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와 패전 사이에 선 군인 총리
1918년 11월 자그레브에서 시모비치는 '압도적 다수가 유고슬라비아 연대의 사상에 사로잡혔다'고 보고했고, 이탈리아의 류블랴나 점거 시도를 세르비아군이 먼저 입성하게 함으로써 저지했다.
두샨 시모비치는 왕국 유고슬라비아의 공군 장군 출신으로,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를 이끌어 삼국동맹 가입에 반대하는 군중의 환호 속에 총리가 된 군인 정치가였다. 그러나 집권 뒤에도 독일의 침공을 막으려 삼국동맹을 공식 폐기하지 못했고, 침공으로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다 1942년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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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베오그라드 육군사관학교 졸업, 포병 소위
- 1912–1918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살로니카 전선 제7보병연대 지휘
- 1918자그레브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민평의회 주재 세르비아 정부·최고사령부 대표
- 1936–1938유고슬라비아 왕립 공군 사령관
- 1938–1940유고슬라비아 왕립군 총참모장, 독일 침공 저항 주장 뒤 사임
- 1941.3–1942.13월 27일 쿠데타 뒤 유고슬라비아 왕국 총리 겸 총참모장
- 1941–1942런던 유고슬라비아 망명정부 수반
- 1945–1946베오그라드 귀환, 미하일로비치 재판 증인
왕정 복고를 지향한 세르비아 민족주의 군 지휘관
1941년 티토와의 협상에서 그는 총봉기가 시기상조라며 거부했고, 두 저항운동의 결별은 곧 무장 충돌로 이어졌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군 장교로서 제2차 세계대전 뒤 왕정과 세르비아 민족주의 질서를 회복하려 한 체트니크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41년 라브나 고라에서 점령군에 맞선 조직을 세웠지만, 전면 봉기보다 전후 권력 장악을 준비하는 전략을 택하며 티토의 파르티잔과 충돌했다. 체트니크 일부와 그의 지휘망은 추축국 및 협력 세력과 협력했고, 이러한 선택은 다민족 유고슬라비아에서 운동의 기반을 약화시키며 연합국의 지지를 파르티잔으로 옮기는 데 영향을 주었다. 전후 그는 반역과 전쟁범죄로 처형되었고, 세르비아 대법원은 2015년 재판이 정치적으로 동기화되었다고 보아 판결을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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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1913세르비아군 사관후보생, 발칸 전쟁 참전
- 1914–1918세르비아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35–1936불가리아 주재 군사 attaché
- 1936–1939체코슬로바키아 주재 군사 attaché, 참모 장교
- 1941유고슬라비아 제2군 참모장 대리
- 1941–1945유고슬라비아 국내군 체트니크 지휘관
- 1946반역·전쟁범죄 재판, 처형
티토와 결별한 당내 스탈린 지지자
1948년 4월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그는 티토의 대소련 답신에 반대했다.
스레텐 주요비치는 세르비아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이자 노동운동 조직가로, 제1차 세계대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쳤다. 그는 전쟁기 파르티잔 봉기를 조직하고 최고사령부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뒤 재무장관을 맡았다.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충돌에서 그는 소비에트 노선을 지지한 유일한 반대자로 중앙위원회 회의에 나섰고, 그 선택으로 당과 공직에서 축출되어 구금되었다. 1950년 자기비판 뒤 석방되고 훗날 당에 복귀했지만, 그의 경력은 혁명적 국제주의와 유고슬라비아의 자율성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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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1924귀국 후 노동운동·노동조합 활동
- 1924–1933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당 조직 활동
- 1938–1940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41–1944세르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참모 활동
- 1945–1947유고슬라비아 연방 재무장관
- 1948티토·스탈린 분열에서 인포르비로 노선 지지
- 1948–1950가택연금과 수감, 자기비판 뒤 석방
- 1950–1971당 복귀, 《보르바》·경제연구기관 간부
스탈린이 '영국 스파이'로 지목한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외교관
스탈린은 1948년 3월 27일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영국 스파이 벨레비트가 여전히 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유고슬라비아의 변호사 출신 파르티잔 장군이자 외교관으로, 전시에는 연합군 군사 임무단과의 접촉 창구를 맡았고 전후에는 외무차관으로서 서방과 협상했다. 1948년 3월 스탈린은 그를 '영국 스파이'라고 직접 지목하며 티토와의 솔직한 외교 서신 교환을 거부했고, 이는 티토-스탈린 결별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사임 후 복권되어 로마·런던 주재 대사와 유엔 유럽경제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냉전기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외교적으로 구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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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자그레브 대학교 법학박사
- 1939이스탄불에서 티토를 만나 KPJ에 입당
- 1942–1943파르티잔 최고사령부, 연합군 군사 임무단 연락장교
- 1945–1948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
- 1951–1952주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대사
- 1952–1956주영국 유고슬라비아 대사
- 1960–1967유엔 유럽경제위원회(UNECE) 사무총장
코민포름 숙청을 지휘한 티토의 3인자이자 유고 중앙집권의 수호자
내무장관 란코비치는 1948년 분열 직후 '누구를 신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며 가장 가까운 동지가 이제는 적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티토와 카르델에 이은 유고슬라비아 제3의 권력자로, 내무장관과 국가보안국(UDBA) 수장으로서 1948년 코민포름 결별 이후 반스탈린 숙청을 총괄했다. 골리오토크 강제수용소를 건설하고 수만 명의 '코민포름주의자'들을 체포·투옥시켰으며, 코소보에서 알바니아계 주민에 대한 강경 진압 정책을 주도했다. 연방 분권화에 반대하고 세르비아 중심의 중앙집권을 고수하다가 1966년 티토의 침실 도청 스캔들로 실각했으며, 이후 공직에서 완전히 배제된 채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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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 1929–1935공산주의 활동으로 체포·투옥
- 1941–1945파르티잔 최고사령부에서 복무, 1944년 OZNA 창설
- 1946–1953유고슬라비아 내무장관 겸 UDBA 수장
- 1948–1955코민포름 반대 숙청 총괄, 골리오토크 수용소 건설
- 1963–1966유고슬라비아 부통령
- 1966브리오니 전원회의에서 전직에서 해임, 당에서 제명
코민포름에서 서유럽 공산당을 공격하고, 훗날 『새 계급』으로 공산주의 체제를 해부한 유고슬라비아 반체제 인사
나는 공산주의의 전 길을 걸었다: 젊은 혁명가에서 독실한 스탈린주의자로, 그리고 완전한 환멸에 이르기까지.
몬테네그로 출신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자로, 파르티잔 투쟁과 전후 국가 건설에서 티토의 가장 가까운 동지 중 하나였다. 1947년 코민포름 창설 회의에서 카르델과 함께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의 '의회주의적 기회주의'를 신랄히 비판했으며, 그의 회고록은 이 회의의 내부 동학에 관한 핵심 사료로 남아 있다. 당내 민주화와 관료 특권층 비판을 제기하다 1954년 모든 직위에서 축출되었고, 수감 중 밀반출한 『새 계급』에서 공산당 관료가 착취적 지배계급으로 변했다고 주장해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다. 이후 30년 넘게 투옥과 감시 속에서도 저술을 이어간 동유럽 최초의 저명한 공산권 반체제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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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1936유고슬라비아 공산당 활동, 체포 및 수감
- 1937–1939KPJ 중앙위원 및 정치국 위원
- 1941–1945몬테네그로 파르티잔 봉기 지도, 최고사령부 선전 담당
- 1945–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부통령, 민족의회 의장
- 1953–1954『보르바』에 일당제 비판 연재, 당에서 축출
- 1956–1966반체제 저술로 두 차례 수감, 『새 계급』·『스탈린과의 대화』 해외 출간
- 1966–1995베오그라드에서 감시 속 자유, 저술 활동 지속
전쟁 희생자 수를 다시 계산한 독립 통계학자
1985년 그는 전쟁 손실을 실제 손실과 인구학적 손실로 나누어 제시했다.
보골류브 코초비치는 사라예보 출신의 세르비아계 법률가이자 통계학자로,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인구와 전쟁 손실을 분석했다. 그는 1985년 저서에서 1921년·1931년·1948년 인구조사를 비교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실제 손실을 약 101만 4천 명, 인구학적 손실을 약 198만 5천 명으로 추산했다. 그의 연구는 국가가 제시한 170만 6천 명이라는 수치와 구별되는 독립적 추계로, 전쟁 희생자 수를 둘러싼 역사논쟁의 핵심 자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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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1952프랑스 국립과학연구센터 연구 조교
- 1949파리에서 법학 박사 취득
- 1956시카고 루스벨트대학교 경제학 석사 취득
- 1963–1984파리에서 미국 기업의 행정·재무 책임자로 활동
- 1985『유고슬라비아 제2차 세계대전 희생자』 출간
- 1997『과학, 민족주의와 선전』 출간
- 2005『신화의 장례』 출간
망명 속에서 왕정의 정통성을 지킨 마지막 국왕
1941년 3월 27일, 두산 시모비치가 그에게 말한 순간이었다. "폐하, 이제부터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페타르 2세는 아버지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 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다.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로 섭정 체제가 무너지고 즉시 성년으로 선포되었지만, 곧 추축국 침공으로 런던의 망명정부를 이끌어야 했다. 그의 왕권은 점령에 맞선 국가적 연속성을 상징했으나, 망명정부의 분열과 파르티잔의 군사적·정치적 승리 속에서 실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45년 왕정이 폐지된 뒤에도 귀환하지 못한 그는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정통성을 둘러싼 미해결 긴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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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국왕 즉위, 섭정 아래
- 1934–1941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명목상 국왕
- 1941.03.27쿠데타 뒤 성년 국왕으로 선포
- 1941.04–06추축국 침공 뒤 정부와 함께 망명
- 1941–1945런던 유고슬라비아 왕정 망명정부의 국가원수
- 1944.09유고슬라비아 군인들에게 티토 합류를 호소
- 1945왕정 폐지로 폐위
- 1945–1970미국에서 망명 생활
- 1970미국 덴버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