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인물프리드리히 엥겔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카를 마르크스, 다비트 프리드리히 슈트라우스, 브루노 바우어, 막스 슈티르너, 이마누엘 칸트, 데이비드 흄, 요제프 디츠겐, 미하일 바쿠닌,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마르틴 루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프랑수아 기조, 아돌프 티에르,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루이 블랑 용어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변증법, 청년헤겔파, 헤겔학파, 독일 관념론, 기독교의 본질, 신성가족, 정신현상학
서문
1859년 베를린에서 나온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의 서문에서 카를 마르크스는, 우리 둘이 1845년 브뤼셀에서 “독일 철학의 이데올로기적 견해에 맞선 우리 견해의 대립을 함께 정리하기로, 사실상 우리의 지난날 철학적 양심과 결산하기로” 착수한 경위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우리 견해란 특히 마르크스가 정립한 유물론적 역사관을 말한다. “이 계획은 헤겔 이후 철학에 대한 비판이라는 형식으로 실행되었다. 두툼한 8절판 두 권 분량의 원고가 베스트팔렌의 출판지에 도착한 지 오래되었을 때, 우리는 사정이 바뀌어 인쇄할 수 없다는 소식을 받았다. 우리는 주요 목적 — 자기 이해 — 을 이미 이루었으므로, 그만큼 더 기꺼이 원고를 쥐들의 갉아먹는 비판에 내맡겼다.”
그 뒤로 사십 년이 넘게 흘렀고, 우리 중 누구에게도 이 주제로 돌아올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채 마르크스는 세상을 떠났다. 헤겔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관해서는 군데군데 의견을 밝힌 적이 있지만, 어디에서도 포괄적인 연관 속에서 다루지는 않았다. 여러 면에서 헤겔 철학과 우리 견해 사이의 중간 고리를 이루는 포이어바흐에게는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그사이 마르크스의 세계관은 독일과 유럽의 국경을 훨씬 넘어, 세계의 모든 문명어 속에서 지지자를 얻었다. 다른 한편 독일 고전철학은 외국에서, 특히 영국과 스칸디나비아에서 일종의 부활을 맞고 있으며, 독일에서조차 사람들은 대학에서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떠먹여지는 절충주의의 멀건 거지 죽에 물리기 시작한 듯하다.
이러한 사정에서, 헤겔 철학에 대한 우리의 관계, 곧 우리가 그것에서 어떻게 출발했고 또 어떻게 그것과 갈라섰는지를 짧고 일관되게 서술하는 일이 내게는 점점 더 필요해 보였다. 마찬가지로, 헤겔 이후의 다른 어떤 철학자보다도 포이어바흐가 우리의 질풍노도 시기에 우리에게 미친 영향을 온전히 인정하는 것은 아직 갚지 못한 명예의 빚으로 보였다. 그래서 《노이에 차이트》 편집부가 슈타르케의 포이어바흐론에 대한 비평을 청했을 때 나는 기꺼이 그 기회를 잡았다. 내 글은 1886년 그 잡지의 제4호와 제5호에 실렸고, 여기서 손질을 거쳐 별쇄본으로 나온다.
이 글을 인쇄소로 보내기 전에 나는 1845/46년의 옛 원고를 다시 찾아내 훑어보았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절은 완성되지 않았다. 완성된 부분은 유물론적 역사관의 서술로 되어 있는데, 이는 당시 우리의 경제사 지식이 아직 얼마나 불완전했는지를 보여 줄 뿐이다. 포이어바흐 학설 자체에 대한 비판은 거기에 빠져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목적에는 쓸모가 없었다. 그 대신 나는 마르크스의 옛 공책 하나에서 부록에 실은 포이어바흐에 관한 열한 개의 테제를 발견했다. 그것은 나중에 다듬을 생각으로 급히 적어 둔 메모로서 결코 인쇄할 생각으로 쓴 것이 아니지만, 새로운 세계관의 천재적인 싹이 담긴 최초의 문서로서 더없이 귀중하다.
1888년 2월 21일, 런던
프리드리히 엥겔스
I
여기서 다루는 책[1]은 우리를 한 시대로 데려간다. 그 시대는 시간으로 따지면 꼬박 한 세대 남짓 전의 일이지만, 지금 독일의 세대에게는 마치 이미 백 년은 된 듯 낯설어졌다. 그런데도 그것은 독일이 1848년 혁명을 준비하던 시기였다. 그 뒤로 우리 나라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1848년의 연장일 뿐이며, 혁명의 유언을 집행하는 일일 뿐이다.
18세기 프랑스에서 그랬듯이 19세기 독일에서도 철학 혁명이 정치적 붕괴의 서막을 열었다. 그러나 둘의 모습은 얼마나 달랐던가! 프랑스인들은 공인된 학문 전체와, 교회와, 때로는 국가와도 공공연히 싸웠다. 그들의 저작은 국경 너머 네덜란드나 영국에서 인쇄되었고, 그들 자신도 툭하면 바스티유에 끌려갈 처지였다. 그에 비해 독일인들은 — 교수, 곧 국가가 임명한 청년의 교사였고, 그들의 저작은 공인된 교과서였으며, 전체 발전을 마무리하는 체계인 헤겔의 체계는 어느 정도 왕립 프로이센 국가철학의 지위로까지 올라섰다! 그런데 이 교수들 뒤에, 그들의 현학적이고 어두운 말 뒤에, 그들의 둔중하고 지루한 문장 속에 혁명이 숨어 있었단 말인가? 바로 당시 혁명의 대변자로 통하던 사람들, 즉 자유주의자들이야말로 머리를 어지럽히는 이 철학의 가장 격렬한 적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정부도 자유주의자도 보지 못한 것을 이미 1833년에 적어도 한 사람은 보았으니, 그의 이름은 물론 하인리히 하이네였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어떤 철학 명제도 헤겔의 저 유명한 명제만큼 편협한 정부들의 감사와 그만큼 편협한 자유주의자들의 분노를 한 몸에 받은 적이 없다.
“현실적인 것은 모두 이성적이며, 이성적인 것은 모두 현실적이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뻔히,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신성화하는 것이며, 전제정치, 경찰국가, 궁정 사법, 검열을 철학적으로 축성하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도 그렇게 받아들였고, 그의 신민들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헤겔에게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곧바로 현실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그에게 현실성이라는 속성은 동시에 필연적인 것에만 속한다.
“현실성은 그 전개 속에서 필연성임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정부의 아무 조처나 — 헤겔 자신이 “어떤 조세 제도”를 예로 든다 — 그에게는 결코 곧바로 현실적인 것으로 통하지 않는다. 그러나 필연적인 것은 결국에는 이성적인 것으로도 드러난다. 따라서 이 헤겔의 명제를 당시 프로이센 국가에 적용하면 그 뜻은 이것일 뿐이다. 이 국가는 그것이 필연적인 한에서 이성적이며 이성에 부합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나빠 보이는데도 그 나쁨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속한다면, 정부의 나쁨은 그에 상응하는 신민의 나쁨에서 그 정당성과 설명을 얻는다. 당시 프로이센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걸맞은 정부를 가졌던 것이다.
그런데 헤겔에 따르면 현실성은 주어진 사회적·정치적 상태에 어떤 상황에서나 언제나 속하는 속성이 결코 아니다. 정반대다. 로마 공화정은 현실적이었지만, 그것을 밀어낸 로마 제정도 현실적이었다. 프랑스 군주정은 1789년에 이르러 너무도 비현실적이 되어, 즉 모든 필연성을 잃고 너무도 비이성적이 되어, 헤겔이 언제나 최고의 열광을 담아 이야기하는 대혁명에 의해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군주정이 비현실적인 것이었고 혁명이 현실적인 것이었다. 이렇게 발전의 흐름 속에서 이전에 현실적이던 모든 것은 비현실적이 되고, 그 필연성과 존재할 권리와 이성성을 잃는다. 죽어 가는 현실적인 것의 자리에 새롭고 생명력 있는 현실이 들어선다 — 낡은 것이 버티지 않고 순순히 죽어 줄 만큼 분별이 있으면 평화롭게, 그것이 이 필연성에 맞서 버티면 폭력적으로. 이리하여 헤겔의 명제는 헤겔 변증법 자체에 의해 그 반대로 뒤집힌다. 인간 역사의 영역에서 현실적인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비이성적이 된다. 따라서 그것은 이미 그 규정상 비이성적이며, 처음부터 비이성성을 짊어지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이성적인 모든 것은, 그것이 존재하는 겉보기 현실과 아무리 모순되더라도, 현실적이 되도록 정해져 있다. 현실적인 모든 것이 이성적이라는 명제는 헤겔 사유 방법의 모든 규칙에 따라 다른 명제로 해소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멸망할 만한 가치가 있다.
바로 여기에 헤겔 철학(칸트 이래 전체 운동의 완결로서 우리는 여기서 이것만 다루어야 한다)의 참된 의의와 혁명적 성격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사유와 행위가 낳은 모든 결과가 최종적이라는 생각에 단번에 종지부를 찍었다. 철학에서 인식해야 할 진리는 헤겔에게서 더는 한번 발견되면 외우기만 하면 되는 완성된 교조적 명제들의 모음이 아니었다. 진리는 이제 인식 과정 자체 속에, 학문의 오랜 역사적 발전 속에 있었다. 학문은 낮은 인식 단계에서 점점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지만, 이른바 절대적 진리를 찾아냄으로써 더 나아갈 수 없는 지점, 손을 무릎에 얹고 손에 넣은 절대적 진리를 경탄하며 바라보는 것 말고는 할 일이 남지 않는 지점에 이르는 일은 결코 없다. 철학적 인식의 영역에서 그렇듯이 다른 모든 인식의 영역과 실천적 행위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식과 마찬가지로 역사도 인류의 완전한 이상 상태에서 완결될 수는 없다. 완전한 사회, 완전한 “국가”는 환상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잇따라 나타나는 모든 역사적 상태는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나아가는 인간 사회의 끝없는 발전 행로에서 거쳐 가는 단계일 뿐이다. 각 단계는 필연적이며, 따라서 그것을 낳은 시대와 조건에서는 정당하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자신의 품 안에서 서서히 자라나는 새롭고 더 높은 조건 앞에서는 낡고 부당한 것이 된다. 그것은 더 높은 단계에 자리를 내주어야 하며, 그 더 높은 단계 역시 차례가 되면 쇠퇴하고 몰락한다. 부르주아지가 대공업과 경쟁과 세계시장을 통해 안정되고 유서 깊은 모든 제도를 실천적으로 해체하듯이, 이 변증법적 철학은 최종적인 절대적 진리라는 관념과 그에 상응하는 인류의 절대적 상태라는 관념을 모두 해체한다. 그 앞에서는 최종적인 것도, 절대적인 것도, 신성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것에서, 모든 것에 깃든 덧없음을 드러낸다. 그 앞에서는 생성과 소멸의 끊임없는 과정,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 끝없이 올라가는 과정 말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 자체가 사유하는 두뇌 속에서 이 과정이 반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이 철학에는 보수적인 측면도 있다. 그것은 특정한 인식 단계와 사회 단계가 그 시대와 상황에서 정당함을 인정한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이 견해의 보수성은 상대적이며, 그 혁명적 성격은 절대적이다. 그것이 인정하는 유일한 절대적인 것이다.
이 견해가 오늘날 자연과학의 수준과 과연 들어맞는지 하는 물음은 여기서 다룰 필요가 없다. 자연과학은 지구의 존재 자체에는 어쩌면 올지도 모를 종말을, 그러나 지구에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태에는 상당히 확실한 종말을 예언하며, 따라서 인간 역사에도 올라가는 가지뿐 아니라 내려가는 가지가 있다고 인정한다. 어쨌든 우리는 사회의 역사가 내리막으로 접어드는 전환점에서 아직 꽤 멀리 있으며, 헤겔 철학에게 그 시대의 자연과학이 아직 의제로 올리지도 않았던 주제를 다루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서 실제로 말해 두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위의 전개는 헤겔에게서 이렇게 날카로운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방법에서 나오는 필연적 귀결이지만, 그 자신은 이 귀결을 이렇게 명시적으로 끌어낸 적이 없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는 체계를 만들어야 했는데, 철학의 체계란 전래의 요구에 따라 어떤 종류든 절대적 진리로 끝맺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이 특히 『논리학』에서 이 영원한 진리란 논리적 과정, 또는 역사적 과정 자체에 다름 아니라고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그는 바로 자신의 체계를 어딘가에서 끝내야 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 끝을 둘 수밖에 없게 된다. 『논리학』에서는 그는 이 끝을 다시 시작으로 만들 수 있다. 여기서는 종착점인 절대 이념이 — 그것이 절대적인 까닭은 그가 그것에 관해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말할 줄 모른다는 데 있을 뿐이다 — 자연으로 “외화”되고, 즉 전화하고, 나중에 정신 속에서, 즉 사유와 역사 속에서 다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 전체의 끝에서 이와 비슷하게 시작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오직 한 가지 길로만 가능하다. 곧 인류가 바로 이 절대 이념의 인식에 이르는 것을 역사의 끝으로 정하고, 이 절대 이념의 인식이 헤겔 철학에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헤겔 체계의 교조적 내용 전체가 절대적 진리로 선언되며, 이는 모든 교조적인 것을 해체하는 그의 변증법적 방법과 모순된다. 그렇게 되면 혁명적 측면은 무성하게 뻗어 나가는 보수적 측면 밑에 질식한다. 그리고 철학적 인식에 해당하는 것은 역사적 실천에도 해당한다. 헤겔이라는 인물 속에서 절대 이념을 정립하는 데까지 이른 인류는 실천에서도 이 절대 이념을 현실 속에서 실현할 수 있을 만큼 나아가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절대 이념이 동시대인들에게 내거는 실천적인 정치적 요구가 너무 높아서는 안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법철학』의 끝에서, 절대 이념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가 신민들에게 그토록 끈질기게, 그러나 헛되이 약속했던 신분제 군주정 속에서, 즉 당시 독일의 소부르주아적 상황에 걸맞은, 유산계급의 제한되고 온건한 간접 지배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서 덤으로 귀족의 필연성까지 사변적으로 증명해 보인다.
그러므로 철두철미 혁명적인 사유 방법을 통해 매우 온순한 정치적 결론이 만들어진 것은 체계의 내적 필연성만으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물론 이 결론의 특수한 형태는 헤겔이 독일인이었고, 그의 동시대인 괴테처럼 그에게도 속물의 변발이 뒤에 한 가닥 달려 있었다는 데서 나온다. 괴테와 헤겔은 저마다 자기 분야에서 올림포스의 제우스였지만, 둘 다 독일 속물에게서 끝내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도 헤겔의 체계가 이전의 어떤 체계보다도 비할 데 없이 넓은 영역을 포괄하고, 그 영역에서 오늘날에도 경탄을 자아내는 풍부한 사상을 펼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정신현상학(정신의 발생학과 고생물학에 견줄 만하다고 할 수 있는 것으로, 개인의 의식이 여러 단계를 거쳐 발전하는 과정을, 인간의 의식이 역사적으로 거쳐 온 단계들의 축약된 재현으로 파악한 것이다), 논리학, 자연철학, 정신철학, 그리고 이 정신철학은 다시 그 개별적인 역사적 하위 형태들로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곧 역사철학, 법철학, 종교철학, 철학사, 미학 등이다 — 이 모든 다양한 역사적 영역에서 헤겔은 발전을 꿰뚫는 실마리를 찾아내 입증하려고 애쓴다. 그리고 그는 창조적 천재였을 뿐 아니라 백과사전적 학식을 갖춘 사람이었으므로, 어디서나 획기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물론 “체계”의 필연성 때문에 그가 여기서 툭하면 억지스러운 구성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으며, 그의 난쟁이 같은 적수들은 오늘날까지도 그것을 두고 끔찍한 아우성을 친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은 그의 작품의 틀이자 비계일 뿐이다. 거기에 쓸데없이 머물지 않고 이 거대한 건물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면, 오늘날에도 온전한 가치를 지닌 셀 수 없는 보물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철학자에게서 바로 “체계”가 덧없는 것이며, 그것은 바로 그 체계가 인간 정신의 덧없지 않은 욕구, 곧 모든 모순을 극복하려는 욕구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모든 모순이 단번에 영원히 제거된다면, 우리는 이른바 절대적 진리에 다다른 것이고, 세계사는 끝난 것이다. 그런데도 세계사는 더 할 일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는데도 계속되어야 한다 — 이는 새롭고 풀 수 없는 모순이다. 이렇게 제기된 철학의 과제란, 한 사람의 철학자가 오직 인류 전체가 그 진보하는 발전 속에서만 해낼 수 있는 일을 해내야 한다는 과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일단 깨닫게 되면 — 그리고 이 깨달음에 이르도록 결국 누구보다 많이 도와준 사람은 헤겔 자신이다 — 그렇게 깨닫는 순간, 지금까지의 의미에서의 철학 전체도 끝장이다. 사람들은 이 길로는, 그리고 어느 개인에게도 도달할 수 없는 “절대적 진리”를 놓아 보내고, 그 대신 실증 과학의 길과 변증법적 사유를 통해 그 성과를 종합하는 길에서 도달할 수 있는 상대적 진리를 뒤쫓는다. 헤겔과 더불어 철학 일반은 끝난다. 한편으로는 그가 철학의 발전 전체를 자신의 체계 속에 더없이 웅대하게 종합했기 때문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비록 무의식적이었다 하더라도 이 체계들의 미로에서 빠져나와 세계에 대한 현실적이고 실증적인 인식으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철학적 색채가 짙은 독일의 분위기 속에서 이 헤겔의 체계가 얼마나 엄청난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이어진 개선 행진이었고, 헤겔이 죽은 뒤에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바로 1830년부터 1840년까지 “헤겔주의 놀음”이 가장 배타적으로 지배했고, 그 적수들까지도 많든 적든 물들였다. 바로 이 시기에 헤겔의 견해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더없이 풍부하게 갖가지 학문 속으로 스며들었고, 평범한 “교양 있는 의식”이 사상의 재료를 얻는 대중 문학과 일간 신문까지도 발효시켰다. 그러나 이 전선 전체에 걸친 승리는 내부 투쟁의 전주곡일 뿐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헤겔의 학설 전체는 갖가지 실천적 당파 견해가 들어설 넉넉한 여지를 남겨 두었다. 그리고 당시의 이론적인 독일에서 실천적인 것이란 무엇보다 두 가지, 종교와 정치였다. 헤겔의 체계에 중점을 둔 사람은 두 영역 모두에서 꽤 보수적일 수 있었다. 변증법적 방법을 핵심으로 본 사람은 종교에서나 정치에서나 극단적 반대파에 속할 수 있었다. 헤겔 자신은 그의 저작에 혁명적인 분노가 꽤 자주 터져 나오는데도 대체로 보수적인 쪽으로 더 기운 것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그의 체계는 그의 방법보다 훨씬 더 많은 “사유의 고된 노동”을 그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30년대 말로 가면서 학파 안의 분열이 점점 더 뚜렷해졌다. 좌파, 곧 이른바 청년헤겔파는 경건주의 정통파와 봉건 반동파에 맞서 싸우면서, 절박한 시사 문제들에 대해 철학자다운 고상한 거리를 두던 태도, 그때까지 그들의 학설에 국가의 묵인과 심지어 보호까지 보장해 주었던 그 태도를 하나씩 내버렸다. 그리고 1840년에 정통파의 위선적 신앙심과 봉건적·절대주의적 반동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와 함께 왕좌에 오르자, 공공연한 당파적 입장 표명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투쟁은 여전히 철학의 무기로 치러졌지만, 더는 추상적·철학적 목표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곧바로 전래의 종교와 기존 국가를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독일 연보》에서는 실천적 궁극 목적이 아직 주로 철학의 옷을 입고 나타났다면, 1842년의 《라인 신문》에서 청년헤겔학파는 떠오르는 급진 부르주아지의 철학으로서 정체를 곧바로 드러냈고, 철학이라는 얄팍한 외투는 검열을 속이는 데에만 필요로 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 정치는 가시밭 같은 영역이었고, 그래서 주된 투쟁은 종교를 겨냥했다. 그런데 특히 1840년 이후 이것은 간접적으로는 정치 투쟁이기도 했다. 첫 자극은 1835년 슈트라우스의 『예수의 생애』가 주었다. 여기서 전개된 복음서 신화 형성 이론에 맞서, 나중에 브루노 바우어는 일련의 복음서 이야기가 저자들이 직접 지어낸 것임을 입증하며 나섰다. 두 사람 사이의 논쟁은 “자기의식”이 “실체”에 맞서 싸운다는 철학의 옷을 입고 벌어졌다. 복음서의 기적 이야기가 공동체의 품에서 무의식적·전통적 신화 형성을 통해 생겨났는가, 아니면 복음서 저자들 자신이 지어냈는가 하는 물음은, 세계사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힘이 “실체”냐 “자기의식”이냐 하는 물음으로 부풀려졌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날 무정부주의의 예언자인 슈티르너가 나타나 — 바쿠닌은 그에게서 아주 많은 것을 가져왔다 — 주권적인 “자기의식”을 자신의 주권적인 “유일자”로 한 수 더 뛰어넘었다.
헤겔학파가 해체되는 과정의 이 측면에는 더 깊이 들어가지 않겠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가장 단호한 청년헤겔파 대다수는 실증 종교에 맞서는 투쟁의 실천적 필연성 때문에 영국·프랑스 유물론으로 되밀려 갔다. 그리고 여기서 그들은 자기 학파의 체계와 충돌하게 되었다. 유물론은 자연을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데 반해, 헤겔의 체계에서 자연은 절대 이념의 “외화”, 말하자면 이념의 격하를 나타낼 뿐이다. 어떤 경우에도 여기서는 사유와 그 사유의 산물인 이념이 근원적인 것이고, 자연은 이념이 몸을 낮추어 준 덕분에 비로소 존재하는 파생된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되는 대로, 잘되든 못되든 이 모순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때 포이어바흐의 『기독교의 본질』이 나왔다. 그것은 유물론을 군말 없이 다시 왕좌에 앉힘으로써 단번에 모순을 날려 버렸다. 자연은 모든 철학과 무관하게 존재한다. 자연은 우리 인간, 즉 그 자신이 자연의 산물인 우리가 자라난 토대이다. 자연과 인간 밖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의 종교적 환상이 만들어 낸 더 높은 존재들은 우리 자신의 본질이 환상적으로 되비친 것일 뿐이다. 주문은 풀렸다. “체계”는 깨어져 옆으로 내던져졌고, 모순은 상상 속에만 있는 것으로 드러나 해소되었다. — 이 책이 준 해방감은 직접 겪어 본 사람이라야 짐작할 수 있다. 열광은 모두의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한동안 포이어바흐주의자였다. 마르크스가 이 새로운 견해를 얼마나 열렬히 반겼는지, 그리고 그가 — 온갖 비판적 유보에도 불구하고 — 얼마나 크게 그 영향을 받았는지는 『신성가족』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책의 결함조차 그 즉각적인 영향에 이바지했다. 문예적이고, 군데군데 과장되기까지 한 문체는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해 주었고, 추상적이고 난해한 헤겔주의 놀음의 기나긴 세월 뒤에 아무튼 청량제였다. 사랑을 지나치게 떠받드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이는 견딜 수 없게 된 “순수 사유”의 주권에 맞서는 것으로서 정당성은 아니더라도 변명거리는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바로 포이어바흐의 이 두 약점에, 1844년 이후 “교양 있는” 독일에서 전염병처럼 퍼진 “진정한 사회주의”가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과학적 인식 대신 문예적 미사여구를, 생산의 경제적 개조를 통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 대신 “사랑”을 통한 인류의 해방을 내세웠고, 한마디로 역겨운 문예 취미와 사랑 타령의 후텁지근함 속으로 흘러 들어갔으니, 그 전형이 카를 그륀 씨였다.
또 하나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헤겔학파는 해체되었지만, 헤겔 철학은 비판적으로 극복되지 않았다. 슈트라우스와 바우어는 저마다 그 한 측면을 끄집어내 다른 측면에 대한 논박에 들이댔다. 포이어바흐는 체계를 깨뜨리고 그냥 옆으로 내던졌다. 그러나 어떤 철학을 그저 틀렸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그 철학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국민의 정신적 발전에 그토록 엄청난 영향을 끼친 헤겔 철학과 같은 거대한 작품은 간단히 무시해 버린다고 해서 치워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자신의 의미에서 “지양된” 것이 되어야 했다. 즉 그 형식은 비판적으로 파괴하되, 그것을 통해 얻은 새로운 내용은 구해 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이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아래에서 다룬다.
그러나 그사이 1848년 혁명은 포이어바흐가 자신의 헤겔을 그랬던 것과 똑같이 거리낌 없이 철학 전체를 옆으로 밀쳐 버렸다. 그와 함께 포이어바흐 자신도 뒷전으로 밀려났다.
II
모든 철학, 특히 근대 철학의 커다란 근본 문제는 사유와 존재의 관계에 관한 문제다. 사람들이 아직 자기 몸의 구조를 전혀 알지 못한 채 꿈에 나타나는 형상들에 자극을 받아[2], 자신들의 사유와 감각이 몸의 활동이 아니라 이 몸 안에 깃들어 살다가 죽을 때 몸을 떠나는 특별한 영혼의 활동이라는 관념에 이른 아주 먼 옛날부터 — 이 시기부터 사람들은 이 영혼이 외부 세계와 맺는 관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혼이 죽을 때 몸에서 떨어져 나와 계속 산다면, 영혼에게 또 따로 죽음을 지어 붙일 까닭은 없었다. 그리하여 영혼 불멸의 관념이 생겨났는데, 이 관념은 그 발전 단계에서는 결코 위안으로 보이지 않았고, 어찌할 도리가 없는 운명으로, 그리고 그리스인들에게서처럼 꽤 자주 명백한 불행으로 보였다. 개인의 불멸이라는 따분한 공상으로 어디서나 사람들을 이끈 것은 종교적 위안의 욕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똑같이 보편적인 편협함에서 자라난 곤혹, 곧 일단 받아들인 영혼을 몸이 죽은 뒤에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곤혹이었다. 아주 비슷한 길을 거쳐, 자연력의 인격화를 통해 최초의 신들이 생겨났다. 이 신들은 종교가 더 발전해 가면서 점점 더 세계 밖의 모습을 띠었고, 마침내 정신의 발전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추상 과정, 아니 거의 증류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은 과정을 거쳐, 많든 적든 제한되어 있고 서로를 제한하는 여러 신들로부터 일신교의 하나뿐인 배타적인 신이라는 관념이 사람들 머릿속에 생겨났다.
그러므로 사유가 존재에 대해, 정신이 자연에 대해 갖는 관계에 관한 물음, 철학 전체의 최고 물음은 모든 종교와 마찬가지로 야만 상태의 편협하고 무지한 관념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 물음은 유럽 인류가 기독교 중세의 긴 겨울잠에서 깨어난 뒤에야 비로소 온전히 날카롭게 제기될 수 있었고, 그 온전한 의미를 얻을 수 있었다. 사유가 존재에 대해 어떤 위치에 있는가 하는 물음, 덧붙이자면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도 큰 역할을 했던 물음, 곧 근원적인 것은 무엇인가, 정신인가 자연인가 하는 물음 — 이 물음은 교회에 맞서 다음과 같이 첨예해졌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아니면 세계는 영원으로부터 존재해 왔는가?
이 물음에 이렇게 답하느냐 저렇게 답하느냐에 따라 철학자들은 두 개의 큰 진영으로 갈라졌다. 자연에 대한 정신의 근원성을 주장한 사람들, 따라서 결국에는 어떤 종류든 세계 창조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 그리고 이 창조는 철학자들에게서, 이를테면 헤겔에게서 기독교에서보다 훨씬 더 뒤얽혀 있고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 관념론 진영을 이루었다. 자연을 근원적인 것으로 본 다른 사람들은 유물론의 여러 학파에 속한다.
관념론과 유물론이라는 두 표현은 원래 이것 말고 다른 것을 뜻하지 않으며, 여기서도 다른 뜻으로 쓰지 않는다. 여기에 다른 것을 끌어넣으면 어떤 혼란이 생기는지는 아래에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유와 존재의 관계에 관한 물음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이 세계 자체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우리의 사유는 현실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가, 우리는 현실 세계에 대한 표상과 개념 속에서 현실의 올바른 거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는가? 이 물음은 철학의 언어로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관한 물음이라 불리며, 압도적으로 많은 철학자가 이를 긍정한다. 이를테면 헤겔에게서는 이 긍정이 자명하다. 우리가 현실 세계에서 인식하는 것은 바로 그 세계의 사유적 내용, 곧 세계를 절대 이념의 단계적 실현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 절대 이념은 영원으로부터 세계와 무관하게, 세계보다 앞서 어딘가에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유가 처음부터 이미 사유 내용인 내용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은 더 따질 것도 없이 분명하다. 그만큼 분명한 것은, 여기서는 증명해야 할 것이 이미 전제 속에 슬그머니 들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것은 헤겔이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에 대한 자신의 증명에서 더 나아간 결론을 끌어내는 것을 조금도 막지 못한다. 곧 자신의 철학은 자신의 사유에 올바르므로 이제 유일하게 올바른 철학이기도 하며, 사유와 존재의 동일성은 인류가 즉시 그의 철학을 이론에서 실천으로 옮겨 온 세계를 헤겔의 원칙에 따라 개조하는 데서 입증되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이것은 그가 거의 모든 철학자와 함께 지닌 환상이다.
그런데 이들 말고도 세계 인식의 가능성, 또는 적어도 남김없는 인식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일련의 철학자들이 있다. 근대 철학자 가운데서는 흄과 칸트가 여기에 속하며, 이들은 철학의 발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견해를 반박하는 데 결정적인 것은, 관념론의 입장에서 가능했던 한도 안에서는 이미 헤겔이 말했다. 포이어바흐가 유물론적으로 덧붙인 것은 깊이 있다기보다는 재치 있다. 이 견해를, 그리고 다른 모든 철학적 괴벽을 가장 통렬하게 반박하는 것은 실천, 곧 실험과 산업이다. 어떤 자연 과정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내고, 그 조건들로부터 산출하고, 게다가 우리의 목적에 이바지하게 함으로써 그 과정에 대한 우리의 파악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칸트의 파악할 수 없는 “물자체”는 끝장이다. 식물과 동물의 몸 안에서 생겨나는 화학 물질들은 유기화학이 그것들을 하나씩 만들어 내기 시작할 때까지 그런 “물자체”로 남아 있었다. 그로써 “물자체”는 우리에 대한 사물이 되었다. 이를테면 꼭두서니의 색소인 알리자린이 그렇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밭에서 꼭두서니 뿌리 속에 자라게 하지 않고, 콜타르에서 훨씬 싸고 간단하게 만들어 낸다. 코페르니쿠스의 태양계는 300년 동안 하나의 가설이었다. 백 대 일, 천 대 일, 만 대 일로 내기를 걸어도 좋을 가설이었지만, 그래도 언제나 가설이었다. 그러나 르베리에가 이 체계가 주는 자료로부터 미지의 행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뿐 아니라 이 행성이 하늘의 어느 자리에 있어야 하는지까지 계산해 내고, 이어 갈레가 실제로 이 행성을 찾아냈을 때,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는 증명되었다. 그런데도 독일에서는 신칸트학파가 칸트의 견해를, 영국에서는(거기서 이 견해는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다) 불가지론자들이 흄의 견해를 되살리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이루어진 이론적·실천적 반박에 비추어 볼 때, 학문적으로는 퇴보이고 실천적으로는 유물론을 뒤로는 받아들이면서 세상 앞에서는 부인하는 쑥스러운 방식일 뿐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에서 헤겔까지, 홉스에서 포이어바흐까지 이어지는 이 긴 시기 동안 철학자들은, 그들이 믿었던 것처럼 순수한 사유의 힘만으로 앞으로 나아간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실제로 그들을 앞으로 몰아간 것은 무엇보다도 자연과학과 산업의 거대하고 점점 더 빠르게 돌진하는 진보였다. 유물론자들에게서는 이것이 이미 겉으로 드러나 있었지만, 관념론 체계들도 점점 더 유물론적 내용으로 채워졌고 정신과 물질의 대립을 범신론적으로 화해시키려 했다. 그래서 마침내 헤겔의 체계는 방법과 내용으로 보아 관념론적으로 거꾸로 세워진 유물론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슈타르케가 포이어바흐의 특징을 그려 내면서 먼저 사유와 존재의 관계라는 이 근본 문제에 대한 포이어바흐의 입장을 검토하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짧은 서론에서는 이전 철학자들, 특히 칸트 이후 철학자들의 견해가 쓸데없이 철학적으로 둔중한 언어로 묘사되는데, 여기서 헤겔은 그의 저작 몇몇 대목에 너무 형식주의적으로 매달린 탓에 매우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 그 뒤에는 포이어바흐 “형이상학” 자체의 발전 과정이, 이 철학자의 관련 저작들이 나온 순서에서 드러나는 대로 자세히 서술된다. 이 서술은 부지런하고 일목요연하게 작업되었지만, 책 전체가 그렇듯이 결코 어디서나 불가피하지는 않았던 철학적 표현 방식이라는 짐을 잔뜩 지고 있다. 이 짐은 지은이가 같은 한 학파의, 또는 포이어바흐 자신의 표현 방식을 덜 따를수록, 그리고 온갖 갈래의, 특히 지금 판치고 있는, 스스로 철학이라 일컫는 사조들의 표현을 더 많이 뒤섞을수록 더욱 거슬린다.
포이어바흐의 발전 과정은 — 물론 결코 완전히 정통적이지는 않았던 — 헤겔주의자가 유물론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며, 이 발전은 어느 단계에 이르러 선행자의 관념론 체계와 전면적으로 단절하게 만든다. 마침내 그에게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다음과 같은 통찰이 밀려든다. 헤겔이 말하는 “절대 이념”의 세계 이전 존재, 세계가 있기 전의 “논리적 범주들의 선재”는 세계 밖 창조자에 대한 믿음의 환상적인 잔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우리 자신도 속해 있는 물질적이고 감각으로 지각할 수 있는 세계가 유일하게 현실적인 것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의 의식과 사유는 아무리 초감각적으로 보일지라도 물질적이고 신체적인 기관인 뇌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물질은 정신의 산물이 아니며, 정신 자체가 물질의 최고 산물일 뿐이다. 이것은 물론 순수한 유물론이다. 여기에 이르러 포이어바흐는 멈칫한다. 그는 습관이 된 철학적 편견, 곧 유물론이라는 사태가 아니라 그 이름에 대한 편견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유물론은 나에게 인간 본질과 인간 지식이라는 건물의 토대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생리학자나 좁은 의미의 자연 연구자, 이를테면 몰레스호트에게 그렇듯이, 그것도 그들의 입장과 직업에서 보아 필연적으로 그렇듯이, 건물 그 자체는 아니다. 뒤로는 나는 유물론자들에게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다.”
포이어바흐는 여기서, 물질과 정신의 관계에 대한 특정한 파악에 기초한 일반적 세계관인 유물론을, 이 세계관이 특정한 역사적 단계, 곧 18세기에 표현되었던 특수한 형태와 한데 뒤섞는다. 그뿐 아니라 그는 유물론을, 18세기 유물론이 오늘날 자연 연구자와 의사들의 머릿속에서 명맥을 잇고 있으며 1850년대에 뷔히너, 포크트, 몰레스호트가 순회 설교하고 다녔던 천박하고 통속화된 모습과도 뒤섞는다. 그러나 관념론이 일련의 발전 단계를 거쳤듯이 유물론도 그러했다. 자연과학 분야에서만 해도 획기적인 발견이 있을 때마다 유물론은 그 형태를 바꾸어야 했다. 그리고 역사도 유물론적으로 다루어지게 된 뒤로는 여기서도 새로운 발전의 길이 열린다.
지난 세기의 유물론은 주로 기계적이었다. 당시에는 모든 자연과학 가운데 역학만이, 그것도 — 천체와 지상의 — 고체 역학만이, 줄여 말해 중력의 역학만이 어느 정도 완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화학은 아직 플로지스톤설에 머문 유치한 형태로만 존재했다. 생물학은 아직 기저귀를 차고 있었다. 식물과 동물의 유기체는 대강만 연구되어 있었고 순전히 기계적인 원인으로 설명되었다. 데카르트에게 동물이 기계였듯이 18세기 유물론자들에게는 인간이 기계였다. 화학적이고 유기적인 성질을 지닌 과정들, 기계적 법칙이 거기서도 통하기는 하지만 다른 더 높은 법칙들에 밀려 뒷전으로 물러나는 과정들에 역학의 척도만을 적용한 것, 이것이 프랑스 고전 유물론의 특유한, 그러나 그 시대로서는 불가피했던 한계의 하나를 이룬다.
이 유물론의 두 번째 특유한 한계는 세계를 하나의 과정으로, 역사적으로 계속 형성되어 가는 물질로 파악하지 못한 데 있었다. 이것은 당시 자연과학의 수준과, 그것과 연관된 형이상학적인, 곧 반변증법적인 철학 방식에 상응했다. 자연이 영원한 운동 속에 있다는 것은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관념에 따르면 이 운동은 똑같이 영원히 원을 그리며 돌 뿐이어서 결코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운동은 언제나 같은 결과를 되풀이해 낳았다. 이런 관념은 당시로서는 불가피했다. 태양계의 생성에 관한 칸트의 이론은 이제 막 제기되었을 뿐이고 아직은 한낱 진기한 이야깃거리로 통했다. 지구 발전의 역사인 지질학은 아직 전혀 알려지지 않았고, 오늘날의 살아 있는 자연물들이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나아간 긴 발전 계열의 결과라는 관념은 당시로서는 아예 과학적으로 제기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자연에 대한 비역사적 파악은 불가피했다. 18세기 철학자들을 이 점에서 탓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런 파악이 헤겔에게서도 보이기 때문이다. 헤겔에게서 자연은 이념의 한낱 “외화”로서 시간 속에서 발전할 수 없고, 다만 공간 속에서 그 다양성을 펼칠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연은 자기 안에 포함된 모든 발전 단계를 동시에 나란히 늘어놓아 보여 주며, 언제나 같은 과정을 영원히 되풀이하도록 저주받는다. 그리고 헤겔은 공간 속에서는 발전하되 시간 — 모든 발전의 근본 조건 — 밖에서 발전한다는 이 불합리를 자연에 떠맡겼는데, 그것도 바로 지질학, 발생학, 식물생리학과 동물생리학, 유기화학이 형성되고, 이 새로운 과학들을 토대로 곳곳에서 훗날의 진화론에 대한 천재적인 예감이 떠오르던(이를테면 괴테와 라마르크) 바로 그때였다. 그러나 체계가 그렇게 요구했고, 그래서 방법은 체계를 위해 스스로에게 충실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비역사적 파악은 역사 분야에서도 통했다. 여기서는 중세의 잔재에 맞선 투쟁이 시야를 가렸다. 중세는 천 년에 걸친 전반적 야만 때문에 역사가 그저 중단된 시기로 여겨졌다. 중세의 커다란 진보 — 유럽 문화권의 확대, 거기서 나란히 형성된 생명력 있는 큰 민족들, 끝으로 14세기와 15세기의 엄청난 기술적 진보 — 이 모든 것을 사람들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커다란 역사적 연관에 대한 합리적 통찰은 불가능해졌고, 역사는 기껏해야 철학자들이 쓰도록 모아 놓은 사례와 예시의 모음집 노릇을 했다.
1850년대 독일에서 유물론 장사를 하던 통속화의 행상꾼들은 스승들의 이 한계를 조금도 넘어서지 못했다. 그 뒤로 이루어진 자연과학의 모든 진보는 그들에게 세계 창조주의 존재를 반박하는 새로운 논거 구실만 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론을 더 발전시키는 일은 그들의 장사와 전혀 상관이 없었다. 관념론은 밑천이 바닥나고 1848년 혁명으로 치명상을 입었지만, 유물론이 한동안 그보다 더 깊이 몰락하는 것을 보는 만족을 맛보았다. 포이어바흐가 이런 유물론에 대한 책임을 거부한 것은 단연 옳았다. 다만 그는 순회 설교사들의 교설을 유물론 일반과 혼동해서는 안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를 지적해야 한다. 첫째로, 포이어바흐가 살아 있던 때에도 자연과학은 아직 격렬한 발효 과정에 있었고, 이 과정은 최근 15년 사이에야 비로소 명료하게 정리된, 상대적인 완결에 이르렀다. 새로운 인식 재료가 지금껏 들어 보지 못한 규모로 공급되었지만, 앞다투어 쏟아지는 발견들의 이 혼돈 속에서 연관을, 그리고 그로써 질서를 세우는 일은 아주 최근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물론 포이어바흐는 세 가지 결정적 발견을 — 세포의 발견, 에너지 전화의 발견, 그리고 다윈의 이름이 붙은 진화론의 발견을 — 모두 살아서 보았다. 그러나 시골에 사는 고독한 철학자가 어떻게 과학을 충분히 따라가서, 당시 자연 연구자들 자신도 일부는 아직 반박하고 일부는 충분히 활용할 줄 몰랐던 발견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었겠는가? 여기서 잘못은 오로지 비참한 독일의 상황에 있다. 그 상황 탓에 철학 강단은 공상이나 늘어놓는 절충주의 벼룩잡이들이 차지했고, 그들 모두보다 까마득히 높이 솟아 있던 포이어바흐는 작은 마을에서 촌사람이 되어 시들어 가야 했다. 그러므로 이제 가능해진 역사적 자연관, 프랑스 유물론의 모든 일면성을 없애는 그 자연관에 포이어바흐가 다가가지 못했다 해도 그것은 포이어바흐의 탓이 아니다.
그러나 둘째로, 포이어바흐가 전적으로 옳은 점은 순전히 자연과학적인 유물론이
“인간 지식이라는 건물의 토대이기는 하지만 건물 그 자체는 아니다”라는 데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 속에서만이 아니라 인간 사회 속에서도 살고 있으며, 인간 사회도 자연 못지않게 자신의 발전사와 자신의 과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사회에 관한 과학, 곧 이른바 역사적·철학적 과학들 전체를 유물론적 토대와 일치시키고 그 위에서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일은 포이어바흐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여기서 그는 “토대”에도 불구하고 전해 내려온 관념론의 굴레에 사로잡혀 있었고, 이 점을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인정한다.
“뒤로는 나는 유물론자들에게 동의하지만, 앞으로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여기, 사회 영역에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사람, 1840년이나 1844년의 자기 입장을 넘어서지 못한 사람은 바로 포이어바흐 자신이었다. 그것도 이번에도 주로 그의 황량한 고립 때문이었다. 이 고립은 그로 하여금 — 다른 어떤 철학자보다도 사교적 교류에 맞게 타고난 그로 하여금 — 자기와 같은 그릇의 다른 사람들과 우호적으로 또 적대적으로 부딪치는 대신 자신의 고독한 머리에서 생각을 짜내도록 강요했다. 이 영역에서 그가 얼마나 관념론자로 남아 있는지는 나중에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슈타르케가 포이어바흐의 관념론을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다는 점만 지적해 둔다.
“포이어바흐는 관념론자다. 그는 인류의 진보를 믿는다.”(19쪽) — “그럼에도 전체의 토대, 하부 구조는 여전히 관념론이다. 실재론은 우리가 우리의 이상적 흐름을 따르는 동안 우리를 잘못된 길로부터 지켜 주는 보호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연민, 사랑, 진리와 정의에 대한 열정은 이상적인 힘이 아닌가?”(VIII쪽)
첫째로, 여기서 관념론이란 이상적 목표를 추구하는 것을 뜻할 뿐이다. 그런데 이상적 목표는 기껏해야 칸트의 관념론 및 그의 “정언명령”과 필연적 관련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칸트조차 자기 철학을 “선험적 관념론”이라 불렀는데, 이는 결코 거기서 인륜적 이상도 다루어지기 때문이 아니라, 슈타르케도 기억하겠지만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다. 철학적 관념론이 인륜적인, 곧 사회적인 이상에 대한 믿음을 중심으로 돈다는 미신은 철학 바깥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몇 조각 안 되는 철학적 교양을 실러의 시에서 외워 익히는 독일 속물에게서 생겨났다. 무력한 칸트의 “정언명령”을 —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고, 따라서 결코 현실적인 것에 이르지 못하므로 무력한 그것을 — 누구보다 날카롭게 비판한 사람, 실러를 통해 퍼진, 실현할 수 없는 이상에 대한 속물적 열광을 누구보다 잔인하게 조롱한 사람(이를테면 『정신현상학』을 보라)은 다름 아닌 완성된 관념론자 헤겔이었다.
그러나 둘째로, 인간을 움직이는 모든 것이 그의 머리를 거쳐 가야 한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 먹고 마시는 일조차 그렇다. 먹고 마시기는 머리를 통해 느낀 배고픔과 목마름 때문에 시작되고, 역시 머리를 통해 느낀 포만감 때문에 끝난다. 외부 세계가 인간에게 미치는 작용은 그의 머릿속에 표현되고, 감정, 생각, 충동, 의지 규정으로서, 줄여 말해 “이상적 흐름”으로서 그 안에 비치며, 이런 모습으로 “이상적 힘”이 된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도대체 “이상적 흐름을 따르고” “이상적 힘”이 자기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인정한다는 사정 — 이것이 그를 관념론자로 만든다면,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발달한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관념론자이며,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유물론자라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셋째로, 인류가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대체로 진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은 유물론과 관념론의 대립과 전혀 아무 관계가 없다. 프랑스 유물론자들은 거의 광신적인 정도로 이런 확신을 품었고, 이신론자 볼테르와 루소도 그에 못지않았으며, 그들은 이 확신을 위해 꽤 자주 가장 큰 개인적 희생을 치렀다. “진리와 정의에 대한 열정”에 — 이 상투어를 좋은 뜻으로 받아들인다면 — 평생을 바친 사람이 누구라도 있다면, 이를테면 디드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슈타르케가 이 모든 것을 관념론이라고 선언한다면, 그것은 유물론이라는 말과 두 사조 사이의 대립 전체가 여기서 그에게 모든 의미를 잃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사실은, 슈타르케가 여기서 오랜 세월에 걸친 성직자 패거리의 비방에서 전해 내려온, 유물론이라는 이름에 대한 속물의 편견에 용서할 수 없는 양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 비록 어쩌면 무의식적으로일지라도. 속물은 유물론이라는 말로 처먹기, 퍼마시기,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 교만한 삶, 돈 욕심, 인색, 탐욕, 이윤 챙기기와 주식 사기, 줄여 말해 자기 자신이 남몰래 빠져 있는 온갖 추잡한 악덕을 떠올린다. 그리고 관념론이라는 말로는 덕과 보편적 인류애와 대체로 “더 나은 세계”에 대한 믿음을 떠올린다. 그는 남들 앞에서는 이것을 뽐내지만, 자신은 기껏해야 습관이 된 “유물론적” 방탕 뒤에 반드시 따라오는 숙취나 파산을 겪으면서 자기가 즐겨 부르는 노래, “인간이란 무엇인가 — 반은 짐승, 반은 천사”를 부르는 동안에만 그것을 믿는다.
그 밖에 슈타르케는 오늘날 독일에서 철학자라는 이름으로 활개 치는 강사들의 공격과 교설에 맞서 포이어바흐를 변호하느라 많은 애를 쓴다. 독일 고전철학의 이 후산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것이 분명 중요할 것이다. 슈타르케 자신에게는 이것이 필요해 보였을 수도 있다. 우리는 독자에게 그것을 면해 주겠다.
III
포이어바흐의 진짜 관념론은 그의 종교철학과 윤리학에 이르자마자 드러난다. 그는 종교를 결코 폐지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종교를 완성하려 한다. 철학 자체가 종교 속으로 녹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의 시대들은 오직 종교적 변화로만 구별된다. 역사적 운동은 인간의 마음에 파고들 때에만 근저에까지 파고든다. 마음은 종교의 한 형식이어서 종교가 마음속에도 있어야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마음은 종교의 본질이다.”(슈타르케, 168쪽에서 인용.)
포이어바흐에 따르면 종교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감정 관계, 마음의 관계다. 이 관계는 지금까지 현실의 환상적 거울상 속에서 — 인간 속성의 환상적 거울상인 하나 또는 여러 신의 매개 속에서 — 자기의 진리를 찾았으나, 이제는 나와 너 사이의 사랑 속에서 그 진리를 매개 없이 곧바로 찾아낸다. 그리하여 포이어바흐에게서는 마침내 성애가 그의 새 종교를 실천하는 최고의 형식은 아니더라도 최고의 형식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런데 인간들 사이의 감정 관계, 특히 두 성 사이의 감정 관계는 인간이 존재한 이래로 늘 있었다. 성애는 특히 지난 800년 동안 발전을 이루고 지위를 쟁취하여, 그동안 모든 시의 의무적인 회전축이 되었다. 현존하는 실정 종교들은 성애에 대한 국가의 규제, 곧 혼인 입법에 더 높은 축성을 내려 주는 데 그쳐 왔으며, 내일 모두 사라진다 해도 사랑과 우정의 실천에는 조금도 달라지는 것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1793년부터 1798년까지 기독교가 사실상 사라졌고, 그 정도가 어찌나 심했던지 나폴레옹조차 반발과 어려움 없이는 기독교를 다시 들여올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사이 기간에 포이어바흐가 말하는 뜻의 대용물에 대한 욕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서 포이어바흐의 관념론은 다음과 같은 데 있다. 그는 서로 끌리는 마음에 바탕을 둔 인간 상호 관계들, 곧 성애, 우정, 동정, 희생 등을 그것들이 그 자체로 있는 그대로 — 그 자신에게도 과거에 속하는 어떤 특정한 종교를 돌이켜 떠올리지 않고 — 그냥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 관계들에 종교라는 이름으로 더 높은 축성을 내려 주어야 비로소 그것들이 온전한 가치를 지니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이 순수하게 인간적인 관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것들이 새롭고 참된 종교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종교의 도장이 찍혀야 비로소 온전한 것으로 통해야 한다. 종교(Religion)는 religare에서 온 말이고 본래 결합을 뜻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의 모든 결합은 하나의 종교다. 이런 어원학적 재주넘기는 관념론 철학의 마지막 궁여지책이다. 낱말이 그 현실적 용법의 역사적 발전에 따라 무엇을 뜻하는가가 아니라, 어원상 무엇을 뜻해야 하는가가 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관념론적 추억에 소중한 종교라는 낱말이 언어에서 사라지는 일만은 없도록 하려고, 성애와 성적 결합이 “종교”로 하늘 높이 떠받들어진다. 1840년대에 루이 블랑 계열의 파리 개혁파들도 꼭 이렇게 말했다. 그들 역시 종교 없는 인간이란 괴물로밖에 상상할 수 없었고, 우리에게 “그러니까 무신론이 당신들의 종교로군!(Donc, l'athéisme c'est votre religion!)”이라고 말했다. 포이어바흐가 본질적으로 유물론적인 자연관을 바탕으로 참된 종교를 세우려 한다면, 그것은 근대 화학을 참된 연금술로 파악하려는 것과 다름없다. 종교가 자기의 신 없이 존립할 수 있다면, 연금술도 자기의 현자의 돌 없이 존립할 수 있다. 덧붙여 말하면 연금술과 종교 사이에는 매우 긴밀한 끈이 있다. 현자의 돌은 신과 비슷한 속성을 많이 지니고 있으며, 코프와 베르틀로가 제시한 자료가 증명하듯이 서기 첫 두 세기의 이집트·그리스 연금술사들은 기독교 교리가 형성되는 데 한몫 거들었다.
포이어바흐의 다음 주장은 단연코 틀렸다.
“인류의 시대들은 오직 종교적 변화로만 구별된다.”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들이 종교적 변화를 동반한 것은, 지금까지 존재해 온 세 세계종교, 곧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문제 되는 한에서일 뿐이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옛 부족 종교와 민족 종교들은 포교하지 않았고, 부족과 민족의 독립이 깨지자마자 모든 저항력을 잃었다. 게르만족의 경우에는 쇠퇴하던 로마 세계제국과, 그 제국이 막 받아들인 기독교 세계종교, 곧 제국의 경제적·정치적·관념적 상태에 걸맞은 기독교 세계종교와 그저 접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소간 인위적으로 생겨난 이 세계종교들, 특히 기독교와 이슬람교에 와서야 비로소 우리는 보다 일반적인 역사적 운동들이 종교적 색채를 띠는 것을 본다. 그리고 기독교의 영역에서조차, 참으로 보편적인 의의를 지닌 혁명들에서 종교적 색채는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부르주아지의 해방 투쟁의 첫 단계들에 한정되어 있다. 또 그 색채는 포이어바흐가 생각하듯이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종교적 욕구에서가 아니라, 바로 종교와 신학 말고는 다른 어떤 이데올로기 형식도 알지 못했던 중세의 전사(前史) 전체에서 설명된다. 그러나 18세기에 부르주아지가 자기 계급 입장에 걸맞은 자기 고유의 이데올로기를 가질 만큼 충분히 강해지자, 부르주아지는 자기의 위대하고 최종적인 혁명인 프랑스 혁명을 오로지 법률적·정치적 이념에만 호소하며 수행했고, 종교에 대해서는 그것이 자기 길을 가로막는 한에서만 신경을 썼다. 그러나 낡은 종교 자리에 새 종교를 앉히겠다는 생각은 부르주아지에게 떠오르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가 그 일에서 어떻게 실패했는지는 다들 아는 바다.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에서 순수하게 인간적인 감정을 품을 가능성은, 우리가 그 안에서 움직이지 않을 수 없는 사회, 곧 계급 대립과 계급 지배에 바탕을 둔 사회 때문에 오늘날 이미 충분히 위축되어 있다. 이 감정들을 하나의 종교로 하늘 높이 떠받들어 그 가능성을 우리 스스로 더 위축시킬 까닭은 없다. 마찬가지로 역사상 커다란 계급투쟁들에 대한 이해는 흔해 빠진 역사 서술 때문에, 특히 독일에서는 이미 충분히 흐려져 있다. 이 투쟁의 역사를 교회사의 한낱 부록으로 바꾸어 그 이해를 우리 스스로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 필요까지는 없다. 벌써 여기서 우리가 오늘날 포이어바흐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왔는지가 드러난다. 이 새로운 사랑의 종교를 찬미하는 그의 “가장 아름다운 대목들”은 오늘날 도무지 읽어 줄 수가 없다.
포이어바흐가 진지하게 연구하는 유일한 종교는 기독교, 곧 일신교에 바탕을 둔 서양의 세계종교다. 그는 기독교의 신이 인간의 환상적 반영, 인간의 거울상일 뿐임을 증명한다. 그런데 이 신 자체는 오랜 추상 과정의 산물, 이전의 수많은 부족 신과 민족 신들을 응축한 정수다. 그리고 이에 상응하여 그 신이 모사하는 인간도 현실적 인간이 아니라 마찬가지로 수많은 현실적 인간의 정수, 곧 추상적 인간이며, 따라서 그 자체가 다시 하나의 사유상이다. 쪽마다 감성을, 구체적인 것 속으로, 현실 속으로 침잠하기를 설교하는 바로 그 포이어바흐가, 인간들 사이의 한낱 성적인 교류를 넘어서는 교류에 대해 말하게 되자마자 철두철미 추상적으로 된다.
이 교류는 그에게 단 하나의 측면, 곧 도덕만을 내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헤겔과 비교되는 포이어바흐의 놀라운 빈곤이 우리를 아연하게 한다. 헤겔의 윤리학 또는 인륜에 관한 학설은 법철학이며, 1. 추상법, 2. 도덕성, 3. 인륜을 포괄하고, 인륜 아래에는 다시 가족, 시민사회, 국가가 함께 묶여 있다. 형식이 관념론적인 만큼 여기서 내용은 실재론적이다. 도덕과 나란히 법, 경제, 정치의 전 영역이 여기에 함께 포함되어 있다. 포이어바흐에게서는 정반대다. 그는 형식상 실재론적이며, 인간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이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말이 없으며, 그리하여 이 인간은 늘 종교철학에서 발언하던 바로 그 추상적 인간으로 머문다. 이 인간은 어머니 배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일신교들의 신에게서 탈피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현실적인 세계, 역사적으로 생겨나고 역사적으로 규정된 세계에 살지도 않는다. 그는 물론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지만, 그 다른 사람 하나하나도 그 자신과 똑같이 추상적이다. 종교철학에서는 그래도 남자와 여자가 있었지만, 윤리학에서는 이 마지막 차이마저 사라진다. 물론 포이어바흐에게는 띄엄띄엄 다음과 같은 문장들이 나온다.
“궁전에서는 오두막에서와 다르게 생각한다.” — “굶주림과 비참 때문에 몸속에 아무 양분이 없는 곳에서는, 너의 머리와 감각과 마음속에도 도덕을 위한 아무 양분이 없다.” — “정치가 우리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 등등.
그러나 포이어바흐는 이 문장들을 가지고 전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순전한 빈말로 머문다. 슈타르케조차 정치가 포이어바흐에게 넘을 수 없는 한계였다는 것, 그리고
“사회론, 사회학은 그에게 미지의 땅(terra incognita)”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선과 악의 대립을 다루는 데서도 그는 헤겔과 비교하면 똑같이 천박해 보인다.
“인간은 본성상 선하다고 말할 때 사람들은 아주 위대한 것을 말한다고 믿는다. —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 그러나 인간은 본성상 악하다는 말로 훨씬 더 위대한 것을 말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잊고 있다.”
헤겔에게서 악은 역사 발전의 동력이 자기를 드러내는 형식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이중의 뜻이 들어 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진보는 모두 필연적으로 어떤 신성한 것에 대한 모독으로서, 낡고 죽어 가지만 관습에 의해 신성화된 상태들에 대한 반역으로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계급 대립이 출현한 이래 역사 발전의 지렛대가 되는 것은 바로 인간의 나쁜 정열, 곧 탐욕과 지배욕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예컨대 봉건제와 부르주아지의 역사가 하나의 끊임없는 증명이다. 그러나 도덕적 악의 역사적 역할을 연구하겠다는 생각은 포이어바흐에게 떠오르지 않는다. 역사는 그에게 도대체 불편하고 으스스한 영역이다. 그의 다음과 같은 말조차,
“본래 자연에서 생겨난 인간은 그저 순수한 자연적 존재였을 뿐 인간이 아니었다. 인간은 인간의, 문화의, 역사의 산물이다” —
이 말조차 그에게서는 전혀 열매를 맺지 못한 채 머문다.
그러니 포이어바흐가 도덕에 관해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지극히 빈약할 수밖에 없다. 행복 추구 충동은 인간에게 타고난 것이며, 따라서 모든 도덕의 기초를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행복 추구 충동은 이중의 교정을 받는다. 첫째는 우리 행위의 자연적 결과에 의한 교정이다. 만취 뒤에는 숙취가, 습관적인 무절제 뒤에는 병이 따른다. 둘째는 우리 행위의 사회적 결과에 의한 교정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똑같은 행복 추구 충동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들은 맞서 우리 자신의 행복 추구 충동을 방해한다.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우리가 자기 충동을 충족시키려면 한편으로 우리 행위의 결과를 올바르게 가늠할 수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같은 충동의 동등한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합리적인 자기 제한, 다른 사람들과의 교류에서는 사랑 — 언제나 또다시 사랑! — 이것이 포이어바흐 도덕의 기본 규칙이며, 다른 모든 규칙은 여기서 도출된다. 포이어바흐의 가장 재기 넘치는 논술도, 슈타르케의 가장 열렬한 찬사도 이 몇 마디 명제의 빈약함과 진부함을 가릴 수는 없다.
행복 추구 충동은 인간이 자기 자신에게 몰두함으로써 충족되는 일이 아주 예외적일 뿐이며, 그렇게 충족된다 해도 결코 자기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이롭지 않다. 오히려 그 충동은 바깥 세계와 관계할 것을, 충족의 수단을, 곧 음식, 다른 성의 개인, 책, 담소, 토론, 활동, 소비하고 가공할 대상을 요구한다. 포이어바흐의 도덕은 이 충족의 수단과 대상이 모든 사람에게 그냥 주어져 있다고 전제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없는 좋은 교훈만 줄 뿐이며, 따라서 이 수단을 갖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화약 한 방어치의 값어치도 없다. 그리고 포이어바흐 자신이 이를 무미건조한 말로 밝힌다.
“궁전에서는 오두막에서와 다르게 생각한다.” “굶주림과 비참 때문에 몸속에 아무 양분이 없는 곳에서는, 너의 머리와 감각과 마음속에도 도덕을 위한 아무 양분이 없다.”
다른 사람들의 행복 추구 충동이 지니는 동등한 권리에 관해서는 사정이 좀 나은가? 포이어바흐는 이 요구를 모든 시대와 모든 상황에 통용되는 것으로서 절대적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부터 통용되는가? 고대에 노예와 주인 사이에서, 중세에 농노와 남작 사이에서 행복 추구 충동의 동등한 권리가 문제 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억압받는 계급의 행복 추구 충동은 가차 없이, 그리고 “법에 따라” 지배계급의 행복 추구 충동에 희생되지 않았던가? — 그렇다, 그것은 비도덕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동등한 권리가 인정되어 있다. — 말로는 인정되어 있다. 부르주아지가 봉건 세력과 투쟁하고 자본주의적 생산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모든 신분적 특권, 곧 인격적 특권을 폐지하고, 먼저 사법상의, 그다음 점차 국법상의 법률적 인격 평등을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된 이래로, 또 그렇게 된 까닭에 말이다. 그러나 행복 추구 충동은 극히 일부만 관념적 권리를 먹고 살 뿐, 그 대부분은 물질적 수단을 먹고 산다. 그런데 자본주의적 생산은 동등한 권리를 지닌 사람들의 대다수에게 근근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만 돌아가도록 배려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대다수의 행복 추구 충동이 지니는 동등한 권리를 노예제나 농노제가 존중했던 것보다 더 낫게 존중하는 일이 설령 있다 해도 거의 없다. 그렇다면 행복의 정신적 수단, 곧 교육 수단에 관해서는 사정이 더 나은가? “사도바의 학교 교사”조차 신화적 인물이 아닌가?
그뿐이 아니다. 포이어바흐의 도덕 이론에 따르면 증권거래소는 인륜의 최고 신전이다 — 다만 늘 올바르게 투기한다는 전제 아래서. 나의 행복 추구 충동이 나를 거래소로 이끌고, 내가 거기서 내 행위의 결과를 아주 올바르게 따져 그 결과가 내게 즐거움만 가져다주고 아무 손해도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곧 내가 늘 돈을 번다면, 포이어바흐의 계율은 이행된 것이다. 또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똑같은 행복 추구 충동을 침해하지도 않는다. 그 다른 사람도 나와 똑같이 자발적으로 거래소에 갔고, 나와 투기 거래를 맺을 때 내가 내 행복 추구 충동을 따랐던 것과 똑같이 자기의 행복 추구 충동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돈을 잃는다면, 바로 그 사실로써 그의 행위는 계산을 잘못했으므로 비인륜적인 것으로 증명되며, 나는 그에게 마땅한 벌을 집행함으로써 근대의 라다만티스로서 뽐내며 가슴을 펼 수조차 있다. 거래소에는 사랑도 군림한다. 사랑이 한낱 감상적인 빈말이 아닌 한에서 말이다. 저마다 상대방에게서 자기 행복 추구 충동의 충족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사랑이 해내야 할 일이며 사랑이 실천적으로 실현되는 방식이 아닌가. 그리고 내가 거기서 내 거래의 결과를 올바르게 예견하고, 그리하여 성공적으로 노름을 한다면, 나는 포이어바흐 도덕의 가장 엄격한 요구들을 모두 이행하고 덤으로 부자까지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포이어바흐 자신이 그것을 거의 원하지도 예감하지도 않았겠지만, 포이어바흐의 도덕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 맞추어 재단되어 있다.
그러나 사랑이 있지 않은가! — 그렇다, 사랑은 포이어바흐에게서 언제 어디서나 실생활의 모든 어려움을 넘어서게 도와준다는 마법의 신이다. 그것도 정반대로 대립하는 이해관계를 지닌 계급들로 쪼개진 사회에서 말이다. 이로써 철학에서는 그 혁명적 성격의 마지막 찌꺼기마저 사라지고, 남는 것은 해묵은 노래뿐이다. 서로 사랑하라, 성별과 신분의 차이 없이 서로 얼싸안아라 — 너도나도 화해에 취한 몽롱함이여!
요컨대 이렇다. 포이어바흐의 도덕 이론도 그 모든 선배 이론들과 똑같은 처지에 놓인다. 그것은 모든 시대, 모든 민족, 모든 상황에 맞추어 재단되어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결코 어디에서도 적용될 수 없고, 현실 세계 앞에서는 칸트의 정언명령과 마찬가지로 무력하다. 현실에서는 모든 계급이, 심지어 모든 직업이 저마다 자기 고유의 도덕을 지니며, 벌받지 않고 그럴 수 있는 곳에서는 그 도덕마저 깨뜨린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야 할 사랑은 전쟁, 분쟁, 소송, 집안싸움, 이혼, 그리고 한쪽에 의한 다른 쪽의 최대한의 착취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포이어바흐가 준 강력한 충격이 어떻게 그 자신에게는 그토록 열매 없이 끝날 수 있었는가? 간단하다. 포이어바흐는 자신이 죽도록 미워하는 추상의 왕국에서 살아 있는 현실로 나아가는 길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연과 인간에 억지로 매달린다. 그러나 그에게서 자연과 인간은 한낱 낱말로 머문다. 현실적 자연에 대해서도, 현실적 인간에 대해서도 그는 우리에게 무엇 하나 확정적인 것을 말해 주지 못한다. 그런데 포이어바흐의 추상적 인간에서 현실적이고 살아 있는 인간으로 나아가려면, 인간을 역사 속에서 행동하는 존재로 고찰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포이어바흐는 이것을 거부했다. 그 때문에 그가 이해하지 못한 1848년은 그에게 현실 세계와의 최종적 결별, 고독 속으로의 은둔을 뜻했을 뿐이다. 여기서도 그 책임은 주로 독일의 사정에 있으며, 이 사정이 그를 비참하게 시들어 가게 만들었다.
그러나 포이어바흐가 내딛지 않은 걸음은 그래도 내디뎌져야 했다. 포이어바흐의 새 종교의 핵심을 이루던 추상적 인간 숭배는 현실적 인간과 그 역사적 발전에 관한 과학으로 대체되어야 했다. 포이어바흐의 입장을 포이어바흐 너머로 더 발전시키는 이 작업은 1845년 마르크스가 『신성가족』에서 열었다.
IV
슈트라우스, 바우어, 슈티르너, 포이어바흐, 이들은 철학의 지반을 떠나지 않는 한에서 헤겔 철학의 끝갈래들이었다. 슈트라우스는 『예수의 생애』와 『교의학』 이후로는 르낭 식(à la Renan)의 철학적·교회사적 문예물만 썼을 뿐이다. 바우어는 기독교 성립사 분야에서만 무언가를 이루었지만, 거기서는 중요한 업적도 남겼다. 슈티르너는 바쿠닌이 그를 프루동과 뒤섞고 이 뒤섞음에 “무정부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뒤에도 여전히 진기한 구경거리로 남았다. 철학자로서 중요했던 것은 포이어바흐 한 사람뿐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철학, 즉 모든 개별 과학 위에 떠 있으면서 그것들을 총괄한다는 과학의 과학은 넘을 수 없는 장벽, 손댈 수 없는 성역으로 남았을 뿐만 아니라, 그는 철학자로서도 중도에 멈춰 서서 아래로는 유물론자, 위로는 관념론자였다. 그는 헤겔과 비판적으로 대결하여 결판을 내지 못하고, 쓸모없다며 그를 그냥 옆으로 내던졌다. 그러면서 그 자신은 헤겔 체계의 백과사전적 풍부함에 맞서 내놓은 적극적인 것이라고는 과장된 사랑의 종교와 빈약하고 무력한 도덕밖에 없었다.
그러나 헤겔 학파의 해체에서는 또 하나의 다른 방향이 나왔다. 실제로 열매를 맺은 유일한 방향이었고, 이 방향은 본질적으로 마르크스라는 이름과 결부되어 있다[3].
헤겔 철학과의 결별은 여기서도 유물론적 입장으로 돌아감으로써 이루어졌다. 다시 말해, 현실 세계 — 자연과 역사 — 를, 미리 품은 관념론적 괴벽 없이 다가가는 누구에게나 그 세계가 스스로 드러나는 그대로 파악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환상적인 연관이 아니라 그 자체의 연관 속에서 파악된 사실들과 조화될 수 없는 관념론적 괴벽은 하나도 남김없이 가차 없이 희생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유물론이란 그 이상 아무것도 뜻하지 않는다. 다만 여기서 처음으로 유물론적 세계관을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 문제가 되는 모든 지식 분야에서 — 적어도 기본 줄기에서는 — 그것을 일관되게 관철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헤겔은 그냥 제쳐 두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앞에서 설명한 그의 혁명적 측면, 즉 변증법적 방법에 이어 갔다. 그러나 이 방법은 헤겔의 형태로는 쓸모가 없었다. 헤겔에게서 변증법은 개념의 자기 발전이다. 절대 개념은 영원으로부터 —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 존재할 뿐만 아니라, 현존하는 세계 전체의 본래적이고 살아 있는 영혼이기도 하다. 절대 개념은 『논리학』에서 상세히 다루어지고 모두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온갖 예비 단계를 거쳐 자기 자신에게로 발전한다. 그다음 그것은 자연으로 변하면서 자기를 “외화”하는데, 자연 속에서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 없이 자연 필연성으로 변장한 채 새로운 발전을 겪고 마침내 인간에게서 다시 자기의식에 이른다. 이 자기의식은 이제 역사 속에서 다시 조야한 상태를 벗어나 자기를 다듬어 가고, 마침내 헤겔 철학에서 절대 개념이 다시 완전히 자기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러므로 헤겔에게서 자연과 역사에 나타나는 변증법적 발전, 즉 온갖 갈지자 운동과 일시적 후퇴를 뚫고 관철되는, 낮은 것에서 높은 것으로의 전진의 인과적 연관은, 영원으로부터, 어디서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생각하는 모든 인간 두뇌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개념의 자기 운동의 복사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데올로기적 전도를 없애야 했다. 우리는 현실의 사물을 절대 개념의 이런저런 단계의 모사로 파악하는 대신, 우리 머릿속의 개념을 다시 유물론적으로 현실 사물의 모사로 파악했다. 이로써 변증법은 외부 세계와 인간 사유 양쪽의 운동의 일반 법칙에 관한 과학으로 환원되었다. 이 두 계열의 법칙은 사태로 보면 동일하지만, 표현으로 보면 다르다. 인간의 머리는 그 법칙들을 의식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반면, 자연에서는, 그리고 지금까지는 인간의 역사에서도 대부분, 그 법칙들이 끝없이 이어지는 겉보기의 우연들 한가운데서 외적 필연성의 형태로 무의식적으로 관철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로써 개념의 변증법 자체는 현실 세계의 변증법적 운동의 의식적 반영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이로써 헤겔의 변증법은 뒤집혔다. 아니 오히려, 그때까지 머리로 서 있던 것이 다시 두 발로 서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해 전부터 우리의 가장 좋은 작업 수단이자 가장 날카로운 무기였던 이 유물론적 변증법은, 신기하게도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와도 무관하게, 심지어 헤겔과도 무관하게 한 독일 노동자 요제프 디츠겐에 의해서도 다시 발견되었다[4].
그런데 이로써 헤겔 철학의 혁명적 측면이 다시 받아들여지는 동시에, 헤겔에게서 그것의 일관된 관철을 가로막았던 관념론적 겉치레에서 해방되었다. 세계는 완성된 사물들의 복합체가 아니라 과정들의 복합체로 파악해야 한다는 위대한 근본 사상, 그 안에서는 겉보기에 안정된 사물들도, 우리 머릿속에 있는 그 사유 모사인 개념들 못지않게 생성과 소멸의 끊임없는 변화를 겪으며, 이 변화 속에서는 겉보기의 온갖 우연에도 불구하고, 또 온갖 일시적 역행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진하는 발전이 관철된다는 사상 — 이 위대한 근본 사상은 특히 헤겔 이래로 일상적 의식 속에 깊이 스며들어, 이처럼 일반적인 형태로는 이제 반박을 받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상을 말로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현실에서 연구 대상이 되는 모든 분야에 하나하나 관철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런데 연구할 때 늘 이 관점에서 출발한다면, 최종 해결과 영원한 진리를 요구하는 일은 영영 사라진다. 사람들은 얻어진 모든 인식이 필연적으로 제한되어 있다는 것, 그 인식이 얻어진 상황에 제약되어 있다는 것을 늘 의식한다. 그러나 또한 아직도 늘 널리 통용되는 낡은 형이상학이 넘어설 수 없는 것으로 여기는 대립들, 즉 참과 거짓, 좋음과 나쁨, 동일과 차이, 필연과 우연의 대립에 더는 위압당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안다. 이 대립들은 상대적 타당성만 가진다는 것, 지금 참으로 인식된 것은 지금 거짓으로 인식된 것이 예전에 참으로 통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참된 측면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숨겨져 있다가 나중에 드러나는 거짓된 측면을 가진다는 것, 필연적이라고 주장되는 것은 순전히 우연들로 이루어져 있고 우연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 뒤에 필연성이 숨어 있는 형식이라는 것 — 등등을.
헤겔이 “형이상학적” 방법이라고 부르는 낡은 연구 방법과 사유 방법은 주로 사물을 주어진 고정된 존재물로 연구하는 데 몰두했고, 그 잔재는 지금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하게 유령처럼 떠돌고 있지만, 그 시대에는 커다란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과정을 연구할 수 있으려면 먼저 사물을 연구해야 했다. 어떤 사물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지각할 수 있으려면 먼저 그 사물이 무엇인지 알아야 했다. 그리고 자연과학에서도 그러했다. 사물을 완성된 것으로 받아들인 낡은 형이상학은 죽은 사물과 살아 있는 사물을 완성된 것으로 연구한 자연과학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이 연구가 결정적 진보, 즉 자연 자체 속에서 이 사물들에 일어나는 변화를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쪽으로의 이행이 가능해질 만큼 진척되었을 때, 철학 분야에서도 낡은 형이상학의 임종 시각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그리고 실제로 자연과학이 지난 세기 말까지 주로 수집하는 과학, 완성된 사물에 관한 과학이었다면, 우리 세기에는 본질적으로 정리하는 과학, 과정에 관한 과학, 이 사물들의 기원과 발전에 관한 과학, 그리고 이 자연 과정들을 하나의 커다란 전체로 묶어 주는 연관에 관한 과학이다. 식물 유기체와 동물 유기체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을 연구하는 생리학, 개별 유기체가 배아에서 성숙에 이르기까지 발전하는 것을 다루는 발생학, 지표면이 점차 형성되어 온 과정을 추적하는 지질학, 이것들은 모두 우리 세기의 자식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 가지 큰 발견이 자연 과정들의 연관에 관한 우리의 지식을 거대한 걸음으로 전진시켰다. 첫째는 세포의 발견이다. 세포는 그것이 증식하고 분화함으로써 식물과 동물의 몸 전체가 발전해 나오는 단위다. 이 발견으로 모든 고등 유기체의 발전과 성장이 단 하나의 일반 법칙에 따라 진행된다는 것이 인식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포의 변화 능력에서 유기체가 자기 종을 바꾸고 그리하여 개체를 넘어서는 발전을 겪을 수 있는 길이 제시되었다. — 둘째는 에너지 전화다. 이것은 우선 무기적 자연에서 작용하는 이른바 힘들, 즉 역학적 힘과 그 보완물인 이른바 위치 에너지, 열, 복사(빛 또는 복사열), 전기, 자기, 화학 에너지가 모두 보편적 운동의 서로 다른 현상 형태이며, 이것들이 일정한 양적 비율에 따라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간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했다. 그래서 하나가 일정한 양만큼 사라지면 다른 하나가 일정한 양만큼 다시 나타나고, 자연의 운동 전체는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전화하는 이 끊임없는 과정으로 환원된다. — 끝으로, 다윈이 처음으로 연관 있게 전개한 증명, 즉 오늘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유기적 자연 산물들 전체가 인간을 포함하여 원래 단세포였던 소수의 배아에서 출발한 긴 발전 과정의 산물이며, 이 배아들은 다시 화학적 경로로 생겨난 원형질 또는 단백질에서 나왔다는 증명이다.
이 세 가지 큰 발견과 자연과학의 그 밖의 엄청난 진보 덕분에, 우리는 이제 자연 속 과정들 사이의 연관을 개별 분야 안에서뿐만 아니라 개별 분야들 상호 간에도 대체로 증명할 수 있게 되었고, 그리하여 경험적 자연과학 자체가 제공한 사실들을 통해 자연 연관의 일목요연한 상을 거의 체계적인 형태로 그려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전체상을 제공하는 것은 예전에는 이른바 자연철학의 과제였다. 자연철학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현실의 연관을 관념적이고 환상적인 연관으로 대체하고, 빠진 사실을 사유의 상으로 보충하고, 현실의 빈틈을 순전한 상상으로 메움으로써만 이 일을 할 수 있었다. 자연철학은 이런 방식으로 많은 천재적인 사상을 품었고 나중의 많은 발견을 예감했지만, 달리 될 수 없었듯이 상당한 헛소리도 쏟아 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충분한 “자연의 체계”에 이르려면 자연 연구의 성과를 변증법적으로, 즉 그 성과 자체의 연관이라는 의미에서 파악하기만 하면 되는 지금, 이 연관의 변증법적 성격이 형이상학적으로 훈련된 자연 연구자들의 머리에조차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밀고 들어오는 지금, 오늘날 자연철학은 최종적으로 제거되었다. 그것을 되살리려는 시도는 모두 쓸데없는 일일 뿐만 아니라 후퇴일 것이다.
그런데 이로써 역시 역사적 발전 과정으로 인식된 자연에 해당하는 것은, 사회의 역사와 그 모든 분야에도, 그리고 인간의 (그리고 신의) 일을 다루는 모든 과학 전체에도 해당한다. 여기서도 역사철학, 법철학, 종교철학 등은 사건들 속에서 증명해야 할 현실적 연관 대신 철학자의 머릿속에서 만들어 낸 연관을 갖다 놓는 데서, 역사를 전체로서나 그 개별 부분으로서나 이념의 점진적 실현으로, 그것도 물론 언제나 철학자 자신이 좋아하는 이념의 실현으로 파악하는 데서 성립했다. 이에 따르면 역사는 무의식적이지만 필연적으로, 처음부터 확정되어 있는 어떤 관념적 목표를 향해, 이를테면 헤겔에게서는 그의 절대 이념의 실현을 향해 나아갔고, 이 절대 이념을 향한 흔들림 없는 방향이 역사적 사건들의 내적 연관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아직 알려지지 않은 현실적 연관의 자리에 새로운 — 무의식적이거나 점차 의식에 이르는 — 신비로운 섭리를 갖다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도 자연 분야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이렇게 만들어 낸 인위적 연관을 현실적 연관을 찾아냄으로써 없애야 했다. 이 과제는 결국 인간 사회의 역사에서 지배적인 것으로 관철되는 일반적 운동 법칙을 발견하는 일로 귀착된다.
그런데 사회의 발전사는 한 가지 점에서 자연의 발전사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자연에서는 — 인간이 자연에 미치는 반작용을 도외시하는 한 — 서로에게 작용하는 것은 모두 의식 없는 맹목적 작인들이며, 그것들의 맞물림 속에서 일반 법칙이 효력을 발휘한다. 일어나는 모든 일 가운데 — 표면에 보이는 수많은 겉보기의 우연들이든, 이 우연들 속의 법칙성을 입증하는 최종 결과들이든 — 의욕된 의식적 목적으로서 일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에 반해 사회의 역사에서 행위하는 자들은 모두 의식을 지니고 숙고나 열정에 따라 행동하며 일정한 목적을 향해 움직이는 인간이다. 의식적 의도 없이, 의욕된 목표 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이 차이는 역사 연구에, 특히 개별 시대와 사건의 연구에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역사의 진행이 내적인 일반 법칙에 지배된다는 사실을 조금도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여기서도 표면에서는, 모든 개인이 의식적으로 의욕한 목표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겉보기에는 우연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의욕된 것이 일어나는 일은 드물다. 대부분의 경우 수많은 의욕된 목적들이 서로 엇갈리고 충돌하거나, 이 목적들 자체가 처음부터 실현될 수 없거나, 수단이 불충분하다. 그리하여 역사 영역에서 수많은 개별 의지와 개별 행위의 충돌은 의식 없는 자연에서 지배하는 상태와 아주 비슷한 상태를 낳는다. 행위의 목적은 의욕된 것이지만, 행위에서 실제로 따라 나오는 결과는 의욕된 것이 아니다. 또는 그 결과가 처음에는 의욕된 목적에 들어맞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국에는 의욕된 것과 전혀 다른 귀결을 가져온다. 그리하여 역사적 사건들 역시 대체로 우연에 지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표면에서 우연이 장난을 치는 곳에서는, 그 우연은 언제나 내적이고 숨겨진 법칙에 지배되며, 문제는 오직 이 법칙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역사를, 그 결과가 어떻게 되든, 저마다 자기 자신의 의식적으로 의욕한 목적을 추구함으로써 만들어 가며,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는 이 많은 의지들과 그것들이 외부 세계에 미치는 다양한 작용의 합력이 바로 역사다. 그러므로 많은 개인이 무엇을 의욕하는가도 문제가 된다. 의지는 열정이나 숙고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다시 열정이나 숙고를 직접 규정하는 지렛대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것이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외적 대상일 수도 있고, 부분적으로는 관념적 동기, 즉 명예욕, “진리와 정의에 대한 열광”, 개인적 증오, 또는 순전히 개인적인 온갖 괴벽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는, 역사 속에서 활동하는 많은 개별 의지가 대개 의욕된 것과 전혀 다른 — 흔히는 정반대의 — 결과를 낳으며, 따라서 그것들의 동기 역시 전체 결과에는 부차적인 의미밖에 없다는 것을 보았다. 다른 한편으로, 더 나아가 이 동기들 뒤에는 다시 어떤 추동하는 힘이 있는가, 행위하는 자들의 머릿속에서 그런 동기로 바뀌는 역사적 원인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낡은 유물론은 이 물음을 한 번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역사관은, 그런 것이 있기라도 하다면, 본질적으로 실용적(pragmatisch)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행위의 동기에 따라 판단하고, 역사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을 고결한 자와 비천한 자로 나누며, 그러고 나서 대개는 고결한 자가 속아 넘어간 쪽이고 비천한 자가 승리한 쪽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여기서 낡은 유물론에게는 역사 연구에서 교훈이 될 만한 것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오고, 우리에게는 역사 영역에서 낡은 유물론이 자기 자신에게 충실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기서 작용하는 관념적 동력을 최종 원인으로 받아들일 뿐,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 이 동력들의 동력이 무엇인지를 탐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비일관성은 관념적 동력을 인정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동력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움직이는 원인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에 반해 역사철학은, 특히 헤겔이 대표하는 역사철학은, 역사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의 표면에 내세운 동기도, 실제로 작용하는 동기도 결코 역사적 사건의 최종 원인이 아니며, 이 동기들 뒤에는 탐구해야 할 다른 움직이는 힘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역사철학은 이 힘들을 역사 자체 속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바깥에서, 철학적 이데올로기에서 역사 속으로 들여온다. 이를테면 헤겔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그 자체의 내적 연관에서 설명하는 대신, 그것이 “아름다운 개체성의 형상들”을 다듬어 낸 것, “예술 작품” 그 자체의 실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냥 단언한다. 그는 이 기회에 고대 그리스인에 관해 아름답고 깊이 있는 말을 많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오늘날 한낱 상투어에 불과한 그런 설명에 더는 넘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역사적으로 행위하는 인간의 동기 뒤에 —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것도 매우 흔히는 무의식적으로 — 자리 잡고 있으면서 역사의 본래적인 최종 동력을 이루는 추동하는 힘들을 탐구하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가 되는 것은 개별 인간의 동기, 그것이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런 동기라기보다는, 거대한 대중, 민족 전체, 그리고 각 민족 안에서는 다시 인민 계급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동기다. 그것도 순간적으로 일시에 솟구쳤다가 금세 타 버리는 짚불처럼이 아니라, 커다란 역사적 변화로 귀결되는 지속적 행동으로 움직이게 하는 동기다. 여기서 행위하는 대중과 그 지도자들 — 이른바 위인들 — 의 머릿속에 의식적 동기로서, 분명하게 또는 흐릿하게, 직접적으로 또는 이데올로기적인, 심지어 천상화된 형태로 반영되는 추동하는 원인들을 규명하는 것 — 이것이 역사 전체를 대체로 지배하고 또 개별 시기와 개별 나라에서 역사를 지배하는 법칙의 흔적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인간을 움직이는 모든 것은 인간의 머리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이 머릿속에서 어떤 모습을 취하는가는 상황에 크게 좌우된다. 노동자들이 1848년 라인 지방에서처럼 기계를 그냥 때려 부수지 않게 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자본주의적 기계제 경영과 화해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이전의 모든 시기에는 역사의 이 추동하는 원인들을 탐구하는 것이 — 그 원인들과 그 결과들 사이의 연관이 뒤얽히고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 거의 불가능했던 반면, 우리의 현 시기는 이 연관을 수수께끼가 풀릴 수 있을 만큼 단순하게 만들었다. 대공업이 자리 잡은 이래로, 그러니까 적어도 1815년의 유럽 평화 이래로, 영국에서는 그곳의 정치 투쟁 전체가 두 계급, 즉 토지를 소유한 귀족(landed aristocracy)과 부르주아지(middle class)의 지배 요구를 둘러싸고 돌아간다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프랑스에서는 부르봉 왕가의 복귀와 함께 같은 사실이 의식되었다. 티에리에서 기조, 미녜, 티에르에 이르는 왕정복고기의 역사가들은 이 사실을 중세 이래 프랑스 역사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곳곳에서 언명한다. 그리고 1830년 이래로 두 나라 모두에서 노동자계급,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를 둘러싼 제3의 투사로 인정되었다. 상황이 이처럼 단순해졌으므로, 이 세 대계급의 투쟁과 그들의 이해관계의 충돌 속에서 근대사의 추동력을 보지 않으려면 — 적어도 가장 앞선 이 두 나라에서는 — 일부러 눈을 감아야 했다.
그러면 이 계급들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언뜻 보아 예전에는 봉건적이었던 대토지 소유에 대해서는 아직 — 적어도 처음에는 — 정치적 원인에서, 폭력적 점탈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여기서는 두 대계급이 순전히 경제적 원인에서 기원하고 발전했다는 것이 분명하고 손에 잡힐 듯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토지 소유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투쟁에서도,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투쟁에 못지않게, 무엇보다도 경제적 이해관계가 문제였고 정치권력은 그것을 관철하기 위한 단순한 수단 노릇을 할 뿐이었다는 것도 그만큼 분명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는 둘 다 경제적 관계의 변화, 더 정확히 말하면 생산양식의 변화의 결과로 생겨났다. 처음에는 길드 수공업에서 매뉴팩처로, 다음에는 매뉴팩처에서 증기와 기계를 쓰는 대공업으로의 이행이 이 두 계급을 발전시켰다. 어떤 단계에 이르자, 부르주아지가 움직이게 한 새로운 생산력 — 처음에는 분업과, 많은 부분 노동자를 하나의 전체 매뉴팩처 안에 결합한 것 — 과 이 생산력이 발전시킨 교환 조건 및 교환 욕구가, 기존의, 역사적으로 전해 내려와 법률로 신성시된 생산 질서, 즉 봉건적 사회 체제의 길드 특권과 그 밖의 수많은 인적·지역적 특권(이것들은 특권을 갖지 못한 신분들에게는 그만큼의 족쇄였다)과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부르주아지가 대표하는 생산력은 봉건 토지 소유자와 길드 장인이 대표하는 생산 질서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결과는 알려진 대로다. 봉건적 족쇄는 깨졌다. 영국에서는 점차적으로, 프랑스에서는 단번에. 독일에서는 아직 그 일이 끝나지 않았다. 그러나 매뉴팩처가 일정한 발전 단계에서 봉건적 생산 질서와 충돌했듯이, 지금은 이미 대공업이 그 자리에 들어선 부르주아적 생산 질서와 충돌하게 되었다. 이 질서에,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좁은 한계에 묶인 대공업은 한편으로는 거대한 인민 대중 전체의 프롤레타리아화를 끊임없이 심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팔리지 않는 생산물을 점점 더 많이 쌓아 낸다. 과잉생산과 대중의 빈곤, 서로가 서로의 원인인 이것이 대공업이 귀결되는 불합리한 모순이며, 이 모순은 생산양식의 변경을 통한 생산력의 해방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그러므로 적어도 근대사에서는 모든 정치투쟁이 계급투쟁이라는 것, 그리고 계급들의 모든 해방 투쟁은 필연적으로 정치적 형식을 띠면서도 — 모든 계급투쟁은 정치투쟁이기 때문이다 — 결국은 경제적 해방을 둘러싸고 벌어진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므로 적어도 여기서는 국가, 곧 정치 질서가 종속적인 것이고, 시민사회, 곧 경제적 관계들의 영역이 결정적인 요소다. 헤겔도 신봉한 예로부터 내려온 견해는 국가를 규정하는 요소로, 시민사회를 국가에 의해 규정되는 요소로 보았다. 겉모습도 이에 부합한다. 개별 인간의 경우 그의 행동의 모든 동력이 그를 행동하게 하려면 그의 머리를 거쳐 그의 의지의 동기로 바뀌어야 하듯이, 시민사회의 모든 욕구도 — 어느 계급이 지금 지배하든 상관없이 — 법률의 형식으로 일반적 효력을 얻으려면 국가의지를 거쳐야 한다. 이것은 사태의 형식적 측면이고 자명한 것이다. 문제는 다만 이 순전히 형식적인 의지가 — 개인의 의지든 국가의 의지든 — 어떤 내용을 갖는지, 이 내용은 어디서 오는지, 왜 하필 이것이 의욕되고 다른 것은 의욕되지 않는지다. 그리고 이것을 물어보면, 근대사에서 국가의지는 대체로 시민사회의 변하는 욕구에 의해, 이 계급 또는 저 계급의 우세에 의해, 최종 심급에서는 생산력과 교환관계의 발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거대한 생산수단과 교통수단을 갖춘 우리 근대에조차 국가가 자립적 발전을 하는 자립적 영역이 아니고 국가의 존립과 발전이 최종 심급에서 사회의 경제적 생활 조건으로부터 설명되어야 한다면, 이것은 인간의 물질적 생활의 생산이 아직 이처럼 풍부한 보조 수단으로 영위되지 못했던, 그래서 이 생산의 필연성이 인간들에게 훨씬 더 큰 지배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었던 모든 이전 시대에는 더욱더 들어맞을 것이다. 대공업과 철도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국가가 대체로 생산을 지배하는 계급의 경제적 욕구를 총괄적 형식으로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면, 한 세대의 인간들이 자기 생애 전체의 훨씬 더 큰 부분을 물질적 욕구의 충족에 바쳐야 했고 따라서 오늘날의 우리보다 그 욕구에 훨씬 더 많이 의존했던 시대에는 국가가 더욱더 그러했을 수밖에 없다. 이전 시대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그 연구가 이 측면에 진지하게 파고들기만 하면, 이것이 아주 풍부하게 확인된다. 그러나 여기서 이것을 논할 수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국가와 국법이 경제적 관계에 의해 규정된다면, 사법(私法)도 당연히 그러하다. 사법은 본질적으로 주어진 상황에서 정상적인, 개인들 사이에 현존하는 경제적 관계를 재가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루어지는 형식은 매우 다양할 수 있다. 영국에서 국민적 발전 전체와 조화를 이루며 일어났듯이, 낡은 봉건법의 형식을 대부분 그대로 두고 거기에 부르주아적 내용을 담을 수도 있고, 심지어 봉건적 명칭에 곧바로 부르주아적 의미를 슬쩍 갖다 붙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한 대륙 서유럽에서처럼, 상품을 생산하는 사회의 최초의 세계법인 로마법을, 단순한 상품 소유자들의 모든 본질적인 법률 관계(매수인과 매도인, 채권자와 채무자, 계약, 채권관계 등)를 더할 나위 없이 날카롭게 다듬어 낸 그 로마법을 바탕에 놓을 수도 있다. 이때 아직 소부르주아적이고 반(半)봉건적인 사회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 이 로마법을 그저 재판 실무를 통해 이 사회의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도 있고(보통법), 아니면 자칭 계몽되었다는 도덕군자연한 법률가들의 도움을 받아 이 사회 상태에 걸맞은 별도의 법전으로 가공할 수도 있다. 그런 사정에서 이 법전은 법률적으로도 조악할 것이다(프로이센 일반란트법). 그러나 또한 위대한 부르주아 혁명 뒤에는 바로 이 로마법을 토대로 프랑스 민법전(Code civil)처럼 고전적인 부르주아 사회 법전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러므로 민법 규정들이 사회의 경제적 생활 조건을 법의 형식으로 표현할 뿐이라면, 이것은 상황에 따라 잘 이루어질 수도, 잘못 이루어질 수도 있다.
국가에서 우리는 인간을 지배하는 최초의 이데올로기적 힘을 본다. 사회는 내부와 외부의 공격에 맞서 자신의 공동 이익을 지키기 위한 기관을 만들어 낸다. 이 기관이 국가권력이다. 이 기관은 생겨나자마자 사회에 대해 자립화한다. 그것도 그것이 특정 계급의 기관이 되어 이 계급의 지배를 직접 관철하면 할수록 더욱 그렇다. 피억압 계급의 지배계급에 대한 투쟁은 필연적으로 정치투쟁, 곧 우선은 이 계급의 정치적 지배에 맞선 투쟁이 된다. 이 정치투쟁과 그 경제적 토대 사이의 연관에 대한 의식은 흐릿해지고,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투쟁 당사자들에게서 완전히 그렇게 되지는 않는 경우에도, 역사가들에게서는 거의 언제나 그렇게 된다. 로마 공화정 내부의 투쟁에 관한 고대의 사료 가운데 결국 무엇이 문제였는지 — 곧 토지 소유였다는 것을 — 분명하고 똑똑하게 말해 주는 것은 아피아노스뿐이다.
그런데 국가는 일단 사회에 대해 자립적인 힘이 되고 나면 곧 또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낸다. 곧 직업 정치가들, 국법 이론가들, 사법 법률가들에게서는 경제적 사실과의 연관이 더욱더 사라진다. 경제적 사실은 개개의 경우마다 법률의 형식으로 재가받으려면 법률적 동기의 형식을 취해야 하고, 그때 이미 효력을 갖고 있는 법 체계 전체도 당연히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이제 법률적 형식이 전부이고 경제적 내용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된다. 국법과 사법은 자신의 독자적인 역사적 발전을 지니는 자립적 영역으로, 그 자체로 체계적 서술이 가능하고 모든 내적 모순을 철저히 뿌리 뽑음으로써 그런 서술을 필요로 하는 영역으로 다루어진다.
더 높은, 즉 물질적·경제적 토대에서 더 멀어지는 이데올로기들은 철학과 종교의 형식을 취한다. 여기서는 표상들과 그 물질적 존재 조건 사이의 연관이 점점 더 얽히고, 중간 고리들에 의해 점점 더 흐려진다. 그러나 연관은 존재한다. 15세기 중엽 이래의 르네상스 시대 전체가 본질적으로 도시의, 따라서 시민계급의 산물이었듯이, 그때부터 새로 깨어난 철학도 그러했다. 그 철학의 내용은 본질적으로 소시민계급과 중간 시민계급이 대부르주아지로 발전하는 데 상응하는 사상을 철학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었다. 정치경제학자이기도 하고 철학자이기도 한 경우가 많았던 지난 세기의 영국인과 프랑스인에게서 이 점은 분명히 드러나며, 헤겔학파에 대해서는 우리가 앞에서 이를 증명했다.
그렇지만 종교에 대해서만 간단히 더 살펴보자. 종교는 물질적 생활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 가장 낯선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아주 원시림적인 시대에, 자기 자신의 자연과 자기를 둘러싼 외부 자연에 관한 인간들의 오해에서 비롯된 원시림적인 표상들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모든 이데올로기는 일단 존재하게 되면 주어진 표상 재료에 이어서 발전하고, 그 재료를 더 다듬어 나간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닐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사상을 자립적이고 독립적으로 발전하며 오직 자기 고유의 법칙에만 따르는 존재자로서 다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사유 과정이 그들의 머릿속에서 진행되는 인간들의 물질적 생활 조건이 결국 이 과정의 경로를 규정한다는 것은 이 인간들에게 필연적으로 의식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이데올로기 전체가 끝장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개 서로 친족 관계에 있는 민족 집단마다 공통된 이 원초적 종교 표상들은, 집단이 갈라진 뒤에는 각 민족에게 주어진 생활 조건에 따라 민족마다 독특하게 발전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여러 민족 집단에 대해, 특히 아리아(이른바 인도유럽) 민족 집단에 대해 비교신화학이 세부까지 증명했다. 이렇게 각 민족에게서 만들어진 신들은 민족신이었고, 그들의 영역은 그들이 지켜야 할 민족의 영토를 넘지 않았으며, 그 경계 너머에서는 다른 신들이 이론의 여지 없이 큰소리를 쳤다. 그 신들은 민족이 존속하는 동안에만 표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고, 민족이 몰락하면 함께 쓰러졌다. 낡은 민족체들의 이 몰락을 가져온 것은 로마 세계제국이었는데, 그 경제적 발생 조건을 여기서 연구할 필요는 없다. 낡은 민족신들은 쇠퇴했다. 로마의 신들조차 그러했는데, 그들 역시 로마시라는 좁은 범위에만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제국을 세계종교로 보완하려는 욕구는, 조금이라도 존중할 만한 외국 신이면 모두 로마에서 토착 신들과 나란히 인정받고 제단을 얻게 하려는 시도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종교는 이런 식으로 황제의 칙령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새로운 세계종교인 기독교는 일반화된 동방 신학, 특히 유대 신학과 통속화된 그리스 철학, 특히 스토아 철학의 혼합으로부터 이미 조용히 생겨나 있었다. 기독교가 처음에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이제부터 다시 힘들여 연구해야 한다.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그 공식적 형태는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 이 목적에 맞게 니케아 공의회에 의해 고쳐진 형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기독교가 벌써 250년 만에 국교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시대 상황에 상응하는 종교였음을 증명한다. 중세에 기독교는 봉건제가 발전하는 것과 정확히 같은 정도로, 봉건제에 상응하는 종교로, 그에 상응하는 봉건적 위계를 갖추고 형성되었다. 그리고 시민계급이 일어서자, 봉건적 가톨릭에 대립하여 프로테스탄트 이단이 발전했다. 처음에는 남프랑스의 알비파에게서, 그곳 도시들이 최고로 번영하던 시기에 발전했다. 중세는 이데올로기의 다른 모든 형식, 곧 철학, 정치, 법학을 신학에 병합해 신학의 하위 분과로 만들어 버렸다. 그럼으로써 중세는 모든 사회적·정치적 운동에 신학적 형식을 취하도록 강요했다. 오로지 종교만을 먹고 자란 대중의 심성에 큰 폭풍을 일으키려면, 그들 자신의 이익을 종교적 옷을 입혀 보여 주어야 했다. 그리고 시민계급이 처음부터, 재산 없고 인정된 어떤 신분에도 속하지 않는 도시 평민들, 날품팔이꾼들, 온갖 종류의 하인들, 곧 훗날 프롤레타리아트의 선구자들로 이루어진 추종자 무리를 낳았듯이, 이단도 일찍이 시민적·온건한 이단과 평민적·혁명적 이단으로 갈라졌다. 후자는 시민적 이단자들조차 혐오했다.
프로테스탄트 이단을 뿌리 뽑을 수 없었던 것은 떠오르는 시민계급을 꺾을 수 없었던 것에 상응했다. 이 시민계급이 충분히 강해지자, 그때까지 주로 지역적이었던 봉건 귀족과의 투쟁은 전국적 규모를 띠기 시작했다. 최초의 큰 행동은 독일에서 일어났다 — 이른바 종교개혁이다. 시민계급은 다른 반역적 신분들 — 도시의 평민, 하급 귀족, 농촌의 농민 — 을 자기 깃발 아래 모을 수 있을 만큼 강하지도 발전하지도 못했다. 귀족이 먼저 패배했다. 농민들은 봉기를 일으켰고, 이것이 이 혁명 운동 전체의 정점을 이룬다. 도시들은 농민들을 저버렸고, 그리하여 혁명은 영방 제후들의 군대에 굴복했으며, 제후들이 이득을 모두 챙겼다. 그때부터 독일은 3세기 동안 자립적으로 역사에 개입하는 나라들의 대열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독일인 루터 곁에는 프랑스인 칼뱅이 서 있었다. 칼뱅은 참으로 프랑스적인 날카로움으로 종교개혁의 시민적 성격을 전면에 내세웠고, 교회를 공화제화하고 민주화했다. 루터파 종교개혁이 독일에서 늪에 빠져 독일을 파멸시키는 동안, 칼뱅파 종교개혁은 제네바, 네덜란드, 스코틀랜드의 공화주의자들에게 깃발이 되었고, 네덜란드를 에스파냐와 독일 제국으로부터 해방했으며, 영국에서 진행된 부르주아 혁명의 제2막에 이데올로기적 의상을 제공했다. 여기서 칼뱅주의는 당시 시민계급의 이익에 걸맞은 진정한 종교적 옷임이 입증되었고, 그 때문에 1689년 귀족 일부와 시민들 사이의 타협으로 혁명이 완결되었을 때에도 완전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영국 국교회는 복구되었지만, 국왕을 교황으로 삼은 가톨릭이라는 이전 형태로가 아니라 강하게 칼뱅주의화된 형태로 복구되었다. 낡은 국교회는 즐거운 가톨릭식 일요일을 지키고 지루한 칼뱅주의식 일요일과 싸웠는데, 새로운 시민화된 국교회는 후자를 도입했고, 그것은 지금도 영국을 아름답게 꾸며 주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칼뱅파 소수가 1685년에 탄압당하거나 가톨릭으로 개종당하거나 쫓겨났다.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었는가? 이미 그때 자유사상가 피에르 벨이 한창 작업 중이었고, 1694년에는 볼테르가 태어났다. 루이 14세의 폭력적 조치는 프랑스 시민계급이 자기 혁명을, 발전한 부르주아지에게만 걸맞은 비종교적이고 순전히 정치적인 형식으로 수행하기 쉽게 해 주었을 뿐이다. 국민의회에는 프로테스탄트 대신 자유사상가들이 앉아 있었다. 이로써 기독교는 마지막 단계에 들어섰다. 기독교는 더 이상 어떤 진보적 계급에게도 그 지향의 이데올로기적 옷으로 쓰일 수 없게 되었다. 기독교는 점점 더 지배계급들의 독점물이 되었고, 지배계급들은 그것을 하층 계급들을 울타리 안에 묶어 두는 단순한 통치 수단으로 쓴다. 그때 여러 계급은 저마다 자기에게 걸맞은 종교를 이용한다. 토지를 소유한 융커는 가톨릭 예수회주의나 프로테스탄트 정통주의를,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부르주아는 합리주의를 이용한다. 그리고 이 양반들이 각자의 종교를 스스로 믿든 말든 아무런 차이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을 본다. 종교는 일단 형성되고 나면 언제나 전승된 재료를 포함한다. 모든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전통은 커다란 보수적 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재료에 일어나는 변화는 계급 관계에서, 따라서 이 변화를 일으키는 인간들의 경제적 관계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여기서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
앞에서 다룬 것은 마르크스의 역사관의 일반적 윤곽, 기껏해야 몇 가지 예시일 수밖에 없다. 증명은 역사 자체에서 해내야 하며, 그 증명은 다른 저작들에서 이미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나는 말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 역사관은, 자연에 대한 변증법적 견해가 모든 자연철학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동시에 불가능하게 만들듯이, 역사 영역에서 철학을 끝장낸다. 이제는 어디서든 연관을 머릿속에서 고안해 내는 것이 아니라 사실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자연과 역사에서 쫓겨난 철학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한에서, 순수한 사유의 영역만이 남는다. 곧 사유 과정 자체의 법칙에 관한 학설, 논리학과 변증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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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8년 혁명과 함께 “교양 있는” 독일은 이론에 절교장을 보내고 실천의 땅으로 넘어갔다. 수공업에 기반한 소경영과 매뉴팩처는 현실적인 대공업으로 대체되었다. 독일은 다시 세계시장에 나타났다. 새로운 소독일 제국은 소국 분립 상태와 봉건제의 잔재와 관료적 행정이 이 발전의 길에 놓았던 가장 극심한 폐해들을 적어도 제거했다. 그러나 사변(Spekulation)이 철학 연구실을 떠나 증권거래소에 자기 신전을 세우는 것과 같은 정도로, 교양 있는 독일도 저 위대한 이론적 감각을 잃어버렸다. 그것은 독일이 정치적으로 가장 깊이 굴욕을 당하던 시기에 독일의 영광이었던 감각, 곧 얻어 낸 결과가 실제로 쓸모 있든 없든, 경찰의 비위를 거스르든 말든 상관없이 순수하게 학문적인 탐구를 하려는 감각이었다. 물론 독일의 공식 자연과학은 특히 개별 연구 분야에서 시대의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미 미국 잡지 《사이언스》(Science)가 옳게 지적하듯이, 개별 사실들 사이의 큰 연관이라는 분야에서, 곧 개별 사실들을 법칙으로 일반화하는 분야에서 결정적 진보는 이제 예전처럼 독일에서가 아니라 훨씬 더 많이 영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철학을 포함한 역사과학 분야에서는 고전철학과 함께 옛날의 이론적으로 거리낌 없던 정신이 더욱더 사라져 버렸다. 생각 없는 절충주의, 그리고 가장 저속한 출세주의에까지 이르는 경력과 수입에 대한 소심한 배려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 학문의 공식 대표자들은 부르주아지와 현존 국가의 노골적인 이데올로그가 되었다 — 그것도 이 둘이 노동자계급과 공공연히 대립하고 있는 시기에.
그리고 오직 노동자계급에게서만 독일의 이론적 감각이 시들지 않고 존속한다. 여기서는 그것을 뿌리 뽑을 수 없다. 여기서는 경력에 대한 배려, 돈벌이에 대한 배려, 위로부터의 은혜로운 보호에 대한 배려가 없다. 오히려 학문이 거리낌 없고 편견 없이 나아갈수록 그만큼 더 노동자들의 이익과 지향에 부합한다. 노동의 발전사에서 사회의 역사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를 알아본 새로운 방향은 처음부터 주로 노동자계급을 향했고, 공식 학문에서는 찾지도 기대하지도 않았던 수용성을 여기서 발견했다. 독일 노동운동은 독일 고전철학의 상속자다.
주석
- C. N. 슈타르케(철학 박사), 『루트비히 포이어바흐』(Ludwig Feuerbach), 슈투트가르트: 페르디난트 엥케(Ferd. Encke), 1885. ↩
- 오늘날에도 야만인과 낮은 단계의 미개인 사이에서는, 꿈에 나타나는 인간의 형상이 일시적으로 몸을 떠난 영혼이라는 관념이 널리 퍼져 있다. 그래서 실제 인간이, 그의 꿈속 모습이 꿈꾸는 사람에게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을 지게 된다. 이를테면 임 턴은 1884년에 기아나의 인디언들에게서 그런 것을 발견했다. ↩
- 여기서 개인적인 해명을 하나 하도록 허락해 주기 바란다. 최근 여러 차례 이 이론에서 내가 맡은 몫이 거론되었으므로, 이 문제를 정리하는 몇 마디를 여기서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마르크스와 40년 동안 함께 일하기 전에도, 함께 일하는 동안에도 이 이론의 기초를 놓는 데에도, 특히 그것을 다듬어 내는 데에도 어느 정도 독자적인 몫을 맡았다는 것은 나 자신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주도적인 근본 사상의 대부분, 특히 경제와 역사 분야의 근본 사상, 그리고 특히 그것을 최종적으로 날카롭게 정식화한 것은 마르크스의 몫이다. 내가 기여한 것은 — 기껏해야 몇몇 특수 분야를 빼면 — 마르크스가 나 없이도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이룬 것을 나는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우리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높이 서 있었고, 더 멀리 보았으며, 더 많은 것을 더 빨리 조망했다. 마르크스는 천재였고, 우리 다른 사람들은 기껏해야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이 이론은 오늘날 지금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이론이 그의 이름을 지니는 것도 당연하다. ↩
- 『두뇌 노동의 본질. 한 육체노동자 지음』(Das Wesen der Kopfarbeit, von einem Handarbeiter), 함부르크, 마이스너 출판사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