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 사회주의
Revolutionary socialism
혁명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려면 사회 혁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사회주의의 흐름과 전통이다. 여기서 혁명은 반드시 폭력적 봉기만을 뜻하지 않으며, 노동계급의 대중운동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가리킨다. 1796년 바뵈프의 평등파 음모와 블랑키의 봉기주의에서 마르크스·엥겔스, 파리 코뮌, 러시아 혁명가들, 그리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에 맞선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거쳐 레닌주의·트로츠키주의·룩셈부르크주의 같은 마르크스주의 흐름뿐 아니라 블랑키즘과 아나키즘까지 아우른다. 점진적 개혁을 내세운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와 대립한다.
상세
개념과 범위
혁명적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넘어가려면 사회 혁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는 사회주의의 흐름과 전통을 가리킨다. 영어판 백과사전은 여기서 말하는 혁명이 반드시 폭력적 봉기를 뜻하지는 않으며, 노동계급의 대중운동이 정치권력을 장악해 국가를 직접 통제하거나 폐지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한다. 프랑스어판 백과사전은 이를 혁명을 내세우는 사회주의의 급진적 흐름으로 정의하면서, 흔히 마르크스주의와 연결되어 레닌주의·트로츠키주의·평의회주의·룩셈부르크주의가 이 이름을 내세우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을 따르지 않는 블랑키즘과 아나키즘도 사회주의가 혁명을 거쳐야 한다고 보았다고 적는다. 이 흐름은 기존 제도를 개혁해 자본주의의 문제를 점차 고치려는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와 맞선다.
혁명적 사회주의는 특정 정당이나 학파의 이름이라기보다 ‘개혁이냐 혁명이냐’는 물음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그래서 서로 다른 시대와 나라에서 음모가, 봉기 지도자, 반란 수병, 이론가가 이 이름 아래 함께 묶인다.
바뵈프와 블랑키: 음모와 봉기의 전통
1796년 그라쿠스 바뵈프와 동지들(‘평등파’)은 사유재산을 폐지해 ‘완전한 평등’과 ‘공동의 행복’을 이루려고 총재정부 타도를 꾀했다. 음모는 밀고로 드러났고 바뵈프는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1828년 필리포 부오나로티가 『바뵈프의 평등을 위한 음모』를 펴내면서 후대에 널리 알려졌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평등파의 음모를 ‘실제로 행동한 공산주의 정당의 첫 출현’으로 보았다.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는 이 전통을 19세기로 이었다. 1824년부터 카르보나리 결사의 일원이었던 그는 당대의 공화파 음모에 두루 관여했고, 1839년 5월 12일 아르망 바르베스 등과 함께 파리에서 봉기를 일으켜 법원을 점거하고 시청을 잠시 차지했다. 거듭된 봉기 시도로 생애의 상당 부분을 감옥에서 보내 ‘갇힌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블랑키즘은 조직된 소수 혁명가 집단이 결정적 ‘일격’을 가해 민중을 혁명으로 이끌고, 권력을 잡은 혁명가들이 새로운 사회주의 체제를 세운다는 구상으로 요약되며, 일시적인 중앙집권적 독재의 필요를 내세웠다. 엥겔스는 1873년 블랑키를 무엇보다 ‘행동가’, 곧 잘 조직된 소수가 적절한 순간의 기습으로 인민 대중을 이끌 수 있다고 믿은 정치적 혁명가로 평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카를로 피사카네가 전위의 행동이 봉기를 불러일으킨다는 ‘행동에 의한 선전’을 이론화했고, 1857년 사프리 상륙 원정을 이끌다가 산차에서 죽었다.
마르크스·엥겔스와 1848년 이후
1848년 『공산당 선언』은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견해와 의도를 숨기기를 경멸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를 폭력적으로 전복해야만 이룰 수 있다고 공공연히 선언한다”고 썼다. 1848~1849년 혁명이 실패한 뒤 런던의 공산주의자동맹에서는 아우구스트 빌리히와 카를 샤퍼가 계속 혁명에 집중하려 한 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제 노동운동의 건설을 지향했고, 1850년 동맹은 갈라졌다. 『선언』이 나온 지 24년 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선진국에서는 노동이 ‘평화적 수단으로’ 목표에 이를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영어판 백과사전은 이 관점을, 사회 전체와 대중의 준비 상태를 고려하지 않고 활동적 소수가 무력으로 지배 엘리트를 타도하려 한 블랑키주의적 관점과 대비한다.
파리 코뮌과 러시아의 혁명가들
1871년 파리 코뮌에서 블랑키주의자들은 경찰(라울 리고 등)·사법·군사 부문의 요직을 맡았고, 공화파 자코뱅과 함께 공안위원회 설치에 가담했다. 코뮌에 참여한 프로스페르올리비에 리사가레는 망명지에서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아 1876년 『1871년 코뮌의 역사』를 펴냈다. 이 책은 프랑스에서 금지되어 몰래 퍼졌고, 엘리너 마르크스가 영어로 옮겼다.
러시아에서는 세르게이 네차예프가 1869년 비밀결사 ‘인민의 응징’의 규약으로 「혁명가의 교리문답」을 썼다. “혁명가는 운명이 정해진 사람이다”로 시작하는 이 문서에는 미하일 바쿠닌과 표트르 트카초프의 생각도 담겼다고 하지만, 바쿠닌은 읽은 뒤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05년 혁명기에는 군대 안에서 봉기가 잇따랐다. 6월 흑해 함대 전함 「포툠킨」에서 질 나쁜 음식 때문에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된 수병 봉기는 아파나시 마튜셴코가 이끌었고, 11월 세바스토폴 봉기에 가담한 해군 대위 표트르 시미트는 1906년 3월 6일 총살되었다. 1918년 핀란드 내전에서는 사회민주당 계열 언론인 알리 알토넨이 적위대의 첫 총사령관을 맡았다.
개혁이냐 혁명이냐
19세기 말 독일 사회민주당 안에서 이 물음은 수정주의 논쟁(1896년 이후)으로 터져 나왔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가 위기에 강하고 적응력이 있음이 드러났으므로 당은 기존 생산양식 안에서 사회 개혁으로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898~1899년 《라이프치히 인민신문》에 연재한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에서 사회민주주의에게 “사회 개혁을 위한 투쟁은 수단이고 사회 변혁은 목적”이라고 반박하면서, “최종 목표는 그것이 무엇이든 내게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라는 베른슈타인의 말을 그 이론의 요약으로 인용했다. 아우구스트 베벨의 당 지도부는 룩셈부르크 등 당 좌파, 카를 카우츠키를 중심으로 한 마르크스주의 중앙파와 함께 수정주의를 혁명적 계급 사회 폐지라는 강령에서 벗어난 것으로 거부했다. 그러나 1914년 8월 당은 전쟁 공채에 찬성했고, 이에 반대한 이들이 1917년 독립사회민주당을, 이어 독일 공산당을 만들었다.
20세기 이후와 이웃 흐름
10월 혁명 뒤 결성된 코민테른은 스스로를 혁명적 사회주의로 규정하기도 했다. 10월 혁명을 두고는 블랑키주의식 쿠데타로 보는 해석과, 볼셰비키가 소비에트에서 대중의 지지를 얻은 뒤에야 권력을 잡았다는 트로츠키 계열의 해석이 맞섰다. 1938년 제4인터내셔널을 만든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비롯해 오늘날 많은 트로츠키주의 단체가 개량주의에 맞서 이 이름을 내세운다. 혁명이 어떻게 시작되어야 하는지, 곧 봉기를 누가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는 이 전통 안에서 오래 논쟁거리였다. 룩셈부르크는 혁명적 자발성 이론으로 알려졌고, 비판자들은 그가 자발성을 과대평가하고 당 조직의 역할을 소홀히 했다고 보았다. 블랑키의 사상과 실천은 「블랑키즘」, 베른슈타인 이후의 개혁 노선은 「개량주의」와 「수정주의」 항목에서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