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군 조직을 주도하고 1932~1936년 총리로서 헝가리를 이탈리아·독일 쪽으로 이끈 우익 급진파 장교
톨너주 무르거에서 마을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나갔다. 1919년 세게드에서 준군사 단체 MOVE를 만들고 호르티의 국민군 조직을 주도했으며, 1921년 카를 왕의 복귀를 무력으로 막는 데 앞장섰다. 1929년 베틀렌 정부의 국방장관이 되었고 1932년 총리가 되었다. 무솔리니와 손잡고 1934년 로마 의정서에 서명했으며, 히틀러를 찾아간 첫 외국 정부 수반으로서 독일과 무역 협정을 맺었다. 1936년 뮌헨에서 병으로 죽었다.
1907년 군에 들어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참모장교로 콘스탄티노플의 독일 군사사절단에서 일했다. 1919년 경찰로 옮겨 칠레 경찰대 책임자, 경찰학교 감찰총감을 지냈고, 친위대에 들어가 힘러의 참모부에서 일했다. 1939년 말 친위대 경찰사단을, 1943년 라트비아인 제6친위군단을 맡았다. 1944년 12월 부다페스트의 제9친위산악군단장이 되어 1944년 12월 24일부터 1945년 2월 11일까지 포위전에서 독일군을 지휘했고, 모든 항복 권유를 거부해 길고 참혹한 포위전으로 이어졌다. 탈출 시도가 실패한 뒤 소련군 포로가 되어 1949년 징역 25년을 선고받았고, 1955년 풀려나 1971년 빌레펠트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트란실바니아의 작센인 가정에서 프란츠 차이드너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병·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전간기에 성을 헝가리식인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로 바꾸었다. 1941년 8월 세게드에 주둔한 제5군단장이 되었다. 1942년 1월 참모총장 솜버테이이가 그를 바치카의 파르티잔 진압에 보냈고, 그의 명령으로 바치카 마을 주민이 학살되었으며 노비사드 학살도 그가 조직했다. 1944년 1월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다른 유죄 장교들과 빈으로 달아났고, 자원해 친위대에 들어갔다. 화살십자당 정권에서 국방차관이 되어 자신을 비판해 온 버이치질린스키 엔드레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전후 헝가리를 거쳐 유고슬라비아로 넘겨져 1946년 11월 처형되었다.
예카테린부르크 점령 직후, 가이다는 로마노프 일가가 며칠 전 살해된 바로 그 이파티예프 가옥에 자신의 사령부를 차렸다.
라돌라 가이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서 부상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지휘관이자 전간기 체코슬로바키아의 장군·정치가였다. 1918년 군단의 동부집단을 이끌며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철도선을 장악하고, 중립과 무장투쟁 사이의 논쟁에서 전투를 밀어붙였다. 이후 콜차크의 백군에 합류했으나 지휘권을 잃고, 귀국 뒤 군 참모총장 대행과 파시스트 국민공동체 지도자를 거쳤다. 그의 군사적 반볼셰비즘은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에서 파시즘으로 변형되었지만, 나치 점령기에는 저항을 도왔다.
1939년 4월 1일의 마지막 전황 보고, 그가 직접 서명했다. 「오늘, 붉은 군대가 포로가 되고 무장이 해제됨으로써 국민군은 최후의 군사 목표에 도달했다.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36년의 독재가 시작됐다.
모로코 식민지 전쟁에서 경력을 쌓아 서른셋에 유럽 최연소 장군이 된 직업군인. 1934년 아프리카군을 동원해 아스투리아스 광부 봉기를 진압하면서 우파에게 「질서의 회복자」로 각인됐고, 1936년 7월 군부 반란에 합류해 카나리아 제도에서 모로코로 날아가 독일·이탈리아 수송기의 힘을 빌려 아프리카군을 본토로 실어 날랐다. 그해 10월 반란 진영의 총사령관 겸 국가수반이 되었고, 1937년 통합령으로 팔랑헤와 카를로스파를 하나의 「국민운동」으로 묶어 개인 지배를 굳혔다. 1939년 승리 뒤에는 정치책임법을 앞세운 대규모 처형과 투옥이 이어져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에서는 비교전을 표방하면서 동부전선에 청색사단을 보냈고, 1953년 미국과의 마드리드 협정과 정교협약으로 전후의 고립에서 벗어났다. 1959년 안정화 계획 이후의 고도성장은 체제를 지탱한 또 하나의 기둥이었으며, 1969년 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1975년 사망과 함께 체제도 해체 과정에 들어갔다.
상세 이력 보기
1892갈리시아 페롤의 해군 집안에서 출생
1907–1910톨레도 보병사관학교 수학
1912–1926모로코 식민지 전쟁 참전, 스페인 외인부대 부사령관을 거쳐 서른셋에 준장
1928–1931사라고사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2공화국 수립과 함께 해임
1934.10아프리카군을 동원해 아스투리아스 광부 봉기를 진압
1935–1936참모총장에 올랐다가 인민전선 정부에서 카나리아 제도로 좌천
1936.07.18–19군부 반란에 합류, 전세기 드래건래피드로 모로코로 이동해 아프리카군 공수를 조직
1936.10.01부르고스에서 반란 진영의 총사령관 겸 국가수반으로 선포됨
1937.04.19통합령으로 팔랑헤와 카를로스파를 단일 「국민운동」으로 통합
1939.04.01전쟁 종료 선포, 정치책임법에 따른 대규모 처형·투옥 개시
1940–1943앙다예에서 히틀러와 회담하고 비교전을 표방하면서 동부전선에 청색사단 파병
1953–1955미국과 마드리드 협정, 교황청과 정교협약 체결; 1955년 유엔 가입으로 고립 탈출
1959안정화 계획으로 자립경제 노선을 접고 고도성장기에 진입
1969–1973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 1973년 총리 카레로 블랑코가 ETA에 암살됨
헤르만 괴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조종사에서 나치 독일의 핵심 권력자이자 공군 최고지휘관으로 변신했다. 그는 프로이센 경찰과 게슈타포 창설, 재무장과 전시경제 동원을 주도하며 독재와 침략전쟁의 국가기구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그는 루프트바페의 역량을 과대평가했고, 공군기지와 전투기 방어망을 압박하던 작전을 영국 도시 폭격으로 돌리는 데 관여해 RAF가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전쟁 뒤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쟁범죄자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집행 전날 자살했다.
전과자들로 편성된 부대를 지휘한 무장친위대 지휘관. 1940년부터 점령한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지휘하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나치 독일의 SS 장교이자 전쟁범죄자. 1940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특수부대를 지휘했으며, 부대는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투입되어 볼라의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다. 그의 지휘 책임은 나치 점령정책과 SS·경찰 지휘체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
상세 이력 보기
1913뷔르템베르크군에 입대해 기관총수로 복무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위까지 올라 두 등급의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19–1921프라이코어단에 가담해 독일 혁명과 노동자 봉기·파업·공산주의자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22–1934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나치당에 입당했으나, 1934년 미성년자 성범죄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당에서 제명되고 박사 학위와 군사 훈장을 박탈당했다.
1937–1939콘도르 군단에 배속되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고 세 차례 부상했으며, 이 복무를 근거로 1940년 유죄 판결이 취소되고 당籍이 회복되었다.
1940밀렵 전과자들로 편성된 오라니엔부르크 밀렵부대를 인수해 지휘하기 시작했고, 이 부대는 특수부대로 개칭되어 점령한 폴란드에서 경비·반(反)빨치산 임무를 맡았다.
1943부대의 연대급 확대가 인가되었고, 부대는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벌이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1944바르샤바 봉기 진압과 볼라 학살에 참가했고, 이어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진압에도 투입되었다.
19452월 구벤 부근에서 소련군과 교전 중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며, 4월에 부대를 버리고 탈영해 숨었다.
커셔(지금의 코시체)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복무했고, 1925년 참모본부에 들어갔다. 1930년대 초 트리아농 이전 국경 회복을 내건 「헝가리주의」를 주창하며 정치에 뛰어들어 1935년 군을 떠났고, 1937년 헝가리 국가사회주의당을 세웠다. 1938년 투옥된 사이 화살십자당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당은 1939년 선거에서 의석 30석을 얻었다. 1944년 10월 독일이 호르티를 끌어내리자 국가 지도자가 되어 중단된 유대인 이송을 재개했고, 그의 민병대는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다. 1945년 5월 오스트리아에서 미군에 붙잡혀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6년 3월 처형되었다.
하인츠 라이네파르트는 나치당과 SS에 가입해 법률가에서 독일 점령전쟁의 지휘관으로 전환한 인물이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서 그는 전투부대와 경찰·보안 병력을 묶은 전투단을 지휘했고, 8월 5일 볼라 공격과 민간인 집단살해의 현장 지휘 구조에 핵심적으로 관여했다. 전후 폴란드의 송환 요구에도 기소와 유죄 판결을 피한 그는 서독에서 시장과 주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경력은 전쟁범죄 지휘 책임과 전후 사회의 면책이 한 인물 안에서 이어진 사례다.
그란사소에서 무솔리니 앞에 선 장면은 실제 지휘권보다 선전의 공로가 더 크게 기록된 순간이었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스코르체니는 Waffen-SS 장교로서 나치 독일의 사보타주와 특수작전을 지휘했다. 1943년 그란사소 작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위치를 찾고 SS 분견대를 이끌어 현장에 참여했지만, 작전 전체의 계획과 지휘는 공수부대 장교 하랄트 모르스와 쿠르트 슈투덴트의 몫이었다. 나치 선전은 그를 ‘무솔리니의 구출자’로 내세웠고, 그는 헝가리 정권 전복과 아르덴 공세의 위장작전에도 관여했다. 전후 전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스페인에서 극우 네트워크와 연결되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