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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쿠즈마 니키토비치 갈리츠키

Кузьма Никитович Галиц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7–1973 ○ 자연사

숙청을 견디고 쾨니히스베르크를 함락한 육군대장

1938년 7월 NKVD에 체포된 갈리츠키는 어떤 혐의도 인정하지 않고 동료 한 명도 지목하지 않았으며, 1939년 5월 증거불충분으로 사건이 종결되어 석방되었다.

타간로크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붉은군대에 입대한 갈리츠키는 내전과 겨울전쟁을 거쳐 제11근위군 사령관으로 동프로이센 작전과 쾨니히스베르크 공략을 지휘했다. 1938년 7월 NKVD에 체포되어 어떤 혐의도 인정하지 않고 동료 한 명도 지목하지 않았으며, 1939년 5월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어 붉은군대에 복귀했다. 종전 직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전몰 장병을 기리는 소련 최초의 기념비 건립을 주도했고, 1945년 4월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여러 군관구와 북부군집단을 지휘하고 1955년 대장으로 진급했으며 1962년 건강상 이유로 퇴역해 1973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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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8제국군 하사관; 붉은군대 입대, 볼셰비키당 입당
  • 1918–21내전: 소대장·중대장·대대장, 중상, 철도방어 정치지도원
  • 1922–37비스트렐 과정·프룬제 아카데미 졸업, 연대장·사단장, 하리코프군관구 참모장
  • 1938–39NKVD 체포·수감, 자백 거부; 1939년 5월 복권·복직
  • 1939–41제24소총사단장 — 겨울전쟁 만네르헤임선 돌파, 서부특별군관구
  • 1941–43제24소총사단·제67소총군단·제3충격군 지휘, 두 번 중상, 벨리키예루키·네벨
  • 1943–45제11근위군 사령관 — 고로도크, 바그라티온,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필라우 함락; 소련영웅
  • 1945–62특별·카르파티아·오데사·자캅카스군관구, 모스크바 방공권, 북부군집단 사령관; 1955년 대장 진급; 1962년 퇴역

파보 탈벨라

Paavo Talvela
군사·지휘 핀란드 국가기관 핀란드 핀란드인 1897–1973 ○ 자연사

만네르헤임의 베를린 밀사로 핀란드와 독일의 군사 협력을 매듭지은 예거 장군

1944년 휴전 후 힘러가 핀란드 무장 저항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자, 탈벨라는 '만네르헤임 원수의 명령이 있을 경우에만' 응하겠다고 답했다.

핀란드 예거 운동으로 군에 입문한 탈벨라는 겨울전쟁에서 톨바얘르비 전투의 첫 승리를 지휘하며 장군으로 급부상했다. 1940년 가을 만네르헤임의 개인 대리인으로 베를린에 파견되어 독일 참모본부와 핀란드군의 비밀 군사 협력을 협상했고, 이는 계속전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전후 사업가와 헬싱키 시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두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장 수훈자로서 1966년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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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예거 지원병, 제27프로이센 예거대대
  • 1918백군 대대장, 핀란드 내전; 소령
  • 1919–1922아우누스 원정군 총사령관; 비에나 원정군 대대장
  • 1926–1927사보 예거연대장
  • 1939.12–1940.04탈벨라 전단장(톨바얘르비 승리), 이어 제3군단장; 소장
  • 1940.09만네르헤임의 개인 대리인으로 베를린 파견, 독일-핀란드 군사 협력 협상
  • 1941.06–1942.01제6군단장, 카렐리야군; 만네르헤임 십자장 수훈(1941.8.3)
  • 1942–1944독일 최고사령부 주재 핀란드군 대표; 중장; 1944년 아우누스 전단 사령관

시프리아노 메라

Cipriano Mera Sanz
군사·지휘 스페인 공화파 스페인 스페인 1897–1975 ○ 사망

카사도의 마드리드 쿠데타를 공산군의 반격에서 구한 아나키스트 제4군단장

「군복을 입는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제부터 내 행동이 내 성실함을 증명할 것이다」

마드리드 출신의 벽돌공으로 CNT 건설노조를 이끌다 내전 직전 투옥되었고, 반란 발발과 함께 풀려나 과달라하라·쿠엥카에서 봉기를 진압하는 종대를 조직했다. 제14사단을 거쳐 제4군단장이 된 그는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이탈리아 지원군단을 격퇴하며 공화국 진영에서 손꼽힌 아나키스트 지휘관이 되었다. 1939년 3월 네그린 정부의 공산당 의존에 반발해 카사도의 쿠데타를 지지했고, 공산군이 마드리드를 장악해 가던 순간 메라의 제4군단 예비대가 시내로 진입해 3일 만에 저항을 분쇄함으로써 전쟁의 종결 경로를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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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CNT 마드리드 건설노조 서기
  • 1936.07민병 종대 조직, 과달라하라·쿠엥카 탈환
  • 1936.11–1937제14사단장
  • 1937–1939제4군단장
  • 1939.03카사도 쿠데타 지지, 마드리드에서 공산군 저항 분쇄
  • 1939–1942오랑·카사블랑카 망명 후 비시정권에 의해 스페인 송환
  • 1946–1975출소 후 프랑스 재망명, 파리에서 벽돌공으로 일함

통화 개혁과 사회적 시장경제를 설계한 서독 경제정치가

1948년 6월 21일, 그는 라디오를 통해 일부 공산품의 가격 통제와 강제 배급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질서를 자유로운 경쟁과 사회적 안전의 결합으로 구상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다. 1948년 비조네 경제행정 책임자로서 통화 개혁을 준비하고 독일마르크 도입과 맞물려 가격·생산 통제를 단계적으로 풀어 서독 경제 회복의 제도적 출발을 열었다. 그의 역할은 흔히 ‘경제 기적’의 단독 설계자로 신화화되지만, 연합국의 개혁과 국제 경기, 노동자와 기업의 생산 회복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으며 가격 자유화는 초기 생활비 상승과 노동계급의 저항도 낳았다. 이후 경제부 장관과 수상으로서 그 질서를 서독의 국가 정체성으로 굳혔으나, 경기 침체와 연정 붕괴 속에서 1966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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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2뉘른베르크 상과대학에서 경영학 수학
  • 1925프랑크푸르트대학교 경제학 박사
  • 1947비조네 ‘화폐·신용 특별기구’ 위원장
  • 1948–1949비조네 경제행정청장
  • 1949–1963서독 경제부 장관, 1957년부터 부수상 겸임
  • 1963–1966서독 제2대 연방수상
  • 1966–1967기독교민주연합 당수
  • 1949–1977독일 연방의회 의원

앤서니 이든

Anthony Eden
정치·당 지도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인 1897–1977 ○ 자연사

전쟁과 탈식민화의 영국 외교가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네 연합국 외무장관이 본회의 의장을 교대로 맡았고, 이든도 그 의장단에 포함됐다.

앤서니 이든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연맹과 집단안보를 중시한 영국 보수 정치가였다. 그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부상 속에서 세 차례 외무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윈스턴 처칠의 핵심 외교 보좌역으로 소련 및 연합국과의 전후 질서를 협상했다. 1945년 얄타 회담과 샌프란시스코 국제기구회의에서 영국을 대표하며 전후 국제기구 형성에 참여했지만, 총리 재임 중 수에즈 침공을 추진해 영국 제국의 한계와 미국 의존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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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영국 육군 장교, 서부전선 복무
  • 1923–1957워릭·리밍턴 지역 하원의원
  • 1931–1934외무차관
  • 1935–1938외무장관
  • 1940–1945외무장관, 전쟁내각 각료
  • 1945얄타 회담 및 샌프란시스코 회의 영국 대표
  • 1951–1955외무장관
  • 1955–1957영국 총리, 보수당 당수

루시우스 D. 클레이

Lucius D. Clay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97–1978 ○ 폐기종

서베를린 봉쇄에 공수로 맞서 324일을 버텨낸 미군 지구 군정장관

봉쇄 하루 만인 1948년 6월 25일, 클레이는 트루먼의 공식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공수 작전을 스스로 명령했고, 살아남은 베를린 시민들은 그를 '도시의 아버지'라 부르며 무덤에 '우리 자유의 수호자'라는 감사 비문을 새겼다.

그루지야 출신의 공병 장교로, 전시 보급 지휘로 두각을 나타낸 뒤 1947년 점령 독일 미군 지구 군정장관이 되었다. 1948년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하자 무력 호송대 대신 공수를 택해 직접 명령을 내렸고, 베를린 방위가 곧 미국의 명예이자 서유럽의 운명이라고 주장하며 324일의 공수를 끝까지 이끌었다. 1949년 퇴역한 뒤 사업가와 역대 대통령의 고문을 지냈고, 1961년 베를린 장벽 위기 때 케네디의 특사로 돌아와 체크포인트 찰리의 미군 전차를 소련 전차와 대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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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그루지야주 메리에타에서 알렉산더 스티븐스 클레이 상원의원의 아들로 출생
  • 1918웨스트포인트 졸업, 공병 장교로 임관
  • 1942최연소 준장으로 승진, 아이젠하워 휘하 물자국장
  • 1945–1946아이젠하워 부관, 독일 연합군 정부 부군정장관
  • 1947–1949미군 지구 군정장관 겸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
  • 1948.06.25베를린 공수 작전 개시 명령
  • 1949–1962퇴역, 컨티넨털 캔 사 회장
  • 1961–1962케네디의 베를린 특사, 체크포인트 찰리 미소 전차 대치

장궈타오

张国焘
정치·당 지도 중국공산당 중국 중국 1897–1979 ↓ 실각 1938 · 자연사

창당 대회 의장에서 대장정 중 마오와 결별해 국민당으로 간 홍군 지도자

1935년 대장정 중 마오와 합류한 뒤 북상 대신 쓰촨 남하를 고집했다. 8만여 병력의 75% 이상을 잃고 자기 군대와 코민테른의 신뢰를 상실했다.

베이징대 학생으로 5·4 운동에 앞장섰고 1921년 제1차 당대회를 주재했다. 노동운동을 조직하다 1931년 어위완 소비에트로 가 제4방면군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고, 1935년 대장정 중 쓰촨에서 마오의 중앙홍군과 합류했다. 북상 대 서진을 놓고 마오와 대립해 별도의 「중앙」을 세우고 남하했으나 병력을 잃고 1936년 옌안에 합류했다. 1937년 비판을 받은 뒤 1938년 국민당 지역으로 탈출해 당에서 제명되었고, 만년에 홍콩과 캐나다에서 회고록을 썼다. 토론토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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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의장
  • 1931–1935어위완 소비에트 · 제4방면군 지도자

옙세이 그리고리예비치 리베르만

Евсей Григорьевич Либерман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소련 러시아 1897–1981 ○ 심장마비

1965년 경제 개혁의 이론적 촉매

「사회에 이로운 것은 모든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 — 1962년 《프라우다》 논문의 핵심 명제

소련의 경제학자. 1962년 9월 《프라우다》에 발표한 논문 「계획, 이윤, 프리미엄」으로 전연방 경제 토론을 촉발하여 1965년 코시긴 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윤 지표를 기업 평가의 핵심으로 삼고 '사회에 이로운 것이 개별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소련 최초의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을 창설했고, 1938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939년 말 복권되었다. 아내 레기나 고로비츠는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누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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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볼린현 슬라부타에서 산림영지 관리인의 아들로 출생
  • 1920키예프대학교 법학부 졸업
  • 1923–1929우크라이나 노동연구소 실습생, 할키우 공장에 소련 최초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 창설
  • 1930–1941하리코프 공학경제연구소 기계제조업 조직·계획 주임
  • 1938–1939NKVD에 간첩·테러 혐의로 체포, 15년형 선고 후 1939년 말 복권
  • 1941–1943키르기스 SSR 재무부 근무
  • 1947–1962하리코프 공학경제연구소 교수, 기계제조업 경제·계획 연구실 창설
  • 1956경제학 박사 (논문: 사회주의 기업의 수익성 제고 방안)
  • 1962《프라우다》에 「계획, 이윤, 프리미엄」 발표 — 전연방 개혁 논쟁 촉발
  • 1962–1981하리코프대학교 통계·회계학과 교수
  • 1981할키우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이반 흐리스토포로비치 바그라먄

Иван Христофорович Баграмя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르메니아 1897–1982 ○ 자연사

비슬라브 최초의 전선군 사령관, 바그라티온에서 발트까지

1944년 여름, 부대가 발트해에 닿자 바그라먄은 스탈린에게 발트해 물 한 병을 보냈다. 독일군이 해안을 되찾는 사이 병이 크렘린에 도착하자 스탈린은 말했다. "돌려주시오. 바그라먄 동무가 직접 따라 부을 수 있게."

아제르바이잔 출신 아르메니아인으로 비슬라브인 최초 소련 전선군 사령관.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습지 돌파로 독일 북부집단군을 쿠를란트에 고립시켰다. 소련원수, 두 번의 소련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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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7러시아 제국군 자원입대, 캅카스 전선 페르시아 원정, 소위
  • 1918–20아르메니아군에서 튀르크군과 교전, 중대장·기병대대장, 중위
  • 1920–34붉은군대 합류, 기병연대장, 고급기병학교·프룬제 아카데미 졸업
  • 1934–40키예프군관구 기병사단 참모장, 참모아카데미 졸업 후 교관
  • 1941–42남서전선 작전참모 — 키예프 방어, 로스토프 반격, 하리코프 공세
  • 1942–4316군·11근위군 사령관 — 지즈드라, 오룔 반격에서 독일 방어 돌파
  • 1943–451발트전선군 사령관 — 바그라티온, 메멜, 쾨니히스베르크 함락
  • 1945–55발트군관구 사령관, 소련원수, 국방차관
  • 1956–68참모아카데미 원장, 국방차관 겸 후방총국장

파벨 이바노비치 바토프

Павел Иванович Бат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7–1985 ○ 자연사

65군을 이끌고 스탈린그라드에서 베를린까지 진격한 도하 작전의 명수

'적은 기술적으로 쳐부숴야 하며, 그것은 곧 적은 피로 싸운다는 뜻이다'라는 바토프의 원칙

러시아 제국 야로슬라블현 필리소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열세 살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하며 독학했다. 1915년 제정군에 징집되어 근위 3소총연대 정찰대를 지휘하고 게오르기 십자훈장을 두 번 받았으며, 1918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내전을 거친 뒤 1929년 당에 입당했다. 1936~1937년 스페인 내전에 '파블로 프리츠'라는 가명으로 참전해 공화파 군사고문을 맡았고, 1942년부터 종전까지 65군을 지휘하며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비스와-오데르 작전을 수행했다. 전후 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참모총장을 지냈고 카르파티아 군관구 재임 중이던 1956년 헝가리 사건 진압에 참여했으며, 1970~1981년 소비에트 전쟁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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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71차대전, 제국육군 정찰대 지휘, 게오르기 십자훈장 2회
  • 1918–21붉은군대 내전, 기관총 소대장→중대장
  • 1936–37스페인 내전, 공화파 군사고문 (가명 파블로 프리츠), 중상
  • 1939–403소총군단장, 폴란드 진주·핀란드 전역
  • 1941–4251군 부사령관→사령관(크림), 3군 사령관(브랸스크 전선)
  • 1942–4565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비스와-오데르·베를린
  • 1955–62카르파티아·발트 군관구 사령관, 남부군집단 사령관
  • 1962–65바르샤바조약기구 합동군 참모총장 (소련군 제1부참모총장 겸임)
  • 1970–81소비에트 전쟁참전용사위원회 위원장

예젠잉

叶剑英
군사·지휘 중국 중국 1897–1986 ○ 자연사

황푸의 교관에서 원수까지, 1976년 4인방 체포를 조직해 문화대혁명을 끝낸 군인

1976년 10월 6일, 원로 장군들을 이끌고 4인방 체포를 명령해 문화대혁명을 끝냈다.

광둥 하카 출신으로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지내고 1927년 입당해 광저우 봉기에 참여했다. 대장정에서 참모장으로 장궈타오의 분열 기도를 마오에게 알렸고, 항일전쟁기와 국공내전기 참모장·베이핑 접수 책임자였다. 1955년 원수가 되었고 문화대혁명 중 「2월 역류」로 비판받았으나 살아남아 린뱌오 사후 군을 맡았다. 마오 사후 1976년 10월 화궈펑·왕둥싱과 함께 4인방 체포를 결정·집행했고, 1978년 덩샤오핑 복권을 지지했다. 1978~1983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으로 국가원수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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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 1975–1978국방부장
  • 1978–1983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고르킨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Горкин

재활의 최고재판소장, 오렌부르크에서 살아남은 자

1957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에 취임한 고르킨 앞으로, 스탈린 시대에 총살된 옛 당원들의 명예회복 청원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자신 오렌부르크에서 동료 전원이 숙청되는 것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1916년 입당한 농민 출신 볼셰비키. 오렌부르크 주당 제1서기 시절 동료 전원이 숙청된 후, 1957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이 되어 15년간 사법적 재활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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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RSDRP(볼셰비키) 입당
  • 1917–19트베리 시소비에트 서기, 트베리 현집행위원장
  • 1919쿠르스크 현체카 간부, 펜자 현농촌부장
  • 1934–37오렌부르크 주당위 제1서기
  • 1937–38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간부회 서기
  • 1938–53소련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서기 (1953–56 부서기)
  • 1956–57소련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서기 (재임)
  • 1957–72소련 최고재판소장
  • 1959–61CPSU 중앙감사위원회 의장

샤를 티용

Charles Tillon

노동운동에서 무장 레지스탕스로 나아간 공산주의자

“수와 단결이 우리 힘이 될 것이다.”

금속노동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로 출발한 샤를 티용은 1919년 해군 mutiny에 참여한 뒤 프랑스 공산당과 CGTU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1940년 독일 점령에 맞선 민족해방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호소했고, 1941년부터 공산주의 무장조직을 통합해 프랑스 유격대·의용군(FTP)을 이끌었다. 해방 뒤에는 장관과 의원으로 국가 재건에 참여했지만, 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1952년 권력에서 밀려났고 1970년 공산당에서 제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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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1프랑스 해군 기관병, 1919년 군함 게생의 반란 주도, 군사형무소 수감
  • 1921–1931프랑스 공산당 가입, CGTU 일드빌렌 지역·낭트 노동조합 지도자
  • 1931–1936CGTU 전국 지도부,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정치국 후보위원
  • 1936–1940하원의원, 스페인 공화파 피난 지원 활동
  • 1940–1944공산당 비밀 지도부, 국민군사위원회와 FTP 창설·최고사령관
  • 1944–1947공군·군수·재건부 장관, 오베르빌리에 시장 및 의원
  • 1952–1970공산당 지도부에서 축출, 1957년 복권, 1970년 제명

세묜 자하로비치 긴즈부르크

Семён Захарович Гинзбург

소련 건설의 첫 인민위원, 전시 공업을 기초부터 세우다

1939년, 스탈린이 그를 초대 건설인민위원으로 지명하자 긴즈부르크는 당으로부터 받은 '엄중경고'를 솔직히 고백했다. 스탈린의 답변: «결핵 환자도 잘 살고 일하는데, 경고 하나쯤 안고 사시오.»

소련 건설을 최초로 단일 국가기구로 통합한 인물. 민스크 출신 유대인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MVTU 졸업 후 레닌 묘 구조물을 설계했으며 오르조니키제 휘하 중공업인민위원부 건설총국장을 지냈다. 1939년 초대 Наркомстрой 인민위원에 취임하여 전국 건설역량을 하나의 지휘체계로 묶었고, 전쟁 중에는 방위공장의 시베리아 긴급이전·체바르쿨 제강공장 75일 완공·라도가 호수 30km 수중 송유관 부설 등 전시 건설을 진두지휘했다. 1970년까지 군사건설·건자재공업 장관과 스트로이방크 총재를 거치며 소련 건설행정의 중추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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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지즈드라 소비에트 서기, 제8군 정치부
  • 1919–1921군사경제아카데미 정치위원
  • 1927–1932MVTU 강사, 노농검사인민위원부 건설그룹장
  • 1932–1937중공업인민위원부 건설총국장 (오르조니키제 휘하)
  • 1937–1938중공업 부인민위원
  • 1938–1939건설위원회 의장 (인민위원회의 산하)
  • 1939–1946초대 건설인민위원 (Наркомстрой)
  • 1946–1947군사·해군 건설 인민위원 → 장관
  • 1947–1950건설자재공업 장관
  • 1963–1970스트로이방크 총재

레온 야코블레비치 가이키스

Леон Яковлевич Гайкис

스페인 주재 두 번째 소련 대사, 부임 석 달 만에 소환되어 총살당했다

콜론타이는 1927년 멕시코에서 일기에 적었다: 「간부라고는 가이키스와 나뿐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암호를 직접 친다. 소름 끼치도록 고립되어 있다.」

1898년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유대계 폴란드인으로, 청년기에는 폴란드 사회당 좌파와 사회민주당에서 활동하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치체린의 비서, 멕시코 주재 일등서기관, 이스탄불 총영사를 거쳐 1936년 스페인 공화국 대사관 고문으로 마드리드에 파견됐고, 1937년 2월 로젠베르크의 후임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석 달 뒤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도착 즉시 체포되었고, 1937년 8월 21일 「조국에 대한 배신」 혐의로 총살된 뒤 1955년 복권되었다. 가이키스의 처형으로 소련은 종전까지 스페인에 대사를 다시 두지 않았고, 공화국 수도에는 사실상 빈 대사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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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폴란드 사회당 좌파·사회민주당 활동, 적군 제11군 복무
  • 1920카자흐 군사혁명위원회(Kazrevkom) 간부
  • 1921–1924외무인민위원부 근무, 치체린 인민위원 비서
  • 1924–1928주멕시코 대사관 일등서기관 겸 대리대사
  • 1929–1933프로핀테른(적색노조인터내셔널) 근무
  • 1935–1936주이스탄불 총영사
  • 1936–1937.02주스페인 대사관 고문
  • 1937.02–06주스페인 전권대표(대사)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피린

Семён Григорьевич Фирин

‘개조’ 선전을 만든 드미트라크 수용소장

1937년 4월 30일, 피린이 연출한 모스크바-볼가 운하 개통 축제 — 깃발과 오케스트라, 죄수들이 그린 지도자 초상화로 빛났다. 한 달 뒤인 5월 28일 체포, 그해 8월 총살.

적군 정보장교 출신의 굴라크 수용소장. 1932년 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부소장을 거쳐 드미트라크(Dmitlag)를 이끌며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을 총괄했다. 죄수 노동을 '개조'라는 이름의 선전으로 포장해 캠프를 전시장으로 만들었고, 1934년 막심 고리키, 아베르바흐와 함께 찬양 문집 『벨로모르』를 공동 편집했다. 생산성이 낮은 죄수의 배급을 깎는 한편 '개조'를 설파한 모순적 인물. 야고다 측근으로 1937년 체포되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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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적군 정보기관 요원(그리스·터키·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 1932–1933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부소장
  • 1933–1937드미트라크 수용소장(모스크바-볼가 운하)
  • 1937체포와 처형

게오르기 에리호비치 란게마크

Георгий Эрихович Лангемак

카추샤 로켓의 아버지, RS‑82·RS‑132를 완성하고 '우주비행학'이라는 말을 만든 기술자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 당시, 반란군에게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일부터 4월 18일까지 구금되었다. 붉은군대가 반란을 진압한 후에야 풀려났다. 그가 카추샤를 만들기 20년 전의 일이었다.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 개발을 시작해 로켓연구소(RNII) 수석기술자(1934–1938)로서 RS-82와 RS-132 고체연료 로켓탄을 실전 배치 가능한 수준까지 완성했다. 이 로켓탄들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BM-13 카추샤 다연장로켓의 핵심 탄약이 되었다. 러시아어에 '코스모나프티카(우주비행학)'라는 용어를 도입했으며 치올콥스키와 교신하며 로켓의 평화적 우주 응용을 구상했다. 1937년 대숙청 당시 허위 고발로 체포되어 1938년 1월 11일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 1991년 사회주의노동영웅에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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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8페트로그라드대학 일본문헌학과 입학, 해군 사관후보생 학교 졸업 후 해군 복무
  • 1919–22붉은군대 동원, 크론시타트 요새 포대장·사단장 보좌
  • 1923–28붉은군대 군사기술아카데미 졸업
  • 1928–33가스역학연구소(GDL)에서 무연화약 로켓탄 RS-82·RS-132 개발 주도
  • 1934–37로켓연구소(RNII/NII-3) 부소장 겸 수석기술자, 군사기술 1급 공병
  • 1937–38NKVD 체포, 1938년 1월 11일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후 당일 총살
  • 1955/1991사후 복권(1955), 사회주의노동영웅 추서(1991)

아브람 아로노비치 슬루츠키

Абрам Аронович Слуцкий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8–1938 ✕ 독살로 전한다

야고다 시대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대외정보국장

1939년 심문에서 프리놉스키는 이렇게 진술했다. "기회를 잡아 자콥스키가 슬루츠키의 얼굴에 클로로포름 마스크를 씌웠다. 그는 이삼 분 만에 잠들었고, 옆방에서 기다리던 알료힌이 오른팔 근육에 독을 주사했다. 슬루츠키는 즉시 사망했다. 몇 분 뒤 나는 위생과 당직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슬루츠키의 급사를 확인했다." 예조프의 지시는 그를 체포하지 말고 "소리 없이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대외정보국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해외의 비합법 요원들에게 닿으면 그들이 귀국을 거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청이 제 요원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설계된 살해였다.

1935~1938년 소비에트 대외정보국장. 야고다 시대 국가보안총국 부서장 중 마지막 생존자로, 케임브리지 첩보망이 형성되던 시기 해외공작을 지휘했다. 1938년 2월 예조프 지시로 독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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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2안디잔 혁명재판소 의장, 투르케스탄 체카
  • 1922–1925투르케스탄 최고재판소 부의장, 이어 군사재판소 의장
  • 1926–1930OGPU 경제국 과장, 이어 부국장
  • 1930–1934INO OGPU 부국장(유럽 담당, 일부 기간 베를린 잠복)
  • 1934–1935국가보안총국 대외국 부국장
  • 1935–1936국가보안총국 대외국(INO) 국장
  • 1936–1938국가보안총국 제7부장
  • 1938프리놉스키의 집무실에서 사망

아크말 이크라모비치 이크라모프

Акмаль Икрамович Икрамов

우즈베크 공산당 최초의 우즈베크인 제1서기, 강제 집단화와 목화 단작을 이끈 뒤 대숙청에 희생된 인물

«나는 지금 발가벗겨진 인간 형상의 짐승이다.» 1938년 3월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에서 이크라모프가 남긴 말로 전해지지만, 다른 사료에는 «너희가 나를 짐승으로 만들었다»는 표현으로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문구는 확정되지 않았다.

타슈켄트의 우즈베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기 투르키스탄에서 당 기관을 이끌었고, 1921~1922년 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서기를 지냈다. 1922년부터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으며, 1924~1925년 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을 맡았다. 1929년 제1서기가 되어 우즈베크인 최초로 이 직책에 올랐고 강제 집단화를 밀어붙여 우즈베키스탄을 소련의 주요 목화 공급지로 만들었다. 1934년 전연방 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37년 해임되어 9월 20일 체포되었고,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다. 1957년 6월 완전히 복권되어 당적을 회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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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나만간 교육국 교사·시찰관, 페르가나 농촌사업부장
  • 1920–1921나만간 혁명위 부위원장, 무슬림국 의장, 페르가나·시르다리야 지역위 책임서기
  • 1921–1922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조직부장 겸 서기
  • 1922–1924모스크바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수학
  • 1924–1929우즈베크 공산당 창당 조직국원, 타슈켄트 주당위 서기, 중앙위 제2서기, 『콤무니스트』 편집자
  • 1929–1937우즈베크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집단화·목화 단작 주도
  • 1934–1937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소수민족 출신 유일)
  • 1937–1938해임·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사형, 총살

그리고리 표도로비치 고르바치

Григорий Фёдорович Горбач

옴스크에서 하바롭스크까지 상한 증액을 몰고 다닌 '북캅카스파' 체키스트

옴스크주에 승인된 1급 한도는 1,000명이었다. 1937년 8월 15일 고르바치는 한도 증액을 청하는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냈다. '8월 13일 현재 옴스크주에서 1급으로 5,444명이 체포되었고...'

예브도키모프가 1934년 국가정치국 안의 '자기 사람'으로 꼽은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부국장을 지냈다. 1937년 옴스크주 NKVD 국장으로서 상한 증액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내 한도를 9천 명 늘렸고, 이어 미로노프의 뒤를 이어 서시베리아(노보시비르스크주) NKVD를 맡아 숙청과 대량작전을 함께 밀어붙인 지도자로 꼽힌다. 류시코프 망명 뒤인 1938년 여름 하바롭스크 변경주 NKVD 국장으로 파견되었으나 그해 11월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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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36북캅카스 체카·OGPU 요원
  • 1936–1937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부국장
  • 1937옴스크주 NKVD 국장, 한도 9천 명 증액
  • 1937–1938노보시비르스크주 NKVD 국장
  • 1938하바롭스크(극동) 변경주 NKVD 국장
  • 1938–193911월 체포, 총살

마트베이 다비도비치 베르만

Матвей Давыдович Берман

굴라크를 확장한 최장수 수장

1938년 12월 24일 저녁, 말렌코프는 베르만에게 '스탈린 동지께서 독일 간첩의 형제를 정부에 더 둘 수 없다'고 통보했다. 체카 요원들이 옛 상관을 '까마귀' 호송차에 태웠다.

1918년 스무 살에 체카에 들어가 시베리아·중앙아시아에서 부랴트-몽골 내무인민위원과 우즈베크 GPU 의장을 지냈다. 1932년부터 1937년까지 굴라크를 이끌며 초기 수장 중 최장수로 남았고, 수용소 체계를 교정노동 실험에서 소비에트 경제의 핵심 도구로 확장했다. 백해-발트 운하와 모스크바-볼가 운하를 죄수 노동으로 건설했으며, 강제노동을 '개조'(perekovka)라는 교리로 정당화했다. 1937년 체신인민위원으로 전출된 뒤 1938년 12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돼 1939년 3월 총살됐다. 1957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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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4부랴트-몽골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27–1928우즈베크 GPU 의장
  • 1930–1932굴라크 부수장
  • 1932–1937굴라크 수장
  • 1936–1937내무부인민위원 겸임
  • 1937–1938체신인민위원
  • 1938–1939체포, 재판과 처형

미하일 예피모비치 콜초프

Михаил Ефимович Кольцов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98–1940 ✕ 처형

소비에트 저널리즘의 대표적 목소리, 헤밍웨이가 카르코프로 형상화한 인물

헤밍웨이는 프라우다 특파원을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만난 가장 지적인 인간...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두뇌와 내면의 위엄, 겉으로 드러나는 뻔뻔함과 유머를 지녔다."

오고뇨크·크로코딜 등 주요 소비에트 잡지를 이끌고 소비에트 작가동맹 외국부를 맡았던 기자 겸 공론가. 키예프에서 태어나 1917년 혁명과 내전에 참여했고 1918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다. 스페인 내전에 『프라우다』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일기』(1938)를 남겼다.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총살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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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8『오고뇨크』 편집장
  • 1925–1938저널-가제타 연합(주르가즈) 책임자
  • 1922–1938『프라우다』 특파원
  • 1934–1938『크로코딜』 편집장
  • 1932–1938『자 루베좀』 창간자 겸 편집자
  • 1936–1937스페인 내전 프라우다 특파원 겸 소련 정치 대리인
  • 1934–1938소비에트 작가동맹 외국부장
  • 1938러시아 SR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미하일 일리치 코시킨

Михаил Ильич Кошкин

T-34를 낳고 폐렴으로 사라진 41세의 수석설계자

1940년 3월, 완성되지 않은 T-34 시제차 두 대를 직접 운전해 눈길 750km를 달려 크렘린에 도착했다. 스탈린 앞에서 시동을 걸며 마지막 남은 힘을 쏟은 그는 귀환 후 폐렴으로 쓰러졌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제과공장 견습생을 거쳐 30세에 공학을 시작한 소련의 탱크 설계자. 하리코프 공장에서 경전차 BT 계열의 현대화를 이끌었고, 1938년부터는 순수 궤도식 중형전차 A-32 프로젝트를 추진해 T-34로 발전시켰다. 1940년 3월, 미완성 시제차 두 대를 직접 몰고 하리코프에서 모스크바까지 눈길 750km를 주파해 크렘린 앞에서 스탈린에게 선보였으나, 그 무리로 폐렴에 걸려 41세로 사망했다. 그가 만든 T-34는 독소전쟁 전체를 관통하는 소련 기갑 전력의 중추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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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8러시아 제국군 징집, 서부전선에서 부상
  • 1918–21붉은군대 자원입대, 차리친·북부전선에서 전투
  • 1919RKP(b) 입당, 제3철도여단 당세포 서기
  • 1921–24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졸업
  • 1924–29뱟카에서 제과공장장·당 선전선동부장
  • 1929–34레닌그라드 공과대학 기계공학 전공, 중형전차 변속기로 졸업
  • 1934–36레닌그라드 키로프 공장 전차설계국, T-29·T-46-1 개발 참여
  • 1936–37하리코프 183호 공장 KB-190 설계국장, BT-7 디젤 개량 완료
  • 1937–39KB-24 조직, A-20·A-32 개발 — A-32가 T-34로 발전
  • 1939.12T-34 국방위원회 결정으로 붉은군대 정식 채택
  • 1940.3하리코프-모스크바-하리코프 시제차 시험주행 직접 수행
  • 1940.9폐렴 악화로 사망, 후임 수석설계자 A. 모로조프

미하일 페트로비치 프리놉스키

Михаил Петрович Фриновский

예조프의 강철 부관

해군인민위원 시절 함대에 무지했던 프리놉스키는 회의마다 엉뚱한 훈수를 두며 "내 말이 맞지?"라고 확인받곤 했는데, 한 회의에서 이반 이바노비치 그렌이 일어나 "아닙니다, 인민위원 동지. 이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셨고 말씀은 틀렸습니다"라고 답했다.

예조프의 제1부인민위원이자 국가보안총국(GUGB)장으로서 대숙청의 대량 작전 실무를 총괄한 체키스트다. 1937년 모스크바 재판과 소련 내 대량 정치 탄압의 조직에 관여했고, 몽골에서 벌어진 대규모 탄압의 조직자 가운데 한 사람이기도 했다. 예조프 몰락과 함께 1938년 9월 해군인민위원으로 전출됐다가 1939년 4월 6일 체포됐고, 1940년 2월 4일 소련 대법원 군사재판부의 사형 선고에 따라 처형됐다. 이후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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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6체카·GPU 요원
  • 1926–1930아제르바이잔 GPU 책임자
  • 1933–1936OGPU·NKVD 국가보안총국 부지도부
  • 1936–1938내무인민위원 제1부관·국가보안총국장
  • 1938–1939해군인민위원
  • 1939–1940체포, 재판과 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