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트 요들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참모장을 맡아 나치 국가의 군사 결정을 작전 명령으로 바꾼 직업군인이었다. 1940년 영국을 상대로 최종 승리가 시간문제라고 판단하며 압박과 침공 선택지를 검토했고, OKW에서 관련 준비와 지휘 문서 작성을 조정했다. 그는 소련 정치위원 처형 명령과 특공대 즉결 처형 명령에 서명하거나 배포했으며, 점령지 주민 강제 소개와 가옥 소각 명령에도 책임을 졌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네 혐목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아 1946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트란실바니아의 작센인 가정에서 프란츠 차이드너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병·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을 치렀고, 전간기에 성을 헝가리식인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로 바꾸었다. 1941년 8월 세게드에 주둔한 제5군단장이 되었다. 1942년 1월 참모총장 솜버테이이가 그를 바치카의 파르티잔 진압에 보냈고, 그의 명령으로 바치카 마을 주민이 학살되었으며 노비사드 학살도 그가 조직했다. 1944년 1월 군사재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다른 유죄 장교들과 빈으로 달아났고, 자원해 친위대에 들어갔다. 화살십자당 정권에서 국방차관이 되어 자신을 비판해 온 버이치질린스키 엔드레의 사형 집행 영장에 서명했다. 전후 헝가리를 거쳐 유고슬라비아로 넘겨져 1946년 11월 처형되었다.
“한 독일 야전원수가 생포된 전례는 아직 없다”는 승진 통보 뒤, 파울루스는 자살하지 않고 항복했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참모 장교이자 장군으로, 소련 침공 계획 수립에도 관여했다. 제6군 사령관으로 스탈린그라드 공격을 지휘했으나, 소련군의 포위 뒤 히틀러의 사수 명령과 군대의 붕괴 사이에 갇혔다. 그는 1943년 1월 31일 항복했고, 포로 생활 중 나치 체제를 비판하며 반나치 독일 장교 조직에 참여했다. 전후 동독에서 군사사를 연구했지만, 그의 경력은 침략전쟁 수행과 뒤늦은 결별이 함께 남긴 책임의 문제를 보여 준다.
눈보라를 뚫고 동프로이센으로 날아간 모델은 히틀러 앞에서 단안경 너머로 노려보며 물었다. 「총통 각하, 9군을 지휘하는 것이 각하십니까, 나입니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장교로 두각을 나타낸 발터 모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최고의 방어전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르제프 돌출부의 9군 사령관으로서 소련군의 여러 대공세를 격퇴해 '방어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히틀러에게는 어디든 급파할 수 있는 '소방수'로 신임을 받았다. 1943년 4월 27일 모델은 항공정찰 사진을 제시하며 쿠르스크 돌출부에 구축된 소련군의 종심 방어선 앞에서 성채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한 최초의 고위 지휘관이었으나 공세는 강행되었고, 북부 공격축을 지휘한 그의 9군은 12km조차 돌파하지 못했다. 전쟁 말기 루르 포위망에서 집단 항복을 거부하고 육군 집단을 해산한 뒤 숲에서 권총 자살했다.
“저항을 즉시 중지하라. 베를린의 민간인과 부상자들이 겪는 고통을 매 시간 연장할 뿐이다.”
헬무트 바이들링은 제국군에서 출발해 국방군 포병 장교와 군단 지휘관으로 올라선 독일 장군이었다. 동부전선에서의 지휘는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과 점령 체계에 연루되었고, 그의 군단은 오자리치 강제수용소 사건과 관련해 전후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되었다. 1945년 4월 23일 베를린 방위구역 사령관이 된 그는 히틀러의 항복 금지 명령 아래 도시 방어를 지휘했으며, 5월 2일 바실리 추이코프와 협상해 주둔군의 저항 중지 명령을 내렸다. 소련 포로가 된 뒤 전쟁범죄로 25년형을 선고받고 1955년 수감 중 사망했으며, 러시아 검찰은 1996년 그를 복권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두 달간의 빙판 체류 내내 그는 매일 저녁 텐트에서 철학·수학·지리 강연을 열었다. 결핵으로 각혈하면서도 끝까지 진영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고, 104명 중 단 한 명의 무단 이탈도 없었다.
수학자·북극 탐험가·국가행정가. 모길료프 출생의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군론 연구로 모스크바 대수학파를 창건했다. 1932년 쇄빙선 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를 세계 최초로 단일 항해로 돌파했고, 1934년 첼류스킨호 침몰 후 빙판 위에서 104명의 생존자를 이끌었다. 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으로 북극 개발을 총괄했으며, 말년에는 태양계 행성이 차가운 먼지 구름의 응축으로 형성되었다는 우주기원론을 제창하여 소련 과학계에 큰 영향을 남겼다.
되니츠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해군 잠수함 전력을 지휘했고, 1943년 1월 대제독으로 승진해 해군 총사령관이 됐다. 잠수함 손실이 커진 1943년 5월 이후에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출격을 명령했다. 히틀러가 자살한 뒤 유언에 따라 국가원수로 지명됐으며, 1945년 5월 7일 요들에게 독일 항복문서에 서명하도록 명령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평화에 반한 죄와 전쟁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10년형을 선고받았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유령적 동반자, 기술복제시대 예술론으로 자본주의 문화를 해부한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
「역사철학 테제」에서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문명의 기록물 가운데 동시에 야만의 기록물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베를린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발터 벤야민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깊이 교차하면서도 어느 학파에도 포섭되지 않은 독보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였다. 유대 신비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그의 사유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예술의 '아우라'를 붕괴시키는 메커니즘을 분석했고, 유작 「역사철학 테제」(1940)에서는 파울 클레의 그림에 빗대 '역사의 천사'라는 강렬한 알레고리로 진보서사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 망명 중에도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19세기 파리의 자본주의 문화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했고, 브레히트·아도르노·숄렘과의 긴장 어린 교류 속에서 기술·이미지·역사에 관한 가장 선구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통찰을 남겼다.
베를린의 공구공 출신으로 1910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928~1933년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을 지냈다. 나치 시기 저항 단체에 가담해 두 차례 투옥되었다. 전후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강제 합당을 지지해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1949년 10월 동독 초대 법무장관이 되었다. 글라도프 일당 재판에서 사형이 가능하도록 성인 형법을 위법하게 적용하게 했다. 1953년 6월 30일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인터뷰에서 6월 17일 파업 참가자를 혐의만으로 처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가 「국가와 당의 적」으로 몰려 해임·제명·체포되었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1956년 석방·사면되고 1958년 복당했으며, 1973년 죽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해 베르됭 전투에서 부상한 뒤 1917년 제대했고, 전쟁 경험을 거쳐 평화주의자가 되어 독일독립사회민주당에 가입했다. 1919년 4월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 대통령을 엿새간 맡고 공화국의 무장 저항에 참여했으며, 반역죄로 5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대표 희곡들을 썼다. 나치 집권 뒤 망명해 반나치 활동을 이어갔고 1939년 뉴욕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14독일군에 자원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다.
1917전쟁 중 부상과 건강 악화 뒤 군에서 제대하다.
1919독일독립사회민주당원으로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 지도부에 참여하고, 4월 6~12일 대통령을 맡다.
나치 인종 이론가로서 1941~1945년 동부 점령지 장관을 지낸 레발 태생의 발트 독일인
1893년 러시아 제국 에스토니아현의 레발(탈린)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에서 건축을 공부했다. 1918년 물러가는 독일군과 함께 독일로 건너가 1919년 1월 히틀러보다 먼저 독일노동자당에 들어갔고, 1923년 당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의 편집장이 되었다. 1930년 인종 이론서 『20세기의 신화』를 냈고, 히틀러에게 「시온 장로 의정서」를 소개해 유대인 음모론을 심었다. 1941년 7월 17일 동부 점령지 장관이 되어 힌리히 로제를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으로 두었으나 실권은 크게 제한되었다. 발트 지역을 독일의 「생존 공간」으로 보았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네 죄목 모두 유죄를 받고 1946년 10월 16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1938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외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1939년 독소 불가침 조약 협상을 주도했으며, 이 조약은 독일의 9월 폴란드 침공을 가능하게 했다. 또한 추축국에 유대인을 독일의 살해 시설로 이송하고 독일 내 유대인 시민을 추방에 넘기도록 압박하는 외교 활동을 지휘했다. 국제군사재판에서 네 혐의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았고, 1946년 10월 16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헤르만 괴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조종사에서 나치 독일의 핵심 권력자이자 공군 최고지휘관으로 변신했다. 그는 프로이센 경찰과 게슈타포 창설, 재무장과 전시경제 동원을 주도하며 독재와 침략전쟁의 국가기구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그는 루프트바페의 역량을 과대평가했고, 공군기지와 전투기 방어망을 압박하던 작전을 영국 도시 폭격으로 돌리는 데 관여해 RAF가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전쟁 뒤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쟁범죄자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집행 전날 자살했다.
겔젠키르헨에서 헌병 하사의 아들로 태어나 교사가 되었고, 1920년 카프 폭동 때 루르 적군을 지휘했다. 소련 군사정보국(GRU) 요원과 코민테른 군사고문으로 중국 광저우 봉기 등에 관여했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고메스」라는 이름으로 국제여단을 이끌었다. 1947년 귀국해 사회주의통일당에 들어갔고, 1950년 초대 국가보안부 장관과 정치국원이 되어 슈타지를 키웠다. 1953년 6월 봉기 뒤 헤른슈타트를 제1서기로 세우자고 제안했으나, 울브리히트가 흐루쇼프의 지지를 얻자 7월 장관직과 모든 직위를 잃고 당에서 제명되었다. 번역가로 지내다 1958년 동베를린에서 죽었고, 1990년 뒤에 복권되었다.
부르크에서 사회민주당원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무두장이로 일했고, 1차 세계대전에 반대해 사회민주당을 떠났다. 독립사회민주당을 거쳐 공산당에 들어갔고 마그데부르크·동프로이센 지구 지도자를 지냈다. 1933년 체포되었다가 탈옥해 망명했고, 소련에서 자유독일 국민위원회에 참여했다. 1945년 아커만 그룹과 함께 돌아와 1946년까지 작센 공산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48년부터 죽을 때까지 사회주의통일당 중앙당통제위원회 위원장으로 당 규율을 맡았고 정치국원·인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53년 봉기 뒤 정치국 다수가 울브리히트를 내치려 할 때 호네커와 함께 그의 편에 섰다. 1971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도 장벽을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공언했으나, 두 달 뒤인 8월 13일 그의 명령으로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3년 라이프치히의 재단사 가정에서 태어나 가구 목수로 훈련받았고, 1912년 사민당에 입당한 뒤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거쳐 1920년 독일공산당(KPD)에 들어갔으며, 1923년 중앙위원, 1928~1933년 라이히스타크 의원이었다. 나치 집권 후 소련으로 망명해 코민테른에서 일했고, 1945년 4월 30일 '울브리히트 그룹'을 이끌고 귀국해 1946년 강제 합병으로 사회주의통일당(SED)을 창당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50년 SED 제1서기가 되어 동독을 통치하며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을 명령하고 1963년 신경제체계 개혁을 추진했으나, 1971년 5월 3일 실각해 호네커에게 자리를 넘겼다.
1946년 4월, 그는 빌헬름 피크와 함께 새로 창립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그로테볼은 바이마르기의 사회민주주의 정치가로, 나치 독재에 맞서 의회에서 반대표를 던지고 전후 소련 점령지의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끌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중했지만 소련 점령 당국의 압력 속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1946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이 되었다. 이 통합은 동독 국가의 정치적 토대를 놓았지만, 사회민주당 내부의 자유로운 선택이 억압된 강제 통합이기도 했다. 1949년부터 동독 최초의 정부 수반을 맡은 그는 국가 건설과 소련의 영향력 사이에서 제한된 자율성을 행사했다.
디트리히 폰 콜티츠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복무한 독일 직업군인으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나치 독일의 전쟁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군정관으로서 히틀러의 도시 파괴 명령을 실행하지 않고 프랑스군에 주둔군을 넘겨주어 파리 해방의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전후 영국의 도청 기록에는 크림반도에서 유대인 학살을 수행했다고 인정하는 발언이 남아 있어, 파리에서의 불복종이 그의 전쟁 책임을 지우지는 않는다.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임시 민주 마기스트라트’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2세는 사회민주당 정치인에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자로 이동한 독일 정치가로, 초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상징성과 자신의 정치적 선택이 겹쳐 있었다. 나치 시대에는 불법 정치활동으로 수용소에 구금되었고, 전후에는 소련 점령지에서 사민주의와 공산주의의 강제적 통합을 거쳐 SED 체제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948년 11월 30일 그는 동부 부문의 비정상적 시의회를 이끌어 선출된 베를린 정부를 폐위시키고 경쟁적 동베를린 마기스트라트를 세웠으며, 이후 도시 재건과 동독 국가기관 운영을 함께 맡았다.
헤스는 1920년 나치당에 가입해 히틀러의 측근으로 부상했다. 1933년 당 부지도자가 되었고 1939년 히틀러는 그를 헤르만 괴링 다음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1941년 5월 그는 영국과의 전쟁을 끝내려는 평화 교섭을 위해 스코틀랜드로 단독 비행했으나 영국 정부는 제안을 거부하고 그를 전쟁포로로 억류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평화에 반한 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아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전과자들로 편성된 부대를 지휘한 무장친위대 지휘관. 1940년부터 점령한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지휘하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나치 독일의 SS 장교이자 전쟁범죄자. 1940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특수부대를 지휘했으며, 부대는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투입되어 볼라의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다. 그의 지휘 책임은 나치 점령정책과 SS·경찰 지휘체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
상세 이력 보기
1913뷔르템베르크군에 입대해 기관총수로 복무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위까지 올라 두 등급의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1919–1921프라이코어단에 가담해 독일 혁명과 노동자 봉기·파업·공산주의자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22–1934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나치당에 입당했으나, 1934년 미성년자 성범죄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당에서 제명되고 박사 학위와 군사 훈장을 박탈당했다.
1937–1939콘도르 군단에 배속되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고 세 차례 부상했으며, 이 복무를 근거로 1940년 유죄 판결이 취소되고 당籍이 회복되었다.
1940밀렵 전과자들로 편성된 오라니엔부르크 밀렵부대를 인수해 지휘하기 시작했고, 이 부대는 특수부대로 개칭되어 점령한 폴란드에서 경비·반(反)빨치산 임무를 맡았다.
1943부대의 연대급 확대가 인가되었고, 부대는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벌이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1944바르샤바 봉기 진압과 볼라 학살에 참가했고, 이어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진압에도 투입되었다.
19452월 구벤 부근에서 소련군과 교전 중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며, 4월에 부대를 버리고 탈영해 숨었다.
슈바르츠발트의 호른베르크에서 직물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싸웠다. 1929년 나치당, 1930년 친위대에 들어갔고, 1933년부터 브라운슈바이크의 경찰청장과 정치경찰 책임자를 지냈다. 1941년 6월 힘러에게 남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친위대·경찰 고위 지도자로 뽑혀 관할 지역의 아인자츠그루펜 학살을 모두 지휘했고, 카미야네츠포딜스키(2만 3600명)와 바비 야르(3만 3771명)의 대량 총살에 자신의 방식을 썼다. 11월 오스트란트로 옮겨 리가 유대인의 절멸을 명령받았고, 룸불라에서 이틀 동안 2만 5000명이 살해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1945년 4월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리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6년 교수형을 당했다.
나치 수용소에서 10년을 버티고 전후 서독 사회민주당을 이끌며 공산당과의 통합을 거부한 지도자
서프로이센 쿨름에서 태어나 1차 세계대전에서 오른팔을 잃었고, 1918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다. 뷔르템베르크 주의회와 제국의회 의원으로 나치에 맞섰다. 1933년 7월 체포되어 활동 포기 서약을 거부하고 10년 동안 여러 강제수용소에 갇혔다. 1945년 하노버에서 당을 재건했고, 소련 점령지구의 그로테볼이 내세운 공산당과의 통합을 거부하며 공산당을 「붉게 칠한 나치」라 불렀다. 1946년 당 의장, 1949년 연방의회 첫 야당 지도자가 되어 중공업 국유화와 통일 독일을 요구하며 아데나워의 서방 통합 정책에 맞섰다. 1952년 본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