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와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
1903년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는 강령과 규약에 합의하고도 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갈라졌나? 당원 자격 한 줄과 편집국 세 자리를 둘러싼 다툼은 어떻게 1905년 두 개의 대회로 굳어졌나?
1903년 7~8월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는 《이스크라》파의 주도로 강령을 채택하고 분트의 연방제 요구를 물리쳤다. 그러나 당원 자격을 정한 규약 제1조에서 마르토프 안이 레닌 안을 이겼고, 분트와 경제주의 대의원이 떠난 뒤 치러진 중앙기관 선거에서는 레닌 쪽이 이겨 다수파(볼셰비키)와 소수파(멘셰비키)라는 이름이 생겼다. 대회 뒤 소수파는 보이콧 끝에 《이스크라》를 되찾았고, 팸플릿 논쟁과 화해 시도를 거쳐 1905년 볼셰비키의 제3차 대회와 멘셰비키의 제네바 협의회로 분열이 굳어졌다.
1903년의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왜 대회를 다시 열어야 했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은 1898년 3월 민스크에서 이미 창당을 선언했다. 그러나 그 제1차 대회에 모인 사람은 아홉 명뿐이었고, 대회는 당명과 선언만 남긴 채 끝났다. 강령도 규약도 없었고, 대의원 대부분이 곧 체포되었다. 그 뒤 5년 동안 러시아 각지의 사회민주주의 조직은 서로 연락이 약한 지역 위원회와 노동자 모임으로 흩어져 있었다. 크룹스카야는 제2차 대회를 돌아보며 이 대회가 엄밀히 말해 창립 대회였다고 썼다. 제1차 대회는 이름과 선언만 정했을 뿐이고, 강령 없이 지내 온 당이 이번에야 이론의 기초를 놓았다는 것이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도 제2차 대회를 사실상의 창립 대회라고 부른다. 1 2 3
그 5년 사이 운동 안에서는 노선 다툼이 커졌다. 노동자의 임금과 노동시간을 위한 경제투쟁에 힘을 모으고 전제정에 맞선 정치투쟁은 자유주의자에게 맡기자는 경제주의 조류가 《라보체예 델로》와 해외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동맹을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에 맞서 레닌, 마르토프, 포트레소프는 플레하노프·악셀로드·자술리치의 노동해방단과 손잡고 1900년 12월 24일(구력 11일) 라이프치히에서 신문 《이스크라》 창간호를 냈다. 제사는 데카브리스트의 시에서 따온 「불꽃에서 불길이 타오르리라」였다. 편집국은 이 여섯 사람이었고, 신문은 뮌헨, 런던, 제네바로 옮겨 가며 찍혔다. 크룹스카야는 편집국 서기로 러시아 안의 연락을 맡았다. 4 5 6
《이스크라》는 처음부터 신문 이상의 것이었다. 국경을 넘어 신문을 들여오고 나눠 주는 대리인망이 러시아 곳곳에 생겼고, 이 연결망이 곧 전국 조직의 뼈대가 되었다. 레닌은 1902년 3월 슈투트가르트에서 낸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이 구상을 이론으로 정리했다. 그는 경제주의자들의 「수공업적」 방식을 비판하며, 전국적 정치신문과 혁명 활동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의 비밀 조직, 곧 직업혁명가 조직이 흩어진 운동을 묶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은 러시아 안에서는 검열로 금지되었지만 활동가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대회에서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로 공격받았다는 크룹스카야의 회고처럼, 이 책은 다가올 논쟁의 배경이 되었다. 4 7 8 9 1
대회는 어떻게 준비되었고, 대회장에는 누가 모였나?
대회를 열자는 움직임은 《이스크라》파만의 것이 아니었다. 경제주의 쪽의 해외 동맹도 1900년부터 대회 소집을 호소했고, 1902년 봄 비아위스토크 회의에는 양쪽이 함께 모여 조직위원회를 뽑았다. 그러나 참가자들이 곧 거의 모두 체포되자 《이스크라》파는 1902년 가을 다시 회의를 열어 자기 쪽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새 조직위원회를 꾸렸다. 이 위원회는 1903년 2월 오룔 회의에서 대회 소집 규정 초안을 채택하고 각 지역 조직을 돌며 대표권을 가진 조직의 명단을 확정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이 과정에서 대의원 다수가 《이스크라》 지지자로 채워졌고, 뜻이 다른 조직은 여러 구실로 대회에서 밀려났다고 적는다. 2 10
대회는 1903년 7월 30일(구력 7월 17일) 브뤼셀에서 열렸다. 벨기에 당은 안전을 위해 커다란 밀가루 창고를 내주었는데, 트로츠키는 양모 더미가 쌓인 창고에서 벼룩 떼에 시달렸다고 회고했다. 플레하노프가 개회 연설을 했고, 창문은 붉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그러나 벨기에 경찰이 대의원들을 뒤쫓고 몇 사람을 추방하자 대회는 8월 6일 이후 런던으로 옮겨 갔다. 모두 37차례 회의 가운데 13차례가 브뤼셀에서, 24차례가 런던에서 열렸고, 대회는 8월 23일(구력 8월 10일)에 끝났다. 26개 조직이 대표를 보냈으며, 결정 투표권 51표를 가진 대의원 43명과 발언권만 가진 대의원 14명이 참석했다. 2 10 5 1
레닌은 대회 직후 쓴 기록에서 51표의 정치적 분포를 이렇게 정리했다. 분트 5표, 《라보체예 델로》파 3표, 《유즈니 라보치》파 4표, 그가 「늪」이라 부른 동요파 6표, 그리고 대체로 확고한 《이스크라》파 약 33표였다. 이 33표가 함께 움직이면 어떤 안건이든 결정할 수 있었다. 대의원 명단에는 노동해방단의 플레하노프와 데이치, 《이스크라》 조직의 마르토프, 해외 동맹의 레닌, 시베리아 동맹의 트로츠키, 모스크바 위원회의 바우만, 키예프 위원회의 크라시코프, 오데사 위원회의 제믈랴치카, 돈 위원회의 구세프, 바쿠 위원회의 크누냔츠가 있었다. 분트에서는 리베르와 메뎀 등이 왔고, 악셀로드·자술리치·포트레소프·크룹스카야는 발언권만 가졌다. 11 12 10
대회는 무엇에 합의했고, 분트는 왜 떠났나?
오늘날 기억되는 분열 때문에 가려지기 쉽지만, 대회는 큰 쟁점 대부분에서 합의에 이르렀다. 《이스크라》와 《자랴》 편집국이 함께 다듬은 강령 초안은 아홉 차례 회의에 걸쳐 토론되었다. 대회는 강령을 두 부분으로 채택했다. 최대 강령은 사회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최종 목표의 조건으로 내걸었고, 최소 강령은 차르 전제정 타도, 민주 공화국 수립, 8시간 노동제, 모든 민족의 완전한 평등과 자결권, 농노제 잔재 철폐, 그리고 지주가 농민에게서 떼어 간 땅(「오트레즈키」)의 반환을 당면 과제로 적었다. 경제주의자 아키모프와 마르티노프, 분트의 리베르는 서유럽 당의 강령에 없다는 이유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조항에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10 1
첫 번째 큰 충돌은 유대인 노동자 총동맹(분트)의 지위를 두고 일어났다. 분트는 제1차 대회의 공동 창립 조직이었고, 1903년에는 3만 명 안팎의 회원을 가진 제국 최대의 사회주의 단체였다. 분트는 자신을 유대인 노동자의 유일한 대표로 인정하고 당을 연방제로 묶자고 요구했다. 《이스크라》파는 이를 민족별로 쪼개진 당을 만드는 분리주의라고 보고, 러시아 땅의 모든 민족 노동자를 하나의 당에 모으자고 맞섰다. 레닌은 유대인인 마르토프와 트로츠키가 반론에 나서게 했다. 연방제 제안은 41대 5(기권 5)로 부결되었다. 이 표결에서는 훗날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한편이었다. 13 10 2 1
분트 대의원들은 대회가 연방제와 유일 대표권 요구를 거부하자 대회장을 떠났다. 앞서 언어 평등 문제에서는 모든 시민이 자기 언어를 쓸 권리를 강령에 넣자는 분트 쪽 수정안이 23대 23으로 부결되었고, 비슷한 내용을 그루지야의 조르다니아가 다시 내자 통과된 일도 있었다. 이어 대회가 《이스크라》파의 해외 연맹을 당의 유일한 해외 조직으로 인정하자, 해외 동맹을 대표한 두 대의원도 항의하며 떠났다. 이렇게 일곱 표가 빠지자 대회장의 힘의 균형이 바뀌었다. 대회는 그 밖에도 사회혁명당을 사회주의의 깃발 아래 부르주아적 경향을 좇는 분파로 규정하는 결의와, 시위, 노동조합 투쟁, 학생, 종파 신도 사업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다. 10 2 14 11
당원은 누구인가? 규약 제1조 표결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규약 토론에서 《이스크라》파 안의 금이 처음 드러났다. 쟁점은 당원 자격을 정한 제1조였다. 레닌의 초안은 당원을 「강령을 인정하고 물질적 수단과 당 조직 하나에 직접 참여하는 것으로 당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정의했고, 마르토프는 마지막 부분을 「당 조직 하나의 지도 아래 정기적으로 개인적 협력을 하는 사람」으로 바꾸자고 했다. 레닌은 마르토프 안의 「탄력성」이 동요하는 분자와 기회주의에 문을 연다고 보았고, 마르토프는 파업과 시위에 나선 노동자 누구나 당원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기쁜 일이라고 했다. 논쟁의 내용과 이후의 해석은 당원 자격 규약 제1조 논쟁 항목에서 따로 다룬다. 11 15 16
표결에서는 마르토프 안이 이겼다. 의사록에 따르면 28대 22, 기권 1이었고, 레닌은 대회 직후의 기록에서 기억나는 대로 28대 23 정도였다고 적었다. 마르토프 안에 찬성한 쪽에는 악셀로드, 자술리치, 트로츠키 같은 《이스크라》파 일부와 함께 분트 5표와 《라보체예 델로》파가 있었다. 레닌은 한 《라보체예 델로》파 대의원이 「더 나쁜 쪽」을 고르려고 마르토프 안에 표를 던졌다고 말했다며 이 연합을 꼬집었다. 플레하노프는 레닌 편에 섰다. 그래도 레닌 자신은 토론 중에 이 차이를 당의 생사가 걸린 문제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규약의 조항 하나 때문에 우리가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머지 조항은 큰 이견 없이 통과되었다. 2 11 15 10
이 표결이 중요해진 것은 조항 자체보다 그것이 드러낸 편 가르기 때문이었다. 레닌은 이 무렵부터 마르토프를 따르는 《이스크라》파 소수가 비《이스크라》파와 「늪」을 끌어모으는 결집점이 되었다고 보았다. 반대로 마르토프 쪽은 레닌의 안을 당을 중앙에 복종시키려는 시도로 읽었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역사가들 사이에서도 평가가 갈린다고 정리한다. 영국 역사가 로버트 서비스는 마르토프가 구성원이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당을, 레닌이 중앙에 복종하는 당을 그렸다고 보지만, 대회 속기록만 보면 두 집단 사이에 원칙의 깊은 차이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다. 17 16 2
다수파와 소수파라는 이름은 어떻게 생겼나?
진짜 결렬은 중앙기관 선거에서 일어났다. 대회 전부터 《이스크라》 편집국 여섯 명은 표가 3대 3으로 갈려 일이 막히곤 했다. 레닌은 대회 전 일곱 번째 편집인으로 트로츠키를 넣자고 했으나 플레하노프가 반대했다. 그러자 레닌은 편집국을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레닌 세 사람으로 줄이자고 제안했다. 그는 지난 45호 동안 마르토프가 39편, 레닌 32편, 플레하노프 24편을 쓴 반면 자술리치는 6편, 포트레소프 8편, 악셀로드 4편에 그쳤다는 수를 들었고, 여섯 명 편집국이 3년 동안 한 번도 다 모여 회의한 적이 없다고 했다. 크룹스카야에 따르면 마르토프는 처음에는 3인 편집국에 동의했으나, 그것이 악셀로드·자술리치·포트레소프를 배신하는 일이라는 설득을 받고 돌아섰다. 2 11 1 5
분트와 해외 동맹이 떠난 뒤 레닌과 플레하노프를 따르는 확고한 《이스크라》파는 24표 안팎으로 다수가 되었다. 대회는 옛 편집국을 그대로 승인하자는 제안을 물리쳤고, 이어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레닌을 편집국으로 뽑았다. 마르토프는 당 안에 「계엄 상태」가 선포되었다며 선출을 거부했다. 중앙위원회에는 레닌을 지지하는 크르지자놉스키와 렌그니크(둘 다 궐석), 노스코프가 뽑혔고, 다섯 명으로 된 당 평의회의 다섯째 위원으로 플레하노프가 선출되었다. 마르토프 지지자들과 「늪」은 투표용지를 내지 않았다. 크룹스카야는 중앙위원회 선거에서 44표 가운데 20표가 기권이었다고 적었다. 11 2 1 18
여기서 두 이름이 나왔다. 처음에는 「강경파」와 「온건파」라는 말이 돌았는데, 트로츠키는 대회 전부터 레닌이 강경파, 마르토프가 온건파였다고 회고했다. 선거에서 이긴 뒤 레닌은 자기 편을 다수파라는 뜻의 볼셰비키(большинство에서)라 불렀고, 마르토프는 자기 편을 소수파라는 뜻의 멘셰비키(меньшинство에서)라 받아들였다. 이 이름은 그 뒤로 굳어졌다. 그러나 대회 전체로 보면 어느 쪽도 처음부터 끝까지 확고한 다수를 갖지 못했다. 제1조에서는 마르토프가 이겼고, 선거에서는 일곱 표가 빠진 덕에 레닌이 이겼다.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불리한 이름을 받아들인 것이 마르토프의 실책이었고, 한때의 표결 결과를 이름에 새긴 것은 레닌의 수완이었다는 견해를 소개한다. 9 5 19 2
대회가 끝난 뒤 소수파는 어떻게 《이스크라》를 되찾았나?
대회가 끝나자 소수파는 새 중앙기관을 보이콧했다. 1903년 10월 중순 제네바에서 멘셰비키 활동가 17명이 모여 마르토프, 포트레소프, 악셀로드, 단, 트로츠키를 「소수파 뷰로」로 뽑았고, 레닌 지지자들이 「닫힌, 한쪽으로 고른 중앙 조직」을 만들어 당을 쪼갰다고 비난했다. 소수파는 러시아로 가는 운송 연결을 중앙위원회에 넘기지 않았고, 지역 조직의 돈이 중앙 금고로 가는 것도 막았다. 크룹스카야는 그동안 아파트나 돈을 대 주던 동조자들이 「개인적 다툼」을 이유로 손을 떼었다고 썼다. 대회 직후 레닌은 노스코프의 제안에 따라 옛 편집국을 다시 넣는 데 반대하지 않았지만, 멘셰비키가 거절했다고 그녀는 회고했다. 20 21 22
첫 충돌의 무대는 해외 러시아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연맹의 대회였다. 1903년 10월 26~31일 제네바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는 멘셰비키가 수에서 앞섰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나온 레닌이 제2차 대회 보고를 하자 단과 크로흐말 등이 책상을 두드리며 맞섰다고 크룹스카야는 썼다. 연맹은 볼셰비키의 「관료적 중앙집권주의」에 맞서 싸우자는 결의를 내고 레닌을 견책했으며, 중앙위원회에서 독립된 자기 규약을 채택했다. 중앙위원회를 대표해 참석한 렌그니크가 규약 수정을 요구했다가 거부당하자 연맹과 그 대회를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이 소동 속에서 플레하노프는 「나는 내 편에 총을 쏠 수 없다」고 말했다. 20 22 21 17
플레하노프는 당의 평화를 위해 옛 편집국을 다시 불러들이기로 했다. 레닌은 대회의 결정을 한 동아리의 뜻에 맞춰 뒤집을 수는 없다고 보았지만, 평화를 가로막지도 않겠다며 《이스크라》 제51호를 끝으로 편집국을 떠났다. 플레하노프는 곧 악셀로드, 자술리치, 마르토프, 포트레소프를 편집국에 넣었다. 1903년 11월 20일(구력 7일) 《이스크라》 제52호에 실린 그의 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경제주의를 이긴 뒤 그 반대편의 「일직선」 사고에 빠지면 안 되며, 수정주의에 기울었다가 돌아온 동지들을 당에서 내쫓는 것은 당의 통일에 해롭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당의 중앙기관지는 소수파의 손에 들어갔고, 당내에서는 레닌 시기의 「옛 《이스크라》」와 그 뒤의 「새 《이스크라》」를 구별하게 되었다. 17 23 4 6
1904년의 팸플릿 논쟁에서 양쪽은 무엇을 주장했나?
1904년은 팸플릿의 해였다. 마르토프는 대회 결과를 「계엄 상태」로 규정한 팸플릿을 냈고, 트로츠키는 시베리아 동맹 대의원으로서 쓴 『시베리아 대표단 보고』에서 레닌을 거칠게 공격했다. 그는 레닌이 고집한 「계엄 상태」는 전권을 요구하고, 조직된 불신의 체제는 철의 손을 요구하며, 공포 정치의 체계는 로베스피에르로 완성된다고 썼다. 레닌은 대회 의사록과 대의원들의 발언을 하나하나 분석한 『일보 전진, 이보 후퇴』로 답했다. 1904년 5월 제네바에서 나온 이 책은 대회의 대립을 당의 혁명파와 기회주의파의 대립으로 그렸다. 플레하노프는 중앙위원회에 이 책을 부인하라고 요구했다. 21 24 25 26
비판은 러시아 밖에서도 왔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904년 7월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조직 문제」에서 『일보 전진, 이보 후퇴』를 「초중앙집권주의」 경향의 체계적 서술로 보고, 그것이 당 활동을 북돋우기보다 통제하려는 감독자의 정신에 차 있다고 비판했다. 그녀는 사회민주당의 중앙집권은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들 스스로의 「자기 중앙집권」이어야 한다고 했고, 진정한 혁명 운동의 실수가 가장 똑똑한 중앙위원회의 무오류성보다 역사적으로 훨씬 값지다고 썼다. 트로츠키는 1904년 8월 악셀로드에게 바친 『우리의 정치적 과제』에서, 당 조직이 당을, 중앙위원회가 당 조직을, 마침내 독재자가 중앙위원회를 「대리」하게 되리라고 경고했다. 27 28 20 29
그러나 이 논쟁이 조직론에만 머문 것은 아니었다. 플레하노프는 1904년 7~8월 「노동계급과 사회민주주의 인텔리겐치아」에서 뒤늦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모든 면에서 약한 팸플릿」이라고 비판했고, 랴자노프는 훗날 플레하노프 저작집 해제에서 조직 문제만이 아니라 전술 문제에서도 차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소수파 안에서도 의견은 하나가 아니었다. 트로츠키는 분열을 하나의 일화쯤으로 보고 다수파와 빨리 다시 합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자유주의에 대한 태도와 볼셰비키에 대한 태도를 두고 멘셰비키 지도부와 1년 내내 다투다가 1904년 9월 소수파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했다. 그 뒤 그는 어느 분파에도 기대지 않고 자기 책임으로 움직였다. 23 30 9
중앙위원회는 왜 화해파가 되었고, 볼셰비키는 어떻게 따로 조직되었나?
대회가 뽑은 중앙위원회는 처음에는 레닌 지지자로만 이루어졌다. 1903년 10월 크라신, 제믈랴치카, 구사로프, 에센이, 11월에는 레닌과 갈페린이 중앙위원으로 보선되었다. 그러나 1904년 여름 사정이 바뀌었다. 렌그니크와 에센이 체포되고 크르지자놉스키와 구사로프가 물러났으며 제믈랴치카는 밀려났다. 남은 노스코프, 크라신, 갈페린은 분열을 끝내는 것이 먼저라고 보았다. 1904년 7월 중앙위원회는 새 《이스크라》 편집국을 인정하고 레닌도 편집국에 넣자는 선언을 냈다. 레닌은 이 7월 선언이 자기 견해를 펴고 러시아와 연락하는 길을 막는다며 중앙위원회에서도 물러났다. 2 21 4 18
이때부터 볼셰비키는 당 중앙과 별도로 자기 조직을 세웠다. 1904년 8월 스위스에서 레닌 지지자 22명이 모여 「당에게」라는 호소문을 내고 제3차 대회 소집을 요구했다. 오데사, 예카테리노슬라프, 니콜라예프, 리가,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위원회와 캅카스 동맹이 이를 지지했다. 레닌은 1904년 가을의 초안에서 새 중앙위원회가 다수파를 무시하고 소수파와 비밀리에 거래했다고 비난하며 다수파 위원회 뷰로의 결성을 알렸다. 남부, 캅카스, 북부의 지역 회의가 이 뷰로를 뽑아 대회 준비를 맡겼다. 보그다노프, 올민스키, 루나차르스키 등이 합류했고, 1905년 1월 4일(구력 1904년 12월 22일) 볼셰비키 신문 《브페료드》(전진)가 제네바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6 31 21 4
화해 노선은 오래가지 못했다. 1905년 2월 20일(구력 7일) 레닌은 중앙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제명되었지만, 이틀 뒤인 2월 22일(구력 9일) 노스코프, 갈페린 등 중앙위원 다수가 한꺼번에 체포되었다. 3월이 되자 중앙위원회에는 크라신과 류비모프만 남았고, 이 중앙위원회가 다수파 위원회 뷰로와 함께 제3차 대회를 소집했다. 그 사이 러시아에서는 1905년 1월 페테르부르크의 「피의 일요일」로 혁명이 시작되었다. 크룹스카야는 혁명의 물결이 높아지면서 망명지의 분파 다툼이 예전만큼 그들을 괴롭히지 않게 되었고, 러시아와 오가는 편지가 한 달에 300통에 이르렀다고 썼다. 2 18 3 30 21
1905년의 두 모임은 분열을 어떻게 굳혔나?
제3차 대회는 1905년 4월 25일부터 5월 10일(구력 4월 12~27일)까지 런던에서 열렸다. 결정권을 가진 대의원 24명과 발언권 대의원 14명이 참석했는데 모두 볼셰비키였다. 대회는 모든 위원회와 조직을 초청했지만,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악셀로드 등 옛 당 평의회 위원들이 소집을 거부하자 소수파 전체가 불참했다. 대회는 분열의 책임을 이 세 사람에게 돌렸고, 규약 제1조를 레닌의 안대로 고쳤으며, 대회와 대회 사이의 지도권을 중앙위원회 하나에 맡겼다. 레닌은 대회 보고에서, 새 규약이 소수파에게도 당 문헌을 발행하고 사상 투쟁을 할 권리를 보장한다고 강조했다. 32 33 3
멘셰비키는 같은 무렵 제네바에서 따로 협의회를 열었다. 이로써 두 분파는 서로 다른 대회와 서로 다른 중앙을 갖게 되었고, 다툼은 조직 문제에서 혁명 전술로 옮겨 갔다. 제3차 대회는 무장 봉기를 준비하고, 승리한 봉기 뒤에는 노동자와 농민의 임시 혁명 정부를 세우며, 거기에 사회민주주의자가 참여할 수 있다고 결의했다. 멘셰비키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가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함께 전제정에 맞서야 한다고 보았다. 제3차 대회는 결정에 따르지 않는 멘셰비키 위원회를 해산할 수 있다는 결의도 냈다. 플레하노프는 멘셰비키와 함께 일할 수 없다며 자기 잡지 《사회민주주의자의 일기》를 내기 시작했고, 제네바 협의회 뒤인 1905년 5월 《이스크라》 편집국에서도 물러났다. 19 32 23
그 뒤에도 분열은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혁명의 압력 속에서 두 분파는 1906년 스톡홀름의 제4차(통일) 대회에서 형식상 다시 합쳤고, 이때 분트도 당에 돌아왔다. 멘셰비키가 다수였던 이 대회도 규약 제1조만은 레닌의 안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두 분파는 각자의 조직을 그대로 유지했고, 1912년 1월 프라하 회의를 거쳐 사실상 별개의 당이 되었다. 레닌은 훗날 「볼셰비즘은 1903년부터 정치사상의 조류이자 정당으로 존재했다」고 썼고, 소련 공산당은 자기 역사의 출발점을 1903년 제2차 대회에 두었다. 이런 의미에서 1903년의 분열은 20세기 러시아 혁명사의 여러 갈림길이 처음 갈라진 자리였다. 14 19 13 2
이 분열은 원칙의 차이였나, 사람의 다툼이었나?
당사자들의 설명부터 서로 달랐다. 레닌은 대회 직후 갈라선 이유가 객관적으로 중앙기관의 구성 문제 하나뿐이었다고 쓰면서도, 그 뒤에는 이 차이를 당의 혁명파와 기회주의파의 대립으로 설명했다. 소련의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역사 단기강좌』는 레닌의 정식이 당을 규율에 복종하는 조직된 부대로 본 반면 마르토프의 정식은 당을 조직적으로 무정형한 것으로 보았다고 정리하고, 새 《이스크라》를 기회주의의 기관지로 규정했다. 크룹스카야도 레닌 주위의 사람들은 원칙에 훨씬 진지했고 다른 쪽은 타협과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앞섰다며, 많은 이가 본질 대신 사람을 보았다고 회고했다. 11 6 1
반대편과 후대의 시각은 달랐다. 트로츠키는 훗날 자서전에서 자신과 레닌의 결렬이 겉으로는 「도덕적」이거나 개인적인 이유로 보였지만 바탕에는 정치적 차이가 있었다고 썼다. 당시 그는 수백만 명을 이끌 혁명당에 필요한 중앙집권의 강도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또 갈등이 격해진 이유로, 레닌이 이미 지도자로 자랐음을 원로들이 알아보지 못한 점을 들었다. 플레하노프는 대회 중 악셀로드에게 레닌을 두고 「저런 사람들로 로베스피에르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고 한다. 영어 위키백과는 처음에는 차이가 작고 개인적 갈등에서 비롯한 것처럼 보였으나 점점 커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고 정리한다. 5 9
숫자도 이름과 달랐다. 볼셰비키는 다수파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그 뒤 당의 여러 국면에서 레닌 지지자는 자주 소수였고, 멘셰비키는 1905년 이후 노동조합과 두마 활동, 소비에트에서 넓은 지지를 모았다. 그러나 1903년 이후 볼셰비키라는 이름은 정치적으로 유리한 자산이 되었다. 오늘날의 연구는 대체로 제2차 대회를 러시아 사회민주주의를 하나의 당으로 묶은 사실상의 창립 대회이자, 동시에 두 개의 당 모델이 처음 맞부딪친 자리로 본다. 조직의 규율과 넓은 대중성, 중앙의 권한과 지역 조직의 자율 사이의 긴장은 이후 볼셰비키 안에서도, 멘셰비키 안에서도 되풀이해 나타났다. 19 14 2
결과
대회는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처음으로 강령과 규약, 중앙기관을 주어 사실상의 창립 대회가 되었지만, 그 자리에서 생긴 다수파와 소수파는 1905년 따로 대회와 협의회를 열며 두 개의 중앙을 갖게 되었다. 두 분파는 1906년 형식상 다시 합쳤으나 각자의 조직을 유지했고 1912년 사실상 별개의 당이 되었다. 볼셰비키라는 이름과 1903년이라는 출발점은 뒤에 소련 공산당의 자기 역사가 되었다.
연표와 지도
- 11900.12.24《이스크라》 창간
레닌, 마르토프, 포트레소프와 플레하노프·악셀로드·자술리치의 노동해방단이 함께 만든 신문 《이스크라》 창간호가 라이프치히에서 나왔다. 신문을 몰래 들여와 나누는 대리인망이 러시아 곳곳에 생겨 흩어진 지역 조직을 잇는 전국 조직의 뼈대가 되었다.
- 21902.03『무엇을 할 것인가?』 출간
레닌이 슈투트가르트의 디츠 출판사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냈다. 경제주의자들의 수공업적 방식을 비판하고 전국적 정치신문과 직업혁명가 조직이 운동을 묶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 책은 이듬해 대회에서 아키모프와 마르티노프가 레닌을 공격하는 근거로도 쓰였다.
- 31902.04비아위스토크 회의와 조직위원회
《이스크라》파와 경제주의 쪽 해외 동맹이 비아위스토크에 함께 모여 제2차 대회를 준비할 조직위원회를 뽑았다. 그러나 참가자들이 곧 거의 모두 체포되었고, 가을에 《이스크라》파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새 조직위원회가 프스코프에서 다시 꾸려졌다.
- 41903.07.30브뤼셀에서 제2차 대회 개막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가 브뤼셀의 창고에서 플레하노프의 개회 연설로 열렸다. 26개 조직에서 결정권 51표를 가진 대의원 43명과 발언권 대의원 14명이 모였다. 대회는 《이스크라》를 당 중앙기관지로 인정하고 강령 토론에 들어갔다.
- 51903.08.06벨기에 경찰에 밀려 런던으로
벨기에 경찰이 대의원들을 뒤쫓고 제믈랴치카 등을 추방하자 대회는 13차례 회의를 끝으로 브뤼셀을 떠나 런던으로 옮겨 갔다. 런던에서는 경찰의 방해 없이 24차례 회의가 이어졌고, 분트 문제와 강령, 규약 토론과 중앙기관 선거가 차례로 이어졌다.
- 61903.08규약 제1조 표결
당원 자격을 정한 규약 제1조를 두고 레닌 안과 마르토프 안이 맞섰다. 마르토프 안이 28대 22, 기권 1로 채택되었는데, 악셀로드·자술리치·트로츠키 등 《이스크라》파 일부와 분트·《라보체예 델로》파가 마르토프 쪽에 섰고 플레하노프는 레닌을 지지했다.
- 71903.08분트와 해외 동맹의 퇴장
대회가 분트의 연방제 요구를 41대 5로 물리치고 유일 대표권 요구도 거부하자 분트 대의원 5명이 떠났다. 이어 해외 연맹을 유일한 해외 조직으로 인정하자 해외 동맹 대의원 2명도 떠났다. 일곱 표가 빠지면서 레닌 쪽이 다수가 되었다.
- 81903.08.23중앙기관 선거와 대회 폐막
대회는 옛 편집국 승인을 물리치고 플레하노프·마르토프·레닌을 《이스크라》 편집국으로 뽑았으나 마르토프가 거부했다. 중앙위원으로 크르지자놉스키·렌그니크·노스코프가 뽑혔다. 레닌 쪽은 다수파(볼셰비키), 마르토프 쪽은 소수파(멘셰비키)라 불리게 되었다.
- 91903.10.26–
31 해외 연맹 대회의 충돌제네바의 해외 연맹 대회에서 수가 앞선 멘셰비키는 「관료적 중앙집권주의」와 싸우자고 결의하고 중앙위원회에서 독립된 규약을 채택했다. 중앙위원회를 대표한 렌그니크가 연맹과 대회를 불법이라 선언했고, 플레하노프는 「내 편에 총을 쏠 수 없다」고 했다.
- 101903.11.20레닌의 사임과 새 《이스크라》
레닌은 《이스크라》 제51호를 끝으로 편집국을 떠났고, 플레하노프는 악셀로드·자술리치·마르토프·포트레소프를 다시 편집국에 넣었다. 이날 나온 제52호에 플레하노프의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실려, 중앙기관지는 소수파의 손에 넘어갔다.
- 111904.05.19『일보 전진, 이보 후퇴』 출간
레닌이 대회 의사록과 대의원 발언을 하나하나 분석한 『일보 전진, 이보 후퇴』를 제네바에서 냈다. 그는 대회의 대립을 당의 혁명파와 기회주의파의 대립으로 그렸고, 멘셰비키는 반발했으며 플레하노프는 중앙위원회에 이 책을 부인하라고 요구했다.
- 1904.07룩셈부르크의 비판과 중앙위원회 7월 선언
룩셈부르크가 「러시아 사회민주당의 조직 문제」에서 레닌의 「초중앙집권주의」를 비판했다. 같은 무렵 렌그니크가 체포된 뒤 노스코프·크라신·갈페린이 이끈 중앙위원회는 새 《이스크라》를 인정하는 화해 선언을 냈고, 레닌은 중앙위원회에서도 물러났다.
- 121904.0822인 회의와 『우리의 정치적 과제』
스위스에서 레닌 지지자 22명이 모여 「당에게」라는 호소문으로 제3차 대회 소집을 요구했다. 같은 달 트로츠키는 『우리의 정치적 과제』에서 당 조직이 당을, 중앙위원회가 조직을, 마침내 독재자가 중앙위원회를 대리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 1904.09–
12 다수파 위원회 뷰로 결성오데사, 예카테리노슬라프, 니콜라예프, 리가, 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위원회의 주도로 남부·캅카스·북부 지역 회의가 다수파 위원회 뷰로를 뽑았다. 뷰로는 중앙위원회와 따로 제3차 대회 준비를 맡았고, 트로츠키는 9월 소수파에서 공식 탈퇴했다.
- 131905.01.04볼셰비키 신문 《브페료드》 창간
볼셰비키가 제네바에서 자기 신문 《브페료드》(전진) 창간호를 냈다. 레닌과 올민스키, 보롭스키가 편집했고 곧 루나차르스키가 합류했다. 그 사이 러시아에서는 「피의 일요일」로 혁명이 시작되었고 러시아에서 오는 편지가 한 달 300통에 이르렀다.
- 1905.02.22중앙위원 일제 체포
레닌이 중앙위원회에서 공식 제명된 지 이틀 만에 노스코프, 갈페린, 두브로빈스키 등 중앙위원 다수가 한꺼번에 체포되었다. 3월에는 크라신과 류비모프만 남았고, 남은 중앙위원회는 다수파 위원회 뷰로와 함께 제3차 대회를 소집하게 되었다.
- 141905.04.25–
05.10 런던 제3차 대회볼셰비키만 참석한 제3차 대회가 런던에서 열렸다. 대회는 분열의 책임을 플레하노프·마르토프·악셀로드에게 돌리고 규약 제1조를 레닌의 안대로 고쳤으며, 무장 봉기 준비와 노동자·농민의 임시 혁명 정부 참여를 결의했다. 대의원은 결정권 24명, 발언권 14명이었다.
- 151905.05제네바 멘셰비키 협의회
멘셰비키는 제3차 대회에 가지 않고 제네바에서 따로 협의회를 열어 자유주의 부르주아지와 함께 전제정에 맞서는 노선을 내세웠다. 두 분파는 각기 다른 중앙을 갖게 되었고, 플레하노프는 협의회 결정에 반발해 《이스크라》 편집국에서도 물러났다.
관련 인물 30명
다수파 (볼셰비키)16명
지도부2
『무엇을 할 것인가?』로 조직론을 내놓았고, 대회에서 규약 제1조 초안과 3인 편집국안을 냈다. 편집국 선거에서 이겨 자기 편을 볼셰비키라 불렀고, 1903년 11월 편집국을 떠난 뒤 『일보 전진, 이보 후퇴』와 다수파 위원회 뷰로로 제3차 대회를 밀어붙였다.
대회 의장, 당 평의회 다섯째 위원게오르기 플레하노프1856–1918대회를 열고 강령 토론을 이끌었으며 규약 제1조와 편집국 문제에서 레닌을 지지했다. 그러나 해외 연맹 대회 뒤 화해를 택해 옛 편집인들을 불러들였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쓰고 레닌의 책들을 비판했다. 1905년 5월 《이스크라》를 떠났다.
참여12
「소로킨」이라는 이름으로 참석한 레닌 지지자였다. 선거를 앞두고 악셀로드가 유형지 소문으로 그를 공격한 장면을 크룹스카야가 기록했다.
키예프 위원회 대의원표트르 크라시코프1870–1939「파블로비치」라는 이름으로 참석해 조직위원회가 집단 규율로 대의원을 묶으려 한 데 항의했다. 다수파 쪽에 섰다.
오데사 위원회 대의원로잘리야 제믈랴치카1876–1947브뤼셀에서 벨기에 경찰에 추방되었다. 대회 뒤 중앙위원으로 보선되었다가 1904년 여름 화해파가 다수가 된 중앙위원회에서 밀려났다.
돈 위원회 대의원세르게이 구세프1874–1933「구세프」라는 이름으로 참석한 레닌 지지자였다. 그와 데이치 사이의 충돌은 『일보 전진, 이보 후퇴』의 부록으로 실렸다.
바쿠 위원회 대의원보그단 크누냔츠1878–1911「루소프」라는 이름으로 바쿠 위원회의 두 표를 가지고 참석한 레닌 지지자였다.
중앙위원 (궐석 선출)글렙 크르지자놉스키1872–1959대회에 오지 못했으나 레닌 지지자로 궐석 선출되었다. 대회 뒤 플레하노프를 찾아가 화해를 시도했다가 불가능함을 확인했고, 1904년 7월 중앙위원회에서 물러났다.
중앙위원 (1903년 보선)레오니트 크라신1870–19261903년 10월 중앙위원으로 보선되었고, 1904년 노스코프·갈페린과 함께 화해 노선을 걸었다. 1905년 3월 남은 두 중앙위원 가운데 하나로 제3차 대회 소집에 참여했다.
볼셰비키 조직가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1873–19281904년 레닌과 손잡고 러시아 안의 연락망을 바탕으로 볼셰비키 기관지 발행과 제3차 대회 선동 계획을 함께 세웠다.
《브페료드》 편집인미하일 올민스키1863–19331904년 볼셰비키에 합류해 레닌과 함께 《브페료드》를 편집했다.
《브페료드》 편집인 (오를롭스키)바츨라프 보롭스키1871–1923「오를롭스키」라는 이름으로 레닌, 올민스키와 함께 《브페료드》 편집국을 이루었다.
《브페료드》 기고자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1875–19331905년 초 제네바에 와 《브페료드》에 합류했고, 그의 글과 연설은 당시 볼셰비키의 분위기와 잘 맞았다.
규약위원회 위원장, 중앙위원블라디미르 노스코프1878–1913「글레보프」라는 이름의 발언권 대의원으로 규약위원회를 이끌고 중앙위원에 뽑혔다. 대회 직후 옛 편집국을 다시 넣자고 제안했고, 1904년 화해 노선을 이끌며 제3차 대회에 반대했다. 1905년 2월 체포되었다.
소수파 (멘셰비키)7명
참여6
발언권 대의원으로 참석해 규약 제1조 토론에서 당과 조직을 구별하자며 마르토프 안을 지지했다. 3인 편집국안에서 빠지자 소수파 뷰로에 들었고, 1903년 11월 편집국에 돌아왔다. 트로츠키는 『우리의 정치적 과제』를 그에게 바쳤다.
《이스크라》 편집인베라 자술리치1849–1919발언권 대의원으로 참석해 마르토프 안에 섰다. 3인 편집국안에서 빠지자 소수파에 가담했고, 1903년 11월 플레하노프가 옛 편집인들을 불러들일 때 편집국에 돌아왔다.
《이스크라》 편집인 (스타로베르)알렉산드르 포트레소프1869–1934「스타로베르」라는 이름으로 발언권 대의원이 되었고 자유주의자에 관한 결의안을 냈다. 3인 편집국안에서 빠지자 소수파 뷰로에 들었고 1903년 11월 편집국에 돌아왔다.
시베리아 동맹 대의원레프 트로츠키1879–1940분트 반박에 나섰고 규약 제1조에서 마르토프를 지지했다. 『시베리아 대표단 보고』와 『우리의 정치적 과제』에서 레닌의 「계엄 상태」와 대리주의를 공격했으나, 1904년 9월 소수파에서도 탈퇴했다.
노동해방단 대의원레프 데이치1855–1941노동해방단 대표로 참석했다. 대회 뒤 해외 연맹 운영위원으로 연맹 대회 소집을 밀어붙여 멘셰비키가 레닌에 맞서는 무대를 만들었다.
소수파 뷰로 위원표도르 단1871–1947대회에는 나오지 않았으나 1903년 10월 소수파 뷰로에 뽑혔고, 해외 연맹 대회에서 레닌에 맞섰다.
분트와 《라보체예 델로》파4명
참여4
분트의 지위에 관한 보고를 맡아 연방제와 유일 대표권을 요구했고, 프롤레타리아 독재 조항에 반대했다. 요구가 거부되자 분트 대의원들과 함께 대회를 떠났다.
해외 동맹 대의원알렉산드르 마르티노프1865–1935《라보체예 델로》파로 프롤레타리아 독재 조항에 반대했고, 해외 연맹이 유일한 해외 조직으로 인정되자 아키모프와 함께 대회를 떠났다. 뒤에 멘셰비키에 가담했다.
해외 동맹 대의원블라디미르 아키모프1872–1921경제주의의 대표 논객으로 강령 수정을 시도했고, 플레하노프는 그가 자신과 레닌을 갈라놓으려 한다고 농담했다. 해외 연맹 인정에 항의해 대회를 떠났다.
분트 해외위원회 대의원블라디미르 메뎀1879–1923「골드블라트」라는 이름으로 참석해 분트의 요구를 대변했고, 대회가 연방제를 거부하자 다른 분트 대의원들과 함께 떠났다.
진영 밖
참여2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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