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10–1919.08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러시아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선포된 평의회 공화국은 왜 133일 만에 무너졌는가?

1918년 10월 과꽃 혁명으로 들어선 카로이의 인민공화국은 영토 상실과 경제난 속에 1919년 3월 빅스 각서로 무너졌고,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합당해 3월 21일 평의회 공화국을 선포했다. 거르버이 샨도르가 의장, 쿤 벨러가 실권자인 혁명통치평의회는 기업과 대토지를 사회화했지만 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지 않았고, 레닌 소년단의 적색 테러는 지지를 더 깎았다. 붉은군대는 북부 원정에서 이겼으나 클레망소 각서에 따라 물러났고, 7월 티서 공세가 실패하자 8월 1일 정부가 사퇴하고 루마니아군이 부다페스트에 들어왔다.

과꽃 혁명과 카로이의 인민공화국

1918년 10월 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무너지는 가운데 카로이 미하이의 독립48년당, 야시 오스카르의 급진당, 사회민주당이 헝가리 국민평의회를 세웠다. 10월 30일 카를 국왕이 기성 정치인 허디크 야노시를 총리로 임명하자 부다페스트의 병사들은 모자의 장미를 떼고 과꽃을 꽂은 채 국민평의회에 충성을 맹세했고, 병사평의회가 시내의 요지를 장악했다. 혁명은 이 꽃의 이름을 따 과꽃 혁명(애스터 혁명)으로 불린다. 허디크는 17시간 만에 물러났고 10월 31일 카로이가 총리가 되었으며, 같은 날 전 총리 티서 이슈트반이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11월 13일 카를이 국정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힌 뒤 11월 16일 헝가리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카로이가 임시 국가원수를 겸했다. 자유선거는 끝내 치러지지 않았다. 1 2

카로이 정부는 윌슨 미국 대통령의 평화 원칙에 기대를 걸고, 11월 2일 국방장관 린데르 벨러의 지휘로 아직 140만 명이 넘던 군의 무장해제를 시작했다. 11월 13일 베오그라드 군사협정은 헝가리 영토 안쪽에 분계선을 그었고, 세르비아·프랑스군이 남쪽에서, 체코슬로바키아군이 북쪽에서, 루마니아군이 동쪽에서 국경을 넘었다. 카로이 정부 시기에 헝가리는 전쟁 전 영토의 약 75%에 대한 통제를 무력 저항 없이 잃었다. 카로이는 본보기로 자기 가문의 영지를 소작인들에게 내주었지만 다른 토지 이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19년 1월 그는 대통령이 되었고 총리직은 베린케이 데네시가 이었다. 3 4 5

러시아 포로수용소에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내전에서 볼셰비키 편에 서서 싸운 쿤 벨러는 1918년 11월 소비에트 측이 준 거액의 자금을 가지고 귀국해, 11월 24일 헝가리 공산주의자당(KMP)을 창립했다. 당은 「붉은 신문」을 내며 카로이 정부와 사회민주당을 공격했고, 1919년 2월 당원은 3만~4만 명으로 추산된다(쿤 벨러 항목은 3만 명 미만, 사회민주당은 70만 명으로 적는다). 2월 20일 공산당 시위대가 사회민주당 기관지 「네프서버」 편집국을 습격해 경찰관을 포함한 7명이 죽었고, 정부는 쿤 등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경찰이 이들을 구타한 일이 알려지자 오히려 동정 여론이 일었고, 옥중의 쿤은 하루에 수백 명의 방문객을 맞으며 당을 지휘했다. 6 7

빅스 각서와 3월 21일의 합당

1919년 3월 20일 협상국 군사사절단장인 프랑스의 페르낭 빅스 중령은 카로이 정부에 헝가리군을 베오그라드 협정선보다 더 뒤로 물리라는 각서를 전달했다. 내용은 2월 말 파리 강화회의에서 정해졌지만 전달된 뒤 이행까지는 18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새 군사분계선이 곧 전후 국경이 되리라는 것이 일반적인 예상이었다. 카로이와 베린케이는 각서를 받아들이면 영토 보전이 위태로워지지만 거부할 힘도 없다고 판단했고, 베린케이 내각은 사임했다. 카로이는 도시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는 사회민주당만이 새 정부를 꾸릴 수 있다고 내각에 알렸다. 8 6 3

사회민주당은 쿤의 볼셰비키 인맥을 통해 러시아 붉은군대의 도움을 얻기를 바랐고, 그 기대 때문에 수감자인 쿤이 오히려 조건을 정했다. 3월 21일 런들레르 예뇌는 감옥에서 쿤 일행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도입에 합의했고, 두 당은 헝가리 사회당이라는 이름으로 합당했다. 합당 문서는 옥중의 코르빈 오토가 타자로 쳤다. 그날 저녁 카로이가 모르는 사이 대통령과 정부가 스스로 물러나 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넘겼다는 소식이 퍼졌고, 이튿날 신문이 그렇게 보도했다. 카로이 명의의 포고문은 파리 강화회의의 결정에 맞서 「세계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정의와 도움을 호소한다」고 썼다. 카로이는 당시에는 이를 부인하지 않았으나 훗날 그런 성명을 낸 적이 없다고 했다. 7 9 10

3월 21일 사회민주당의 거르버이 샨도르와 공산당의 쿤 벨러가 평의회 공화국을 선포했다. 러시아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공산주의자가 이끄는 정권이었다. 쿤은 무선 전신으로 레닌에게 헝가리에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세워졌다고 알리고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과의 동맹 조약을 요청했지만, 내전에 묶인 소비에트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레닌은 3월 22일 무선으로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의 프롤레타리아 정부, 특히 쿤 벨러 동지」에게 인사를 보냈고, 이튿날에는 새 정부가 단순한 사회주의 정부, 곧 「배신자 사회주의자들」의 정부가 아니라 실제로 공산주의 정부가 되리라는 「실질적 보장」이 무엇인지, 공산주의자가 정부의 다수인지를 물었다. 그는 같은 전문에서 헝가리 혁명의 특수한 조건에서 러시아의 전술을 세부까지 모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경고했다. 6 7 11 12

혁명통치평의회와 사회화

새 정부인 혁명통치평의회의 의장은 거르버이였고 쿤은 외무 인민위원이었지만, 레닌과 무선으로 직접 연락하는 쿤이 실권을 쥐었다. 인민위원 33명 가운데 옛 공산당원은 14명, 옛 사회민주당원은 17명, 무소속은 2명이었고, 쿤을 뺀 인민위원은 모두 옛 사회민주당원, 인민위원 대리는 모두 옛 공산당원이었다. 런들레르가 내무, 뵘 빌모시가 사회화, 바르가 예뇌(훗날 소련의 경제학자 예브게니 바르가)가 재무를 맡았고, 루카치 죄르지는 교육 인민위원 대리가 되었다. 4월 2일의 임시 헌법은 노동자·병사·농민 평의회가 법을 만들고 집행하며 재판한다고 규정했다. 4월 7일 평의회 선거에서는 헝가리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투표했지만, 고용주와 성직자 등은 선거권이 없었고 후보는 통합 사회당만 낼 수 있었다. 거르버이의 제안으로 국호의 「소비에트」는 헝가리어 「터나치」(평의회)로 바뀌었고, 6월 23일 최종 헌법은 국호를 「헝가리 사회주의 연방 평의회 공화국」으로 정했다. 7 6 9

정부는 귀족 칭호와 특권을 없애고 교회와 국가를 분리했으며, 첫날부터 전국적 금주령을 내렸다. 주택, 호텔, 상점, 백화점, 대외무역, 금융기관, 학교, 극장, 영화관, 약국과 노동자 20명이 넘는 공업·광업·운수 기업이 보상 없이 사회화되었다. 몰수 대상 토지의 기준은 자료에 따라 100홀드(약 57헥타르) 초과 또는 40헥타르 초과로 다르게 적힌다. 8시간 노동제가 도입되고 집세가 20% 내렸으며, 방이 여럿인 부르주아 주택에 노동자 가족이 들어갔다. 공장 경영은 노동자와 공장평의회에 맡겨졌고 사회보험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집세 인하와 임금 인상은 곧 인플레이션에 묻혔고, 3주 만에 공산당원들은 경제 분야에서 옛 사회민주당원들에게 밀려났다. 금주령은 포도주 산지의 반발을 사 4월 포도주 수출이, 7월 노동자 1인당 하루 반 리터의 포도주가 허용되면서 넉 달 만에 끝났다. 6 9 7

농업 문제는 평의회 공화국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정부는 몰수한 중대 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지 않고 협동조합과 국영농장으로 운영하기로 했으며, 옛 지주와 관리인, 마름이 새 농장의 관리자로 남는 경우가 많았다. 땅에서 일하지 않는 사람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다는 원칙이 선언되었지만, 분배를 기다리던 농업노동자와 빈농은 실망했고 다시 몰수될 것을 두려워한 자영농은 체제에 등을 돌렸다. 빈농에게 텃밭이 나누어진 것은 6월 말이었다. 정부가 농산물 값을 농민이 믿지 않는 새 지폐로 치르면서 도시의 식량 사정도 나빠졌고, 레닌 소년단 같은 무장대가 농촌에서 식량을 징발했다. 체제의 실질적 지지 기반은 부다페스트를 비롯한 대공업 중심지의 노동자에 머물렀고, 농촌에서는 정부의 권위가 거의 미치지 않았다. 7 9 6

스뮈츠 사절과 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의 개입

평의회 공화국의 수립에 놀란 파리 강화회의는 4월 4일 남아프리카의 얀 스뮈츠 장군을 부다페스트에 보냈다. 스뮈츠는 빅스 각서보다 유리한 분계선을 제시하고, 이를 받아들이면 경제 봉쇄를 풀고 헝가리를 강화 협상에 초청하겠다고 했다. 혁명통치평의회는 루마니아군이 마로시(무레슈)강 선까지 물러나고 점령군이 경제·정치에 간섭하지 않으며 세게드와 아라드에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고, 스뮈츠는 협상을 끝내고 떠났다. 그 사이 옛 지배층은 빈에서 베틀렌 이슈트반을 중심으로 반볼셰비키 위원회를 만들었고, 5월 30일 프랑스군이 점령한 세게드에서 카로이 줄러를 총리로 하는 반혁명 정부가 섰다. 전 해군 제독 호르티 미클로시가 그 국방장관이자 국민군 사령관이 되어 6월 6일 세게드에 도착했다. 9 13 14

4월 16일 루마니아군이 분계선을 넘어 공세를 시작했다. 4월 26일 반혁명 성향의 크러토흐빌 카로이가 지휘하던 정예 세케이 사단이 루마니아군과 협상한 끝에 무기를 내려놓아 130킬로미터의 전선이 열렸고, 5월 1일까지 루마니아군은 티서강 동쪽을 모두 차지했다. 북쪽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군이 5월 2일 미슈콜츠에 들어왔다. 쿤은 4월 19일 집회에서 「우리는 영토 보전의 교리를 신봉하지 않는다」며 이 싸움이 국제 혁명과 국제 반혁명의 싸움이라고 했고, 4월 22일 레닌에게는 필요하다면 「브레스트-리토프스크식」 강화라도 맺겠다고 썼다. 4월 26일 그는 협상국의 제안을 거부한 것이 실수였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사임을 입에 올렸다. 루마니아군이 티서강에서 멈춘 것은 5월 1일 소비에트 러시아 외무인민위원 게오르기 치체린이 베사라비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내자 루마니아가 5월 2일 부다페스트와 휴전했기 때문이었다. 9 13 7 15

지도부는 처음부터 러시아 붉은군대와의 연결에 기대를 걸었다. 5월 18일 서무엘리 티보르는 비행기로 키이우에 가서 우크라이나의 포드보이스키 군사인민위원, 안토노프-옵세옌코 사령관과 협의하고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여러 차례 회담하며 루마니아에 대한 공동 작전을 제안했다. 그러나 5월 31일 돌아온 서무엘리는 백군이 모스크바를 위협하고 우크라이나의 붉은군대도 백군·폴란드군과 싸우고 있어 실질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고했다. 레닌은 5월 27일 「헝가리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인사」에서 헝가리 프롤레타리아트가 조직 면에서 이미 러시아를 앞선 듯하다고 칭찬하며, 착취자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엄격하고 신속하며 단호하게」 분쇄하라고 촉구했다. 9 16

북부 원정과 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

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군의 진격 앞에서 정부는 계급 구호 대신 조국 방위를 호소했고, 붉은군대는 5월 말 20만 명으로 불었다. 총사령관은 뵘 빌모시였고 실제 지휘는 참모장 시트롬펠드 어우렐 대령이 맡았다. 옛 왕국군의 장교와 병사 다수가 공산주의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돌아왔다. 5월 20일 붉은군대는 체코슬로바키아군에 반격해 미슈콜츠를 되찾고 루마니아군과 체코슬로바키아군 사이를 갈라놓았다. 이어진 북부 원정에서 6월 6일 코시체(커샤)를 점령했고, 3주 만에 니트라–즈볼렌–코시체 선까지 나아가 바르데요우(바르트퍼)에서 폴란드 국경에 이르렀다. 9 15

되찾은 도시에 걸린 것은 헝가리 삼색기가 아니라 붉은 깃발이었다. 6월 16일 프레쇼우(에페리에시)에서 체코인 언론인 안토닌 야노우셰크를 수반으로 하는 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 국가는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노동자 20명 이상의 공장·대토지·금융기관의 국유화를 포고하고 혁명재판소와 슬로바키아 「붉은군대」를 세웠지만, 부다페스트에 의존했고 헝가리의 일부인지 독립국인지, 국경이 어디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쿤은 6월 10일 코시체에서 「우리 볼셰비키는 헝가리의 통합을 지지한다」고 연설했고, 체코 역사가 야로슬라프 셰베크는 이 국가를 슬로바키아에서 헝가리의 영향력을 되살리려는 덮개로도 본다. 반대로 헝가리의 민족주의자와 직업 장교들은 슬로바키아 공화국의 선포를 공산주의 정부가 잃은 땅을 되찾을 뜻이 없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9 17 6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는 6월 7일 전보로 공격 중지를 요구했고, 6월 13일에는 강화회의가 정한 헝가리의 북부·동부 국경을 통보하며 붉은군대가 그 뒤로 물러나면 루마니아군도 티서강 동쪽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지도부는 긴 논쟁 끝에 이를 받아들였고, 쿤은 「강요된 제국주의적 강화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보다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6월 24일 전투가 멈췄고 6월 30일 철수가 시작되어 7월 7일 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도 사라졌다. 그러나 루마니아군은 티서강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희생을 치르고 얻은 땅을 내준 데 반발해 시트롬펠드가 사임했고, 장교와 병사가 대거 떠나면서 붉은군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4 15 7 9 17

적색 테러

혁명통치평의회는 3월 21일 계엄을 선포하고 혁명재판소를 두었으며, 경찰과 헌병을 붉은 경비대로 대체했다. 공산당은 정치경찰을 쥐었고, 6월부터 코르빈 오토가 정치조사국을 이끌었다. 서무엘리는 4월 20일 죄르 연설에서 「피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체르니 요제프가 조직한 약 200명의 무장대는 「레닌 소년단」을 자칭하며 서무엘리의 장갑열차를 타고 전국을 돌았고, 반혁명이 의심되는 곳에서 재판 없이 사람을 처형했다. 4월 마코에서 잡힌 인질 가운데 전 하원의장 나바이 러요시와 마코 시장 등은 부다페스트로 끌려가던 도중에 총살되었다. 루카치는 붉은군대 제5사단 정치위원으로서 5월 포로슬로에서 자기 부대 병사 8명을 처형하게 했다. 9 18 19 20) 21

테러는 정부 안에서도 다툼거리였다. 사회민주당 출신 인민위원들은 서무엘리와 체르니를 억제하라고 요구했고, 국방 인민위원 뵘은 4월 말 무장대와 재판소의 해산을 명령했다. 서무엘리는 이를 따르지 않고 5월 솔노크와 어보니에서 재판을 이어 갔다. 5월 19일 군은 괴될뢰에서 체르니 부대를 무장해제했지만, 그 가운데 43명은 코르빈의 정치조사국에 배속되어 「두 번째 체르니 부대」가 되었다. 6월 24일 부다페스트에서 루도비커 사관학교 생도들이 봉기하고 다뉴브강의 모니터함이 인민위원들의 숙소인 헝가리아 호텔을 포격했으나 하루 만에 진압되었다. 같은 시기 칼로처와 두너퍼터이 일대의 농민 봉기는 서무엘리의 징벌대와 레닌 소년단에게 유혈 진압되었고 공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부다페스트의 유일한 협상국 대표였던 이탈리아의 귀도 로마넬리 중령은 테러에 항의했고, 6월 봉기 가담자들을 보복에서 구해 냈다. 18 19 9 7

적색 테러의 사망자 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헝가리어 위키백과는 여러 자료가 300~600명으로 본다고 정리하고, 영어권 서술은 혁명재판소가 370~587명을 처형했다고 하거나 1922년 바리 얼베르트의 『헝가리 적색 테러의 희생자』를 따라 590명을 든다. 1919년 12월 체르니와 레닌 소년단원 13명이 부다페스트의 군 교도소에서 처형되었고, 코르빈도 같은 달 교수형에 처해졌다. 뒤이은 헝가리 백색테러의 희생자는 1,500~6,000명으로 추산되며, 쿤 벨러 항목은 그것이 적색 테러의 열 배에 이르렀다고 쓴다. 9 20) 19 10 22) 7

붕괴: 티서 공세에서 부다페스트 점령까지

7월 20일 붉은군대는 티서강을 건너 루마니아군을 공격했지만, 루마니아군은 며칠 만에 공세를 멈춰 세우고 헝가리군의 전선을 돌파했다. 그 사이 7월 23일 빈 주재 공사로 부임한 뵘은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위임을 받아 협상국 사절단과 평의회 정부의 퇴진을 합의했다. 파리 강화회의의 5인 위원회는 협상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새 정부가 서야만 식량을 보내고 봉쇄를 풀며 강화를 맺겠다고 선언했고, 「네프서버」가 7월 30일 이를 실었다. 쿤은 7월 27일과 30일 모스크바에, 30일에는 레닌에게 직접 베사라비아에서 루마니아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7월 31일 우크라이나의 사정 때문에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답이 왔다. 루마니아군은 7월 29~30일 티서강을 건너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6 9 23

7월 31일 쿤 등 지도자들은 전선 근처의 체글레드에 다녀왔고, 8월 1일 당 지도부와 혁명통치평의회의 합동회의는 사퇴를 결정했다. 쿤은 마지막 연설에서 「헝가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고 말하며, 공장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타도」를 외치던 노동자들이 앞으로 어떤 정부에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인민위원들은 특별열차로 빈에 갔고 오스트리아에서 억류되었다. 쿤은 지하조직을 위해 루카치와 코르빈을 남겼는데, 코르빈은 8월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다. 서무엘리는 8월 2일 자동차로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다 붙잡혔고,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당국은 그가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국경 경비대에 사살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9 7 21 10 18

부다페스트 노동자평의회는 인쇄공 노동조합 지도자 페이들 줄러에게 정부를 맡겼다. 이른바 「노동조합 정부」는 8월 2일 첫 회의에서 평의회 공화국을 폐지하고 인민공화국을 되살렸으며, 혁명재판소를 해산하고 정치범을 석방했고, 8월 4일 붉은 경비대를 해산했다. 사회화된 재산은 옛 소유주에게 돌려주었지만 농민을 의식해 대토지는 지주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루마니아군은 협상국의 금지에도 8월 3일 기병대를, 4일 본대를 부다페스트에 들여보냈고, 미국의 해리 힐 밴드홀츠 장군이 국립박물관의 약탈을 막았다. 협상국은 사회주의자만으로 된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고, 8월 6일 우익 단체 「백악관 동지회」의 프리드리히 이슈트반이 루마니아군을 등에 업고 페이들 정부를 몰아냈다. 이튿날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이 섭정을 자처하며 프리드리히를 총리로 임명했다. 6 24 25 3 13 9

루마니아군은 벌러톤 호 주변을 뺀 헝가리 대부분을 점령했다가 1920년 초 식량과 공장 설비, 철도 차량을 가지고 철수했다. 세게드에서 국민군을 키운 호르티는 1919년 11월 국민군을 이끌고 부다페스트에 들어왔고, 넉 달 뒤인 1920년 3월 1일 다시 세워진 헝가리 왕국의 섭정이 되었다. 그 사이 국민군 장교들은 공산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 유대인을 겨냥한 헝가리 백색테러를 벌였다. 13 22) 14

평가

레닌은 1919년 5월 헝가리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의 이행이 러시아보다 「비교할 수 없이 쉽고 평화로웠다」며, 부르주아 정부의 자발적 사퇴와 공산주의 강령에 따른 노동계급의 즉각적 통일을 높이 평가했다. 패배 뒤 평가는 달라졌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를 위한 테제에서 그는 개량주의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서둘러 공산주의자라는 이름을 단 헝가리 사회민주당원들이 저지른 것과 같은 배신」이 되풀이된다고 경고했다. 같은 대회에서 그는 바르가의 책을 들어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헝가리 농촌을 거의 바꾸지 못했고 일용 노동자는 아무 변화를 보지 못했으며 소농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몰수한 대토지의 일부라도 소농에게 넘기지 않으면 소농은 옛 질서와 소비에트 독재의 차이를 보지 못하고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권력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었다. 16 26 27

오늘날 헝가리 역사학에서는 공산당의 집권을 혁명보다 쿠데타에 가까운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롬시치 이그나츠는 1918년 10월의 혁명이 거대한 대중운동을 동반한 것과 달리 1919년 3월의 권력 이양은 몇몇 지도자의 막후 합의로 「거의 쿠데타처럼」 이루어져 수도와 지방의 주민을 놀라게 했다고 쓴다. 다만 이 정권 교체가 외국군의 압박과 잇따른 각서·최후통첩 속에서 빠르게 동원할 군대가 절실해진 상황에서 일어났다는 점도 함께 지적된다. 이탈리아 외교관 출신의 역사가 알베르토 인델리카토는 붕괴의 원인을 협상국이나 백군의 개입이 아니라 체제 자신의 사회·경제 정책의 결함에서 찾는다. 반면 협상국의 봉쇄와 고립, 이웃 나라들과의 전쟁, 내전 중인 러시아 붉은군대와 손잡을 수 없었던 사정이 국내 개혁의 실패와 겹쳐 붕괴를 불렀다는 정리도 있다. 9 7 6

지도부의 상당수가 유대계였다는 사실은 붕괴 뒤 반유대주의를 부추겼다. 롬시치는 유대계 인민위원과 인민위원 대리의 비율이 60%, 아마도 70~75%에 이르렀다고 쓰지만, 헝가리 유대인 대다수는 볼셰비키 지지자가 아니었다. 헝가리 백색테러는 유대인 전체를 공산주의자로 몰아 약탈하고 학살했고, 미국 역사가 앤드루 C. 야노시는 그 테러가 붉은 경비대의 무작위 폭력보다 더 잔인했으며 사적 보복과 이득의 수단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공산당 정권은 1959년 법률로 평의회 공화국을 기념했지만 이 법은 1993년 폐지되었고, 2019년 11월 부다페스트에는 1934년 호르티 시대의 적색 테러 희생자 기념비가 복원되었다. 평의회 공화국의 인민위원이던 라코시는 1949~1956년 두 번째 공산주의 국가의 지도자가 되었고, 쿤은 1938년 소련의 대숙청 때 처형되었다. 9 14 22) 20) 6 7

결과

평의회 공화국의 붕괴 뒤 루마니아군이 헝가리 대부분을 점령했고, 페이들의 노동조합 정부는 엿새 만에 쫓겨났으며 호르티의 국민군이 권력을 잡아 헝가리 백색테러를 벌였다. 레닌과 코민테른은 사회민주당과의 합당과 토지 미분배를 패배의 교훈으로 삼았다.

연표와 지도

부다페스트 프레쇼우 빈 미슈콜츠 세게드 4 프레쇼우 5 빈 2 미슈콜츠 1 부다페스트 3 세게드
  1. 11918.10.31헝가리
    과꽃 혁명

    병사평의회가 부다페스트의 요지를 장악했고 국왕은 카로이를 총리로 임명했다.

  2. 1918.11.16헝가리
    인민공화국 선포

    카를의 퇴진 선언 뒤 카로이가 임시 국가원수를 겸했다.

  3. 1918.11.24헝가리소련
    헝가리 공산주의자당 창립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쿤 벨러 등이 당을 세웠다.

  4. 1919.02.20헝가리
    「네프서버」 습격과 쿤의 체포

    7명이 죽었고 정부는 공산당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5. 1919.03.20헝가리프랑스
    빅스 각서

    협상국이 헝가리군의 추가 철수를 요구했고 베린케이 내각이 사임했다.

  6. 1919.03.21헝가리
    합당과 평의회 공화국 선포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합당하고 혁명통치평의회가 섰다.

  7. 1919.04.04헝가리프랑스
    스뮈츠 사절

    협상국의 타협안을 혁명통치평의회가 조건부로 거부했다.

  8. 1919.04.16루마니아헝가리
    루마니아군의 공세

    5월 1일까지 루마니아군이 티서강 동쪽을 차지했다.

  9. 21919.05.20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북부 원정 시작

    붉은군대가 미슈콜츠를 되찾고 체코슬로바키아군을 밀어냈다.

  10. 31919.05.30헝가리프랑스
    세게드 반혁명 정부

    호르티가 국방장관이자 국민군 사령관이 되었다.

  11. 1919.06.13프랑스헝가리
    클레망소 각서

    강화회의가 정한 국경 뒤로 붉은군대의 철수를 요구했다.

  12. 41919.06.16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
    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

    프레쇼우에서 선포되어 7월 7일까지 존속했다.

  13. 1919.06.24헝가리
    부다페스트 봉기 진압

    루도비커 생도와 모니터함의 반란이 하루 만에 진압되었다.

  14. 1919.07.20헝가리루마니아
    티서 공세

    붉은군대의 마지막 공세가 루마니아군에 막혔다.

  15. 51919.08.01헝가리오스트리아
    혁명통치평의회 사퇴

    인민위원들은 빈으로 떠났고 페이들의 노동조합 정부가 들어섰다.

  16. 1919.08.04루마니아헝가리
    루마니아군의 부다페스트 입성

    전날 기병대에 이어 본대가 시내에서 행진했다.

  17. 1919.08.06헝가리루마니아
    프리드리히의 쿠데타

    루마니아군을 등에 업은 우익 세력이 페이들 정부를 몰아냈다.

  18. 1919.11헝가리
    국민군의 부다페스트 입성

    호르티가 국민군을 이끌고 수도에 들어왔다.

관련 인물 16명

참여10

내무 인민위원 · 붉은군대 지휘관런들레르 예뇌1875–1928

감옥에서 쿤과 독재 도입에 합의했고 내무 인민위원과 북부 원정의 군단장을 지냈다.

국방 인민위원 · 붉은군대 총사령관뵘 빌모시1880–1949

붉은군대를 지휘했고 7월 빈에서 협상국과 평의회 정부의 퇴진을 합의했다.

재무 인민위원 · 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예브게니 바르가1879–1964

재무 인민위원과 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으로 사회화를 이끌었고, 그의 책은 레닌의 농업 비판의 근거가 되었다.

사회적 생산 인민위원라코시 마차시1892–1971

상업 인민위원 대리와 사회적 생산 인민위원을 지냈고 7월 말 붉은 경비대를 지휘했다.

교육 인민위원 · 사단 정치위원루카치 죄르지1885–1971

교육 인민위원으로 일하고 제5사단 정치위원으로 병사 8명을 처형하게 했으며, 붕괴 뒤 지하당을 맡았다.

소비에트 러시아 인민위원회의 의장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

쿤과 무선으로 연락하며 공산당의 주도를 요구했고 패배 뒤 합당과 농업 정책을 비판했다.

소비에트 러시아 외무인민위원게오르기 치체린1872–1936

5월 1일 베사라비아 문제로 루마니아에 최후통첩을 보내 루마니아군을 티서강에 멈춰 세웠다.

우크라이나 군사인민위원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1880–1948

5월 키이우에서 서무엘리와 공동 작전을 협의했다.

우크라이나 붉은군대 사령관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1883–1938

5월 키이우에서 서무엘리와 루마니아에 대한 공동 작전을 협의했다.

인민공화국 대통령카로이 미하이1875–1955

빅스 각서로 정부가 무너졌고, 그의 명의로 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에 넘긴다는 포고가 나왔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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