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10월, 위궤양 수술을 앞둔 병상에서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토요일에 새 회진이 있을 예정이다. 수술을 거부당하지나 않을까 두렵다." 수술이 취소될까 봐 두려워했지만, 수술대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러시아 혁명운동과 소비에트 군사 건설을 잇는 핵심 인물. 1904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 파업을 이끌고 두 차례 사형 선고를 받았다. 내전기에는 동부전선에서 콜차크를, 남부전선에서 브란겔을 격파한 붉은 군대의 가장 성공적인 전선 사령관으로 부상했다. 1925년 트로츠키의 후임으로 전쟁인민위원이 되어 정규군 중심의 군사개혁과 통일군사교리 확립을 추진했고, 마르크스주의 군사이론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같은 해 위궤양 수술 중 사망하여 소비에트 권력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죽음 중 하나를 남겼다.
24년간 키르기스스탄을 농업 공화국에서 산업 공화국으로 전환시킨, 흐루쇼프-브레즈네프 시대의 건설자
말년의 회고록에서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유산이자 짐이었던 프로젝트에 이렇게 썼다. "토크토굴 수력발전소 — 나의 자랑이자 나의 아픔이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출발한 키르기스 정치인으로, 1945년부터 10년간 모스크바 CPSU 중앙위원회 교관으로 근무하며 중앙당 경험을 쌓았다. 1961년부터 1985년까지 키르기스스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내며, 150개의 대규모 산업 시설(나린 수력발전 캐스케이드, 토크토굴 수력발전소, 마나스 국제공항)을 건설하고 51만 호 이상의 주택을 공급했다. 총공업생산은 5배, 전력 생산은 12배 증가했다. CPSU 중앙위원회 위원(1961~1986)으로 전연방 무대에도 참여했으며, 은퇴 후 독립 키르기스스탄 의회 의원(1993~2005)을 지냈다.
소설 속 '만쿠르트' — 기억과 정체성을 빼앗긴 채 어머니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노예 — 는 소비에트 지식인들 사이에서 역사적 기억상실의 대명사가 되었다.
칭기즈 아이트마토프는 키르기스인으로 러시아어로 주로 쓴 소비에트 대표 작가로, 중앙아시아 민속과 구전 전통을 현대적 서사에 녹여냈다. 중편 『자밀라』(1958)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굴사리여 안녕』 『하얀 배』로 레닌상(1963)과 세 차례 소련 국가상을 받았다. 대표작 『백 년보다 긴 하루』(1980)는 초원의 외딴 역을 배경으로 전설과 SF를 엮어, 기억을 빼앗긴 '만쿠르트'를 소비에트 지성사의 상징적 개념으로 만들었다. 고르바초프의 문화 고문으로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했고, 룩셈부르크 대사(1990~1993)와 키르기스스탄의 EU·NATO·유네스코 대사(2000~2008)를 지냈다. 175개 언어로 번역된 그의 작품은 중앙아시아의 목소리를 세계문학에 각인시켰다.
1991년 8월 21일, 쿠데타 한복판에서 판킨은 체코슬로바키아 TV에 출연했다. 소련 대사 중 유일하게 '야나예프의 치명적 실수'라며 공개 비판하고, 즉각 철회를 촉구한 순간이었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신문을 소련 최고의 청년지로 키운 언론인이자, 국가상을 수상한 문학비평가. 외교관으로 전환해 8월 쿠데타 당시 유일하게 공개 비판한 대사였으며, 쿠데타 실패 후 소련의 마지막 외무장관으로 이스라엘과의 외교 수립, 미소 군축 협상 개시를 주도했다.
1991년 8월 26일 최고회의에서 아카예프는 신연방조약 초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선언하고 국가연합을 요구했다.
물리학자이자 키르기스 공화국 과학아카데미 출신의 정치가인 아카예프는 당 관료가 아니었던 인물로서 1990년 공화국의 첫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그는 소련 말기의 민족 갈등과 주권 요구 속에서 다당제와 시장 개혁을 내세웠고, 1991년 쿠데타를 신속히 비판하며 키르기스스탄의 독립을 이끌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도 공화국의 주권을 중시해 8월 조약 초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고 국가연합에 가까운 수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재임 후반에는 대통령 권한의 연장과 가족·측근 중심의 통치, 부패 의혹이 커졌고 2005년 대중 봉기로 실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