антиалкогольная кампания · 1985–1988

반알코올 캠페인

Anti-Alcohol Campaign

1985년 3월 고르바초프의 당 서기장 취임 두 달 뒤 시작된 소련 최대의 국가 금주 정책. 주류 생산을 거의 절반으로 줄이고 판매 시간을 오후 2시부터 7시까지로 제한했으며 가격을 올리고 공공장소 음주와 사설 증류에 대한 처벌을 강화했다. 구호는 《트레즈보스트는 삶의 규범》이었다. 1914년 제정 러시아의 금주령과 1958년·1972년 캠페인에 이은 스탈린 사후 최대 규모의 시도였고, 소매 거래 수입의 약 4분의 1을 주류 소비세에 의존하던 재정 구조를 곧바로 압박했다.

상세

역사

1985년 5월 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음주와 알코올중독 극복 조치에 관하여》)과 각료회의 제410호 결정이 착수 조치를 채택했고, 5월 16일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 결정이 행정·형사 제재로 이를 뒷받침했으며 모든 연방공화국이 같은 결정을 동시에 채택했다. 같은 결정들을 다루는 영어 자료는 각료회의 결정을 5월 7일로, 판매 제한을 6월 1일로 적는 반면 러시아어 자료는 판매 제한을 5월 조치에 넣어, 이 세부에서 출처가 어긋난다. 1984년 등록 소비량은 1인당 10.5리터, 사설 증류주까지 포함하면 14리터를 넘어 제정 러시아나 스탈린 시기(5리터 미만)를 훨씬 웃돌았고, 안드로포프를 이어 솔로멘체프와 리가초프는 이를 경제 침체와 노동 규율 해이의 근본 원인으로 보았다. 안드로포프는 이미 1980년대 초 대규모 금주 캠페인을 구상하고 펠리셰 위원회에 방안을 마련하게 했으나 실행 전에 사망했다.

주류 생산은 1985년 1억 9,900만 데칼리터(순수 알코올 기준), 1986년 1억 2,100만, 1987년 9,300만으로 급감해 1980~1985년 15퍼센트 미만의 감소와 대조적으로 1985~1988년에 거의 절반으로 줄었고 맥주와 포도주까지 삭감되었다. 한 영어 자료는 주류 생산 기업 600개 이상이 폐쇄되었다고 전하는 반면 러시아어 자료는 다수의 주류 판매점이 폐쇄되었다고 서술해, 무엇이 폐쇄되었는지에서 출처가 갈린다. 모스크바 당 책임자 그리신은 다수의 주류 판매점을 폐쇄하고 수도에서의 음주 단속이 완료되었다고 보고했으며, 전연합 자원 금주 협회는 3년 안에 회원 1,400만 명을 넘겼다.

주류 소비세는 소매 거래 재정 수입의 약 25퍼센트(일부 자료로는 국가 예산의 약 30퍼센트)를 차지하며 빵·우유·설탕 보조금을 뒷받침했다. 1985년 계획 600억 루블은 460억 루블에 그쳐 균형을 맞출 수 있었던 예산에 140억 루블 적자가 생겼고 이는 1991년까지 이어졌다. 식품산업 주류 수입은 1985년 약 600억 루블에서 1986년 380억, 1987년 350억으로 줄었으며, 고르바초프 보좌관 샤흐나자로프는 캠페인 비용을 1,000억 루블로 추산했고 총리 파블로프는 이후 손실 수입을 2,000억 루블로 제기했다. 파블로프는 1989년 재무장관으로서 주류 판매 수입 감소분도 제시했는데, 공개된 집계는 손실 규모를 수백억 루블대로 적으면서 465억 루블에서 357억 루블로의 감소, 즉 108억 루블 규모의 감소를 함께 적어 단위가 어긋난다. 확실한 것은 주류 수입 감소가 막대했고 이것이 캠페인 중단의 주요 이유가 되었다는 점이다. 커지는 불만과 1987년부터의 경제 위기 속에 지도부는 캠페인을 축소했고, 금주 선전은 중단되고 판매는 다시 늘었으나 제한 조치는 형식적으로 폐기되지 않아 오후 2시 이전 판매 금지는 1990년 7월 24일 각료회의 제724호 결정으로서야 해제되었다. 한 영어 자료는 1988년 10월 종료를 전하고, 미시간주립대 자료는 세수 감소로 인한 재정 불균형을 화폐 발행으로 메우며 인플레이션이 촉발되었다고 서술한다.

사례와 결과

단속은 일상에까지 파고들었다. 보드카·브랜디·포도주 가격이 20~30퍼센트 올랐고 최저가 보드카('안드로포프카')는 자취를 감추었으며 1986년 8월 4.70루블에서 9.10루블로 뛰었다. '금주 구역'과 무주(無酒) 결혼식이 장려되었으며 당원들은 금주 협회 가입을 요구받았다. 동시에 암시장이 크게 자극되어, 한 집계에 따르면 1985~1987년 설탕 판매가 18퍼센트 늘어 140만 톤이 사설 증류로 유입되어 1억 4,000만~1억 5,000만 데칼리터의 사모곤을 생산했고, 사설 증류 기소는 1985년 3만 건에서 1986년 15만 건, 1987년 39만 7,000건으로 급증했다. 접착제·유리 세정제·디클로르보스 같은 대체 음용품 판매도 뛰었고, 1987년 알코올 중독 사건은 4만 4,000건을 넘고 사망자는 1만 1,000명에 이르렀으며 등록 약물 중독자는 9,000명에서 2만 명으로 늘었다. 미국의 금주법과 마찬가지로 조직범죄도 늘었다.

포도 재배도 큰 타격을 입었다. 포도원 조성·관리 배정이 삭감되고 농장 세금이 인상되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몰도바 등에서 포도원이 뽑혔다. 몰도바는 21만 헥타르 중 8만 헥타르를, 우크라이나는 약 6만 헥타르와 예산의 약 5분의 1을 잃었고, 러시아의 포도원 면적은 1985~1990년 20만 헥타르에서 16만 8,000헥타르로 줄고 평균 포도 수확량은 85만 톤에서 43만 톤으로 떨어졌다. 다만 이 파괴 서술은 논쟁적이다. 우크라이나 당 서기 포흐레브냐크와 크림 주 서기 마카렌코는 리가초프가 포도원과 마산드라 와인 서고의 파괴까지 요구했으며 서고는 셰르비츠키의 개입으로 보존되었다고 말한 반면, 리가초프는 2010년 인터뷰에서 위로부터의 뽑기 지시를 부인하고 마산드라를 방문한 적이 없다고 했으며 솔로멘체프는 2003년 기술 품종만 교체되었다고 주장했다. 리가초프는 1985년 포도원 면적이 126만 헥타르, 1988년 121만 헥타르였다고도 반박했다.

보건 지표는 크게 개선되었다. 공식 등록 기준 1인당 주류 판매량은 2.5배 이상 줄었고, 남성 기대수명은 2.6년 늘어 러시아 역사상 최고 수준에 이르렀으며 연간 출생아 약 550만 명(이전 수십 년보다 50만 명 증가), 허약아 출생 8퍼센트 감소, 범죄 감소가 보고되었고 1985~1992년 구제된 생명은 약 138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대체 독극물 중독이 급증했고, 일부 공식 수치는 강주 소비가 1인당 10~11리터에서 6리터로, 포도주 소비가 27리터에서 3리터로 줄었다고 보여주었지만 실제 총소비량에는 뚜렷한 감소가 없었으며 주류 접근의 어려움은 알코올중독자가 아니라 일반 시민이 겪었다.

문화계도 영향을 받았다. 검열은 문학·노래·연극·영화에서 음주 장면을 삭제하거나 고쳐 쓰게 했고, 안드레이 마카레비치는 영화 《나치니 스나찰라》(1985)의 삽입곡 《열차에서의 대화》 가사를 다시 써야 했다. 섹토르 가자(《사모곤시치키》), 주파르크(《트레즈보스트는 삶의 규범》) 같은 그룹들은 무주 바와 무주 결혼식 같은 구호를 풍자했다.

구분

고르바초프의 캠페인은 스탈린 사후 세 번째이자 최대 규모의 금주 캠페인이었다. 1914년 니콜라이 2세 치하에서 시작된 제정 금주('수호이 자콘')는 내전기를 거쳐 1925년 스탈린이 폐지하고 국가 보드카 전매를 복원했으며, 10월 4일 40퍼센트 곡물주 판매에 서명했다. 볼셰비키는 제정 정부의 금주를 물려받아 1917년 11월 8일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명령으로 추가 통지 시까지 주류 생산을 금지했고, 1929년 캠페인은 '노동자 요구'로 시작되어 맥주 홀을 폐쇄하고 금주 식당과 잡지 《트레즈보스트 이 쿨투라》를 열었다. 1958년 흐루시초프 캠페인(역·공항·공장·학교 부근 보드카 판매 금지와 사설 증류 단속)은 예산 타격 때문에 약 6개월 만에 뒤집혔고, 1972년 브레즈네프 캠페인(5월 16일 제361호 결정)은 강주 생산을 줄이고 가격을 올리고 30도 이상 주류 판매를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제한했으며 '음주에 맞서 싸우자' 구호 아래 강제 노동 치료소를 만들었다.

이 캠페인은 국가 보드카 전매와 소비세 구조 안에서 작동했다. 1979년 주류 간접세는 약 254억 루블로 소득세를 웃돌았으므로 소비 삭감은 재정 중립적 보건 조치가 아니라 곧바로 예산 타격이었다. 평가도 첨예하게 갈린다. 고르바초프는 2005년 '좋은 대의가 실수로 명예롭지 않게 끝났다'고 했고, 같은 해 여론조사에서 러시아인의 58퍼센트가 캠페인을 긍정적으로 보았으나 긍정적 성과를 냈다고 본 사람은 15퍼센트에 그쳤다. 보좌관 야코블레프는 2000년 사람들이 오히려 더 마셨다고 주장했고, 전 KGB 간부 그루시코는 결과가 의도와 정반대였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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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comprehensive account of the 1985–1988 campaign, including production figures (cut from 251 to 123 million decalitres), budget losses (14 billion ruble deficit in the first year, 100 billion total estimate by Shakhnazarov), moonshine and surrogate statistics, vineyard destruction, and the de facto abandonment by 1988.
  2. 위키백과 (영문) English Wikipedia: alcohol production reduced by 40%, campaign costs estimated up to US$100 billion over 1985–1990, rise in surrogate poisonings, termination in October 1988.
  3. soviethistory.msu.edu Seventeen Moments in Soviet History (Michigan State University): essay by James von Geldern detailing the 1985 campaign measures, the budgetary imbalance created by the loss of alcohol revenue, the rise of samogon and organized crime, and the campaign's abandonment after 1987.
  4. 위키백과 (러시아어)
  5. 위키백과 (영문)
  6. 위키백과 (영문)
  7. soviethistory.ms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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