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카의 정치수사 설계자
1921년 타간체프 사건으로 페트로그라드 지식인들을 대거 처형한 뒤, 어찌 그리 가혹하냐는 물음에 아그라노프는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지식인의 70퍼센트는 한쪽 다리를 적의 진영에 담그고 있었소. 우리는 그 다리를 불태워야 했소."
1893년 10월 12일 모길료프 현 체체르스크에서 상인 집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2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갔다가 1915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같은 해 체포돼 예니세이 현으로 유배됐다. 1918년 인민위원회 서기로 레닌과 제르진스키의 지시를 직접 받았고, 1919년 체카에 들어가 크론슈타트 봉기와 안토노프 농민 봉기, 타간체프 사건을 수사했다. OGPU 비밀부장과 부의장을 거쳐 1934년 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겸 국가보안총국 실질 책임자가 되어 키로프 살해 수사를 지휘했다. 1937년 사라토프로 좌천됐다가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됐고, 사후 복권되지 않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9–1931 보안·정보·치안 · 소련 · 국가보안 기관
경력 연표
- 1919–1931체카와 OGPU의 정치수사 요원 겸 특별전권위원
- 1931–1933OGPU 비밀정치부장, OGPU 위원회 위원
- 1933–1934OGPU 부의장
- 1934–1936내무인민위원 제1부관, 국가보안총국 업무 실질 지휘
- 1936–1937NKVD 국가보안총국장
- 1937–1938사라토프 NKVD 책임자, 1937년 7월 20일 체포돼 1938년 8월 1일 총살
관련 역사 사건
타간체프 사건과 체카의 '음모' 수사 모델
아그라노프의 이름을 전국에 알린 것은 1921년 이른바 '페트로그라드 전투조직(V. N. 타간체프) 사건'이었다. 이는 실재가 의심되는 군주제 음모 사건으로, 소련 비밀경찰이 1921년 대체로 날조한 것이었다. 페트로그라드의 과학·예술계 인사를 중심으로 800명 넘게 '테러리즘' 혐의로 체포됐고, 그중 98명이 처형됐으며 다수가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앞선 수사관들이 실패한 뒤 아그라노프가 사건을 맡아 더 많은 사람을 체포했고, 타간체프에게 3시간 안에 자백하지 않으면 그와 인질 전원을 처형하겠다는 최후통첩을 제시해 협조를 받아냈다. 타간체프가 부른 이름들은 7월 31일과 8월 초에 걸쳐 체포됐다. 사건의 가장 유명한 희생자는 시인 니콜라이 구밀료프로, 8월 3일 체포돼 8월 24일 코발렙스키 숲에서 60명과 함께 총살됐다. 아그라노프가 타간체프를 45일간 독방에 감금했다는 기록은 1936년 망명 회고록(로만 굴)에 근거한 것으로, 중립적 사실로 단정하지 않는다. 1992년 이 사건의 유죄 판결은 모두 복권되고 사건은 날조로 선언됐다. 다만 1990년대에는 조직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문서가 학계에 소개되면서 논쟁이 다시 열렸다.
살롱의 체키스트, 문학을 담당한 심문관
아그라노프는 체카와 그 후신 기관에서 창작 인텔리겐치아를 담당한 인물이었다. 그는 여러 유명 작가·시인·예술가와 친분을 맺었고, 블라디미르 마야콥스키, 릴리 브릭, 레오폴트 아베르바흐, 보리스 필냐크와 가까이 지냈다. 감시와 교유는 그에게 모순이 아니라 직무의 두 면이었다. 그의 이름은 1930년 마야콥스키의 자살을 둘러싼 의혹과도 얽혀 있다. 마야콥스키는 아그라노프가 선물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아그라노프는 훗날 브릭과 관계를 맺었다. 아그라노프는 시인의 죽음에 대해 스스로 조사를 벌였으며, 1935년 크렘린은 자살 관련 문서와 함께 '시인의 죽음에 대해 자체 조사를 수행한 아그라노프가 수집한 자료'를 요구했다. 같은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갈린다. 망명 회고록에서 로만 굴은 그를 '가장 피비린내 나는 수사관'으로 규정했지만, 흐루쇼프의 회고록은 그를 '뛰어난 인물, 확고한 체키스트', '정직하고 침착하며 지적인 사람'으로 기억하며 심문에서 목소리를 높이거나 고문을 가한 적이 없다고 덧붙였다.
1934년 12월, 키로프 사건의 심문관에서 1938년의 피고인으로
키로프가 1934년 12월 1일 스몰니에서 살해되자, 스탈린은 그날 저녁 특별열차로 출발해 12월 2일 10시 30분 몰로토프·보로실로프·주다노프·예조프·야고다와 함께 레닌그라드에 도착했다. 아그라노프는 NKVD 요원 무리와 함께 의심을 산 레닌그라드 체키스트 메드베디와 자포로제츠를 교체하러 투입됐다. 그는 키로프 살해 수사를 지휘하고 레닌그라드 주 NKVD 임시 책임자가 되어, 야고다·예조프와 함께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의 조직자 중 한 사람이었고 1930년대 주요 정치재판의 자료를 준비했다. 다만 영문 자료는 스탈린이 카메네프·지노비예프 등의 책임을 날조하라고 지시했을 때 아그라노프가 저항한 듯 보였고, 그래서 스탈린이 그 일을 니콜라이 예조프에게 맡겼다고 전한다. 흐레브뉴크는 아그라노프가 예조프와 함께 야고다에 대한 음모에 실제로 가담했다고 평가한다. 두 서술은 서로 충돌하며, 어느 한쪽으로 단정하지 않고 병기한다. 그는 1937년 2월 트로츠키주의자 명단을 요구하는 문서를 지방 NKVD 책임자들에게 돌렸고, 4월 15일 좌천됐으며 5월 17일 사라토프 주 NKVD 책임자가 되어 1937년 7월 30일자 명령 제00447호로 만들어진 특별 삼인조에 들어가 탄압에 가담했다. 1937년 7월 20일 직무 수행 중 체포돼 'NKVD 기관 내 반혁명 음모조직' 가담 혐의를 받았다. 그의 이름은 1937년 11월 1일자 스탈린의 처형 명단에 올랐다가 스탈린이 지워 9개월을 더 살았고, 1938년 7월 26일 명단에 다시 올라 8월 1일 소련 최고법원 군사재판부에서 형이 확정돼 같은 날 총살됐으며 콤무나르카에 묻혔다. 아그라노프의 수사 파일을 본 역사가 에두아르트 마카레비치는 처형 시점을 1938년 8월 21일로 본다. 1955년 딸 노라가 복권을 청원했으나 군사검찰은 반소비에트 조직 가담 혐의는 근거 없다면서도 NKVD 재직 중 사회주의 법치를 상습적으로 위반한 책임은 충분히 입증됐다며 사건 재심을 거부했다. 2001년에도 친족은 거부됐고, 2013년 1월 22일 복권 결정은 같은 해 8월 27일 러시아 최고법원에 의해 취소돼 그는 복권 대상이 아닌 것으로 인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