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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지휘 인물 424명

레이먼드 A. 스프루언스

Raymond Ames Spruance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인 1886–1969 ○ 자연사

미드웨이의 냉정한 항공전 지휘관

깊은 위기에서도 침착하고 결단력 있었으며, 모든 기회를 과감히 붙잡았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선에서 미국 해군의 항공모함 작전을 지휘한 제독이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을 거느린 제16기동부대를 지휘해 일본의 항공모함 네 척을 격침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신중한 판단과 침착한 지휘로 명성을 얻었으며, 전후에는 해군대학 총장과 필리핀 주재 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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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미국 해군사관학교 졸업
  • 1913–1922구축함 지휘 및 태평양 함대 복무
  • 1935–1938해군대학 교관
  • 1938–1939전함 미시시피 함장
  • 1942제16기동부대 지휘, 미드웨이 해전
  • 1943–1945중부 태평양군 및 제5함대 사령관
  • 1946–1948해군대학 총장
  • 1952–1955필리핀 주재 미국 대사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Gotthard Heinrici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86–1971 ○ 자연사

동부전선의 방어전문가

1945년 4월 16일, 소련군 포격 직전 전방 참호의 주력을 후방 진지로 철수시켜 방어선을 보존했다.

고트하르트 하인리치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국방군의 고위 지휘관으로서 동부전선 방어전의 전문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소련 침공과 점령전쟁에 참여했으며, 전쟁범죄와 정치적 명령이 작전 영역에 스며든 현실에서 지휘 책임을 졌다. 1945년 육군집단 비스툴라 사령관이 된 그는 소련군의 주공을 예측하고 제로 고지를 중심으로 종심 방어를 구축했지만, 그 전술적 성과는 패배를 뒤집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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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프로이센 육군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동부전선 복무, 참모 장교
  • 1937–1940제16보병사단 사단장
  • 1940–1941제12군단장, 프랑스 전역과 소련 침공 참전
  • 1942–1944제4군 사령관, 동부전선 방어전 지휘
  • 1944–1945제1기갑군 사령관, 폴란드·슬로바키아 방면 후퇴전 지휘
  • 1945.03–04육군집단 비스툴라 사령관, 제로 고지 전투와 베를린 방어 지휘
  • 1945–1948영국군 포로, 1948년 석방

주더

朱德
군사·지휘 중국 중국 1886–1976 ○ 자연사

중국 홍군과 인민해방군을 창건한 총사령관, 10대 원수 중 제1인자

암살자들이 권총을 겨누자 "쏘지 마시오. 나는 그냥 취사병이오"라고 말해 살아남았고, 병사들은 그를 '취사반장'이라 불렀다.

중국 공산혁명의 군사적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이다. 1928년 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해 '주-마오 군대'를 형성했고, 게릴라전을 전략 차원으로 끌어올려 대장정·항일전쟁·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부주석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으며, 1955년 10대 원수 중 첫 번째로 임명되었다. 군벌 장군에서 아편을 끊고 공산주의자로 거듭난 그의 삶은 중국 혁명의 궤적을 가장 완전하게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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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윈난군관학교 졸업, 신해혁명 참가
  • 1922베를린에서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공산당 입당
  • 1927난창 봉기 공동 지휘 — 인민해방군의 기원
  • 1928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 — '주-마오' 제4홍군
  • 1930중국 홍군 총사령관, 1~4차 포위섬멸전 승리
  • 1934–1935대장정에서 홍군 총사령관
  • 1937–1945팔로군 총사령관, 백단대전 지휘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10대 원수 중 제1위

바실리 이바노비치 차파예프

Василий Иванович Чапа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7–1919 ✕ 전사

소련 영화와 민담으로 되살아난 내전의 전설적 지휘관

내가 목수였을 땐 목숨이 전혀 아깝지 않았어. 용감했지. 그런데 지금은 좀 더 잘 살게 되면서 새로운 삶을 알게 됐다. 이제는 그때의 내가 아니야—이제는 목숨이 아까워.

가난한 농민 출신의 붉은 군대 지휘관. 정규 군사교육 없이 과감한 전술과 카리스마로 내전의 전설이 되었다. 1919년 우랄 전선에서 전사했으나 푸르마노프의 소설과 영화로 소비에트 영웅으로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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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7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 326 벨고라이 연대에서 복무하며 펠트페벨까지 승진.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3개 수훈.
  • 1917–1918볼셰비키 입당. 니콜라옙스크에서 붉은위병대 조직, 니콜라옙스크 제1·제2연대 지휘.
  • 1918제2니콜라옙스크사단장으로 우랄 코사크 및 체코군단과 교전. 능선을 따라 사마라 방면으로 진격.
  • 1918–1919붉은 군대 참모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학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의로 이탈.
  • 1919제25소총병사단장으로 부활. 부구루슬란, 벨레베이, 우파 작전에서 두각. 적기훈장 수훈.
  • 1919.6–9우랄 전선으로 재배치. 특별집단 지휘관으로 우랄스크 포위 해제. 9월 5일 르비셴스크에서 코사크 기습으로 전사.

게오르기 바실리예비치 지노비예프

Георгий Васильевич Зиновье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인 1887–1934 ○ 자연사

공군 출신의 붉은 군대 지휘관

제1차 세계대전 공중전에서 게오르기 십자훈장 4개를 받은 비행사는 혁명 편으로 돌아서 1920년 옛 부하라 성채 공략을 직접 지휘했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는 제1차 세계대전의 군용 비행사에서 혁명과 내전의 적군 지휘관으로 변모한 군인이다. 그는 1919년 동부전선 반격에서 투르키스탄군을 이끌어 부구루슬란, 벨레베이, 우파 작전에 참여했고, 콜차크군의 진격을 되돌리는 데 기여했다. 전후에는 군사교육과 공병 지휘를 맡으며 초기 소비에트 군대의 제도화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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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서부전선 제2군 제3시베리아소총군단 항공대 비행사
  • 1917제3시베리아소총군단 병사위원회 의장
  • 1918스몰렌스크 주둔군 사령관
  • 1918–1919오렌부르크·악튜빈스크 전선 지휘관
  • 1919투르키스탄군 사령관
  • 1919–1920제1군 사령관
  • 1920–1921투르키스탄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32–1934군사공병아카데미장 겸 정치위원

아우구스트 이바노비치 코르크

Август Иванович Корк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에스토니아 1887–1937 ✕ 처형

제국 장교에서 붉은 군대 최고위 사령관으로

“코르크는 나의 자랑이다. 각 전선마다 제1바이올린을 켜는 사령관이 있듯, 서부전선에서는 코르크가 그 바이올린이다” — 총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 1920년 투하쳅스키에게 보낸 직통 회선에서

에스토니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짜르 군대 참모본부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정예 장교였다. 1918년 자원입대한 붉은 군대에서 내전기 제15군 사령관으로 페트로그라드를 방어하고 폴란드 전선에서 공세를 지휘했으며, 제6군 사령관으로 페레콥-촌가르 작전에서 브란겔의 백군을 격멸했다. 내전 후 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까지 오르며 붉은 군대 최고위 사령관(2급 군사령관)이 되었고, 독일 주재 무관으로도 복무했다. 1937년 투하쳅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어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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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4제98 유리예프스키 보병연대 장교, 이후 니콜라예프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급)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제20군단, 제3시베리아군단, 제10군 참모 장교; 서부전선 항공 담당 장교 (참모 대위)
  • 1918.06붉은 군대 자원입대, 전러시아 총참모부 작전과 근무
  • 1919.02–05에스토니아 적군 (에스토니아 노동코뮌 군대) 참모장
  • 1919.06–08제7군 부사령관 — 페트로그라드 방어, 유데니치 군 격퇴
  • 1919.08–1920.10제15군 사령관 — 폴란드-소비에트 전쟁
  • 1920.10–1921.05제6군 사령관 — 페레콥-촌가르 작전, 브란겔 백군 최종 격멸
  • 1921–1922하리코프 군관구 사령관, 이후 우크라이나·크림 군 부사령관
  • 1922–1923투르케스탄 전선군 사령관 — 바스마치 반군 진압
  • 1924–1927서부 군관구 사령관 → 캅카스 적기군 사령관 →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
  • 1927–1928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28–1929소련 주독 무관; 독일 국가방위군 교육 시설에서 연수
  • 1929.05–11붉은 군대 보급국장
  • 1929–1935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35–1937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겸 정치위원 (2급 군사령관)
군사·지휘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인 1887–1945 ✕ 자살

오키나와 소모전을 지휘한 일본군 장군

패전이 확정된 뒤에도 그는 항복 권고를 거부하고 최후 명령으로 끝까지 싸우라고 지시했다.

우시지마 미쓰루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로, 중국 침략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지휘관을 맡았다. 1944년 오키나와에 배치된 뒤 제32군을 이끌며 해안 결전 대신 남부의 종심 방어와 소모전을 택했지만, 그 방어 체계는 주민 동원과 전투 편입을 수반했다. 1945년 5월 슈리에서 남부로 철수한 결정은 전투를 연장했으나 피란민을 전장에 몰아넣어 주민 희생을 키웠고, 그는 항복을 거부한 채 6월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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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육군사관학교 제20기 졸업, 보병 소위
  • 1916육군대학교 제28기 졸업
  • 1918–1919시베리아 출병군 참모, 수송·배치 담당
  • 1937–1939제36보병여단장, 중국 전선 지휘
  • 1939–1941제11사단장, 만주국 호림 주둔
  • 1942–1944육군사관학교장
  • 1944–1945제32군 사령관, 오키나와 방어 지휘
  • 1945육군대장 승진, 마부니에서 자결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

Heinrich von Vietinghoff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87–1952 ○ 자연사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 항복을 대표한 장군

1945년 4월 29일 카세르타에서 그의 대리인들이 독일군의 이탈리아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프로이센 군인 가문 출신인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는 제국군과 국가방위군을 거쳐 국방군의 상급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폴란드 침공과 소련 침공에 참여했고, 1943년부터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의 방어전을 지휘했다. 1945년 4월 카세르타에서 연합군과 항복 조건을 조율하고 군을 대표해 서명하게 함으로써, 독일군의 이탈리아 전쟁을 끝내는 절차의 핵심 당사자가 되었다. 전후에는 포로 생활 뒤 서독 재무장 논의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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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8프로이센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9–1935국가방위군 장교, 육군부와 군단 참모 복무
  • 1938–1939제5기갑사단 사단장
  • 1940–1942제46기갑군단 사령관, 발칸 및 동부전선 지휘
  • 1942–1943제9군 및 제15군 사령관
  • 1943–1944이탈리아 제10군 사령관, 구스타프선과 고딕선 방어
  • 1944–1945육군집단 C 및 남서방면군 최고지휘관
  • 1945카세르타 항복 협정에서 독일군 대표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

Alexander Vandegrift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네덜란드인 1887–1973 ○ 자연사

과달카날을 지키고 해병대를 지킨 장군

1946년 상원에서 그는 해병대의 미래를 의회가 결정해야 한다며, “무릎 꿇는 것은 우리 군단의 전통이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알렉산더 밴더그리프트는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에서 상륙작전과 방어를 결합한 지휘관이었다. 그는 1942년 8월 제1해병사단을 이끌고 과달카날에 상륙해 헨더슨 비행장을 중심으로 한 교두보를 지켰고, 이 공세는 미국의 첫 대규모 지상 반격이 되었다. 전후에는 해병대 사령관으로서 육군 편입론에 맞서 해병대의 독자적 역할을 의회에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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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미국 해병대 소위로 임관
  • 1912–1914쿠바·니카라과·멕시코 원정 복무
  • 1915–1923아이티 점령 및 헌병대에서 복무
  • 1942제1해병사단장, 과달카날 상륙과 방어 지휘
  • 1943제1해병상륙군단장, 부건빌 상륙 지휘
  • 1944–1947제18대 미국 해병대 사령관
  • 1945현역 해병 최초로 대장 진급
  • 1964회고록 《Once a Marine》 출간

에리히 폰 만슈타인

Erich von Manstein
군사·지휘 나치당·나치 정권 독일 독일 1887–1973 ○ 1949년 전범 유죄, 53년 석방

나치 독일 최고의 작전 전략가이자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정점

"프로이센의 야전원수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를 이 한 마디로 답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나치 독일의 야전원수이자 동부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작전적 두뇌로 꼽혔던 군인이다. 1940년 프랑스 침공의 아르덴 우회 기동안(낫질 작전)의 입안자이며, 1941~42년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키고 1943년 2~3월 하리코프에서 소련군의 과신장된 진격을 역습해 독일 남부전선의 붕괴를 막고 쿠르스크 돌출부를 형성시켰다. 히틀러와의 작전적 불화로 1944년 3월 해임되었고, 전후 영국 군사재판에서 전쟁범죄로 18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53년 석방되어 서독 군 재건에 조언했다.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는 홀로코스트와 국방군 범죄를 외면한 채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주춧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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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프로이센 근위보병 제3연대 소위 임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양 전선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하고 대위로 종전
  • 1920s–1935제국방위군 참모·지휘관, 국방성 근무; 소령에서 대령으로
  • 1936육군 참모본부 수석 부참모총장 (소장)
  • 1939–1940폴란드·프랑스 전역: 남부집단군 참모장, 낫질 작전 입안, 제38군단장
  • 1941–1942제11군 사령관: 크림반도·세바스토폴 함락; 야전원수 진급
  • 1942–1944돈 집단군→남부집단군 사령관; 하리코프 역습, 쿠르스크 남부 축; 1944년 3월 해임
  • 1949–1955전쟁범죄로 18년 형(1953년 석방); 『잃어버린 승리』 출간, 서독 군사 고문

버나드 몽고메리

Bernard Law Montgomery
군사·지휘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1887–1976 ○ 자연사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지상군 지휘관

1944년 6월 12일 노르망디에서 병사들에게 말했다. “여러분과 나는 곧 함께 임무를 수행해야 합니다.”

버나드 몽고메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과 병사 훈련에 대한 집착을 바탕으로 지휘관이 된 영국 육군 원수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엘알라메인에서 제8군을 재건해 승리를 이끌었고, 이후 시칠리아와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을 앞두고 제21군집단을 맡아 초기 연합군 지상군을 통솔했으며, 상륙 규모를 확대하고 해안 교두보를 넓히는 구상을 추진했다. 그의 신중하고 통제적인 작전 방식은 병력 손실을 줄이는 장점과 전쟁을 느리게 한다는 비판을 함께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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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왕립 워릭셔 연대 임관
  • 1914–1918서부전선 참전, 제47런던사단 참모장
  • 1942–1943제8군 사령관, 엘알라메인 전투 지휘
  • 1943제8군 사령관, 시칠리아·이탈리아 침공 지휘
  • 1944제21군집단 사령관, 노르망디 상륙 초기 연합군 지상군 지휘
  • 1944–1945제21군집단 사령관, 북서유럽 전역 지휘
  • 1946–1948제국참모총장
  • 1951–1958유럽연합군 최고사령부 부최고사령관

네스토르 이바노비치 마흐노

Нестор Иванович Махно

볼셰비키·백군·독일군·민족주의자를 차례로 상대한 아나키스트 농민군 사령관

1918년 6월 크렘린. 레닌은 마흐노에게 "당신 같은 아나키스트라면 우리도 기꺼이 협력할 텐데"라고 말했지만, 마흐노는 2년 뒤 볼셰비키의 배신을 두 번 겪었다.

우크라이나 아나코-공산주의 혁명가. 농민군을 이끌고 자유지구라는 무정부주의 자치 실험을 주도했다. 적군과 두 차례 동맹으로 백군을 격퇴했으나 매번 배신당했고, 망명 후 파리에서 회고록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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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훌랴이폴레 아나코-공산주의 그룹 '자유 경작자 연맹' 가입, 부유층 몰수 시작
  • 1910사형 선고 후 연소 감형으로 종신 노역형; 부티르카 감옥에서 아르시노프에게 이론 교육을 받음
  • 1917–1918사면 후 훌랴이폴레 귀환, 소비에트 의장 겸 흑위대 조직, 지주 토지 몰수
  • 1919.2–6적군과 동맹, 제1자드네프롭스크 사단 제3여단장; 트로츠키가 무법자로 선언하자 결별
  • 1919.7–10우크라이나 혁명반란군 총사령관; 데니킨 후방 600km 기습으로 백군 모스크바 진격 교란; 자유지구 선포
  • 1920.10–11브란겔에 맞서 적군과 재동맹, 크림 작전 참가; 승리 직후 적군이 마흐노 부대 포위·섬멸
  • 1921–1925루마니아·폴란드·단치히를 거쳐 파리로 망명
  • 1925–1934파리 망명 중 무정부주의 활동, 회고록 집필, 골결핵으로 사망

세르게이 비탈리예비치 므라치콥스키

Сергей Витальевич Мрачковский

우랄의 붉은 지휘관

1926년 지노비예프파가 스탈린과 결별하자 좌익 반대파는 누구와 연합할지 고민했다. 므라치콥스키의 답은 단호했다: '아무와도 안 된다. 지노비예프는 도망치고, 스탈린은 속일 것이다.'

우랄의 볼셰비키 조직가이자 내전 영웅으로, 특수북부원정대를 지휘해 토볼스크를 점령하고 두 차례 적기훈장을 받았다. 이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바이칼-아무르 철도(BAM) 초대 건설 책임자가 되었다. 좌익 반대파의 핵심 인물로, '지노비예프는 도망치고 스탈린은 속일 것이다'라는 유명한 경구를 남겼으며 1936년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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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우랄 혁명·적군 지휘관
  • 1923–1927좌익 반대파 활동과 제명
  • 1935–1936수감, 첫 모스크바 재판과 처형

하인츠 구데리안

Heinz Wilhelm Guderian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88–1954 ○ 자연사

기갑전의 설계자이자 나치 독일의 장군

1940년 5월, 그는 뫼즈를 건넌 기갑부대가 보병을 기다리지 말고 해협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전차를 집중 운용하는 기동전 교리를 발전시켜 독일 기갑부대의 형성과 초기 전격전 승리에 기여한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과장해 ‘기갑군의 아버지’로 내세웠지만, 그 구상은 오스발트 루츠와 여러 장교들의 작업 위에 세워졌다.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 그는 아르덴을 돌파해 뫼즈를 건너 영국 해협까지 신속히 진격하자고 밀어붙였고, 이 작전은 연합군을 덩케르크 일대에 고립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치 정권과 협력했고 동부전선의 침략전쟁과 점령 범죄에 연루된 지휘관이었으며, 전후 회고록은 자신의 책임과 정권과의 결합을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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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하노버 경보병대대 장교
  • 1914–1918제1차세계대전 참전, 통신·참모 장교
  • 1927–1931육군수송·차량화 부대 참모 및 교관
  • 1935–1938제2기갑사단 지휘관, 차량화 부대 감찰관
  • 1938–1940제19군단 사령관, 서부전역 기갑 지휘
  • 1941제2기갑집단 사령관, 바르바로사 작전
  • 1943–1945기갑부대 총감찰관, 육군참모총장 직무대행

얀 카를로비치 베르진

Jānis Ян Карлович Берзин Bērziņš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라트비아 1889–1938 ✕ 총살

군사정보국(GRU)을 세우고 대숙청에 삼켜진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1935년 2월 덴마크에서 열린 비밀 주재원 회의가 발각되어 중앙기구 간부 네 명이 한꺼번에 체포되었고, 베르진은 사표를 냈다.

라트비아 출신으로 본명은 페테리스 큐지스이며, 1889년 리가 근처의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나 1938년 처형되었다. 1905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해 라트비아에서 무장 활동을 벌였고, 경찰 살해로 카토르가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이르쿠츠크 유형에서 1914년 탈출했다. 1919년 소비에트 라트비아 내무인민위원 대리, 1920년부터 적군 정보부에서 일했으며 1924~35년 제4(정보)국장으로 소련 군사정보 체계를 세웠다. 1936년 스페인 공화파 수석 군사고문을 지내고 1937년 정보국장에 복귀했으나, 그해 11월 체포되어 1938년 7월 29일 처형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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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07RSDLP 입당, 16세에 라트비아에서 무장 활동
  • 1907–14경찰 살해로 8년 카토르가형(미성년으로 2년 감형), 복역 후 이르쿠츠크 유형, 1914년 탈출
  • 1917겨울궁전 습격에 참가, 12월부터 체카에서 근무
  • 1919.1–5소비에트 라트비아 내무인민위원 대리
  • 1920–24적군 정보부(GRU 전신)에서 근무
  • 1924–35제4(정보)국장, 소련 군사정보 체계를 세움
  • 1935.4–1936.6코펜하겐 실패로 사표를 내고 극동특별군(OKDVA) 부사령관
  • 1936.10–1937.5스페인 공화파 수석 군사고문 «그리신 장군», 레닌훈장 수훈
  • 1937.6–8GRU 국장 재임명, 두 달 만에 해임·체포
  • 1937.11–1938«라트비아 민족중심» 사건으로 11월 27일 체포, 1938년 7월 29일 처형, 1956년 복권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치 메호노신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ехонош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89–1938 ✕ 처형

적군 창설의 조용한 설계자, 차리친에서 스탈린과 맞선 트로츠키의 대리인

1918년 1월 브레스트 평화 협상 중, 레닌이 주재한 당 간부회의에서 메호노신은 "우리에겐 실질적 전투력이 없다. 전선은 벌거숭이다. 싸울 수 없다"고 보고했다.

콘스탄틴 메호노신은 적군 창설기의 핵심 군사 조직가로,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10월 무장봉기를 준비하고 이어 군사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으로서 포드보이스키·스클랸스키와 함께 신생 적군의 골격을 세웠다. 공화국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여러 전선을 누볐으며, 1918년 차리친에서는 트로츠키가 임명한 남부전선 사령관을 지지하며 스탈린·보로실로프의 독자노선에 맞서 이들을 실각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내전 후에는 브세보부치를 이끌며 소비에트 체육 시스템의 기초를 닦았고, 이후 고스플란·오소아비아힘·해양연구소 등으로 옮겨갔으며,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된 후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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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3페름에서 학생혁명조직 참여; RSDLP 입당·볼셰비키; 폭발물 운반·선전물 등사 등 지하 활동
  • 1913–191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두 차례 체포·추방; 카스피해 과학원 해양탐사 참여
  • 1915–1917.2파블롭스크 근위연대 예비대대 사병; 병사들 사이에서 볼셰비키 조직 건설
  • 1917.4–10볼셰비키 중앙위 군사조직(보옌카) 지도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7월 봉기 후 크레스티 감옥 수감
  • 1917.10–11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참모장;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격 진압 지휘
  • 1917.11–1918.9군사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잠나르콤보옌); 최고군사평의회 위원; 적군편성 전러시아 콜레기야 위원
  • 1918.9–1919.7공화국혁명군사평의회(РВСР) 위원; 동부·남부·카스피-카프카스 전선 РВС 위원 — 차리친에서 스탈린과 충돌
  • 1920–1926제3군·11군 РВС 위원(소비에트-폴란드 전쟁·바쿠 진입); 브세보부치 책임자; 최고체육평의회 의장; 붉은스포르틴테른
  • 1926–1937폴란드 주재 무관; 고스플란 방위부문 책임자; 오소아비아힘; 해양연구소장; 해군정보부 부장

파벨 예피모비치 디벤코

Павел Ефимович Дыб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89–1938 ✕ 처형

발트 함대를 이끌고 10월 혁명의 승부를 결정지은 첫 해군 인민위원

1917년 11월 1일, 가치나 궁전. 수천 명의 수병을 이끌고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부대를 포위한 디벤코는 코사크 대표단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장군을 넘기시오. 소비에트 권력이 보장하는 안전한 귀가를 약속하겠소." 이튿날 아침 크라스노프 장군이 체포되었고, 케렌스키는 여장을 하고 도주했다. 혁명의 운명을 결정한 일주일이었다.

체르니고프의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발트 함대 수병으로 복무하며 볼셰비키 지하조직에 가담했다. 1917년 4월 첸트로발트 의장이 되어 함대를 장악했고, 10월 혁명 당시 헬싱포르스와 크론슈타트에서 수병 부대를 페트로그라드로 투입해 봉기를 성공시켰으며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와 제헌의회 해산을 지휘했다. 내전기에는 크림 반도 점령과 차리친 해방에 공을 세웠고, 크론슈타트·탐보프 봉기 진압에 참여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와의 결혼으로 혁명기의 가장 유명한 커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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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발트 함대 징병, 전함 임페라토르 파벨 1세에서 전기병 복무; 함내 볼셰비키 지하조직 가입
  • 1917.04–1918.03첸트로발트 의장; 10월 봉기에 수병 부대 투입,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 제헌의회 해산
  • 1917.10–1918.03초대 해군인민위원; 나르바 패배로 사임·당 제명, 군사재판에서 무죄
  • 1919.02–1919.09제1자드네프롭스크 사단장; 크림반도 점령, 크림 소비에트군 사령관
  • 1919.10–1920.05제37소총병사단장; 차리친 해방, 북캅카스에서 데니킨군 격파
  • 1921.03–1921.04혼성사단장으로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크론슈타트 요새 사령관; 탐보프 봉기 진압 참여
  • 1928–1937중앙아시아·프리볼시스키·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1935년 2급 군사령관

이시와라 간지

石原莞爾
군사·지휘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인 1889–1949 ○ 자연사

만주 침략을 설계한 이론가

“기름이 필요하다고 전쟁을 시작하는 자가 있는가.”

이시와라 간지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군사사상가로, 만주를 장차 미국과 맞설 전쟁을 준비하는 전략적 기반으로 보았다. 그는 1931년 관동군 작전참모로서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함께 철도 폭파를 구실로 만주사변을 시작하고 점령을 확대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전면전에는 반대하며 자신의 팽창 구상이 초래한 결과와 충돌했고, 도조 히데키와 대립한 뒤 예비역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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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육군사관학교 졸업, 보병 소위
  • 1915–1918육군대학교 수학, 2등 졸업
  • 1921–1925육군대학교 교관, 독일 주재 유학
  • 1928–1931관동군 작전주임참모, 작전과장
  • 1935–1937참모본부 작전과장, 작전부장
  • 1937–1938관동군 참모부장 대리
  • 1939–1941육군 중장, 제16사단장, 예비역 편입
  • 1941–1945입명관대 국방학 연구소장, 동아연맹 운동 지도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Jean de Lattre de Tassigny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계 1889–1952 ○ 자연사

비시의 명령을 거부하고 해방군을 이끈 장군

1945년 1월, 후퇴 명령이 내려졌지만 장군은 상징적 도시 스트라스부르의 수성을 명령해 드골의 지시를 '완벽한 수렴'으로 하루 먼저 앞질렀다.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전쟁을 거친 프랑스 직업군인으로, 1940년 패전 속에서도 사단의 결속을 지킨 지휘관이다. 비시 정권 아래 복무했지만 1942년 독일군의 남부 프랑스 점령에 맞서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투옥과 탈출 뒤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육군 B와 프랑스 제1군을 지휘하며 프로방스 상륙 이후 툴롱과 마르세유를 해방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 진격했으며, 1945년 베를린 항복식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전쟁을 지휘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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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기병학교 수료, 장교 임관
  • 1914–1918제12용기병연대·제93보병연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21–1926모로코 주둔, 리프 전쟁 참전
  • 1940제14보병사단 사단장, 프랑스 전투
  • 1942–1943몽펠리에 제16군관구 사령관, 비시 명령 거부로 투옥·탈출
  • 1943–1945육군 B 및 프랑스 제1군 사령관, 해방전쟁 지휘
  • 1950–1951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극동원정군 총사령관

레프 자하로비치 메흘리스

Лев Захарович Мехлис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유대인 가정 출신) 1889–1953 ○ 자연사

스탈린의 개인비서에서 붉은 군대의 숙청 집행자로, '붉은 군대의 인퀴지토르'라 불린 인물

1950년 전 보건장관 예. 이. 스미르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1949년 스탈린에게 메흘리스에게 정부 위원회를 맡기자고 제안했더니 스탈린은 배를 잡고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요지는 '메흘리스는 무언가를 부수고 파괴하는 데나 맞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오데사에서 유대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학교 여섯 학급을 마치고 점원·가정교사로 일했으며, 1907~1910년 시온주의 노동자 정당 포알레 시온에 속했다. 1918년 입당해 붉은 군대에서 정치 업무를 맡았고, 1922~1926년에는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였다. 1930~1937년 《프라우다》 편집장으로 '인민의 적'에 대한 투쟁을 선동했고, 1937~1940년 국방부인민위원 겸 정치총국장으로 장교단 대량 숙청을 조직했다. 1942년 케르치 전선의 스타프카 대표로서 참사를 초래해 두 계급 강등되었으나 계급이 회복되어 1944년 상장이 되었고, 국가통제장관(1946~1950)을 지낸 뒤 1953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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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7차르 포병대 복무, 루마니아 전선에서 고급 하사관 계급
  • 1918–1920붉은 군대 정치위원, 여단·사단·집단군에서 복무
  • 1922–1926중앙위원회 사무국 보좌관·국장,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
  • 1930–1937중앙위 출판부장 겸 《프라우다》 편집장, 대숙청 선전전 지휘
  • 1937–1940국방부인민위원·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군 장교단 대숙청의 주요 조직자
  • 1942스타프카 대표로 크림 전선에 파견, 케르치 참사로 전선 붕괴, 스탈린 명령으로 두 계급 강등
  • 1942–1945여러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계급 회복(1942년 중장, 1944년 상장)
  • 1946–1950소련 국가통제장관 겸 국가편성위원회 의장, 각료회의 간부회 위원

그리고리 이사코비치 추드놉스키

Григорий Исаакович Чудно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0–1918 ✕ 자살

겨울궁전에 두 번 들어간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 항복 협상으로 방어선을 무너뜨리다

겨울궁전 안에서 팔친스키가 그를 체포하자 사관생도들이 항의했다. 「그의 구금은 우리 명예의 훼손이다. 신변을 보장했다.」 인민위원은 풀려났고, 생도들도 곧 무기를 버렸다.

10대에 혁명운동에 뛰어든 예카테리노슬라프 출신 유대인 청년으로, 트로츠키와 함께 망명 생활을 거쳐 1917년 메즈라이온치를 통해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으로 겨울궁전에 두 차례 직접 들어가 협상했고, 그가 약속한 무사 통행으로 방어선이 무너지며 유혈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곧 남서전선 특별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 및 중앙라다에 맞서 싸우다 1918년 4월 류보틴 근처에서 포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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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0혁명운동 입문, 멘셰비키; 예니세이현 유형
  • 1913–1916망명: 파리(『나셰 슬로보』), 코펜하겐, 뉴욕(『노비 미르』)에서 트로츠키와 활동
  • 1917.05–08귀국; 메즈라이온치 → 볼셰비키 합류; 군대 내 반전 선동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 담당; 겨울궁전 협상, 풀코보 전투
  • 1917.11–12남서전선 특별인민위원; 중앙라다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
  • 1918.01–04소련군에 구출; 키예프 민사위원; 류보틴 근처에서 포위되어 자살

보리스 미로노비치 펠트만

Борис Миронович Фельдма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투하쳅스키 사건 피고 8인 중 하나, 고문 아래 자백의 연쇄를 시작한 인사국장

"나는 체포 다음날 곧바로 반소비에트 조직 가담을 자백했으나, 오늘까지도 나의 역할을 축소하고 가장 본질적인 사실들을 은폐하려 했다." (1937년 5월 19일 심문)

유대인 목수의 아들로 핀스크에서 태어나, 1차대전 사병과 내전 사단장을 거쳐 붉은 군대의 엘리트로 올랐다. 1934년부터 노농적군 지휘인사국장으로 전군 간부 배치를 총괄했으며, 투하쳅스키와 긴밀히 움직이며 1932년 독일 제국방위군 기동훈련에도 동행했다. 1937년 5월 15일, 투하쳅스키보다 일주일 먼저 체포된 그는 고문 아래 동료 40여 명을 '군사-트로츠키주의 음모' 가담자로 지목했고, 이 자백이 대숙청의 연쇄 폭발을 촉발했다. 6월 12일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당일, 투하쳅스키 등 7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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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7제정 러시아군 사병, 1차대전 참전
  • 1918–21내전: 제55소총사단장, 탐보프 농민반란 진압 원정군단 지휘
  • 1922–28제17·제19소총군단장
  • 1928–34레닌그라드 군관구 참모장
  • 1934–37노농적군 지휘인사국장
  • 1937.04모스크바 군관구 부사령관으로 전보
  • 1937.05.15체포; 심문에서 동료 40여 명 지목
  • 1937.06.12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총살; 1957년 복권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

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люхер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0–1938 ✕ 옥사

「적기 훈장 제1호」: 내전의 영웅이자 첫 원수 5인 중 하나, 레포르토보에서 스러지다

산재한 적위대를 규합해 54일간 우랄 산맥 1,500㎞를 싸우며 돌파했다. 이 불멸의 행군으로 블류헤르 동지에게 적기 훈장 제1호를 수여한다. —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1918.9.28

야로슬라블 빈농 출신으로, 1918년 우랄에서 1,500㎞ 대장정을 지휘해 붉은 군대 최초의 적기 훈장을 받았다. 프룬제 휘하에서 페레콥 방어선을 돌파해 브란겔을 크림에서 축출했고,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으로 볼로차옙카에서 백군을 최종 격파했다. 쑨원의 주력 군사고문 '갈린 장군'으로 국민혁명군 북벌을 설계했으며, 1929년 중동철도 분쟁에서 만주군을 격파했다. 1935년 초대 원수 5인에 올라 특별극동군을 지휘하며 일본의 팽창에 맞섰으나, 하산 호 전투 뒤 체포되어 루뱐카에서 사망했다.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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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제1차 세계대전 참전, 두 차례 게오르기 훈장, 중상으로 제대
  • 1916볼셰비키당 입당
  • 1918우랄 1,500㎞ 대장정 — 적기 훈장 제1호
  • 1919–1920제51소총사단장: 시베리아 전역, 페레콥 돌파로 크림 점령
  • 1921–1922극동공화국 군사장관 겸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볼로차옙카 승리
  • 1924–1927쑨원의 주력 군사고문 「갈린 장군」 — 국민혁명군 북벌 입안
  • 1929중동철도 분쟁: 만주군 격파, 적성 훈장 제1호 수훈
  • 1929–1938특별극동군 사령관 — 소비에트 극동 방위 총괄
  • 1935초대 원수 5인 중 하나
  • 1937투하쳅스키 사건 특별재판부 참여
  • 1938하산 호 전투 후 해임, 체포, 루뱐카에서 사망
  • 1956사후 복권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세묘노프

Григорий Михайлович Семёнов

일본군에 기대어 자바이칼을 지배하고 콜차크와 맞선 백군 아타만

「…태동하는 내전의 조건에서, 모든 온정과 인간애는 버려져야 한다」: 회고록 『나 자신에 대하여』에서 자신의 백색 테러 정책을 정당화한 말.

자바이칼 코사크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성 게오르기 훈장을 받은 유능한 기병 장교였다. 1917년 말 특별만주부대(OMO)를 조직해 시베리아 내전의 첫 전선을 열었고, 일본군의 군사·재정 지원을 등에 업고 자바이칼 지역을 장악해 '동부 변경' 정부를 수립했다. 콜차크의 권위를 거부하며 독자 세력화했고, 그의 통치 아래 자행된 대규모 백색 테러는 미군 정보 당국의 조사 대상이 될 정도로 잔혹했다. 1920년 패주 후에도 일본의 후원 아래 만주에서 반소 활동을 이어가다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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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1오렌부르크 코사크 사관학교 졸업, 호룬지 임관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 참전, 성 게오르기 훈장 4급·게오르기 무기 수훈, 에사울 진급
  • 1917.12–1918특별만주부대(OMO) 조직, 자바이칼에서 반볼셰비키 봉기 주도
  • 1918–1919치타 점령, 자바이칼 코사크 군 아타만 선출, 콜차크와 충돌 후 화해
  • 1920.1–10러시아 동부 변경 전권 통치자, 극동군 편성 → 10월 패주, 비행기로 만주 도피
  • 1921–1945일본·만주 망명, 일본군과 협력, BREM 의장(1943–1945)
  • 1945.8–1946.8소련군에 체포, 모스크바에서 재판 후 교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