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1804

아이티 혁명

프랑스에서 가장 부유한 식민지 생도맹그의 노예들은 어떻게 1791년 봉기해 파리의 어떤 법령보다 먼저 자신들의 해방을 밀어붙였고, 왜 그 혁명은 1794년의 노예제 폐지를 거쳐 1804년 독립국 아이티의 수립으로, 그리고 다시 강제노동과 배상금의 역사로 이어졌나?

1791년 8월 생도맹그 북부 평원의 노예 봉기는 파리의 어떤 법령보다 앞섰다. 영국과 스페인의 침공 앞에서 민사위원 송토나와 폴브렐은 1793년 노예제 폐지를 선포했고, 국민공회는 1794년 2월 4일 이를 모든 식민지로 넓혔다. 투생 루베르튀르는 영국군을 몰아내고 섬을 통일해 1801년 헌법으로 종신 총독이 되었으나, 나폴레옹의 르클레르 원정군에 체포되어 옥사했다. 노예제 복원 시도는 데살린이 이끈 독립 전쟁을 불렀고, 1803년 11월 베르티에르에서 승리한 반란군은 1804년 1월 1일 아이티의 독립을 선포했다.

아이티프랑스「앙티유의 진주」: 생도맹그의 노예제 사회

생도맹그는 이스파니올라섬 서쪽 3분의 1을 차지한 프랑스 식민지로, 1697년 레이스베이크 조약으로 스페인이 프랑스의 지배를 공식 인정했다. 18세기에 설탕과 커피 플랜테이션이 급속히 늘어 1767년에는 원당 7,200만 파운드와 정제당 5,100만 파운드를 수출했고, 1780년대에는 유럽에서 소비되는 설탕의 약 40%와 커피의 60%를 생산했다. 1789년 무렵 약 8,000개의 플랜테이션이 있었고, 다른 자료는 이 식민지가 세계 커피의 60%와 프랑스·영국이 수입하는 설탕의 40%를 생산했다고 적는다. 해마다 평균 600척의 배가 보르도로 산물을 실어 날랐고, 1789년 프랑스 인구 약 2,500만 명 가운데 100만 명의 생계가 이 섬의 농산물 수입에 직접 달려 있었다. 「앙티유의 진주」라 불린 이 식민지는 18세기 유럽 식민지 가운데 가장 수익성이 높은 곳이었다. 1 2

이 부는 노예 노동 위에 세워졌다. 1681년부터 1791년까지 약 79만~86만 명의 노예가 들어왔고, 1783~1791년에는 대서양 노예무역 전체의 3분의 1이 이 식민지로 향했다. 1764~1771년에 해마다 1만~1만 5천 명이던 수입 노예는 1786년 약 2만 8천 명, 1787년 이후 해마다 3만 명 이상으로 늘었다. 아프리카에서 온 노예의 절반 이상이 황열병으로 1년 안에 죽었다는 추정이 있을 만큼 사망률이 높아 노예 인구는 해마다 2~5%씩 줄었고, 농장주들은 새 노예를 사들이는 쪽이 싸다고 계산했다. 1789년의 인구는 백인 4만~4만 5천 명, 자유 유색인 2만 8천~3만 2천 명, 노예 40만 6천~46만 5천 명으로 추산되며, 아이티 혁명 문서는 노예 45만 2천 명이라는 수치를 쓴다. 노예의 3분의 2는 아프리카 태생이었고, 콩고 출신이 약 40%로 가장 많았다. 1 2

사회는 세 신분으로 나뉘었다. 행정 요직과 대농장을 쥔 「그랑 블랑」과 장인·감독·소상인인 「프티 블랑」이 백인을 이루었고, 자유 유색인은 1789년 플랜테이션 재산의 3분의 1과 노예의 4분의 1을 소유할 만큼 부유했지만 1760년대부터 공직과 특정 직업, 유럽식 복장과 무기 휴대를 금지하는 차별법에 묶였다. 맨 아래의 노예는 다른 모든 신분을 합친 것보다 약 열 배 많았다. 1685년 루이 14세의 코드 누아르는 노예에게 세례와 일요일 휴식을 규정하는 한편 도주 노예의 귀를 자르고 세 번째 도주에는 사형을 정했으며, 농장주들은 보호 조항을 공공연히 어겼다. 도망 노예(마룬)의 무리는 산지에서 농장을 습격했고, 보두 사제 마캉달은 1751년부터 반란을 이끌다 1758년 화형당했다. 프랑스 역사가 폴 프레고시는 「아이티는 지옥이었지만 아이티는 부유했다」고 썼다. 2 1 3

프랑스아이티파리의 혁명과 자유 유색인의 권리 투쟁 (1789–1791)

1789년 8월 26일 국민의회가 공포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선언했지만, 그 평등이 여성·노예·식민지 주민에게 미치는지는 모호했다. 백인 농장주들은 혁명을 프랑스의 무역 통제에서 벗어나 섬을 제 뜻대로 다스릴 기회로 보았고, 노예들은 농장주가 주도하는 독립이 더 가혹한 지배를 뜻한다고 이해해 대체로 왕당파와 영국 편에 섰다. 파리에서는 1788년 브리소와 클라비에르가 세운 흑인우호협회가 노예제 폐지를 주장했으나, 혁명 초기에 제출된 폐지안은 귀족의 반대로 철회되었고 1790년 국민의회는 노예제 유지를 확인했다. 미라보는 생도맹그의 백인들이 「베수비오 화산 기슭에서 잠자고 있다」고 말했다. 2 4

자유 유색인은 1780년대부터 쥘리앵 레몽을 앞세워 백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프랑스에 호소해 왔다. 카프프랑세의 부유한 커피 상인 뱅상 오제는 1788년 파리에 가서 혁명에 가담했고, 1789년 8월 부재 농장주들에게 차별법 폐지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하자 레몽과 함께 자유 유색인의 대표권과 투표권을 국민제헌의회에 요구했다. 두 사람 모두 노예 소유자였고 노예제의 존속을 지지했다. 1790년 3월 제헌의회는 자유 유색인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 모호한 법을 통과시켰고, 오제는 런던에서 클라크슨을 만난 뒤 1790년 10월 몰래 식민지로 돌아왔다. 식민지 총독과 의회가 법의 시행을 거부하자 오제는 장바티스트 샤반과 함께 카프프랑세 근교에서 약 300명의 자유 유색인을 모아 봉기했다. 첫 토벌대 600명을 물리쳤으나 1,500명의 두 번째 공격에 패해 스페인령 산토도밍고로 달아났고, 11월 20일 인체에서 체포되어 프랑스 측에 넘겨졌다. 1791년 2월 6일 그는 카프프랑세에서 거열형(수레바퀴형)으로 처형되었고 잘린 머리는 창끝에 걸렸다. 5 2

오제의 처형은 파리의 여론을 움직였다. 1791년 5월 국민제헌의회는 부유한 자유 유색인에게 시민권을 주기로 했고, 백인 농장주들이 이 결정을 따르기를 거부하자 두 달 안에 물라토와 백인 사이에 산발적 무력 충돌이 일어났다. 이때까지의 싸움은 백인 분파들 사이, 그리고 백인과 자유 유색인 사이의 것이었고, 노예들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오제는 노예제에 맞서 싸운 것이 아니었지만, 그가 받은 형벌은 뒤에 노예 반란군이 1791년 8월 봉기에 나서고 식민자들과의 조약을 거부한 이유 가운데 하나로 거론되었다. 2 5

아이티1791년 8월, 북부 평원의 봉기

1791년 8월 14일 밤, 카프프랑세 근교 모른루주의 한 농장(부아 카이망)에서 북부 평원 농장의 대표 약 200명이 모였다. 보두 사제 뒤티 부크만과 여사제 세실 파티망이 주재했다고 전해지는 이 집회에서 검은 돼지가 제물로 바쳐지고 참석자들은 맹세를 나누었으며, 부크만은 「우리의 눈물에 목마른 백인들의 신의 형상을 내던지고,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서 말하는 자유에 귀 기울이라」고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이 의식에 관한 당대의 직접 기록은 없다. 1814년 백인 식민자 앙투안 달마스의 책에 처음 기록되었고, 부크만의 기도문은 1824년 에라르 뒤멜의 구술 수집에서 나왔으며, 레옹프랑수아 오프만 같은 비평가는 의식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같은 밤 모른루주에서는 노예 감독과 마부 등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던 특권 노예 약 200명이 따로 모여 봉기 날짜를 정했다고 하며, 투생 루베르튀르의 전기는 이 자리에서 장프랑수아, 비아수, 장노, 부크만이 지도자를 뽑았고 투생은 자신 대신 조르주 비아수를 추천했다고 적는다. 6 7 8

봉기는 8월 21일 밤에서 22일 월요일 사이에 시작되었다. 부크만은 뒤티·에롱·노에 농장의 노예들을 모아 노에 제당소에 불을 질렀고, 이튿날 밤 북쪽 농장들을 돌며 세를 불려 약 1만 5천 명의 병력으로 카프프랑세를 포위하러 나섰다. 열흘 안에 노예들은 북부 관구 전체를 장악했고 백인은 요새화된 몇몇 진지만 지켰다. 수 주 안에 북부에서 봉기에 가담한 노예는 10만 명에 이르렀고, 두 달 동안 백인 4,000명이 죽었으며 제당 플랜테이션 180개와 커피·인디고 플랜테이션 수백 개(커피 농장만 900개 이상)가 불탔다. 1791년 9월 살아남은 백인들은 민병대를 꾸려 반격해 약 1만 5천 명의 흑인을 죽였다. 남부에서도 9월부터 로맨라프로페테스가 이끄는 1만 3천 명이 레오간과 자크멜을 점령하고 불태웠다. 부크만은 1791년 11월 7일 퐁블뢰에서 프랑스군에게 죽었고, 식민 당국은 「반란군의 우두머리 부크만의 머리」라는 글귀와 함께 그의 머리를 카프프랑세 광장에 내걸었다. 7 2

반란군은 노예제에서의 해방을 요구했지만 이 단계에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지도자 대부분은 국왕이 노예를 해방하는 칙령을 내렸는데 식민지 총독이 숨겼다고 믿고 프랑스 국왕을 위해 싸운다고 밝혔으며, 흰 모표와 생루이 십자가를 달았다. 1791년 12월 투생은 백인 포로의 석방과 복귀 노동을 조건으로 채찍 금지, 주당 하루의 추가 휴일, 갇힌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협상에 참여했으나 식민지 의회는 거부했다. 1792년에 이르러 반란군은 생도맹그의 3분의 1을 장악했다. 중요한 것은 순서다. 봉기는 파리의 어떤 해방 법령보다 앞섰다. 입법의회가 자유 유색인에게 권리를 준 1792년 4월 4일 법령은 봉기 일곱 달 뒤에, 송토나의 북부 해방 포고는 두 해 뒤에, 국민공회의 노예제 폐지는 두 해 반 뒤에 나왔다. 2 8

아이티프랑스민사위원들과 해방령: 봉기에서 1794년 2월 4일까지

반란의 성공에 놀란 파리의 입법의회는 1792년 4월 4일 식민지 자유 유색인에게 완전한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주는 법령을 통과시켰고, 이를 집행할 민사위원으로 송토나, 폴브렐, 아이요를 병력과 함께 보냈다(파견 병력은 자료에 따라 6,000명 또는 약 1만 명). 세 위원은 1792년 9월 17일 카프프랑세에 닿았고, 노예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피부색과 무관하게 자유인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러 왔다고 선언했다. 1793년 프랑스가 영국·스페인과 전쟁에 들어가자 섬의 정세는 뒤집혔다. 스페인은 동쪽 산토도밍고에서 반란군을 끌어들였고, 장프랑수아와 비아수는 1793년 5월, 투생은 6월 초에 토지와 특권, 병사와 가족의 자유를 약속한 스페인군에 정식으로 가담했다. 투생은 위원들의 6월 20일 포고(싸우는 남성 노예에게만 자유를 주는 제안)에 「흑인들은 왕 아래에서 복무하기를 원하며, 스페인 왕이 보호를 제안했다」고 답했다. 2 9 8

1793년 6월 20일 새 총독 갈보가 선원과 백인 주민을 이끌고 위원들을 잡으려 카프프랑세를 공격했다. 수적으로 밀린 송토나와 폴브렐은 자신들 편에서 싸우는 흑인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주겠다고 선언했고, 반란 노예 일부와 자유 흑인, 충성을 지킨 백인 부대가 합세해 도시를 되찾았으나 도시의 대부분은 불탔다. 영국과 스페인, 프랑스 왕당파에게 식민지를 잃지 않으려면 더 많은 지지가 필요했다. 1793년 8월 29일 송토나는 북부 관구의 노예제 폐지를 선포했고, 같은 날 투생은 「형제와 벗들이여, 나는 투생 루베르튀르다. 나는 생도맹그에 자유와 평등이 지배하기를 원한다」는 캉튀렐 선언을 냈다. 10월 31일 폴브렐이 서부·남부 관구에서 같은 조치를 취했다. 폴브렐은 해방된 이들에게 1년간 농장 노동을 계속할 의무를 지웠고, 송토나의 포고 역시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에게 농장 노동의 의무를 두었다. 두 위원은 폐지론자였지만 파리로부터 노예제를 폐지할 권한을 받은 적이 없었고, 역사가들은 그 동기가 평등의 이념이었는지 권력을 지키려는 필요였는지를 두고 논쟁한다. 9 8 4 2

송토나는 북부 관구가 뽑은 대표 세 사람, 곧 백인 식민자 루이 뒤페, 자유 흑인 장교 장바티스트 벨레, 자유 유색인 장바티스트 밀스를 파리로 보내 해방의 승인을 구했다. 벨레는 세네갈 고레섬에서 태어나 두 살에 팔려 온 뒤 스스로 자유를 산 사람으로, 국민공회에 앉은 첫 흑인 의원이 되었다. 1794년 2월 4일(혁명력 2년 플뤼비오즈 16일) 뒤페가 노예제 폐지만이 식민지를 프랑스의 손에 지키는 길이라고 연설하자 들라크루아가 「긴 토론으로 공회의 명예를 더럽히지 말자」고 외쳤고, 국민공회는 박수로 법령을 통과시켰다. 「국민공회는 모든 식민지에서 노예제가 폐지되었음을 선언한다. 따라서 식민지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은 피부색의 구별 없이 프랑스 시민이며 헌법이 보장하는 모든 권리를 누린다.」 당통은 「오늘 우리는 보편적 자유를 선포한다. 영국인들은 오늘 죽었다」고 말했다. 1793년 헌법과 1795년 헌법 모두 노예제 폐지를 담았다. 그러나 이 법령은 영국이 점령한 마르티니크에는 적용되지 못했고, 인도양의 일드프랑스와 레위니옹은 시행을 거부했다. 투생은 1794년 5월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 그 시점과 동기는 논쟁거리로, 5월 4일 고나이브에 공화국 기를 올렸다는 설과 5월 6일 산라파엘 성당에서 스페인군을 기습했다는 설이 있으며, 5월 18일 라보 장군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이미 프랑스를 위해 싸우고 있었음을 확인해 준다. 2 10 4 8 11

아이티영국스페인도미니카 공화국영국·스페인의 개입과 루베르튀르의 지배 (1793–1801)

송토나에게 불만을 품은 그랑 블랑들은 자메이카의 영국 당국에 도움을 청했고, 피트 내각과 전쟁장관 던더스는 식민지의 재정 가치와 강화 협상의 카드, 그리고 반란이 영국령 서인도로 번질 위험을 생각해 침공을 계획했다. 자메이카 부총독 윌리엄슨은 식민자 대표와 구체제의 복원, 자유 유색인 차별, 노예제 보호를 약속하는 협정을 맺어 윌버포스와 클라크슨의 비판을 샀다. 1793년 9월 20일 영국군 약 600명이 제레미에 상륙했고, 22일에는 프랑스 해군의 주요 기지 몰생니콜라가 싸움 없이 영국 해군에 항복했다. 이때 섬의 프랑스군은 3,500명뿐이었다. 1794년 5월 19일 화이트의 부대가 도착해 6월 포르토프랭스를 점령했지만, 그레이 장군의 7,000명 가운데 약 5,000명이 황열병으로 죽었고 영국 해군은 「함장 46명과 1,100명이 죽었다」고 보고했다. 포테스큐는 「1794년 서인도에 묻힌 영국인이 1만 2천 명이라 해도 적게 잡은 것」이라고 썼다. 리고는 남부에서 영국군을 막아 레오간을 되찾았고 1794년 성탄절에 티뷔롱을 기습해 탈환했다. 2

투생이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자 스페인의 위협은 곧 끝났다. 1795년 7월 바젤 조약으로 스페인은 전쟁을 끝내고 산토도밍고를 프랑스에 넘겼고, 장프랑수아와 비아수는 11월까지 투생과 싸우다 각각 스페인과 플로리다로 떠났으며 그들의 병사 대부분은 투생에게 합류했다. 피트는 1795년 「대공세」를 결정해 영국 역사상 최대인 200척에 약 3만 명을 보냈으나, 1796년 레오간 공격은 포병 지휘관 페티옹의 포격 앞에 참패했고 6월까지 도착한 1만 명은 포르토프랭스와 해안 거점에 갇힌 채 황열병에 시달렸다. 1797년 4월 포르토프랭스에 온 메이틀랜드는 영국군이 「전멸했다」고 썼고, 1798년 5월 10일 투생과 휴전에 합의해 18일 포르토프랭스에서 철수했다. 8월 31일 두 사람은 영국이 생도맹그 전체에서 물러나는 대신 투생이 「자메이카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비밀 협정에 서명했고, 1798년 말 몰생니콜라의 마지막 영국군이 떠났다. 1793~1798년 원정은 영국 국고에 400만 파운드와, 죽거나 다치거나 황열병으로 영구히 쓸 수 없게 된 병사 10만 명을 치르게 했다고 한 자료는 적는다. 2 8 12

프랑스군 사령관 라보와 손잡은 투생은 1796년 3월 카프프랑세에서 라보를 체포한 물라토 지휘관 빌라트를 몰아내 부총독이 되었고, 1797년에는 식민지 최고위 장교가 되었다. 1796년 돌아온 송토나는 그를 장군으로 승진시켰지만, 망명한 백인 농장주의 귀환을 둘러싸고 두 사람은 갈라섰고 투생은 1797년 여름 송토나를 프랑스로 돌려보냈다. 1798년 총재정부가 보낸 에두빌은 남부를 다스리던 자유 유색인 장군 앙드레 리고를 편들어 두 사람을 갈라놓으려다 10월 쫓겨났다. 1799년 6월 리고가 프티고아브와 그랑고아브를 공격하며 「남부 전쟁」이 시작되었다. 투생은 4만 5천~5만 명으로 리고의 1만 5천 명을 압도했고, 미국 해군의 프리깃 제너럴 그린호가 포격으로 그를 도왔다. 페티옹이 지킨 자크멜은 1800년 3월 11일 함락되었고, 리고는 7월 프랑스로 달아났다. 데살린의 보복 학살 규모는 당시 프랑스 장군 라크루아의 1만 명 설과 C. L. R. 제임스의 수백 명 설로 엇갈린다. 투생은 1800년 12월 스페인령 산토도밍고를 침공해 1801년 1월 섬 전체를 장악하고 그곳의 노예를 해방했다. 8 13 2

1801년 투생은 주로 백인 농장주로 이루어진 중앙의회에 헌법을 기초하게 했고, 7월 초 카프프랑세에서 이를 공포했다(공포일은 자료에 따라 7월 3일, 7일, 12일로 엇갈린다). 제1조는 생도맹그가 「프랑스 제국의 일부이되 특별한 법의 적용을 받는 하나의 식민지」라고 했고, 제3조는 「이 영토에 노예는 존재할 수 없다. 예속은 영원히 폐지된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프랑스인으로 태어나고 살고 죽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헌법은 투생을 후계자 지명권을 가진 종신 총독으로 삼았고, 제6조로 가톨릭을 유일한 공인 종교로 정했으며, 이혼을 금지하고 경작자를 농장에 묶는 강제노동과 노예무역을 통한 노동력 수입을 허용했다. 역사가 제러미 팝킨은 이 체제를 「토지 소유를 독점해 가는 군사 카스트의 억압적 통제를 받는 농민층」의 사회라고 평했다. 1801년 10월 북부에서 강제노동에 반대하는 봉기가 일어나자 투생은 이를 지지한 조카 모이즈 장군을 11월 21일 총살했다. 나폴레옹은 헌법을 프랑스 제국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8 14 15

프랑스아이티영국르클레르 원정과 독립 전쟁 (1802–1804)

1801년 나폴레옹은 처남 샤를 르클레르를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처음에는 투생 장교들의 계급과 토지를 인정하고 노예 해방을 보장하면서 파리의 권위만 세우려 했으나, 10월에 이르러 투생 정부를 무장 해제하고 흑인 장교들을 프랑스로 추방하라고 비밀리에 지시했고, 투생이 잡히면 노예제를 복원할 작정이었다. 1801년 12월 14일 빌라레 드 주아외즈의 함대가 전열함 35척과 프리깃 21척에 7,000~8,000명을 싣고 브레스트를 떠났고 뒤이어 증원이 이어져 모두 31,131명이 상륙했다(르클레르 전기는 4만 명, 투생 전기는 2만 명이라고 적는다). 리고와 페티옹 등 투생에게 쫓겨났던 자유 유색인 장교들도 함께 돌아왔다. 1802년 2월 3일 함대가 카프프랑세 앞에 나타나자 앙리 크리스토프는 「당신은 잿더미가 된 카프를 보고서야 들어올 것이다」라는 편지를 보낸 뒤 명령대로 도시에 불을 질렀고, 2월 5일 프랑스군이 상륙했다. 열흘 안에 프랑스군은 항구와 도시 대부분을 차지했다. 15 16 8

투생은 해안 도시와 평야를 불태우고 산으로 물러나 우기와 황열병이 프랑스군을 쓰러뜨리기를 기다린다는 계획을 세웠다. 라빈아쿨뢰브르에서 여섯 시간의 백병전 끝에 밀린 뒤, 아르티보니트 계곡의 크레타피에로 요새에서 데살린이 1802년 3월 4일부터 24일까지 포위를 버텼다. 그는 화약통 위에 횃불을 들고 서서 「프랑스군이 여기 발을 들이면 모든 것을 날려 버리겠다」고 외쳤고, 병사들은 「자유를 위해 죽겠다」고 답했다. 프랑스군은 뒤귀아 장군이 전사하고 르클레르가 부상당하는 등 약 2,000명을 잃었으며, 데살린은 식량과 탄약이 떨어지자 3월 24일 밤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다. 로샹보조차 「우리의 덫에서 벗어난 이 기적 같은 퇴각은 믿을 수 없는 무공」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4월 25일 크리스토프가 프랑스군에 투항했고 데살린이 뒤따랐으며, 5월 6일 투생은 사면을 조건으로 르클레르의 권위를 인정하고 에네리의 농장에 물러났다. 6월 7일 브뤼네 장군은 회담을 구실로 투생을 체포해 측근 100명과 함께 프랑스로 보냈다. 배에 오르며 투생은 「나를 쓰러뜨림으로써 당신들은 생도맹그에서 자유의 나무의 줄기를 베었을 뿐이다. 그것은 뿌리에서 다시 돋아날 것이다. 뿌리는 많고 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쥐라산맥의 주 요새에 갇혀 1803년 4월 7일 숨졌다. 2 17 18 8

3월에 우기가 시작되자 황열병이 번졌다. 3월 말까지 프랑스군 5,000명이 죽고 5,000명이 입원했으며, 7월 중순까지 사망자는 약 1만 명에 이르렀고 9월에 르클레르는 싸울 수 있는 병력이 8,000명뿐이라고 적었다. 그 사이 1802년 5월 20일 법은 아미앵 조약으로 돌려받은 마르티니크 등에서 노예제 유지를 확정했고, 과들루프에서는 리슈팡스가 노예제를 다시 세웠다. 과들루프 소식이 전해지자 1802년 여름 흑인 경작자들이 봉기했고 8월부터 흑인·물라토 부대의 집단 이탈이 시작되었다. 10월 르클레르는 나폴레옹에게 「산악의 흑인을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 없애고 12세 미만 아이만 남겨야 한다. 평야의 흑인 절반을 없애고 견장을 달아 본 유색인은 한 명도 남기지 말아야 한다」는 섬멸전을 건의했고, 카프프랑세에서 흑인 부대원 1,000명의 목에 밀가루 부대를 매달아 배에서 밀어 넣어 죽였다. 10월 아르카에의 비밀 회합 뒤 데살린과 페티옹이 반란군에 합류했고, 11월 르클레르는 토르튀섬에서 황열병으로 죽었다(사망일은 11월 1일과 2일로 엇갈린다). 뒤를 이은 로샹보는 쿠바에서 사람 사냥용 개를 들여오고 카프프랑세만에서 흑인들을 익사시켰으며, 선창에 황을 태워 수백 명을 질식시키는 「훈증 유황 목욕」을 고안했다. 로샹보가 카프에서 흑인 500명을 목매달자 데살린은 백인 500명을 죽여 머리를 창에 꽂아 세웠다. 로샹보의 잔학은 흑인과 자유 유색인을 프랑스에 맞서 하나로 묶었다. 2 15 16 11 19 20

1803년 5월 18일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다시 시작되자 영국 해군은 덕워스의 전대로 생도맹그를 봉쇄해 프랑스군의 증원과 보급을 끊고 아이티군에 무기를 공급했다. 같은 날 아르카에에서 데살린은 원주민군(아르메 앵디젠)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10월 8일 프랑스군은 포르토프랭스를 버리고 카프에 집결했고, 11월 18일 카프 남쪽 베르티에르에서 마지막 큰 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수아 카푸아는 말이 쓰러지자 칼을 뽑아 「전진! 전진!」을 외치며 돌격했고, 로샹보는 북을 울려 잠시 사격을 멈추고 참모를 보내 그의 용기에 경의를 표한 뒤 전투를 재개했다. 폭풍우를 틈타 로샹보는 물러났고 이튿날 항복 조건이 정해졌다. 베르티에르 전투 문서는 양측 병력을 반란군 2만 7천 명 대 프랑스군 2,000명, 손실을 반란군 전사 1,200명·부상 2,000명 대 프랑스군 전사 130명·부상 400명으로 적는다. 11월 30일 밤 프랑스군 8,000명과 백인 민간인 수백 명이 영국 함선에 올라 떠났고, 뒤에 남겨진 프랑스군 부상병들은 며칠 뒤 익사당했다. 12월 3일 몰생니콜라의 누아유는 쿠바로 탈출하려다 영국 프리깃에 치명상을 입었다. 1804년 1월 1일 고나이브에서 데살린은 섬의 타이노어 이름을 따 「아이티」라 이름 붙인 나라의 독립을 선포했다. 비서 부아롱토네르가 낭독한 선언은 「우리는 독립하여 살거나 아니면 죽어야 한다」고 끝맺었다. 생도맹그에 보내진 약 3만 1천 명 가운데 살아 돌아온 프랑스군은 7,000~8,000명에 지나지 않았고 장군 20명 이상이 죽었다. 프랑스는 뒷날의 워털루보다 더 많은 병력을 이 섬에서 잃었다. 2 17 21 15 22

아이티프랑스독립 아이티: 학살, 제국, 분열, 배상금

독립 선언 뒤 데살린은 1804년 2월부터 4월 22일까지 남은 프랑스인의 학살을 명령했다. 2월 22일 모든 도시의 백인을 처형하되 총성으로 희생자에게 경고하지 않도록 칼과 총검을 쓰라는 명령에 서명했고, 2~3월 도시들을 돌며 집행을 확인했다. 포르토프랭스에서는 3월 18일 그가 도착한 뒤 약 800명이 죽고 50명쯤 살아남았으며, 4월 18일 카프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희생자는 3,000~5,000명(아이티 혁명·데살린 문서) 또는 3,000~7,000명(학살 문서)으로 추산된다. 프랑스군에서 이탈한 폴란드 병사들(데살린은 이들을 「유럽의 백인 흑인」이라 불렀다), 노예무역과 무관한 독일계 이주민, 일부 의사와 사제, 비백인과 결혼한 여성은 제외되었다. 1804년 9월 22일 장군들은 데살린을 황제로 추대했고 10월 6일 카프에서 자크 1세로 대관했으며, 1805년 5월 20일 헌법은 모든 시민을 「흑인」으로 규정하고 백인의 토지 소유를 금지했다. 데살린은 모든 시민을 병사 아니면 경작자로 묶는 농장 노동 체제를 강행해 트루요가 「농업 군사주의」라 부른 지배를 폈고, 새로 해방된 이들과 옛 자유민 양쪽의 반감을 샀다. 1806년 10월 17일 그는 포르토프랭스 북쪽 퐁루주에서 페티옹과 제랭 등이 꾸민 음모에 암살되었고 시신은 군중에게 찢겼다. 23 17 2

암살 뒤 나라는 둘로 갈라졌다. 북부에서 앙리 크리스토프는 1807년 2월 17일 「아이티국」의 대통령이 되었고 1811년 3월 26일 왕국을 선포해 앙리 1세로 즉위했다. 그는 시타델 라페리에르와 상수시 궁전을 짓고 코르베(부역) 농장 노동으로 설탕 수출 수입을 올렸으며, 영국과의 통상으로 국고를 채우고 윌버포스·클라크슨과 서신을 주고받았으나, 1820년 10월 8일 병들고 인기를 잃은 채 반란을 두려워해 자살했다. 남부에서 알렉상드르 페티옹은 1807년 아이티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816년 종신 대통령이 되었고, 대농장을 몰수해 지지자와 농민에게 나눠 주어 「파파 봉쾨르」라는 별명을 얻었으나 수출과 국가 수입은 급감했다. 그는 1815년 망명한 시몬 볼리바르에게 피난처와 병력·물자를 제공했고, 1818년 3월 29일 황열병으로 죽었다. 후계자 장피에르 부아예는 1820년 크리스토프가 죽자 나라를 재통일했고, 1822년 2월 동쪽 산토도밍고를 점령해 1844년 도미니카 독립 전쟁까지 섬 전체를 다스렸다. 24 20 2

프랑스는 식민지의 상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1814~1815년 빈 회의에서 프랑스는 「무력을 포함한 모든 수단으로 생도맹그를 되찾을」 권리를 비밀 조항에 넣었고, 미국의 제퍼슨은 노예 반란이 번질 것을 두려워해 아이티와의 외교 관계를 거부하고 금수 조치를 취했다. 1825년 7월 3일 바롱 드 마코가 이끄는 군함 14척, 대포 528문이 포르토프랭스 앞에 나타나 샤를 10세의 4월 17일 칙령을 들이밀었다. 프랑스는 옛 노예 소유자에게 1억 5천만 프랑을 다섯 번에 나눠 배상하는 조건으로 독립을 승인했고, 배상액 산정은 코드 누아르 제44조와 제48조를 근거로 했다. 아이티는 첫 3천만 프랑을 프랑스 은행에서 빌려 치러야 했으며, 1838년 잔액이 줄었고(자료에 따라 9천만 프랑 또는 6천만 프랑) 1883년에 완납했으나 그 빚을 갚기 위해 진 다른 빚은 1947년에야 끝났다. 2022년 『뉴욕 타임스』는 실제 지급된 배상금을 약 1억 1,200만 프랑으로 추산했다. 미국은 1862년 링컨 정부에 와서야 아이티를 승인했다. 25 2 8

아이티프랑스평가

희생자 수는 추정마다 크게 다르다. 로버트 셰이나는 아이티인 35만 명과 유럽 병사 5만 명이 죽었다고 추정했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정치 백과사전』은 흑인 약 20만 명과 물라토 수천 명, 프랑스·영국군 최대 10만 명이라고 적으며, 아이티 혁명 문서의 다른 대목은 1791~1803년 아이티인 사망자를 약 20만 명, 프랑스군 전사자를 3만 7천 명으로 든다. 유럽 쪽 사망의 대부분은 황열병 때문이었고(게거스는 1791~1797년 파견된 영국군 5명 중 3명이 병으로 죽었다고 본다), 아이티인 사망의 대부분은 폭력 때문이었다. 르클레르 원정군의 규모(2만·3만 1천·4만 명), 1801년 헌법의 공포일, 르클레르의 사망일, 1804년 학살 희생자, 1838년에 감액된 배상금 액수 역시 자료마다 어긋나며, 본문은 범위와 출처를 함께 적었다. 부아 카이망 의식은 1814년에야 기록되었고 그 실재 자체가 논쟁거리다. 2 6 15

미셸롤프 트루요는 아이티 혁명의 역사가 프랑스 혁명의 역사에 「침묵당했다」고 썼다. 트리니다드의 마르크스주의자 C. L. R. 제임스는 1938년 『블랙 자코뱅』에서 혁명을 프랑스 혁명의 맥락 속에 놓고, 노예 출신의 투생이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프랑스 혁명가들보다 더 순수하게 체현했으며 그 이념은 「어떤 프랑스인에게보다 그들에게 훨씬 더 큰 의미였다」고 보았다. 그는 「군주파가 백인이고 부르주아지가 갈색이며 프랑스 대중이 흑인이었다면 프랑스 혁명은 인종 전쟁으로 역사에 남았을 것」이라고 썼다. 혁명의 영향을 두고도 역사가들은 갈린다. 데이비드 게거스는 서반구에서 노예제가 수십 년 더 번성했으므로 그 차이는 제한적이었다고 보는 반면, W. E. B. 듀보이스는 이 혁명이 없었다면 영국 의회가 폐지론을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로랑 뒤부아는 남부 전쟁이 인종 정체성의 차이가 아니라 「영토와 정치 권력을 둘러싼 갈등」이었다고 주장하고, 필리프 지라르는 1804년 학살을 양측이 공공연히 고려한 제노사이드적 전략의 귀결로 분석하며, 일부 연구자는 이를 피억압자가 억압자를 겨눈 「서발턴 제노사이드」라 부른다. 최근에는 혁명에서 여성이 한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2 26 13 23

사회주의 운동에 아이티 혁명이 남긴 것은 세 가지다. 첫째, 1794년 2월 4일의 폐지는 역사상 첫 노예제 폐지로 꼽히기도 하지만, 그것은 파리의 선의가 아니라 생도맹그에서 먼저 일어난 봉기와 현지 위원들의 결정을 뒤늦게 추인한 것이었고, 1802년 나폴레옹은 이를 뒤집었다. 해방은 아래로부터의 봉기가 식민 본국의 혁명을 끌고 간 사례였다. 둘째, 해방 뒤의 아이티는 「노예제로부터는 자유로웠으나 강제노동으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한」 나라였다. 투생의 1801년 헌법, 데살린의 농장 노동 체제, 크리스토프의 코르베는 모두 수출 경제를 되살리려 옛 노예를 농장에 묶었고, 페티옹의 토지 분배는 자급 농민을 낳았지만 국가 수입을 무너뜨렸다. 해방된 노동을 어떻게 조직하는가 하는 문제는 혁명이 끝난 뒤에도 풀리지 않았다. 셋째, 제임스가 「아프리카인과 그 후손이 남의 착취와 잔혹의 대상이 아니라 스스로 큰 규모로 행동하는」 역사를 쓰겠다고 했듯, 이 혁명은 20세기 반식민·범아프리카 운동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준거가 되었다. 미국의 사회주의 잡지 『자코뱅』은 투생 루베르튀르의 초상을 로고로 쓴다. 4 2 26 8 24

결과

프랑스는 생도맹그에 보낸 약 3만 1천 명 가운데 7,000~8,000명만 데려갔고 나폴레옹은 아메리카 제국의 꿈을 접고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았다. 아이티는 노예 반란이 세운 유일한 국가이자 라틴아메리카 최초의 독립국이 되었으나, 1804년 프랑스인 학살, 데살린의 제정과 암살, 크리스토프의 왕국과 페티옹의 공화국으로의 분열을 겪었고, 투생에서 크리스토프까지 이어진 농장 강제노동 체제는 해방 노동의 조직이라는 문제를 남겼다. 프랑스는 1825년 1억 5천만 프랑의 배상을 조건으로 독립을 승인했고 그 빚은 1947년에야 끝났다.

연표와 지도

카프프랑세 몰생니콜라 고나이브 크레타피에로 제레미 포르토프랭스 레오간 산토도밍고 자크멜 레카이 20 토르튀섬 1 카프프랑세 2 카프프랑세 5 카프프랑세 6 카프프랑세 7 카프프랑세 8 카프프랑세 15 카프프랑세 16 카프프랑세 23 카프프랑세 26 카프프랑세 22 베르티에르 3 부아 카이망 4 북부 평원 18 에네리 11 고나이브 24 고나이브 17 크레타피에로 19 아르카에 21 아르카에 9 제레미 10 포르토프랭스 12 포르토프랭스 25 포르토프랭스 27 포르토프랭스 28 포르토프랭스 14 산토도밍고 13 자크멜
  1. 1685.03프랑스
    코드 누아르 공포

    루이 14세가 프랑스령 아메리카 섬들의 노예제를 규정하는 칙령을 공포했다. 생도맹그 평의회에는 1687년 5월 등록되었다.

  2. 11790.10아이티
    오제의 봉기

    파리에서 돌아온 뱅상 오제가 샤반과 함께 자유 유색인 약 300명을 모아 카프프랑세 근교에서 봉기했으나 패해 스페인령으로 달아났다.

  3. 21791.02.06아이티
    오제 처형

    오제가 카프프랑세에서 거열형으로 처형되고 머리가 창끝에 걸렸다.

  4. 1791.05프랑스
    자유 유색인 시민권 법령

    국민제헌의회가 부유한 자유 유색인에게 시민권을 주기로 했으나 백인 농장주들은 따르기를 거부했다.

  5. 31791.08.14아이티
    부아 카이망 집회

    카프프랑세 근교에서 노예 대표 약 200명이 모여 봉기를 준비했다. 부크만과 세실 파티망이 주재했다고 전해진다.

  6. 41791.08.21–22아이티
    북부 노예 봉기 시작

    부크만이 노에 제당소를 불태우며 봉기가 시작되었다. 열흘 안에 북부 관구 전체가 반란군 손에 들어갔다.

  7. 51791.11.07아이티
    부크만 전사

    부크만이 퐁블뢰에서 프랑스군에게 죽었고 머리가 카프프랑세에 내걸렸다.

  8. 1792.04.04프랑스
    자유 유색인 권리 법령

    입법의회가 식민지 자유 유색인에게 완전한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주고 민사위원을 보내기로 했다.

  9. 61792.09.17아이티
    민사위원 도착

    송토나, 폴브렐, 아이요가 카프프랑세에 닿아 노예제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선언했다.

  10. 71793.06.20아이티
    갈보 사건과 카프프랑세 소실

    총독 갈보가 위원들을 공격했고, 위원들은 자신들 편에서 싸우는 흑인에게 시민권을 약속했다. 도시 대부분이 불탔다.

  11. 81793.08.29아이티
    송토나의 북부 해방 포고

    송토나가 북부 관구의 노예제 폐지를 선포했고, 같은 날 투생은 캉튀렐 선언을 냈다.

  12. 91793.09.20–22영국아이티
    영국군 상륙

    영국군 약 600명이 제레미에 상륙했고 몰생니콜라가 영국 해군에 항복했다.

  13. 101793.10.31아이티
    폴브렐의 서부·남부 해방

    폴브렐이 서부·남부 관구에서 노예제 폐지를 선포했다.

  14. 1794.02.04프랑스
    국민공회의 노예제 폐지

    생도맹그 대표 뒤페·벨레·밀스의 호소 뒤 국민공회가 모든 식민지의 노예제 폐지를 박수로 가결했다.

  15. 111794.05아이티스페인
    투생, 프랑스 편으로

    투생이 스페인군을 떠나 프랑스 공화국 편으로 돌아섰다. 날짜는 5월 4일·6일·18일 설이 있다.

  16. 1795.07.22스페인프랑스도미니카 공화국
    바젤 조약

    스페인이 전쟁에서 빠지고 산토도밍고를 프랑스에 넘겼다.

  17. 121798.05.10–08.31영국아이티
    메이틀랜드와 영국군 철수

    메이틀랜드가 투생과 휴전하고 포르토프랭스에서 철수했으며, 8월 31일 비밀 협정으로 영국은 생도맹그 전체에서 물러났다.

  18. 131799.06–1800.07아이티
    남부 전쟁

    리고의 공격으로 시작된 내전에서 투생이 자크멜(1800년 3월 11일)을 함락시키고 리고를 프랑스로 몰아냈다.

  19. 141801.01도미니카 공화국아이티
    산토도밍고 점령

    투생이 스페인령 산토도밍고를 점령해 섬 전체를 장악하고 그곳의 노예를 해방했다.

  20. 151801.07아이티
    1801년 헌법

    투생이 자신을 종신 총독으로 삼고 노예제 폐지와 가톨릭 국교, 농장 강제노동을 담은 헌법을 공포했다(3일·7일·12일 설).

  21. 1801.12.14프랑스
    원정군 출항

    르클레르의 원정군이 브레스트를 떠났다. 모두 3만 1천여 명이 상륙하게 된다.

  22. 161802.02.03–05프랑스아이티
    카프프랑세 소각과 프랑스군 상륙

    크리스토프가 명령대로 도시에 불을 질렀고 프랑스군이 상륙했다.

  23. 171802.03.04–24프랑스아이티
    크레타피에로 포위전

    데살린이 요새를 20일간 지키다 포위망을 뚫고 나갔다. 프랑스군은 약 2,000명을 잃었다.

  24. 181802.06.07프랑스아이티
    투생 체포

    브뤼네 장군이 회담을 구실로 투생을 체포해 프랑스로 보냈다.

  25. 191802.10아이티
    데살린·페티옹의 합류

    과들루프의 노예제 복원 소식 뒤 아르카에 비밀 회합에서 데살린과 페티옹이 프랑스에 맞서기로 했다.

  26. 201802.11프랑스
    르클레르 사망

    르클레르가 토르튀섬에서 황열병으로 죽고 로샹보가 지휘를 이었다.

  27. 1803.04.07프랑스
    투생 옥사

    투생이 쥐라의 주 요새에서 숨졌다.

  28. 211803.05.18영국아이티
    영불 개전과 봉쇄, 원주민군 총사령관

    영국 해군이 생도맹그를 봉쇄했고, 같은 날 아르카에에서 데살린이 원주민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29. 221803.11.18아이티프랑스
    베르티에르 전투

    데살린과 카푸아의 군대가 카프 남쪽에서 로샹보를 꺾었다. 이튿날 항복 조건이 정해졌다.

  30. 231803.11.30프랑스영국
    프랑스군 철수

    프랑스군 8,000명과 백인 민간인 수백 명이 영국 함선에 올라 카프를 떠났다.

  31. 241804.01.01아이티
    아이티 독립 선언

    고나이브에서 데살린이 아이티의 독립을 선포했다.

  32. 251804.02–04.22아이티
    프랑스인 학살

    데살린의 명령으로 남은 프랑스인 3,000~7,000명이 살해되었다. 폴란드·독일계 등은 제외되었다.

  33. 261804.10.06아이티
    데살린 대관

    9월 22일 황제로 추대된 데살린이 카프에서 자크 1세로 대관했다.

  34. 271806.10.17아이티
    데살린 암살

    데살린이 포르토프랭스 북쪽 퐁루주에서 암살되었고, 나라는 크리스토프의 북부와 페티옹의 남부로 갈라졌다.

  35. 281825.07.03프랑스아이티
    프랑스의 승인과 배상금

    군함 14척을 앞세운 프랑스가 1억 5천만 프랑의 배상을 조건으로 독립을 승인했다.

관련 인물 17명

관련 용어

출처: 자료 1자료 2자료 3자료 4자료 5자료 6자료 7자료 8자료 9자료 10자료 11자료 12자료 13자료 14자료 15자료 16자료 17자료 18자료 19자료 20자료 21자료 22자료 23자료 24자료 25자료 26

← 역사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