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리투아니아

7 명

해당 인물

예브헨 미하일로비치 코노발레츠

Євген Михайлович Коновалець
반혁명 세력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1891–1938 ✕ NKVD 암살 · 로테르담

시치 소총병을 이끌고 UVO와 OUN을 조직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도자

1938년 5월 23일 로테르담. 신뢰하던 연락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우크라이나식 초콜릿 상자 안에는 모스크바에서 제작한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다.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 자시키우 출신의 우크라이나 군인·정치가.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가 된 뒤 1917년 키이우에서 시치 소총병을 조직했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싸웠다. 독립전쟁 패배 후 망명지에서 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을 이끌었으며, 1929년 빈에서 여러 민족주의 단체를 통합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을 창설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유럽과 북미의 망명 조직을 연결하고 국제연맹에 우크라이나 문제를 제기하려 했으나, 1938년 로테르담에서 OUN에 침투한 NKVD 요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폭탄으로 암살되었다. 1929년 리투아니아 시민권과 여권을 받아 망명 활동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지만, 그의 민족적·정치적 정체성과 운동의 목표는 일관되게 우크라이나 독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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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복무, 마키우카 전투 뒤 러시아군 포로
  • 1917–1920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 시치 소총병 조직·지휘
  • 1920–1929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 창립·지도
  • 1929–1938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 초대 지도자
  • 1938.05로테르담에서 파벨 수도플라토프의 폭탄 공작으로 암살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1932–2010 ○ 자연사

당을 모스크바에서 분리해 낸, 독립 리투아니아의 첫 대통령이 된 공산주의자

1990년 1월 고르바초프가 빌뉴스까지 날아와 당의 분리를 되돌리라고 압박했을 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정은 당대회가 내렸고, 그것을 되돌릴 권한은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경제 관리자 출신으로 1988년 사유디스의 지지 속에 리투아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12월 당을 소련공산당에서 분리하는 결정을 이끌었다. 연방 공화국의 집권당이 모스크바와 결별한 첫 사례였다. 독립 후인 1993년 첫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옛 공산당원이 선거로 집권할 수 있음을 보였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나토·유럽연합 가입의 길을 열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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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7리투아니아 SSR 건설자재공업부 장관
  • 1967–1977리투아니아 SSR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의장
  • 1977–1987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8–1989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독립 리투아니아공산당(소련공산당에서 분리) 제1서기
  • 1990리투아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1993–1998리투아니아 공화국 대통령
  • 2001–2006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

로무알다스 오졸라스

Romualdas Ozolas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인 1939–2015 ○ 암으로 사망

200만 서명으로 소련군 철수를 요구한 사유디스의 철학자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사회주의가 무엇으로 되는지' 보기로 결심했다. 몇 년 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리투아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빌뉴스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문화잡지 『쿨투로스 바라이』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1973년 리투아니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를 계기로 1988년 사유디스 창립에 참여했고, 독립운동의 이론가로서 200만 명 서명 운동을 주도해 주둔 소련군 철수를 요구했다.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대중운동과 함께 '발트의 길'을 기획한 3국 조정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독립 후 부총리(1990~1991)로 란츠베르기스-프룬스키에네 내각의 실무를 떠받쳤다. 이후 중도연합을 창당해 세이마스 의원(1992~2000)을 지냈고, 유럽연합 가입을 주권 제약으로 간주해 끝까지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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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2빌뉴스대학 철학 전공
  • 1965–1968『쿨투로스 바라이』 편집자
  • 1973–1989빌뉴스대학 철학 강사
  • 1988–1990사유디스 창립 멤버·평의회 의원
  • 1989–1990소련 인민대표대회 대의원
  • 1990–1991리투아니아 공화국 부총리
  • 1992–2000세이마스(의회) 의원
  • 1993–2000리투아니아 중도연합 당수

카지미에라 다누테 프룬스키에네

Kazimira Danutė Prunskienė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인 1943–2026 ○ 뇌졸중으로 사망

실용주의 노선으로 독립을 협상하려 했으나, 사퇴로 군사옵션의 마지막 장애물이 사라졌다

그녀는 각료들 앞에서 울며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끝장이다."

리투아니아의 첫 독립 후 총리(1990~1991)로, 소련 붕괴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10개월을 이끌었다. 사유디스 창립 멤버로 리투아니아 SSR 부총리를 거쳐 총리에 올랐으며, 부시·대처·콜 등 서방 정상을 만나 '호박색 숙녀'라는 별명을 얻고 신생국의 외교적 존재감을 세웠다. 의장 란츠베르기스의 강경 노선과 달리 실용주의자였으나, 1991년 1월 8일 고르바초프에게 군사행동 불가 보장을 요청했다 거부당하고 다음 날 사퇴했다. 닷새 뒤 소련군이 빌뉴스에서 민간인 14명을 살해했고, 그녀는 2004년 대선 결선에서 아담쿠스에게 근소하게 패한 뒤 농업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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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86빌뉴스대학 산업경제학 강사·부교수
  • 1986–1988리투아니아 SSR 농업경제연구소 부소장
  • 1989–1990리투아니아 SSR 각료회의 부의장
  • 1990.03–1991.01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
  • 1995–1998리투아니아 여성당 당수
  • 1996–2004세이마스(의회) 의원
  • 2004–2008농업장관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

Vytautas Landsbergis
리투아니아 독립운동 지도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1932–

제국에서 걸어 나간 첫 나라를 이끈 음악학자

1990년 3월 11일 밤, 독립 회복법이 반대 없이 가결되자 의장석의 그가 선언했다. 리투아니아는 다시 독립국가라고. 소련에서 걸어 나간 첫 공화국이었고, 크렘린이 받은 첫 탈퇴 통보였다.

리투아니아의 음악학자로 화가이자 작곡가 추를료니스 연구의 권위자였다. 1988년 개혁운동 사유디스의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고,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독립 회복법을 통과시켜 소련에서 이탈을 선언한 첫 공화국의 국가수반이 되었다. 모스크바의 경제 봉쇄와 1991년 1월의 유혈 진압 시도를 버텨 내며 독립을 지켰고, 이후 세이마스(국회) 의장과 유럽의회 의원을 지내며 리투아니아 우파의 원로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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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리투아니아 음악원(현 리투아니아 음악연극아카데미) 졸업
  • 1978–1990리투아니아 음악원 및 빌뉴스 사범대학 교수
  • 1988–1990사유디스 평의회 의장
  • 1989–1990소련 인민대표대회 대의원
  • 1990–1992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 (국가원수)
  • 1993–2003조국동맹(보수당) 당수
  • 1996–2000리투아니아 세이마스(국회) 의장
  • 2004–2014유럽의회 의원

아이나스 라사스

Ainius Lašas
연구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인 현대 ○ 현대 학자로 활동

발트 정치와 국제관계를 연구한 리투아니아 학자

아이나스 라사스는 리투아니아의 정치학자이자 발트 지역 정치와 국제관계를 연구한 학자다. 그는 2007년 논문에서 1991년 1월 빌뉴스와 리가의 유혈 진압을 둘러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무지 주장을 재검토하고, 이를 반박하는 정황 증거를 제시했다. 그의 연구는 소비에트 해체기의 민족문제와 권력 책임을 문서와 정치적 맥락 속에서 추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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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대리투아니아 정치학자
  • 2007「피의 일요일」 저자, Journal of Baltic Studies
  • 2008발트해 지역 안보 협력 연구 공저자
  • 2000년대~현재발트 정치·국제관계 연구

알베르타스 시메나스

Albertas Šimėnas
외국 정치가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인 1950– ○ 생존

독립 회복기의 경제학자 정치가

알베르타스 시메나스는 경제학자로 활동하다 리투아니아 독립 회복 운동에 참여한 정치가이자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의 서명자였다. 그는 1991년 1월 소련군이 빌뉴스의 핵심 시설을 포위한 시기에 정부를 이끌었고, 3일 뒤 실종 상태에서 게디미나스 바그노리우스에게 총리직이 넘어갔다. 이후 경제장관과 국회의원으로 일하며 독립국가의 경제 개혁과 제도 정비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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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리투아니아 파필리아이에서 출생
  • 1972–1984국가계획위원회 산하 연구기관 경제학자
  • 1984–1989빌뉴스 공학건설대 경제학 강사, 1989년 부교수
  • 1990–1992최고회의 의원,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 서명자
  • 1991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
  • 1991–1992경제장관
  • 1996–2000리투아니아 공화국 세이마스 의원, 경제위원회 위원장
  • 2000–2016리투아니아 철도 개발담당 이사 및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