Антипартийная группа · 1957–1962

반당 그룹

Anti-Party Group

1957년 6월 흐루쇼프를 제1서기직에서 축출하려다 실패한 말렌코프·몰로토프·카가노비치와 뒤늦게 가담한 셰필로프를 가리켜 소련 공식 언론이 붙인 정치적 레이블. 흐루쇼프 자신이 상대에게 붙인 이름이며, 당 적대나 통일된 조직이 아니었기에 실체를 가리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스탈린 시대라면 사형으로 끝났을 패배가 좌천과 출당으로 처리되면서 정치적 패배가 죽음을 뜻하지 않게 된 이행을 표시한다.

상세

정의와 명칭

「반당 그룹」은 소련 공식 언론에서 통용된 정치적 레이블로, 1957년 6월 흐루쇼프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직에서 축출하려 한 최고위 인물들을 가리켰다. 흐루쇼프 자신이 상대에게 이 별칭을 붙였고, 정식 명칭은 「말렌코프·카가노비치·몰로토프 및 그들에게 가담한 셰필로프의 반당 그룹」이었다. 역사학자 윌리엄 토브먼은 이 명칭이 이중으로 오해를 낳는다고 본다. 이들은 당에 반대한 것이 아니었고 실질적인 그룹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말렌코프·몰로토프·카가노비치라는 세 주요 경쟁자는 흐루쇼프를 몰아내려는 뜻 외에는 거의 결속되어 있지 않았고, 보로실로프·불가닌·페르부힌·사부로프·셰필로프는 막판에 가담했다. 따라서 이 이름은 승자가 패자에게 붙인 정치적 규정이지, 스스로 조직한 세력의 자기 명칭이 아니었다.

배경과 경과

대립의 뿌리는 1956년 비밀연설 이후의 탈스탈린화와 개혁 노선이었다. 경제 결정권의 분산, 국제적으로 계급투쟁을 덜 강조하는 방침, 투자의 공업에서 농업으로의 전환, 사적 농업 활동 장려, 처녀지 개간, 소비재의 「공산주의로의 질주」, 자본주의 국가와의 평화공존이 논쟁거리였다. 몰로토프는 처녀지 개간을 「모험」이라 했고 말렌코프는 흐루쇼프의 강령을 「기회주의적」이며 「우경적 농민 편향」이라고 비판했다.

1957년 6월 18일 간부회의에서 이들은 흐루쇼프를 불가닌으로 교체하는 안을 표결로 통과시켰다. 표수에 대해서는 사료가 엇갈린다. 한쪽은 말렌코프·몰로토프·카가노비치·불가닌·보로실로프·페르부힌·사부로프의 7대 4(반대는 흐루쇼프·미코얀·수슬로프·키리첸코)라 하고, 다른 쪽은 6명 찬성(몰로토프·말렌코프·보로실로프·카가노비치·불가닌·사부로프), 페르부힌 기권, 4명 반대(흐루쇼프·키리첸코·미코얀·수슬로프)로 전원회의에서 제1서기를 해임하도록 권고했다고 적는다. 흐루쇼프와 동료들은 제1서기를 해임할 수 있는 것은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뿐이라고 맞섰다.

국가보안위원회 의장 세로프와 국방장관 주코프는 흐루쇼프와 짜고 그를 지지하는 중앙위원들을 모스크바로 긴급 공수했고, 도착한 위원들이 회의가 끝나기 전에 개입해 제1서기와 서기국의 문제를 논의에서 제거했다. 간부회의는 나흘간 이어졌고 곧바로 전원회의가 열렸다. 6월 22일 개막한 전원회의에서 수슬로프는 간부회의의 분열을 제20차 당대회의 탈스탈린화 노선을 둘러싼 대립으로 설명해 흐루쇼프 자신의 과거를 문제 삼는 것을 피했고, 주코프는 몰로토프·카가노비치·말렌코프를 당·소비에트 간부 체포와 처형의 「주요 책임자」로 제시하는 문서를 낭독했다.

카가노비치는 「정치국 위원 전원에 대해 말해야 한다」고 맞서며 흐루쇼프에게 우크라이나의 처형 명단에 서명하지 않았느냐고 직접 물었다. 흐루쇼프는 답을 피했고, 주코프는 대량 탄압 조직의 모든 책임자를 철저히 조사해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전원회의 차원에서 비밀로 분류되어 일반 당원들은 페레스트로이카 때까지 알지 못했다.

조치와 처분

1957년 6월 29일 전원회의 결정은 그룹 구성원들이 당 노선에 반대하고 당 지도기관 구성을 분파적으로 바꾸려 했다고 비난했다. 연방 공화국의 권한 확대와 지방 소비에트 강화에 반대하고, 산업 관리 재편과 소브나르호즈 창설을 저해하려 했으며, 집단농 농민의 물질적 유인 강화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유·버터·고기 1인당 생산에서 미국을 따라잡자는 구호에 맞섰고, 개인숭배의 결과를 청산하는 조치에도 저항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몰로토프에 대해서는 처녀지 개간 반대, 외교부장관으로서 유고슬라비아와의 관계 개선 저해, 오스트리아 국가조약 방해,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 반대, 전쟁 방지와 사회주의로의 다양한 길에 관한 입장 거부가 열거되었다.

같은 날 전원회의 결정으로 말렌코프·몰로토프·카가노비치·셰필로프는 당과 국가 직책에서 해임되어 한직으로 밀려났다. 몰로토프는 몽골 주재 대사, 말렌코프는 카자흐스탄 수력발전소 소장, 카가노비치는 우랄의 소규모 칼륨 공장 소장, 셰필로프는 키르기스스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이 되었다.

보로실로프·불가닌·페르부힌·사부로프는 전원회의에서 자기 잘못을 인정해 처음에는 가벼운 처분을 받았다. 보로실로프는 1960년 7월까지 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과 간부회의 위원직을 유지했고, 불가닌은 1958년 3월까지 각료회의 의장을 지낸 뒤 국가은행을 맡았다가 원수 계급을 잃고 스타브로폴 소브나르호즈를 이끌었다. 페르부힌은 간부회의 후보위원으로 강등된 뒤 1958년부터 1962년까지 동독 주재 대사와 국가계획위원회 관계 일을 했고, 사부로프는 중앙위원회 일반 위원으로 강등되어 1958년 시즈란 중기계공장 소장이 되었다.

스탈린 시대와 달리 패배는 처형을 뜻하지 않았다. 이들은 지방과 외교 무대로 좌천되었고 출당은 그 뒤에 이루어졌다. 토브먼은 이 사건을 패자가 정치적으로는 패했으나 살아남은 권력투쟁으로 본다. 흐루쇼프가 나머지 인물에 대한 처벌을 늦춘 것도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에게 반대했는지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출당과 여파

제22차 당대회는 1961년 10월 17일부터 31일까지 열렸다. 이 대회의 탈스탈린화 강화 속에서 그룹 구성원들은 당에서 제명되었다. 다만 제명 시점에 대해서는 사료가 갈린다. 한쪽은 제22차 당대회 무렵의 1961년 제명으로 보고, 다른 쪽은 일부가 1957년 6월 중앙위원회에서 해임되었고 1962년에 출당되었다고 적는다. 그래서 정확한 종료 연도를 한 해로 확정할 수 없다. 대회의 규탄과 그 뒤의 형식적 출당은 구분해 보아야 한다.

사건의 여파는 대외 관계에도 미쳤다. 흐루쇼프의 국제 공산주의 진영 내 지위가 한동안 불안해졌고, 그는 중국공산당과 마오쩌둥의 지지가 필요해졌다. 그 대가로 소련의 핵 기술이 제공되어 1957년 10월 국가방위 신기술 협정이 체결되었다. 같은 해 10월 흐루쇼프는 반당 그룹과의 투쟁에서 도움을 준 국방장관 주코프를 보나파르트주의를 내세워 해임했다. 그룹에 대한 승리가 승자의 동료를 보장하지는 않았던 셈이다.

구분과 사례

이 명칭은 탈스탈린화 반대 세력을 당 지도부 안에서 고립시키는 수단이었다. 퍄지코프는 제22차 당대회 결의가 비판받은 스탈린 개인숭배보다 반당 그룹을 거의 네 배 더 많이 다루었고, 비판이 가장 집중된 인물이 몰로토프였다고 지적한다. 곧 이 용어는 냉전기 소련 당의 특정한 규정이지, 어떤 반대 세력에나 붙일 수 있는 일반 명칭이 아니다. 지도부는 그룹을 스탈린 테러의 책임자로도, 탈스탈린화의 반대자로도 동시에 제시했다. 전원회의가 이 모순을 비밀로 분류해 봉인한 점에서 이 레이블은 함께 쓰인 개인숭배 비판과 구별된다.

명칭의 현장 적용은 고르지 않았다. 캄차카주 당위원회는 우스트볼셰레츠키구 키흐친스키 어류통조림 공장(46호 공장) 노동자 회의에서 81명이 반당 그룹 지지를, 31명만이 중앙위원회 결정 지지를 표결했다고 보고했다. 이후 공장장이 해임되었고 새 회의에서 결정이 승인되었다. 제22차 당대회에 이르러서는 게오르기 주코프도 그룹의 참여자로 지목되어, 명칭이 뒤에 확대 적용되었음을 보여준다.

비교할 만한 별개의 사례로는 중국의 사인방, 폴란드의 나타린파, 1965년 불가리아 쿠데타 시도 등이 함께 거론된다. 이는 이 용어가 「분파·반당」 고발이라는 한 계열의 한 사례일 뿐, 그것들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사한다.

관련 인물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full article: definition, composition (Malenkov, Molotov, Kaganovich, Shepilov), June 1957 Presidium vote, Zhukov's role, aftermath and 1961 expulsion
  2.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article: political cliché, full Presidium membership and vote count, charges against group, local reactions, Пыжиков's analysis of XXII Congress emphasis
  3. encyclopedia.com Encyclopedia of Russian History (William Taubman): power struggle logic, policy differences, KGB/military role in ferrying Central Committee members, punishment details, significance of political defeat without execution
  4. 위키백과 (영문)
  5. 위키백과 (러시아어)
  6. encyclopedia.com
  7. 위키백과 (영문)
← 용어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