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루쇼프가 '검투사 사건'에서 외친 말: "알렉산드로프는 젊으니 이해하겠다. 그런데 너는 그 나이에 거길 왜 갔느냐?" — 크루슈코프와 이념 관료들은 이 한 방에 모조리 직위에서 사라졌다.
소련의 철학자이자 당 이념 관료. 러시아 고전 철학과 미학을 전공했으며,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장(1944~1949)으로서 스탈린의 공식 단평전(1947)을 공동 집필하고 마르크스주의 정전 편찬을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문학예술부장(1950~1953)과 선전선동부장(1953~1955)을 역임하며 후기 스탈린 시기 문화 통제와 즈다노프슈치나 노선의 집행자로 활동했다. 1955년 이른바 '검투사 사건'으로 불리는 성 스캔들에 연루되어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었고, 우랄 지방으로 좌천된 후 학계로 복귀하여 소련 예술사연구소장(1961~1973)을 지냈다.
흐루쇼프 시대의 레닌그라드 당 수장, 스탈린 시신 이장을 제안하고 당 기구의 충성 시험에 걸려 넘어진 인물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가 사임 의사를 내비치자 침묵이 흘렀다. 스피리도노프가 일어나 "동지들, 니키타 세르게예비치의 바람을 지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흐루쇼프의 얼굴이 굳었고 며칠 뒤 그는 모든 당직을 잃었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야간 공업학교를 마친 후 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레닌그라드에서 기업 간부로 성장한 소련의 당·국가 지도자이다. 1957년 프롤 코즐로프의 후임으로 레닌그라드 지역당 제1서기에 올라 대규모 주택 건설(소위 '흐루쇼프카')과 과학·방위 산업 단지 확장을 주도했다. 1961년 제22차 당대회에서 레닌그라드 대표단장으로서 스탈린 시신의 레닌 묘역 이장을 공식 제안해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를 극적으로 추동했다. 곧 중앙위원회 서기로 발탁되었으나, 중앙위 간부회의에서 흐루쇼프의 위장 사임 제의를 진심으로 지지하는 실수를 범해 실각, 1962년부터 1970년까지 연방회의 의장이라는 의전적 직책으로 밀려났다.
"전쟁 전 정보부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내가 과학기술정보과에 배치되었을 때 거기엔 세 명뿐이었다. 모두 초짜였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전 세계에 우리 요원은 고작 5~6명이었다."
화학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정보장교로, 과학기술 첩보의 제도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1940년 서방 과학저널에서 핵물리학 논문이 사라진 것을 감지해 소련 외국정보부 최초의 원자력 첩보 지령을 기안했고, 뉴욕에서 클라우스 푹스·줄리어스 로젠버그 등 맨해튼 계획 침투 공작망을 지휘해 쿠르차토프의 원자폭탄 개발을 수년 단축시켰다.
「낡은 지시적 규범에 기초한 경제 관리 방식을 떠나 더 단순하고 저렴하며 효과적인 경제 규제로 나아갈 때다」
바딤 트라페즈니코프는 전기공학자이자 자동화 과학자로, 소련의 생산기술과 관리체계를 함께 바꾸려 했다. 그는 자동화의 성과가 경직된 계획 지표 아래에서는 현장에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보았고, 1964년 《프라우다》에 기존의 지시적 경제 운영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개입은 자동화 연구를 기업 운영의 문제와 연결하며 코시긴 개혁의 사상적 분위기를 넓혔다.
1936년 11월 장관직을 수락했다. 정부 참여를 둘러싼 에마 골드만과의 논쟁은 같은 혁명을 지지하는 아나키스트들 사이에도 전략적 차이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스페인의 아나키스트이자 작가. CNT 계열 활동가로서 1936년 11월부터 1937년 5월까지 공화국 정부의 보건·공공부조 장관을 지냈다. 전쟁 중 의료와 구호 정책을 추진했지만, 국가권력을 거부하는 아나키즘의 원칙과 장관직 수행 사이의 긴장은 운동 내부의 논쟁을 낳았다. 에마 골드만과의 서신은 반파시즘 전쟁과 사회혁명의 관계를 둘러싼 이견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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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열다섯 살에 첫 단편소설 『비극의 시간』을 발표하며 집필 활동 시작
1927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FAI)에 가담
1931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 노동조합 CNT에 가입, 연설가로 두각을 나타냄
19367월 쿠데타 이후 FAI 반도위원회와 CNT 전국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193611월 공화국 정부의 보건·사회부조 장관으로 임명
19375월 바르셀로나 5월 사건 뒤 내각 총사퇴로 장관직에서 물러남
1939프랑스로 망명, 이후 툴루즈를 거점으로 망명 CNT 재건과 아나키스트 언론 활동을 이어감
1957년 6월 간부회. 흐루쇼프가 셰필로프의 비판을 자르며 물었다: 「자넨 얼마나 공부했나?」 셰필로프가 답했다: 「저는 김나지움에 중등학교, 적색교수학원 3년에 대학 4년입니다.」 「나는 팝 앞에서 감자 한 포대 값으로 두 겨울 배웠네.」 「그런데 어떻게 모든 분야의 전문가 행세를 하십니까?!」
소련 최초의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경제학자 출신 당 이론가. 1941년 병역 면제임에도 민병대에 자원해 소장으로 종전한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전후 선전선동부와 프라우다 편집장을 거쳐 흐루쇼프의 핵심 이론가로 부상했고, 말렌코프 비판에서 비밀연설에 이르는 탈스탈린화의 이념적 언어를 제공했다. 1956년 외무장관으로 제3세계 외교의 물꼬를 텄지만, 이듬해 반당그룹에 가담했다가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라는 조롱 속에 몰락했다. 이후 키르기스 경제연구소와 문서보관소에서 수십 년 조용히 살았고, 사후 회고록 『불가담자』로 재평가되었다.
1984년, 포노마료프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이 국제공산주의운동에 미칠 파장을 경고했던 자글라딘의 메모를 금고에서 꺼내며 말했다. "당신이 옳았어, 바딤 발렌티노비치!" 그리고는 다시 금고에 넣었다.
1919년 14세로 입당한 소비에트 정치가이자 사상가. 흐루쇼프 해빙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 직전까지 30년 넘게 중앙위 국제부장을 지내며 세계 공산당 및 민족해방운동과의 관계를 총괄했다. 1961년 중앙위 서기, 1972년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승격해 소련 외교정책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외교부가 국가 대 국가 외교를 담당했다면, 포노마료프는 당 대 당 외교와 이념 네트워크를 주도하며 소련 공산당의 국제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브레즈네프 시대 지도부 안에서 드문 반스탈린주의자였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속에 31년 만에 퇴장했다.
'새장은 계획이고, 그 안에서 새[경제]는 마음껏 날 수 있다.' — 1982년, 시장과 계획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핵심 구상을 정식화하며
중국 공산당 제1·2세대 지도부의 핵심 인물로, 중국 사회주의 경제 건설의 설계자 역할을 수행했다. 상하이 상무인서관 식자공 출신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했고, 대장정과 옌안 정풍운동을 거치며 당 조직부장으로서 마오쩌둥의 측근이 되었다. 1949년 이후 중앙재경위원회 주임으로서 제1차 5개년 계획을 입안하고 물가 안정과 통일 재정을 확립했으며, 대약진 붕괴 이후 저우언라이·덩샤오핑과 함께 경제 재건을 주도했다. 1980년대에는 '새장 경제' 개념(시장은 계획이라는 새장 안에서 자유롭게 날아야 한다)을 정식화하며 덩샤오핑에 이은 중국 제2의 실력자로 개혁의 속도를 조절하는 보수파의 구심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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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상하이 상무인서관 노동쟁의 지도, 5·30운동 참여 후 중국 공산당 입당
1931–1934중앙위원·정치국원, 대장정 참가 — 쭌이 회의 참석
1937–1944중앙조직부장, 옌안 정풍운동에서 핵심 역할
1949–1954중앙재경위원회 주임 겸 정무원 부총리, 제1차 5개년 계획 입안
1956–1962중공 중앙위원회 부주석; 대약진 이후 경제 재건 주도
1978–1987중앙기율검사위원회 제1서기, 중앙고문위원회 주임 — 개혁개방 초기 설계와 보수적 견제
사망 직전 옐친에게 '저축이 없으니 국비로 장례를 치러 달라'고 썼다. 5년간 소련 경제를 이끈 총리는 평생 방 세 칸 아파트에서 살며 월급으로 버스를 사서 학교에 기증했다.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출신의 실무형 경제 관료로, 75세에 코시긴의 뒤를 이어 각료회의 의장이 되었다. 정치적 야심과는 거리가 먼 정직한 기술자였으며,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체르넨코 3대에 걸쳐 총리로 재임했다. 정체기 말기의 관료적 연속성을 상징했지만, 1984년에는 기업 자율과 '사회주의 시장'을 검토한 개혁위원회를 주재해 페레스트로이카 구상의 단초를 마련했다.
1978년 7월, 28년간 에스토니아를 이끈 캐빈은 중앙위원회에서 해임 통보를 받았다. 후임으로는 러시아에서 태어나 에스토니아어조차 서툰 카를 바이노가 임명되었다 — 민족 간부에 대한 브레즈네프 중앙의 신뢰 상실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1950년부터 1978년까지 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를 지내며 소련 에스토니아를 실질적으로 이끈 정치인으로, 이후 1983년까지 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을 역임했다. 스탈린주의자로 출발했으나 점차 온건·실용 노선으로 전환하여 '라비림(laveerimine)'이라 불리는 균형 정책(모스크바의 요구와 에스토니아 민족 이익 사이의 절충)을 구사했다. 28년간 재임하며 공화국 역사상 최장기 집권자가 되었고, CPSU 중앙위원(1952–1986)으로서 전연방 차원에서도 에스토니아의 이해를 대변했다. 1970년대 후반 브레즈네프 시기 러시아화 정책이 강화되자 중앙과 마찰을 빚었고, 결국 1978년 카를 바이노에게 자리를 내주며 교체되었다.
국제여단의 아동시설에서 만난 아이들의 경험을 소설로 옮겼다. 전쟁을 겪는 어린이를 선전의 대상만이 아니라 고유한 기억과 감정을 지닌 존재로 다루려 했다.
독일계 유대인 아동·청소년 문학 작가. 나치 집권 뒤 프랑스로 망명했고, 스페인 내전 중 국제여단이 세운 에른스트 텔만 아동시설에서 활동했다. 아이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 『네 명의 스페인 소년』을 집필했다. 1942년 아우슈비츠로 강제 이송된 뒤 살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망일은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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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1929베를린과 하이델베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나 학위 없이 중단했다.
1931아동 도서 연작 「어린이 나라의 해와 비」에 첫 이야기들을 발표했다.
1932베를린 노동자 아이들의 삶을 다룬 『뮐러 거리, 오늘의 소년들』을 출간했다.
1934파리 망명 중 쓴 청소년 소설 『멕시코 소년 얀코』가 스트라스부르에서 출간되었다.
1937리자 테츠너의 주선으로 『차오와 징링, 중국의 아이들』이 스위스 노동조합 신문에 실렸다.
1937–1938국제여단 편에서 내전을 다룬 아동·청소년 도서를 준비하기 위해 스페인을 취재했다.
1938연말에 『네 명의 스페인 소년』 원고를 완성했으나 이 작품은 1987년에야 출간되었다.
1942년 「야생 백합」으로 옌안의 특권을 비판한 당원으로, 제명과 투옥을 거쳐 1947년 비밀리에 처형된다. 다이칭은 이 사건을 정풍운동의 억압을 가늠하는 핵심 사례로 꼽는다.
허난 출신 번역가·작가로 1937년 옌안에 가 마르크스주의 고전을 번역했다. 1942년 3월 『해방일보』에 실은 잡문 「야생 백합」에서 간부의 식사·의복 등급과 청년의 좌절을 지적했고, 곧 정풍운동에서 「트로츠키파」로 몰려 비판 대회의 표적이 되었다. 1943년 체포되어 감금되었고, 1947년 국민당군의 옌안 공격으로 철수하던 중 산시성 싱현에서 처형되었다. 1991년 공안부가 트로츠키파 혐의를 공식 철회했다.
베를린에서 코불로프가 심은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게슈타포가 조종하는 이중간첩이었다. 그의 보고는 NKVD 정보분석관을 건너뛰고 베리야를 거쳐 스탈린의 책상에 직행했고, "독일의 침공 위험은 없다"는 확신을 강화시켰다.
보그단 코불로프의 동생으로, 형과 베리야의 후원에 힘입어 NKVD에서 출세했다. 1938년 서른둘에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대행, 이듬해 베를린 NKVD 레지덴트로 파견되었으나 독일어도 작전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주력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독일이 심은 이중간첩으로, 1940~1941년 나치의 역정보가 코불로프를 통해 모스크바로 흘러들어갔다. 전쟁기에는 우즈베키스탄 보안 총수, 전후에는 포로관리총국과 굴라크 부수장을 지냈으며, 1953년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총살되었다.
1937년, 하잔은 17세기 그루지야의 민족 영웅 기오르기 사아카제에 대해 '연계를 파악하고 체포하라'는 지령과 함께 수사 파일을 개설했다. 수감자가 그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오데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33년 OGPU 고등학교에서 퇴교당한 뒤 그루지야 NKVD 비밀정치부(SPO) 수사관이 되어 베리야-고글리제 체제 아래 사건 조작과 고문을 일삼았다. 대숙청기에는 동료까지 체포·처형으로 몰아넣었고, 1938년 체포됐다가 베리야의 지시로 석방돼 전역 처리에 그쳤다. 전쟁기 NKVD 중앙기구에서 복무했으며, 1948년에는 역설적이게도 『소비에트 인간의 도덕적 모습』을 출간했다. 1955년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트빌리시에서 재판받고 총살됐다.
1941년 6월 17일, 독일 정찰기가 북방함대 기지 상공에 잇따라 출현하자 골롭코는 상부의 승인 없이 스스로 책임지고 함대 전투태세를 2호로 격상시켰다. 나흘 뒤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북방함대는 이미 전시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다.
전시 내내 소련 북방함대를 지휘한 해군 제독. 테레크 코사크 출신으로 1925년 콤소몰 동원으로 해군에 입대해 프룬제 고등해군학교를 졸업하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카르타헤나 해군기지 고문으로 참전했다. 1940년 34세로 북방함대 사령관에 취임해 1941년 6월 17일 독일 정찰기 출현 증가를 포착하고 스스로 책임지고 함대 전투태세를 상향 조치했으며, 전쟁 기간 내내 무르만스크 방어와 북극 호송대 호위를 지휘해 연합군의 보급로를 사수했다. 종전 후 해군 주력참모부장과 해군 제1부총사령관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원양 작전역량을 구축했고, 1955년 전후 최초로 소련 함대의 영국 공식 방문을 이끌었다.
카밀 이크라모프의 회고에 따르면, 셰이닌은 흐루쇼프 시기에도 비신스키가 살던 집을 차로 지나칠 때마다 진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소련 검찰청 수사국장(1935, 1939~1949)으로서 키로프 암살, 지노비예프·카메네프, 부하린·리코프·야고다 사건 등 스탈린 시대 주요 정치 수사를 지휘한 2급 국가법률고문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로만 루덴코 수석검사의 보좌관으로 소련 검찰단에 참여했다. 동시에 《수사관의 수기》(1938)로 소비에트 탐정소설 장르를 개척했고, 영화 《엘베 강의 만남》(1949) 시나리오로 스탈린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하다. 1936년과 1951년 두 차례 체포·투옥되었으나 모두 생환했으며, 해빙기에는 《옥탸브리》 부편집장과 모스필름 편집장을 지내다 196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일곱 살도 되기 전에 청의 마지막 황제가 되어 1911년 신해혁명으로 퇴위하고 1917년 한 차례 복위했다. 이후 만주국의 집정과 황제를 거쳐 1945년 소련군에 사로잡힌 뒤, 1959년 사면되어 개조의 모범으로 제시되었다.
세 살에 청의 선통제로 즉위해 1912년 신해혁명으로 퇴위했다. 자금성에 머물다 1924년 쫓겨나 톈진의 일본 조계로 갔고, 1932년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집정, 1934년부터 황제가 되었다. 1945년 소련군에 붙잡혀 억류된 뒤 1950년 중국에 송환되어 푸순 전범관리소에서 개조 교육을 받았고 1959년 특사로 풀려났다. 베이징 식물원 정원사와 정협 위원으로 살다 문화대혁명 초기인 1967년 병사했다.
1949년 12월 16일, 중앙위 전원회의는 포포프를 서기직과 모스크바 당 제1서기에서 해임했다. 공식 이유는 '비판 억압, 자기비판 부재, 간부에 대한 그릇된 태도'였다. 그 자리에는 흐루쇼프가 앉았다.
셰르바코프 사후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1945~1949)를 맡아 전후 복구와 800주년 기념 사업을 진두지휘했으며, 동시에 중앙위 서기(1946~1949)로 발탁되어 스탈린의 후계 구도에서 잠시 거론될 만큼 급부상했다. 1949년 12월 '비판 억압과 간부 운용의 오류'를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고, 흐루쇼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후 도시건설·농기계 장관, 항공공장장, 폴란드 대사를 거쳐 변방 공장장으로 밀려났으며, 1965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민병대 지휘관들을 평가한 한 보고서는 '도면 하나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자는 모데스토뿐'이라고 적었다.
후안 모데스토는 스페인 공산당의 군사 조직가에서 출발해 공화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성장했다. 그는 제5연대와 제5군단을 이끌며 민병대를 정규 군대로 통합하는 전쟁의 변화를 구현했다. 1938년 에브로군 사령관으로서 공화국의 마지막 대공세를 지휘했지만, 장기 소모전은 병력과 물자의 열세를 뒤집지 못했다. 패전 뒤 소련과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자신의 전쟁 경험을 기록했다.
1942년 첼랴빈스크 외곽 페르신스카야 부지에 들판의 말뚝 하나에서 시작한 제철소 건설을 이끌어, 1943년 4월 19일 첫 쇳물을 뽑아냈다.
모스크바 운하,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의 핵심 시설들을 건설한 군사 기술자이자 국가 행정가이다. 1944년부터 NKVD/MVD 산업건설수용소총국(글라프프롬스트로이) 국장으로서 수용소 노동력으로 특수 시설을 지었고, 체랴빈스크-40(마야크)과 콤비나트 817호를 비롯한 원자력 시설 건설을 지휘해 1949년 최초 핵실험의 물질적 토대를 마련했다. 중형기계공업부 차관을 거쳐 1963년부터 국방부 차관으로 군사 건설 체계를 맡았으며, 1972년 대장으로 승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1949), 스탈린상(1951), 레닌상(1968)을 수상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라도가 호수 얼음길 '생명의 길'의 정치적 책임자로서, 그는 직접 호송대를 검열하며 빙판 위를 오갔다.
즈다노프의 측근 정치일꾼으로, 레닌그라드 포위전 당시 '생명의 길' 정치적 관리를 책임졌으며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붉은 군대 총정치국장(글라프푸르)을 맡아 전후 소련군 정치·이념 체계의 수장이었다. 셰르바코프 사후 그 자리를 이었으나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실각했고, 체포는 면했지만 군 정치 아카데미 원장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당 중앙기관에서 복무했으며, 1960년 알바니아 대사로 부임했으나 소련-알바니아 결렬로 1년 만에 소환되어 당-국가 통제 기구에서 경력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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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19391927년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가입, 크룹스카야 공산대학 졸업(1931), 고리키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 이후 아브토자보츠크 구 당위 서기
1939–1941붉은 군대 정치일꾼으로 전환, 군 전기기술 아카데미 정치부장(1939), 레닌그라드 군관구 정치선전국 부국장(1940~1941)
1941–1942북부전선 군사회의 위원, 레닌그라드 및 볼호프 전선 정치국장 — '생명의 길' 정치적 관리 책임
1942–1945붉은 군대 총정치국 선전선동국장 겸 부국장, 셰르바코프 아래에서 전시 군 정치사업 지휘
1945–1949붉은 군대·소비에트군 총정치국장(글라프푸르), 1945년 9월 대장군 진급, 극동 소련군 최고사령부 군사회의 위원 겸임
「나의 교향곡 대부분은 묘비명이다. 우리 민족이 죽임을 당한 모든 이들을 위한 기념비다.」 — 솔로몬 볼코프가 기록한 구술 회고에서
15개의 교향곡과 15개의 현악사중주를 남긴 20세기 최대 작곡가 중 한 명. 1926년 페트로그라드 음악원 졸업작인 제1교향곡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은 초연 후 2년 만에 『프라우다』의 「음악 대신 혼란」 기사로 공격받았다. 전시 레닌그라드에서 작곡한 제7번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소련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나, 1948년 즈다노프의 '형식주의' 비판으로 다시 한 번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이후 교향곡, 실내악, 영화음악 등에서 소련 체제와 예술가 양심 사이의 긴장을 음악으로 증언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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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5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 전공, 제1교향곡으로 졸업
1927–1936쇼팽 콩쿠르 입상, 『코』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발표, 국제적 주목
1936『프라우다』 「음악 대신 혼란」으로 공식 비판, 제4교향곡 초연 철회
1937–1948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 제5·제7「레닌그라드」교향곡으로 명예 회복
1948즈다노프 비판 — '형식주의'로 몰려 교수직 박탈, 작품 다수 발표 금지
1949–1953미국 방문 평화 회의 참석, 『숲의 노래』로 스탈린상 수상, 비공식 풍자곡 『반형식주의 라요크』 작곡
1957–1975소련 작곡가동맹 서기, 러시아 작곡가동맹 제1서기, 제13·14·15교향곡과 후기 사중주들 발표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때, 빌리스 라치스는 후임으로 베르클라우스를 밀었지만 모스크바는 페이베를 선택했다. 라트비아의 자율적 노선을 꺾고 임명된 그는 이후 라트비아를 떠나 모스크바의 과학행정가로 남은 생을 보냈다.
라트비아인 소작농 가정에서 태어난 농화학자로, 식물 미량원소 연구의 선구자였다. 전후 라트비아 농업대학 총장과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거쳐 민족소비에트 의장과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을 동시에 역임하며 흐루쇼프 시기 발트 민족 간부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1959년 라트비아 민족공산주의자 숙청 국면에서 베르클라우스 대신 정부 수반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모스크바로 완전히 이동하여 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생애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