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기능·활동
국가·세력

인물이 많은 소속

모든 소속 50개

그리스

대한민국

독일

라오스

라트비아

러시아

루마니아

미국

베트남

소련

스페인

에티오피아

영국

오스트리아

우크라이나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일본

중국

체코슬로바키아

캄보디아

쿠바

폴란드

프랑스

핀란드

헝가리

정치적 입장(선택됨)
국적
출신 배경
시대

스테판 로베츠키

Stefan Paweł Rowecki
폴란드 국내군 반혁명 세력 폴란드 폴란드계 1895–1944 ✕ 옥중 살해

폭풍 작전의 정치적 조건을 읽은 지하군 지휘관

1942년 국내군 창설 명령에 따라 그는 통합된 지하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스테판 로베츠키는 폴란드의 직업군인이자 독일 점령기 국내군의 초대 총사령관으로, 분산된 저항 조직을 통합된 지하군으로 묶은 인물이다. 그는 독일군의 패퇴와 소련군의 진입이라는 상반된 조건 속에서 봉기를 구상했고, 1942년 국내군 창설 뒤 전면 봉기 계획을 발전시켰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된 뒤 독일의 반소 협력 제안을 거부했으며, 바르샤바 봉기 직후 작센하우젠에서 살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4–1917폴란드 군단 제1·제5 보병연대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 1919–1920폴란드군 참모장교로 폴란드-소련 전쟁에 참전
  • 1923–1926군사교육과학연구소 학술부장, 군사 주간지 《프셰글롱트 보이코비》 창간·편집
  • 1930–1935제55 포즈난 보병연대 지휘관
  • 1939–1940바르샤바 기갑자동차여단 지휘관, 승전복무단·무장투쟁연맹 지휘부
  • 1940–1942무장투쟁연맹 총사령관, 국내군 창설 준비
  • 1942–1943국내군 초대 총사령관, 전면 봉기와 폭풍 작전 구상
  • 1943–1944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작센하우젠에 수감

오스카르 디를레방어

Oskar Dirlewanger
나치당·나치 정권 파시스트·나치 독일 독일 1895–1945 ✕ 구타로 사망

볼라 학살에 가담한 SS 특수부대 지휘관

전과자들로 편성된 부대를 지휘한 무장친위대 지휘관. 1940년부터 점령한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지휘하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나치 독일의 SS 장교이자 전쟁범죄자. 1940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특수부대를 지휘했으며, 부대는 폴란드와 벨라루스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진압에 투입되어 볼라의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다. 그의 지휘 책임은 나치 점령정책과 SS·경찰 지휘체계 속에서 살펴야 한다.

상세 이력 보기
  • 1913뷔르템베르크군에 입대해 기관총수로 복무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위까지 올라 두 등급의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 1919–1921프라이코어단에 가담해 독일 혁명과 노동자 봉기·파업·공산주의자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 1922–1934프랑크푸르트 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나치당에 입당했으나, 1934년 미성년자 성범죄 등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당에서 제명되고 박사 학위와 군사 훈장을 박탈당했다.
  • 1937–1939콘도르 군단에 배속되어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고 세 차례 부상했으며, 이 복무를 근거로 1940년 유죄 판결이 취소되고 당籍이 회복되었다.
  • 1940밀렵 전과자들로 편성된 오라니엔부르크 밀렵부대를 인수해 지휘하기 시작했고, 이 부대는 특수부대로 개칭되어 점령한 폴란드에서 경비·반(反)빨치산 임무를 맡았다.
  • 1943부대의 연대급 확대가 인가되었고, 부대는 벨라루스에서 반(反)빨치산 작전을 벌이며 민간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 1944바르샤바 봉기 진압과 볼라 학살에 참가했고, 이어 슬로바키아 민족 봉기 진압에도 투입되었다.
  • 19452월 구벤 부근에서 소련군과 교전 중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으며, 4월에 부대를 버리고 탈영해 숨었다.

엔드레 라슬로

Endre László
헝가리 국가기관 파시스트·나치 헝가리 헝가리 1895–1946 ✕ 처형(교수형)

1944년 내무부 차관으로 버키 라슬로와 함께 헝가리 유대인의 게토 수용과 아우슈비츠 이송을 맡은 극우 관료

어보니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경기병 장교로 싸웠고,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MOVE 등 반혁명 단체에 가담해 잔혹함으로 이름났다. 1923년부터 15년 동안 괴될뢰 수석 군수, 1938년 페스트주 부지사를 지내며 반유대법이 미흡하다며 해수욕장 출입 금지 등을 독자적으로 가했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여로시 언도르 밑에서 내무부 차관이 되어 유대인 게토 수용과 이송에 폭넓은 권한을 받았고, 버키 라슬로와 함께 아이히만을 도와 5~7월 40만 명이 넘는 헝가리 유대인을 이송했다. 9월 해임되었으나 화살십자당 집권 뒤 작전 지역 민정 담당 정부위원이 되었다. 1945년 달아났다가 미군에 붙잡혀 넘겨졌고, 1946년 사형 선고를 받아 교수형을 당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8경기병 장교
  • 1919–1921반혁명 단체 활동
  • 1923–1938괴될뢰 수석 군수
  • 1938–1944페스트주 부지사
  • 1944내무부 행정 차관
  • 1944–1945작전 지역 민정 담당 정부위원
  • 1946인민재판소 사형 선고, 처형
폴란드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폴란드 폴란드계 1895–1960 ○ 자연사

봉기의 동원과 개시를 맡은 국내군 지휘관

1944년 7월 말, 그는 지하 병력을 봉기에 맞춰 동원하고 8월 1일 개시 명령을 내렸다.

안토니 흐루시치엘은 폴란드군 장교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바르샤바 지구 국내군을 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1944년 7월 25일 봉기 승인을 받은 뒤 지하 병력의 동원을 준비하고 현지 개시 시기를 판단했으며, 8월 1일 봉기가 시작되자 수도의 무장 부대를 지휘했다. 그러나 외부 지원과 독일군의 붕괴를 낙관한 그의 판단은 봉기의 장기화와 군사적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전후에는 포로수용소를 거쳐 서방으로 망명했고, 공산 당국의 시민권 박탈을 겪은 뒤 워싱턴에서 생을 마쳤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제90보병연대 장교
  • 1919–1927폴란드군 제14·42보병연대 지휘관
  • 1931–1937보병훈련소와 육군대학 전술 강사
  • 1938–1939폴란드군 제82 시베리아 소총연대장
  • 1940–1941무장투쟁연맹 제3부장, 바르샤바 지구 참모장
  • 1941–1944바르샤바 지구 국내군 사령관
  • 1944바르샤바 봉기 전군 지휘관, 바르샤바 국내군단 사령관
  • 1945–1948서방 폴란드군 참모·재향군인 조직 간부

타데우시 부르코모로프스키

Tadeusz Bór-Komorowski
폴란드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폴란드 폴란드인 1895–1966 ○ 자연사

봉기의 명령과 항복을 함께 감당한 국내군 지휘관

1944년 10월 5일, 그는 항복한 국내군 부대의 선두에 서서 바르샤바를 떠나 포로가 되었다.

타데우시 부르코모로프스키는 제2차 세계대전기 폴란드 국내군을 이끈 군인이자 런던 망명정부의 정치 지도자였다. 그는 소련군의 진격 속에서 독립국가의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정치적 목표로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봉기를 명령했지만, 서방 연합국의 제한된 지원과 소련군의 개입 부재 속에서 봉기는 고립되었다. 그는 1944년 10월 항복 협상을 승인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전후에는 망명정부 총리로서 패전국이 된 폴란드의 국가적 연속성을 지키려 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기병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
  • 1918–1939폴란드군 기병 장교, 그루지옹츠 기병훈련센터 지휘관
  • 1939–1941크라쿠프 지역 지하조직과 서부지역 전구 지휘
  • 1941–1943국내군 부사령관
  • 1943–1944국내군 총사령관, 바르샤바 봉기 명령
  • 1944–1947폴란드군 총사령관, 독일군 포로 생활 포함
  • 1947–1949런던 폴란드 망명정부 총리
  • 1956–1966망명 폴란드 정치권의 삼인평의회 위원

표도르 이바노비치 트루힌

Фёдор Иванович Трухин

전선 참모에서 반소 무장조직 지도자로 전향한 장군

1941년 가을, 포로가 된 그는 독일 당국에 적군 후방의 '철도·창고 등'을 타격하여 보급과 지휘를 마비시킬 부대의 창설을 제안했다.

트루힌은 러시아 제국군 장교 출신으로 적군에서 경력을 쌓아 군사교육과 참모 업무를 맡은 장군이었다.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때 발트 군관구와 북서전선의 작전 지휘 체계에서 복무했으나, 전선 후퇴 중 포로가 되었다. 그는 포로 상태에서 독일 당국과 협력하고 블라소프의 러시아 해방군 및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군사조직의 참모장으로 활동했다. 전쟁 뒤 소련에 넘겨져 반역죄로 처형되었으며, 그의 이력은 전문 군사 관료의 지식이 독일 점령전과 반소 무장 프로젝트에 전용된 사례를 보여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916–1917러시아 제국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8–1921적군 중대·대대·연대 지휘관, 내전에 참전
  • 1922–1925적군 군사아카데미 수학
  • 1932–1936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관 및 전투훈련 방법론 학과장
  • 1937–1940총참모부 군사아카데미 고급 교관, 소장 진급
  • 1940–1941적군 전투훈련국 부국장, 발트 군관구 작전부장 겸 참모차장
  • 1941.06북서전선 참모차장, 리투아니아에서 포로가 됨
  • 1943–1945다벤도르프 러시아 해방군 학교장, 러시아 인민해방위원회 군사조직 참모장

마크 W. 클라크

Mark W. Clark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계 1896–1984 ○ 자연사

전쟁의 성과와 민간인 피해 사이에 선 연합군 지휘관

1953년 7월 27일, 마크 W. 클라크는 판문점 정전협정에 유엔군사령부 대표로 서명했다.

마크 W. 클라크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지휘한 미국 육군 장성으로, 연합전의 참모 역량과 현장 지휘를 함께 보여 준 인물이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로마 점령과 독일군 항복을 이끌었지만, 라피도강 작전과 몬테카시노 폭격을 둘러싸고 작전 판단과 민간 유산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전쟁 말기 유엔군사령관으로서 공세와 정전협상을 병행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유엔군 측 대표로 서명했다. 그의 경력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 추구가 연합 지휘체계와 전쟁의 파괴성을 어떻게 함께 드러냈는지를 보여 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미 육군 보병 소위
  • 1942북아프리카 연합군 작전 부사령관
  • 1943–1944미 제5군 사령관, 이탈리아 전선
  • 1944–1945제15군집단 사령관, 이탈리아
  • 1945–1947오스트리아 미군 점령군 총사령관
  • 1947–1949미 제6군 사령관
  • 1949–1952미 육군 야전군 사령관
  • 1952–1953유엔군사령부·극동군사령부 총사령관

살러시 페렌츠

Szálasi Ferenc

화살십자당 지도자, 1944년 독일이 세운 「민족 지도자」

커셔(지금의 코시체)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복무했고, 1925년 참모본부에 들어갔다. 1930년대 초 트리아농 이전 국경 회복을 내건 「헝가리주의」를 주창하며 정치에 뛰어들어 1935년 군을 떠났고, 1937년 헝가리 국가사회주의당을 세웠다. 1938년 투옥된 사이 화살십자당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당은 1939년 선거에서 의석 30석을 얻었다. 1944년 10월 독일이 호르티를 끌어내리자 국가 지도자가 되어 중단된 유대인 이송을 재개했고, 그의 민병대는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다. 1945년 5월 오스트리아에서 미군에 붙잡혀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6년 3월 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1차 세계대전 복무
  • 1925–1935헝가리군 참모본부 장교
  • 1937헝가리 국가사회주의당 창당
  • 1938–1940투옥 중 화살십자당 지도자로 추대, 1940년 사면
  • 1944–1945「민족 지도자」, 국민통합정부 수반
  • 1946인민재판소에서 사형 선고, 처형

파보 탈벨라

Paavo Talvela
핀란드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핀란드 핀란드인 1897–1973 ○ 자연사

만네르헤임의 베를린 밀사로 핀란드와 독일의 군사 협력을 매듭지은 예거 장군

1944년 휴전 후 힘러가 핀란드 무장 저항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자, 탈벨라는 '만네르헤임 원수의 명령이 있을 경우에만' 응하겠다고 답했다.

핀란드 예거 운동으로 군에 입문한 탈벨라는 겨울전쟁에서 톨바얘르비 전투의 첫 승리를 지휘하며 장군으로 급부상했다. 1940년 가을 만네르헤임의 개인 대리인으로 베를린에 파견되어 독일 참모본부와 핀란드군의 비밀 군사 협력을 협상했고, 이는 계속전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전후 사업가와 헬싱키 시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두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장 수훈자로서 1966년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6예거 지원병, 제27프로이센 예거대대
  • 1918백군 대대장, 핀란드 내전; 소령
  • 1919–1922아우누스 원정군 총사령관; 비에나 원정군 대대장
  • 1926–1927사보 예거연대장
  • 1939.12–1940.04탈벨라 전단장(톨바얘르비 승리), 이어 제3군단장; 소장
  • 1940.09만네르헤임의 개인 대리인으로 베를린 파견, 독일-핀란드 군사 협력 협상
  • 1941.06–1942.01제6군단장, 카렐리야군; 만네르헤임 십자장 수훈(1941.8.3)
  • 1942–1944독일 최고사령부 주재 핀란드군 대표; 중장; 1944년 아우누스 전단 사령관

자크 도리오

Jacques Doriot
프랑스 공산당 파시스트·나치 프랑스 프랑스 1898–1945 ✕ 기총소사로 사망

인민전선을 가장 먼저 요구하고 파시스트로 끝난 생드니의 공산주의자

1934년 4월 그는 코민테른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요구했다. 6월에 제명되었고, 7월에 당은 그가 요구한 바로 그 협정에 서명했다

생드니의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스물여섯에 하원의원이 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까지 오른 프랑스공산당의 젊은 지도자. 리프 전쟁 반대 선동으로 투옥되었고 1927년에는 코민테른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1931년부터 생드니 시장을 지냈다. 1934년 2월의 위기 직후 그는 당론에 앞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공개로 요구했고, 모스크바의 소환을 거부해 6월 27일 제명되었다. 한 달 뒤 당은 그가 요구한 것과 같은 통일행동협정에 서명했지만 그는 이미 밖에 있었다. 1936년 프랑스인민당(PPF)을 세워 파시즘 쪽으로 옮겨 갔고, 1941년 반볼셰비키 프랑스의용군단에 참여해 독일군복을 입고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며, 1945년 2월 독일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를 맞고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8우아즈 브렐에서 노동자 집안에 출생
  • 1915–1922생드니의 금속노동자, 공산주의 청년운동에 투신
  • 1923–1924공산주의청년인터내셔널 지도부, 1924년 하원의원 당선
  • 1925리프 전쟁 반대 선동으로 투옥
  • 1927코민테른 특사로 중국 파견
  • 1931–1937생드니 시장
  • 1934.02–06사회당과의 공동행동 공개 요구, 모스크바 소환 거부, 6월 27일 제명
  • 1936프랑스인민당(PPF) 창당
  • 1941–1944반볼셰비키 프랑스의용군단 참여, 독일군복으로 동부전선 종군
  • 1945.02독일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로 사망

버키 라슬로

Baky László
헝가리 국가기관 파시스트·나치 헝가리 헝가리 1898–1946 ✕ 처형(교수형)

헌병대 출신의 국민사회주의자로, 1944년 내무부 차관으로서 엔드레 라슬로와 함께 유대인 이송을 맡은 인물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사관학교를 나와 제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싸웠고, 1919년 세게드에서 폭력적인 반혁명 활동으로 이름을 얻은 뒤 헌병대 지도자로 떠올랐다. 1938년 헌병 소장으로 물러나 헝가리 국민사회주의당에 들어갔고, 1939년 의원이 되었으며 독일 자금의 신문 『머저르샤그』 편집인이 되었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내무부 정무 차관이 되어 엔드레 라슬로와 함께 유대인 이송을 맡았고, 4월 4일 아이히만 특무대와의 회의를 주재해 유대인 재산을 빼앗고 도시 게토로 옮긴 뒤 독일로 이송하기로 정했다. 여름에 해임되고 반호르티 쿠데타 모의로 체포되었으나 화살십자당 집권 뒤 국가보안국장이 되었다. 1945년 오스트리아에서 붙잡혀 넘겨졌고, 1946년 교수형을 당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장교
  • 1919–1938헌병 장교, 소장으로 퇴역
  • 1939–1944국회의원, 『머저르샤그』 편집인
  • 1944내무부 정무 차관
  • 1944–1945국가보안국장
  • 1946인민재판소 사형 선고, 처형

앙리 나바르

Henri Navarre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98–1983 ○ 자연사

프랑스 극동원정군의 마지막 사령관으로 디엔비엔푸 요새화를 결정해 1954년 패배를 맞은 장군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프랑스군을 투입하고 요새화를 명령한 나바르는 1954년 3월 시작된 포위전에서 철수를 명하지 않았으며, 5월 요새가 함락되어 프랑스의 협상 입지가 무너졌다.

1차·2차 세계대전을 치른 프랑스 육군 장군으로, 1953년 5월 살랑의 뒤를 이어 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부임 직후 본국 정부에 이 전쟁은 이길 수 없고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교착이라고 보고했다. 도시와 주요 도로를 지키며 베트민을 협상으로 몰아넣는다는 「나바르 계획」에 따라, 라오스로 가는 베트민의 길목을 막으려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낙하산 부대를 내려 요새를 세웠다. 1954년 5월 요새가 함락되면서 프랑스의 패배가 결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6–1918생시르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제1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기병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 1942–1945독일에 맞선 활동으로 소환되자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프랑스 해방전에서 제1군 기갑연대를 지휘했다.
  • 1945–1953준장이 되어 독일에서 복무했으며 제5기갑사단장과 알퐁스 쥐앵 원수 참모장을 지냈다. 1948~1949년에는 알제리에서 사단을 지휘했다.
  • 1953–1954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사령관으로서 디엔비엔푸 전투를 지휘했으며, 요새 함락 뒤 교체되었다.
  • 1956육군에서 퇴역하고 인도차이나 전쟁에 관한 저서 《인도차이나의 고통》을 출간했다.

라울 살랑

Raoul Salan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99–1984 ○ 자연사

인도차이나 전쟁의 프랑스군 사령관이자 OAS 지도자였다.

살랑은 1952~1953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한 뒤 알제리 주재 프랑스 정부 대표를 맡았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해 1961년 4월 장군들의 쿠데타에 가담하고, 실패 뒤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지를 주장하는 비밀 무장조직 OAS를 창설·지휘했다. OAS는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테러와 폭력을 벌였다. 1962년 체포되어 종신 구금형을 받았으며, 1968년 사면·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2–1953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총사령관
  • 1958–1960알제리 주재 프랑스 정부 대표
  • 1961–19624월 쿠데타 가담, 이후 OAS 지도자
  • 1962체포되어 종신 구금형 선고
  • 1968사면·복권

하인리히 힘러

Heinrich Himmler

나치 인종국가의 핵심 설계자

1943년 10월 포젠에서 그는 친위대 장교들에게, 시체 백 구에서 천 구를 견디며 '품위 있는 자'로 남은 것이 '기록되지도, 기록될 수도 없는 영광의 장'이라고 말했다.

하인리히 힘러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와 경찰 체계를 확장해 인종주의적 지배와 대량학살을 관료적으로 조직한 핵심 지도자였다. 그는 강제수용소와 절멸정책, 점령지의 학살 부대를 통솔하며 유대인과 여러 집단에 대한 집단살해를 실행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에는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을 살해·추방하는 독일의 보복 작전을 승인하고 지시했다. 전쟁 말기 서방과의 독자적인 협상을 시도하다 히틀러에게 해임됐고, 영국군에 체포된 뒤 자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3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에 가입하고 뮌헨 폭동에 가담했다.
  • 1925친위대에 가입했다.
  • 1929–1945제국지도자 친위대로서 친위대를 지휘했다.
  • 1936–1945독일 경찰장으로서 경찰과 정치탄압 기구를 장악했다.
  • 1943–1945내무장관을 겸임했다.
  • 1944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도시 파괴와 주민 학살·추방 작전을 지시했다.
  • 1945서방과의 독자 협상 시도로 해임되고 체포 뒤 자살했다.

카를 프리드리히 오토 볼프

Karl Friedrich Otto Wolff

나치 SS의 고위 조정자이자 전쟁 말기의 협상 대표

1945년 3월 8일, 볼프는 스위스에서 앨런 덜레스와 북이탈리아 항복 조건을 논의했다.

카를 볼프는 나치 독일의 고위 SS 장교로,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참모장을 지내며 정권의 핵심 의사결정과 범죄에 접근했다. 이탈리아 점령기에 최고 SS·경찰 지도자로서 유대인 검거와 강제노동, 저항운동 탄압을 관할했고, 그 책임을 전후 협상 참여로 지울 수는 없었다. 1945년 스위스에서 미국 OSS의 앨런 덜레스와 비밀 협상인 작전 선라이즈를 진행해 북이탈리아 독일군의 조기 항복을 이끌었지만, 그 영향력과 동기는 제한적으로 평가된다. 전후에는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1920독일 제국군 제115 보병연대 장교 후보생, 서부전선 복무
  • 1931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과 SS 가입
  • 1935–1943SS 국가 지도자 개인참모장
  • 1943–1944이탈리아 최고 SS·경찰 지도자
  • 1944–1945이탈리아 주둔 독일군 전권대장
  • 1945작전 선라이즈 독일 측 협상 대표, 북이탈리아 항복 관여
  • 1964–1969뮌헨 법원에서 유대인 30만 명 살해 방조죄로 15년형, 1969년 석방

응오딘지엠

Ngô Đình Diệm

바오다이를 몰아내고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가 1963년 쿠데타 때 살해된 정치가

1955년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남베트남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가족을 정권 요직에 기용하고 반대파를 투옥·처형했다. 1963년 불교도 시위가 확산하자 미국은 지원을 거두었고, 군부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후에의 가톨릭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식민지 관리를 지낸 반공 민족주의자였다. 1954년 6월 제네바 회의 도중 바오다이가 베트남국 총리로 임명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1955년 국민투표로 바오다이를 몰아내고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제네바 협정이 약속한 1956년 통일 선거는 치러지지 않았다. 가족 중심의 권위주의 통치와 불교도 탄압으로 반발을 샀고, 1963년 미국 중앙정보국이 지지한 쿠데타 때 붙잡혀 살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3바오다이 황제 정부에서 내무장관을 지냈으나 프랑스가 개혁을 거부하자 사임했다.
  • 1954–1955바오다이의 요청으로 베트남국 총리를 지냈다.
  • 1955–1963정부가 통제한 국민투표에서 바오다이를 축출한 뒤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대통령으로 통치했다. 1956년 전국 자유선거를 규정한 제네바 협정을 이행하지 않았다.

풀헨시오 바티스타

Fulgencio Batista
쿠바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쿠바 쿠바인 1901–1973 → 혁명으로 축출 · 망명

선거와 군부 사이에서 권력을 전환한 쿠바 지배자

1959년 1월 1일, 반군이 수도로 진격하자 바티스타는 대통령직을 버리고 쿠바를 떠났다.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가난한 농촌 출신의 군인·정치가로, 1933년 하사관 반란 뒤 쿠바 정치를 좌우했다. 1940년에는 새 헌법 아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회개혁과 연합국 지원을 추진했지만, 1952년 선거 패배가 예상되자 쿠데타로 권력을 되찾았다. 그의 두 번째 통치는 헌정과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미국 자본 및 하바나의 조직범죄와 결탁한 권위주의 정권이었으며, 불평등과 탄압은 무장 저항을 키웠다. 1959년 쿠바 혁명으로 축출된 그의 망명은 이후 미·쿠바 대립이 심화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쿠바 육군 사병
  • 1923–1933농촌경비대 속기사 하사
  • 1933–1940쿠바 육군 참모총장, 실권자
  • 1940–1944쿠바 헌정 대통령
  • 1948–1952쿠바 상원의원
  • 1952–1959쿠바 대통령, 군사독재자
  • 1959–1973망명 생활, 포르투갈·스페인
일본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일본 일본 1902–1961 ✕ 라오스에서 실종

국경 방침서로 할힌골 사건을 일으킨 관동군 참모

다나카 류키치 장군은 전후 증언에서 '대미 전쟁을 가장 단호하게 주장한 단 한 사람이 쓰지 마사노부였다'고 밝혔다.

관동군 작전참모였던 쓰지 마사노부는 스스로 작성한 국경 방침서로 1939년 할힌골 사건을 일으켜, 아래로부터의 월권(게코쿠조)으로 소련과의 국경전쟁을 밀어붙였다. 할힌골 패배 뒤에는 소련의 화력을 목격한 경험을 근거로 대소전을 반대하면서도, 도리어 대미 개전의 가장 강경한 주창자가 되었다. 말레이 작전 입안자이자 바탄 죽음의 행진·숙칭 학살의 주모자였던 그는 전범 재판을 피해 도주했다가 귀국해 중의원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4통제파(도세이하) 활동, 황도파 쿠데타 저지
  • 1937–1939관동군 작전참모
  • 1939.04「국경 방침서」 작성, 할힌골 사건 유발
  • 1941참모본부 작전과, 대미 개전 주창
  • 1941–1942말레이 공세 입안, 싱가포르 함락, 숙칭 학살
  • 1942바탄 죽음의 행진, 과달카날 공세
  • 1952중의원 의원 당선(재선)

크리스티앙 드 카스트리

Christian de Castries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902–1991 ○ 자연사

1954년 디엔비엔푸 요새를 지휘하다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된 프랑스 장군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해 패전 뒤 포로가 되었다. 석방 후 사단장과 기업 경영자를 거쳐 군에서 은퇴했다.

프랑스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 기병 장교로, 2차 세계대전을 거쳐 인도차이나 전쟁에 참전했다. 1953년 12월 디엔비엔푸 요새의 지휘를 맡았다. 1954년 3월 13일 베트민의 공격이 시작되어 비행장이 포격으로 부서지고 우기로 보급이 끊기자 요새는 3개 거점만 남았다. 5월 7일 하노이의 코니 장군은 백기를 들지 말고 사격을 멈춘 뒤 장비를 파괴하라고 명령했고, 카스트리는 요새 함락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제네바 협정 뒤 풀려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23육군에 입대해 소뮈르 기병학교에서 수학했다.
  • 1926기병 장교로 임관했다가 승마 스포츠를 위해 군을 떠났다.
  • 1940–1945제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군에 복귀해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했다.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와 독일에서 연합군과 싸웠으며, 전쟁 말기에는 제3 모로코 스파히 기병대를 지휘했다.
  • 1946인도차이나에 파견되어 모로코 구미에르 대대를 지휘했다.
  • 1953–1954부상으로 프랑스에서 1년간 요양한 뒤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대령으로 디엔비엔푸 방어를 맡았고, 포위전 막바지에 준장으로 승진했다. 프랑스군은 1954년 5월 7일 패배했고, 그는 제네바 휴전 협정이 마련되는 동안 4개월간 포로로 억류됐다.
  • 1954–1959귀국 후 서독 주둔 제5기갑사단을 지휘했다. 1959년 교통사고 뒤 군에서 은퇴했다.
  • 1991파리에서 사망했다.

하인츠 라이네파르트

Heinz Reinefarth

바르샤바 봉기의 학살을 지휘한 SS 장군

라이네파르트는 바르샤바 봉기 진압 보고에서 “죽일 탄약보다 포로가 더 많다”고 썼다.

하인츠 라이네파르트는 나치당과 SS에 가입해 법률가에서 독일 점령전쟁의 지휘관으로 전환한 인물이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서 그는 전투부대와 경찰·보안 병력을 묶은 전투단을 지휘했고, 8월 5일 볼라 공격과 민간인 집단살해의 현장 지휘 구조에 핵심적으로 관여했다. 전후 폴란드의 송환 요구에도 기소와 유죄 판결을 피한 그는 서독에서 시장과 주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경력은 전쟁범죄 지휘 책임과 전후 사회의 면책이 한 인물 안에서 이어진 사례다.

상세 이력 보기
  • 1927예나에서 법학을 마치고 법률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 1932나치당과 SS에 가입했다.
  • 1942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에서 SS 민정 행정감찰관을 맡았다.
  • 1944바르테란트 SS·경찰고등지도자가 되었다.
  • 1944.08바르샤바 봉기 진압 전투단을 지휘했다.
  • 1945퀴스트린 요새 사령관을 맡았고 미군에 체포되었다.
  • 1951–1964베스터란트 시장을 지냈다.
  • 1962–1967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조지 F. 케넌

George F. Kennan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04–2005 ○ 자연사

1946년 장전문과 X 논문으로 봉쇄 정책을 설계한 미국 외교관·역사가

「소련에 대한 미국 정책의 주요 요소는 러시아의 팽창 경향에 대한 장기적이고 인내심 있으면서도 단호하고 경계하는 봉쇄여야 한다」, 1947년 X 논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역사가로, 1946년 모스크바에서 국무부에 보낸 '장전문'과 1947년 《포린 어페어스》에 발표한 X 논문에서 소련의 팽창을 장기적·인내심 있게 봉쇄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으로서 마셜 플랜의 설계에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트루먼 독트린과 NATO로 이어지는 냉전 초기 미국 대외정책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신이 설계한 봉쇄가 군사적 대결로 변질되자 평생 비판자로 돌아섰고, 베트남 전쟁과 NATO 확장에 공개 반대하며 현실주의적 외교를 주장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국무부 외교관으로 임용
  • 1933–1936주소 미국대사관 3등서기관
  • 1944–1946주소 미국대사관 공사참사관, '장전문' 송신
  • 1947–1949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 마셜 플랜 설계, X 논문 발표
  • 1952주소 대사, 페르소나 논 그라타 선언
  • 1956–2005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외교사 저술
  • 1961–1963주유고슬라비아 대사

커티스 E. 르메이

Curtis LeMay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06–1990 ○ 심장마비

일본을 불태우고 상대에게 핵폭격을 주장한 공군 원수

클레이가 '석탄이라도 실어날라 줄 수 있겠소?' 하고 묻자 르메이는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에 대한 전략폭격을 지휘한 인물로,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을 시작으로 66개 도시를 소이탄으로 태웠다. 1948년 미 유럽공군 사령관으로서 베를린 봉쇄에 맞서 루시우스 클레이에게 '우리는 무엇이든 실어나를 수 있다'고 답하며 공수의 첫 단계를 세웠다. 이어 전략공군사령부(SAC)를 맡아 핵전력 중심의 제트 공군으로 개편했고, 1961년 공군 참모총장이 되어 쿠바 위기 때 미사일 기지 폭격을 주장했다. 은퇴 후에는 인종분리주의자 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1968년 대선에 나섰다.

상세 이력 보기
  • 1942제305폭격단장, 유럽 전선
  • 1944–1945제21폭격사령부 지휘관, 일본 소이탄 공습
  • 1947–1948미 유럽공군(USAFE) 사령관, 베를린 공수 개시
  • 1948–1957전략공군사령부(SAC) 사령관
  • 1957–1961미 공군 부참모총장
  • 1961–1965미 공군 참모총장
  • 1968조지 월리스의 부통령 후보

린든 B. 존슨

Lyndon B. Johnson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908–1973 ○ 자연사

개혁과 전쟁 사이의 냉전 대통령

1968년 7월, 미국과 소련이 전략무기 제한 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린든 B. 존슨은 의회에서 다져진 협상력으로 미국의 국내 개혁과 냉전 전략을 함께 밀어붙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민권법과 투표권법, 메디케어를 포함한 ‘위대한 사회’를 확장했지만, 베트남전의 확대는 그 성과를 압도하는 역사적 책임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경쟁을 지속하면서도 소련과 전략무기 제한을 모색해 1967년 글래스버러 정상회담과 1968년 전략무기 협상 합의로 훗날 SALT로 이어질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물러난 마지막 해에도 베트남 평화협상과 군비통제를 병행하려 했으나, 합의의 결실은 후임 정부가 거두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7–1949텍사스 제10선거구 연방 하원의원
  • 1949–1951텍사스주 연방 상원의원
  • 1951–1953상원 민주당 원내총무
  • 1953–1955상원 민주당 원내대표
  • 1955–1961상원 다수당 원내대표
  • 1961–1963미국 부통령
  • 1963–1969미국 제36대 대통령

오토 스코르체니

Otto Skorzeny

나치 특수작전의 지휘관이자 선전의 산물

그란사소에서 무솔리니 앞에 선 장면은 실제 지휘권보다 선전의 공로가 더 크게 기록된 순간이었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스코르체니는 Waffen-SS 장교로서 나치 독일의 사보타주와 특수작전을 지휘했다. 1943년 그란사소 작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위치를 찾고 SS 분견대를 이끌어 현장에 참여했지만, 작전 전체의 계획과 지휘는 공수부대 장교 하랄트 모르스와 쿠르트 슈투덴트의 몫이었다. 나치 선전은 그를 ‘무솔리니의 구출자’로 내세웠고, 그는 헝가리 정권 전복과 아르덴 공세의 위장작전에도 관여했다. 전후 전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스페인에서 극우 네트워크와 연결되며 살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32오스트리아 나치당 가입
  • 1938오스트리아 병합 과정에서 SS 대원으로 활동
  • 1943RSHA 제6국 특수공작 부문 지휘
  • 1943그란사소 작전에서 SS 분견대 지휘
  • 1944헝가리 판처파우스트 작전 관여
  • 1944아르덴 공세 그라이프 작전 지휘
  • 1947다하우 군사재판에서 무죄 판결
  • 1953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의 군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