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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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츨라프 바츨라보비치 보롭스키

Вацлав Вацлавович Вор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71–1923 ✕ 암살

혁명과 외교, 문학 사이를 오간 최초의 소비에트 외교관, 로잔에서 총탄에 쓰러지다

1923년 5월 10일 로잔 호텔 세실 식당. 저녁 식사 중 백계 장교 모리스 콘라디가 다가가 권총을 쏘았다. 콘라디는 웨이터에게 리볼버를 건네며 말했다: "나는 좋은 일을 했다 — 러시아 볼셰비키가 유럽 전체를 망쳤다… 이것은 온 세계를 이롭게 할 것이다."

보롭스키는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문학비평의 선구자이자 세계 최초의 소비에트 외교관 중 한 사람이다. 폴란드계 귀족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해 'P. 오를롭스키' 등 여러 필명으로 당 기관지에 날카로운 문학비평과 정치 팸플릿을 발표했다. 1917년 말 스칸디나비아 3국 주재 외교대표로 임명되며 혁명 러시아의 첫 외교 창구를 열었고, 1921년부터 이탈리아 전권대표로 활동하며 제노바 회담에 참가했다. 1923년 로잔 회담 중 백계 망명 장교에게 암살당했으며, 범인에 대한 스위스 법정의 무죄 판결은 소련-스위스 국교 단절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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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혁명운동 참여, 학생 비밀 모임
  • 1897–1899체포, 뱟카 유형
  • 1900–1904제네바 망명, 《이스크라》 기고, 볼셰비키 합류(1903)
  • 1903오데사 잠입, 지하활동, 볼셰비키-폴란드 좌파 연락 담당
  • 1905–1906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언론 활동, 무기 구매, 제4차 당대회 참가
  • 1915–1916페트로그라드 지멘스-슈케르트 공장 근무
  • 1917.04스톡홀름 자граничное бюро ЦК 위원 (가네츠키·라데크와 함께)
  • 1917–1919스칸디나비아 3국(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 주재 소비에트 외교대표
  • 1919–1920귀국, 국가출판사(Госиздат) 책임자
  • 1921–1923이탈리아 주재 전권대표 겸 무역대표
  • 1922제노바 회담 소비에트 대표단 참가
  • 1923.05.10로잔 회담 파견 중 백계 장교 M. 콘라디에게 암살

표도르 아로노비치 로트시테인

Фёдор Аронович Ротштей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71–1953 ○ 자연사

30년 영국 망명 끝에 소비에트 최초의 페르시아 대사가 된 볼셰비키 역사가

레닌은 1920년 7월 로트시테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러시아로 오는 문제에 대해 나는 양면적인 생각이다. 당신은 런던에서의 활동에 대단히 중요하다. 추방당하게 내버려두라 ― 감히 그럴 용기가 있는지 두고 보자."

30년간 영국에서 활동한 볼셰비키 망명가. 1921년 초대 주페르시아 소비에트 대사로 차르의 불평등조약을 폐기했고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를 설립했다. 영국 노동운동과 제국주의를 연구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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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정치적 이유로 러시아 제국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
  • 1895–1911사회민주연맹(SDF) 가입, 1901–1906년 집행위원
  • 1901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 가입, 볼셰비키 파벌 지지
  • 1911–1920영국사회당(BSP) 좌파 지도자, 반전 입장 견지; 《The Call》 기고
  • 1914–1918영국 외무성 및 전쟁성에서 러시아어 통번역관으로 근무
  • 1920영국 공산당(CPGB) 창립 기여, 소비에트 러시아로 귀국
  • 1921–1923주페르시아 RSFSR 전권대표, 소련-이란 조약 체결
  • 1923–1930외무인민위원부 collegium 위원, 《국제생활》 책임편집자
  • 1924–1925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IMKhMP) 초대 소장
  • 1927–1945《대소비에트백과사전》 제1판 주필진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45–1946레닌 훈장(1945), 노동적기훈장(1946) 수훈

게오르기 바실리예비치 치체린

Георгий Васильевич Чичер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2–1936 ○ 자연사

혁명국가를 외교 언어로 번역한 첫 외무인민위원

「치체린은 훌륭한 일꾼, 가장 성실하고 똑똑하며 박식하다. 이런 사람은 귀히 여겨야 한다. '지휘력'이 부족한 게 흠이라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다.」 — 레닌, 1918년 7월

1872년 탐보프현 카라울 영지에서 오래된 러시아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1930년까지 13년간 소비에트 외교를 이끌었다. 1918년 3월 트로츠키의 뒤를 이어 외무인민위원 대행이 되었고 5월 30일 정식 취임했으며, 1922년 라팔로 조약으로 베르사유 체제의 봉쇄를 뚫었다. 1923년부터 소련 외무인민위원, 1930년 병으로 물러나 리트비노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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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30외무인민위원
  • 1898–1904제정 러시아 외무성 관리

알렉산드라 미하일로브나 콜론타이

Александра Михайловна Коллонта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72–1952 ○ 자연사

여성 해방을 혁명의 의제로 만든 최초의 여성 각료

제2차 소비에트 대회가 스몰니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한 때를 두고 콜론타이는 «내 생애 가장 위대하고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장군 미하일 도몬토비치의 딸로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핀란드 제재소주의 딸이었다. 1917년 10월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복지인민위원으로 선출되어 세계 최초의 여성 각료가 되었으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에 반대해 곧 사임했다. 1919년 여성부(제노트델)를 세우는 데 앞장서 여성 문맹 퇴치와 노동·가족 제도 개편을 알리는 일을 맡았고, 1920년 노동자반대파에 가담했다가 패배했다. 1922년부터 노르웨이·멕시코·스웨덴의 외교 사절로 나가 1943년 대사로 승진했는데, 이 임무는 사실상의 유배여서 국내 정치 활동은 막혔고 1952년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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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7망명, 여성 노동운동 조직
  • 1909《여성문제의 사회적 기초》 출간
  • 1917–1918복지인민위원: 세계 첫 여성 각료
  • 1919–1922여성부(제노트델) 지도
  • 1920–1921노동자반대파 참여
  • 1921팸플릿 《노동자 반대파》 발표
  • 1923–1945노르웨이·멕시코·스웨덴 공사·대사: 세계 첫 여성 공사
  • 1923《날개 달린 에로스에게 길을》 발표
  • 1944소련-핀란드 강화 교섭 중개

세라피마 일리이니치나 고프네르

Серафима Ильинична Гопнер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0–1966 ○ 자연사

볼셰비키 최초로 우크라이나 당을 이끈 여성, 코민테른 7개 전 대회 대표

1917년 2월, 예카테리노슬라프. 혁명의 소식은 '전신으로' 도시에 도착했다고 고프네르는 회고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지 1년도 안 된 시점, 그녀는 곧바로 볼셰비키 위원회와 신문 《즈베즈다》 편집실로 달려갔다.

우크라이나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볼셰비키. 1903년 입당 이래 지하운동·내전·코민테른 무대를 가로지르며 활동했고, 7개 전 대회 대표를 지냈다. 대숙청을 넘기고 역사학자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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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오데사에서 비합법 사회민주주의 서클 활동 시작
  • 1903RSDRP 가입, 볼셰비키 파벌에 합류
  • 1905예카테리노슬라프 당위원회 위원, 이후 서기
  • 1910–1916프랑스 망명: 파리 볼셰비키 그룹, 프랑스 사회당, 베른 여성 사회주의자 회의
  • 1916–1917러시아 귀환, 이르쿠츠크·예카테리노슬라프·브랸스크 지하 활동, 《즈베즈다》 편집
  • 191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 1919–1920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제12군 정치국 강사과정 책임자
  • 1920–1925예카테리노슬라프·모스크바·도네츠크·하르키우 주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5–1927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여성부 출판분과장
  • 1927–193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전우크라이나 프롤레타리》 편집장, 《콤무니스트》 부편집장
  • 1928–1943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후보위원, 7개 전 대회 대표
  • 1938–1945《이스토리체스키 주르날》 부편집장
  • 1945–1966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 박사
  • 1960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수여

스타니스와프 스타니스와보비치 페스트콥스키

Станислав Станиславович Пестков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82–1937 ✕ 처형

폴란드 귀족에서 카자흐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된 국제주의 혁명가

1917년 11월, 스몰니 연구소에서 멘진스키에게 런던 대학에서 금융학을 공부했다고 말하자, 멘진스키가 몸을 일으키며 「그렇다면 자네를 국가은행 관리자로 임명하겠네」라고 선언했다. 그렇게 페스트콥스키는 소비에트 국가은행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SDKPiL에 입당하고 1905년 혁명기에는 지도부에서 활동한 폴란드 귀족 출신 볼셰비키. 10월혁명 직후 국가은행 초대 인민위원을 지냈고, 스탈린의 민족문제인민위원부에서 부인민위원으로 일하며 소비에트 민족정책의 제도화에 참여했다. 1919년 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에 임명되어 사실상 카자흐스탄의 초대 소비에트 지도자가 되었으며, 이후 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와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가로 국제혁명운동에 헌신했다. 대숙청으로 1937년 처형,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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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906SDKPiL 입당, 1905-06년 주이사회 위원
  • 1906–19124년 강제노동형 후 이르쿠츠크 영구유형, 1912년 크라쿠프로 탈출
  • 1917.10–11중앙전신국 인민위원 → 국가은행 인민위원
  • 1917–1919민족문제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스탈린 보좌)
  • 1919–1920키르기스(카자흐) 혁명위원회 초대 의장
  • 1920–19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서부전선 정치총국장
  • 1924–1926초대 소련 주멕시코 전권대표
  • 1926–1937MOPR 중앙위 부의장, 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

오시프 아로노비치 퍄트니츠키

Осип Аронович Пятницкий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882–1938 ✕ 처형

코민테른 지하 배달부에서 기구의 등뼈로, 그리고 기구에 먹혔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니콜라이 예조프에게 NKVD 비상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이 상정되자, 퍄트니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당 전체를 총살하게 될 것입니다." 회의장은 침묵에 잠겼고, 그는 6월 25일 전원회의에서 축출되었다.

가난한 유대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글을 깨친 구(舊) 볼셰비키. 『이스크라』의 비밀 국제 배송망을 구축한 지하운동의 명수에서, 12년간 코민테른 서기로 각국 공산당의 연락·재정·간부를 총괄하는 국제기구의 실무 등뼈로 성장했다.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NKVD의 비상권한 부여에 공개 반대했고, 한 달 뒤 체포되어 1년간 고문 끝에 이듬해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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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2『이스크라』 비밀 배송망 구축, '프레이다크'로 활동
  • 1903–1908볼셰비키 합류, 오데사·모스크바 위원회 활동, 1905년 혁명 참여
  • 1914–1917체포되어 예니세이스크주 유형, 2월 혁명 후 모스크바 복귀
  • 1917모스크바 당위원회·전투당센터 구성원, 철도노선 적위대 지휘
  • 1921–1923코민테른 집행위원회(ИККИ) 위원
  • 1923–1935코민테른 서기 — 연락·재정·간부 배치 총괄
  • 1935–1937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행정정치부장
  • 1937.06중앙위 전원회의에서 NKVD 비상권한 반대, 축출·체포

야코프 자하로비치 수리츠

Яков Захарович Суриц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2–1952 ○ 자연사

멘셰비키에서 소련 최장수 대사로: 아프가니스탄에서 브라질까지, 6개국을 횡단한 혁명 외교관

1940년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1919년 이래 뚱뚱하고 수염 난 야코프 수리츠는 아프가니스탄, 터키, 독일과 국제연맹 논쟁에서 빛나는 기록을 쌓은 소련 최고의 외교관이었다."

멘셰비키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소련 외교관. 1918년 외무인민위원부에 합류한 후 덴마크·아프가니스탄·노르웨이·터키·독일·프랑스·브라질 등 7개국에서 소련을 대표했다. 특히 1923년부터 11년간 터키 대사로 재임하며 아타튀르크와 긴밀히 협력,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1925)을 체결했고 앙카라에 최초의 대사관을 건립했다. 1934년 베를린 주재 대사로 부임해 나치 집권 초기 독소 경제 관계를 관리했으며, 1937년 파리로 자리를 옮겨 단치히 위기와 겨울전쟁을 거치며 소련의 국제연맹 외교를 이끌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기 소비에트 외교가 당파적 아마추어에서 전문 외교기구로 변모하는 전 과정을 관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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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유대인 노동총동맹(분트) 가입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가입, 멘셰비키 분파
  • 1907–1910혁명 활동으로 체포, 토볼스크현 유배
  • 1910–1917독일 망명, 하이델베르크·베를린 대학에서 철학·법학 수학
  • 1917러시아 귀국, RSDLP(b)에 합류
  • 1918–1919덴마크 주재 소련 외교사절단 부대표
  • 1919–1921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아프간 조약 기초
  • 1920–1922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투르키스탄 위원회 위원, 중앙아시아 외무인민위원부 전권위원
  • 1922–1923노르웨이 주재 소련 외교대표
  • 1923–1934터키 주재 소련 전권대표; 소련-터키 우호중립조약 체결 (1925), 앙카라 대사관 건립 (1926)
  • 1934불가리아와의 외교관계 수립 교섭 주도
  • 1934–1937독일 주재 소련 전권대표, 초기 나치 시대 독소 경제 관계 관리
  • 1937–1940프랑스 주재 소련 전권대표 겸 국제연맹 소련 대표단원
  • 1940프랑스 정부에 의해 페르소나 논 그라타 선언
  • 1940–1945외무인민위원부 고문, 대사급 외교관
  • 1946–1947브라질 주재 초대 소련 전권대사
  • 1948은퇴

아돌프 아브라모비치 이오페

Адольф Абрамович Иофф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유대계) 1883–1927 ✕ 자살

브레스트-리톱스크 소비에트 대표단장, 트로츠키의 가장 오랜 동지

유서에서 자신의 죽음을 '싸우는 자의 항의'로, 트로츠키·지노비예프 제명을 '테르미도르의 시작'으로 규정했다. 유서 본문은 11월 15일 밤에서 16일 사이에 쓰고 16일자로 남겼으며, 사망일은 사료에 따라 16일과 17일로 갈린다.

트로츠키의 가장 오랜 동지이자 볼셰비키 외교관. 심페로폴의 유대계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고, 1912년 오데사에서 체포되어 10개월 수감 뒤 시베리아로 유형되었다가 1917년 2월혁명으로 풀려났다. 10월 봉기를 군사혁명위원회에서 준비했고 트로츠키의 증언에 따르면 그 의장으로 봉기를 이끌었다. 브레스트-리톱스크 소비에트 대표단을 이끌었고, 주독 전권대표로 베를린에 대사관을 세웠다가 1918년 11월 추방되었다(독일 혁명 준비 혐의와 실제 준비 활동이 함께 기록된다). 1922–23년 주중 대표로서 1923년 쑨원과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이후 좌익반대파에 섰다. 1927년 해외 치료가 거부되자 자살로 항의했고, 사후 가족도 탄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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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7멘셰비키로 혁명운동 시작, 베를린·취리히에서 의학·법학 수학
  • 1908–1912빈에서 트로츠키와 《프라우다》 발행, 아들러에게 정신분석 수학
  • 1912–1917오데사에서 체포·10개월 수감 후 시베리아로 유형, 1917년 2월혁명으로 풀려나다
  • 1917.0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0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중앙위원 후보·서기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10월 봉기 지휘
  • 1917.11–1918.01브레스트-리톱스크 평화협상 소비에트 대표단 의장
  • 1918.04–11주독 RSFSR 전권대표, 추가조약 체결; 독일 혁명 준비 혐의와 실제 준비 활동이 함께 기록된 가운데 11월 추방
  • 1922–1923주중 소비에트 대표, 쑨원-이오페 선언으로 국공합작의 길을 열다
  • 1924–1925주오스트리아 소비에트 전권대표
  • 1925.06–1927트로츠키가 의장인 중앙양보위원회 부의장
  • 1919–1920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국고통제 인민위원·노동국방위원회 위원
  • 1920–1921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와 강화조약, 폴란드와 리가 조약 체결
  • 1922제노바 회의 소비에트 대표단 일원
  • 1923–1927좌익반대파 활동
  • 1927모스크바 대학 소비에트 법학부 교수

그리고리 예브세예비치 지노비예프

Григорий Евсеевич Зиновьев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83–1936 ✕ 총살 처형

10월에 반대했고, 스탈린을 변호했고, 스탈린에게 죽었다

1924년 5월, 레닌의 유언이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 낭독되었다. 카메네프가 문서를 읽었고,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을 옹호하는 연설에 나서 그를 서기장으로 재선출하자는 동의를 거수로 통과시켰다. 트로츠키의 소수만 반대했고, 유언은 대회에 보고되지 않았다.

레닌의 오랜 망명 동지이자 코민테른 초대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초기 얼굴이었다. 본명은 옵세이-게르숀 라도미슬스키로, 옐리자베트그라드(오늘날 우크라이나 크로피브니츠키)의 유대인 낙농가에서 태어났다. 1917년 10월 무장봉기에는 카메네프와 함께 공개 반대했으나,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북부의 당 조직을 장악했고 1921년 3월 정치국 정회원이 되었다. 레닌 사후 스탈린·카메네프와 3두체제를 이루어 트로츠키를 고립시켰고, 1925년 12월 신반대파로 패배한 뒤 1926년 레닌그라드 소비에트와 코민테른 의장직에서 밀려났다. 1936년 8월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총살되었고, 198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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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망명기 레닌의 최측근
  • 1917.10카메네프와 봉기 반대, 계획 누설 파동
  • 1919–1926코민테른 초대 의장
  • 1923–1925트로이카, 트로츠키 견제
  • 1926–1927통합반대파, 출당과 굴복 반복
  • 1936제1차 모스크바 재판, 처형

레프 보리소비치 카메네프

Лев Борисович Каменев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유대계 아버지·러시아계 어머니) 1883–1936 ✕ 처형

당의 공인된 신중파: 경고는 그보다 오래 살았다

1917년 10월 18일, 카메네프는 무장봉기가 혁명에 파멸적이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레닌은 제명을 요구했으나, 10월 20일 중앙위원회는 사퇴를 받아들였다. 10월 25일 그는 국가원수가 되었으나 11월 4일 연립정부 문제로 사퇴했다.

레닌이 1902년 파리에서 만나 30년 넘게 함께한 가장 오랜 동지다. 1901년 당에 들어가 시베리아 유형과 망명을 거쳤고, 1914년에는 프라우다와 두마 볼셰비키 의원단을 지도했다. 10월 봉기에 반대했으나 혁명 후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1918~1926)을 지냈고 레닌 병중에는 정치국을 주재했다. 1922년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추천했고 스탈린·지노비예프와 3두체제를 이루었지만 1925년 「우리는 지도자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공개 맞서 실각했다. 이후 푸시킨 하우스와 아카데미아 출판사를 이끌며 문학 연구에 전념했고, 1936년 8월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1988년 복권되었으나 당적은 회복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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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두마 볼셰비키 의원단 재판, 시베리아 유형
  • 1917프라우다 편집, 4월 테제와 10월 봉기에 반대
  • 1918–1926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 1922–1924레닌 병중 정치국 주재, 트로이카
  • 1936지노비예프와 나란히 재판, 처형

재판에서 살아남아 감옥에서 죽은 논객

"스탈린과 모세의 차이를 아십니까? 모세는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지만, 스탈린 동지는 유대인들을 정치국에서 데리고 나왔지요." —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정치국에서 축출된 뒤 라데크가 바자노프에게 던진 농담.

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으로 국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오간 저널리스트·외교가였다. 레닌의 측근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과 코민테른 창립에 참여했고, 볼셰비키 중앙위원·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날카로운 논쟁과 비꼬는 유머로 이름난 좌익 반대파 지도자였으나, 1930년 공개 자아비판으로 복당했다. 대숙청 속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중심 피고로 법정에서 연극적 자백을 펼쳐 10년형을 받았고, 1939년 옥중에서 스탈린의 지시로 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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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3국제 공산주의·외교 활동
  • 1923–1927좌익 반대파 지도부
  • 1937–1939재판, 수감과 살해

표트르 라자레비치 보이코프

Пётр Лазаревич Вой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27 ✕ 암살

니콜라이 2세 처형 결정에 참여한 볼셰비키 외교관: 바르샤바에서 암살당하다

1927년 6월 7일 아침, 바르샤바 중앙역. 보이코프가 아르카디 로젠골츠를 마중 나갔다가 백계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가 달려들어 권총을 쏘았다. 체포된 코베르다는 말했다: "나는 러시아를 위해, 수백만 인민을 위해 복수했다."

보이코프는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련 외교관이다. 1918년 우랄 소비에트 공급위원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의 처형을 결정한 특별회의에 참여했으며, 시신 훼손용 황산 공급 명령에 서명했다. 1924년부터 주폴란드 소련 전권대표로 바르샤바에서 외교 임무를 수행했고, 1927년 6월 백계 러시아인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그의 암살은 소련-폴란드 관계의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소련 당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모스크바에서 전 제국 귀족 20명을 즉결 처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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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멘셰비키
  • 1906얄타 경찰서장 겨냥 폭탄 테러 기도 실패, 도피
  • 1907–1917제네바 망명, 제네바 대학교 수학·화학 전공, 멘셰비키-국제주의파 활동
  • 1917.08볼셰비키 합류, 예카테린부르크 소비에트 및 군사혁명위원회 참여
  • 1918.01–12우랄 지역 소비에트 공급위원
  • 1918.07우랄 소비에트 특별회의에서 니콜라이 2세 처형 결정에 참여, 황산 공급 서명
  • 1919–1920식량인민위원부 분배국 근무, 첸트로소유스(중앙소비자협동조합) 부의장
  • 1920–1921대외무역인민위원부 이사, 수출위원회 참여
  • 1924–1927주폴란드 소련 전권대표(전권대사)
  • 1927.06.07바르샤바 중앙역에서 백계 망명 청년 보리스 코베르다에게 암살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부하린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Бухарин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8 ✕ 처형

「당 전체의 총아」, 당의 이름으로 죽다

1920년대 중반, 스탈린은 부하린을 두고 동지를 향해 말했다: 「너와 나, 부하르치크는 히말라야이고, 나머지는 작은 얼룩일 뿐이다.」 10년 뒤 스탈린은 그를 총살하도록 했다.

레닌이 유언에서 「당 전체의 총아」라 부른 명민한 이론가. 브레스트에서는 혁명전쟁을 외친 최좌파였고, 10년 뒤에는 네프와 농민을 지키려 스탈린의 대전환에 맞선 「우편향」이 되었다. 1929년 정치국에서 밀려났다가 1934년 중앙위원으로 복귀해 이즈베스티야 주필과 1936년 헌법 기초에 참여했으나, 1937년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1938년 재판 끝에 총살되었다. 스탈린에게 「코바, 왜 나의 죽음이 필요한가?」라고 적은 쪽지는 메드베데프 형제의 저술을 통해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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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7뉴욕에서 망명 신문 편집
  • 1917《제국주의와 세계경제》 출간(1915년 집필)
  • 1918좌파 공산주의자, 브레스트 반대
  • 1918–1929프라우다 주필, 코민테른 지도부
  • 1920프레오브라젠스키와 《공산주의 ABC》 공저·출간
  • 1921《사적 유물론: 사회학 체계》 출간
  • 1925–1928네프 이론가, 「부유해지십시오」
  • 1929「우편향」으로 실각
  • 1934–1936이즈베스티야 주필, 1936년 헌법 기초 참여
  • 1938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처형

레프 미하일로비치 카라한

Лев Михайлович Караха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1889–1937 ✕ 처형

중국에 대한 짜르 불평등조약을 폐기한 1919년 카라한 선언의 주역

1925년 베이징 외교단 단장이 된 카라한. 부르주아 예법을 조롱하던 볼셰비키였지만, 그가 은빛 육두마차를 타고 흰 장갑을 낀 연미복 차림으로 등장하자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흰 장갑을 우아하게 낄 줄 아는 볼셰비키."

아르메니아계 변호사 가문 출신으로, 1904년 15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으며 처음에는 멘셰비키였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서기를 지낸 뒤 외무부인민위원이 되었다. 1919년 '카라한 선언'을 기초·발표하여 중국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모든 불평등조약과 특권 포기를 선언했고, 이는 소비에트 아시아 정책의 기초를 이룬 문서가 되었다. 주중 대사 시절 1924년 중소협정을 체결했으며, 1937년 대숙청 중 '친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사형당했다가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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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5세에 RSDLP 입당, 처음에는 멘셰비키
  • 1917.0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0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 1917–1918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소비에트 대표단 서기
  • 1918–1921외무부인민위원 (RSFSR)
  • 1921–1922주폴란드 RSFSR 전권대표
  • 1922–1923외무인민위원부 동방부장
  • 1923–1926주중 소비에트 전권대표 (1924년부터 대사)
  • 1925베이징 외교단 단장 (두아옌)
  • 1926–1934외무부인민위원 (USSR)
  • 1934–1937주터키 소비에트 전권대표

아르카디 파블로비치 로젠골츠

Аркадий Павлович Розенгольц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9–1938 ✕ 처형

소비에트 공군을 세우고 대외무역을 맡은 볼셰비키

런던 아르코스 급습(1927년 5월 12일) 뒤 로젠골츠는 7쪽 항의각서를 내고 군사스파이 활동을 부인했으나, 5월 24일 볼드윈 수상이 의회에서 압수문서를 공개했고 영국은 5월 25일 국교를 단절하고 그를 추방했다.

1905년 16세로 볼셰비키에 입당한 뒤 내전에서 정치위원으로 카잔 공략과 콜차크전에 참여했고, 1922년부터 1924년까지 공군 총책임자를 지냈다. 1925년부터 1927년까지 런던에서 대리대사로 일하며 아르코스 사건과 영소 단교를 맞았고, 귀국 뒤 좌익 반대파와 결별하고 스탈린 체제에 합류했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 대외무역인민위원을 지냈으며, 1937년 해임과 체포 후 1938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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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16세에 볼셰비키 입당, 제4차 당대회 대의원; 비테프스크·키예프 등지에서 보험대리인으로 지하활동
  • 1917모스크바 소비에트 집행위원,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무장봉기 참여
  • 1918–1920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8군·제5군 정치위원, 체크트란 창설
  • 1922–1924공군 총책임자, 독일 정부·군부와 비밀 군사협상, 46인 선언 서명
  • 1925–1927런던 주재 소련 대리대사; 아르코스 급습(5월 12일), 5월 25일 단교와 추방
  • 1927–1930중앙통제위원회 위원·상임위원, 노농감찰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30–1937대외무역인민위원 — 5개년 계획 시기 수출입 총괄, 오르조니키제와 설비 수입 갈등
  • 1937–19386월 14일 해임 후 국가비축관리국장으로 전출, 10월 7일 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표도르 표도로비치 라스콜니코프

Фёдор Фёдорович Раскольни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2–1939 → 사망

볼가 소함대 사령관에서 망명 비판자로: 스탈린에게 공개서한을 보낸 외교관

1918년 12월, 구축함 스파르타크 호에서 영국군에 나포될 때 — 에스토니아인 선원으로 위장하고 감자 자루 속에 숨었으나, 에스토니아어를 한마디도 못해 정체가 탄로났다.

내전기 볼가·발트함대 사령관을 지낸 볼셰비키 해군 지휘관. 외교관으로 복무하다 1938년 소환을 거부하고 망명, 1939년 〈스탈린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으로 대숙청을 공개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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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재학 중 볼셰비키 입당
  • 1912–1914《즈베즈다》·《프라우다》 문학 담당 기자
  • 1917크론시타트 소비에트 부의장, 7월 사건 후 체포·투옥, 10월 석방
  • 1918해군참모부 정치위원, 볼가 소함대 사령관 — 카잔 탈환, '죽음의 바지선' 포로 432명 구출
  • 1919–1920영국군 포로(런던 브릭스턴), 교환 후 볼가-카스피 소함대 사령관, 엔젤리 상륙작전 지휘
  • 1920–1921발트함대 사령관, 두 차례 적기훈장 수훈
  • 1921–1924아프가니스탄 주재 전권대표
  • 1928–1930글라브레페르트콤 의장, 《크라스나야 노비》 주필
  • 1930–1938에스토니아·덴마크·불가리아 주재 전권대표
  • 1938–1939소환 거부, 파리 망명; 1939년 8월 〈스탈린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발표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미프

Паве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иф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901–1938 ✕ 처형

28인의 볼셰비키를 키워낸 코민테른의 중국 전문가

1931년 1월, 미프는 상하이에서 열린 중국공산당 제4차 전원회의에 코민테른 대표로 직접 참석해 왕밍과 그의 그룹을 정치국으로 진입시키며 '28인의 볼셰비키'의 약진을 현장에서 주도했다.

10대 후반에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내전에 참전한 뒤 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에서 수학했다. 모스크바 중산대학(중국 노동자 공산대학)의 부총장을 거쳐 1927년 26세의 나이로 총장에 올랐고, 왕밍을 비롯한 '28인의 볼셰비키'로 불리는 중국 유학생 집단을 직접 길러내 초기 중국공산당 내 친소련·정통파 세력의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28년부터 1935년까지 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으로서 중국 혁명 노선을 조정했으며, 1935년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을 지냈다. 중국 혁명과 식민지 문제에 관한 다수의 저작을 남긴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중국학의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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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내전 참전, 정치위원
  • 1925–1927중산대학 부총장
  • 1927–1929중국 노동자 공산대학 총장
  • 1928–1935코민테른 동양사무국 부소장
  • 1930–1931코민테른 극동부 비서
  • 1935–1937디미트로프의 대중국 정치보좌관
  • 1937국제민족식민지문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