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usammenbruchstheorie; Zusammenbruchsdebatte · 1898–현재 (1898~1899년 베른슈타인과 카우츠키·룩셈부르크의 수정주의 논쟁에서 시작해, 1913년 룩셈부르크의 『자본축적론』을 둘러싼 논쟁과 1929년 그로스만의 『자본주의 체제의 축적과 붕괴의 법칙』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 이후 다시 읽혔다.)

붕괴론 논쟁

Breakdown controversy

자본주의가 자기 모순 때문에 경제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가를 두고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논쟁. 1898~1899년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임박한 붕괴를 전제한 「붕괴론」을 버리고 개혁에 힘쓰자고 하자,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런 특별한 붕괴론을 세운 적이 없다고 반박했고 룩셈부르크는 붕괴의 필연성을 과학적 사회주의의 근거로 옹호했다. 1913년 룩셈부르크의 시장 한계론, 1929년 헨리크 그로스만이 이윤율 저하에서 끌어낸 「축적과 붕괴의 법칙」으로 이어졌다.

상세

「붕괴론」이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나?

19세기 말 독일 사회민주당 안에는 머지않아 큰 경제공황이 와서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오리라는 기대가 널리 퍼져 있었다. 영국에 망명해 있던 사회민주당 이론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1898년 《노이에 차이트》에 영국의 사회주의자 벨퍼트 백스를 반박하는 글을 쓰면서 이 기대를 「붕괴론」(Zusammenbruchstheorie)이라 이름 붙이고 비판했다. 이듬해 그는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1899) 서문에서 자기 입장을 이렇게 정리했다.

“나는 우리가 곧 닥칠 부르주아 사회의 붕괴 앞에 서 있으며, 사회민주당이 이런 임박한 거대한 사회적 파국을 내다보고 거기에 맞추어 전술을 정하거나 그것에 기대야 한다는 견해에 반대했다. 나는 이 입장을 그대로 유지한다.”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전제』 서문)
„Ich bin der Anschauung entgegengetreten, daß wir vor einem in Bälde zu erwartenden Zusammenbruch der bürgerlichen Gesellschaft stehen und daß die Sozialdemokratie ihre Taktik durch die Aussicht auf eine solche bevorstehende große soziale Katastrophe bestimmen, beziehungsweise von ihr abhängig machen soll. Das halte ich in vollem Umfange aufrecht.“

베른슈타인의 근거는 자본주의의 「적응력」이었다. 통신과 교통의 발달, 유럽 공업국의 커진 부, 탄력적인 신용 제도, 산업 카르텔의 등장으로 한 곳의 교란이 경제 전체로 번지는 힘이 약해져, 적어도 한동안은 예전 같은 일반적 공황이 일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민주당은 큰 붕괴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민주주의로 교육하며, 노동계급을 끌어올리고 국가를 민주적으로 바꿀 개혁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했다. 이 주장이 사회민주당 안의 수정주의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정통파는 어떻게 대답했나?

카를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과 사회민주당 강령』(1899)에서 우선 말 자체를 문제 삼았다.

“특별한 「붕괴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세운 적이 없다. 그 말은 베른슈타인에게서 나왔다.” (카우츠키, 『베른슈타인과 사회민주당 강령』 2장)
„Eine besondere „Zusammenbruchstheorie“ ist von Marx und Engels nicht aufgestellt worden. Das Wort stammt von Bernstein“

카우츠키는 에르푸르트 강령의 공황 조항에 붕괴라는 말이 한 마디도 없고, 공황이 사회혁명을 열어 준다거나 공황 때만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단언한 당의 공식 문건도 없다고 지적했다. 베른슈타인이 백스 한 사람의 생각을 당 전체, 나아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론으로 부풀렸다는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1899)에서 다른 방향으로 맞섰다. 베른슈타인이 거부한 것은 붕괴의 특정한 형태가 아니라 붕괴 자체이며,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객관적 필연성을 잃는다는 것이다. 그는 과학적 사회주의가 세 가지에 기대고 있다고 했다. 자본주의 경제의 무정부성이 커져 몰락이 피할 수 없는 결과가 되는 것, 생산 과정의 사회화가 미래 사회 질서의 싹을 만드는 것,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과 계급의식이 커지는 것이다. 첫째를 버리면 사회주의는 이상이나 도덕의 문제로 떨어진다는 것이 룩셈부르크의 경고였다.

1913년 이후 논쟁은 무엇을 두고 갈렸나?

20세기 초에는 붕괴를 부정하는 쪽도 이론을 갖추었다. 러시아의 투간-바라놉스키는 생산이 계획적으로 조직되어 수요를 완전히 알고 노동과 자본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다면 공급이 수요를 넘을 일이 없다며, 비례만 맞으면 자본주의가 끝없이 확대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루돌프 힐퍼딩은 자본의 집중이 오히려 자본주의를 안정시킨다고 보았고, 오토 바우어는 재생산 표식으로 축적이 인구 증가에 맞추어 조정될 수 있음을 보이려 했다. 그로스만은 이들을 「신조화론자」라 불렀다.

룩셈부르크는 1913년 『자본축적론』에서 붕괴의 근거를 시장에서 찾았다.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환경이 있어야 잉여가치를 실현할 수 있고, 그 바깥이 사라지면 축적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자본축적론 (룩셈부르크) 항목 참고). 비판자들은 이를 과소소비론이라 반박했다.

그로스만은 무엇을 보이려 했나?

폴란드 출신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헨리크 그로스만은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에서 1926~1927년 강의를 바탕으로 『자본주의 체제의 축적과 붕괴의 법칙(동시에 공황론)』(1929)을 냈다. 그는 붕괴론이 마르크스 경제 체계의 「주춧돌」인데도 수십 년 논쟁에서 누구도 그것이 체계 안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재구성하지 않았다고 썼다. 그가 세운 과제는 이것이었다.

“우리의 과제는 자본주의 재생산 과정이 경제 순환 자체에서 비롯되는 원인 때문에 어떻게 필연적으로 순환적인, 곧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상승과 하강 운동을 거쳐 마침내 자본주의 체제의 붕괴에 이르는지를 보이는 데 있다.” (그로스만, 『축적과 붕괴의 법칙』 79쪽)
„Unsere Aufgabe besteht darin, zu zeigen, wie der kapitalistische Reproduktionsprozess durch Ursachen, die aus dem Wirtschaftskreislauf selbst entspringen, notwendig in zyklischen, also periodisch sich wiederholenden Auf- und Abstiegsbewegungen verläuft und schließlich zum Zusammenbruch des kapitalistischen Systems führt.“

그로스만은 바우어의 재생산 표식을 그대로 가져와 계산을 이어 갔다. 바우어의 표식에서는 불변자본이 해마다 10%, 가변자본이 5%씩 늘어난다. 바우어는 4년치만 계산해 이윤율은 떨어져도 이윤의 양은 계속 늘어나므로 붕괴할 경제적 이유가 없다고 보았다. 그로스만이 같은 규칙으로 계산을 계속하자 35년째에 이르러 잉여가치의 증가분이 축적 조건을 유지하기에 모자라게 되었다.

원리는 간단한 숫자로 볼 수 있다(설명용 가정). 해마다 늘려야 할 불변자본이 잉여가치보다 빨리 커지면, 잉여가치 가운데 자본가가 소비할 몫은 처음에는 비중만 줄다가 나중에는 절대량도 줄고, 끝내 0에 가까워진다. 예컨대 잉여가치가 100일 때 추가 불변자본에 60, 추가 가변자본에 20을 쓰고 자본가 소비가 20이었다면, 몇십 년 뒤 잉여가치가 200으로 늘어도 추가 불변자본이 170, 추가 가변자본이 40을 요구하면 모자라는 10을 채울 길이 없다. 그때부터는 임금을 깎거나 고용을 줄여야 하는데, 그러면 한쪽에는 실업자가, 다른 쪽에는 놀고 있는 자본이 생긴다. 그로스만은 이를 가치 증식이 모자라서 생기는 「자본의 절대적 과잉축적」이라 불렀다.

그로스만은 이것을 자동적인 붕괴 예언으로 내놓지 않았다. 그는 마르크스의 방법을 단순화한 가정에서 출발해 단계적으로 현실에 다가가는 「연속적 근사」로 보았고, 붕괴 경향을 늦추는 반대 경향, 곧 불변자본의 가치 절하, 임금 인하, 자본수출, 전쟁에 의한 자본 가치 파괴, 제국주의를 책의 나머지 절반에서 다루었다. 독점 조직, 자본수출, 원료 산지의 분할 같은 최근 자본주의의 특징도 그에게는 축적의 본질에서 나오는 표면 현상이었다. 결과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투쟁이 결정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그로스만의 책은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다시 읽혔나?

책은 1929년 월스트리트 붕괴 몇 달 전에 나와 독일어권에서 큰 주목을 받았지만, 대부분의 서평은 적대적이었고 흔히 자동적 붕괴를 예언하는 숙명론으로 그려졌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혁명적 결론 때문에, 굳어 가던 스탈린주의 정통은 공인 교리에서 벗어났다는 이유로 그를 공격했다. 니콜라이 콘드라티예프 같은 비판자는 결정론적 붕괴 법칙을 거부했다. 같은 해 일본의 구루마 사메조도 따로 공황론이 마르크스 저작에서 차지하는 결정적 중요성에 주목했다.

그로스만은 1960년대 말 서독 신좌파에게 재발견되었고, 1970년대 데이비드 야프 등이 전후 호황의 끝을 설명하는 데 그의 이론을 썼으며, 폴 매틱의 『경제 위기와 위기 이론』(1981)이 쉽게 소개했다. 축약 영역본은 1992년에 나왔다. 로만 로스돌스키는 「마르크스가 붕괴론을 내놓지 않았다는 주장은 주로 1차 세계대전 전후의 수정주의 해석에서 비롯되었으며, 룩셈부르크와 그로스만은 수정주의자들에 맞서 붕괴론을 고집함으로써 헤아릴 수 없는 이론적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반면 미하엘 하인리히는 붕괴론이 당장의 패배가 아무리 쓰라려도 적의 종말은 확실하다는 역사적 위안의 기능을 했다고 보고, 공황은 파괴만이 아니라 서로 떨어져 움직이던 생산과 소비의 통일을 폭력적으로 되돌리는 과정이라고 지적했다. 붕괴론 논쟁은 오늘날 이윤율 저하 경향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관련 인물

출처

  1.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2.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3.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4.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5.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6.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7. de.wikipedia.org
  8. de.wikipedia.org
  9.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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