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7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해결책은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나는 대안을 보지 못한다."
1931년 스테파나케르트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88년 2월 24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되어 불과 4일 전 지역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를 통과시킨 직후의 폭발적 상황을 물려받았다. 임기 중 3월 당 플레넘을 주재해 모스크바에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 이관을 공식 요청했고, 7월에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고 선언했다. 모스크바는 1989년 1월 그를 해임하고 아르카디 볼스키의 특별관리위원회로 대체했으며, 해임 후 모스크바에서 은퇴 생활을 하다 2000년 사망했다.
1999년 12월 31일 모스크바 시간 낮 12시 신년사 방송에서: "여러분, 나는 사임합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우리의 많은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1931년 우랄 부트카에서 집단화로 몰락한 부농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2007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건설 기술자로 일하다 1961년 입당해 스베르들롭스크 주 당 제1서기(1976–85)와 모스크바 당 제1서기(1985–87)를 지냈고, 1987년 10월 21일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지도부를 비판한 뒤 해임되었다. 1990년 러시아 연방 인민대의원, 이어 최고소비에트 의장(1990–91)이 되었고 1991년 6월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9년까지 재임했다.
1977년 응구아비 암살의 공모 혐의로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가봉의 오마르 봉고가 개입해 총살형을 면했다.
농작물 유전학을 전공한 생물학자 출신 정치인으로, 1963년 32세에 마삼바데바 정권의 총리가 됐다. 콩고인민공화국 시절 응구아비 암살 연루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석방돼 프랑스에서 망명했고, 1991년 주권 국민회의의 과도 총리 선거에서 초반 투표를 선두로 달리다 4차 투표에서 밀롱고에게 패했다. 1992년 사회민주주의 정당 UPADS를 이끌고 사수응게소를 꺾어 콩고 최초의 민주 선거 대통령이 됐으나, 1997년 내전에서 패해 다시 망명했다.
자치주는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가깝지만, 높은 산으로 분리되어 있다. (1977년 국제 저널 인터뷰에서)
아제르바이잔 샤마흐 태생의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73년 헤이다르 알리예프에 의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 제1서기로 임명되어 1988년까지 재임했다. 카라바흐 외부 출신으로 알리예프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며,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족적 요구를 억압하고 바쿠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77년 국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카라바흐가 '높은 산으로 아르메니아와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해 동족의 분노를 샀고, 1988년 2월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해임되었다. 1992년 바쿠에서 체포·투옥되었다가 1993년 알리예프의 사면으로 석방된 뒤 모스크바로 이주해 중학교 역사 교사로 일하다 1998년 사망했다.
아르메니아를 14년간 이끌며 현대화하고, 카라바흐에 동조해 실각한 후 복귀했으나 의회 총격으로 암살당하다
1975년 4월 23일, 데미르찬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의 조직자들을 공식 규탄하며 공화국의 이름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예레반 전기기술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을 거쳐 1974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취임하여 1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 중 메차모르 원자력발전소와 예레반 지하철을 비롯한 현대적 기반시설을 건설했고, 1975년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최초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공식 규탄했다. 1978년 공화국 헌법에 아르메니아어를 국어로 명기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1988년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에서 민중 시위에 동조한 이유로 모스크바에 의해 '건강상 사유'로 해임되었다. 소련 붕괴 후 1998년 대선에 출마해 결선에서 40%를 득표하고 1999년 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의회 총격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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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1966예레반 전기기술공장: 기술자·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
1959–1961CPSU 중앙위 고등당학교 수료
1966–1972예레반 시당위 서기 → 제1서기
1972–1974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서기
1974–1988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76–1988 아르메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의장 겸임)
1990년 1월 고르바초프가 빌뉴스까지 날아와 당의 분리를 되돌리라고 압박했을 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정은 당대회가 내렸고, 그것을 되돌릴 권한은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경제 관리자 출신으로 1988년 사유디스의 지지 속에 리투아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12월 당을 소련공산당에서 분리하는 결정을 이끌었다. 연방 공화국의 집권당이 모스크바와 결별한 첫 사례였다. 독립 후인 1993년 첫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옛 공산당원이 선거로 집권할 수 있음을 보였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NATO·유럽연합 가입의 길을 열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총리를 지냈다.
1990년 말, 그는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당을 이끌었지만 그 당의 통치 기반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스테판 포고샨은 역사학자 출신의 아르메니아 공산당 정치가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대중매체와 출판 행정을 오래 맡았다. 그는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가 진행되던 시기에 당의 국가적 기반과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는 과정을 대표했다. 1990년 말부터 1991년까지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이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으로 활동한 뒤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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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1958예레반 국립대학교 콤소몰 위원회 서기
1958–1962아르메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간부, 예레반 시 콤소몰 제1서기
1962–1967아르메니아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제1서기
1967–1970아라라트 지구당위원회 제1서기
1970–1988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국가 텔레비전·라디오 위원회 의장
1988–1990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산하 정보통신사 사장, 국가출판위원회 의장
1989년 6월 27일, 호른과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알로이스 모크는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볼트커터로 철조망을 함께 끊으며 '철의 장막'에 첫 구멍을 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개혁파 외교관료에서 민주화 이후 총리까지 역임한 정치가로, 1989년 외무장관으로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알로이스 모크와 함께 절단하며 '철의 장막' 붕괴의 상징적 순간을 연출했다. 동독 난민들의 서독 탈출을 위한 헝가리 국경 개방을 주도하여 독일 통일의 물꼬를 텄고, 이는 1989년 동유럽 혁명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1994년 총선에서 헝가리 사회당을 압승으로 이끌어 총리가 되었고, 보크로시 긴축 개혁으로 시장경제 전환의 틀을 다졌다. 그의 정치 인생은 1956년 혁명 진압 부대 복무라는 깊은 그림자와 1989년 국경 개방의 역사적 공로 사이에서, 20세기 헝가리 좌파의 모순을 온몸으로 체현했다.
사임하던 1991년 8월 회의장을 나서며 그는 "나는 떠나지만, 훗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고, 이후 정치를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라고 불렀다.
카호르 마흐카모프는 광산 기술자 출신의 타지크 공산당 관료로, 계획경제와 공화국 행정을 오래 이끌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민족적 자기의식과 정치적 동요를 키우던 시기에 그는 체제를 개혁하려 했지만 대중의 불신과 민족주의적 압력에 부딪혔다. 1990년 타지키스탄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1991년 모스크바의 8월 쿠데타를 지지한 뒤 사임했다. 그의 경력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제도적 연속성과 해체기의 정치적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소련 해체 협정에 서명했던 포킨은 2016년 인터뷰에서 '남자로서 부끄럽지만 크림반도가 병합됐을 때 나는 아이처럼 울었다'고 고백했다.
비톨트 포킨은 광산 기술자 출신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경제관료로, 계획경제의 운영과 국가 전환을 함께 경험했다. 그는 독립 직전과 직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끌며 경제 위기와 연방 해체의 압력을 조정해야 했다. 1991년 12월 레오니드 크라프추크와 함께 우크라이나 대표로 벨로베시 협정에 서명해 소련 이후 질서의 출범에 참여했다. 말년에는 돈바스 협상에서 논쟁적인 입장을 보여 공적 역할에서 물러났다.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숨가이트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하여, 나는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2~1988)로,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모스크바로 승진한 후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개인적으로 청렴했으나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지도자였으며, 1988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의 아르메니아 이관 결의와 숨가이트 포그롬이 잇따르자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불신 속에 5월 사임하면서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고 말했고, 이후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1990년 10월 25일 최고회의 대통령 선출에서 그도 아파스 주마굴로프도 과반을 얻지 못했고, 10월 27일 아카예프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95년 선거에서는 아카예프 71.6퍼센트, 마살리예프 24.4퍼센트로 패했다.
키르기스 소비에트의 당·국가 지도자로 1933년 4월 10일 오시주 알리시 마을에서 태어나 2004년 7월 31일 비슈케크에서 사망했다. 광산 기술자로 교육받고 1956년부터 키질키야 탄광관리국에서 일했으며 당·국가기구로 올랐다. 1985년 11월 2일 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선출되어 1991년 4월 6일까지 재임했고, 1986~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 1990년 7월 14일~1991년 4월 25일 정치국원이었다. 1990년 최고회의 의장을 지냈고 대통령 선출과 1995년 선거에서 아카예프에게 패했다. 1992년 9월부터 2004년까지 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을 이끌었다. 사망일은 출처에 따라 7월 31일과 8월 1일로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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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1961키질키야 탄광관리국 콤소몰스카야 광산의 광산부문 부총공학자, 이어 키르기즈우골 트러스트 부총공학자
1961–1973오시주 당위원회 강사, 알마아타 고등당학교 수학, 당·국가 감독 기관 근무, 오시주 당위원회 산업·교통부장, 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장, 타시쿠미르 시 당위원회 제1서기
1972–1974프룬제 시 집행위원회 의장
1974–1979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1979–1985이식쿨주 당위원회 제1서기
1985–1991키르기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5년 11월 2일 제21차 전원회의에서 선출, 1991년 4월 6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기구로 이동하며 해임). 1986~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 1990년 7월 14일~1991년 4월 25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
1990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1990년 4월 10일 제12차 소집 최고회의 첫 회의에서 선출, 12월 10일 본인 요청으로 해임)
1991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이념부문 고문(1991년 4~8월)
1992–2004키르기스스탄 공산주의자당 지도자(1992년 9월부터). 당 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공산당연합-소련 공산당 이사회 집행위원 겸 부의장
1993–1996산업안전·광산감독 국가검열국장(1993년 1월~1996년 6월)
1994–2004이. 라자코프 재단 이사장(1994년부터)
1995–2004주고르쿠 케네시 인민대표회의 의원(1995년 4월 선출, 2000년 4월 재선), 2000년부터 입법회의 의원
블라디미르 몹시샨은 아르메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농업·당 관료로 성장한 정치가였다. 1990년 공산당 제1서기와 소련 공산당 정치국원이 되었지만,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의 해결이 지연되자 정치국을 떠났다. 소련 해체 뒤에도 난민 행정과 국방, 농업 정책에 관여하며 독립 아르메니아의 국가 건설에 참여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MSZMP) 정치국원이자 개혁파의 이념적 후견자였다. 1989년 1월 28일 라디오에서 1956년 혁명을 '민중봉기'라 규정해 당의 정통성을 스스로 무너뜨렸고, 5월 서베를린에서는 베를린 장벽을 '치욕'이라 부르며 동독 체제를 비판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함께 범유럽 피크닉을 후원해 철의 장막에 첫 균열을 냈고, 이후 헝가리 사회당 부의장을 거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1년 쿠데타 패배 뒤 그는 국가비상사태위원회의 결성을 “당에 대한 범죄”라고 불렀다.
아나톨리 말로페예프는 노동자 출신으로 당 조직을 거쳐 벨로루시아의 공화국 지도부에 오른 소비에트·벨로루시아 정치가였다. 그는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에 지역 행정 경험과 연방 중심의 당 노선을 바탕으로 공산당을 이끌었고, 1991년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지지했다. 쿠데타 패배 뒤에도 당 조직의 재건을 모색했으며, 이후 독립 벨로루시아의 의회 정치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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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고멜 출생
1949–1952고멜·민스크 차량수리공장에서 기계공
1952–1956소비에트 해군 복무
1962–1975고멜·모지리 당 조직에서 근무, 모지리 시당 제1서기와 고멜주 당위원회 서기
엘미라 카파로바는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교육·외무 행정을 거쳐 공화국 최고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1990년 1월 바쿠에 계엄을 선포하고 소련군을 투입한 조치에 맞서, 자신이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결정이 내려졌다고 밝히며 공화국 주권 침해를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이 드문 제도적 반발은 소비에트 연방의 민족문제가 공화국 제도와 대중운동, 연방 권력의 충돌로 폭발한 순간을 보여 준다.
벨로베즈까지 우리가 걸어온 길은 멀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1958년 입당해 30여 년간 우크라이나 공산당 선전·이념 부서를 오르내린 당료였으나, 1990년 최고소비에트 의장에 오르며 '민족공산주의'로 방향을 틀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는 연방이 아닌 연합(конфедерация)을 고수하며 신연방조약 서명을 9월로 미루었고,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 후 8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선언을 주재했다. 그해 12월 1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일주일 뒤 옐친·슈시케비치와 벨로베즈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의 종말을 확정지었다. 대통령 재임 중 핵무기 포기와 경제 침체로 비판받았으나, 평화로운 정권 교체로 퇴진해 의원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고르바초프가 물었다. '국제사회 반응은 생각했나?' 나는 답했다. '옐친이 지금 부시와 통화 중입니다. 부시는 찬성하는 눈치입니다!'
민스크에서 태어난 핵물리학자로, 벨라루스 국립대학 교수이자 라디오전자공학 전문가였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조사위원회에서 소련 당국의 은폐에 맞서 진실 공개를 요구하다 해임되었고, 이 경험이 그를 정치로 이끌었다. 1991년 벨라루스 최고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비스쿨리 사냥 별장에서 옐친·크랍추크와 회동을 주최했으며, 원래 석유·가스 공급 논의로 시작된 자리에서 소련 해체 선언문에 처음으로 서명 의사를 밝혔고, 고르바초프에게 전화를 걸어 소련이 끝났음을 통보했다. 독립 벨라루스의 첫 국가원수였으나 1994년 루카셴코의 부패 의혹 공세로 실각했고, 말년에는 망명하지 않고 민스크에서 루카셴코 정권을 비판하는 야당 원로로 남았다.
그리고레 예레메이는 소련 말기 몰다비아의 당·국가 관료로, 소비에트 체제의 마지막 국면을 당 내부에서 관리한 인물이다. 그는 몰다비아 공산당 제1서기로 재임하며 연방 해체와 공화국 독립이 겹친 1991년의 전환을 통과했다. 당 해산 뒤에는 몰도바의 외교관과 국회의원으로 활동해 소비에트 정치 경력과 독립국가의 제도 정치 사이를 잇는 행보를 보였다.
1991년 8월 쿠데타 시도 뒤 체포되어, 소련 연방 질서를 지키려던 정치가에서 수감된 피고인이 되었다.
알프레드스 루빅스는 리가의 도시 행정과 라트비아 공산당에서 성장한 라트비아 공산주의 정치가였다. 그는 소련 체제와 라트비아의 독립을 둘러싼 충돌에서 당의 연방적 질서를 지키려 했고, 1991년 8월 쿠데타를 지지한 혐의로 체포되어 유죄 판결과 수감으로 정치적 책임을 졌다. 출소 뒤에도 사회주의당을 이끌고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이어 갔다.
2002년 대선을 이틀 앞두고 후보직을 사퇴하며 '투표의 투명성 조건이 보장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독립 직후 콩고의 첫 국고총감을 지낸 재정 기술관료로, 이후 세계은행 이사를 거치며 국제금융계에 몸담았다. 일당체제가 무너지는 1991년 주권 국민회의에서 4차 투표 끝에 과도 총리로 선출되어 집행권을 받고 다당제 선거까지 이끌었다. 과도기를 마친 뒤 민주공화연합(UDR-Mwinda)을 창설해 드니 사수응게소 정권의 대표적 야당 인물로 남았다.
체르노빌 참사 당시 모스크바 반대를 무릅쓰고 어린이 52만 명 대피를 관철한 우크라이나 최고회의 의장
'불은 껐고, 다 정상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는 결혼식, 하나는 텃밭, 하나는 프리피야티 강에서 낚시질입니다.' 내무차관의 4월 26일 아침 보고를 이렇게 전했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으로서, 모스크바의 지시와 달리 키이우와 오염 지역에서 어린이 52만 6천 명을 닷새 만에 대피시킨 인물이다. 크리비리흐 광부의 딸로 태어나 콤소몰과 교육부 차관을 거쳐 1985년 공화국 국가원수 자리에 올랐으며, 재임 기간 내내 중앙의 정보 통제와 싸우며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1989년 우크라이나 인민운동(Rukh) 금지 결의안에 서명을 거부했고, 은퇴 후 아동·여성 복지 재단을 이끌며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긍정적 회고와 독립 우크라이나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