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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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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게뢰 에르뇌

Gerő Ernő

단 3개월 만에 혁명을 촉발한 마지막 스탈린주의 제1서기

1956년 10월 23일 밤 게뢰는 라디오 연설에서 학생 시위대를 향해 '우리 청년들에게 쇼비니즘의 독을 주입하려는 자들'이라고 규탄했고, 수 시간 내로 평화 시위는 혁명으로 바뀌었다.

헝가리 공산운동의 핵심 인물로, 1918년 창당과 함께 입당해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활동했다. 코민테른 요원과 NKVD 공작원으로 프랑스·스페인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는 '바르셀로나의 도살자'로 불리며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라코시의 오른팔로 헝가리 경제 스탈린화를 주도했고, 1956년 7월 라코시 후임 제1서기가 되었으나 개혁 요구를 거부했다. 10월 23일 저녁 시위대를 '파시스트'로 규정한 라디오 연설은 봉기를 혁명으로 폭발시켰고, 25일 사임 후 소련으로 도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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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헝가리 공산당 창당 가입, 평의회 공화국 청년공산주의자 활동
  • 1925–36코민테른·NKVD 공작원: 프랑스·벨기에·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활동
  • 1936–39스페인 내전: 카탈루냐 통일사회당(PSUC) 배후 지도, 트로츠키주의자(POUM) 숙청 지휘
  • 1940–44모스크바 망명: KPV 해외국 라코시와 공동 지도, 포로·적군 대상 선전
  • 1945–48최고국가평의회 위원, 통상·교통장관
  • 1948–53MDP 정치국원·부서기장, 재무장관: 중공업화·집단화로 경제 스탈린화 주도
  • 1953–56.07내무장관·부총리; 1956년 7월 MDP 제1서기
  • 1956–8010월 25일 사임, 소련 도피; 1960년 귀국, 1962년 출당, 은둔 중 사망

리디야 페오도시예브나 티마슈크

Лидия Феодосьевна Тимашук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8–1983 ○ 사망

즈다노프의 심전도를 읽고 쓴 편지 한 통이 의사들 음모 사건의 불씨가 된 크렘린 심장 전문의

크렘린 주치의가 「내 말을 믿지 티마슈크 같은 사람 말을 믿겠느냐」며 그녀의 심근경색 진단을 묵살하자, 그녀는 상부에 편지를 썼고 4년 후 의사들의 음모의 불씨가 되었다.

1926년부터 크렘린 병원에서 근무한 심장 전문의로, 1948년 8월 28일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심전도를 판독하고 '심근경색' 진단을 내렸으나 상급 의사들에게 묵살당했다. 이에 당과 국가보안부에 세 차례 항의 편지를 보냈고, 4년 후 이 편지들은 1953년 '의사들의 음모' 사건 조작의 근거로 부활했다. 1953년 1월 '의사-살인자들을 적발한 공로'로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스탈린 사후 4월에 박탈당했고, 이후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에서 지목되며 '정보원'이라는 낙인이 평생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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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브레스트리톱스크에서 하사관의 딸로 출생
  • 1920사마라 의대 재학 중 발진티푸스·콜레라 방역에 동원
  • 1926제1모스크바대 의대 졸업, 크렘린 병원(레치산우프르) 근무 시작
  • 1943–1953NKVD-MGB 비밀정보원으로 활동
  • 1948.8기능진단과장으로서 즈다노프의 심근경색 진단 후 상부에 항의 편지 발송
  • 1953.1'의사-살인자 적발 공로'로 레닌 훈장 수훈, 전국적 영웅으로 부상
  • 1953.4스탈린 사후 레닌 훈장 박탈, 이듬해 노동적기훈장 수훈
  • 1964크렘린 병원 퇴직, 사망 시까지 명예 회복을 청원

해리 헤이우드

Harry Haywood
정치·당 지도 미국 공산당 미국 미국 1898–1985 ○ 자연사

코민테른 '흑인 벨트' 테제의 설계자: 남부 흑인은 자결권을 가진 억압된 네이션이다

“흑인 문제는 근본적으로 억압된 네이션의 문제이며 완전한 자결권을 가진다.” — 『흑인 해방』(1948)

전 노예의 아들로 급진화된 미국 공산주의자. 코민테른에서 남부 흑인 자결권 테제를 수립했고, CPUSA 정치국원과 스페인 내전 정치위원을 지냈다. 탈스탈린화 반대로 제명된 후 마오주의 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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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제1차 세계대전 — 미 육군 제8연대(흑인연대) 복무, 프랑스 전선 참전
  • 1922–1925아프리카 혈맹단 → 청년공산주의동맹 → 미국공산당 입당
  • 1926–1930모스크바 유학 — 동방노력자공산대학·국제레닌학교, 코민테른 흑인문제 결의 초안
  • 1931–1938CPUSA 정치국원 겸 흑인부장 — 스코츠보로 구명운동, 남부 소작인조합 조직
  • 1937스페인 내전 —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 연대 정치위원, 브루네테 전투
  • 1943–1945제2차 세계대전 — 미국 상선대 복무
  • 1948『흑인 해방』 출간 — 남부 흑인 해방을 미완의 민주혁명 과제로 이론화
  • 1959반수정주의와 흑인 자결권 고수로 CPUSA에서 제명
  • 1964–1978신공산주의 운동 — 10월동맹/CPML 중앙위원, 『블랙 볼셰비키』 출간

알렉세이 블라디미로비치 스네고프

Алекс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негов

굴라크 생존자로서 탈스탈린화를 밀어붙인 구볼셰비키

미코얀이 소치행을 권했지만, 스네고프는 당원증을 돌려받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고 버텼다.

알렉세이 스네고프는 초기 소비에트 당 사업을 거친 구볼셰비키였지만, 대숙청의 조작된 혐의로 15년 넘게 굴라크에 갇혔다. 1954년 석방과 복권 뒤 그는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니키타 흐루쇼프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스탈린 체제의 폭력과 재활 문제를 알리는 자문자가 되었다. 올가 샤투노프스카야와 함께 희생자들의 복권을 추진하고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개인숭배를 비판하도록 흐루쇼프를 설득했다. 이후에도 더 깊은 탈스탈린화를 주장하다가 감시와 비판을 받았으며, 1967년 잠시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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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 가입
  • 1918–1921빈니차·포돌리아 지하 당조직과 포돌리아 губер니아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3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31–1937자캅카스·이르쿠츠크·첼랴빈스크·차파옙스크·무르만스크의 당·정치 부문 간부
  • 1937–1954대숙청으로 체포되어 굴라크와 유형지에서 15년 이상 복역
  • 1954–1960석방·복권 후 내무부 굴라크 정치부장
  • 1956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비판과 희생자 복권을 촉구
  • 1967잠시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곧 복권
정치·당 지도 브라질 공산당 브라질 브라질 1898–1990 ○ 자연사

희망의 기사: 2만 5천 km를 행군한 브라질 혁명가

많은 사람들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대개 나이가 들면 제정신을 찾는다. 젊을 때는 혁명가였다가 결혼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정착하지. 그러나 나는 이 나이에 이르도록 아직 제정신이 들지 않았다. — 1984년 인터뷰에서

브라질 혁명가·정치인. 1925~1927년 '프레스테스 종대'를 이끌고 내륙 2만 5천 km를 행군해 '희망의 기사'라 불렸다. 1935년 코민테른 집행위원, ANL 봉기 지도 후 9년간 수감. 1943년부터 37년간 브라질 공산당 사무총장으로 노동운동과 반독재 투쟁을 지휘했고 쿠데타 후 망명 중에도 당을 이끌었다. 유럽공산주의 전환을 거부해 축출됐으나 끝까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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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7프레스테스 종대 참모장 — 14개 주 25,000km 행군
  • 1931–1934소련 망명, 엔지니어로 활동하며 마르크스주의 연구
  • 1934브라질 공산당 입당
  • 1935ANL 명예의장 · 코민테른 집행위원 · 무장봉기 지도
  • 1936–1945수감; 1943년 PCB 사무총장으로 선출
  • 1945–1948연방 상원의원; 1947년 당 불법화 후 지하활동
  • 1943–1980브라질 공산당 사무총장 (37년간)
  • 1971–1979군사독재 아래 소련 망명; 1979년 사면으로 귀국

예핌 파블로비치 슬라프스키

Ефим Павлович Славский

29년간 소련 핵무기·원자력 산업 전체를 지휘한 '위대한 예핌'

부하들이 그를 '위대한 예핌'이라 불렀고, 의료진은 생애 누적 피폭량을 치사량의 세 배에 해당하는 약 1,500뢴트겐으로 추산했다는 회고가 전한다.

도네츠크 마키이우카의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품팔이꾼과 목동으로 일했고 교구 학교 3학년까지밖에 다니지 못했다. 1918년 봄 볼셰비키 당에 입당해 남북전쟁에서 제1기병군 소속으로 싸웠고 1928년 제대한 뒤 1933년 비철금속·금 연구소를 졸업했다. 1946년 제1총국 부국장이 되어 원자폭탄 계획에 들어갔고 1947년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로 임명되어 1949년 첫 소련 핵실험의 플루토늄을 생산했다. 1957년부터 1986년 11월까지 핵산업을 이끌며 폐쇄 원자력 도시들을 세웠고 1991년 1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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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28도네츠크 탄광 소년 광부, 적위대·제1기병군 복무 후 제대
  • 1933–1941모스크바 비철금속연구소 졸업, 엘렉트로친크 공장장, 드네프르 알루미늄 공장장
  • 1941–1945우랄 알루미늄 공장장, 전시 알루미늄 생산 총괄로 레닌 훈장 3회
  • 1946–1953제1총국 부국장 겸 콤비나트 817호(마야크) 책임자, 첫 원자폭탄 플루토늄 생산
  • 1953–1957중형기계공업 제1차관, 수소폭탄 개발 참여
  • 1957–1986중형기계공업 장관(29년), 차르봄바·핵잠수함·원전·폐쇄 원자력 도시 건설 총괄
  • 1986체르노빌 사고 수습 지휘 후 강제 퇴임

취추바이

瞿秋白
정치·당 지도 중국공산당 중국 중국 1899–1935 ✕ 처형

중국어로 《인터내셔널》을 처음 울린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이자 1927년 당의 지도자

1935년 6월 18일, 장팅 중산공원의 작은 언덕. 총살형 집행을 앞둔 취추바이는 풀밭에 앉아 집행인을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바로 여기가 좋군!" 그리고 《인터내셔널》을 부르며 숨을 거두었다.

5·4운동 세대의 대표적 지식인으로, 러시아어를 익혀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볼셰비키 혁명의 현장을 중국에 생생히 전했다. 1923년 귀국 후 천두슈의 뒤를 이어 CCP 임시 중앙을 이끌며 광저우 봉기 등 무장투쟁 노선을 추진했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실각 후에는 루쉰·마오둔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을 이끌며 마르크스주의 문예이론을 중국에 정초했고, 《인터내셔널》을 비롯한 러시아·소비에트 문학 번역에 헌신했다. 1935년 국민당에 체포되어 장팅에서 총살당했으며, 사형장까지 《인터내셔널》을 부른 최후로 혁명적 순교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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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2《천바오》 모스크바 특파원
  • 1922모스크바에서 중국 공산당 입당
  • 1923CCP 중앙위원, 선전·기관지 편집 책임
  • 1927–1928CCP 임시 정치국 수장 (사실상 당 지도자)
  • 1928–1930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무위원, CCP 대표단 단장
  • 1930–1931CCP 중앙위원, 좌경폭동주의 비판 후 해임
  • 1931–1934상하이 좌익작가연맹 지도, 루쉰과 공동 활동, 번역·문예비평
  • 1934–1935중화소비에트공화국 교육인민위원, 《붉은 중국》 편집

얀 에르네스토비치 스텐

Ян Эрнестович Стэн
학술·연구 소비에트 라트비아 1899–1937 ✕ 처형

스탈린의 철학 교사에서 우익 반대파로 전락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스탈린이 헤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자, 성미 급한 라트비아인 철학자 스텐은 크렘린 사무실에서 제자의 양복 옷깃을 붙잡고 흔들며 가르쳤다. 수업 후 친구에게 남긴 말: '코바는 10년 안에 드레퓌스와 베일리스 재판을 무색하게 만들 짓을 할 거야.'

라트비아 출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붉은교수양성소 1기 졸업 후 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을 개인교습하며 소비에트 철학 제도화의 중심에 섰다. 1928년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로 돌아선 뒤 1932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유배되었고, 잠시 복권되었으나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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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라트비아에서 RSDLP 입당
  • 1921–1924붉은교수양성소 철학과 1기 수학
  • 1925–1928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 개인교습
  • 1927–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선전부 부장
  • 1928–1930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부소장
  • 1932당 제명,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체포·유배
  • 1934–1936석방,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
  • 1937재체포되어 사형

이그나티 스타니슬라보비치 레이스

Игнатий Станиславович Рейсс

스탈린에게 결별장을 보내고 NKVD에 살해된 소련의 불법공작원

“오늘 침묵하는 자는 스탈린의 공범이 된다.” — 1937년 7월 1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결별서

본명 나탄 마르코비치 포레츠키. 오스트리아-헝가리령 갈리치아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에 합류했고, 이후 ‘루트비히’와 ‘이그나티 레이스’라는 이름으로 서유럽에서 소련 군사정보·국가보안기관의 불법공작망을 운영했다. 1928년 적기훈장을 받았으나 모스크바 재판과 대숙청을 겪으며 스탈린 체제와 결별했다. 1937년 7월 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훈장을 반납하고 제4인터내셔널 지지를 선언했다. 같은 해 9월 4일 로잔 근교에서 오랜 지인 게르트루트 실트바흐에게 유인된 뒤, 세르게이 시피겔글라스가 지휘한 NKVD 암살조의 총격으로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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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폴란드 공산주의 노동자당 가입
  • 1921–1937중·서유럽에서 코민테른·소련 군사정보·국가보안기관 불법공작 수행
  • 1928정보 공작 공로로 적기훈장 수훈
  • 1937.07스탈린 체제와 공개 결별, 훈장 반납과 제4인터내셔널 지지 선언
  • 1937.09로잔 근교에서 NKVD 암살조에 피살

이반 테렌티예비치 클레이묘노프

Иван Терентьевич Клеймё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899–1938 ✕ 처형

로켓 연구를 국가 기관으로 묶은 조직가

1937년 11월 2일, 그가 이끌던 연구소의 수석기사 랑게마크 체포 뒤 클레이묘노프도 체포되었다.

이반 클레이묘노프는 소련의 초기 로켓 기술을 조직한 군사공학자이자 행정가였다. 그는 기체역학연구소와 반응과학연구소를 연결해 연구를 군수 체계에 편입했고, 무연 추진제 로켓탄과 훗날 카튜샤로 이어진 기술 개발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그가 세운 연구기관은 대숙청 속에서 핵심 인력의 체포와 함께 붕괴했으며, 클레이묘노프 자신도 처형되었다. 1955년 무혐의로 복권되었고 199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추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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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RKP(b) 입당
  • 1920–1921붉은군대 군수·보급 복무
  • 1928–1930공군과학연구소 공방장
  • 1930–1932베를린 소련 무역대표부 공학부 부책임자
  • 1932–1933기체역학연구소 소장
  • 1933–1937반응과학연구소 초대 소장·원장
  • 1937중앙공기유체역학연구소 프로펠러·엔진 부문 부소장
  • 1938처형, 1955년 무혐의 복권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비노그라도프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Виноград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9–1940 ✕ 처형

수오무살미 참패 후 사단 앞에서 총살된 제44사단장

재판은 50분 만에 끝났고, 1940년 1월 11일 비노그라도프는 참모장·정치부장과 함께 생존한 사단 병력 앞에서 총살되었다.

트베리 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붉은 군대에 입대, 내전에서 콜차크·마흐노·브란겔과 싸웠다. 1939년 초 급격한 승진으로 제44소총병사단장이 되어 폴란드 침공을 거쳐 겨울전쟁에 투입되었고, 포위된 제163사단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받고 라테 도로로 진격했다. 핀란드군의 모티 전술에 사단이 궤멸되자 지휘를 포기하고 탈출했으며, 50분간의 군사재판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1940년 1월 11일 생존 병력 앞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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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입대, 동부전선에서 콜차크군과 교전 중 부상
  • 1920–1924보병 지휘 과정 수료, 소대장·중대장 보좌
  • 1924–1937제48소총병사단 내 중대장·연대학교장·연대 참모장 역임, 1936년 소령
  • 1937–1938제143소총연대장, 1938년 대령 진급
  • 1938–1939지휘관 예비역, 중국 특별 파견; 1939년 1월 콤브리그 진급
  • 1939.01–1940.01제44소총병사단장: 폴란드 침공, 겨울전쟁 라테 도로 전투
  • 1940.01.11제9군 군사재판소 사형 판결, 사단 앞에서 총살

발터 게르마노비치 크리비츠키

Вальтер Германович Кривицкий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폴란드 (갈리치아 유대계) 1899–1941 ✕ 의문사, 자살 판정

스탈린의 비밀 정보 활동을 서방에 처음 증언한 망명 정보관

1936년 12월, 슬루츠키가 그에게 임박한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협정에 대해 알렸다.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합니다. 아마도 히틀러와의 협정 체결까지 남은 시간은 서너 달뿐일 것...' 크리비츠키의 회고는 나우모프가 1936~1937년의 물밑 정치를 재구성하는 주요 사료다.

갈리치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본명이 자무엘 긴즈베르크인 소련 군사정보 요원으로, 1930년대에 헤이그를 거점으로 서유럽 비합법 정보망을 이끌었다. 1936년 12월 해외정보부장 슬루츠키에게서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물밑 접촉을 들었고, 1937년 여름 파리에서 시피겔글라스투하쳅스키 사건의 본질을 논한 끝에, 동료 이그나츠 라이스가 암살되자 그해 가을 망명했다. 1939년 회고록 '나는 스탈린의 요원이었다'를 펴내고 미 의회에서 증언했으며, 1941년 2월 워싱턴의 호텔에서 총상 사체로 발견되었다. 자살로 판정되었으나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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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혁명기 붉은군대 정보 활동 시작
  • 1921–1935군사정보국(4국) 요원, 유럽 비합법 활동
  • 1935–1937헤이그 주재 비합법 레지덴트
  • 1937라이스 암살 뒤 파리에서 망명
  • 1939회고록 출간, 미 의회 증언
  • 1941워싱턴에서 사망

장 피에르 물랭

Jean Moulin
정부·행정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인 1899–1943 ✕ 고문 후 사망

분열된 레지스탕스를 묶은 공화주의자

그는 독일군의 허위 서명 강요에 맞서 명예를 훼손하느니 자결을 택하려 했다.

장 물랭은 프랑스의 고위 관료이자 공화주의자로, 나치 점령에 맞선 국내 레지스탕스를 자유 프랑스와 연결한 조직가였다. 그는 샤를 드골의 위임을 받아 경쟁하던 저항운동들을 조정하고, 정치세력과 노동조합까지 포괄하는 국민저항위원회를 세웠다. 그의 통합 작업은 독립성을 지키려는 여러 세력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1943년 체포와 고문으로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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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사부아 현 지사 비서실장
  • 1925–1930알베르빌 군 부지사
  • 1936인민전선 항공부 장관 비서실장
  • 1937–1939아베롱 현 지사
  • 1939–1940외르에루아르 현 지사
  • 1941–1943드골의 국내 레지스탕스 대표
  • 1943국가레지스탕스평의회 초대 의장

보리스 아르카디예비치 야르체프

Борис Аркадьевич Рыбкин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계 유대인 1899–1947 ✕ 의문의 교통사고사

정보관의 얼굴로 수행한 위험한 외교

그는 1938년 4월 핀란드 측에 독일이 핀란드를 거쳐 레닌그라드를 공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리스 아르카디예비치 리브킨은 야르체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소련의 정보관이자 외교관이었다. 1938년 그는 핀란드에 대한 독일의 위협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비밀 협상을 시작했지만, 영토 교환 요구는 합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실패한 접촉은 협상과 안보 불신이 얽힌 채 겨울전쟁으로 향하던 소련·핀란드 관계의 첫 단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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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예카테리노슬라프 체카에 입문
  • 1924–1929OGPU 반정보 부문 간부
  • 1931–1935이노 OGPU 중앙아시아·해외 공작
  • 1935–1938헬싱키 소련 공사관 영사, 야르체프 명의 활동
  • 1938–1939핀란드와 비밀 협상 담당
  • 1941–1943스톡홀름 소련 공관 정보 거점 책임
  • 1944–1945동유럽 비합법 공작·공작원 침투 부서장
  • 1947MGB 대외특수공작 중 사망

안드리야 헤브랑

Andrija Hebrang
정치·당 지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 1899–1949 ✕ 옥중 실종 · 사망 처리

혁명적 민족정치와 당 중앙집권 사이에 선 지도자

1948년 소련과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베오그라드의 감옥에서 사라졌다.

안드리야 헤브랑은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크로아티아 공산당의 전시 지도자로, 점령에 맞선 조직과 해방지대의 정치 건설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경제 재건과 중공업 중심의 발전 계획을 주도하며 티토에 이어 유고슬라비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자치적 정치 표현과 경제 노선을 둘러싼 긴장은 티토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정보망과 연계된 인물로 지목되어 당에서 축출되고 체포되었으며, 1949년 감옥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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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 1925–1928자그레브 지방 당 조직 활동
  • 1941–1944크로아티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서기
  • 1943–1944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정치국원
  • 1944–1946국가반파시스트평의회와 산업·무역 행정 담당
  • 1946–1948경제위원회 의장, 계획위원회 의장
  • 1948당에서 축출, 가택연금과 체포
  • 1949베오그라드 감옥에서 실종, 사망 처리

안드레이 플라토노비치 플라토노프

Андрей Платонович Платонов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99–1951 ○ 병사

유토피아의 폐허를 쓴 엔지니어

1932년 10월, 고리키의 말라야 니키츠카야 집에서 스탈린은 소련 작가들을 향해 "인간 영혼의 엔지니어"라는 말을 남기고, 1년 전 자기 손에 파멸한 작가를 그 자리에서 찾았다.

기술자이자 토지개량 전문가였던 그는 소설가로 돌아서 소련 문학에 뚜렷한 목소리를 남긴 작가였다. 본명은 클리멘토프이며, 아버지의 이름 플라톤에서 따온 '플라토노프'는 필명이었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쓴 『체벤구르』와 『구덩이』는 집단화와 스탈린 정책을 회의적으로 그려 수십 년간 출판되지 못했다. 1951년 1월 5일 모스크바에서 결핵으로 사망했고, 마지막 출판물은 러시아 민담을 다시 쓴 이야기 모음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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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6기술자·기자·시인으로 활동
  • 1927–1929『체벤구르』와 『구덩이』 집필
  • 1930년대검열과 출판 배제
  • 1942–1945전쟁 특파원 활동

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

Лаврентий Павлович Берия

개혁안을 든 비밀경찰 총수

폭발 직전 '아무것도 안 될 거야, 이고르'라던 베리야는, 섬광이 솟아오르자 쿠르차토프하리톤을 달려가 껴안고서도, 곧 의심에 사로잡혀 비키니 실험 관측자에게 '혹시 쿠르차토프가 우릴 속이려는 게 아닌가?'라고 물었다.

스탈린의 비밀경찰 총수이자 원폭 계획의 감독자. 그루지야 메르헤울리에서 가난한 농민 가정에 태어나 191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캅카스 지역 보안기관을 거쳐 1938년 11월 NKVD 내무인민위원이 된 뒤 대숙청의 대량 탄압을 축소했다. 1940년 트로츠키 암살을 감독하고, 같은 해 3월 5일 정치국 결정에 따라 폴란드 장교·지식인 2만여 명의 카틴 학살을 집행했다. 1944년에는 체첸·잉구시인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직접 지휘했고, 1945년부터 특별위원회 의장으로 원폭 계획을 총괄해 1949년 첫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스탈린 사후 1953년 제1부총리 겸 내무장관으로 사면·복권 등 개혁을 밀어붙였으나 6월 26일 체포되었고, 12월 23일 사형 선고와 처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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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31캅카스 체카·GPU
  • 1931–38그루지야 당 제1서기
  • 1938–45내무인민위원, 예조프 숙청 마무리와 굴라크 관리, 1944년 민족 강제이주 집행
  • 1945–53원폭 계획 총괄(특별위원회 의장)
  • 1953.3–6제1부총리, 사면·복권 등 개혁안 연발
  • 1953.6/12체포, 처형

솔로몬 라파일로비치 밀시테인

Соломон Рафаилович Мильштейн

강제이주의 열차를 조직한 수송총국장

1941년 10월, 밀시테인은 베리야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전쟁 발발 이후 특별부가 지연·탈주 군인 65만 7천여 명을 억류했고 그중 1만 201명을 총살했으며 "3,321명은 부대 앞에서 총살"되었다고 적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 그루지야에서 당 경력을 쌓은 뒤, 1939년 NKVD 수송총국장에 올라 스탈린 시대 강제이주의 철도 기구를 운영했다. 그의 총국은 폴란드인, 카라차이인, 칼미크인, 체첸인, 잉구시인 등 전체 민족 집단의 추방 열차를 편성하고 움직였다. 이 공로로 전투공로훈장인 수보로프 훈장 2급을 받았으나 소비에트 국가는 1962년 이를 취소했다. 1953년 베리야의 체포 직후 함께 체포되어 별도 재판으로 1955년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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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1938그루지야 당 사업, 트빌리시 시당 서기 등
  • 1938–1939NKVD 수사부 부부장
  • 1939–1941NKVD 수송총국장
  • 1941–1942NKVD 특별부관리국 제1부국장
  • 1942–1943NKVD 수송국장
  • 1943–1947NKGB·MGB 제3관리국장(수송)
  • 1951–1953MVD 굴라크 부수장
  • 1953우크라이나 내무 제1부장관
  • 1953–1955체포, 별도 재판과 처형

압크센티 나리키예비치 라파바

Авксентий Нарикиевич Рапава

십 년간 그루지야 경찰기구를 운영한 자

1951년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된 라파바는 자신이 10년간 지휘했던 내부감옥에 갇혀 160일간 잠을 빼앗겼고, 얼음처럼 찬 독방에 수갑을 찬 채 벌거벗겨진 채 버려졌다 — 그가 수하들에게 지시했던 바로 그 고문 수법이었다.

밍그렐리아 출신으로 1920년대 체카에 들어가 1938년부터 10년간 그루지야 NKVD와 국가보안부를 이끌며 대숙청 시기 공화국 보안기구의 핵심 책임자로 활약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서 전간기 그루지야 공안 체제를 구축했으나, 1951년 스탈린의 '밍그렐리아 사건'에 연루됐다가 스탈린 사후 풀려났고, 베리야 몰락 직후인 1953년 7월 재체포되어 1955년 공개 재판 끝에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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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1아자리야 GPU 책임자
  • 1931–1933그루지야 GPU 부의장
  • 1936–1937자캅카스·그루지야 부내무인민위원
  • 1937–1938압하지야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이어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38–1943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 1943–1948그루지야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48–1951그루지야 법무장관
  • 1953그루지야 국가통제장관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스테판 아코포비치 아코포프

Степан Акопович Акопов

전시 중형기계에서 자동차공업까지 이끈 아르메니아계 생산 관료

1938년 우랄마시 공장장 시절, 군사기술 2급 기술자 계급을 받았다. 전시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KV·IS 중전차와 SU 자주포의 동력계통을 책임졌고, 1945년 5월에는 쿠투조프 1급 훈장 — 대규모 부대 작전을 성공시킨 군사령관에게 주어지는 훈장을 산업 지휘관으로서 받았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산업 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전차·자주포·트랙터 생산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자동차·트랙터 공업을 연이어 관장했다. 우랄마시 공장장을 거쳐 중기계·중형기계 인민위원부에서 말리셰프, 반니코프 등과 함께 스탈린 시대 군수-산업 행정을 떠받친 실무형 관리자였다. 1955년 흐루쇼프에게 공개 비판받고 물러났으나, 이미 3개의 레닌 훈장과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급 산업 지휘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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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2그루지야 콤소몰 조직비서, 트빌리시 시위원회 책임비서
  • 1922–1931바우만 모스크바 기계기계공학대학에서 수학하며 당 조직 업무 병행
  • 1931–1937포돌스크 크레킹·전기기관차 공장 기술이사, 후에 공장장
  • 1937–1939우랄마시 공장장, 군사기술 2급 계급 수여
  • 1939–1941중기계공업 부인민위원, 제1부인민위원; 중형기계공업 제1부인민위원
  • 1941–1946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 — 전차·자주포·트랙터 동력계통 생산 총괄
  • 1946–1950자동차공업 장관, 자동차·트랙터공업 장관
  • 1950–1955농업기계제조 차관·제1차관, 기계제조 장관, 자동차·트랙터·농업기계 장관; 1955년 퇴임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말리닌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Малин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9–1960 ○ 자연사

로코솝스키의 불가분의 참모장, 위대한 공세의 기획자

1941년 여름, 폭탄 파편이 말리닌의 뒷머리와 목에 박혔다. 중상이었지만 그는 병원 후송을 거부하고 야전 사령부에 남았다. 로코솝스키는 후일 '전쟁 내내 나의 오른팔이었다'고 회고했다.

농민 출신 목수에서 붉은군대 최고의 참모 장교 중 한 명으로 성장한 말리닌은, 스몰렌스크 포위망의 절망적인 순간부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 작전의 승리까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참모장으로 복무했다. 로코솝스키가 지휘하고 말리닌이 치밀하게 계획한 이 긴밀한 동반 관계는 제16군, 돈·중앙·제1벨로루시 전선군 사령부를 소련 작전술의 모범으로 만들었다. 전후에는 소련군 독일주둔군 참모장, 지상군 주참모장을 거쳐 1953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으로 재직했으며,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 작전 계획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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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군대 입대, 내전 참전
  • 1931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기갑부대 근무
  • 1939–40제9군 작전처장으로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 1941–44로코솝스키 휘하 제16군·전선군 참모장;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바그라티온
  • 1945소련 영웅 칭호 수여; 독일주둔 소련군 참모장
  • 1948–50지상군 주참모장
  • 1953–60소련군 총참모부 제1부참모장; 1956년 헝가리 개입 계획

안드레이 그리고리예비치 크랍첸코

Андрей Григорьевич Кравч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899–1963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에서 만주까지, 소련 최정예 전차군을 이끈 기갑사령관

1945년 8월, 크랍첸코의 제6근위전차군은 고비사막을 가로질러 3주도 안 되어 800킬로미터를 돌파하며 대싱안링 산맥을 넘어 만주 평원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소련의 전차군 지휘관으로, 스탈린그라드 포위 고리를 닫은 제4전차군단을 지휘했고 쿠르스크와 드네프르에서 제5근위전차군단을 이끌었다. 1944년 제6전차군(이후 제6근위전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코르순-셰우첸콥스키, 우만-보토샤니, 야시-키시네프, 부다페스트, 빈 공세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었다. 1945년 8월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그의 군대는 고비사막과 대싱안링 산맥을 초고속으로 돌파하며 관동군을 분쇄하는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이 공로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으며, 전차병 대장까지 진급한 몇 안 되는 기갑지휘관 중 한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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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0붉은군대 자원입대, 남북전쟁 참전 — 타라샤 연대, 제44소총병사단, 제60소총연대
  • 1923폴타바 보병학교 졸업
  • 192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39–1940제173차량화소총사단 참모장, 소련-핀란드 전쟁 및 베사라비아 진주 참전
  • 1941–1942제31전차여단장 (모스크바 방어전), 제61군 전차병과 부사령관
  • 1942제1전차군단 참모장 → 제2전차군단장 (스탈린그라드)
  • 1942–1944제4전차군단장 → 제5근위전차군단장 (스탈린그라드 포위, 쿠르스크, 드네프르)
  • 1944–1947제6전차군 사령관 → 제6근위전차군 사령관 (코르순, 야시-키시네프, 부다페스트, 빈, 만주)
  • 1948–1954자바이칼·발트·극동 군관구 기갑·기계화병과 사령관, 극동 군관구 전차무장 담당 부사령관
  • 1955건강 악화로 예비역 편입

알렉산데르 자바츠키

Aleksander Zawadzki
정부·행정 폴란드 국가기관 폴란드 폴란드계 1899–1964 ○ 자연사

전후 폴란드 국가기구를 이끈 공산주의자

1956년 3월 비에루트의 장례식에서 “비에루트는 죽었지만 단결된 우리 당은 살아 있다”고 말했다. 같은 달 제6차 전원회의는 오하프를 제1서기로 선출했고, 고무우카가 제1서기가 된 것은 1956년 10월 제8차 전원회의였다.

제철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23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한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사단장급 장군이다. 1925년과 1936년 두 차례 체포되어 감옥에서 보냈고, 1939년 이후 소련에서 폴란드 애국자 동맹과 폴란드 노동자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소련 편성 폴란드군의 정치장교를 맡았다. 전후 실레지아 주지사와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쳐 1952년 11월 20일 국가평의회 의장에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재임했고, 주지사 시절에는 소련의 인력·설비 반출 중단을 추진했다. 1956년 3월 제6차 전원회의에서 제1서기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오하프가 선출되었고, 이후 당내 강경파인 나톨린 계열로 분류되었다. 1964년 8월 7일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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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9폴란드 공산당 활동가, 투옥
  • 1943–1945소련 편성 폴란드군 정치장교, 정치교육 담당 부사령관
  • 1944–1948폴란드 노동자당 정치국 위원
  • 1945–1948실레지아-돔브로바 주지사
  • 1948–1954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위원
  • 1949–1952각료회의 부의장
  • 1952–1964폴란드 국가평의회 의장

리리싼

李立三
정치·당 지도 중국공산당 중국 중국 1899–1967 ✕ 실각 1930 · 자살

1930년 도시 봉기 노선 「리리싼 노선」으로 당을 이끌다 실각한 노동운동 지도자

1922년 안위안 탄광 파업을 조직한 중공 노동운동 지도자로, 1930년 3월부터 8월까지 당 중앙의 실권을 쥐었다.

후난 출신으로 프랑스 근공검학 시절 입당했고 1922년 안위안 탄광 파업, 1925년 5·30 운동의 조직자였다. 1928년 이후 당 중앙의 실권을 쥐고 1930년 혁명의 고조가 왔다며 창사·우한 등 대도시 공격을 명령했으나 실패했고, 코민테른의 비판으로 실각해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15년 동안 소련에 머물며 소련인 아내를 맞았고 1946년 귀국해 노동부장을 지냈다. 문화대혁명 초기 박해 속에 1967년 자살했으며 1980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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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0중공 중앙 선전부장 · 실질적 지도자
  • 1949–1954노동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