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카데르의 얼음도끼가 트로츠키를 끝내지 못했다면, 내 책이 그러길 바란다'는 말로 자신의 트로츠키 전기를 소개했다.
로버트 서비스는 영국의 소련사 연구자이자 역사가로, 혁명부터 스탈린 사망까지의 정치사를 폭넓게 다뤘다. 레닌·스탈린·트로츠키 전기를 통해 개인의 선택과 혁명 국가의 구조를 함께 해석했다. 베리야 처형을 그의 범죄뿐 아니라 전후 개혁 구상을 둘러싼 권력투쟁으로 읽은 그의 서술은 역사해석 논쟁을 촉발했다.
"소련 경제는 대개 실패로 치부된다. 그러나 나는 소련 경제가 훌륭히 작동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20세기 가장 성공한 개발도상국이었지만, 소련은 바로 그 뒤를 이었다."
옥스퍼드대학교 경제사학자 로버트 앨런은 2003년 저서 『농장에서 공장으로: 소비에트 산업혁명의 재해석』에서 소련의 산업화가 20세기 가장 성공적인 개발 사례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그의 추계에 따르면 1928년부터 1937년까지 1인당 소비는 약 30% 증가했으며, 이는 기존 연구(버그슨·채프먼)의 소비 감소 결론을 정면으로 뒤집는 결과였다. 그는 계량모형을 바탕으로 집단화 없는 NEP 지속 경로가 GDP 성장률 면에서는 실제 성과와 비슷했을 것이라는 반사실적 시뮬레이션도 제시해, 소련 산업화의 비용과 성과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 참조점이 되었다.
프랭크는 원자폭탄이 천황을 움직여 항복을 시작하게 했지만 「소련의 개입이야말로 항복 이행을 강제하는 데 무겁게 작용하는 요인」이라고 봤다.
리처드 B. 프랭크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을 연구한 군사사가다. 그는 과달카날 전투부터 일본 제국의 종말까지 작전과 정책, 일본 지도부의 판단을 함께 추적하며 전쟁의 귀결을 설명했다. 특히 『Downfall』은 일본의 항복을 둘러싼 군사적 붕괴와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결합해 논쟁적인 종결 과정을 분석한 저작이다.
“군사적으로는 균형이 크게 이동한 순간이지만, 소련인들이 갑자기 자신을 믿기 시작한 상징적 전환점이었다.”
리처드 오버리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독일을 중심으로 현대 전쟁의 구조와 결과를 연구해 온 영국 역사가다. 그는 군사 작전만이 아니라 국가의 경제 동원, 사회적 경험, 정치적 심리가 전쟁의 향방을 함께 만든다고 분석했다. 스탈린그라드에 대해서는 소련의 전략적 승리가 아직 독일의 패배를 확정한 것은 아니지만, 소련 사회가 자신감을 회복하고 독일군이 취약하다는 인식이 세계로 퍼진 상징적·심리적 전환점이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은 전쟁의 물질적 조건과 집단적 인식의 변화를 대립시키기보다 서로 연결해 파악한다.
그는 더그의 구성원을 120명으로 보는 통설에 반대하여, 실제로는 110명 미만이었고 고위 장교는 배제되었으며 새 구성원은 받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현대 에티오피아사를 연구하는 역사가이자 저술가로, 아디스아바바 대학 명예교수다. 하일레 셀라시에 1세 대학에서 역사학을, 런던 대학에서 아프리카사를 공부했고, 역사학과장과 에티오피아 연구소장을 지냈다. 1855~1991년을 다루는 에티오피아 현대사 표준 개설서를 썼으며, 사회연구포럼 창립 회원으로 활동했다.
「우리는 스탈린에게 기근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이 드러낸 것은 잘못된 정책 탓에 초래되었지만 예상치 못했고 바라지도 않았던 기근 위기와 씨름하는 소비에트 지도부의 모습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제사가이자 소비에트 사회·경제·인구사 연구자. 로버트 W. 데이비스와 함께 『기아의 해』(2004)를 저술해 구소련 기록보관소 자료를 바탕으로 1932–1933년 기근 사망자를 약 450만~650만 명으로 추산했으며, 기근을 의도된 제노사이드가 아니라 강제적 곡물 조달 정책·기상 재해·무분별한 공업화가 결합된 비극으로 설명했다. 1990년 「소련의 1930년대 탄압 규모와 초과 사망에 대한 추가 해명」으로 서방의 과장된 수치를 바로잡기 시작했고, 훗날 독일과 소련의 탄압 규모를 비교하는 작업으로까지 나아갔다.
복무 중 '바실리 티모페예프'라는 필명으로 첩보소설을 쓰던 그는, 기밀 해제 전 예조프의 신문 조서 원문을 발굴해 평전에 그대로 실었다.
소련 국가보안 기관(KGB) 출신의 러시아 작가다. 기밀 해제 이전의 수사 기록에 접근해 예조프 평전 『예조프: 「철의」 스탈린 인민위원 이야기』(2001, 「특별 문서고」 총서)를 썼다. 이 책은 예조프 신문 조서와 재판 기록을 대량으로 수록한 초기 공간물이지만, 조서 인용 사이사이에 신문실 정경 같은 소설적 재구성을 끼워 넣어 사료와 창작의 경계가 흐리다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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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모스크바 폴리그라프 연구소 졸업
1971KGB 학교 졸업
1970년대–국가보안기관 정보장교로 복무(대령), 태국·인도에서 타스 통신 특파원으로 근무
2008년 인터뷰에서 "프랑코는 스페인 국민 대다수의 감사와 인정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마오주의 도시게릴라 조직 GRAPO의 창립 멤버에서 프랑코 옹호 역사 수정론자로 전향한 스페인의 논쟁적 저술가. 스페인 내전의 발발 책임이 좌익의 반민주적 혁명 기도에 있다고 주장하며, 1934년 10월 사회당 주도 봉기를 내전의 실질적 시작으로 보는 관점으로 포스트 프랑코 역사학계의 정설에 도전했다. 2003년 『내전의 신화』는 15만 부 판매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고, 스탠리 G. 페인의 옹호와 폴 프레스턴 등 주류 역사학자들의 맹비판 사이에서 스페인 현대사 수정주의 논쟁의 중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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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1974마드리드 국립언론학교 수학, 급진적 반프랑코 운동가로 활동
1975마오주의 무장조직 GRAPO 공동 창립, 10월 1일 경찰관 살해 현장에 동행
1977GRAPO에서 제명됨
1983납치 공모로 징역 1년 선고, 사회 재편입 조치 수용
1999–2001『내전의 기원』 등 3부작 출간, 수정주의적 내전 해석 제시
2003『내전의 신화』 출간, 15만 부 판매 및 6개월 연속 베스트셀러
2005–현재Libertad Digital 등에 칼럼 기고, 프랑코 옹호 역사서 다수 출간
1977년 12월 로우르데스 카살과 함께 안토니오 마세오 여단을 이끌고 쿠바를 방문했다. 55명이 참여한 이 방문은 쿠바계 이민자들과 쿠바 정부의 1978년 대화를 앞서는 것이었다.
마리펠리 페레스-스타블은 1949년 태어난 쿠바 출신 사회학자·역사가로, 11세 때 가족과 함께 쿠바를 떠났다.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에서 1985년 사회학 박사, 플로리다대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쿠바 혁명: 기원, 과정, 유산』(옥스퍼드대 출판부, 초판 1993)의 저자이며 이 책의 시대 구분이 이 사전의 역사 서술에서 인용된다. 플로리다 인터내셔널 대학교 사회학 교수(현 명예교수)를 지냈고 2004~2009년 미주 대화의 민주적 거버넌스 담당 부회장을 맡았다. 쿠바인이라는 출신 표기는 출처에 따른 것으로, 미국 시민권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네프는 왜 실패했는가? 나는 이 물음에 답하는 세 가지 방식을 구별하고자 한다: 합리적 포기, 비합리적·정치적 결정, 제약된 선택.
마크 해리슨은 케임브리지에서 경제학을, 옥스퍼드에서 현대사를 공부한 영국의 경제사가로, 1975년부터 워릭대학교 경제학과에서 가르치며 소련 경제사를 연구해 왔다. 1980년 논문 「네프는 왜 실패했는가」에서 네프 폐기를 합리적 포기, 비합리적·정치적 결정, 제약된 선택의 세 입장으로 정리해 이후 네프사 서술의 분석틀을 제공했다. 그의 연구는 전시 경제, 국가 비밀, 강제의 경제학으로 확장되었으며, 1996년 『전쟁의 회계』로 영국 슬라브·동유럽학회 앨릭 노브 상을, 2023년 『비밀의 리바이어던』으로 소비에트 체제의 정보 통제를 분석했다.
미국 출판인·역사가로, 1991년 예일대 출판부에서 냉전 후 공개된 소련 아카이브 자료를 서방에 선보인 『공산주의 연대기』 시리즈를 창설했다. 2003년 블라디미르 나우모프와 공저한 『스탈린의 마지막 범죄』는 이전까지 폐쇄됐던 KGB 및 대통령 문서고 자료를 바탕으로 의사들의 음모 사건을 전면 재구성했으며, 스탈린이 유대인 인구의 대규모 강제 이주와 새로운 대숙청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논제를 제시했다. 2009년부터 YIVO 유대인 연구소의 소장으로서 동유럽 유대인 문서유산 보존에 힘쓰고 있다.
1977년 그가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심사받았을 때, 심사 기관인 CPSU 중앙위 산하 사회과학아카데미는 "이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다"라는 요지의 평가서를 제출했다.
모스크바 태생 타타르계 제도경제학자로, MSU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가르치며 '아시아적 생산양식'에 관한 논쟁적 박사논문으로 주목받았다. 1993년 쿠즈미노프와 함께 고등경제대학(ВШЭ) 설립에 참여해 초대 경제학과장과 초대 부총장을 지냈고, 러시아 제도경제학파의 핵심 구축자로 자리잡았다. 2017년 출간된 집단 논문집 『놓친 기회인가, 마지막 안전판인가?』의 책임편집자로서, 코시긴 개혁을 둘러싼 역사학계의 양극화된 평가를 표제 하나로 응축했다.
J. 아치 게티는 소련 정치사와 스탈린 시대를 연구한 미국의 역사가로, UCLA에서 러시아·소련사 연구와 교육을 이끌었다. 1985년 저서 『대숙청의 기원』에서 스탈린 체제를 단일한 중앙 통제의 산물로 보지 않고, 취약한 당 조직과 지역의 자율성, 지도부 내부의 갈등이 정책 형성에 작용했다고 분석했다. 이 접근은 흐루쇼프의 비밀연설과 스탈린주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에서 서방 수정주의의 중요한 한 축이 되었지만, 테러에 대한 스탈린과 당 지도부의 책임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소련 기록보관소 개방 뒤에는 동료들과 함께 억압의 규모와 국가 폭력을 새 자료로 재검토했다.
그는 쿠바 미사일 위기를 정상회담의 신화가 아니라 우발적 사건들이 겹친 시간대별 위기로 다시 펼쳐 보였다.
마이클 돕스는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저널리스트이자 논픽션 작가로, 냉전 종식과 국제분쟁을 현장에서 취재했다. 그는 워싱턴 포스트의 동유럽·파리·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일하며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그 국제적 결과를 기록했다. 『자정 1분 전』은 미국·소련·쿠바 자료를 대조해 쿠바 미사일 위기를 시간대별로 재구성하고, 핵전쟁의 위험이 기존 통념보다 훨씬 컸음을 보여 주었다. 그의 작업은 정상 지도자들의 대결이라는 서사를 넘어 현장 지휘관과 우발적 사건이 위기를 어떻게 증폭했는지 드러낸다.
「고르바초프의 경제학자들」을 분석한 글들에는 '사기꾼'이나 '무식한 자'라는 말이 결코 등장하지 않는다
소련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한 경제학자로, 노보시비르스크 대학과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수학했다. 1988년 논문 「1965년 소련 경제개혁의 교훈」에서 코시긴 개혁에 대한 중앙 부처와 고스플란의 저항이 단순한 관료적 이기심이 아니라, 부분적 시장 개혁이 중앙계획 체계를 파괴하면서도 작동 가능한 대안은 내놓지 못한다는 합리적 인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마이클 엘먼과 함께 『소련 경제체제의 파괴』를 편집했으며, 이 체제 비양립성 테제는 소련 개혁 실패를 둘러싼 역사학적 논쟁의 중심 논거 중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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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노보시비르스크 대학 경제학 디플로마
1985펜실베이니아 대학 경제학 박사
1984–2002계획경제연구소(Command Economies Research, Inc.) 설립·대표, 미 국방부·CIA 계약 연구 수행
1995년 개인 재산 백여만 위안을 들여 러시아 해제 문서를 사들여, 중국 냉전사 연구의 토대가 된 아카이브를 학자들에게 무상으로 열었다.
선즈화는 중국 냉전사와 소련사, 중소관계사를 연구해 온 역사학자이며 화둥사범대학 냉전국제사연구센터를 이끌었다. 그는 러시아에서 해제 문서를 직접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소련 문서집을 편찬해 중국 냉전사 연구의 자료 기반을 넓혔다. 그의 연구는 중소분열을 국가이익과 국제공산주의운동의 관계가 교차한 과정으로 분석하며, 중국의 선택을 이념적 연대만으로 설명하는 공식 서술에 질문을 던졌다. 한국전쟁과 중소동맹에 관한 저술은 중국과 소련, 조선 사이의 상호 계산을 추적해 중국 학계의 냉전 해석을 국제적으로 알렸다.
그 나라의 점령, 1968년 8월의 믿기 어려운 그 연대의 경험, 그것은 누구나 겪을 수 없는 아주 드문 역사적 순간들에 속하고, 그것을 경험한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얀 파우에르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목격하고 이듬해 서독으로 이주한 체코 출신 역사가다. 1995년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다룬 표준적 저작 『프라하 1968』을 출간했으며, 브레멘대학 동유럽연구소에서 체코슬로바키아 현대사를 연구했다. 2011년 ENRS 기고문에서 그는 침공이 '시민사회 반대운동의 시작이자 개혁공산주의의 역사적 종말'이었다고 평가하며, 프라하의 봄이 소련의 탱크와 탈냉전기 체코의 기억 정치에 의해 두 번 묻혔다고 주장했다.
1990년 6월 부쿠레슈티에서 광부들이 반정부 시위대를 폭력 진압하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고, 이를 '가장 조잡하고 역겨운 형태의 야만성'에 대한 통찰을 준 경험이라고 기록했다.
루마니아 공산당 엘리트 가정에서 태어나 1981년 망명한 정치학자로, 스탈린주의와 동유럽 공산 체제의 몰락을 비교정치학적 시각에서 분석해 왔다. 2003년 『모든 계절을 위한 스탈린주의』로 루마니아 공산주의사의 결정적 종합을 제시했고, 2006년 루마니아 대통령 직속 공산독재연구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공산주의 과거사 청산 보고서를 이끌었다. 1989년 혁명의 원인·의미·결과를 다룬 2009년 논문은 혁명 이후 민족 갈등과 권위주의적 반동에도 불구하고 그 '관대한 메시지'는 훼손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1989년 연구의 기준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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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1981부쿠레슈티 표준건축설계연구소 사회학자
1983–1990필라델피아 외교정책연구소(FPRI) 연구원
1985–1990펜실베이니아대학교 강사
1990–메릴랜드대학교 정치학 교수
1998–2004『East European Politics and Societies』 편집장
2006루마니아 공산독재연구 대통령위원회 위원장
2009「1989년 혁명: 원인, 의미, 결과」 『Contemporary European History』 발표
2014년 10월 30일 리스본에서 죽었다. 남편이자 공동 저자인 알바루 마테우스는 그보다 한 해 앞선 2013년 8월에 죽었다.
포르투갈의 역사가. 비아나두카스텔루 태생으로 1952년에 나 2014년 10월 30일 리스본에서 죽었다. 포르투갈 식민지와 식민지 전쟁, 정치경찰을 연구했고 박사 논문을 『식민지 전쟁 속의 PIDE/DGS 1961-1974』(2004)로 펴냈다. 남편이자 공동 저자인 알바루 마테우스와 함께 앙골라·모잠비크 관련 저작을 냈으며, 1977년 5월 27일을 다룬 『앙골라의 숙청』(2007)에서 아고스티뉴 네투에게 니투 알베스 지지자 학살의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옛 정치범들을 면담한 녹음과 기록은 토레 두 톰부에 소장돼 있다.
사고 40년 뒤 회고에서 그는 '어떤 의미에서 체르노빌이 글라스노스트를 만들었다'고 썼다.
데이비드 마플스는 캐나다의 역사학자로 앨버타대학교에서 벨라루스·러시아·우크라이나의 현대사와 정치를 연구했다. 그는 체르노빌의 사회·정치적 영향을 일찍부터 분석했으며, 사고 직후 출간된 『Chernobyl and Nuclear Power in the USSR』와 후속 연구로 핵에너지 정책, 안전, 주민과 국가의 대응을 함께 조명했다. 이후 연구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의 민족사, 기근, 소비에트 붕괴로 확장되었고, 체르노빌이 소련 해체에 미친 영향은 중요하지만 단일 원인으로 환원할 수 없다는 신중한 평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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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런던대학교 학사
1980앨버타대학교 역사학 석사
1985셰필드대학교 경제·사회사 박사
1987『Chernobyl and Nuclear Power in the USSR』 출간
1988『The Social Impact of the Chernobyl Disaster』 출간
마셜 플랜을 원조 사업이 아니라 전후 유럽의 경제 질서를 바꾼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읽었다.
배리 아이켄그린은 국제통화·금융 체제의 역사를 현재의 정책 문제와 연결해 분석해 온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경제사가다. 그는 금본위제가 대공황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킨 구조를 밝히며, 통화 제도와 국가 정책의 상호작용을 연구했다. 마셜 플랜 연구에서는 원조액 자체보다 원조에 붙은 조건이 서유럽의 전후 혼합경제를 시장과 무역 중심으로 재편한 효과에 주목했다. 이 연구는 경제 재건에서 자금과 제도적 조건의 관계를 묻는 논쟁의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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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크루즈 학사
1986예일 대학교 경제학 박사
1987–현재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경제학·정치학 교수
1991J. 브래드퍼드 디롱과 「마셜 플랜: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구조조정 프로그램」 공동 집필
《전시의 알바니아》는 점령기를 분열과 내부 대립, 그리고 공산주의자들의 집권으로 이어진 권력 투쟁으로 다시 그렸고, 전쟁이 알바니아를 한 고립에서 다른 고립으로 밀어넣었다고 결론지었다.
발칸사·알바니아사 연구자로 1952년 1월 27일 출생했다. 1982년 캘리포니아대학교 샌타바버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인디애나-퍼듀대학교 포트웨인 캠퍼스 역사학 교수와 역사학과장을 지냈으며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다. 알바니아 과학원 외국인 회원이다. 국적과 출신 배경은 확인되지 않았다. 《조그 왕과 알바니아의 안정 투쟁》(1984), 《전시의 알바니아 1939–1945》(1999), 《발칸의 강자들》(2006)을 썼고 슈반트너-지버스와 《알바니아 정체성》(2002), 올리버 옌스 슈미트와 《알바니아 약사》(2022)를 함께 냈다.
그는 1989년 이렇게 썼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지 냉전의 종식이 아니라 역사의 종말일 수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국제정치 연구자로, 국가·제도·정치 질서의 형성을 비교해 왔다. 1989년 논문 「역사의 종말?」은 냉전 종식과 자유민주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인류의 이념적 진화가 도달한 지점으로 해석하며 1989년의 의미를 둘러싼 가장 유명한 논쟁의 한 축을 만들었다. 1992년 저서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에서 이 주장을 확장했지만, 이후에는 국가 역량과 법치, 책임성을 강조하며 초기 명제의 단순한 낙관론을 수정했다.
그의 『붉은 태양은 어떻게 떠올랐나』(2000)는 당 문서와 회고록으로 옌안 정풍운동을 재구성해, 마오가 개인적 권위를 공고히 하고 이후 당의 방식을 확립한 과정으로 다루었다.
난징 출신으로 문화대혁명기 아버지가 「우파」로 박해받는 것을 보며 자랐고, 난징대학에서 중국 현대사를 가르쳤다. 2000년 홍콩에서 낸 『붉은 태양은 어떻게 떠올랐나 — 옌안 정풍운동의 전말』은 공개된 문헌만으로 1942~1945년 정풍운동을 재구성해, 마오가 사상 개조와 심사·「구조 운동」을 통해 당의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하고 이후 정치운동의 틀을 만든 과정을 보여주었다. 대륙에서 출판이 금지되었으나 널리 읽혔으며, 그는 2011년 간암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