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함으로 포위된 사단을 구한 해병 지휘관
“후퇴라니, 지옥에나 가라! 우리는 그저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중이다.”
올리버 P. 스미스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복무한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상륙작전 전문성과 신중한 판단으로 알려졌다. 제1해병사단장으로서 1950년 인천 상륙과 서울 진격을 지휘했으며, 이후 장진호에서 중국군에 포위된 병력을 조직적으로 돌파시켰다. 그는 맥아더와 앨먼드의 속도 중심 명령에 맞서 보급선과 철수로를 준비했고, 그 선택은 병력 보존과 작전 지속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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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미 해병대 소위 임관
- 1934–1936프랑스 육군 고등전쟁학교 수학
- 1944제5해병연대장, 뉴브리튼 작전 지휘
- 1944–1945제1해병사단 부사단장, 펠렐리우·오키나와 작전
- 1950–1951제1해병사단장, 인천·서울·장진호 작전
- 1953–1955대서양 함대 해병대 사령관
- 1955대장으로 퇴역
18년 감옥에서 버틴 일본공산당 초대 서기장
1956년 흐루쇼프는 제20차 당대회 개막에서 스탈린·고트발트와 함께 '도쿠다 규이치'의 이름을 부르며 기립 추모를 요청했고, 전당대회가 일어섰다.
일본공산당 창립(1922년) 원년 멤버로, 1928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18년간 비전향으로 복역한 후 1945년 초대 서기장으로 당을 재건했다. 1950년 코민포름의 평화혁명노선 비판을 계기로 소련·중국과 보조를 맞춘 무장투쟁으로 전환했고, 공직추방 후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기관에서 당을 지휘하다 1953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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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일본공산당 창립 참여, 중앙위원
- 1928–1945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18년 복역 (아바시리·지바·도요타마·후추 형무소)
- 1945일본공산당 서기장 (초대)
- 1946–1950중의원 의원 (3선, 도쿄 3구)
- 1950–1953중국 망명, 베이징기관 조직 및 무장투쟁 지휘
분단 국가의 통합을 이끈 사회민주주의자
1946년 4월, 그는 빌헬름 피크와 함께 새로 창립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그로테볼은 바이마르기의 사회민주주의 정치가로, 나치 독재에 맞서 의회에서 반대표를 던지고 전후 소련 점령지의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끌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중했지만 소련 점령 당국의 압력 속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1946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이 되었다. 이 통합은 동독 국가의 정치적 토대를 놓았지만, 사회민주당 내부의 자유로운 선택이 억압된 강제 통합이기도 했다. 1949년부터 동독 최초의 정부 수반을 맡은 그는 국가 건설과 소련의 영향력 사이에서 제한된 자율성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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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2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 1920–1926브라운슈바이크 주의회 의원
- 1922–1924브라운슈바이크 법무·국민교육 장관
- 1925–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45–1946소련 점령지 독일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 1946–1950독일 사회주의통일당 공동 의장
- 1949–1964독일민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60–1964중병으로 사실상 정치 활동 중단
- 1964동베를린에서 사망
샌프란시스코에서 강대국 거부권에 맞서 중소국 연대를 이끈 오스트레일리아 외무장관
스테티니어스·그로미코와 함께 긴급소위원회를 구성한 에바트는 '화해적 태도'로 초안을 제시했고, 6월 20일 총회 토론권 교착이 해소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 정치인이자 법률가로, 36세에 고등법원 최연소 판사가 되었고 이후 커틴·치플리 정부에서 검찰총장 겸 외무장관을 지냈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5대 강국의 안보리 거부권에 맞서 중소국 대표로 38건의 수정안을 제출했고, 스테티니어스·그로미코와 함께 긴급소위원회를 구성해 총회 토론권을 둘러싼 교착을 해소했다. 1948년 유엔 총회 의장으로 세계인권선언 초안을 주도했으며, 이스라엘 건국을 심의한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 의장도 맡았다. 1951년 노동당 대표가 되었으나 반공 이슈를 둘러싼 당내 분열과 세 차례 연속 총선 패배 끝에 1960년 정계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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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1930뉴사우스웨일스 주의회 의원
- 1930–1940오스트레일리아 고등법원 판사
- 1941–1949검찰총장 겸 외무장관
- 1948–1949유엔 총회 의장
- 1951–1960노동당 대표·야당 지도자
- 1960–1962뉴사우스웨일스 대법원장
분단의 현장에서 국가 권력으로 이동한 사회민주주의자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임시 민주 마기스트라트’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2세는 사회민주당 정치인에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자로 이동한 독일 정치가로, 초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상징성과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겹쳐 있었다. 나치 시대에는 불법 정치활동으로 수용소에 구금되었고, 전후에는 소련 점령지에서 사민주의와 공산주의의 강제적 통합을 거쳐 SED 체제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비정상적 시의회를 이끌어 선출된 베를린 정부를 폐위시키고 경쟁적 동베를린 마기스트라트를 세웠으며, 이후 도시 재건과 동독 국가기관 운영을 함께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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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1925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 편집자
- 1927–1933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 시의원
- 1928–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46–1949브란덴부르크 주의회 의장
- 1946–1979독일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정치국 위원
- 1948–1967동베를린 초대 시장
- 1949–1979동독 인민회의·국가평의회 지도부
- 1971–1979SED 인민회의 원내단 의장
나치 수용소에서 10년을 버티고 전후 서독 사회민주당을 이끌며 공산당과의 통합을 거부한 지도자
서프로이센 쿨름에서 태어나 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었고, 1918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다. 뷔르템베르크 주의회와 제국의회 의원으로 나치에 맞섰다. 1933년 7월 체포되어 활동 포기 서약을 거부하고 10년 동안 여러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1945년 하노버에서 당을 재건했고, 소련 점령지구의 그로테볼이 내세운 공산당과의 통합을 거부하며 공산당을 「붉게 칠한 나치」라 불렀다. 1946년 당 의장, 1949년 연방의회 첫 야당 지도자가 되어 중공업 국유화와 통일 독일을 요구하며 아데나워의 서방 통합 정책에 맞섰다. 1952년 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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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사회민주당 입당
- 1930–1933제국의회 의원
- 1933–1943나치 강제수용소 수감
- 1946–1952사회민주당 의장
- 1949–1952연방의회 야당 지도자
전후 대외무역장관을 지내고 1948년 2월 사임 뒤 다시 망명한 국민사회당 정치가
1948년 2월 20일, 경찰 지휘부 교체를 둘러싼 정부 위기에 립카는 비공산당 장관들과 함께 사임서를 제출했다. 베네시 대통령은 사임을 수리했고, 공산당의 권력 장악 뒤 립카는 다시 망명했다.
언론인 출신의 국민사회당 정치가로, 1940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 망명정부 외무부의 국무장관이 되었다. 1945년 귀국해 대외무역장관을 맡았고 1946~1948년 제헌의회 의원이었다. 1948년 2월 경찰 숙청에 항의해 사임한 비공산당 장관 가운데 하나였고, 공산당이 권력을 잡자 다시 나라를 떠났다. 망명 중에 체코슬로바키아와 뮌헨 협정, 1948년 2월 사건에 관한 책을 썼고, 1958년 1월 런던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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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영국으로 가 런던 망명정부 외무부 국무장관으로 일했다.
- 1945임시정부의 대외무역장관에 임명되어 5월 체코슬로바키아로 돌아왔다.
- 1946–1948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 19482월 사임 뒤 망명해 체코슬로바키아와 뮌헨 협정, 1948년 2월 사건을 다룬 저술을 남겼다.
동독 사회민주당을 재건하고 통합에 서명했으나 1948년 사회주의통일당을 탈당해 서쪽으로 간 조직가
엘빙의 조선소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13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사무직 노조 간부로 브라운슈바이크에서 그로테볼과 함께 일했다. 나치 시기 사회민주당 저항 모임에 가담해 1938년 그로테볼과 함께 투옥되었다. 1945년 5월 그로테볼과 함께 베를린에서 사회민주당을 재건해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공산당과의 합의와 통합 선언에 사회민주당 쪽 첫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다. 1946년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서기국원에 뽑혔으나 당의 스탈린화 속에 고립되었고, 1948년 9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10월 「새로운 형태의 당」이 전체주의 독재로 이어질 것이라는 탈당 편지를 쓰고 서쪽으로 도피했다. 1964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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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3사회민주당 입당
- 1938그로테볼과 함께 투옥
- 1945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46사회주의통일당 중앙서기국원
- 1948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고 탈당, 서쪽으로 도피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른 국민영웅에서 프라하의 봄의 뜻밖의 보루가 된 군인 대통령
1968년 8월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가 '노동자-농민 정부'를 세우라 요구하자, 스보보다는 둡체크와 개혁파 지도부를 석방하지 않으면 내 머리에 총알을 박겠다고 응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서 탈영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합류한 1차대전 참전자로, 2차대전에서는 소련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해 동부전선을 누비며 국민영웅으로 떠올랐다. 1948년 국방장관으로서 '군대는 인민을 향해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며 공산당의 2월 쿠데타를 방조했으나, 곧 숙청당해 1950년대를 수감과 은둔으로 보냈다. 1968년 3월 둡체크의 추천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프라하의 봄 개혁에 동의했고, 8월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직후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서 권총 자살을 위협하며 납치된 개혁파 지도부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이후 정상화 국면에서 신문 검열에 협력하고 둡체크 교체를 방조하는 등 소극적 순응으로 일관하다 1975년 헌법 조항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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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1920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즈보로프·바흐마치 전투, 시베리아 철수
- 1921–1939체코슬로바키아군 장교; 뮌헨 위기 당시 대대장
- 1939–1945폴란드·소련에서 체코슬로바키아군 편성; 제1군단장으로 키예프·두클라 해방
- 1945–1950체코슬로바키아 국방장관
- 1950–1951부총리 겸 체육위원장으로 전보
- 1951–1954숙청: 체포·수감 후 석방, 고향 협동조합에서 노동
- 1954–1959클레멘트 고트발트 군사대학 총장
- 1968–1975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158차례 정전회담 끝에 판문점에서 유엔군 대표로 정전협정에 서명한 미 육군 중장
1952년 6월, 회담이 성과 없이 끝날 것이 분명하자 해리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고, 남일 장군은 어안이 벙벙한 채 남겨졌다.
서부전선과 벌지 전투에서 무공을 세운 기병 장교 출신으로, 1952년 5월 유엔군 정전대표단 수석대표가 되어 1년 넘게 판문점 회담을 이끌었다. 1953년 7월 27일, 남일 장군과 서로 눈길 한 번 마주치지 않고 18부의 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3년간의 한국전쟁 교전을 멈추었다. 독실한 복음주의 신자이자 장교기독교친목회 회장을 지낸 그는, 퇴역 후에도 '명령 아래 사는 사람'이라는 신앙의 규율을 평생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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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웨스트포인트 졸업, 기병 소위 임관
- 1944제30보병사단 부사단장, 노르망디·벌지 전투 참전
- 1946–1949연합국 최고사령부(GHQ) 배상과장, 일본 점령
- 1950–1951제9보병사단장, 포트 딕스
- 1951.12제8군 부사령관, 한국
- 1952.05–1953.07유엔군 정전대표단 수석대표
- 1953.09극동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 1954–1957카리브군 사령관, 퇴역
전후 미국 국제질서를 설계한 실무가
흐루쇼프는 미국의 군비 증강이 전쟁 위협이라고 경고했다.
존 J. 매클로이는 법률가 출신의 미국 외교·안보 관료이자 금융가로, 전쟁 수행과 전후 국제질서 구축을 잇는 통로였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 강제수용과 독일 전범 사면·감형 같은 결정에 관여하며 미국 권력의 폭넓은 책임과 그 모순을 드러냈다. 1961년 존 F. 케네디의 군비축소 고문으로서 소련과 시험금지 및 군비축소를 협상했고, 7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베를린 위기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을 직접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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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1919미 육군 포병 장교, 프랑스 전선 복무
- 1921–1940뉴욕 변호사, 월스트리트 법률가
- 1941–1945전쟁부 차관보, 전시 동원·정보·안보 정책 담당
- 1947–1949세계은행 제2대 총재
- 1949–1952미국 독일 고등판무관
- 1953–1960체이스맨해튼은행 회장
- 1953–1970외교협회 이사회 의장
- 1961케네디 대통령 군비축소 고문
1948년 2월 쿠데타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인민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시킨 공산당 지도자
우리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이며 우리 최고 사령부는 바로 모스크바다. 우리는 러시아 볼셰비키에게서 당신들의 목을 비트는 법을 배우러 모스크바에 간다. 그 웃음보는 찢어 놓겠다! 1929년 12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국회 첫 연설에서
모라비아의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에 참여했고, 1929년 제5차 대회에서 서기장이 되어 사망까지 당을 이끌었다. 코민테른 서기(1935–1943)를 지내며 인민전선 노선을 추진했고, 1945년 5월 프라하로 돌아와 부총리와 민족전선 의장을 맡았다. 1946년 총선에서 KSČ가 38%를 얻은 뒤 총리가 되었고, 1948년 2월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해 그해 6월 14일 체코슬로바키아 최초의 공산당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으로서 산업 국유화와 농업 집단화를 밀어붙이며 밀라다 호라코바(1950년 처형), 루돌프 슬란스키와 블라도 클레멘티스(1952년 처형) 등의 재판을 만들었고, 1953년 3월 14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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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참여
- 1929–1945KSČ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38–1945모스크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주의 저항 지도
- 1945–1946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 1946–1948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1948–1953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13일의 총리
1958년 6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을 거부하며 말했다. "유일한 위안은 언젠가 헝가리 민족과 국제 노동계급이 나에 대한 이 중대한 혐의를 벗겨 주리라는 확신이다."
헝가리의 공산주의자.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로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모스크바 망명기에 농업 문제 전문가가 되었다. 1945년 농업장관으로 토지개혁을 집행했으나 1948~49년 집단화 속도를 두고 라코시·게뢰와 맞섰다가 밀려났다. 1953년 7월 총리가 되어 '새 노선'으로 투자 축소, 개인 농가 보장, 억류수용소 폐쇄를 추진했으나 1955년 해임되었다. 1956년 혁명 때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중립을 선언했고, 1958년 비공개 재판 뒤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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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1921러시아군 포로, 적군 가담, 볼셰비키 입당
- 1930–1944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농업 연구
- 1945–1946농업장관, 토지개혁 집행
- 1953–1955총리, 「새 노선」: 수용소 해산, 농민 부담 경감
- 1955실각·출당
- 1956.10–11봉기의 총리, 다당제·중립 선언
- 1958비밀 재판 후 처형
- 1989영웅광장 재매장
37년간 프랑스 공산당의 2인자, 의회와 지하를 오간 스탈린주의자
「기회주의, 합법주의, 의회 환상이 있었다… 우리가 당 앞에서 용기 있게 이 자기비판을 수행한다면 대중 사이에 투쟁에 유리한 분위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20구 파리에서 레옹 블룸을 꺾고 국회의원이 된 이후 37년간 프랑스 공산당 지도부에서 모리스 토레즈의 2인자로 활동한 정치인. 제2차 세계대전 중 점령 하 프랑스에서 지하당을 지휘했으며, 전후 국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PCF의 참여 정부 노선을 '의회 환상'이었다고 자인하며 마셜 플랜에 대한 투쟁적 반대로의 전환을 상징했다. 1969년 대통령 선거에서 21.3%를 득표, 프랑스 공산당 사상 최고 득표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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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19171차 대전 참전, 베르됭에서 부상 후 포로
- 1920–1926PCF 창립 당원 → 중앙위원회, 국회의원 당선
- 1928–1936레옹 블룸을 꺾고 재선, 정치국 입성, 국회 부의장
- 1940–1944지하 PCF 책임자, 프랑스 레지스탕스 지도
- 1945–1947제헌의회·국민의회 의원 및 부의장, 3당 연정 참여
- 1947–1953코민포름에서 자기비판 → 마셜 플랜 반대 투쟁, 토레즈 병중 당 대행
- 1959–1975상원 의원 및 공산당 원내대표, 1969년 대선 21.3% 득표
- 1975몽트뢰유에서 사망, 페르 라셰즈에 안장
억압을 집행하고 스탈린의 숙청에 쓰러진 불가리아 2인자
재판에서 그는 예심 자백을 철회했고, 최후 진술에서 그 자백이 고문으로 짜낸 것임을 밝히려 했다.
불가리아 공산당 정치국원·부총리로, 지하운동 시절부터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에 이은 당의 실질 2인자였다. 1944년 9월 조국전선 정권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를 맡아 인민재판소 설립을 주도하며 억압의 집행자였지만, 소련의 담배 매입가에 맞서 경제 독자성을 지키려다 스탈린과 충돌했다. 1949년 체포되어 영국 간첩·티토 결탁 혐의로 기소됐고, 법정에서 자백을 철회한 유일한 동유럽 전시재판 피고로 12월 16일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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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불가리아 공산당 입당
- 1924공산 출판 배포로 8년형 선고
- 1931당 중앙위원회 위원, 당 기관지 편집
- 1937정치국원 겸 중앙위원회 서기
- 1942지하 저항 조직 중 종신형 선고
- 1945–1948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46–1949부총리 · 전력화부 장관, 경제 정책 총괄
- 1949해임·체포·재판 후 교수형
통화 개혁과 사회적 시장경제를 설계한 서독 경제정치가
1948년 6월 21일, 그는 라디오를 통해 일부 공산품의 가격 통제와 강제 배급을 폐지한다고 발표했다.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질서를 자유로운 경쟁과 사회적 안전의 결합으로 구상한 경제학자이자 정치가였다. 1948년 비조네 경제행정 책임자로서 통화 개혁을 준비하고 독일마르크 도입과 맞물려 가격·생산 통제를 단계적으로 풀어 서독 경제 회복의 제도적 출발을 열었다. 그의 역할은 흔히 ‘경제 기적’의 단독 설계자로 신화화되지만, 연합국의 개혁과 국제 경기, 노동자와 기업의 생산 회복이 함께 작용한 결과였으며 가격 자유화는 초기 생활비 상승과 노동계급의 저항도 낳았다. 이후 경제부 장관과 수상으로서 그 질서를 서독의 국가 정체성으로 굳혔으나, 경기 침체와 연정 붕괴 속에서 1966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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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1922뉘른베르크 상과대학에서 경영학 수학
- 1925프랑크푸르트대학교 경제학 박사
- 1947비조네 ‘화폐·신용 특별기구’ 위원장
- 1948–1949비조네 경제행정청장
- 1949–1963서독 경제부 장관, 1957년부터 부수상 겸임
- 1963–1966서독 제2대 연방수상
- 1966–1967기독교민주연합 당수
- 1949–1977독일 연방의회 의원
전쟁과 탈식민화의 영국 외교가
1945년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네 연합국 외무장관이 본회의 의장을 교대로 맡았고, 이든도 그 의장단에 포함됐다.
앤서니 이든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연맹과 집단안보를 중시한 영국 보수 정치가였다. 그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부상 속에서 세 차례 외무장관을 지냈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윈스턴 처칠의 핵심 외교 보좌역으로 소련 및 연합국과의 전후 질서를 협상했다. 1945년 얄타 회담과 샌프란시스코 국제기구회의에서 영국을 대표하며 전후 국제기구 형성에 참여했지만, 총리 재임 중 수에즈 침공을 추진해 영국 제국의 한계와 미국 의존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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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1919영국 육군 장교, 서부전선 복무
- 1923–1957워릭·리밍턴 지역 하원의원
- 1931–1934외무차관
- 1935–1938외무장관
- 1940–1945외무장관, 전쟁내각 각료
- 1945얄타 회담 및 샌프란시스코 회의 영국 대표
- 1951–1955외무장관
- 1955–1957영국 총리, 보수당 당수
서베를린 봉쇄에 공수로 맞서 324일을 버텨낸 미군 지구 군정장관
봉쇄 하루 만인 1948년 6월 25일, 클레이는 트루먼의 공식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공수 작전을 스스로 명령했고, 살아남은 베를린 시민들은 그를 '도시의 아버지'라 부르며 무덤에 '우리 자유의 수호자'라는 감사 비문을 새겼다.
그루지야 출신의 공병 장교로, 전시 보급 지휘로 두각을 나타낸 뒤 1947년 점령 독일 미군 지구 군정장관이 되었다. 1948년 소련이 서베를린을 봉쇄하자 무력 호송대 대신 공수를 택해 직접 명령을 내렸고, 베를린 방위가 곧 미국의 명예이자 서유럽의 운명이라고 주장하며 324일의 공수를 끝까지 이끌었다. 1949년 퇴역한 뒤 사업가와 역대 대통령의 고문을 지냈고, 1961년 베를린 장벽 위기 때 케네디의 특사로 돌아와 체크포인트 찰리의 미군 전차를 소련 전차와 대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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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7그루지야주 메리에타에서 알렉산더 스티븐스 클레이 상원의원의 아들로 출생
- 1918웨스트포인트 졸업, 공병 장교로 임관
- 1942최연소 준장으로 승진, 아이젠하워 휘하 물자국장
- 1945–1946아이젠하워 부관, 독일 연합군 정부 부군정장관
- 1947–1949미군 지구 군정장관 겸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
- 1948.06.25베를린 공수 작전 개시 명령
- 1949–1962퇴역, 컨티넨털 캔 사 회장
- 1961–1962케네디의 베를린 특사, 체크포인트 찰리 미소 전차 대치
라코시 시대 문화정책의 총감독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라코시의 권력 집중을 비판하고 헝가리 지도부 개편을 논의했다. 레버이는 초청받지 못했고, 그달 정치위원회에서도 제외됐다.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헝가리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4~44년 소련에 살았고, 귀국 뒤 1945~50년 당 기관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헝가리 문화생활 전반을 통제했고 1949년부터 문화장관을 겸했다. 1952년부터 라코시에게 밀려나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고, 몰로토프는 그가 이념 분야의 「모든 것을 한 몸에」 쥐었다고 비꼬았다. 1953년 정치위원회에서 빠졌다가 1956년 잠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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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반전 좌파 잡지 「테트」와 후속지 「마」 편집진에 합류했다.
- 1918헝가리 공산당 창립 모임에 참여하고 당 기관지 「뵈뢰시 우이사그」 편집진에서 일했다.
- 1930–19341930년 체포되어 1931년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석방된 뒤 프라하를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
- 1944–19451944년 헝가리로 돌아와 당 중앙위원회 수립에 참여했고, 1945년 당 선전·언론부장이 됐다.
- 1945–1950당 중앙 일간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 1949–1953공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 1953–1958대통령평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 19567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정치위원회에 복귀했으나, 10월 헝가리 혁명 때 소련으로 이송됐다.
- 1957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임시집행위원회 고문으로 귀국해 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됐고, 6월 당내 논쟁에서 패배한 뒤 다수파의 견해를 수용했다.
「모스크바파」의 재무장관, 1952년 화폐개혁을 빌미로 숙청되어 아이우드 감옥에서 죽은 세케이 헝가리인 공산주의자
195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까지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화폐개혁의 「과오」는 루카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그를 변호하려 한 파우케르와 제오르제스쿠는 석 달 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길을 밟았다.
트란실바니아 세케이 지방의 헝가리인 가정에서 루커 라슬로로 태어나 철도 공장 노동자로 일했고, 1919년 헝가리 혁명 뒤 루마니아 노동운동에 들어가 1920년대 초 공산당에 가입했다.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며, 1940년 체르너우치 감옥에 있다가 소련군의 북부 부코비나 점령으로 풀려나 소련 시민이 되었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으로 뽑혔다. 전쟁 중 모스크바에서 아나 파우케르와 함께 망명 루마니아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고, 1944년 귀국해 정치국원·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1947년 11월부터 재무장관으로서 화폐 안정화와 국유화 재정을 맡았으나, 1952년 1월 화폐개혁의 실행 오류가 빌미가 되어 3월 초 전원회의에서 「우편향」으로 규탄되고 8월 체포되었다. 1954년 10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63년 아이우드 감옥에서 죽었다. 1968년 차우셰스쿠 지도부의 당 전원회의가 그를 사후 복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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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루마니아 노동운동 참여
- 1920년대–1940공산당 입당, 여러 차례 투옥
- 1940체르너우치 감옥 석방, 소련 시민·우크라이나 최고회의 대의원
- 1944귀국, 정치국원·중앙위 서기
- 1947–1952재무장관
- 1952「우편향」 규탄, 해임·체포
- 1954사형 선고, 종신형 감형
- 1963아이우드 감옥에서 사망
- 1968사후 복권
전간기 반파시즘 파괴공작을 조직했고 1953~1957년 슈타지를 이끈 공산주의자
하노버주 뮌덴에서 태어나 1918년 수병 반란에 가담했고 1919년 공산당에 들어가 당 군사조직을 이끌었다. 1932~1933년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다. 망명 중 1936~1940년 「볼베버 동맹」을 조직해 파시스트 국가들의 선박에 21건의 파괴공작을 벌였고, 스페인 공화국군에 무기를 댔다. 1946년 귀국해 해운 행정을 맡았다. 1953년 7월 차이서가 물러나 국가보안부가 국가보안청으로 격하되자 그 수장이 되었고, 1955년 11월 다시 국가보안부 장관이 되었다. 울브리히트·호네커와 충돌하고 시르데반 편에 섰다가 1957년 물러났고, 1958년 「분파 활동」으로 중앙위원회에서 쫓겨났다. 1967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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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수병 반란 가담
- 1932–1933제국의회 의원(공산당)
- 1936–1940「볼베버 동맹」 파괴공작 조직
- 1953–1955국가보안청장(차관급)
- 1955–1957국가보안부 장관
- 1958중앙위원회에서 축출
소농당 출신의 명목상 국가원수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실권이 거의 없던 도비를 헝가리 대표단에 포함했다. 모스크바의 초청은 그의 국가원수직이나 소농당 경력에 대한 오해, 또는 국가 간 회담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쇠니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년만 마치고 날품팔이로 일했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을 지지했고 농업노동자 운동에 참여했다. 소농당 좌파 지도자로 공산당과 손잡아 1948~52년 총리, 1952~67년 대통령평의회 의장으로 명목상 국가원수를 지냈다.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 초청되었지만, 라이너는 소련 지도부가 그의 실권이나 농민 사이의 권위를 잘못 짐작한 탓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협동조합의 강제 해산을 두려워해 몰로토프의 해산 제안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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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1952헝가리 총리를 지냈다.
- 1952–1967헝가리 인민공화국 대통령평의회 의장으로 국가원수를 지냈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이자 1960년대 신좌파의 대표적 이론가
'그것은 가장 진전된 위치에서 위대한 거부,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항의다' — 《일차원적 인간》(1964)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철학자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결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이론을 전개했다. 《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자본주의의 억압 구조를 분석하고 해방된 에로스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일차원적 인간》(1964)에서는 기술적 풍요가 비판 의식을 잠식하는 현대 산업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로 규정하며 억압적 탈승화 개념을 제시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 전시 OSS에서 근무하고 브랜다이스대와 UC샌디에이고에서 가르치며 1960년대 학생 운동과 신좌파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위대한 거부'로 상징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비판 이론과 해방 정치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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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제네바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합류
- 1934–1942컬럼비아대학교 사회연구소 연구원, 뉴욕
- 1942–1951OSS 및 국무부 분석관, 중앙유럽과장
- 1954–1965브랜다이스대학교 정치이론 교수
- 1965–1970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철학 교수
단 3개월 만에 혁명을 촉발한 마지막 스탈린주의 제1서기
1956년 10월 23일 밤 게뢰는 라디오 연설에서 학생 시위대를 향해 '우리 청년들에게 쇼비니즘의 독을 주입하려는 자들'이라고 규탄했고, 수 시간 내로 평화 시위는 혁명으로 바뀌었다.
헝가리 공산운동의 핵심 인물로, 1918년 창당과 함께 입당해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활동했다. 코민테른 요원과 NKVD 공작원으로 프랑스·스페인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는 '바르셀로나의 도살자'로 불리며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라코시의 오른팔로 헝가리 경제 스탈린화를 주도했고, 1956년 7월 라코시 후임 제1서기가 되었으나 개혁 요구를 거부했다. 10월 23일 저녁 시위대를 '파시스트'로 규정한 라디오 연설은 봉기를 혁명으로 폭발시켰고, 25일 사임 후 소련으로 도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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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1919헝가리 공산당 창당 가입, 평의회 공화국 청년공산주의자 활동
- 1925–1936코민테른·NKVD 공작원: 프랑스·벨기에·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활동
- 1936–1939스페인 내전: 카탈루냐 통일사회당(PSUC) 배후 지도, 트로츠키주의자(POUM) 숙청 지휘
- 1940–1944모스크바 망명: KPV 해외국 라코시와 공동 지도, 포로·적군 대상 선전
- 1945–1948최고국가평의회 위원, 통상·교통장관
- 1948–1953MDP 정치국원·부서기장, 재무장관: 중공업화·집단화로 경제 스탈린화 주도
- 1953–1956.07내무장관·부총리; 1956년 7월 MDP 제1서기
- 1956–198010월 25일 사임, 소련 도피; 1960년 귀국, 1962년 출당, 은둔 중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