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마르토프는 스탈린이 1907년 당에서 제명된 전력이 있음을 폭로했다. 스탈린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혁명재판소는 마르토프에게 '공적 견책'을 선고했다.
이스크라를 레닌과 함께 만든 동지였으나, 1903년 당원 자격 조항 하나를 두고 갈라져 멘셰비키의 지도자가 되었다. 10월 이후에도 나라를 떠나지 않고 합법 야당의 자리를 지키려 애썼고, 1920년 출국을 「허락받아」 베를린에서 결핵으로 죽었다. 병상의 레닌이 그의 안부를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죄르 주 러버즈드의 정육점 집안에서 태어난 식자공으로, 인쇄노동자 조합과 소비협동조합을 이끌고 1909년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들어갔다. 1919년 베린케이 정부의 노동·복지장관을 지냈고, 공산당과의 합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선포에 반대해 당직에서 물러났다. 1919년 8월 1일 평의회 정부가 사퇴하자 총리가 되어 평의회 공화국을 폐지하고 그 법령을 철회했지만, 8월 6일 루마니아군의 지원을 받은 프리드리히 이슈트반에게 쫓겨났다. 그 뒤 사회민주당 재건에 참여했고 1922~1931년 국회의원을 지냈다.
1943년 6월 그는 국왕에게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바돌리오를 임명하며 독일과의 동맹을 끊으라고 비밀리에 요구했다.
이반오에 보노미는 사회주의 개혁파에서 출발해 이탈리아 자유주의 의회정치의 핵심 인물로 이동한 정치가였다. 파시즘의 부상기에 충분히 단호하게 저항하지 못했고 무솔리니 정부를 지지한 전력이 있었지만, 1942년부터 반파시스트 세력을 다시 연결하며 정권 교체를 모색했다. 그는 1943년 국왕에게 무솔리니 해임과 피에트로 바돌리오 기용을 비밀리에 요구했고, 9월에는 6개 정당으로 구성된 민족해방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이후 왕정과 저항운동, 연합국 사이의 타협을 이끌며 전후 이탈리아의 제도적 이행을 관리했다.
1918년 1월 18일, 타브리다 궁전.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체르노프는 러시아 최초의 민주적 의회 개회를 선언했다. 볼셰비키 의원들이 퇴장한 후에도 회의는 계속되었고, 토지 사회화 법안이 통과되었다. 새벽 4시 40분, 무장한 수비대가 "경비가 피곤하니 회의를 끝내 달라"며 접근했다. 체르노프는 차기 회의 일정을 정하고 휴회를 선언했다. 그날이 마지막 회기였다.
나로드니키 농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해 토지 사회화를 사회혁명당(PSR) 강령으로 정립한 수석 이론가. 1917년 제헌의회 의장에 선출되었으나, 볼셰비키의 의회 해산 후 32년간 망명하며 저술로 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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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나로드니키 서클에서 활동, 1894년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1900농업사회주의동맹 공동 창립, 농민 대상 불법 출판물 배포
1902사회혁명당(PSR) 공동 창립, 중앙위원, 기관지 《혁명 러시아》 편집자
1905–1907제1차 당 대회 주도, 제2두마 사회혁명당 원내대표, 혁명 진압 후 재망명
1873년 중부 포흐얀마의 칸누스에서 태어나 17살에 미국으로 건너가 광산에서 일하며 급진적 서부광부연맹에 들었다. 1900년 돌아와 1907년 사회민주당 의원이 되었고, 1912~1917년 핀란드 노동조합연맹 의장, 1913년 의회 의장을 지냈다. 1917년 상원 경제부 부의장, 곧 세계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총리가 되었다. 내전 때 인민대표위원회 식량 위원을 맡아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3월 1일 조약에 서명했고, 패전 뒤 러시아로 피했다. 1919~1920년 영국이 꾸린 무르만스크 군단의 정치 고문이 되어 핀란드 공산당에게서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22~1949년 미국에서 사회민주주의 신문 『라이바야』를 만들었고, 1944년 「토코이 법」으로 내전 관련 혐의를 벗었다.
1929년 12월 27일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스탈린은 연단에서 그로만의 이론을 직접 겨냥했다: 「10월혁명이 농민에게 2월혁명보다 적은 혜택을 주었다」는 주장을 거론하며 청중의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그로만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순간 유전적 계획론은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통계학자·경제학자. 독일계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98년 RSDLP에 입당해 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업강령을 공동 기초했고, 펜자 통계국장 시절 다단계 표본추출법을 개발했다. 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식량위원장을 맡았고, 1921년 고스플란에 합류해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이끌며 최초의 '국민경제 통제숫자'와 균형법을 설계했다. 바자로프와 함께 유전적 계획 방법론을 주창했으나 스탈린의 공개 비판 후 1930년 체포되어 1931년 멘셰비키 재판 주피고인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즈달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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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908모스크바대학 입학, 혁명운동으로 제적 후 1908년 통신졸업
1898–1905RSDLP 입당, 제2차 대회 후 멘셰비키 잔류, 농업강령 공동 기초; 뱟카·예니세이 유형 중 통계 작업 시작
1909–1914펜자 주통계국장, 다단계 표본추출법 개발·농가조사 적용
1917–1918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식량위원장·중앙식량관리국장, 10월혁명 후 북부지역 식량관리국장
1921–1926고스플란 콘윤크투라 연구소장, 최초 '국민경제 통제숫자'·균형법 설계, '회복적 성장' 개념 정식화
1926–1929고스플란 농업분과위원장, 바자로프와 유전적 계획 방법론 주창; 스탈린의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공개 비판
1930–1940'멘셰비키 중앙국' 사건 체포, 1931년 재판에서 10년형; 수즈달 교정노동수용소에서 1940년 사망, 1991년 복권
화가와 언론인으로 일했으며, 1917년 독일사회민주당의 전쟁 지지에 반대해 독립사회민주당 창당에 참여했다. 1918~1919년 뷔르템베르크 임시정부에서 내무장관을 맡았고, 1919년부터 독립사회민주당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당 대표단으로 참석했으나 코민테른 가입 조건과 독일공산당과의 합당에 반대했다. 1922년 독립사회민주당 다수가 독일사회민주당에 재통합된 뒤 독일사회민주당 지도부에서 활동했고, 1933년 나치 집권 후 망명했다.
1893년 독일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당 지도부에 올랐고, 1919년부터 1920년까지 외무장관으로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1920년 처음 총리가 되어 좌파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장애인 고용, 초등교육, 실업급여와 노동자 사회보호를 확대하는 개혁을 추진했다. 1928년 다시 총리가 되어 대연정을 이끌었으며, 대공황과 실업보험 재정 분담을 둘러싼 갈등 속에 연정이 붕괴하자 1930년 사임했다.
재판에서 판사들에게: "나는 피고가 아니라 당신들의 포로다. 우리는 두 진영이다.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원이자 시인으로, 1905년 2월 4일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차르의 숙부 세르게이 대공을 폭탄으로 암살한 인물. 이틀 전, 대공의 아내와 어린 조카들이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을 보고 폭탄 투척을 멈춘 그의 행동은 '윤리적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낳았고, 알베르 카뮈의 희곡 『정의의 사람들』의 모델이 되었다.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에서 활동하다 사회민주당의 점진주의에 실망하여 SR 전투조직에 합류했으며, 플레베 암살 감시에도 참여했다. 재판에서 '전진하는 혁명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하라'고 법정에 선언한 후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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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1899모스크바 및 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가입 (1898)
트로츠키는 그를 두고 '정치가의 완전한 캐리커처였다. 오룔의 여자 신학교에서 어학을 가르치는 매력적인 교사 — 그게 전부다'라고 평했다.
SR 창립자이자 우파 지도자로서, 1905년 혁명기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 SR 분파를 이끌었고 케렌스키 임시정부의 내무장관과 예비의회 의장을 역임했다. 내전기에는 통일된 반볼셰비키 정부를 수립하려는 노력의 정점으로서, 우파 국가회의에서 전러시아 임시정부(우파 디렉토리)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11월 콜차크 쿠데타로 체포·추방되었고,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망명 언론 활동을 했다. 그의 정치 궤적은 러시아 혁명기 민주적 사회주의가 무장한 좌우 세력 사이에서 붕괴한 과정을 압축해 보여준다.
키슈쿤할러스의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 벽돌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들어섰고, 1901년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건설노동자 조합과 노동자보험기금을 이끌었다. 1919년 3월 21일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합당을 지지했고, 혁명통치평의회 의장으로서 평의회 공화국의 법적 국가원수 겸 총리가 되었으나 실권은 쿤 벨러에게 있었다. 붕괴 뒤 페이들 정부의 교육장관을 지냈고, 루마니아군에 붙잡혔다가 클루지에서 탈출해 브라티슬라바, 빈,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전후 귀국이 허락되지 않은 채 1947년 파리에서 죽었다.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이보다 큰 승리는 없었다」, 마티뇽 협정 타결 직후 라디오 연설에서, 1936년 6월
성냥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1909년 서른 살에 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이 되어 1940년까지 이끈 프랑스 노동운동의 얼굴. 혁명적 생디칼리슴에서 출발했으나 1914년 신성동맹을 받아들이며 개혁주의로 옮겨 갔고, 베르사유 조약의 노동 조항 기초와 국제노동기구(ILO) 창설에 참여했다. 1936년 재통합된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했으며, 비시 정권 아래 억류되어 독일로 이송되었다가 살아 돌아와 1948년 공산당 주도의 CGT에서 갈라져 나온 「노동자의 힘」(FO)의 창립 의장이 되었고 195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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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906오베르빌리에 성냥 공장 노동자, 아버지를 실명시킨 백린에 맞선 파업으로 해고
1909–1940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
1914.08반전 총파업 노선을 접고 「신성동맹」 수용, 조레스 장례식에서 연설
1919–1921베르사유 조약 노동 조항 기초, ILO 창설 참여; CGT 분열로 혁명파가 CGTU로 이탈
1936.03–06재통합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 서명, 조합원 100만에서 400만으로
1879년 민스크현 자즈베야에서 태어나 1903년 바르샤바 수의학교를 마쳤고, 수의사이자 마리나호르카 농업학교 교사로 일했다. 러일전쟁에 종군했고 벨라루스 사회주의 흐라마다에서 활동했다. 1917년 12월 제1차 전벨라루스 대회 의장으로 뽑혔고 대회가 해산될 때 체포되었다. 1918년 2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회담에 벨라루스 대표로 갔고, 3월 라다 의장이 되어 독립을 선포한 3월 24~25일 회의를 이끌었으며, 7~11월에는 인민서기국 의장을 지냈다. 1920년대 소비에트 벨로루시의 농업 부문에서 일하다 1930년 「벨라루스 해방동맹」 사건으로 체포되어 유형과 굴라크를 거쳤고, 1943년 석방된 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917년 6월 위기 뒤 그는 볼셰비키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요구하며 혁명의 방어를 주장했다.
미하일 리베르는 본명 미하일 골드만으로, 유대인 노동운동의 조직인 분트에서 성장해 멘셰비키의 주요 지도자가 된 혁명가였다. 그는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분트의 조직 자율성을 주장했고, 1917년에는 혁명적 방어주의와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결합하려 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와 전러시아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임시정부와의 연립을 옹호했으며, 6월 10일 시위 위기 뒤 볼셰비키에 대한 강경 조치를 요구하는 다수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10월 봉기와 볼셰비키와의 협상에 반대한 그는 이후 체포와 유배를 거듭했고, 1937년 처형된 뒤 사후 복권되었다.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기계공으로, 금속노동자 조합 서기를 거쳐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들어갔다. 1919년 1월 베린케이 정부의 국방장관이 되었고, 공산당과의 합당 협상에 참여했다. 평의회 공화국에서 국방 인민위원과 붉은군대 총사령관을 지냈고, 7월 빈 주재 공사로 가서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위임으로 협상국 사절단과 평의회 정부의 퇴진을 합의했다. 망명 뒤 빈, 체코슬로바키아, 스웨덴에서 살았고, 1946~1948년 스웨덴 주재 헝가리 공사를 지내다 사회민주당이 공산당에 통합되자 사임했다. 1949년 스톡홀름에서 죽었다.
유배지 루스코예 우스티예에 도착한 젠지노프는 일기에 썼다: '이곳은 물론 러시아지만, 17세기, 어쩌면 16세기의 러시아다.'
블라디미르 젠지노프는 러시아 사회혁명당의 중앙위원이자, 세 차례의 시베리아 유배를 북극 시베리아의 민족지·조류학 연구로 바꿔낸 언론인이었다. 1918년 사마라 제헌의회 위원회와 우파 디렉토리에서 볼셰비키와 콜차크 사이의 민주적 대안을 지지하다가 옴스크 쿠데타로 추방당했고, 이후 파리와 뉴욕에서 혁명과 내전의 경험을 기록하는 망명 언론인으로 살았다.
1946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공세가 이어지자 그는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니스트 베빈은 가난한 노동자에서 영국 최대 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성장한 노동운동가이자 노동당 정치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동력 동원을 조직한 경험은 전후 영국의 외교와 유럽 재건을 노동과 국가 역량의 문제로 보게 했다. 외무장관으로서 그는 조르주 비도와 함께 마셜의 하버드 연설에 대한 유럽의 대응을 조직하고, 영국의 안보와 서유럽 협력을 미국의 원조 및 대서양 동맹과 결합했다. 동시에 그의 강한 반공주의와 제국적 이해관계는 전후 질서의 국제주의가 해방과 지배를 함께 품었음을 보여 준다.
1881년 마르트빌리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대학 시절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들어가 멘셰비키가 되었고, 1907~1912년 제3대 국가 두마 의원을 지냈다. 1917년 11월부터 1918년 3월까지 자캅카스 인민위원부 의장을 지냈고, 이어 자캅카스 세임 정부에서 전쟁장관을 맡았다. 1918년 5월 그루지야 독립선언서에 서명했고, 그루지야 민주공화국에서 외무장관·법무장관과 정부 부의장을 지냈다. 1921년 3월 프랑스로 망명했고, 1953년부터 1954년 파리에서 숨질 때까지 망명정부를 이끌었다.
1921년 베틀렌–페이에르 협정으로 사회민주당의 합법 활동을 얻어 낸 헝가리 사회민주주의·노동조합 지도자
베스프렘주 바로실뢰드에서 태어난 기계공 출신으로 금속·광산 노동조합을 이끌었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광업 부문을 맡았고, 붕괴 뒤 페이들 정부의 내무장관과 후사르 정부의 노동·복지장관을 지냈다. 테러로 사회민주당이 선거를 거부하자 1920년 1월 사임하고 오스트리아로 피신했다. 1921년 귀국해 베틀렌 정부와 협정을 맺었고 1922~1944년 의원, 1927년부터 노동조합 평의회 서기장을 지냈다. 1944년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 전후 공산당과의 합당에 반대해 1947년 제명된 뒤 미국으로 망명했고 1956년 뉴욕에서 죽었다.
1918년 올테너 행동위원회를 조직해 의장을 맡고 총파업을 이끌었다. 군사재판에서 군인들에게 파업자 발포 명령을 거부하라고 촉구한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인쇄공 출신으로 스위스 사회민주당 좌파의 젊은 지도자가 되었고, 전쟁에 반대했다. 이탈리아 사회당과 함께 국제사회주의사무국과 별개인 반전 회의를 준비해 1915년 9월 치머발트 회의를 조직했고, 1915~1917년 치머발트 운동의 국제사회주의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17년 스위스 외무장관 호프만과 독일–러시아 강화 교섭에 관여한 사건으로 물러났다. 1918년 11월 스위스 총파업을 이끌어 투옥되었고, 뒤에 베른 주 정부와 연방의회에서 일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06–1909바젤 노동운동 비서로 일했다.
1911–1955연방의회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919~1920년에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