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기능·활동
국가·세력(선택됨)

인물이 많은 소속

모든 소속 215개

가나

국제조직

그레나다

그루지야

그리스

기니비사우

남아프리카 공화국

네덜란드

대한민국

독일

동독

라오스

라트비아

러시아

루마니아

리투아니아

마다가스카르

모잠비크

몰도바

몽골

미국

베냉

베트남

벨기에

벨라루스

부르키나파소

불가리아

브라질

소련

소말리아

스위스

스페인

아제르바이잔

아프가니스탄

알바니아

알제리

앙골라

에스토니아

에티오피아

영국

예멘

오스트레일리아

오스트리아

우즈베키스탄

우크라이나

유고슬라비아

이스라엘

이탈리아

인도

인도네시아

일본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국

체코

체코슬로바키아

칠레

카자흐스탄

캄보디아

콩고-브라자빌

콩고민주공화국

쿠바

키르기스스탄

탄자니아

투르크메니스탄

튀르키예

포르투갈

폴란드

프랑스

핀란드

헝가리

정치적 입장
국적
출신 배경
시대

리처드 하우

Richard Howe
영국 국가기관 그레이트브리튼/영국 잉글랜드계 1726–1799 ○ 병사

영국 해군 제독, 1794년 6월 1일 해전의 승리자

1794년 6월 1일, 하우는 해협함대를 지휘하여 곡물 수송선단을 호위하던 프랑스 함대를 상대해 7척을 나포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영광의 6월 1일'로 불리는 이 해전은 사이트의 프랑스 혁명 전쟁 사건 문서와 직접 연결된다.

영국 왕립해군 장교이자 정치인. 1726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 참전하고 7년 전쟁 중 1759년 키브롱 만 해전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미국 독립 전쟁기에는 북아메리카 방면 해군 사령관 겸 평화위원을 지냈다. 1783년과 1783년 12월부터 1788년까지 해군본부 수석위원을 맡았고, 프랑스 혁명 전쟁에서는 해협함대를 지휘하여 1794년 6월 1일 전투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다. 1797년 스피트헤드 해군 반란에서 진압이 아닌 직접 설득으로 12시간 만에 평화를 회복했다. 1799년 8월 5일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7395등급함 HMS Pearl로 해군에 입대
  • 1746post-captain 승진
  • 1758형 조지 하우 전사 후 아일랜드 귀족 작위 상속
  • 1776–1778북아메리카 방면 해군 사령관 겸 평화위원
  • 1783–1788해군본부 수석위원
  • 1788하우 백작 작위 수여
  • 1793–프랑스 혁명 전쟁에서 해협함대 사령관
  • 1796Admiral of the Fleet 승진
  • 1797스피트헤드 반란 진정

호레이쇼 넬슨

Horatio Nelson
영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영국 잉글랜드 1758–1805 ✕ 트라팔가르에서 전사

나일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한 영국 해군 제독

1798년 8월 아부키르만에서 청색기 소장으로 영국 함대를 지휘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을 호송한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다. 프랑스 기함 오리앙이 폭발하고 교전한 17척 중 전열함 2척과 프리깃 2척만이 달아났다.

영국 해군 제독. 1758년 노퍽주 번햄소프의 목사관에서 태어나 삼촌 모리스 서클링의 후원으로 해군에 들어갔고, 서인도와 지중해에서 복무하며 1794년 칼비에서 한쪽 눈을, 1797년 산타크루스데테네리페에서 오른팔을 잃었다. 1798년 8월 1~3일 아부키르만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해 이집트의 나폴레옹 군을 고립시켰고, 1801년 코펜하겐에서 덴마크를 꺾었으며 1805년 트라팔가르에서 전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794칼비에서 한쪽 눈을 잃음
  • 1797산타크루스데테네리페에서 오른팔을 잃음
  • 1798나일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 격파
  • 1801코펜하겐 해전에서 덴마크 격파
  • 1805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전사

조지 커즌

George Nathaniel Curzon

인도 총독을 지내고 외무장관으로 커즌선과 로잔 조약 협상을 이끈 보수당 정치가

더비셔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이튼과 옥스퍼드를 거쳐 1885년 하원에 들어갔고, 러시아의 인도 위협을 경고하는 여행기를 썼다. 1899~1905년 인도 총독으로 행정 개혁을 폈지만, 1905년 벵골 분할로 민족주의를 갈라놓으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재임 중 대기근이 겹쳤다. 1차 세계대전 중 로이드 조지의 전시 내각에 들어갔고, 1919년 10월 외무장관이 되어 소련-폴란드 경계안인 커즌선에 이름을 남겼다. 세브르 조약을 설계했고, 1922년 로잔 회의에서 연합국 수석 협상자로 튀르키예의 국경을 정했다. 1923년 총리 자리를 놓쳤고 1925년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5하원 의원
  • 1899–1905인도 총독
  • 1916전시 내각, 상원 원내대표
  • 1919–1924외무장관
  • 1922–1923로잔 회의 연합국 수석 협상자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David Lloyd George

대전 후반 영국을 이끌고 강화회의에서 독일에 대한 온건론을 편 자유당 총리

맨체스터의 웨일스인 집안에서 태어나 급진 자유주의 웅변가로 이름을 얻었다. 재무장관으로 1909년 「인민 예산」과 국민보험법을 내 복지국가의 토대를 놓았다. 군수장관과 육군장관을 거쳐 1916년 12월 총리가 되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는 독일 경제를 무너뜨릴 막대한 배상에 반대하고 프랑스의 패권을 견제했다. 1921년 영국-소련 무역협정을 맺고 아일랜드 자유국 수립을 협상했으나 1922년 보수당이 연립에서 빠지자 사임했다. 1936년 히틀러를 만나 찬양하기도 했다. 1945년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0하원의원(카나번 버러스)
  • 1908–1915재무장관
  • 1915–1916군수장관
  • 1916육군장관
  • 1916–1922영국 총리
  • 1919파리 강화회의 영국 대표

레지널드 다이어

Reginald Dyer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 1864–1927 ○ 자연사

1919년 암리차르 잘리안왈라 바그에서 비무장 군중에게 발포를 명령한 영국 인도군 장교

영국령 인도 펀자브의 머리에서 양조장 관리인의 아들로 태어나 샌드허스트를 나왔고, 벵골군으로 옮겨 국경 원정에 나갔다. 1차 세계대전에서 세이스탄 부대를 지휘했다. 임시 준장이던 1919년 4월 13일, 집회 금지령을 어기고 암리차르의 잘리안왈라 바그에 모인 군중에게 경고 없이 발포를 명령했다. 병사들은 출구 쪽을 향해 약 10분 동안 1,650발을 쏘았고, 공식 보고로도 최소 379명이 죽었다. 영국 여성이 습격당한 거리에서는 사람들을 배로 기어가게 했다. 헌터 위원회의 비판을 받고 사임을 강요당했으나, 영국에서는 「인도를 구한 사람」이라며 모금이 열렸다. 1927년 뇌출혈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5샌드허스트 졸업, 영국군 임관
  • 1887벵골군 전속
  • 1914–1918세이스탄 부대 지휘
  • 1919.04.13잘리안왈라 바그 학살
  • 1920퇴역

라이어널 던스터빌

Lionel Charles Dunsterville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 1865–1946 ○ 자연사

1918년 던스터포스를 이끌고 페르시아를 가로질러 바쿠 방어에 나선 영국 장군

1865년 스위스 로잔에서 태어나 러디어드 키플링과 같은 학교를 다녔고, 키플링의 소설 속 「스토키」의 모델이 되었다. 영국령 인도군 장교로 북서변경과 중국에서 복무했다. 1917년 말 메소포타미아 전선 등에서 뽑은 1,000명 미만의 연합군 부대 던스터포스의 지휘관이 되어 1918년 1월 바그다드를 출발해 페르시아를 가로질렀다. 1918년 8월 센트로카스피 독재 정부가 장악한 바쿠의 방어에 나섰으나, 9월 14일 오스만군의 공세 앞에서 바쿠를 버리고 물러났다. 1946년 잉글랜드 데번주에서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884영국 육군 중위 임관
  • 1900–1902의화단 운동 때 중국 복무
  • 1915임시 준장, 젤룸 여단장
  • 1917–1918던스터포스 지휘관
  • 1918소장 진급

해럴드 함즈워스

Harold Sidney Harmsworth
영국 1868–1940 버뮤다에서 사망

『데일리 메일』 사설로 트리아농 국경 수정을 주장해 헝가리의 영웅이 된 영국 신문왕 로더미어 자작

형 앨프리드(뒷날 노스클리프 자작)와 함께 1896년 『데일리 메일』, 1903년 『데일리 미러』를 창간했고, 1922년 형이 죽은 뒤 어소시에이티드 뉴스페이퍼스의 지배권을 사들였다. 1914년 남작, 1919년 로더미어 자작이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중 한때 항공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27년 6월 21일 『데일리 메일』 사설 「헝가리의 양지」에서 트리아농 조약으로 잃은 영토의 상당 부분을 헝가리에 돌려주자고 주장해 헝가리의 국민 영웅이 되었고, 헝가리인 120만 명 이상이 감사 서한에 서명했다. 1930년대에는 히틀러를 찬양하고 1934년 영국 파시스트 연합을 지지했으며, 1940년 버뮤다에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6『데일리 메일』 공동 창간
  • 1903『데일리 미러』 창간
  • 1919로더미어 자작
  • 1922어소시에이티드 뉴스페이퍼스 인수
  • 1927「헝가리의 양지」 사설
  • 1934영국 파시스트 연합 지지
영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영국 영국 (영국계·미국계 혼혈) 1874–1965 ○ 뇌졸중

백분율 합의로 유럽을 스탈린과 나눈 영국의 전시 총리

1944년 10월 모스크바 회담에 대한 처칠의 회고록 서술이다. "나는 반쪽짜리 종이에 백분율을 적어 스탈린에게 밀어 보냈다. 스탈린은 푸른 연필로 체크 표시를 해 돌려보냈다." 소련 당국은 1958년 이를 부인했다.

영국의 정치가·군인·저술가. 1874년 블레넘 궁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도·수단·보어전쟁에서 복무한 뒤 1900년 의회에 입성했고, 자유당 정부에서 통상장관·내무장관·해군장관을 지냈으나 갈리폴리 원정 실패로 물러났다. 1924~1929년 재무장관을 지냈고, 1940년 5월 총리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끌었다. 1945년 선거에서 패한 뒤 야당 당수가 되어 1946년 '철의 장막'을 경고했으며, 1951~1955년 다시 총리를 지냈다.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1965년 사망했다. 제국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으며 인도 자치에 반대한 인물로서 평가가 갈린다.

상세 이력 보기
  • 1940–1945연합내각 총리 (제1차)
  • 1951–1955총리 (제2차)
  • 1945–1951야당 당수
  • 1939–1940해군장관
  • 1924–1929재무장관
  • 1911–1915해군장관
  • 1910–1911내무장관
  • 1908–1910통상장관
  • 1921–1922식민지부 장관
  • 1919–1921육군·공군 장관
  • 1917–1919군수장관

레지널드 드랙스

Reginald Plunkett-Ernle-Erle-Drax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1880–1967 ○ 자연사

군사개혁을 주장했으나 외교 협상 권한 없이 파견된 제독

소련 측이 협상 권한을 묻자, 드랙스의 사절단은 정부 승인 없이는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었다.

레지널드 드랙스는 영국 해군의 전술과 지휘 개혁을 주장한 제독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주요 지휘직과 참모직을 맡았다. 1939년 8월 그는 프랑스 대표단과 함께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논의했지만, 영국 정부의 서면 협상 권한을 받지 못했다. 낡은 상선으로 늦게 도착한 대표단의 무력함은 독일과의 전쟁을 막기 위한 영국·프랑스 외교의 제한과 불신을 드러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6영국 해군 입대, HMS 브리태니아에서 훈련
  • 1909『현대 해군 전술』 출판, 참모교육 연구
  • 1914–1918대전함 HMS 라이언에서 복무, 주요 해전에 참가
  • 1919–1922왕립 해군참모대학 교장
  • 1923–1924독일 연합국 해군통제위원회 위원장
  • 1932–1934아메리카·서인도 제도 전대 총사령관
  • 1935–1938플리머스 해군기지 총사령관
  • 1939영국 군사사절단장으로 모스크바 협상 참가
  • 1939–1941노어 해군기지 총사령관
  • 1943–1945대서양 수송선단 준장
  • 1939『모스크바 사절단』 출판

휴 다우딩

Hugh Dowding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인 1882–1970 ○ 자연사

레이더 방공체계의 설계자

“시카고의 갱스터들이 차에 방탄유리를 달 수 있다면, 우리 조종사들도 같은 것을 가질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영국 공군 장교 휴 다우딩은 전투기 중심의 방공을 일찍 중시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영국 전투기지휘부에서 레이더, 관측망, 습격 plotting, 무선통제를 하나의 체계로 묶어 소수의 전투기로 독일 공군의 공격에 대응했다. 1940년 영국 전투에서 예비 전력과 조종사를 보존한 신중한 운용은 방어의 지속성을 높였지만, 전후에는 대형 편대 전술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지휘권을 잃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0영국 육군 왕립수비포병대 장교
  • 1914왕립비행단 조종사 및 비행지휘관
  • 1915왕립비행단 제16비행대 지휘관
  • 1929영국 방공 전투지역 사령관
  • 1930공군위원회 보급·연구 담당 공군위원
  • 1936영국 공군 전투기지휘부 사령관
  • 1940영국 전투 방어 지휘
  • 1943남작 서임

윌리엄 시즈

William Seeds
영국 국가기관 영국 아일랜드계 1882–1973 ○ 자연사

협상의 한복판에서 소련을 오판한 영국 외교관

시즈는 몰로토프를 두고 “농민 유형의 어리석은 교활함”이 있다고 평가했다.

윌리엄 시즈는 영국 외교관으로, 여러 유럽·아메리카 공관을 거쳐 1939년 모스크바 대사로 부임했다. 그는 영불소 상호원조 조약을 만들려는 협상에서 영국을 대표했지만, 서방의 지연과 소련의 안보 요구가 충돌하는 과정을 냉정하게 읽어 내지는 못했다. 리트비노프의 교체 뒤 몰로토프를 경멸적으로 평가한 그의 보고는 협상 실패를 바라본 당대 영국 외교의 시야와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904–1907워싱턴 주재 영국 외교공관
  • 1908–1910베이징 주재 영국 공사관
  • 1913–1919리스본 총영사관 대리공사·총영사
  • 1928–1930라인란트 영국 고등판무관
  • 1930–1935브라질 주재 영국 대사
  • 1939–1940소련 주재 영국 대사, 모스크바 삼국동맹 협상 대표
  • 1973런던에서 사망

베르트람 램지

Bertram Home Ramsay
영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영국 영국계 1883–1945 ✕ 추락사

됭케르크 철수를 조직한 해군 지휘관

도버성 아래 지휘부에서 램지와 참모들은 됭케르크 철수를 9일 밤낮으로 조정했다.

베르트람 램지는 영국 해군 장교로, 전시 해상작전을 조직하고 지휘하는 능력으로 두각을 보였다. 1940년 됭케르크에서 그는 군함과 민간 선박을 동원해 포위된 영국·연합군 병력의 철수를 지휘했다. 이후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상륙작전을 거쳐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연합군 해군 총지휘를 맡았다. 그는 1945년 프랑스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8영국 해군에 입대
  • 1915–1919모니터함 M25 및 구축함 HMS 브로크 지휘, 도버 순찰대 복무
  • 1933–1935전함 HMS 로열 소버린 함장
  • 1939–1942도버 지휘관, 해협 방어와 됭케르크 철수 담당
  • 1942북아프리카 침공 부해군 총사령관
  • 1943시칠리아 침공 동부 기동부대 해군 지휘관
  • 1944노르망디 상륙작전 연합군 해군 총사령관

존 메이너드 케인스

John Maynard Keynes

강화회의에 항의해 재무부를 떠나 배상의 해악을 경고한 영국 경제학자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나 킹스 칼리지에서 수학을 공부했다. 1915년 재무부에 들어가 연합국 간 신용 조건을 설계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는 독일의 배상액을 지불 능력을 넘지 않게 하려 했으나 고위 협상에서 대부분 밀려났고, 조약에 실망해 재무부를 떠났다. 1919년 『평화의 경제적 귀결』로 조약의 해악을 예측해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대공황 속에서 유효수요가 경제활동 수준을 정한다고 보고 재정·통화 정책으로 불황에 맞설 것을 주장했으며, 1936년 『일반이론』을 냈다. 1944년 브레턴우즈 협상에서 영국 대표단을 이끌었으나 미국안에 밀렸다. 1946년 심장마비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9재무부 관리
  • 1919파리 강화회의 재무부 대표, 사임
  • 1919『평화의 경제적 귀결』
  • 1936『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
  • 1944브레턴우즈 회의 영국 대표단장

앨런 브룩

Alan Francis Brooke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아일랜드인 1883–1963 ○ 자연사

제국참모총장으로 연합군 대전략을 세운 영국 육군 원수

그는 1943년 프랑스 상륙이 충분한 병력과 상륙정, 제공권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이 판단은 노르망디 상륙을 1944년 6월까지 늦췄다. 1945년까지 대륙 작전이 불가능하다는 그의 트라이던트 회의 발언은 전략가로서의 명성을 훼손했다.

앨런 브룩은 1883년 7월 23일 프랑스 바녜르드비고르에서 태어나 1963년 6월 17일 심장마비로 사망한 영국 육군의 야전원수다. 그는 포병 장교로 군 생활을 시작해 1929년 라크힐 포병학교 교장을 지냈고 1940년 본토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1941년 12월 제국참모총장, 1942년 3월 참모총장위원회 의장에 올라 윈스턴 처칠의 최고 군사고문으로서 연합국의 전략을 조율했고 1944년 1월 1일 원수로 진급했다.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추축국을 몰아내고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이탈시켜 지중해 항로를 여는 전략을 우선했으며, 영국 본토 출생이 아닌 프랑스 출생이지만 국적은 영국이다. 전쟁일기는 처칠과 다른 지휘관들에 대한 직설적 비판으로 유명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02왕립포병대 소위 임관
  • 1914–1918서부전선 포병 참모장교
  • 1938–1940대공군단 및 남부사령부 지휘관
  • 1940–1941영국 본토군 총사령관
  • 1941–1946제국참모총장
  • 1942–1946참모총장위원회 의장
  • 1953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영국 최고 치안관

클레멘트 애틀리

Clement Attlee

포츠담 회담 도중에 처칠을 대체해 등장한, 말수 적은 전후 개혁의 설계자

1945년 선거 승리 후 버킹엄궁에서 조지 6세를 만난 애틀리는 침묵을 깨며 "제가 선거에서 이겼습니다"라고 말했고, 왕은 "압니다. 6시 뉴스에서 들었습니다"라고 답했다.

클레멘트 애틀리는 1945년 포츠담 회담 도중 노동당의 압승으로 윈스턴 처칠을 대신해 영국 총리가 된 인물이다. 전시 연립내각에서 부총리로 처칠을 보좌했으나, 유권자들은 전쟁 영웅 대신 복지국가를 약속한 무채색의 그를 선택했다. 그의 정부는 국민보건서비스(NHS)를 창설하고 주요 산업을 국유화했으며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을 단행해 대영제국의 해체를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마셜 플랜과 NATO 창설을 주도하며 미국 편에 서서 냉전의 초기 윤곽을 그렸다.

상세 이력 보기
  • 1935–1955노동당 당수
  • 1940–1942국새상서 (전시 연립내각)
  • 1942–1945부총리 (전시 연립내각)
  • 1945–1951영국 총리
  • 1951–1955야당 당수

존 고트

John Vereker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아일랜드인 1886–1946 ○ 자연사

됭케르크에서 철수를 택한 야전 원수

“여기 다시 간다, 전쟁을 향해 행진한다.”

존 고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용맹성과 제2차 세계대전의 지휘 판단이 함께 기억되는 영국 육군 원수였다. 1918년 됭노르 운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도 공격을 이끈 공로로 빅토리아 십자장을 받았다. 프랑스 주둔 영국 원정군 사령관으로서 1940년 독일군의 포위와 대륙 방어선의 붕괴를 판단해 됭케르크 철수를 명령했고, 이 선택은 병력을 보존했지만 그의 야전 지휘 능력에 대한 논쟁을 남겼다. 이후 몰타 총독으로 포위된 섬의 방어를 지휘하며 명성을 회복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5척탄병 근위대 소위로 임관
  • 1914–1918서부전선 참전, 참모 및 대대 지휘
  • 1936–1937참모대학장
  • 1937–1939제국참모총장
  • 1939–1940프랑스 주둔 영국 원정군 총사령관
  • 1941–1942지브롤터 총독
  • 1942–1944몰타 총독 겸 총사령관
  • 1944–1945팔레스타인·트란스요르단 고등판무관

버나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1887–1976 ○ 자연사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지상군 지휘관

1944년 6월 12일 노르망디에서 병사들에게 말했다. “여러분과 나는 곧 함께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버나드 몽고메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과 병사 훈련에 대한 집착을 바탕으로 지휘관이 된 영국 육군 원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엘알라메인에서 제8군을 재건해 승리를 이끌었고, 이후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을 앞두고 제21군집단을 맡아 초기 연합군 지상군을 통솔했으며, 상륙 규모를 확대하고 해안 교두보를 넓히는 구상을 추진했다. 그의 신중하고 통제적인 작전 방식은 병력 손실을 줄이는 장점과 전쟁을 느리게 한다는 비판을 함께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08왕립 워릭셔 연대 임관
  • 1914–1918서부전선 참전, 제47런던사단 참모장
  • 1942–1943제8군 사령관, 엘알라메인 전투 지휘
  • 1943제8군 사령관, 시칠리아·이탈리아 침공 지휘
  • 1944제21군집단 사령관, 노르망디 상륙 초기 연합군 지상군 지휘
  • 1944–1945제21군집단 사령관, 북서유럽 전역 지휘
  • 1946–1948제국참모총장
  • 1951–1958유럽연합군 최고사령부 부최고사령관

트래퍼드 리말로리

Trafford Leigh-Mallory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인 1892–1944 ✕ 추락사

육군 협동을 중시한 연합군 공군 지휘관

몽고메리는 “그만이 지상전에서 이기려는 유일한 공군 지휘관이며 질투심도 없다”며 전쟁성에 리말로리의 유임을 요구했다.

트래퍼드 리말로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항공 정찰과 육군 협동 경험을 바탕으로 왕립공군의 작전 지휘관이 된 영국 공군 원수였다. 영국 전투에서는 대편대 운용을 둘러싸고 휴 다우딩과 키스 파크의 방어적 운용에 맞섰으며, 그 갈등은 지휘부 교체와도 얽혔다. 그는 오버로드에서 연합원정공군을 조정해 독일군 증원과 수송망을 차단하는 항공계획을 추진했지만, 프랑스 민간인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판단도 함께 남겼다. 노르망디 전투 뒤 동남아시아 공군 사령관으로 이동하던 중 프랑스 알프스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6왕립비행군단 제7비행대 조종사
  • 1917–1918왕립비행군단 제8비행대 지휘관
  • 1937–1940왕립공군 제12전투비행단 사령관
  • 1940–1942왕립공군 제11전투비행단 사령관
  • 1942–1943왕립공군 전투사령부 총사령관
  • 1943–1944연합원정공군 총사령관, 오버로드
  • 1944동남아시아 공군 사령관 지명

키스 로드니 파크

Keith Rodney Park
영국 국가기관 영국 뉴질랜드 1892–1975 ○ 자연사

영국 본토 항공전의 방공 지휘관

레이더와 보고 체계가 알려 준 표적에 맞춰 11그룹 전투기를 즉시 출격시켜 남동부 방어를 유지했다.

뉴질랜드 출신의 영국 공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의 포병과 전투기 조종 경험을 방공 지휘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1940년 11그룹을 지휘하며 런던과 잉글랜드 남동부의 전투기 방어를 운용했고, 레이더·보고 체계와 신속한 소규모 출격을 결합해 독일 공군의 공세에 대응했다. 그의 판단은 비행장 피해와 조종사 소모가 누적되는 조건에서 전투기 전력을 보존하면서도 남부 방공망을 유지해야 한다는 긴장 속에서 이루어졌다. 전후에는 몰타와 극동에서도 공중작전을 지휘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4–1916뉴질랜드 원정군 포병 장교로 갈리폴리와 서부전선에 복무
  • 1916–1918왕립비행군단과 왕립공군에서 전투기 조종사, 48비행대대 지휘
  • 1938–1940전투기지휘부 선임 항공참모장교
  • 1940.04–11제11그룹 항공장교 지휘관, 영국 본토 항공전의 남동부 방공 운용
  • 1940–1941훈련지휘부에서 전투기 조종사와 부대 훈련 담당
  • 1941–1942이집트 항공장교 지휘관
  • 1942–1945몰타 방공과 지중해·중동 및 인도 공중작전 지휘
  • 1946영국 공군 퇴역, 공군 원수 계급

아서 해리스

Arthur Travers Harris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1892–1984 ○ 자연사

전략폭격을 총력전의 중심에 둔 공군 지휘관

쾰른에 대한 1,000기 폭격 직후 뉴스릴 연설에서 그는 '그들은 바람을 뿌렸으니, 이제 회오리바람을 거두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서 해리스는 제2차 세계대전기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를 이끈 공군 지휘관으로, 독일 도시를 겨냥한 지역 폭격을 전쟁 수행의 핵심 수단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대규모 폭격의 작전적 효율성을 높였지만 민간인 사망과 도시 파괴를 낳은 전략의 책임도 함께 짊어졌다. 노르망디 상륙을 앞두고는 독일 산업에 대한 압박을 약화시킨다며 수송계획으로의 전환에 반대했으나, 1944년 3월 프랑스 철도 중심지에 대한 초기 공격을 명령해 계획을 실행했다. 이 긴장은 전략폭격의 독자성을 지키려는 공군 지휘와 지상군 지원이라는 연합군의 공동 목표가 충돌한 사례를 보여 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8왕립비행군단 조종사 및 편대 지휘관
  • 1918–1920왕립공군 창설과 함께 RAF 복무
  • 1925–1927제58비행대대 지휘관
  • 1937–1939제4폭격단 및 중동 RAF 부대 지휘
  • 1939–1941제5폭격단 사령관, 공군참모차장
  • 1942–1945RAF 폭격기 사령부 총사령관
  • 1953남로디지아 출신 인사로 남작 작위 수여

로널드 스코비

Ronald MacKenzie Scobie
영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영국 영국계 1893–1969 ○ 자연사

아테네 전투를 지휘한 영국 장군

1944년 12월 1일, 스코비는 ELAS에 무장을 해제하라고 명령했다.

로널드 스코비는 제1·2차 세계대전에 복무한 영국 육군 장군으로, 토브루크와 몰타를 거쳐 제3군단을 지휘했다. 그는 1944년 해방 직후 그리스에서 영국의 군사 개입을 대표하는 지휘관이 되었다. 12월 1일 ELAS 무장해제 명령은 국민해방전선과 영국·그리스 정부 세력의 충돌을 촉발했고, 스코비는 아테네 전투에서 영국군 작전을 지휘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4–1918왕립공병대 장교, 서부전선 복무
  • 1920–1924울리치 왕립육군사관학교 생도중대 장교
  • 1939전쟁청 동원국 부국장
  • 1941제70보병사단장, 토브루크 요새 지휘
  • 1942몰타 주둔군 사령관
  • 1943–1944중동 총사령부 참모총장, 제3군단장
  • 1944–1946그리스 주둔 영국군 사령관
  • 1947육군 퇴역

윌리엄 쇼얼토 더글러스

William Sholto Douglas
영국 국가기관 영국 스코틀랜드계 영국인 1893–1969 ○ 자연사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한 영국 공군 지휘관

다우딩의 후임이 된 그는 전투기 사령부를 재건하는 동시에 독일 공군에 공세로 맞서려 했다.

윌리엄 쇼얼토 더글러스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친 영국 공군 고위 지휘관이었다. 그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대규모 전투기 편대를 중시하는 노선을 지지했고, 휴 다우딩의 후임으로 전투기 사령부를 맡아 전쟁의 소모로 약해진 전력을 재건하면서 독일 공군에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 이 전환은 방공 중심의 임무를 프랑스 상공 공세로 넓혔지만, 서커스 작전은 제한적인 성과에 그쳤다. 전후에는 독일 영국 점령지 사령관과 브리티시 유러피언 항공 회장으로 활동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4영국 육군 포병대 소위
  • 1915–1919왕립비행단 조종사 및 비행대 지휘관
  • 1936–1938공군부 참모업무국장
  • 1938–1940공군참모차장보 및 공군참모차장
  • 1940–1942전투기 사령부 총사령관
  • 1943–1944중동 공군사령부 총사령관
  • 1944–1945연안 사령부 총사령관
  • 1946–1947독일 영국 점령지 공군 총사령관
  • 1949–1964브리티시 유러피언 항공 회장

앤서니 이든

Anthony Eden

전쟁과 탈식민화의 영국 외교가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네 연합국 외무장관이 본회의 의장을 교대로 맡았고, 이든도 그 의장단에 포함됐다.

앤서니 이든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연맹과 집단안보를 중시한 영국 보수 정치가였다. 그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부상 속에서 세 차례 외무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윈스턴 처칠의 핵심 외교 보좌역으로 소련 및 연합국과의 전후 질서를 협상했다. 1945년 얄타 회담과 샌프란시스코 국제기구회의에서 영국을 대표하며 전후 국제기구 형성에 참여했지만, 총리 재임 중 수에즈 침공을 추진해 영국 제국의 한계와 미국 의존을 드러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9영국 육군 장교, 서부전선 복무
  • 1923–1957워릭·리밍턴 지역 하원의원
  • 1931–1934외무차관
  • 1935–1938외무장관
  • 1940–1945외무장관, 전쟁내각 각료
  • 1945얄타 회담 및 샌프란시스코 회의 영국 대표
  • 1951–1955외무장관
  • 1955–1957영국 총리, 보수당 당수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1906–1997 ○ 자연사

그리스 저항운동에 투입된 영국 공병 장교

1942년 11월 25일, 마이어스의 일행은 그리스 파르티잔 약 150명의 지원을 받아 고르고포타모스 철교를 폭파했다.

에드먼드 마이어스는 영국 왕립공병대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특수작전집행부의 그리스 군사사절단을 이끌었다. 그는 1942년 고르고포타모스 철교 파괴 작전을 설계하고 지휘하며 ELAS와 EDES의 협력을 조정했다. 군사 목표를 수행한 그의 임무는 전후 그리스의 정치 질서와 영국의 개입 문제에 얽혔고, 그는 회고록에서 그 경험을 기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6영국 왕립공병대 임관
  • 1942–1944점령 그리스 영국 군사사절단장, 특수작전집행부
  • 1942고르고포타모스 철교 파괴 작전 지휘
  • 1943아소포스 철교 파괴 작전 참여
  • 1944제1공수사단 왕립공병대 지휘관, 아른험 전투
  • 1955회고록 《Greek Entanglement》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