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7년 10월 2일 그는 유엔 총회에서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동독·서독으로 이루어진 중부 유럽 비핵지대안을 제시했고, 이는 채택되지 못했다.
아담 라파츠키는 1909년 12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렘베르크(현 리비우)에서 태어나 바르샤바에서 자랐다.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치가이자 경제학자, 외교관으로서 사회주의권의 안보 요구를 국제 협상의 언어로 번역한 인물이다. 그는 1957년 중부 유럽 비핵지대안을 제시했고, 1964년에는 유럽안보회의 소집을 제안해 헬싱키 프로세스로 이어질 의제 형성에 기여했다. 동시에 PZPR 지도부와 정부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정치가였으며, 1966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검열 완화를 선호한 개혁파로 여겨졌으나, 1968년 유대계 인사 박해에 반대해 12월 외무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1970년 10월 10일 바르샤바에서 사망했다.
보충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자유도시' 형성이 곧 브란덴부르크 문에 국경이 세워진다는 뜻입니까?
함부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하다 학위를 마치지 못하고 언론에 들어간 독일 기자다. 전후에는 소련이 통제하는 베를린 방송에서 일하다 1949년 서베를린으로 옮겨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 특파원이 되었고,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국경이 브란덴부르크 문에 세워지는가'를 물어 울브리히트로부터 '아무도 장벽을 세울 의도가 없다'는 유명한 답을 끌어냈다.
“어떤 역사라도 살아남는다면, 인류 문명의 종말을 함께 초래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 딴은 버마의 교사와 관료 출신 외교관으로, 탈식민화와 국제 협상이 중심이 된 냉전기의 유엔을 이끈 제3대 사무총장이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그는 존 F. 케네디와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호소와 제안을 보내 소련 선박의 항로 전환과 쿠바 미사일 철수를 연결하는 출구를 제시했고, 이후 쿠바를 방문해 피델 카스트로와 검증 문제를 논의했다. 그의 중재는 핵전쟁의 위험을 낮췄지만, 유엔의 조용한 외교는 초강대국 중심의 위기 서술에서 오래도록 과소평가되었다. 그는 콩고 평화유지 작전과 베트남전 종식을 위한 협상도 추진하며 국제기구의 도덕적 책임과 강대국 정치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1963년 해임을 둘러싼 경위는 증언마다 엇갈린다. 측근들은 그가 술기운에 흐루쇼프에게 전화해 욕설을 들었다고 하고, 경호원의 증언은 다차 산책길의 대면 충돌에서 그가 모자를 벗어 던졌다고 전한다.
볼로그다현 로파리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7년제 학교를 마치고 1923~1929년 회계원으로, 1929~1930년 클럽 관리자와 촌소비에트 의장으로 일했으며, 1936년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를 졸업하고 1937년 당에 입당했다. 1940년부터 고스방크 중앙기구 국장들을 맡아 1953년 소련 재무차관, 1958년 국가은행 총재가 되었고, 1959년 은행체계 개편과 1961년 10:1 화폐개혁을 이끌었다. 1963년 흐루쇼프와의 갈등 끝에 총재직에서 물러났으나 탄압은 받지 않았고, 이후 러시아공화국 재무부에서 국가수입·산업금융 국장과 콜레기움 위원으로 재직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23–1936회계원·클럽 관리자·촌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졸업
1936–1939레닌그라드 주·시 공동은행 선임검사관, 부행장, 행장
1939–1940레닌그라드 시 재정국장
1940–1953고스방크 중앙기구 각 국장, 잡지 《화폐와 신용》 편집장, 이사, 부총재
1950–1955소련 대외무역은행(브네슈토르그방크) 이사장
1953–1958소련 재무차관, 재무부 콜레기움 위원
1958–1963소련 국가은행 총재(1959년 은행체계 개편, 1961년 10:1 화폐개혁)
사촌 왕을 몰아내고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5년 뒤 같은 궁정에서 공산 쿠데타에 살해된 아프가니스탄 초대 대통령
1977년 모스크바 정상회담에서 브레즈네프에게 '우리는 당신들이 아프가니스탄을 어떻게 운영할지 지시하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바락자이 왕조 출신의 아프간 왕족으로, 1953년 사촌 자히르 샤에 의해 총리로 임명되어 10년간 소련 편향의 근대화를 추진하며 '붉은 왕자'로 불렸고, 파슈투니스탄 문제로 파키스탄과 국경 분쟁을 벌였다. 1973년 좌파 장교들의 지원을 받아 무혈 쿠데타로 왕정을 전복하고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올랐으나, 집권 후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고 일당제를 도입했으며 대외정책을 이란·사우디·서방으로 급선회했다. 1978년 4월 혁명 당시 대통령궁에서 PDPA 칼크파 장교들에게 가족 18명과 함께 사살되었고, 이는 소련-아프간 전쟁의 직접적 전사가 되었다.
내무장관이던 란코비치는 1948년 분열 이후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며 가장 가까운 동지가 이제는 적일 수도 있다'고 적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지도자로 티토·카르델에 이은 제3의 권력자로 여겨졌다. 1944년 5월 파르티잔 보안기구 오즈나를 창설했고, 전후 내무장관 겸 국가보안국(우드바) 수장으로서 1948년 소련·유고슬라비아 분열 이후 반스탈린 숙청을 총괄해 1949년 골리오토크와 스베티 그르구르에 코민포름주의자 수용소를 세웠다. 코소보에서는 1947~1966년이 '란코비치 시대'로 불릴 만큼 알바니아계에 대한 강경 진압이 자행되었고, 보이보디나 헝가리계와 산자크 무슬림에 대한 소규모 탄압도 있었다. 연방 분권화에 반대하고 중앙집권을 고수했으며, 1966년 브리오니 전원회의에서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제명된 뒤 두브로브니크에서 조용히 지내다 1983년 사망했다.
그가 소련 대외정보를 지휘한 15년은 소련·러시아 대외정보 역사상 가장 긴 재임이었다. 1955년 6월 대행으로 시작해 1956년 5월 총국장에 취임했고 1971년 7월 후임에게 자리를 넘겼다. 이 기록은 그의 중요성을 뒷받침하는 문서적 핵심이다.
1909년 9월 3일 코스트로마주 갈리치 예즈드 볼쇼예 오조기노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83년 11월 12일 사망했고 노보데비치 묘지에 안장되었다. 레닌그라드 조선소에서 용접공·선체 표시공으로 일하다 1930년 2월 당에 입당했고, 1939년 2월 국가보안기관에 들어가 레닌그라드 NKVD 수상부서를 거쳐 1940년 여객선 스바네티 부선장 신분으로 해외 정찰 활동을 했다. 전쟁 중 레닌그라드 NKVD/NKGB 제1(정찰)과장으로 정찰·파괴 공작조를 적 후방에 투입했고, 1946년부터 MGB 중앙기구와 루마니아 고문으로 근무했다. 1955년 6월 KGB 제1총국장 대행, 1956년 5월 총국장에 취임해 1971년 7월까지 소련 대외정보를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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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931발트 조선소 및 북부 조선소 용접공·선체 표시공
1931–1934적군 복무, 레닌 군사정치대학 야간 코무즈 졸업
1934–1939콤소몰·당 정치활동가, 발트해운회사 당위원회 서기
1939–1941NKVD 레닌그라드국 수상부서 근무, 해외 정찰 임무
1941–1945NKVD/NKGB 레닌그라드국 제1(정찰)과장, 40여 개 공작조를 독일군 후방에 침투
1946–1952MGB 중앙기구, 스칸디나비아·발칸·중동 임무, 루마니아 세쿠리타테 고문
1952–1955KGB 제1총국 부국장(1954년부터)·제1부국장(1955년 8월부터)
1955–1971KGB 제1총국장 대행(1955년 6월부터), 1956년 5월 총국장 취임, 1971년 7월까지 재임
모스크바 항공대학 출신으로 항공기 공장 작업장장을 거쳐 소련 최초 전자식 고속 계산기계 개발을 지휘, 1954년 스탈린상 1등급을 받았다. 1956년 계기제조·자동화부 초대 장관, 이후 우크라이나와 연방 고스플란에서 계획경제 실무를 쌓았고, 1962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상주대표(1962~1977)를 지냈다. 흐루쇼프·코시긴·티호노프 3대 정부에 걸쳐 소련 블록 대외경제의 제도적 틀을 설계한 핵심 인물이다.
1928년, 열아홉 살 랴잔스키는 자작 단파무전기 앞에 앉아 있었다. 북극에서 비행선 이탈리아 호가 추락하고 쇄빙선 크라신이 구조에 나섰다. 전파가 대기를 가르자 연결이 이루어졌다 — 소련 최초의 단파구조교신이었다. 그는 이 순간을 평생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위대한 조국전쟁 중 모스크바 방공의 핵심이 된 페그마티트 레이더를 개발했고, 1946년부터 NII-885 수석설계자로서 R-7 대륙간탄도미사일, 스푸트니크, 보스토크, 소유스, 달·금성·화성 탐사선의 무선유도·원격측정·추적 시스템을 설계했다. 코롤료프·글루시코·바르민·필류긴·쿠즈네초프와 함께 '6인 수석설계자회의'를 구성했으며, 동료들 사이에서는 갈등을 중재하는 '평화주의자'로 불렸다. 1987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 로켓에 그의 무선 장비가 실리지 않은 적은 없었다.
버넷 볼로튼은 스페인 내전을 취재한 기자이자, 공화파 내부의 권력투쟁과 혁명 억압을 추적한 역사가였다. 그는 전쟁 중 공산당에 우호적이었으나, 1937년 5월의 충돌과 POUM 탄압을 조사하며 공산주의 세력이 공화국의 혁명적 동맹을 억눌렀다고 보게 되었다. 난민 증언과 방대한 신문·문서 자료를 수십 년간 모아 《스페인 혁명》과 유고작 《스페인 내전》을 남겼고, 그의 연구는 내전의 정치사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 자료가 되었다.
쇼킨은 즐겨 말했다. "포드 사는 '포드' 자동차를 만든다. 그러니 MEP(전자공업부)는 '엘렉트로니카'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소련 전자산업의 창설자로, 1961년 전자기술 국가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된 뒤 1965년부터 1985년까지 전자공업부 장관을 지내며 소련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의 토대를 닦았다. 그가 구상한 젤레노그라드는 '소련의 실리콘밸리'로 불렸으나,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서방과의 격차는 오히려 벌어졌다.
1985년 3월 11일 정치국. 체르넨코가 죽은 이튿날, 그로미코는 고르바초프가 회의를 열자 곧바로 일어나 그를 총서기로 추천했다. 그에게 돌려진 '미소는 상냥하지만 이빨은 강철'이라는 말은 가장 유명해졌지만, 공개된 회의 기록에는 없다.
28년간 외무장관을 지내며 얄타에서 쿠바 위기, 데탕트, 헬싱키 협정까지 냉전 외교의 결정적 순간마다 소련을 대표했다. 외교에 입문한 1939년 이후 대숙청으로 비어 있던 자리를 채우며 올라 1943~1946년 주미 대사, 유엔 초대 상임대표를 지냈다. 1940년대 말부터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20여 차례 행사해 '미스터 니예트'로 불렸고, 신조는 '10년 협상이 하루 전쟁보다 낫다'였다. 1973년부터 정치국 정회원이었으며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개입을 지지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의 정치적 책임을 함께 졌다. 1985년 3월 정치국에서 고르바초프를 총서기로 추천했고, 1988년 건강을 이유로 은퇴한 뒤 1989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노버트 위너는 이렇게 물었다. '보고류보프라는 사람이 여러 명 있는 겁니까? 수학, 역학, 물리학 모두에 일급 전문가인 사람이 한 명일 리 없잖아요.'
14세에 첫 논문, 21세에 박사학위를 받은 신동으로, 니콜라이 크릴로프와 비선형역학의 키예프 학파를 세웠다. BBGKY 위계, 초유동체 미시 이론, 보고류보프 변환, 재규격화군, 쿼크 색전하, 초전도 미시 이론을 연달아 제시하며 통계역학과 양자장론의 기초를 다시 썼다. 1956년 두브나 JINR 이론물리연구실을 설립하고 1966년부터 1988년까지 소장으로 동구권 최대 국제과학기관을 이끌었으며, 스테클로프 연구소 이론물리부장을 겸해 소련 이론물리학의 제도 전체를 조직했다. 비당원 정교회 신자로서, 노버트 위너가 '보고류보프가 여러 명인가'라고 물을 만큼 수학·역학·물리학을 아우른 다재다능한 이론과학자였다.
중앙계획경제를 굳게 믿은 정통파 공산주의자로 시장화를 막았고, 1989년 천안문 시위에 대한 군사 진압을 열렬히 주장했다.
후베이 목수 출신으로 제4방면군의 정치위원이었고 서로군 궤멸 뒤 살아남았다. 항일전쟁기 후베이의 신4군 제5사단을 세웠고 국공내전 초기 중원 돌파를 이끌었다. 1954년부터 재정부장으로 22년간 경제 운영을 맡았으며 문화대혁명에서도 저우언라이 곁에서 살아남았다. 1976년 4인방 체포에 참여했고 화궈펑의 「양개범시」와 덩샤오핑 사이에서 천윈과 함께 계획경제 우선을 주장했다. 1983~1988년 국가주석을 지냈으며 1989년 강경 진압을 지지했다.
피오트르 야로셰비치는 전후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 출신 공산주의 정치가로, 국가 경제 운영과 당·정부 기구를 연결한 인물이었다. 에드바르트 기에레크의 차관과 서방 차관에 의존한 성장 정책을 집행했지만, 소비 확대와 부채 증가는 식량 가격과 공급의 위기를 키웠다. 1976년 급격한 식료품 가격 인상을 발표한 뒤 라돔과 우르수스에서 노동자 봉기가 일어났고, 정부는 가격안을 철회했으며 탄압은 노동자와 지식인 반대파의 결합과 KOR 결성으로 이어졌다. 1980년 총리직에서 밀려났고, 1992년 아내와 함께 자택에서 살해되었다.
1942년 7월 2일, 그는 독일 점령 당국의 유대인 체포에 프랑스 경찰을 투입하겠다고 동의했다.
르네 부스케는 프랑스의 고위 관료로, 비시 정권의 경찰 협력을 국가 주권의 외형과 결합해 추진했다. 그는 독일 보안기관과 협상해 프랑스 경찰을 동원할 자율성을 확보하는 한편, 유대인 박해와 추방을 실행하는 체계에 경찰력을 제공했다. 1942년 7월 벨디브 검거에서 그의 행정적 결정은 대규모 체포와 강제 이송을 가능하게 했으며, 해방 뒤에는 숙청을 피하고 금융·정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복귀했다.
그는 로켓을 발사대에 '매달린 상태'로 고정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코롤료프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실험 결과 바르민의 안이 최적이었다. 훗날 그를 '바이코누르의 아버지'라 불렀다.
모스크바 출신, 바우만 공대에서 냉동·압축기 공학을 전공하고 1935~36년 미국을 방문해 기술을 시찰했다. 콤프레소르 공장 수석설계자로 독소전 발발 직후 카튜샤 다연장로켓 발사대를 개발했다. 1946년부터 GSKB 스페츠마시를 이끌며 R-1에서 R-7, 프로톤, 에네르기야-부란까지 소련의 거의 모든 로켓 발사대와 사일로를 설계했다. 코롤료프의 수석설계자회의 일원으로 달·금성 토양채취 장치도 개발했으며, 실현되지 못한 달 기지 '즈베즈다'를 구상했다.
1979년 12월, 루사코프는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을 담은 정치국 문서에 서명했다. 그가 관장하던 '사회주의 국가' 범주 안에는 이제 군사적 현상 변경까지 포함되었다.
레닌그라드 공과대학을 졸업한 토목기술자 출신으로, 1930년대 육류·어류 가공공장 건설 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해 1950년 소련 수산공업장관까지 올랐다. 1957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시대 간부 숙청 때 폴란드 대사관 참사관으로 밀려났다가, 1964년 브레즈네프 시대에 중앙위 기구로 복귀해 사회주의 국가 공산당·노동자당 연락부를 이끌었다. 1977년 중앙위 서기로 겸직하면서 9년간 바르샤바 조약 동맹국과 몽골·베트남·쿠바 등 사회주의권 집권당과의 관계를 총괄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에도 참여했다. 1986년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직후 '구시대 인물'로 퇴장했다.
“유엔에서는 미사일 위협 제거를, 미주기구에서는 리우 조약에 따른 공동행동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딘 러스크는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국무부를 거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국제주의자였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군사적 충돌을 통제하면서도 봉쇄를 선택했고, 미주기구와 유엔을 통해 그 조치를 국제적으로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점차 개입을 강하게 옹호해, 국제법과 동맹 외교를 중시한 인물이 전쟁의 정당화에도 관여한 긴장을 남겼다. 퇴임 뒤에는 그루지야대학교에서 국제법과 외교를 가르쳤다.
기습으로 쿠바를 치는 건 진주만과 똑같은 짓이다. 그게 어디로 갈지 생각하면 정말 소름이 끼친다... 미사일을 다 제거해도 그게 끝이 아니야. 그게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국무차관(1961–1966)으로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두 행정부에서 복무하며, 쿠바 미사일 위기와 베트남전이라는 냉전의 두 결정적 순간에 확전을 반대한 예외적 인물이었다. 1962년 10월 EXCOMM에서 기습 공습을 '또 하나의 진주만'이라 규정하며 로버트 케네디를 비롯한 다수를 봉쇄 쪽으로 돌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후 1965년까지 베트남 파병 확대에 홀로 반대하는 각료 내 유일한 반대자가 되었다. 퇴임 후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편향된 중동 정책을 비판했고, 유럽 통합의 초기 설계자 중 한 명으로 장 모네와 함께 슈만 계획과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조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파블롭스키는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와 참모총장 오가르코프에게 소련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단호히 반대하는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수개월 후 지상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됐다.
우크라이나 농촌 출신으로 농업학교를 나와 붉은 군대에 입대, 독소전쟁에서 코카서스에서 베를린까지 진군한 소총사단을 지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67년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13년간 소련 지상군을 지휘했으며, 1968년에는 바르샤바조약군 통합군 사령관으로서 체코슬로바키아 침공(다뉴브 작전)을 현장 지휘했다. 1979년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귀환한 후 국방장관 우스티노프와 참모총장 오가르코프에게 소련군 파병을 단호히 반대하는 서면 보고서를 제출했고, 수개월 뒤 해임됐다. 소련 최대의 지상군을 13년간 이끈 육군대장으로서 군사개입을 공개 반대한 이력은 브레즈네프 말기 군사 엘리트 내부의 균열을 드러낸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