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하노프와 악수한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코민테른의 동아시아 전략가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 의장이 러일전쟁 중인 양국 대표 — 플레하노프와 가타야마 — 가 부의장으로 함께 선출되었음을 알리자, 두 사람은 일어나 말없이 손을 굳게 잡았다. 회의장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오카야마 출신으로 미국 유학 후 일본 최초의 노조와 사회민주당을 창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전략을 입안했으며, 모스크바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4–1896미국 유학, 그리넬 칼리지·예일 신학부 졸업, 기독교·사회주의 전향
- 1896–1901귀국, 철공조합·『노동세계』 창간, 사회민주당 창당
- 1904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플레하노프와 반전 악수
- 1911–1912도쿄 시가전차 파업 주도, 9개월 투옥
- 1914–1921미국 망명, CPUSA 가입, 일본인 노동자 공산 그룹 조직
- 1921–1922멕시코 경유 소비에트 러시아, 일본공산당 창립 주도
- 1922–1933코민테른 집행위원·상임간부회, 반제·반전 국제회의
항복 결정을 조율한 해군 출신 총리
1945년 8월 10일, 그는 교착한 회의에서 “이제 제가 어전에 나아가 성의를 여쭙고, 그 뜻으로 회의의 결정을 삼고자 합니다”라고 제안했다.
스즈키 간타로는 일본 해군 대장 출신 정치가로, 천황의 시종장과 추밀원 의장을 거쳐 전쟁 말기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군부의 전쟁 수행 노선을 받들었지만, 1945년 내각과 최고전쟁지도회의의 대립을 관리하며 전쟁을 끝낼 통로를 열었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 참전 뒤에도 이른바 ‘Big Six’의 교착은 계속되었고, 스즈키는 천황 주재 회의에서 결정을 천황의 재가에 맡기는 절차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했지만, 그 과정은 침략전쟁의 책임과 군부의 저항을 지운 것이 아니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4–1887해군병학교 입교 및 졸업
- 1904–1905제4구축대 사령, 일본해 해전 참전
- 1914–1917해군차관
- 1924–1925연합함대 사령장관, 해군군령부장
- 1929–1936천황 시종장 겸 추밀고문관
- 1944–1945추밀원 의장
- 1945-04–1945-08일본 내각총리대신, 항복 결정 주도
- 1945-12–1946-06추밀원 의장, 공직 추방으로 사임
황도파의 군국주의 지도자
아라키 사다오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군이자 황도파의 대표적 지도자로,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와 대외 팽창을 결합한 군국주의를 주장했다. 1931년 만주사변 뒤 육군대신이 되어 관동군의 기정사실을 정부의 정책으로 굳히는 데 기여했고, 소련 극동을 겨냥한 북진론도 지지했다. 그러나 그가 후원한 청년 장교 세력은 통제에서 벗어나 2·26 사건으로 폭발했고, 사건 뒤 현역에서 물러났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55년 석방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7육군사관학교 졸업, 임관
- 1907육군대학 수석 졸업
- 1915–1918러시아군 종군무관, 시베리아 출병 참가
- 1924–1925헌병사령관
- 1928–1930육군대학 교장
- 1931–1934육군대신, 관동군의 만주 점령과 만주국 승인을 추진
- 1938–1939문부대신, 황도교육과 전시 동원 추진
- 1946–1955극동국제군사재판 유죄 판결, 복역 후 석방
군부의 압력 속에서 외교와 책임 사이에 선 정치가
1945년 6월, 그는 말리크에게 다가갔지만 소련은 회담을 늦추며 대일전 준비 시간을 벌었다.
히로타 고키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 출신 정치가로, 국제협조를 표방하면서도 중국 침략과 군부의 대외정책에 제동을 걸지 못한 인물이다. 외무상과 총리를 거치며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되살리고 방공협정을 추진해 민간정부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데 관여했다. 1945년 6월에는 소련의 야코프 말리크 대사와 접촉해 전쟁 종결을 위한 중재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소련은 이미 대일 참전을 준비하며 회담을 지연시켰다. 도쿄 재판에서 전쟁범죄 유죄 판결을 받아 1948년 문관으로는 유일하게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 책임과 형량은 지금도 논쟁적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외무성 입성, 외교관 시험 수석 합격
- 1923–1926외무성 유럽미주국장
- 1927–1930주네덜란드 공사
- 1930–1932주 सो련 대사
- 1933–1936외무상, 사이토·오카다 내각
- 1936–1937내각총리대신, 외무상 겸임
- 1937–1938제1차 고노에 내각 외무상
- 1945말리크 대사와 접촉, 소련 중재 타진
제국 일본의 대륙외교를 밀어붙인 외교가
1941년 4월 모스크바를 떠날 때, 스탈린이 직접 역에 나와 그를 전송했다.
마쓰오카 요스케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대륙 진출과 국제적 고립을 함께 상징한 인물이다. 그는 국제연맹에서 만주국을 옹호하며 일본의 탈퇴를 이끌었고, 만철 총재를 거쳐 외무상이 되었다. 1941년에는 독일·이탈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하는 한편 몰로토프와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했지만, 독소전쟁 뒤 대소전쟁을 주장하다 실각했다. 전후 전범으로 구금되었으나 재판 중 병사해 판결을 받지 못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4외무성 외교관 시험 합격, 외무성 입성
- 1919파리강화회의 일본 대표단 수행원
- 1922–1930남만주철도 이사, 1927년 부총재
- 1933국제연맹 일본 대표단 수석전권대표, 일본 탈퇴 선언
- 1935–1939남만주철도 총재
- 1940–1941제2차 고노에 내각 외무대신, 삼국동맹 추진
- 1941몰로토프와 일소중립조약 서명
- 1941제3차 고노에 내각 출범과 함께 외무대신에서 물러남
제국 육군의 마지막 관동군 사령관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 뒤 관동군의 항복을 명령했다.
야마다 오토조는 러일전쟁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복무한 일본 제국 육군 대장으로, 군령과 군사교육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4년 관동군 총사령관이 된 그는 태평양 전선으로 병력과 장비가 빠져나간 만주의 취약한 방어력을 파악했지만, 소련의 침공 앞에서 급히 편성된 부대들은 빠르게 무너졌다. 일본의 항복 뒤 소련에 억류된 그는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서 세균전 관련 책임을 추궁받고 2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56년 귀환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3육군사관학교 졸업, 기병 장교
- 1912육군대학 졸업
- 1934–1937참모본부 총무부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 1937–1939제12사단장, 제3군 사령관, 중지나 파견군 사령관
- 1939–1944교육총감, 군사참의관
- 1944–1945관동군 총사령관, 만주국 주재 일본 대사
- 1949–1950하바롭스크 전범재판 피고인, 25년형
- 1956소련 억류에서 귀환
제국군의 명령과 항복 사이에 선 참모총장
1945년 9월 2일, 그는 대본영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요시지로 우메즈는 일본 제국 육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중국과 만주 점령지에서 군사 통치와 일본의 대륙 정책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전쟁 지속을 주장했지만, 군부 내 쿠데타 시도에는 가담하지 않고 천황의 항복 명령을 관철했다. 1945년 9월 2일에는 일본 제국 대본영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전쟁 수행 책임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4육군 소위, 보병 제1연대
- 1919–1921스위스 주재 무관
- 1934–1935지나 주둔군 사령관
- 1939–1944관동군 사령관·총사령관
- 1944–1945일본 육군참모총장
- 1945대본영 대표로 항복문서 서명
- 1948–1949극동국제군사재판 종신형, 복역 중 사망
전쟁을 막지 못한 종전 외교가
1945년 7월, 그는 포츠담 선언을 평화의 기초로 삼되 소련과 먼저 교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고 시게노리는 일본 제국의 직업 외교관으로, 태평양전쟁의 개전과 종결 때 외상을 맡았다. 그는 전쟁을 피하려는 대미 협상에 참여했지만 개전을 막지 못했고, 전쟁 뒤에는 그 외교적 책임을 두고 재판을 받았다. 1945년에는 소련을 중재자로 삼아 조건부 종전을 모색하는 한편 포츠담 선언 수락을 주장했으며, 이 선택은 종전을 앞당기려는 현실 감각과 소련의 의도를 오판한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은 그에게 금고 20년을 선고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2외무성 입성,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 합격
- 1933–1935외무성 구미국장
- 1937–1938주독일 대사
- 1938–1940주ソ 대사, 국경·중립 협상 담당
- 1941–1942도조 내각 외무대신 겸 척무대신
- 1945스즈키 내각 외무대신 겸 대동아대신, 포츠담 선언 수락 추진
- 1948극동국제군사재판, 금고 20년 선고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를 통보받은 마지막 주소 대사
과거의 타성으로 저항을 이어가고 있는 현실을 속히 끝내고, 국가 멸망의 한 걸음 앞에서 그것을 멈추게 해야 한다.
일본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벨기에·프랑스·이탈리아 대사를 거쳐 1937년 외무대신이 되었으나 평화협조 노선을 고수하여 군부와 충돌, 석 달 만에 사임했다. 1942년 주소 대사로 부임해 종전 시까지 모스크바에 주재하며, 소련의 중재는 불가능하고 조속한 무조건 항복만이 나라를 구할 길이라고 도쿄에 거듭 경고했다. 1945년 8월 8일 크렘린에서 몰로토프로부터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를 통보받았다. 전후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1949년부터 1953년까지 참의원 의장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외무성 입성
- 1917–1919하얼빈 총영사
- 1927–1930국제연맹 일본 대표
- 1930–1937주벨기에·프랑스 대사
- 1937.03–06외무대신
- 1942–1945주소련 대사
- 1945–1946소련에 억류
- 1949–1953참의원 의장
미국과의 전쟁을 두려워하면서도 진주만을 설계한 제독
“6개월이나 1년은 마음껏 날뛰겠지만, 2년째와 3년째에는 전혀 자신이 없다.”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일본 제국 해군의 제독이자 항공전력의 가능성을 일찍 파악한 전략가였다. 미국의 산업력과 석유 우위를 직접 관찰해 장기전의 승산을 낮게 보았지만, 전쟁이 결정되자 일본의 우세를 단기간에 확보할 방도를 찾았다. 그는 연합함대 사령장관으로서 진주만 공격을 밀어붙여 남방 자원 공세의 시간을 벌려 했고, 그 선택은 전술적 성공과 미국의 전면 참전을 함께 낳았다. 1942년 미드웨이 패배 뒤에도 전쟁을 지휘하다 1943년 미군의 요격으로 전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4해군병학교 졸업, 해군 장교로 임관
- 1905쓰시마 해전 참가, 부상과 손가락 두 개를 잃음
- 1919–1921하버드대학교 유학
- 1925–1928주미 일본대사관 해군 무관
- 1936–1939해군차관, 삼국동맹에 반대
- 1939–1943연합함대 사령장관
- 1941진주만 공격 계획을 관철하고 지휘
- 1943부건빌 상공에서 미군 요격으로 전사
북방 구상과 남방 팽창 사이에서 제국을 전쟁으로 이끈 군인 정치가
1941년 10월, 그는 철군 요구를 ‘심장’이라 부르며 양보를 항복으로 규정했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통제파를 대표한 군인 정치가로, 만주와 중국에서 제국의 군사적 팽창을 밀어붙였다. 관동군 참모장 시기에는 소련과의 국경 긴장을 이용하면서도 중국 북부로 전선을 넓혔고, 이후 육군 지도부의 우선순위는 대소 북진보다 석유와 전략 자원을 겨냥한 남진으로 기울었다. 총리로서 그는 국가를 총동원해 미국·영국과의 전쟁을 수행하고 반대 의견을 억눌렀으며, 1944년 전황 악화 속에서 실각했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육군사관학교 졸업, 보병 소위 임관
- 1919–1922스위스·독일 주재 무관 및 유럽 근무
- 1935–1937관동군 헌병대 사령관, 관동군 참모장
- 1938육군차관, 육군 항공총감
- 1940–1941제2·3차 고노에 내각 육군대신
- 1941–1944일본 제40대 총리, 내무대신·육군대신 겸임
- 1944육군 참모총장 겸임, 7월 내각 총사퇴
- 1948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 처형
노몬한에서 패배한 일본 제국 장군
미치타로 고마쓰바라는 러시아를 연구한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 정보와 참모 업무를 거쳐 야전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1939년 할힌골에서 제23사단을 지휘하며 일본의 국경전쟁을 대규모 작전으로 이끌었지만, 주코프의 포위 공세 속에서 사단이 사실상 궤멸하는 패배를 겪었다. 이 패배는 그의 경력에 책임을 묻는 결과로 이어졌고, 그는 1940년 예편한 뒤 그해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육군사관학교 졸업
- 1909–1910러시아 주재 무관보
- 1919–1929육군참모본부 대소 정보 담당 및 모스크바 무관
- 1932–1934만주국 하얼빈 특별기관장
- 1934–1937제8보병여단 및 근위 제1여단 지휘관
- 1937–1939관동군 제23사단장, 육군중장
- 1939–1940할힌골 패전 뒤 관동군 참모, 예편
만주 점령을 현실로 만든 군부 책략가
1948년 옥중 일기에 그는 만주사변의 성공을 되돌아보며, 중국에 손댄 것이 잘못이었다고 썼다.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정치가로, 만주사변과 중국 침략 확대를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이시와라 간지와 함께 1931년 철도 폭파를 계획하고 관동군의 독단적 군사행동을 점령과 괴뢰국 수립으로 연결했다. 이후 육군대신과 여러 전선의 지휘관을 지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전쟁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4육군사관학교 졸업, 육군 보병 소위
- 1916육군대학교 졸업, 참모 경력 시작
- 1924–1926중국 주재 일본 공사관 무관보좌관
- 1929–1932관동군 고급참모, 만주사변과 점령 작전 주도
- 1934–1937만주국 군정 최고고문, 관동군 참모차장·참모장
- 1937–1939제5사단장, 육군대신
- 1939–1941지나파견군 총참모장
- 1941–1945조선군·제7방면군 사령관, 싱가포르에서 항복 서명
- 1948극동국제군사재판 사형 집행
기갑전의 한계를 드러낸 일본군 장성
1939년 7월 9일, 전차의 절반 이상을 잃은 야스오카 파견대는 해산되고 그는 지휘에서 해임되었다.
야스오카 마사오미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성으로, 보병 중심 군대에서 전차 운용을 맡은 지휘관이었다. 1939년 노몬한 전투에서 제1전차단을 중심으로 임시 편성된 야스오카 파견대를 지휘해 7월 공세에 참가했지만, 전차와 보병·포병의 협조가 무너진 가운데 장갑차량의 절반 이상을 잃고 부대가 해산되었다. 이후 예비역에 편입되었고, 인도네시아 점령 통치에 참여한 뒤 전후 전범 혐의로 체포되어 1948년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육군 보병 소위, 보병 제43연대
- 1914육군대학 졸업
- 1935육군 소장, 보병 제30여단장
- 1938육군 중장, 독립혼성 제1여단장
- 1939제1전차단장, 노몬한의 야스오카 파견대 지휘
- 1941예비역 편입
- 1942–1945육군 사정장관, 수라바야 주지사
- 1945–1948전후 전범 혐의로 체포, 1948년 사망
오키나와 소모전을 지휘한 일본군 장군
패전이 확정된 뒤에도 그는 항복 권고를 거부하고 최후 명령으로 끝까지 싸우라고 지시했다.
우시지마 미쓰루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로, 중국 침략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지휘관을 맡았다. 1944년 오키나와에 배치된 뒤 제32군을 이끌며 해안 결전 대신 남부의 종심 방어와 소모전을 택했지만, 그 방어 체계는 주민 동원과 전투 편입을 수반했다. 1945년 5월 슈리에서 남부로 철수한 결정은 전투를 연장했으나 피란민을 전장에 몰아넣어 주민 희생을 키웠고, 그는 항복을 거부한 채 6월 자결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8육군사관학교 제20기 졸업, 보병 소위
- 1916육군대학교 제28기 졸업
- 1918–1919시베리아 출병군 참모, 수송·배치 담당
- 1937–1939제36보병여단장, 중국 전선 지휘
- 1939–1941제11사단장, 만주국 호림 주둔
- 1942–1944육군사관학교장
- 1944–1945제32군 사령관, 오키나와 방어 지휘
- 1945육군대장 승진, 마부니에서 자결
제국의 외교관에서 패전국의 서명자로
1945년 9월 2일, 그는 미주리호 갑판에서 천황과 일본 정부를 대표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마모루 시게미쓰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군부의 팽창을 경계하면서도 제국 국가의 외교를 수행했다. 그는 1932년 상하이에서 폭탄 공격으로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1945년에는 외무대신으로서 천황과 일본 정부를 대표해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도쿄재판에서 침략전쟁과 포로 보호 의무와 관련해 금고 7년을 선고받았지만 1950년 가석방되었고, 전후 외무대신과 부총리로 복귀해 일본의 국제사회 재편입을 추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1외무성 입성
- 1928–1930상하이 총영사
- 1930–1933주중화민국 공사
- 1936–1938주 소련 대사
- 1938–1941주영 대사
- 1943–1945외무대신 · 대동아대신
- 1945항복 문서 일본 측 서명자
- 1954–1956부총리 겸 외무대신
만주 침략을 설계한 이론가
“기름이 필요하다고 전쟁을 시작하는 자가 있는가.”
이시와라 간지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군사사상가로, 만주를 장차 미국과 맞설 전쟁을 준비하는 전략적 기반으로 보았다. 그는 1931년 관동군 작전참모로서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함께 철도 폭파를 구실로 만주사변을 시작하고 점령을 확대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전면전에는 반대하며 자신의 팽창 구상이 초래한 결과와 충돌했고, 도조 히데키와 대립한 뒤 예비역으로 밀려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09육군사관학교 졸업, 보병 소위
- 1915–1918육군대학교 수학, 2등 졸업
- 1921–1925육군대학교 교관, 독일 주재 유학
- 1928–1931관동군 작전주임참모, 작전과장
- 1935–1937참모본부 작전과장, 작전부장
- 1937–1938관동군 참모부장 대리
- 1939–1941육군 중장, 제16사단장, 예비역 편입
- 1941–1945입명관대 국방학 연구소장, 동아연맹 운동 지도
외교를 말했지만 제국의 전쟁을 넓힌 귀족 정치가
1941년 10월, 그는 전쟁을 자신할 수 없다며 외교를 택할 사람에게 정권을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일본의 귀족 정치가이자 제국의 전시 동원을 이끈 총리였다. 사회주의 사상과 반제국주의적 인종평등론에 관심을 보였지만, 서구 제국주의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과 동아시아 지배 구상을 추진했다. 1940년 삼국동맹과 대정익찬회를 주도한 뒤 미국과의 협상을 시도했으나 군부의 확장 노선을 꺾지 못했고, 1941년 도조 히데키에게 정권을 넘겼다. 전후 전범 용의자로 체포될 예정이던 그는 1945년 청산가리로 자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6귀족원 의원
- 1919파리강화회의 일본 대표단 수행원
- 1933–1937귀족원 의장
- 1937–1939제1차 내각 총리대신
- 1940–1941제2·3차 내각 총리대신
- 1940–1941대정익찬회 총재
- 1945동구궁 내각 국무대신
미국을 알았던 이오지마 방어 지휘관
미국은 세계의 대국이므로 일본은 가능한 한 이 나라와 싸움을 피해야 한다고 가족에게 말했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외교관으로, 미국의 산업력과 군사력을 직접 관찰한 드문 일본군 고위 지휘관이었다. 그는 이오지마에서 해안의 결전을 피하고 지하호와 종심 방어를 결합해 압도적 전력에 맞서는 소모전을 설계했다. 그 방어는 일본의 패배를 막지 못했지만 미국군의 상륙과 섬 점령에 큰 비용을 부과했으며, 동시에 병사들에게 만세 돌격과 무의미한 자결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지휘 원칙을 드러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4육군사관학교 졸업, 기병 소위
- 1923육군대학교 졸업, 성적 2위
- 1927–1930미국 주재 무관보, 하버드에서 수학
- 1931–1933캐나다 주재 무관
- 1941–1943제23군 참모장, 홍콩 전투에 참전
- 1943–1944근위 제2사단장
- 1944–1945제109사단장, 오가사와라 병단장, 이오지마 수비 지휘
- 1945이오지마 전투에서 전사, 사후 육군 대장 추서
일본공산당을 세 번이나 창설한 국제적 공산주의자
1946년 1월 도쿄 당사에 도착한 노사카를 맞으려 기모노와 양장 차림의 젊은 여성들이 마치 스타를 기다리는 팬처럼 모여들었다고 한 신문이 전했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에 참여하고 영국공산당 창립대회(1920년)에도 런던 대표로 출석한 국제 공산주의자로,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미국·중국에서 대일 첩보망을 운영했다. 1940~1945년 옌안에서 일본인민해방연맹을 이끌며 일본군 포로를 공산군 전향 병력으로 재편했고, 전후 일본공산당을 '사랑받는 당'으로 포장해 평화적 혁명 노선으로 35석의 의석을 얻어냈다. 1958년부터 24년간 당 의장을 지내며 안보투쟁과 중·소 분열 속 당의 독자 노선을 유지했으나, 1992년 스탈린 시대 동료 밀고 사실이 폭로되어 자신이 창립한 당에서 제명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유아이카이(우애회) 입회, 기관지 『노동 및 산업』 편집
- 1920영국공산당(CPGB) 창립 참여, 런던 대표
- 1922일본공산당(JCP) 창립 참여, 『무산자신문』 편집
- 1931–1940코민테른 집행위원, 소련·미국·중국에서 대일 정보활동
- 1940–1945옌안에서 일본인민해방연맹 지도, 일본군 포로 전향사업 총괄
- 1946–1950중의원 의원 당선, JCP 중앙위원
- 1955–1958일본공산당 제1서기
- 1958–1982일본공산당 중앙위원회 의장
18년 감옥에서 버틴 일본공산당 초대 서기장
1956년 흐루쇼프는 제20차 당대회 개막에서 스탈린·고트발트와 함께 '도쿠다 규이치'의 이름을 부르며 기립 추모를 요청했고, 전당대회가 일어섰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 원년 멤버로,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8년간 비전향으로 복역한 후 1945년 초대 서기장으로 당을 재건했다. 1950년 코민포름의 평화혁명노선 비판을 계기로 소련·중국과 보조를 맞춘 무장투쟁으로 전환했고, 공직추방 후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기관에서 당을 지휘하다 1953년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2일본공산당 창립 참여, 중앙위원
- 1928–1945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18년 복역 (아바시리·지바·도요타마·후추 형무소)
- 1945일본공산당 서기장 (초대)
- 1946–1950중의원 의원 (3선, 도쿄 3구)
- 1950–1953중국 망명, 베이징기관 조직 및 무장투쟁 지휘
고노에 총리의 브레인이자 모스크바를 구한 일본인 간첩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훌륭하게 죽고 싶다.
호즈미 오자키는 아사히 신문 기자이자 공산주의자로, 리하르트 조르게의 도쿄 첩보망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본인 정보원이었다. 그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브레인으로서 내각의 최고위급 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고, 1941년 9월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고 남방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결정적 정보를 조르게에게 전달해 모스크바 전투의 향방을 바꾸었다. 1941년 10월 체포되어 전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국가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사형 집행 전 감옥에서 아내와 딸에게 보낸 편지는 『사랑은 별비처럼』으로 출간되어 전후 일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1927아사히 신문 기자
- 1928–1932아사히 신문 상하이 특파원
- 1930상하이에서 리하르트 조르게와 접촉
- 1934–1941조르게 도쿄 첩보망의 핵심 정보원
- 1937–1941쇼와연구회 연구원, 고노에 내각 자문
- 1938–1941고노에 총리 '조찬회' 멤버
- 1941.10조르게 사건으로 체포
- 1944.11.7스가모 구치소에서 교수형
제국의 전쟁과 전후 전환을 통과한 천황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 1945년 항복 조서의 구절
히로히토는 1926년부터 1989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제124대 천황으로, 제국 헌법의 군주와 전후 헌법의 상징천황을 모두 경험했다. 그는 일본의 대외 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승인한 국가 체제의 정점에 있었으며, 전쟁 수행과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의 범위는 지금도 논쟁적이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 뒤 교착된 최고전쟁지도회의에 개입해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고 항복 방송을 했다. 전후에는 천황의 신격화를 부정하고 상징적 국가원수로 남았으며, 해양생물학 연구도 계속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1도쿄에서 출생
- 1916황태자로 책봉
- 1921–1926섭정
- 1926–1945일본 제124대 천황, 제국 헌법상 대권 행사
- 1941대미·대영·대 네덜란드 개전 결정 승인
- 1945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고 항복 방송
- 1947–1989일본국 헌법상 상징천황
- 1989도쿄에서 사망
국경 방침서로 할힌골 사건을 일으킨 관동군 참모
다나카 류키치 장군은 전후 증언에서 '대미 전쟁을 가장 단호하게 주장한 단 한 사람이 쓰지 마사노부였다'고 밝혔다.
관동군 작전참모였던 쓰지 마사노부는 스스로 작성한 국경 방침서로 1939년 할힌골 사건을 일으켜, 아래로부터의 월권(게코쿠조)으로 소련과의 국경전쟁을 밀어붙였다. 할힌골 패배 뒤에는 소련의 화력을 목격한 경험을 근거로 대소전을 반대하면서도, 도리어 대미 개전의 가장 강경한 주창자가 되었다. 말레이 작전 입안자이자 바탄 죽음의 행진·숙칭 학살의 주모자였던 그는 전범 재판을 피해 도주했다가 귀국해 중의원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4통제파(도세이하) 활동, 황도파 쿠데타 저지
- 1937–1939관동군 작전참모
- 1939.04「국경 방침서」 작성, 할힌골 사건 유발
- 1941참모본부 작전과, 대미 개전 주창
- 1941–1942말레이 공세 입안, 싱가포르 함락, 숙칭 학살
- 1942바탄 죽음의 행진, 과달카날 공세
- 1952중의원 의원 당선(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