1938년 7월 NKVD에 체포된 갈리츠키는 어떤 혐의도 인정하지 않고 동료 한 명도 지목하지 않았으며, 1939년 5월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이 종결되어 석방되었다.
타간로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붉은군대에 입대한 갈리츠키는 내전과 겨울전쟁을 거쳐 제11근위군 사령관으로 동프로이센 작전과 쾨니히스베르크 공략을 지휘했다. 1938년 7월 NKVD에 체포되어 어떤 혐의도 인정하지 않고 동료 한 명도 지목하지 않았으며, 1939년 5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어 붉은군대에 복귀했다. 종전 직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전몰 장병을 기리는 소련 최초의 기념비 건립을 주도했고, 1945년 4월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여러 군관구와 북부군집단을 지휘하고 1955년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1962년 건강상 이유로 퇴역해 1973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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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8제국군 하사관; 붉은군대 입대, 볼셰비키당 입당
1918–21내전: 소대장·중대장·대대장, 중상, 철도방어 정치지도원
1922–37비스트렐 과정·프룬제 아카데미 졸업, 연대장·사단장, 하리코프군관구 참모장
1938–39NKVD 체포·수감, 자백 거부; 1939년 5월 복권·복직
1939–41제24소총사단장 — 겨울전쟁 만네르헤임선 돌파, 서부특별군관구
1941–43제24소총사단·제67소총군단·제3충격군 지휘, 두 번 중상, 벨리키예루키·네벨
1943–45제11근위군 사령관 — 고로도크, 바그라티온,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필라우 함락; 소련영웅
1945–62특별·카르파티아·오데사·자캅카스군관구, 모스크바 방공권, 북부군집단 사령관; 1955년 대장 진급; 1962년 퇴역
1944년 휴전 후 힘러가 핀란드 무장 저항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자, 탈벨라는 '만네르헤임 원수의 명령이 있을 경우에만' 응하겠다고 답했다.
핀란드 예거 운동으로 군에 입문한 탈벨라는 겨울전쟁에서 톨바얘르비 전투의 첫 승리를 지휘하며 장군으로 급부상했다. 1940년 가을 만네르헤임의 개인 대리인으로 베를린에 파견되어 독일 참모본부와 핀란드군의 비밀 군사 협력을 협상했고, 이는 계속전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전후 사업가와 헬싱키 시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두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장 수훈자로서 1966년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군복을 입는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제부터 내 행동이 내 성실함을 증명할 것이다」
마드리드 출신의 벽돌공으로 CNT 건설노조를 이끌다 내전 직전 투옥되었고, 반란 발발과 함께 풀려나 과달라하라·쿠엥카에서 봉기를 진압하는 종대를 조직했다. 제14사단을 거쳐 제4군단장이 된 그는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이탈리아 지원군단을 격퇴하며 공화국 진영에서 손꼽힌 아나키스트 지휘관이 되었다. 1939년 3월 네그린 정부의 공산당 의존에 반발해 카사도의 쿠데타를 지지했고, 공산군이 마드리드를 장악해 가던 순간 메라의 제4군단 예비대가 시내로 진입해 3일 만에 저항을 분쇄함으로써 전쟁의 종결 경로를 결정지었다.
1948년 6월 21일, 그는 라디오를 통해 일부 공산품의 가격 통제와 강제 배급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질서를 자유로운 경쟁과 사회적 안전의 결합으로 구상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다. 1948년 비조네 경제행정 책임자로서 통화 개혁을 준비하고 독일마르크 도입과 맞물려 가격·생산 통제를 단계적으로 풀어 서독 경제 회복의 제도적 출발을 열었다. 그의 역할은 흔히 ‘경제 기적’의 단독 설계자로 신화화되지만, 연합국의 개혁과 국제 경기, 노동자와 기업의 생산 회복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으며 가격 자유화는 초기 생활비 상승과 노동계급의 저항도 낳았다. 이후 경제부 장관과 수상으로서 그 질서를 서독의 국가 정체성으로 굳혔으나, 경기 침체와 연정 붕괴 속에서 1966년 사임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네 연합국 외무장관이 본회의 의장을 교대로 맡았고, 이든도 그 의장단에 포함됐다.
앤서니 이든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연맹과 집단안보를 중시한 영국 보수 정치가였다. 그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부상 속에서 세 차례 외무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윈스턴 처칠의 핵심 외교 보좌역으로 소련 및 연합국과의 전후 질서를 협상했다. 1945년 얄타 회담과 샌프란시스코 국제기구회의에서 영국을 대표하며 전후 국제기구 형성에 참여했지만, 총리 재임 중 수에즈 침공을 추진해 영국 제국의 한계와 미국 의존을 드러냈다.
봉쇄 하루 만인 1948년 6월 25일, 클레이는 트루먼의 공식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공수 작전을 스스로 명령했고, 살아남은 베를린 시민들은 그를 '도시의 아버지'라 부르며 무덤에 '우리 자유의 수호자'라는 감사 비문을 새겼다.
그루지야 출신의 공병 장교로, 전시 보급 지휘로 두각을 나타낸 뒤 1947년 점령 독일 미군 지구 군정장관이 되었다. 1948년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하자 무력 호송대 대신 공수를 택해 직접 명령을 내렸고, 베를린 방위가 곧 미국의 명예이자 서유럽의 운명이라고 주장하며 324일의 공수를 끝까지 이끌었다. 1949년 퇴역한 뒤 사업가와 역대 대통령의 고문을 지냈고, 1961년 베를린 장벽 위기 때 케네디의 특사로 돌아와 체크포인트 찰리의 미군 전차를 소련 전차와 대치시켰다.
1935년 대장정 중 마오와 합류한 뒤 북상 대신 쓰촨 남하를 고집했다. 8만여 병력의 75% 이상을 잃고 자기 군대와 코민테른의 신뢰를 상실했다.
베이징대 학생으로 5·4 운동에 앞장섰고 1921년 제1차 당대회를 주재했다. 노동운동을 조직하다 1931년 어위완 소비에트로 가 제4방면군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고, 1935년 대장정 중 쓰촨에서 마오의 중앙홍군과 합류했다. 북상 대 서진을 놓고 마오와 대립해 별도의 「중앙」을 세우고 남하했으나 병력을 잃고 1936년 옌안에 합류했다. 1937년 비판을 받은 뒤 1938년 국민당 지역으로 탈출해 당에서 제명되었고, 만년에 홍콩과 캐나다에서 회고록을 썼다. 토론토에서 사망했다.
「사회에 이로운 것은 모든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 — 1962년 《프라우다》 논문의 핵심 명제
소련의 경제학자. 1962년 9월 《프라우다》에 발표한 논문 「계획, 이윤, 프리미엄」으로 전연방 경제 토론을 촉발하여 1965년 코시긴 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윤 지표를 기업 평가의 핵심으로 삼고 '사회에 이로운 것이 개별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소련 최초의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을 창설했고, 1938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939년 말 복권되었다. 아내 레기나 고로비츠는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누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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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볼린현 슬라부타에서 산림영지 관리인의 아들로 출생
1920키예프대학교 법학부 졸업
1923–1929우크라이나 노동연구소 실습생, 할키우 공장에 소련 최초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 창설
'적은 기술적으로 쳐부숴야 하며, 그것은 곧 적은 피로 싸운다는 뜻이다'라는 바토프의 원칙
러시아 제국 야로슬라블현 필리소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열세 살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하며 독학했다. 1915년 제정군에 징집되어 근위 3소총연대 정찰대를 지휘하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두 번 받았으며,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내전을 거친 뒤 1929년 당에 입당했다. 1936~1937년 스페인 내전에 '파블로 프리츠'라는 가명으로 참전해 공화파 군사고문을 맡았고, 1942년부터 종전까지 65군을 지휘하며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비스와-오데르 작전을 수행했다. 전후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참모총장을 지냈고 카르파티아 군관구 재임 중이던 1956년 헝가리 사건 진압에 참여했으며, 1970~1981년 소비에트 전쟁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광둥 하카 출신으로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지내고 1927년 입당해 광저우 봉기에 참여했다. 대장정에서 참모장으로 장궈타오의 분열 기도를 마오에게 알렸고, 항일전쟁기와 국공내전기 참모장·베이핑 접수 책임자였다. 1955년 원수가 되었고 문화대혁명 중 「2월 역류」로 비판받았으나 살아남아 린뱌오 사후 군을 맡았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화궈펑·왕둥싱과 함께 4인방 체포를 결정·집행했고, 1978년 덩샤오핑 복권을 지지했다. 1978~198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으로 국가원수 역할을 했다.
금속노동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로 출발한 샤를 티용은 1919년 해군 mutiny에 참여한 뒤 프랑스 공산당과 CGTU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1940년 독일 점령에 맞선 민족해방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호소했고, 1941년부터 공산주의 무장조직을 통합해 프랑스 유격대·의용군(FTP)을 이끌었다. 해방 뒤에는 장관과 의원으로 국가 재건에 참여했지만, 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1952년 권력에서 밀려났고 1970년 공산당에서 제명됐다.
1939년, 스탈린이 그를 초대 건설인민위원으로 지명하자 긴즈부르크는 당으로부터 받은 '엄중경고'를 솔직히 고백했다. 스탈린의 답변: «결핵 환자도 잘 살고 일하는데, 경고 하나쯤 안고 사시오.»
소련 건설을 최초로 단일 국가기구로 통합한 인물. 민스크 출신 유대인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MVTU 졸업 후 레닌 묘 구조물을 설계했으며 오르조니키제 휘하 중공업인민위원부 건설총국장을 지냈다. 1939년 초대 Наркомстрой 인민위원에 취임하여 전국 건설역량을 하나의 지휘체계로 묶었고, 전쟁 중에는 방위공장의 시베리아 긴급이전·체바르쿨 제강공장 75일 완공·라도가 호수 30km 수중 송유관 부설 등 전시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1970년까지 군사건설·건자재공업 장관과 스트로이방크 총재를 거치며 소련 건설행정의 중추로 남았다.
콜론타이는 1927년 멕시코에서 일기에 적었다: 「간부라고는 가이키스와 나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암호를 직접 친다. 소름 끼치도록 고립되어 있다.」
1898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청년기에는 폴란드 사회당 좌파와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치체린의 비서, 멕시코 주재 일등서기관, 이스탄불 총영사를 거쳐 1936년 스페인 공화국 대사관 고문으로 마드리드에 파견됐고, 1937년 2월 로젠베르크의 후임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석 달 뒤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도착 즉시 체포되었고, 1937년 8월 21일 「조국에 대한 배신」 혐의로 총살된 뒤 1955년 복권되었다. 가이키스의 처형으로 소련은 종전까지 스페인에 대사를 다시 두지 않았고, 공화국 수도에는 사실상 빈 대사관만 남았다.
1937년 4월 30일, 피린이 연출한 모스크바-볼가 운하 개통 축제 — 깃발과 오케스트라, 죄수들이 그린 지도자 초상화로 빛났다. 한 달 뒤인 5월 28일 체포, 그해 8월 총살.
적군 정보장교 출신의 굴라크 수용소장. 1932년 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부소장을 거쳐 드미트라크(Dmitlag)를 이끌며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을 총괄했다. 죄수 노동을 '개조'라는 이름의 선전으로 포장해 캠프를 전시장으로 만들었고, 1934년 막심 고리키, 아베르바흐와 함께 찬양 문집 『벨로모르』를 공동 편집했다. 생산성이 낮은 죄수의 배급을 깎는 한편 '개조'를 설파한 모순적 인물. 야고다 측근으로 1937년 체포되어 총살됐다.
카추샤 로켓의 아버지, RS‑82·RS‑132를 완성하고 '우주비행학'이라는 말을 만든 기술자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 당시,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일부터 4월 18일까지 구금되었다. 붉은군대가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풀려났다. 그가 카추샤를 만들기 20년 전의 일이었다.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 개발을 시작해 로켓연구소(RNII) 수석기술자(1934–1938)로서 RS-82와 RS-132 고체연료 로켓탄을 실전 배치 가능한 수준까지 완성했다. 이 로켓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BM-13 카추샤 다연장로켓의 핵심 탄약이 되었다. 러시아어에 '코스모나프티카(우주비행학)'라는 용어를 도입했으며 치올콥스키와 교신하며 로켓의 평화적 우주 응용을 구상했다. 1937년 대숙청 당시 허위 고발로 체포되어 1938년 1월 11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 1991년 사회주의노동영웅에 추서되었다.
1939년 심문에서 프리놉스키는 이렇게 진술했다. "기회를 잡아 자콥스키가 슬루츠키의 얼굴에 클로로포름 마스크를 씌웠다. 그는 이삼 분 만에 잠들었고, 옆방에서 기다리던 알료힌이 오른팔 근육에 독을 주사했다. 슬루츠키는 즉시 사망했다. 몇 분 뒤 나는 위생과 당직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슬루츠키의 급사를 확인했다." 예조프의 지시는 그를 체포하지 말고 "소리 없이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대외정보국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해외의 비합법 요원들에게 닿으면 그들이 귀국을 거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청이 제 요원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설계된 살해였다.
1935~1938년 소비에트 대외정보국장. 야고다 시대 국가보안총국 부서장 중 마지막 생존자로, 케임브리지 첩보망이 형성되던 시기 해외공작을 지휘했다. 1938년 2월 예조프 지시로 독살되었다.
우즈베크 공산당 최초의 우즈베크인 제1서기, 강제 집단화와 목화 단작을 이끈 뒤 대숙청에 희생된 인물
«나는 지금 발가벗겨진 인간 형상의 짐승이다.» 1938년 3월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에서 이크라모프가 남긴 말로 전해지지만, 다른 사료에는 «너희가 나를 짐승으로 만들었다»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문구는 확정되지 않았다.
타슈켄트의 우즈베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기 투르키스탄에서 당 기관을 이끌었고, 1921~1922년 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1922년부터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4~1925년 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을 맡았다. 1929년 제1서기가 되어 우즈베크인 최초로 이 직책에 올랐고 강제 집단화를 밀어붙여 우즈베키스탄을 소련의 주요 목화 공급지로 만들었다. 1934년 전연방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37년 해임되어 9월 20일 체포되었고,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다. 1957년 6월 완전히 복권되어 당적을 회복했다.
옴스크주에 승인된 1급 한도는 1,000명이었다. 1937년 8월 15일 고르바치는 한도 증액을 청하는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냈다. '8월 13일 현재 옴스크주에서 1급으로 5,444명이 체포되었고...'
예브도키모프가 1934년 국가정치국 안의 '자기 사람'으로 꼽은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부국장을 지냈다. 1937년 옴스크주 NKVD 국장으로서 상한 증액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내 한도를 9천 명 늘렸고, 이어 미로노프의 뒤를 이어 서시베리아(노보시비르스크주) NKVD를 맡아 숙청과 대량작전을 함께 밀어붙인 지도자로 꼽힌다. 류시코프 망명 뒤인 1938년 여름 하바롭스크 변경주 NKVD 국장으로 파견되었으나 그해 11월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됐다.
1938년 12월 24일 저녁, 말렌코프는 베르만에게 '스탈린 동지께서 독일 간첩의 형제를 정부에 더 둘 수 없다'고 통보했다. 체카 요원들이 옛 상관을 '까마귀' 호송차에 태웠다.
1918년 스무 살에 체카에 들어가 시베리아·중앙아시아에서 부랴트-몽골 내무인민위원과 우즈베크 GPU 의장을 지냈다. 1932년부터 1937년까지 굴라크를 이끌며 초기 수장 중 최장수로 남았고, 수용소 체계를 교정노동 실험에서 소비에트 경제의 핵심 도구로 확장했다. 백해-발트 운하와 모스크바-볼가 운하를 죄수 노동으로 건설했으며, 강제노동을 '개조'(perekovka)라는 교리로 정당화했다. 1937년 체신인민위원으로 전출된 뒤 1938년 12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돼 1939년 3월 총살됐다. 1957년 복권.
헤밍웨이는 프라우다 특파원을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만난 가장 지적인 인간...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두뇌와 내면의 위엄, 겉으로 드러나는 뻔뻔함과 유머를 지녔다."
오고뇨크·크로코딜 등 주요 소비에트 잡지를 이끌고 소비에트 작가동맹 외국부를 맡았던 기자 겸 공론가. 키예프에서 태어나 1917년 혁명과 내전에 참여했고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스페인 내전에 『프라우다』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일기』(1938)를 남겼다.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총살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1940년 3월, 완성되지 않은 T-34 시제차 두 대를 직접 운전해 눈길 750km를 달려 크렘린에 도착했다. 스탈린 앞에서 시동을 걸며 마지막 남은 힘을 쏟은 그는 귀환 후 폐렴으로 쓰러졌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제과공장 견습생을 거쳐 30세에 공학을 시작한 소련의 탱크 설계자. 하리코프 공장에서 경전차 BT 계열의 현대화를 이끌었고, 1938년부터는 순수 궤도식 중형전차 A-32 프로젝트를 추진해 T-34로 발전시켰다. 1940년 3월, 미완성 시제차 두 대를 직접 몰고 하리코프에서 모스크바까지 눈길 750km를 주파해 크렘린 앞에서 스탈린에게 선보였으나, 그 무리로 폐렴에 걸려 41세로 사망했다. 그가 만든 T-34는 독소전쟁 전체를 관통하는 소련 기갑 전력의 중추가 되었다.
해군인민위원 시절 함대에 무지했던 프리놉스키는 회의마다 엉뚱한 훈수를 두며 "내 말이 맞지?"라고 확인받곤 했는데, 한 회의에서 이반 이바노비치 그렌이 일어나 "아닙니다, 인민위원 동지.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셨고 말씀은 틀렸습니다"라고 답했다.
예조프의 제1부인민위원이자 국가보안총국(GUGB)장으로서 대숙청의 대량 작전 실무를 총괄한 체키스트다. 1937년 모스크바 재판과 소련 내 대량 정치 탄압의 조직에 관여했고, 몽골에서 벌어진 대규모 탄압의 조직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예조프 몰락과 함께 1938년 9월 해군인민위원으로 전출됐다가 1939년 4월 6일 체포됐고, 1940년 2월 4일 소련 대법원 군사재판부의 사형 선고에 따라 처형됐다. 이후 복권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