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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틴 표도로비치 루네프

Константин Фёдорович Лунё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7–1980 ○ 자연사

당 경력으로 보안기관에 들어선 관료

1953년 베리야 사건 특별재판소에서 내무부 제1차관 자격으로 전임 장관을 심리했다.

콘스탄틴 루네프는 섬유 노동자 출신의 당 관료로, 전후 모스크바 당 조직에서 경력을 쌓은 뒤 국가보안기구의 고위직으로 이동했다. 1953년 베리야 체포 뒤 내무부 제1차관이 된 그는 전임 수장을 심리한 특별재판소에 내무부 대표로 참여했다. 이 역할은 내무부가 당의 정치적 결정에 복속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동시에, 당 인사가 강압적 국가기구의 운영을 맡은 체제의 성격을 드러낸다. 이후 KGB 제1부의장과 카자흐 공화국 KGB 의장 대행을 지냈으나, 1960년 병으로 퇴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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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37섬유산업 노동자·노조 및 관리직
  • 1941–1946모스크바주 당위원회 지도원·도시당 제1서기
  • 1946–1953모스크바시 당위원회 간부·행정 부문 책임자
  • 1953.06–07소련 내무부 제9국장
  • 1953–1954소련 내무부 제1차관, 베리야 사건 특별재판소 위원
  • 1954–1959KGB 제1부의장
  • 1958–1959KGB 의장 직무대행·카자흐 공화국 KGB 의장
  • 1961–1969에너지기술 연구기관 부소장, 정년퇴직

알렉산드르 하리토노비치 부시긴

Александр Харитонович Бусыг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7–1985 ○ 자연사

생산성 혁신으로 이름난 자동차 공장 대장장이

포드의 초청에 그는 “우리에게 조국은 금보다 소중하다”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알렉산드르 부시긴은 고리키 자동차 공장의 대장장이로서 생산성 향상 방법을 현장에 도입하고 노동자 집단의 조직을 이끈 소련의 대표적 생산 노동자였다. 1935년 그의 작업반은 교대 한 번에 규정량 675개를 크게 웃도는 크랭크축 966개와 1001개를 단조해, 스타하노프 운동이 기계공업으로 확산되는 상징이 되었다. 그는 전쟁과 전후에도 공장 관리와 노동자 교육에 참여했으며, 노동 영웅의 성취가 개인의 숙련뿐 아니라 작업장 조직과 국가적 동원에 의존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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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고리키 자동차 공장 건설 노동자
  • 1932고리키 자동차 공장 대장장이
  • 1935스타하노프 운동 전연방 회의 참가
  • 1937–1950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 1938공산당 입당
  • 1940년대–1970년대고리키 자동차 공장 주요 작업장 책임자
  • 1975사회주의 노동 영웅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랑팡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Лангфанг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프랑스 1907–1990 ○ 자연사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심문관

스탈린 사후에도 그는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1958년 소련 최고재판소는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의 죄로 그에게 15년형을 선고했고, 그는 형기를 하루도 감형받지 못한 채 다 채우고 나왔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러시아화된 프랑스계 집안에서 태어나 1931년 OGPU에 들어갔다. 대숙청 시기 NKVD 심문관으로 외무인민위원 대리 크레스틴스키, 코민테른의 퍄트니츠키와 크노린,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안벨트 등의 사건을 맡아 구타로 자백을 받아 냈다. 전시에는 작전부서를 지휘하며 투바·몽골·신장에 파견됐고 1945년 중장까지 올랐다. 1955년 해임되고 계급을 박탈당한 뒤 1957년 체포되어, 1958년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의 죄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형기를 다 채우고 1972년 출소해 1990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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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7OGPU·NKVD 방첩 요원
  • 1937–1940NKVD 심문관, 방첩부 부장 보좌
  • 1940–1941수사부장, 그리스 파견
  • 1942–1946전시 작전부서 지휘, 투바·몽골·신장 파견
  • 1946–1955MGB·KGB 간부, 중국 고문
  • 1955–1957해임과 계급 박탈
  • 1957–1972체포, 15년형 복역

파벨 아나톨리예비치 수도플라토프

Павел Анатольевич Судоплат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07–1996 ○ 자연사

트로츠키를 제거한 스탈린의 첩보 거장, 결국 스탈린의 감옥에서 15년

베리야는 우리가 추천한 사람들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던진 질문은 단 하나였다: '그들이 정말로 필요한가?' — 『특수임무』

멜리토폴의 제분업자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에 붉은군대에 뛰어든 소년병은 남북전쟁의 무법지를 헤치고 GPU의 암약요원으로 성장했다. 1938년 로테르담에서 스탈린의 친필 명령으로 OUN 지도자 코노발레츠를 암살했고, 1940년에는 나움 에이팅곤과 함께 '오리 작전'을 지휘해 트로츠키를 제거했다. 독소전쟁기에는 제4국장으로서 적 후방의 파르티잔·사보타주 활동과 원자력 첩보(그룹 'S')를 총괄했다. 1953년 베리야의 '공범'으로 체포되어 15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석방 후 필명으로 역사소설을 쓰며 살다가 소련 붕괴 뒤인 1992년 완전히 복권되었다. 그의 회고록 『특수임무』는 소련 정보기관의 가장 내밀한 작전들을 처음으로 공개한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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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붉은군대 소년병; 포로·탈출 후 오데사에서 부랑자 생활
  • 1921–1932우크라이나 GPU·OGPU 정보장교로 두각을 드러냄
  • 1933–1938OGPU·NKVD 외국부(INO) — 베를린 OUN 내부 침투, 해외 암약
  • 1938코노발레츠 암살(로테르담); NKVD 외국정보국장 대행(11월–12월)
  • 1939–1941외국정보부국장; '오리 작전' — 트로츠키 암살 지휘
  • 1941–1946NKVD 제4국장 — 적 후방 파르티잔·사보타주 전쟁; 원자력 첩보 그룹 'S' 지휘
  • 1946–1953전후 대NATO 사보타주 작전; MVD 제1총국 부국장 (1953)
  • 1953–1968베리야 '공범'으로 체포, 15년형 — 블라디미르 교도소에서 복역
  • 1968–1996석방 후 필명으로 소설 집필; 1992년 완전 복권, 회고록 『특수임무』 출간

콘스탄틴 안토노비치 페트르자크

Константин Антонович Петржа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907–1998 ○ 자연사

우라늄 자발핵분열을 발견하고 소련 원자폭탄의 토대를 놓은 물리학자

중성자원을 제거한 뒤에도 이온화실은 계속 신호를 냈다. 우주선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모스크바 지하철 디나모 역 50m 지하로 실험을 옮긴 끝에, 페트르자크와 플료로프는 우라늄이 스스로 갈라진다는 것을 증명했다.

소련의 핵물리학자. 1940년 게오르기 플료로프와 함께 우라늄-235의 자발핵분열을 발견하여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과학적 토대를 놓았다. 전쟁 중 군복무를 거쳐 1942년 카잔으로 복귀, 쿠르차토프의 지휘 아래 중성자원 측정법(동반입자법)을 개발하고 플루토늄 신속검출 기술을 확립했다. 1947년 흘로핀 라듐연구소에 중성자물리·핵분열 연구실을 설립해 40년 가까이 이끌었으며, 1949년 렌소베트 기술원에 핵물리학과를 창설해 소련 핵산업 인력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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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8마로비셰르스키 유리공장 도자기·유리 화공
  • 1931–1936레닌그라드대학교 물리학부, 쿠르차토프 지도하 졸업
  • 1936–1941흘로핀 라듐연구소(RIAN) 대학원생, 쿠르차토프·흘로핀 지도
  • 1940플료로프와 우라늄 자발핵분열 공동 발견 (국가발견등록 제33호)
  • 1941–1942붉은 군대 복무, 중위; 카잔으로 소환되어 원자폭탄 계획 투입
  • 1947–1986RIAN 중성자물리·핵분열 연구실 창설 및 실장
  • 1949–1984렌소베트 기술원 핵물리학과 창설 및 학과장
  • 1948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빅토르 세묘노비치 아바쿠모프

Виктор Семёнович Абакум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54 ✕ 처형

스메르시를 지휘하고 MGB를 통치한 스탈린의 보안 수장

1949년, 저명한 과학자 리나 시테른을 심문하며 "이 늙은 창녀야!"라고 고함치자, 시테른은 "장관께서 학자에게 말하는 태도가 그렇습니까"라고 답했다.

스탈린 시대 말기 국가보안을 총괄한 실력자로, 14세에 적군 입대 후 OGPU·굴라그를 거쳐 대숙청에서 살아남았고, 전시 방첩 기구 스메르시 총국장으로 발탁되어 스탈린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 종전 후 MGB 장관으로서 레닌그라드 사건과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탄압을 설계·집행하며 베리야를 견제하는 스탈린의 핵심 카드로 군림했다. 그러나 1951년 부하의 밀고로 '의사들 음모' 은폐 혐의로 체포되어 자신이 구축한 체제에 삼켜졌고, 스탈린 사후 레닌그라드 사건 조작 혐의로 재판받아 1954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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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년대NKVD에서 성장, 대숙청기 보안 실무를 거쳐 승진
  • 1943–1946스메르시 방첩총국장, 전시 군 방첩을 지휘
  • 1946–1951MGB 국가보안장관, 전후 보안기관을 지휘
  • 1949–1951레닌그라드 사건 등 전후 숙청 국면에 관여
  • 1951–1954체포 뒤 스탈린 사후 재판을 거쳐 처형

게오르기 표도로비치 알렉산드로프

Георгий Фёдор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61 ↓ 좌천 1955

스탈린의 수석 이념 감독관, 철학 논쟁에 무너지다

1947년 6월 철학 논쟁장. 즈다노프가 500명 앞에서 묻는다: "이 책에서 부르주아 철학자들이 서로를 깨물어먹는 장면은 묘사했으면서,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어떻게 그 모두를 쓸어버렸는지는 어디 있습니까?" 알렉산드로프는 침묵한다.

스탈린 시대 수석 철학 관료. 고아에서 선전선동국장까지 올라 『서유럽철학사』로 스탈린상을 받았으나, 1947년 철학 논쟁으로 실각했다. 문화장관도 성추문으로 1년 만에 민스크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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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20년대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전기기사 아들. 내전기 고아가 되어 보리소글렙스크 고아원에서 성장
  • 1930–1935모스크바 철학문학사연구소(МИФЛИ) 졸업 및 아스피란투라 수료
  • 1935–1939МИФЛИ 교수, 철학사 전공.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박사학위
  • 1939중앙위 선전선동국 부국장 겸 고등당학교(ВПШ) 교장
  • 1940–1947중앙위 선전선동국장: 전쟁기 선전·대외이념공세·전후 문화통제 주도
  • 1943『철학사』 3권으로 스탈린상 수상
  • 1946『서유럽철학사』로 스탈린상 수상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스탈린 전기(2판) 공동 집필
  • 19476월 철학 논쟁: 스탈린·즈다노프의 비판. 9월 선전선동국장 해임, 철학연구소장으로 전출
  • 1954–1955소련 문화장관 임명. 1년 만에 「검투사 사건」 성추문으로 파면
  • 1955–1961민스크의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철학법률연구소 분과장으로 좌천, 말년을 보냄

예브게니 드미트리예비치 키셀료프

Евгений Дмитриевич Киселё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1908–1963 ○ 유엔 재직 중 사망

라코시를 불신한 부다페스트 주재 소련 대사

1962년 3월 유엔 사무국의 정치·안전보장이사회 담당 사무차장이 되었다. 이듬해 사망하자 안전보장이사회는 4월 18일 회의에서 그의 외교 경력과 유엔 근무를 추모했다.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과 외교관 양성 학교를 나와 1938년 외무인민위원부에 들어갔다. 쾨니히스베르크 총영사, 뉴욕 총영사, 오스트리아 주재 정치대표를 거쳐 1949~54년 헝가리 대사를 지냈다. 라코시가 스탈린과의 비밀 대화를 알려 주지 않아 곤란을 겪었고, 헝가리의 생활수준·탄압·지식인 동향을 비판하는 보고서를 모스크바에 보냈다. 스탈린 사후 몰로토프는 1953년 6월 회담을 준비하며 그의 보고를 검토했다. 이후 이집트 대사, 유엔 사무차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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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헝가리 주재 소련 대사로 재직했다.
  • 1955–1959이집트와 그 후신 아랍연합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로 재직했다.
  • 1959–1962소련 외무부 근동국장을 맡았다.
  • 1962–1963유엔 사무국의 정치·안전보장이사회 담당 사무차장으로 재직했다.

레프 다비도비치 란다우

Лев Давидович Ландау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제르바이잔 1908–1968 ○ 자연사

'란다우 학교'를 세우고 양자유체 역학을 개척한 소련 이론물리학의 거장

그는 물리학자를 성취도에 따라 로그 등급으로 분류하곤 했다. 1급은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랙. 아인슈타인은 0.5급이었다. 자신은 한때 2.5급에 두었다가, 나중에 1.5급으로 올렸다.

소련 이론물리학자. 엄격한 이론최소과목으로 제자를 선발하는 '란다우 학교'를 세웠고, 초유동체·페르미 액체 이론으로 응집물질물리학을 개척했다. 리프시츠와의 《이론물리학 강좌》는 세계적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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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우크라이나 물리기술연구소(UFTI) 이론부장 · 하르코프 대학 교수
  • 1937–1968모스크바 물리문제연구소(IFPAN) 이론부장
  • 1943–1947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저온물리학 교수
  • 1945–1953소련 원자력 프로젝트 참여 · 스탈린상 3회 수상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академик) 선출
  • 1962노벨 물리학상 수상 '응집물질 이론, 특히 액체 헬륨의 선구적 연구'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이사예프

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 Иса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08–1971 ○ 자연사

소련 우주선의 심장을 만든 엔진 설계자: 폐쇄식 사이클의 발명가

가가린 귀환 후 흐루쇼프 앞에서 코롤료프가 이사예프를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일을 죄다 제동 거는 사람입니다." 흐루쇼프는 농담을 알아듣고 웃으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 우주선을 지구로 되돌리는 제동엔진을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광산기술자로 출발해 로켓 비행기 BI-1의 엔진 개발을 계기로 액체추진 로켓에 뛰어든 설계자. 1949년 폐쇄식 사이클(단계식 연소)을 세계 최초로 제안하고, 얇은 구리 연소실과 평판 분사기를 도입해 독일 V-2 계열의 복잡한 배관 설계에서 소련 로켓공학을 독립시켰다. 그의 제동엔진 TDU는 가가린을 포함한 모든 보스토크·보스호트 우주비행사를 지구로 귀환시켰고, KTDU 기동엔진 계열은 소유스·살류트·미르와 루나·베네라·마르스 탐사선 전체를 움직였다. R-11(스커드) 미사일 엔진과 SLBM 추진체계 설계에서도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그가 세운 KB KhimMash는 오늘날까지 러시아 우주선 엔진의 핵심 설계국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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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모스크바 광산대학 졸업, 금속공장 기술자
  • 1934–1944볼호비티노프 설계국: 항공기 착륙장치, BI-1 로켓전투기 엔진
  • 1944–1947OKB-2 수석설계자, 독일 로켓기술 조사단 참가(1945)
  • 1948–1952니리-88 제9부: 진동방지 격벽, 평판 분사기, 폐쇄식 사이클(1949) 발명
  • 1951–1955R-11(스커드) 엔진 S2.253; 코롤료프와 협업 시작
  • 1958–1961OKB-2 확대; 보스토크 TDU 제동엔진(104회 비행 성공)
  • 1962–1971KTDU 계열: 소유스·살류트·미르·행성탐사선 엔진; N1-L3 달착륙선용 LOX/LH2 엔진
  • 1967–1971KB KhimMash(舊 OKB-2) 수석설계자로 사망 시까지 재임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체르노우소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Черноус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08–1978 ○ 자연사

레닌그라드 사건 후폭풍 속에 등장했다 사라진 러시아 공화국 수반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 직후 체르노우소프는 중앙위 조직국원과 러시아 공화국 총리직에서 동시에 해임되었다. 그의 다음 직장은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이었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볼가 강변의 시즈란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출발해 모스크바 동력공학원을 졸업한 기술관료형 당료였다. 1939년부터 1948년까지 모스크바 주당위 제2서기로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를 보좌했고, 1949년 미하일 로디오노프가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숙청된 직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어 스탈린 말년의 러시아 정부를 이끌었다. 1952년 19차 당대회 직후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어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장으로 좌천되었고, 스탈린 사후에야 자동차공업부 차관으로 복귀해 고스플란과 코메콘에서 조용히 경력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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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2러시아 공화국(RSFSR) 각료회의 의장
  • 1949–1952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조직국 위원
  • 1948–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당·노조·콤소몰 기관부장
  • 1939–1948모스크바 주당위 제2서기
  • 1939–1952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위원 후보
  • 1938–1939모스크바 시 스탈린 구당위 제1서기
  • 1955–1957소련 자동차공업부 차관
  • 1952–1955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장

조제프 야코블레비치 코틴

Жозеф Яковлевич Кот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908–1979 ○ 자연사

KV·IS 중전차를 만든 탱크그라드의 수석 설계자

동료 설계자가 남긴 말: '코틴은 누군가를 낚아채지 않으면 밤에 잠을 못 이룬다.' 그의 전차들에는 키로프, 보로실로프, 스탈린의 이름이 붙었다.

소련 중전차 설계의 거장으로, KV 계열과 IS(이오시프 스탈린) 중전차, SU-152·ISU-152 자주포를 세상에 내놓은 군수 기술자이자 행정가. 1937년 29세에 키로프 공장 수석 설계자가 되어 T-28 개량을 시작으로, 에스파냐 내전의 교훈을 반영해 대전차 방어를 뚫을 중장갑 전차 개발에 착수했다. 독소전쟁 발발 후 부전차공업인민위원으로서 레닌그라드에서 첼랴빈스크까지 공장 대피를 진두지휘해 '탱크그라드'를 건설했고, 전쟁 기간 1만 8천 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쏟아냈다. 전후에도 PT-76 수륙양용전차, T-10 중전차, K-700 트랙터를 개발하며 민수 분야까지 설계 영역을 넓혔고, 1968년 방위공업차관으로 군수 행정의 정점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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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육군기계화·차량화 아카데미 연구부문 엔지니어, 설계국장
  • 1937–1968키로프 공장 SKB-2 수석 설계자 (레닌그라드/첼랴빈스크)
  • 1941–1943소련 전차공업 부인민위원 겸 수석 설계자
  • 1943–1945제100실험전차공장장 겸 수석 설계자 (첼랴빈스크)
  • 1949–1968VNII-100 전차연구소 소장 겸 수석 설계자
  • 1968–1972소련 방위공업차관

이사크 콘스탄티노비치 키코인

Исаак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ико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리투아니아 1908–1984 ○ 자연사

소련 원자폭탄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의 과학 책임자

“과학자라는 것은 직함도 직장도 아닙니다. 연구실에 들어서면서 과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과학자라는 것은 끊임없는, 때로는 괴로운, 때로는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 1984년 사망 직전 콤소몰 상 시상식 연설.

소련의 실험물리학자. 1933년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에서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를 발견했고, 액체 금속의 홀 효과와 초전도체의 자이로자기 비율을 선구적으로 측정했다. 1943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제2연구소에 합류해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를 맡았으며,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에서 단 둘만 이름을 올렸다. 종전 후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1960–1984)을 지내며, 수학자 콜모고로프와 《크반트》를 창간했고 형 아브람과 집필한 물리 교과서는 소련 표준이 되었다. 연구실에 사해문서 영인본을 꽂아둘 만큼 유대 전통과 히브리어에 정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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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연구원
  • 1933M. M.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 발견
  • 1935우랄 물리기술연구소 전기현상부장, 스베르들롭스크 이주
  • 1936물리수학 박사 학위 취득
  • 1937–1944우랄 공업대학 일반물리학 주임교수
  • 1942대전류 측정 장치 발명으로 스탈린상 3급 수상
  • 1943제2연구소 합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 위원
  • 1950원자력연구소(IAE) 부장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0–1984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 1969물리·수학 대중과학잡지 《크반트》 공동 창간, 초대 편집장

이오시프 미하일로비치 투르코

Иосиф Михайлович Турко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인 1908–1994 ○ 자연사

쿠즈네초프가 야로슬라블에 심은 인물, 사형 대신 15년형을 산 레닌그라드 사건 피고인

“그는 내 얼굴과 머리를 때리고, 내가 쓰러지자 배를 발로 찼다… 나는 의사가 주사기를 든 것을 보았다. 겁이 나서 바로 두 통의 조서에 서명했다.”

벨라루스계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공장과 당 기구를 거쳐 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1946–1949)까지 오른 당 간부로, 전후 알렉세이 쿠즈네초프가 러시아 공화국 각지에 배치한 지역 간부 중 한 명이었다. 1950년 9월 29~30일 레닌그라드 사건 재판에서 중앙 피고인 6인과 함께 기소되어 사형 대신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MGB 수사관들에게 구타당해 허위 자백에 서명했고, 1954년 석방·복권된 후 조용히 살다 199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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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7유리 공장 노동자 → 레닌그라드 '프롤레타리' 공장 기술자·기획생산부장
  • 1937–1940레닌그라드 '프롤레타리' 공장장
  • 1940–1944레닌그라드 크라스노그바르데이스키 구당위 간부서기 → 제1서기
  • 1944–1945레닌그라드 주당위 서기
  • 1945–1946레닌그라드 주당위 제2서기
  • 1946–1949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 · 소련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 1949–1954레닌그라드 사건: 해임·체포·15년형 (MGB 구타로 허위 자백)
  • 1954–1956쿠스타나이 주 집행위원회 부의장
  • 1956–레닌그라드 주 계획위원회 부의장 → 연방급 개인연금 생활자

파벨 야코블레비치 메시크

Павел Яковлевич Меши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910–1953 ✕ 처형

베리야 측근이자 스탈린 대숙청의 집행자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실시된 소련 최초의 핵실험(22킬로톤)에 참가했다.

소련의 국가보안 간부이자 중장으로, 스탈린 대숙청을 실제로 조직한 집행자 가운데 한 사람이면서 베리야 측근이었다. 코노토프의 기계공장에서 자물쇠공으로 일하다 1931년 사마라 에너지 연구소에 들어갔고, 1932년 3월 당 중앙 결정으로 국가보안 기관에 배치되어 OGPU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1941년 2월 NKVD 분리 후 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이 되어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원과 그 가족에 대한 탄압을 조직했다. 1953년 3월 베리야에 의해 우크라이나 내무장관이 되어 강경 진압을 주장한 주 내무부장들을 해임했고, 6월 30일 키예프에서 체포되어 12월 23일 처형됐으며 2000년 재활이 거부되고 형량이 징역 25년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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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NKVD 수사부장, 경제총국 부국장
  • 1941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
  • 1941–1943NKVD 경제국장
  • 1943–1945스메르시 부국장
  • 1945–1953제1총국 부국장(원폭 계획 보안·방첩)
  • 1953우크라이나 내무장관
  • 1953체포, 재판과 처형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체스노코프

Дмитрий Иванович Чесноков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러시아 1910–1973 ○ 실각 1953

스탈린이 마지막으로 정치국에 올린 철학자

1964년 자신의 저서 《역사적 유물론》에서 스탈린의 테제를 정면으로 논박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기간을 사회주의 전 기간으로 확장하는 독단주의자와 분파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계급투쟁 격화에 관한 스탈린의 잘못된 명제를 공유하고 있다.'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당 이데올로그. 역사적 유물론과 게르첸의 세계관을 전공했으며, 1948년 출간된 《게르첸의 세계관》으로 1951년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1949년부터 《보프로시 필로소피》 편집장, 1952년에는 중앙위 철학·역사부장과 이론지 《꼼무니스트》 편집장을 겸하며 스탈린 말기 이념 기구의 핵심 축으로 부상했다.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 상임위원회(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스탈린 사망 다음 날인 1953년 3월 6일 전격 해임되었다. 이후 고리키 주당 간부와 국가방송위원장을 거쳐 모스크바 대학에서 역사적 유물론 강좌를 이끌었고, 1964년 자신의 저작에서 스탈린의 계급투쟁 격화 테제를 공개적으로 논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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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43스베르들롭스크 대학 교수·학과장
  • 1943–1947스베르들롭스크 시당위 선전 담당 부장·비서
  • 1947–1948중앙위 선전선동국 과학부 부장
  • 1948–1951소련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부소장
  • 1949–1952《보프로시 필로소피》 편집장
  • 1952–1953중앙위 상임위원·철학역사부장·《꼼무니스트》 편집장
  • 1953–1957고리키 주당위 부장·비서
  • 1957–1959국가방송·텔레비전 위원회 의장
  • 1959–1967모스크바 대학 역사적 유물론 강좌 주임
  • 1967–1970중앙위 사회과학아카데미 부총장

올가 표도로브나 베르골츠

Ольга Фёдоровна Берггольц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0–1975 ○ 병사

봉쇄된 도시의 라디오 목소리

1942년 2월, 남편 몰차노프가 아사한 직후 베르골츠는 라디오에서 이렇게 낭독했다: "나는 레닌그라드의 과부다."

레닌그라드 포위전(1941–1944) 동안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매일 시와 연설을 낭독하며 아사 직전의 시민들에게 생명의 언어를 전한 소비에트 시인이다. 1938년 '문학그룹'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과 유산을 겪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1939년 석방·복권된 후 당에 복귀했다. 대표작 『2월 일기』(1942)와 『레닌그라드 시』(1942)는 봉쇄의 참상과 시민의 존엄을 직시했으며, 피스카료프스코예 묘지에 새겨진 그녀의 글귀 '아무도 잊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잊히지 않았다'는 전쟁 기억의 상징이 되었다. 스탈린상(1951)을 수상했고 자전적 소설 『낮의 별들』(1959)로 해빙기 문학의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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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첫 시 「레닌」 발표
  • 1930레닌그라드대학 졸업, 첫 책 『겨울-여름-앵무새』 출간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가입
  • 1938–1939체포·7개월 구금 후 석방 및 복권
  •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기간 라디오 방송
  • 1942『2월 일기』, 『레닌그라드 시』 발표
  • 1951『페르보로시스크』로 스탈린상 수상
  • 1959자전적 소설 『낮의 별들』 발표

표트르 표도로비치 크리보노스

Пётр Фёдорович Кривонос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인 1910–1980 ○ 자연사

철도에서 생산성 혁신을 조직한 기관사

1935년 7월 1일, 크리보노스의 기관차 편대가 화물열차 속도를 종전의 시속 30킬로미터에서 53킬로미터로 끌어올렸다.

표트르 크리보노스는 기관사로서 철도의 운송 능력을 끌어올린 소련의 생산성 혁신가였다. 그는 1935년 7월 화물열차의 기술 속도를 크게 높이는 운전법을 선보여 스타하노프보다 앞서 철도 부문 노동 영웅의 전형을 만들었고, 이를 따르는 ‘크리보노스파’가 확산됐다. 전쟁 때는 철도 수송과 파괴된 철도망 복구를 지휘했으며, 전후에는 교육을 보완해 장기간 철도를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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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슬라뱐스크 기관차고 정비공·기계공 학교 학생
  • 1929–1933남부도네츠 철도 보조기관사·기관사
  • 1935화물열차 운전 혁신, 철도 부문 생산성 운동의 선구자
  • 1937–1938슬라뱐스크 기관차고장
  • 1938–1941남부도네츠 철도 및 북도네츠 철도장
  • 1941–1943전시 철도 수송·건설 전권대표, 톰스크 철도장
  • 1943–1953북도네츠 철도장, 전후 철도 복구 책임자
  • 1953–1980우크라이나 남서 철도장

바실리 스테파노비치 푸르소프

Василий Степанович Фурс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인 1910–1998 ○ 자연사

원자로 이론과 교육을 잇댄 핵 프로젝트 물리학자

“빠르게, 빈틈없이, 서두르지 않으면서 서둘렀다.”

바실리 스테파노비치 푸르소프는 이론물리학과 원자로 연구를 오가며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의 계산과 조직을 맡은 물리학자였다. 그는 두보프스키, 포브즈네르와 함께 F-1에서 플루토늄이 축적되는 양을 계산했고, 흑연과 우라늄의 선별 이론을 발전시켰다. 이후 A-1의 발진과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을 과학적으로 이끌었으며, 전후에는 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물리학부를 장기간 운영해 원자력 국가의 연구 인력을 길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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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9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조교·부교수
  • 1938–1941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이론물리학과장 대행
  • 1941–1944붉은군대 정치장교·포병 배터리 commissar
  • 1944–1947제2연구소 이론 부문 선임연구원·부문장
  • 1947–1951콤비나트 817 A-1 원자로 과학 책임자
  • 1951–1954쿠르차토프의 우라늄·흑연 원자로 부책임자
  • 1954–1989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물리학부 학장

파벨 바실리예비치 리차고프

Павел Васильевич Рычаг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1–1941 ✕ 처형

스탈린 앞에서 소련 공군을 '관짝'이라 말한 에이스

1941년 4월 9일 정치국 회의. 스탈린이 물었다: "왜 이렇게 사고가 많은가?" 리차고프가 자리에서 일어나 답했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관짝을 타고 날라고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내전에서 6기 개인 격추·14기 집단 격추를 기록하고 1936년 25세의 나이에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은 전투기 조종사. 중국 항일전과 할힌골에서 공군 고문으로, 겨울전쟁에서는 제9군 공군 사령관으로 활약했으며, 1940년 8월 29세에 소련 공군 총국장(ВВС РККА)에 올랐다. 1941년 4월 9일 정치국 회의에서 스탈린이 높은 사고율을 추궁하자 "당신들이 우리에게 관짝을 타고 날라고 강요하고 있습니다"라고 직언했다가 해임되었고, 독소전 발발 사흘 뒤인 6월 24일 체포되었다. 같은 해 10월 28일 바르비시에서 재판 없이 총살되었으며, 1954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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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36전투기 조종사로 복무, 키예프 군관구 항공대에서 편대장·비행대장 역임
  • 1936–1937스페인 내전에서 I-15 전투비행단 지휘, 6기 개인·14기 집단 격추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수훈
  • 1937–1938중국 주재 소련 공군 수석 군사고문('바탈린 장군'), 중일전쟁에서 공군 작전 지도
  • 1939–1940겨울전쟁에서 제9군 공군 사령관, 이후 공군 총국 부국장·제1부국장 역임
  • 1940.08–1941.04소련 공군 총국장(Начальник ГУ ВВС РККА) 겸 국방부 항공 담당 부인민위원
  • 1941.06독소전 발발 사흘 뒤 체포, 10월 28일 재판 없이 총살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쿠즈네초프

Николай Иванович Кузнец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1–1944 ✕ 전사

나치 점령지 한복판에서 독일 장교로 위장해 고위 관리들을 제거한 소련의 전설적 첩보원

1944년 3월, 보라틴 마을에서 UPA 대원들에게 포위되자 쿠즈네초프는 수류탄으로 자신과 적들을 함께 폭사했다.

소련의 전설적 첩보원이자 파르티잔. 독일어 6개 방언을 구사하는 언어 천재로, 독일군 중위 파울 지베르트로 위장하여 나치 점령 우크라이나의 수도 로브노에서 활동하며 6명 이상의 고위 독일 관리들을 직접 제거했다. 쿠르스크 전투를 앞두고 독일군의 대규모 전차 공격 계획을 최초로 입수했으며, 테헤란 회담에서 연합국 수뇌부를 겨냥한 '멀리뛰기 작전'을 사전에 탐지했다. 1944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의 교전에서 사망했고, 사후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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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튜멘 농업대학 입학, 부친 사망으로 중퇴
  • 1927–1929탈리차 임업기술학교 재학, 독일어·에스페란토·폴란드어 독학
  • 1930–1932코미-페르먀크 자치구에서 삼림 측량사, OGPU 협력 개시
  • 1932–1938스베르들롭스크 산업대학 재학, 우랄마시에서 외국인 기술자 감시
  • 1938NKVD 중앙기관 특수요원, 모스크바 독일 외교관 감시
  • 1942파르티잔 부대 «포베디텔리» 배속, 파울 지베르트로 로브노 잠입
  • 1943쿠르스크 전차 공세 계획 및 장거리 도약 작전 정보 입수
  • 1943–1944로브노·리보프에서 독일 고위 관리 6명 이상 제거
  • 1944.03.09보라틴에서 UPA와 교전 중 전사
  • 1944.11.05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사후 수여

키릴 이바노비치 셸킨

Кирилл Иванович Щёлки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계 1911–1968 ○ 자연사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에 기폭장치를 손수 꽂은 핵물리학자, 제2핵무기연구소의 초대 과학책임자

1949년 8월 29일, 셸킨은 조립동에서 RDS-1을 수령하는 서류에 서명하고,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한 뒤 탑의 출입문을 봉인했다. 그가 '기폭' 버튼을 누른 마지막 사람이었다.

키릴 셸킨은 연소·폭발 물리학자로서 스핀 폭굉 이론을 정립했고,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서 결정적 실무를 맡은 인물이다.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그가 직접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하고 탑의 출입문을 봉인한 뒤 기폭 버튼을 눌렀다. 이후 1955년 우랄 지역에 두 번째 핵무기 설계국인 첼랴빈스크-70(현 브니이테에프)의 초대 과학책임자 겸 수석설계자로 부임하여 소련 최초로 실전배치된 열핵무기를 개발했다. 쿠르차토프, 하리톤과 함께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1959년 연속된 심장발작으로 1960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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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41소련 과학아카데미 화학물리연구소 연구원(레닌그라드)
  • 1941–1942붉은 군대 자원입대, 모스크바 방어전 참전 (제7근위소총사단)
  • 1944–1947화학물리연구소 실험실장 (모스크바)
  • 1947–1952KB-11(아르자마스-16) 부수석설계자 겸 연구부문장
  • 1952–1955KB-11 수석설계자 제1대리 겸 과학지도자 제1대리
  • 1955–1960NII-1011(첼랴빈스크-70) 초대 과학지도자 겸 수석설계자
  • 1960–1968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IPT) 연소학과장·교수

마리나 미하일로브나 라스코바

Марина Михайловна Раскова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912–1943 ✕ 추락사

여성 전투비행연대를 창설한 소련의 기록비행사

1938년 '로디나' 호 비행 중 연료 부족으로 타이가에 불시착해야 했을 때, 기수 조종석에 탄 라스코바는 충돌 시 가장 위험한 위치였다. 그리조두보바가 낙하산 탈출을 명령하자 그녀는 초콜릿 두 조각만 지닌 채 시베리아 타이가로 뛰어내렸고, 열흘 동안 홀로 생존 끝에 구조되었다.

소련 최초의 여성 항법사이자 1938년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영웅 칭호를 받은 3인 중 한 명. 1938년 모스크바-극동 무착륙 비행으로 여성 세계 거리 신기록을 수립했다. 1941년 스탈린에게 직접 여성 전투부대 편성을 설득해 586전투연대·587폭격연대·588야간폭격연대 등 3개 여성 항공연대를 창설했으며, 588연대는 '밤의 마녀들'로 불리며 전설이 되었다. 587폭격연대를 직접 지휘하던 중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선으로 향하던 비행에서 악천후로 추락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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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항법연구소 제도사
  • 1933소련 공군 최초의 여성 항법사 자격 취득
  • 1934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교관 — 여성 최초
  • 1935계기비행 교관 자격 취득, 중앙비행클럽 졸업
  • 1937–1939NKVD 특별과 전속 자문관
  • 1937–1938다수의 여성 세계항공기록 수립 (항법사)
  • 1938'로디나' 호 모스크바-극동 무착륙 비행, 소비에트연방영웅 수훈
  • 1941여성항공연대 창설 — 586·587·588연대 조직
  • 1942–1943587폭격항공연대장, Pe-2 폭격기 전환 훈련 지휘

파샤 니키티치나 안겔리나

Прасковья Никитична Ангелина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계 그리스인 1912–1959 ○ 자연사

여성 기계화 노동의 선구자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제가 하나를 사면 그들도 하나를 사요.”

파샤 안겔리나는 초기 5개년계획의 농업에서 여성 노동자가 기술을 익히고 생산을 조직할 수 있음을 보여 준 트랙터 운전수이자 여단장이었다. 그녀는 여성 트랙터 여단을 이끌며 스타하노프 운동의 농업 부문을 대표하는 공적 인물이 되었고, 여성의 농촌 기계화 진출을 촉진했다. 그러나 그녀의 명성과 생산 기록은 성별 분업을 넘어선 노동의 가능성과 국가가 노동 영웅을 선전의 상징으로 만드는 방식을 함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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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최초의 여성 트랙터 운전수 중 한 사람
  • 1933최초의 여성 트랙터 여단 조직·지휘
  • 1935전연맹 스타하노프 대회 참가·발언
  • 1938여성 트랙터 운전수 양성 운동 주도
  • 1940모스크바 티미랴제프 농업 아카데미 졸업
  • 1947사회주의 노동 영웅 수훈
  • 1958두 번째 사회주의 노동 영웅 수훈
  • 1948『콜호스 들판의 사람들』 출간
  • 1937–1958소련 최고회의 대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