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주의

민족의 독립·통합·국가주권을 중심으로 정치사상을 전개한 인물들입니다. 삼민주의·드골주의·투르키스탄 민족주의와 권위주의적·극우 민족주의 등 서로 다른 흐름을 포함하며, 이들을 같은 정책이나 가치관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반식민 해방운동과 파시즘의 구체적 경력은 각각의 입장 모음에서도 구분해 살펴봅니다.

13 명

소속 인물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다닐렙스키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Данилевский
민족주의 러시아 러시아 1822–1885 ○ 심부전

문화-역사적 유형론으로 러시아 문명의 독자성을 논증한 범슬라브주의 철학자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와 유럽』을 '모든 러시아인의 책상 위 필독서'라 불렀다.

러시아 문명주의 역사철학의 창시자. 주저 『러시아와 유럽』(1869)에서 세계사를 문화-역사적 유형의 순환으로 파악하고 슬라브 유형을 독자 문명으로 정립했다. 젊은 시절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푸리에 사상을 연구하다 체포·구금되었으나 보수로 전향, 범슬라브주의를 체계화하여 포베도노스체프·카트코프와 함께 구체제 이데올로기 지형을 형성했다. 도스토옙스키가 '모든 러시아인의 필독서'라 칭했고 슈펭글러·토인비의 문명론을 선취한 이 저작은 러시아 보수사상사의 핵심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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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6–1843차르스코예 셀로 리체움 졸업
  • 1843–1849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자유청강;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푸리에 사상 강의
  • 1849체포·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100일 구금 후 볼로그다 유배
  • 1852–1881어업·해양 원정 지휘(볼가·카스피·백해·아조프·북극해); 러시아 어업법 체계화; 콘스탄티노프 메달(1866)
  • 1869『러시아와 유럽』 출간 — 문화-역사적 유형론으로 국제적 명성
  • 1879–1885니키츠키 식물원장(1879–1880); 『다위니즘』(1885) 출간; 티플리스에서 사망

쑨원

孙中山
중국국민당 민족주의 중국 중국 1866–1925 ○ 간암

중화민국의 「국부」, 삼민주의와 제1차 국공합작을 설계한 혁명가

청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1911년 신해혁명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임종에서 직접 구술한 유언에서도 소련과의 우호를 거듭 밝혔다.

광둥 출신으로 하와이와 홍콩에서 교육받고 의사가 되었다. 1894년 흥중회, 1905년 도쿄에서 동맹회를 조직해 청 타도와 공화국 수립을 내걸었고, 1911년 신해혁명 뒤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곧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겼다.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를 제창했으며 1923년 소련의 요페와 공동선언을 내고 소련의 원조와 공산당원의 개인 자격 입당을 받아들여 제1차 국공합작을 열었다. 1925년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했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모두 그의 유산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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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2중국동맹회 총리
  • 1912.01–03중화민국 임시대총통
  • 1919–1925중국국민당 총리

얀 퇴니손

Jaan Tõnisson
민족주의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1868–1941? 실종 · 사망 추정

타르투 강화를 체결한 에스토니아 총리, 「포스티메스」의 발행인

1940년 6월 소련의 점령이 닥치자 그는 페츠 대통령에게 상징적으로라도 무장 저항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포스티메스」를 이끈 에스토니아 자유주의 민족운동의 대표로 1919~1920년 총리를 지내며 타르투 강화를 체결했다. 1934년 페츠의 권위주의 체제에 반대해 밀려났고 1940년 소련 점령 뒤 체포되어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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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포스티메스」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민족운동의 기관지로 키움
  • 1906러시아 제1두마 의원, 비보르크 호소 서명
  • 1917에스토니아 임시지방의회(마패브) 의원
  • 1919–1920총리로 타르투 강화 조약 체결
  • 1923–1925리가코구 의장
  • 1927–1928국가원로
  • 1931–1932외무장관
  • 1933국가원로(마지막 정부)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

Stanisław Grabski
민족주의 폴란드 폴란드인 1871–1949 ○ 자연사

민족국가 구상을 밀어붙인 엔데치아 이론가

리가 협상에서 민스크를 포기한 선택은 폴란드의 동방정책을 연방국가 구상에서 민족국가 구상으로 돌렸다.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는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젊은 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국가민주주의 진영의 핵심 이론가가 되었다. 그는 폴란드의 독립과 국가 통합을 민족적 동질성에 강하게 결부했고, 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 등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연방 구상에 비판적이었다. 1920년 민스크와 리가 협상에서 그는 민스크를 요구하지 않는 노선을 지지해 피우수트스키의 동방 연방 구상을 약화시키고 리가 국경의 민족국가적 틀을 굳혔다. 이후 교육장관과 망명 정부·전후 국가기구의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1926년 이후 엔데치아와 거리를 두며 정치적 입장을 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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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3사회주의 운동가, 노동자 교육·비합법 노동조직 활동
  • 1906–1914국가민주당 지도자, 러시아 제국 두마 폴란드 문제 자문
  • 1919–1923폴란드 하원 의원, 국민민주 진영 원내·당 지도자
  • 1920–1921민스크·리가 평화협상 폴란드 대표, 민족국가 노선 주도
  • 1923–1925종교·공교육 장관
  • 1942–1944폴란드 망명정부 국가평의회 의장
  • 1945–1947국가민족평의회 부의장

안타나스 스메토나

Antanas Smetona
리투아니아 국가기관 민족주의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1874–1944 ✕ 화재 사망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을 주도한 초대 대통령, 뒤에 1926년 쿠데타의 지도자

궁을 떠나기 전 그는 "나는 내 손으로 리투아니아를 볼셰비키 국가로 만들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리투아니아 평의회 의장으로 1918년 독립 선언에 서명하고 1919년 초대 대통령이 되어 붉은 군대, 베르몬트군, 폴란드군과 싸우는 첫 정부들을 이끌었다. 1926년 쿠데타로 권위주의 체제를 세웠고 1940년 소련 점령 뒤 미국으로 피해 1944년 화재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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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빌뉴스에서 기자·민족운동 활동
  • 1917리투아니아 평의회 의장
  • 1918리투아니아 독립법(2월 16일) 서명
  • 1919리투아니아 초대 대통령
  • 1925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 연합 의장
  • 192612월 쿠데타 주도, 대통령 복귀 뒤 권위주의 통치

카를리스 울마니스

Kārlis Ulmanis

라트비아 독립전쟁의 총리, 뒤에 1934년 쿠데타의 독재자

점령 당일 라디오 연설에서 저항을 금하며 "나는 내 자리에 남고, 그대들도 그대들의 자리에 남으시오."라고 했다.

1918년 11월부터 라트비아 임시정부 총리로 소비에트군, 독일계 쿠데타, 베르몬트군을 차례로 넘기고 1920년 리가 강화와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1934년 쿠데타로 독재를 세웠고 1940년 소련에 강제이송되어 1942년 감옥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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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1라트비아 임시정부 초대 총리
  • 1920리가 강화 조약과 토지개혁 주도
  • 1918–1934농민연합 지도자로 총리·외무장관 여러 차례 역임
  • 1934-05군과 아이스사르기 동원, 무혈 쿠데타
  • 1936-04'민족의 지도자' 자처, 대통령 겸 총리
  • 1939-10소련군 기지 배치를 허용한 상호원조조약 서명
  • 1940-07소련 점령 뒤 퇴위, 7월 강제이송
  • 1942크라스노보츠크 감옥에서 사망

리투아니아 초대 총리, 뒤에 극우 「철의 늑대」의 지도자

1928년 국민회의를 해산하자 그는 "선거를 약속했을 뿐, 언제 열지는 약속하지 않았다"고 농담했다.

1918년 11월 리투아니아 첫 내각의 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었고 이후 파리와 국제연맹에서 빌뉴스 문제를 다투었다. 1926년 쿠데타 뒤 다시 총리가 되어 극우 「철의 늑대」를 이끌다 스메토나와 갈라졌고, 1942년 소련 감옥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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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역사·철학부 석사 학위 수여
  • 1916페름 대학 교수, 국민진보당 입당
  • 1918초대 총리 겸 외무장관 취임 (11월), 파리 강화회의 수석대표
  • 1918–1920역대 내각에서 외무장관 역임
  • 1926제3대 세이마스 의원, 12월 쿠데타 뒤 총리 겸 외무장관 복귀
  • 1928독일과 국경 조약 체결, 극우 「철의 늑대」 실질 지도
  • 1929스메토나 대통령에게 해임되어 유배
  • 1934–1938쿠데타 미수 뒤 투옥, 1938년 프랑스로 추방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일리인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Ильин
민족주의 러시아 제국 (1923년 박탈, 이후 무국적·스위스) 러시아 1883–1954 ○ 자연사

10월 혁명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백군 이민 사상으로 전향한 헤겔주의 법철학자

그는 『힘으로 악에 저항함』에서 "체포하고, 단죄하고, 사격할" 용기를 요구했고, 고리키는 이를 '복수의 복음'이라 불렀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헤겔 법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고 교수가 된 러시아 법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다. 1905년 혁명기 급진적 입장에서 출발했으나 10월 혁명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반볼셰비키 투쟁의 이론가로 전향,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추방되었다. 망명 중 『힘으로 악에 저항함』(1925)에서 무력 저항을 정당화했으며 파시즘을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건강한 현상'으로 옹호했다. 사후 저작은 솔제니친과 푸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민족주의·권위주의 담론의 핵심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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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사립강사
  • 1918모스크바대학 법학 교수, 헤겔 연구로 석·박사 학위 취득
  • 1922'철학자의 배'로 소비에트에서 추방, 베를린 망명
  • 1923–1934베를린 러시아 학술연구소 교수
  • 1927–1930『루스키 콜로콜』(러시아의 종) 편집자·발행인
  • 1938나치 독일 떠나 스위스 정착, 라흐마니노프 재정 지원
  • 1948–1954사후 『우리의 과업』으로 묶인 정치 에세이 집필

무스타파 쇼카이

Мустафа Шокай
민족주의 러시아 제국 카자흐 1890–1941 ○ 의문사

투르키스탄 독립을 꿈꾸고 코칸트 자치를 이끈 카자흐 민족주의자

“나는 투르키스탄 군단을 이끌라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더 이상의 협력도 거부한다. 내 결정의 모든 결과를 나는 알고 있다.” — 리벤트로프에게 보낸 편지, 1941년

무스타파 쇼카이는 러시아 제국 붕괴 후 중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자치 정부인 코칸트(투르키스탄) 자치 정부를 이끈 카자흐 민족주의 정치 지도자였다. 페트로그라드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국가두마 무슬림 분과 서기로 활동하며 제정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식민 정책에 맞섰다. 1918년 볼셰비키가 코칸트를 무력으로 진압하자 프랑스로 망명하여 《야쉬 투르키스탄》 등 간행물로 투르키스탄 독립 사상을 국제적으로 전파했으며, 1941년 나치가 투르키스탄 군단 조직을 제안하자 포로수용소의 실태를 목격하고 이를 거부했다. 그 직후 베를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나,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독립 선구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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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국가두마 무슬림 분과 서기
  • 1917투르키스탄 민족평의회 의장
  • 1917투르키스탄 임시정부 위원
  • 1917–1918코칸트 자치 정부 외무장관, 후임 수반
  • 1918–1919알라쉬 오르다 정부 위원
  • 1921–1941망명 언론인·편집자, 《야쉬 투르키스탄》 편집장
프랑스 국가기관 민족주의 프랑스 프랑스 1890–1970 ○ 자연사

패배 속에서 프랑스의 전쟁 지속을 선언한 국가 지도자

“희망은 사라져야 하는가? 패배는 endgült적인가? 아니다!”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군인·저항 지도자·정치가로, 1940년 패전 뒤에도 전쟁을 계속할 프랑스의 대표성을 자임했다.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를 조직해 비시 정권의 정통성 주장에 맞섰고, 해방 뒤에는 임시정부를 이끌며 국가 재건의 방향을 둘러싼 갈등을 드러냈다. 그는 강한 행정부와 국가적 자율성을 중시해 제5공화국을 세웠지만, 개인 권력과 식민지 전쟁을 둘러싼 긴장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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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8육군 보병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독일군 포로
  • 1932–1937국방최고회의 사무국 장교, 기갑전과 기동전 저술
  • 1940.05–06제4기갑사단 지휘, 준장 승진, 국방·전쟁 담당 국무차관
  • 1940–1943런던의 자유 프랑스 지도자, 프랑스군과 해외 위원회 조직
  • 1943–1944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 공동의장 및 의장
  • 1944–1946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의장
  • 1958–1959국무총리, 제5공화국 헌법 제정 주도
  • 1959–1969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

장쉐량

张学良
북양정부·군벌 민족주의 중국 중국 1901–2001 ↓ 체포 1936 · 자연사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해 제2차 국공합작의 길을 연 「젊은 원수」

1936년 12월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해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냈고, 그 대가로 반세기 넘게 연금 생활을 했다.

만주 군벌 장쭤린의 아들로 1928년 아버지가 일본군에 폭살되자 동북을 물려받았고, 그해 말 난징 국민정부에 귀순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근거지를 잃은 뒤 공산당 토벌에 투입되었으나, 1936년 12월 시안에서 양후청과 함께 장제스를 감금해 내전 중지와 항일을 요구했다. 사건은 저우언라이의 중재로 풀렸지만 그는 장제스와 함께 난징으로 돌아가 이후 반세기 넘게 연금되었다. 1990년대 풀려나 하와이에서 100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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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1동북 변방군 사령관
  • 1936.12시안 사변 주도

스테판 반데라

Степан Андрійович Бандера
민족주의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1909–1959 ✕ 독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정치가이자 OUN-B 지도자다.

반데라는 폴란드령 동부 갈리시아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하조직 활동을 이끌었다. OUN 지도부였던 그는 1934년 폴란드 내무장관 브로니스와프 피에라츠키 암살을 조직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1940년 OUN이 분열하자 급진파 OUN-B를 이끌었고,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직후 리비우에서 선포한 우크라이나 국가가 나치 독일과 협력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독일 당국은 그를 구금하고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 보냈으며, 전후 서독에서 OUN-B 망명 조직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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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에 가입했다.
  • 1931OUN 선전 책임자가 되었다.
  • 1933OUN의 폴란드 국내 지도부를 이끌었다.
  • 1934폴란드 내무장관 암살을 조직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 1940OUN이 분열한 뒤 OUN-B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다.
  • 1941–1944독일 당국에 체포되어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 1945OUN 해외 조직을 이끌었다.
  • 1959뮌헨에서 KGB 요원 보단 스타신스키에게 독살당했다.

오르반 빅토르

Orbán Viktor

1989년 반공청년 지도자에서 '비자유민주주의' 창시자로

우리가 충분히 단호하다면, 집권당이 자유선거에 복종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56년의 정신을 놓지 않는다면, 러시아 군대의 철수 협상을 즉시 시작할 정부를 선출할 수 있다.

오르반 빅토르는 1989년 너지 임레 재매장식에서 소련군 철수와 자유선거를 요구한 연설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반공청년 지도자였다. 1998년 총선 승리로 헝가리 최연소 총리가 되어 NATO 가입을 이끌었고, 2010년 재집권 후 개헌·사법·언론을 장악하며 스스로 '비자유민주주의'라 부르는 체제를 구축했다. 2014년 바일레 투슈나드 연설에서 자유민주주의와의 결별을 공개 선언했으며, 2020년 헝가리 역사상 최장기 총리가 되었다. 반공 저항으로 출발한 그의 정치 여정은 21세기 권위주의 포퓰리즘의 대표적 모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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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Fidesz (Fiatal Demokraták Szövetsége) 공동 창립
  • 1989너지 임레 재매장식 연설; 반대파 원탁회의 Fidesz 대표
  • 1990국회의원, Fidesz 원내대표 (1993까지)
  • 1993–2000, 2003–Fidesz 당수
  • 1998–2002헝가리 총리, NATO 가입 주도
  • 2010–2026총리, 개헌 및 '비자유민주주의' 체제 구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