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독립·통합·국가주권을 중심으로 정치사상을 전개한 인물들입니다. 삼민주의·드골주의·투르키스탄 민족주의와 권위주의적·극우 민족주의 등 서로 다른 흐름을 포함하며, 이들을 같은 정책이나 가치관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반식민 해방운동과 파시즘의 구체적 경력은 각각의 입장 모음에서도 구분해 살펴봅니다.
러시아 문명주의 역사철학의 창시자. 주저 『러시아와 유럽』(1869)에서 세계사를 문화-역사적 유형의 순환으로 파악하고 슬라브 유형을 독자 문명으로 정립했다. 젊은 시절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푸리에 사상을 연구하다 체포·구금되었으나 보수로 전향, 범슬라브주의를 체계화하여 포베도노스체프·카트코프와 함께 구체제 이데올로기 지형을 형성했다. 도스토옙스키가 '모든 러시아인의 필독서'라 칭했고 슈펭글러·토인비의 문명론을 선취한 이 저작은 러시아 보수사상사의 핵심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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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1843차르스코예 셀로 리체움 졸업
1843–1849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자유청강;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푸리에 사상 강의
1849체포·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100일 구금 후 볼로그다 유배
1852–1881어업·해양 원정 지휘(볼가·카스피·백해·아조프·북극해); 러시아 어업법 체계화; 콘스탄티노프 메달(1866)
1869『러시아와 유럽』 출간 — 문화-역사적 유형론으로 국제적 명성
1879–1885니키츠키 식물원장(1879–1880); 『다위니즘』(1885) 출간; 티플리스에서 사망
청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1911년 신해혁명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임종에서 직접 구술한 유언에서도 소련과의 우호를 거듭 밝혔다.
광둥 출신으로 하와이와 홍콩에서 교육받고 의사가 되었다. 1894년 흥중회, 1905년 도쿄에서 동맹회를 조직해 청 타도와 공화국 수립을 내걸었고, 1911년 신해혁명 뒤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곧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겼다.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를 제창했으며 1923년 소련의 요페와 공동선언을 내고 소련의 원조와 공산당원의 개인 자격 입당을 받아들여 제1차 국공합작을 열었다. 1925년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했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모두 그의 유산을 주장했다.
리가 협상에서 민스크를 포기한 선택은 폴란드의 동방정책을 연방국가 구상에서 민족국가 구상으로 돌렸다.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는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젊은 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국가민주주의 진영의 핵심 이론가가 되었다. 그는 폴란드의 독립과 국가 통합을 민족적 동질성에 강하게 결부했고, 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 등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연방 구상에 비판적이었다. 1920년 민스크와 리가 협상에서 그는 민스크를 요구하지 않는 노선을 지지해 피우수트스키의 동방 연방 구상을 약화시키고 리가 국경의 민족국가적 틀을 굳혔다. 이후 교육장관과 망명 정부·전후 국가기구의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1926년 이후 엔데치아와 거리를 두며 정치적 입장을 조정했다.
그는 『힘으로 악에 저항함』에서 "체포하고, 단죄하고, 사격할" 용기를 요구했고, 고리키는 이를 '복수의 복음'이라 불렀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헤겔 법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고 교수가 된 러시아 법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다. 1905년 혁명기 급진적 입장에서 출발했으나 10월 혁명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반볼셰비키 투쟁의 이론가로 전향,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추방되었다. 망명 중 『힘으로 악에 저항함』(1925)에서 무력 저항을 정당화했으며 파시즘을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건강한 현상'으로 옹호했다. 사후 저작은 솔제니친과 푸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민족주의·권위주의 담론의 핵심 원천이 되었다.
“나는 투르키스탄 군단을 이끌라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더 이상의 협력도 거부한다. 내 결정의 모든 결과를 나는 알고 있다.” — 리벤트로프에게 보낸 편지, 1941년
무스타파 쇼카이는 러시아 제국 붕괴 후 중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자치 정부인 코칸트(투르키스탄) 자치 정부를 이끈 카자흐 민족주의 정치 지도자였다. 페트로그라드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국가두마 무슬림 분과 서기로 활동하며 제정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식민 정책에 맞섰다. 1918년 볼셰비키가 코칸트를 무력으로 진압하자 프랑스로 망명하여 《야쉬 투르키스탄》 등 간행물로 투르키스탄 독립 사상을 국제적으로 전파했으며, 1941년 나치가 투르키스탄 군단 조직을 제안하자 포로수용소의 실태를 목격하고 이를 거부했다. 그 직후 베를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나,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독립 선구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군인·저항 지도자·정치가로, 1940년 패전 뒤에도 전쟁을 계속할 프랑스의 대표성을 자임했다.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를 조직해 비시 정권의 정통성 주장에 맞섰고, 해방 뒤에는 임시정부를 이끌며 국가 재건의 방향을 둘러싼 갈등을 드러냈다. 그는 강한 행정부와 국가적 자율성을 중시해 제5공화국을 세웠지만, 개인 권력과 식민지 전쟁을 둘러싼 긴장도 남겼다.
1936년 12월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해 제2차 국공합작을 이끌어냈고, 그 대가로 반세기 넘게 연금 생활을 했다.
만주 군벌 장쭤린의 아들로 1928년 아버지가 일본군에 폭살되자 동북을 물려받았고, 그해 말 난징 국민정부에 귀순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근거지를 잃은 뒤 공산당 토벌에 투입되었으나, 1936년 12월 시안에서 양후청과 함께 장제스를 감금해 내전 중지와 항일을 요구했다. 사건은 저우언라이의 중재로 풀렸지만 그는 장제스와 함께 난징으로 돌아가 이후 반세기 넘게 연금되었다. 1990년대 풀려나 하와이에서 100세로 사망했다.
반데라는 폴란드령 동부 갈리시아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하조직 활동을 이끌었다. OUN 지도부였던 그는 1934년 폴란드 내무장관 브로니스와프 피에라츠키 암살을 조직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었다. 1940년 OUN이 분열하자 급진파 OUN-B를 이끌었고,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직후 리비우에서 선포한 우크라이나 국가가 나치 독일과 협력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독일 당국은 그를 구금하고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에 보냈으며, 전후 서독에서 OUN-B 망명 조직을 이끌었다.
우리가 충분히 단호하다면, 집권당이 자유선거에 복종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56년의 정신을 놓지 않는다면, 러시아 군대의 철수 협상을 즉시 시작할 정부를 선출할 수 있다.
오르반 빅토르는 1989년 너지 임레 재매장식에서 소련군 철수와 자유선거를 요구한 연설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반공청년 지도자였다. 1998년 총선 승리로 헝가리 최연소 총리가 되어 NATO 가입을 이끌었고, 2010년 재집권 후 개헌·사법·언론을 장악하며 스스로 '비자유민주주의'라 부르는 체제를 구축했다. 2014년 바일레 투슈나드 연설에서 자유민주주의와의 결별을 공개 선언했으며, 2020년 헝가리 역사상 최장기 총리가 되었다. 반공 저항으로 출발한 그의 정치 여정은 21세기 권위주의 포퓰리즘의 대표적 모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