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ёв
소련 러시아 1931–2022 ○ 자연사

체제를 고치려다 체제를 끝낸 사람

체르넨코 장례식 전날 밤, 고르바초프는 정원에서 라이사에게 말했다. "이렇게 더 살 수는 없어." 개혁은 그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체제가 스스로 뽑은 개혁가. 글라스노스트페레스트로이카로 체제를 구하려 했고, 1989년 동유럽에서 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1991년 크림 연금에서 돌아와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는 문서에 서명했다. 서방의 갈채와 국내의 원망을 동시에 받으며, 자신이 끝낸 나라보다 31년을 더 살았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스타브로폴에서 크렘린까지, 마지막 세대의 이력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1931년 3월 2일 스타브로폴 지방의 농촌 마을 프리볼노예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사는 소비에트 농민의 역사 그 자체였다. 두 할아버지가 모두 1930년대에 체포되었고, 소년 시절에는 독일군 점령을 겪었다. 열여섯 살에는 아버지와 함께 콤바인을 몰아 노동적기훈장을 받았고, 이 훈장과 우수한 성적으로 모스크바대학 법학부에 들어갔다. 대학에서 평생의 동반자 라이사를 만났고,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급우 즈데네크 믈리나르시(훗날 프라하의 봄의 주역)와 우정을 맺었다.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간 그는 콤소몰과 당 기구의 사다리를 착실히 올라 1970년 서른아홉에 스타브로폴 지방당 제1서기가 되었다. 스타브로폴은 당 지도부가 휴양하러 오는 온천 지대였고, 그는 이곳에서 수슬로프, 코시긴, 그리고 결정적으로 안드로포프의 눈에 들었다. 1978년 농업 담당 중앙위원회 서기로 모스크바에 올라왔고, 1980년 마흔아홉에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다. 노인들의 정치국에서 그는 거의 스무 살 아래의 막내였다.

안드로포프는 병상에서 그에게 회의 주재를 맡기려 했고, 체르넨코 시기에 그는 사실상의 제2서기로 이념과 인사를 다뤘다. 1984년 12월의 이념 회의 연설에서 그는 이미 글라스노스트와 인간적 요소 같은 말들을 꺼내 놓았다. 권력이 그에게 왔을 때, 그는 준비된 것처럼 보였다. 다만 무엇을 하려는지는 그 자신도 아직 다 알지 못했다.

1985년 3월, 「더 많은 사회주의」의 약속

1985년 3월 11일, 체르넨코가 죽은 다음 날 54세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노쇠한 지도자들의 장례가 이어지던 시대에 그의 젊음은 그 자체로 변화의 약속이었다. 스타브로폴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콤바인 조수로 일하며 모스크바대학 법학부를 나온 그는, 당 기구의 정점까지 올라간 전형적인 소비에트 세대의 아들이었다.

그의 개혁은 사회주의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되살리려는 것이었다. 그는 「더 많은 사회주의, 더 많은 민주주의」를 구호로 내걸었고, 페레스트로이카(개편)와 글라스노스트(공개성)로 침체한 경제와 경직된 정치를 깨우려 했다. 1986년 4월 체르노빌 참사에서 관료적 은폐의 대가를 확인한 뒤 글라스노스트는 더욱 과감해졌다. 검열이 풀리고, 스탈린 시대의 탄압이 공론의 장에 올랐으며, 1989년에는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경쟁 선거를 통해 인민대의원대회가 구성되었다.

대외적으로 그는 「신사고」를 내걸고 군비경쟁의 종식을 추구했다. 1987년 중거리핵전력조약으로 한 세대 만에 처음으로 핵무기가 실제로 감축되었고, 1989년에는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했다. 그해 동유럽의 격변 앞에서 그는 무력 개입을 거부했다.

글라스노스트라는 도박, 진실은 체제를 구할 것인가

글라스노스트(공개성)는 처음에는 통치의 도구였다. 관료의 태만과 부패를 여론으로 감시하게 해 개혁의 지렛대로 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1986년 4월 체르노빌 참사가 은폐의 대가를 보여 준 뒤, 공개의 범위는 현재에서 과거로, 경제에서 역사로 걷잡을 수 없이 넓어졌다. 아불라제의 영화 「참회」가 개봉되고, 아흐마토바의 「레퀴엠」,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그로스만의 「삶과 운명」이 차례로 활자화되었다. 잡지 구독 부수가 수백만씩 뛰었고,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두꺼운 문예지를 읽으며 자기 나라의 역사를 처음으로 배웠다.

1987년에는 스탈린 시대 탄압 희생자의 복권 작업이 재개되어 야코블레프가 이끄는 위원회가 부하린을 비롯한 옛 피고인들을 차례로 복권시켰다. 1988년 3월 화학 교사 니나 안드레예바의 「원칙을 버릴 수 없다」라는 투고가 보수파의 반격 신호탄이 되어 3주간 나라가 얼어붙었지만, 고르바초프는 프라우다의 반박문으로 응수하며 공개 노선을 지켰다. 1990년 6월에는 언론법이 제정되어 검열이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글라스노스트는 고르바초프의 가장 확실한 성공이자 가장 큰 정치적 대가를 치른 개혁이었다. 진실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했지만, 그 진실의 상당 부분은 당의 역사에 대한 것이었다. 역사가들은 경제 성과가 뒤따르지 못하는 상황에서 공개성이 체제의 정당성 자체를 잠식했다고 평가한다. 고르바초프 자신은 끝까지 이를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1990년, 대통령이 된 해에 모든 것이 흔들렸다

1990년 3월 고르바초프는 소련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국민 직선이 아니라 인민대의원대회의 간선을 택했고, 역사가들은 이를 그의 결정적 실기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이후 그의 권위는 선거로 검증된 옐친의 권위 앞에서 늘 한 수 접혀야 했다. 같은 달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선언했고, 여름에는 러시아를 포함한 공화국들의 주권 선언이 잇따랐다. 신문들은 이를 「주권의 행진」이라 불렀다.

가을에는 시장경제로 가는 500일 계획을 놓고 급진파와 정부안 사이에서 절충을 거듭하다 결국 개혁의 때를 놓쳤다. 10월에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바로 그 시기 상점 앞의 줄은 전쟁 이후 가장 길어지고 있었다. 바깥의 영예와 안의 궁핍이 이토록 엇갈린 지도자는 드물었다. 겨울로 접어들며 그는 크류치코프, 파블로프, 야나예프 같은 강경파를 중용하는 우선회를 택했고, 12월 셰바르드나제는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라고 경고하며 사임했다.

1991년 1월 빌뉴스에서 소련군이 TV 송신탑을 점거하며 14명이 죽었다. 고르바초프는 발포 명령을 부인했지만 책임 소재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민주파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3월의 연방 유지 국민투표에서 76%의 찬성을 얻자 그는 마지막 카드로 공화국 정상들과의 신연방조약 협상, 이른바 노보오가료보 프로세스에 모든 것을 걸었다.

1991년 8월, 포로스의 사흘과 돌아온 다른 나라

1991년 8월 20일은 신연방조약의 서명일이었다. 조약은 국방과 외교를 뺀 대부분의 권한을 공화국에 넘기는 내용이었고, 강경파에게는 이것이 연방의 사망 선고로 보였다. 8월 18일 오후, 크림반도 포로스의 대통령 별장에서 휴가 중이던 고르바초프에게 불청객들이 찾아와 비상사태 선포에 동의하라고 요구했다. 그가 거부하자 통신이 끊겼고, 그는 가족과 함께 사흘간 연금되었다. 모스크바에서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가 권력 장악을 선언했다.

쿠데타는 사흘 만에 무너졌지만, 8월 22일 모스크바로 돌아온 고르바초프는 「다른 나라로 돌아왔다」라고 말했다. 실권은 이미 저항의 상징이 된 옐친에게 넘어가 있었다. 옐친은 생중계되는 러시아 의회 단상에서 고르바초프에게 러시아공산당 활동 정지 포고령을 읽게 하는 굴욕을 안겼다. 8월 24일 고르바초프는 당 서기장직을 내려놓고 중앙위원회의 자진 해산을 권고했다. 그가 되살리려 했던 당은 그렇게 끝났다.

가을 내내 그는 신연방조약을 되살리려 분투했지만, 12월 1일 우크라이나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다수가 독립을 택하면서 연방을 이어 붙일 마지막 실이 끊어졌다. 12월 8일 벨로베즈 숲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 정상이 소련의 소멸을 선언했을 때, 소련 대통령에게 남은 것은 퇴임의 형식을 정하는 일뿐이었다.

1991년 12월 25일, 크렘린에서 내려진 붉은 깃발

개혁은 그의 손을 벗어났다. 부분적인 개혁은 계획경제의 조정 기능을 허물면서도 시장의 조정 기능을 세우지 못했고, 상점 진열대는 비어 갔다. 글라스노스트는 민족문제의 봉인을 풀었고, 카라바흐와 발트, 캅카스에서 분쟁이 타올랐다. 1991년 3월 17일의 연방 존속 국민투표에서 참여 공화국 투표자의 76퍼센트가 연방 유지에 찬성했으나, 그 연방을 지킬 정치적 수단은 이미 흩어지고 있었다.

1991년 8월의 쿠데타 시도는 고르바초프 자신이 임명한 측근들이 일으켰고, 실패한 쿠데타는 그가 지키려던 당과 연방을 함께 무너뜨렸다. 12월 8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정상들이 벨로베자 숲에서 연방의 해체를 선언했을 때, 그에게는 이를 막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12월 25일 저녁 그는 대통령직 사임을 발표했고, 그날 밤 크렘린 위의 붉은 깃발이 내려졌다.

서방에서 고르바초프는 유혈 없이 냉전을 끝낸 지도자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소련 시민들이 치른 대가는 참혹했다. 1990년대 러시아의 국내총생산은 거의 절반으로 줄었고, 남성 기대수명은 급락했으며, 수천만 명이 하루아침에 빈곤이나 무국적 상태로 떨어졌다. 사회주의를 구하려던 진심과 그 진심이 낳은 파국 사이의 간극, 그것이 그의 유산이다. 그는 2022년 8월 30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해방자인가 매장인인가, 끝나지 않은 평가

퇴임 후 고르바초프는 30년을 더 살았다. 재단을 세워 페레스트로이카를 변호했고, 탄압받는 신문 노바야가제타의 주주가 되었으며, 1996년 대통령 선거에 나서 0.5%를 얻는 수모도 겪었다. 서방에서 그는 유럽을 해방하고 핵전쟁의 공포를 걷어낸 인물로 환대받았지만, 자국에서는 제국을 무너뜨리고 1990년대의 고통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지목되곤 했다. 같은 사람에 대한 평가가 국경에 따라 이토록 갈리는 예는 20세기에 드물다.

학문적 평가도 갈린다. 아치 브라운은 그를 체제 안에서 자라나 체제를 넘어선, 진심으로 민주화를 택한 개혁가로 본다. 스티븐 코트킨은 개혁 불가능한 체제를 개혁하려 한 시도 자체가 붕괴를 낳았다고 본다. 다만 어느 쪽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 있다. 그는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대규모 유혈을 피했고, 권력을 지키기 위해 탱크를 부르자는 유혹을 끝내 거부했다. 그 자신의 요약은 이랬다. 「개혁은 시작되어야 했다. 나는 지금도 페레스트로이카를 변호한다.」

2022년 8월 30일 그는 91세로 죽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전쟁이 벌어지던 때였고, 그가 끝내려 했던 대결의 시대가 되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시점이었다. 국장은 없었고, 크렘린의 주인은 조문 대신 짧은 전보를 보냈다. 그는 노보데비치 묘지의 라이사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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