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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미하일 이오시포비치 리트빈

Михаил Иосифович Литвин

예조프의 인사책임자, 14,000명 체키스트를 숙청

1938년 여름, 예조프의 다차에서 동료 체키스트들에게 "일이 잘못되면 자살하겠다"고 말했고, 그해 11월 모스크바行 기차를 한 시간 앞두고 권총 자살로 그 말을 실행했다.

볼셰비키 체키스트. 예조프 측근으로 1936년 NKVD 인사국장이 되어 야고다 계열 14,000명을 숙청하고 부하린 재판을 주도했다. 레닌그라드 NKVD 국장이던 1938년 예조프 몰락 직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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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크라스노야르스크 인쇄노조 위원장
  • 1920–1921극동전선 군사위원·체카 수사관
  • 1930중앙아시아 당국 분배부장
  • 1931–1933볼셰비키 중앙위 간부분배부문 차장
  • 1936–1937NKVD 인사국장
  • 1937–1938GUGB 제4부(비밀정치부)장
  • 1938레닌그라드 NKVD 국장

표도르 표도로비치 라스콜니코프

Фёдор Фёдорович Раскольников

볼가 소함대 사령관에서 망명 비판자로: 스탈린에게 공개서한을 보낸 외교관

1918년 12월, 구축함 스파르타크 호에서 영국군에 나포될 때 — 에스토니아인 선원으로 위장하고 감자 자루 속에 숨었으나, 에스토니아어를 한마디도 못해 정체가 탄로났다.

내전기 볼가·발트함대 사령관을 지낸 볼셰비키 해군 지휘관. 외교관으로 복무하다 1938년 소환을 거부하고 망명, 1939년 〈스탈린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으로 대숙청을 공개 규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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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재학 중 볼셰비키 입당
  • 1912–1914《즈베즈다》·《프라우다》 문학 담당 기자
  • 1917크론시타트 소비에트 부의장, 7월 사건 후 체포·투옥, 10월 석방
  • 1918해군참모부 정치위원, 볼가 소함대 사령관 — 카잔 탈환, '죽음의 바지선' 포로 432명 구출
  • 1919–1920영국군 포로(런던 브릭스턴), 교환 후 볼가-카스피 소함대 사령관, 엔젤리 상륙작전 지휘
  • 1920–1921발트함대 사령관, 두 차례 적기훈장 수훈
  • 1921–1924아프가니스탄 주재 전권대표
  • 1928–1930글라브레페르트콤 의장, 《크라스나야 노비》 주필
  • 1930–1938에스토니아·덴마크·불가리아 주재 전권대표
  • 1938–1939소환 거부, 파리 망명; 1939년 8월 〈스탈린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발표

미르사이드 하이다르갈리예비치 술탄-갈리예프

Мирсаид Хайдаргалиевич Султан-Галие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2–1940 ✕ 처형

이슬람 사회주의와 민족 공산주의의 창안자, 스탈린의 첫 번째 이념적 희생양

1923년 체포 후, 카메네프는 트로츠키에게 이렇게 회고했다: "술탄-갈리예프 체포를 기억하나? 스탈린의 주도로 이뤄진 첫 번째 주요 당원 체포였네. 불행히도 지노비예프와 내가 동의해버렸지."

타타르인 교사 가정 출신으로, 볼셰비키 내 최고위 무슬림 정치인이자 이론가였다. 1917년 입당 후 민족인민위원부 무슬림분과장과 중앙무슬림군사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식민지 무슬림 민중 전체를 '프롤레타리아 민족'으로 재정의하고 동방 혁명이 세계혁명을 선도해야 한다는 '무슬림 민족공산주의'를 정립했다. 1923년 스탈린 주도로 체포·출당된 최초의 저명 볼셰비키이며, 그의 사상은 후일 나세르와 벤 벨라 등 제3세계 반식민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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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7교사·사서·언론인; 타타르어·러시아어 신문에 혁명적 글 발표
  • 1917.7물라누르 바히토프와 함께 무슬림 사회주의 위원회(카잔) 공동 창설
  • 1917.11볼셰비키당 입당; 민족인민위원부 무슬림 부문 책임자
  • 1918–1920중앙무슬림군사대학 의장; 붉은 군대 무슬림 부대 조직, 바시키르 부대 편입 주도
  • 1919–1921동방민족 공산주의 조직 중앙국 의장
  • 1920–1923민족인민위원부 대학 구성원; 타타르 자치공화국 창설 주도, 동방노동자 공산대학 강사
  • 1923.5'민족 일탈주의'로 체포·제명; '술탄갈리예프주의' 숙청 시작
  • 1928–1934재체포,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솔로프키 수용소 수감
  • 1937–19403차 체포; 1940년 1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총살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학술·연구 독일 독일 1892–1940 ✕ 모르핀 과다복용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유령적 동반자, 기술복제시대 예술론으로 자본주의 문화를 해부한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

「역사철학 테제」에서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문명의 기록물 가운데 동시에 야만의 기록물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베를린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발터 벤야민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깊이 교차하면서도 어느 학파에도 포섭되지 않은 독보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였다. 유대 신비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그의 사유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예술의 '아우라'를 붕괴시키는 메커니즘을 분석했고, 유작 「역사철학 테제」(1940)에서는 파울 클레의 그림에 빗대 '역사의 천사'라는 강렬한 알레고리로 진보서사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 망명 중에도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19세기 파리의 자본주의 문화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했고, 브레히트·아도르노·숄렘과의 긴장 어린 교류 속에서 기술·이미지·역사에 관한 가장 선구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통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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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베른대학교에서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으로 박사학위 취득
  • 1925프랑크푸르트대학교 교수자격 논문 『독일 비극의 기원』 제출했으나 철회
  • 1928『일방통행로』와 『독일 비극의 기원』 출간
  • 1933나치 정권 성립 후 독일을 영구히 떠나 파리로 망명
  • 1935–1936「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집필 및 프랑스어판 발표
  • 1940「역사철학 테제」 집필, 피레네 국경 포트보우에서 자결

스타니슬라프 프란체비치 레덴스

Станислав Францевич Реденс

스탈린의 처남이자 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

1921년 1월 19일 크림에 도착한 레덴스는 심페로폴·세바스토폴·케르치에 사형 선고권을 가진 독립 시(市)체카를 신설하고 자신의 직속으로 두었다. 이 기관들은 브란겔군 잔여 세력과 '계급적 적'에 대한 대량 숙청을 집행했다.

롬자 지방 출신 폴란드인으로 1918년 체카에 입문해 내전기 크림 체카 의장으로서 브란겔군 패잔병에 대한 대량 보복을 지휘했다. 스탈린의 두 번째 부인 나데즈다의 언니 안나 알릴루예바와 결혼해 스탈린의 처남이 되었다. 1933년부터 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을 맡아 수도권 보안을 총괄했고, 대숙청기에는 NKVD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으로서 대량 사형 판결을 주재했으며 처형은 부토보와 코무나르카에서 집행됐다. 1938년 말 폴란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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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크림 체카 의장
  • 1928–1931자캅카스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1–1933우크라이나 주재 OGPU 전권대표
  • 1933–1938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
  • 1937–1938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
  • 1938카자흐 내무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마리나 이바노브나 츠베타예바

Марина Ивановна Цветаева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92–1941 ✕ 자살

망명과 귀환 사이에서 시를 밀어붙인 은시대의 시인

1939년 귀환은 망명 작가가 스탈린 시대 소련으로 되돌아온 대가를 보여 준다.

러시아 은시대의 시인·산문가·번역가다. 내전 뒤 망명해 베를린·프라하·파리에서 창작했고, 1939년 소련으로 돌아온 뒤 전쟁 피난지 옐라부가에서 삶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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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첫 시집 《저녁 앨범》 자비 출간
  • 1922–1939베를린·프라하·파리 망명 생활
  • 1939소련 귀환
  • 1941옐라부가 피난지에서 사망

미하일 페트로비치 키르포노스

Михаил Петрович Кирпонос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2–1941 ✕ 전사

키예프 포위망에서 전사한 남서전선 사령관

1941년 6월 26일, 독일 육군참모총장 할더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남부집단군에 맞서는 적군은 단호하고도 정력적인 지휘를 보여주고 있다.」 브로디 전차전의 혼란 속에서도 키르포노스의 남서전선은 붕괴하지 않았다.

가난한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산림 노동자로 일하다 1915년 징집되었다. 내전기에는 쇼로스의 사단에서 대대장·연대장으로 백군과 싸웠고, 프룬제 군사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카잔 보병학교 교장을 거쳤다. 1939-40년 겨울전쟁에서 제70소총사단을 지휘해 핀란드만 빙판을 우회하여 비보르크 배후를 차단, 이 공로로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41년 1월 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독소전 발발과 함께 남서전선 사령관으로서 브로디 전차전과 우만·키예프 방어전을 지휘했다. 1941년 9월 20일 키예프 포위망 탈출 시도 중 박격포 파편에 전사했으며, 키예프 참사에서 전사한 최고위급 소련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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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7러시아제국군 징집, 하사관·연대위원장
  • 1918–21붉은군대 입대, 쇼로스 사단에서 대대장·제22연대장
  • 1927–34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44소총사단 참모장 등
  • 1934–39카잔 보병학교 교장
  • 1939–40제70소총사단장 — 겨울전쟁, 소련영웅 수훈
  • 1940.04–06제49소총군단장
  • 1940–41 (1월)레닌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 1941.01–06키예프 특별군관구 사령관 (주코프 후임)
  • 1941.06–09남서전선 사령관 — 브로디·우만·키예프 전투
  • 1941.09.20키예프 포위망 탈출 중 전사

누리야 포즈데라츠

Nurija Pozderac

다민족 저항 연합을 대표한 보스니아 정치가

1941년 여름 우스타샤 지도자 크바테르니크가 카진으로 찾아와 협력을 권하자, 포즈데라츠는 그와의 면담 자체를 단호히 거부했다.

누리야 포즈데라츠는 카진 지역의 교사 출신 보스니아 무슬림 정치가로, 우스타샤 정권의 협력 요구를 거부하고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박해에 맞섰다. 아내 데블레타와 함께 수십 명의 유대인 피란민을 구했고, 1942년 아브노이 부의장으로 선출되며 민족적으로 다원적인 해방전선의 대표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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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s–1930s카진 지역 교사
  • 1935유고슬라비아 왕국 의회 의원
  • 1941우스타샤 협력 거부, 민족해방운동 참여
  • 1942카진 민족해방위원회 의장
  • 1942아브노이 집행위원회 부의장
  • 1943네레트바·수체스카 전투 참가
  • 1944국민해방훈장 추서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폴리카르포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Поликарпов

10년간 소련 전투기 전력을 지배한 '전투기 왕'

1939년 독일 출장에서 돌아온 폴리카르포프는 자신의 설계국이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 기술진, I-200 계획, 공장 모두 새로 설립된 MiG 설계국으로 넘어간 후였다.

'전투기 왕'으로 불린 소련 항공기 설계자. I-15 복엽기와 혁신적 I-16 단엽기는 1934~1941년 소련 전투기 전력의 중추였으며 스페인, 중국, 할힌골, 독소전쟁 초기에 투입되었다. 1929년 조작된 사보타주 혐의로 체포·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OGPU 수용소 설계국 TsKB-39에서 I-5를 개발, 1931년 사면되었다. 1939년 독일 출장 중 설계국이 아르툠 미코얀미하일 구레비치의 MiG 설계국으로 이관되었으나, OKB-51을 재건해 I-185 개발을 지속했다. 3만 대 이상 생산된 U-2(Po-2)도 그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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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루스코-발티스키 공장 항공부문 엔지니어 · 시코르스키 휘하 S-16 생산 책임
  • 1918–1923두크스(GAZ 제1공장) 기술부 근무 · 기술부장까지 승진
  • 1923–1928GAZ 제1공장 수석 설계자 · R-1, I-1, U-2 설계
  • 1929–1931체포 · OGPU TsKB-39에서 I-5 개발 · 1931년 사면
  • 1933–1939TsKB-39 제2여단장 → 제84·156·1공장 수석 설계자 · I-15·I-16 개발
  • 1940–1944OKB-51 소장 겸 수석 설계자 · I-185 개발 · 1943년부터 모스크바 항공대 교수

트래퍼드 리말로리

Trafford Leigh-Mallory
군사·지휘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인 1892–1944 ✕ 추락사

육군 협동을 중시한 연합군 공군 지휘관

몽고메리는 “그만이 지상전에서 이기려는 유일한 공군 지휘관이며 질투심도 없다”며 전쟁성에 리말로리의 유임을 요구했다.

트래퍼드 리말로리는 제1차 세계대전의 항공 정찰과 육군 협동 경험을 바탕으로 왕립공군의 작전 지휘관이 된 영국 공군 원수였다. 영국 전투에서는 대편대 운용을 둘러싸고 휴 다우딩과 키스 파크의 방어적 운용에 맞섰으며, 그 갈등은 지휘부 교체와도 얽혔다. 그는 오버로드에서 연합원정공군을 조정해 독일군 증원과 수송망을 차단하는 항공계획을 추진했지만, 프랑스 민간인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는 판단도 함께 남겼다. 노르망디 전투 뒤 동남아시아 공군 사령관으로 이동하던 중 프랑스 알프스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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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왕립비행군단 제7비행대 조종사
  • 1917–1918왕립비행군단 제8비행대 지휘관
  • 1937–1940왕립공군 제12전투비행단 사령관
  • 1940–1942왕립공군 제11전투비행단 사령관
  • 1942–1943왕립공군 전투사령부 총사령관
  • 1943–1944연합원정공군 총사령관, 오버로드
  • 1944동남아시아 공군 사령관 지명

스테판 막시모비치 페트리첸코

Степан Максимович Петриченко

크론시타트 반란을 이끈 수병, 소련 스파이가 되어 수용소에서 최후를 맞다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페트리첸코가 이끄는 임시혁명위원회 기관지는 '여기 크론시타트에서 제3의 혁명의 첫 돌이 놓였다. 노동 대중의 마지막 족쇄를 끊고 새로운 길을 여는 혁명이다'라고 선언했다.

스테판 페트리첸코는 발트함대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의 상급 병기병으로, 1917년 12월 에스토니아 나이사르 섬에서 '소비에트 수병 및 요새건설자 공화국'을 선포하고 의장으로 활동했다. 1921년 3월에는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볼셰비키 독재에 반대하는 무장봉기를 이끌며 임시혁명위원회 의장이 되어 '공산주의자 독재를 타도하라'는 요구를 내걸었다. 봉기 진압 후 핀란드로 망명했으나 1922년 소비에트 정보기관에 포섭되어 20년 넘게 비밀 요원으로 활동했다. 1945년 핀란드에서 소련으로 송환되어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1947년 수용소 이송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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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발트함대 전함 페트로파블롭스크에 배속
  • 1917.12–1918.2나이사르 섬에서 '소비에트 수병 및 요새건설자 공화국' 선포, 의장
  • 1919볼셰비키당에 가입했으나 곧 재등록 과정에서 탈락
  • 1921.3크론시타트 반란 임시혁명위원회 의장; 반란 진압 후 핀란드 망명
  • 1922소비에트 정보기관에 포섭, 핀란드 주재 소련 비밀요원 활동 개시
  • 1927–1937핀란드 케미 제지공장 노동자로 위장하며 첩보 활동 지속
  • 1941핀란드 당국에 체포·구금
  • 1945–1947소련 송환,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0년형 선고, 수용소 이송 중 사망

햘마르 프리돌프 실라스부오

Hjalmar Fridolf Siilasvuo
군사·지휘 핀란드 국가기관 핀란드 핀란드인 1892–1947 ○ 자연사

수오무살미에서 두 개 소련 사단을 모티 전술로 궤멸시킨 핀란드의 예거 중장

사단도 채 갖춰지기 전이었다: 실라스부오는 완편되지 않은 제9사단으로 소련 163사단을 연말까지 격파했고, 이어 라테 도로에서 44사단을 포위해 모티 더미로 만들었다.

헬싱키 출신의 예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로 건너가 프로이센 예거대대에서 훈련받고 핀란드 내전에서 백군 중대장으로 싸웠다. 겨울전쟁 당시 대령으로 제9사단을 지휘, 수오무살미와 라테 도로에서 소련 제163·제44 사단을 모티 전술로 포위·궤멸시켜 오울루를 향한 소련의 핀란드 분단 계획을 무너뜨렸다. 이 전공으로 소장에 오르고 베스트셀러 『수오무살미 전투』를 썼으나,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계속전쟁과 라플란드 전쟁에서 제3군단장으로 북부 전선과 독일군 축출을 지휘했으며, 1944년 만네르헤임 십자훈장을 받고 5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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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독일 제27프로이센 예거대대 훈련, 동부전선 참전
  • 1918핀란드 내전 백군 중대장, 탐페레·비푸리 전투
  • 1934–1939북포흐얀마 군관구 사령관, 오울루 시의원
  • 1939–1940제9사단장, 수오무살미·라테 도로에서 소련 2개 사단 격멸
  • 1941–1942제3군단장, 북부 핀란드-소련 전선 지휘
  • 1944카렐리야 지협 제3군단장, 부오크시 방어전
  • 1944–1945라플란드 전쟁 핀란드군 총괄 지휘관, 독일군 축출
  • 1944–1947제1사단장; 1947년 사망

라돌라 가이다

Radola Gajda

군단의 승리를 백군 정치로 확장한 장군

예카테린부르크 점령 직후, 가이다는 로마노프 일가가 며칠 전 살해된 바로 그 이파티예프 가옥에 자신의 사령부를 차렸다.

라돌라 가이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서 부상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지휘관이자 전간기 체코슬로바키아의 장군·정치가였다. 1918년 군단의 동부집단을 이끌며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철도선을 장악하고, 중립과 무장투쟁 사이의 논쟁에서 전투를 밀어붙였다. 이후 콜차크의 백군에 합류했으나 지휘권을 잃고, 귀국 뒤 군 참모총장 대행과 파시스트 국민공동체 지도자를 거쳤다. 그의 군사적 반볼셰비즘은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에서 파시즘으로 변형되었지만, 나치 점령기에는 저항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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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1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복무
  • 1915–1916몬테네그로군 장교
  • 1917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중대·연대 지휘관
  • 1918군단 동부집단 사령관, 이르쿠츠크·예카테린부르크 점령 지휘
  • 1918–1919콜차크 백군 시베리아군 사령관
  • 1922–1926체코슬로바키아군 사단장, 총참모장 대행
  • 1927–1939파시스트 국민공동체 지도자, 국회의원

바츨라프 노세크

Václav Nosek

1948년 2월 비공산당 경찰 간부 해임으로 정부 위기를 촉발시킨 체코슬로바키아 내무장관

각료회의가 해임 철회를 의결했지만, 노세크는 이를 무시하고 프라하 경찰 간부 8명을 공산당원으로 교체했다.

광부 출신으로 18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나치 점령 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런던 망명정부 국가평의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1945년 귀국 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경찰과 보안기구를 공산당 세력으로 재편했다. 1948년 2월 13일 비공산당 경찰 간부 8명을 해임함으로써 내각 위기를 유발했고, 이는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과 고트발트의 정권 장악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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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대의원
  • 1929KSČ 중앙위원회 위원 선출
  • 1941–1942런던 체코슬로바키아 국가평의회 위원 → 부의장
  • 1945–1953체코슬로바키아 내무장관
  • 1953–1955체코슬로바키아 노동사회복지장관

이반 슈바시치

Ivan Šubašić

왕정과 민족해방 세력 사이의 타협 정치가

그는 1944년 11월 베오그라드 협상에서 연립정부와 섭정을 받아들이면서도 군주제 문제를 전후로 넘겼다.

이반 슈바시치는 크로아티아계 유고슬라비아 정치가이자 변호사로, 전쟁 전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초대 수반을 지냈다. 망명 왕정과 티토가 이끄는 민족해방운동의 세력 균형이 바뀌자 그는 양측을 잇는 비공산주의 협상 대표가 되었다. 그는 1944년 티토와 협상해 아브노이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연립정부와 섭정을 구상했지만, 군주제의 존속 여부는 전후 결정으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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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유고슬라비아 의용군 복무 후 법학 공부
  • 1920년대브르보브스코에서 변호사 개업
  • 1938유고슬라비아 국민의회 의원, 크로아티아 농민당
  • 1939–1941크로아티아 바노비나 초대 수반
  • 1944.06–11유고슬라비아 왕정 망명정부 총리
  • 1944.06비스 협정에서 티토와 협상
  • 1944.11베오그라드 협정 초안에 서명, 연립정부와 섭정 구상
  • 1945티토 정부 외무장관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Bolesław Bierut
정치·당 지도 폴란드 통일노동당 폴란드 폴란드 1892–1956 ○ 심장마비

스탈린이 가장 신뢰한 동구권 대리인, 폴란드 스탈린주의 체제의 설계자이자 오데르-나이세 국경의 수호자

1947년 2월 5일, 무신론자 공산주의자 비에루트는 세임에서 대통령 선서를 마치며 전통적인 종교문구를 덧붙였다: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Tak mi dopomóż Bóg).'

코민테른 비밀학교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 1943년 소련 신임 아래 폴란드 노동자당 지도부에 합류, 국가민족평의회 의장(1944–47), 대통령(1947–52), 통일노동자당 서기장(1948–56), 총리(1952–54)를 지냈다. 포츠담에서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관철했고, 6개년 계획으로 중공업화·집단농장화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화정책을 추진하며 바르샤바 재건을 주도했다. 공안부(UB)를 통한 무장반대파 진압과 가톨릭교회와의 대립을 감독했으며,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 직후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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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폴란드 사회당–좌파(PPS-레비차) 입당
  • 1918폴란드 공산당(KPRP/KPP) 입당, 활동 중단 후 1921년부터 다시 당원으로 활동
  • 1925–1930코민테른 비밀학교(1925–26)와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1927년 11월부터 1930년까지) 수학, 코민테른 교관
  • 1933–1938사나치아 정권에 체포(1933년 12월), 7년형 선고; 1938년 12월 사면
  • 1943폴란드 노동자당(PPR) 서기국 합류(11월 23일), 국가민족평의회(KRN) 의장 선출(12월 31일)
  • 1947–1952폴란드 공화국 대통령(1952년 11월 20일 국가평의회 선출로 종료)
  • 1948–1956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 서기장, 1954년 3월 17일부터 제1서기
  • 1952–1954폴란드 인민공화국 총리(1952년 11월 20일–1954년 3월 18일)
  • 1916–1921루블린 식료품 협동조합 간부, 노동자 협동조합 연합 좌파 조직; 1921년 바르샤바 주택협동조합 공동창립
  • 1927–1933폴란드 공산당 중앙기술부 책임자,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에서 코민테른 특수임무 수행
  • 1944–1949PPR 정치국 비공개 위원(1944년 8월부터); 1949년 2월 24일부터 당 중앙위 정치국 안전위원회 위원장으로 탄압기구 감독
  • 1955동독 카를 마르크스 훈장 수훈

알렉산드로스 스볼로스

Αλέξανδρος Σβώλος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그리스 그리스계 아로마니아인 1892–1956 ○ 자연사

민중주권을 설계한 사회주의 헌법학자

1944년 레바논 회의에서 그는 저항운동이 세운 해방 지역의 대표성을 전국 정부 구상에 반영하려 했다.

알렉산드로스 스볼로스는 노동권과 민주적 헌정 질서를 연구한 그리스의 헌법학자이자 사회주의 정치인이었다. 추축국 점령기에 민족해방정치위원회 의장으로서 해방 지역의 행정과 민중 대표 제도 구상을 이끌었고, 레바논 회의에서 저항운동과 망명정부의 연합을 모색했다. 해방 뒤에는 국민통합정부의 재무장관으로 경제 재건을 추진했으나, 좌파 장관들과 함께 사임하며 저항군 해산에 반대했다. 그는 반공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서 독자적 사회주의 민주주의를 지키려 했고, 그 긴장은 전후 그리스 정치에서 그의 영향력과 고립을 함께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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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아테네대학교 헌법학 박사 취득, 강의 시작
  • 1917–1920국가경제부 노동·사회정책국장
  • 1929–1946아테네대학교 헌법학 교수
  • 1941–1943마케도니아·트라키아 위원회 의장
  • 1944.04–09민족해방정치위원회 의장, 외무·교육·종교·국민계몽 담당 서기
  • 1944.09–12국민통합정부 재무장관
  • 1945–1953사회당·인민민주주의동맹 의장
  • 1950, 1956테살로니키 선출 국회의원

야코프 이사코비치 세레브랸스키

Яков Исаакович Серебрянский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벨라루스 1892–1956 ✕ 심문 중 사망

파리에서 백군 장군을 납치한 소련 특수공작 창시자, 자기 기관에 고문당하다

프랑스 경찰 제복을 입은 그들은 거리에서 쿠테포프를 멈춰 세우고 심문을 구실로 차에 태웠다. 쿠테포프는 저항했고, 몸싸움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세레브랸스키가 내게 말했다. — 파벨 수도플라토프, 『특수임무』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23년 OGPU에 영입되어 팔레스타인에 첫 소련 스파이망을 구축했고, 유럽 전역에서 200명 이상을 포섭했다. 1930년 파리에서 프랑스 경찰로 위장해 백군 지도자 쿠테포프 장군을 납치·살해했으며, 트로츠키 아들의 기록보관소 탈취와 스페인 공화파 군용기 밀반입을 지휘했다. 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로 활약했으나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아바쿠모프의 고문으로 거짓 자백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1년 수도플라토프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전시 정보전에 복귀했고, 1953년 베리야 사건에 연루되어 재체포된 후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문 중 사망했다. 1971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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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에스에르 맥시말리스트; 투옥(1909); 제국군, 동프로이센 중상(1914); 바쿠 전기기사
  • 1917–1923바쿠 소비에트 에스에르 활동가; 페르시아; 모스크바 체카; 에스에르 혐의 체포
  • 1923–1929OGPU 팔레스타인·벨기에·프랑스 불법체류자; '야샤 그룹' 간첩망 구축
  • 1929–1934OGPU 특수반장; 쿠테포프 장군 파리 납치(1930); 200명 이상 포섭
  • 1934–1938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 트로츠키 기록보관소 탈취; 스페인 무기 밀반입; 상급소령
  • 1938–1941체포·고문·사형 선고; 독소전 발발 후 사면
  • 1941–1946NKVD 제4국 전시 정보작전; 1946년 퇴역
  • 1953–1956베리야 사건 연루 재체포; 부티르카 심문 중 사망

후안 네그린

Juan Negrín
정부·행정 스페인 공화파 스페인 스페인 1892–1956 ○ 심장마비

라이프치히에서 돌아온 생리학자, 공화국의 금을 모스크바로 보내고 끝까지 항전을 택한 마지막 총리

1938년 5월, 프랑코에게 내민 「13개 조항」. 스페인의 완전한 독립, 보통선거로 선출되는 정부, 지역 자치, 양심의 자유, 토지개혁, 그리고 전쟁 행위에 대한 보복 금지. 프랑코의 답은 무조건 항복이었다.

생리학자 출신의 스페인 사회노동당(PSOE) 정치인. 킬과 라이프치히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스물아홉에 마드리드 대학 생리학 교수가 되어 세베로 오초아를 길러낸 실험실을 세웠으며, 1929년 PSOE에 입당해 1931년 하원의원이 되었다. 1936년 9월 재무장관으로 입각해 국립은행의 금 준비를 카르타헤나로 옮기고 이를 소련에 맡기는 결정에 서명했고, 바르셀로나 5월 사태 뒤인 1937년 5월 총리에 올라 「저항이 곧 승리」를 내걸고 인민군의 중앙집권화를 밀어붙였다. 그가 공산당과 소련 고문단에 의존한 것은 서방의 불개입 아래 무기를 살 곳이 그곳뿐이었기 때문이었으나, 이 때문에 「모스크바의 꼭두각시」라는 비난을 평생 받았다. 1938년 5월 「13개 조항」으로 협상을 시도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고집했고, 1939년 3월 카사도 대령의 쿠데타로 그는 스페인을 떠났다. 1946년 PSOE에서 제명됐고, 2008년에야 당으로부터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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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카나리아 제도 라스팔마스의 부유한 가톨릭 가정에서 출생
  • 1906–1915독일 킬과 라이프치히에서 의학·생리학 수학, 1912년 의학박사
  • 1922스물아홉에 마드리드 대학 생리학 교수, 세베로 오초아를 배출한 실험실 창설
  • 1929–1931PSOE 입당, 제2공화국 수립과 함께 라스팔마스 선거구 하원의원 당선
  • 1936.09라르고 카바예로 내각 재무장관 취임, 금 준비를 카르타헤나로 이송
  • 1936.10금 준비 510톤을 소련에 맡기는 결정에 서명, 이른바 「모스크바의 금」
  • 1937.05.17바르셀로나 5월 사태 뒤 총리 취임: 「하나의 전쟁, 하나의 군대, 하나의 지휘」
  • 1938.04–1939.03국방장관 겸임, 「저항이 곧 승리」 노선으로 에브로 공세 지휘
  • 1938.05「13개 조항」 발표로 협상 시도, 프랑코가 거부
  • 1938.09–10국제연맹에서 국제여단의 일방적 철수를 발표하고 바르셀로나 고별 행진 주관
  • 1939.03카사도 대령의 쿠데타로 스페인을 떠나 프랑스 망명
  • 1939–1945망명 공화국 정부 총리, 스페인 난민 구호기구(SERE) 조직
  • 1946PSOE에서 제명 (2008년 당에 의해 복권)
  • 1956.11.12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페르 라셰즈 묘지에 안장

세르게이 야코블레비치 주크

Сергей Яковлевич Жук

굴라크 수로를 설계한 스탈린 시대의 수석 수력기술자

1931년 체포되어 벨로모르-발트 운하 건설장으로 보내진 지 1년 반 만에 '건설 현장에서 더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가석방되었다. 백군 포로 출신 죄수가 20년 후 사회주의노동영웅으로 크렘린 벽에 안장된 역설은 여기서 시작되었다.

소련의 수력기술자이자 공병 소장. 백군 장교 출신으로 1931년 체포되어 벨로모르-발트 운하 건설에 투입된 후 탁월한 공학 능력으로 두각을 나타내 1932년 조기 석방 및 전과 말소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운하, 볼가-돈 운하, 쿠이비셰프 수력발전소 등 소련의 대표적 수리 시설들의 설계와 건설을 총괄했으며, 194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기드로프로옉트 연구소 소장으로서 소련 수력공학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강제노동에 의존한 공사 방식은 솔제니친의 비판 대상이 되었으나, 그는 소련 내륙 수운 체계와 수력발전 인프라의 실질적 설계자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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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7알렉세옙스크 군사공병학교 졸업, 시베리아 공병대대 복무
  • 1918–1919백군 콜차크 군대 공병 장교 (소위)
  • 1921–1930적군 공병 교관, 키예프·수미·폴타바 군사학교에서 교편
  • 1931–1932OGPU 체포(사건 '봄'), 벨로모르스트로이 부수석기사로 징역 중 1932년 가석방
  • 1932–1933OGPU 정식 간부, 벨로모르-발트 운하 부수석기사
  • 1933–1935모스크바 운하 건설 수석기사
  • 1935–1937우글리치·르빈스크·이반코보 수력발전소 건설 수석기사
  • 1937–1939쿠이비셰프 수력발전단지 건설관리국 수석기사 겸 국장대행
  • 1939–1941NKVD 글라브기드로스트로이 수석기사 겸 제1부국장
  • 1941–1942NKVD 방어공사총국(GUOBR) 수석기사 겸 부국장
  • 1942–1957기드로프로옉트 연구소 소장 (1942년 설립부터 사망까지)
  • 1944–1957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기술경제평의회 위원
  • 1948–1952볼가-돈 운하·치믈랸스크 수력발전소 수석기사

안드레이 바실리예비치 흐룰료프

Андрей Васильевич Хрулё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2–1962 ○ 자연사

전쟁 물자를 움직인 보이지 않는 총사령관, 스탈린이 승리의 축배를 바친 유일한 병참 장군

크렘린 승전 축하연. 스탈린이 지휘관들에 대한 건배가 끝난 뒤 술잔을 다시 채우며 말했다: 「이제 진정한 사령관, 이 위대한 승리도 없었을 위대한 전쟁의 일꾼을 위해. 흐룔료프 동지를 위해.」

가난한 대장장이 가문의 소년이 상트페테르부르크 금세공 도제를 거쳐 소련군 대장과 소련군 후방의 창설자로 올랐다. 1941년 8월 1일 통합병참체계인 소련군 후방(Тыл Красной армии)을 설립하고 종전까지 이를 이끌며, 동시에 1942~1943년에는 교통인민위원으로서 전시 철도를 관장했다. 전쟁 기간 동안 크렘린궁 스탈린 집무실을 113회 방문하며 최고사령관과 직접 물자와 보급을 조율했고, 승전 기념연에서 스탈린은 「이 위대한 승리도 없었을, 진정한 사령관이자 위대한 전쟁의 일꾼」이라며 흐룔료프를 위한 건배를 제안했다. 사후 흐루쇼프의 반대를 뚫고 크렘린 성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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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제1기병군 제11기병사단 정치위원, 남북전쟁 참전
  • 1930–1936붉은군대 중앙군사재정국장 → 국방인민위원부 총무국장
  • 1939–1941붉은군대 보급국장 → 주병참감부장
  • 1941–1951국방부인민위원 → 붉은군대 후방총국장 (Тыл 창설)
  • 1942–1943소련 교통인민위원 (철도 총괄)
  • 1943대장 진급 (11월 7일)
  • 1955–1957숙청 군 지휘관 98명 재활 주도, 블류헤르 원수 포함
  • 1958–1962국방부 감찰고문단에서 여생을 보냄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코로빈

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оровин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892–1964 ○ 자연사

소비에트 국제법학의 창시자, '과도기 국제법' 개념을 정립한 이론가

국제법을 부르주아적 잔재로 부정하는 대신, 체제 간 '과도기적' 국제법을 정식화했다. 한스 켈젠은 이를 소비에트 법이론 내 '해결 불가능한 모순'이라고 평했다.

소비에트 국제법 이론의 창시자. 1924년 『과도기의 국제법』에서 체제 간 '과도기적 국제법' 개념을 정립했다. 우주법 선구자로도 평가되며, 스탈린 시대를 생존하여 소비에트 국제법학의 제도적 토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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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
  • 1918–1927러시아 적십자사 중앙위원회 서기 겸 외국부장
  • 1923모스크바 국립대학 교수
  • 1924『과도기의 국제법』 출간 — 소비에트 국제법 이론의 기초 확립
  • 1938법학박사 학위 취득
  • 1945–1946유엔 준비위원회 소련 대표단 전문가, 런던·파리 외무장관회의 자문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48–1952소련 과학아카데미 법학연구소 소장
  • 1957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 위원
  • 1959과학아카데미 행성간 공간 법률문제 위원회 위원장
  • 1960–1964모스크바 국립대학 법학부 국제법 주임

빅토르 발렌티노비치 노보질로프

Виктор Валентинович Новожил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2–1970 ○ 자연사

마르크스 가치론과 수리 최적화를 접목한 소비에트 경제수학파의 공동 창시자

1942년, 독일군 점령하의 퍄티고르스크에서 시립극장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트로 등록해 강제노동 이송을 피했다. 독일 측 경제학자 슈타켈베르크가 통계국장직을 제안하자 '현재 4중주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서 떠날 수 없다'며 거절했다.

칸토로비치·넴치노프와 함께 소련 수리경제학파의 창시자. 마르크스 노동가치론에 기초해 자원 희소성을 반영하는 '차등적 비용' 개념을 정식화, 계획경제 최적화 이론의 토대를 세웠다. 1965년 레닌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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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하리코프 출생 (아버지는 현직 참사관)
  • 1911–1915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금메달), 정치경제학·통계학 강좌 교수장학생으로 잔류
  • 1922–1951레닌그라드 폴리테크닉 연구소 교수, 1938–1951 기계제작 경제학 주임
  • 1941경제학 박사학위: 「계획·설계 변수의 국민경제적 효율 비교측정 방법」
  • 1951–1966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통계학 주임
  • 1961레닌 훈장 수훈
  • 1965레닌상 공동 수상 (칸토로비치·넴치노프와 선형계획법·경제모형 개발)
  • 1966–1970TsEMI 레닌그라드 분소 체계적 경제평가 연구실장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예료멘코

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Ерёменко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2–1970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의 남쪽 집게발을 닫은 기병 출신 사령관

1941년 8월,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예료멘코는 스탈린에게 직접 "그 악당 구데리안을 때려부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실패했고, 구데리안은 키예프를 포위했다.

우크라이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징집된 병사에서 소련 원수까지 오른 군인. 부됸니의 제1기병군에서 내전을 치렀고, 기병 장교로 숙청기를 무사히 통과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남동전선(후에 스탈린그라드 전선)을 지휘하며 흐루쇼프와 함께 도시 방어 계획을 세웠고, 천왕성 작전에서 남쪽 포위망을 닫아 파울루스의 제6군을 가두는 데 성공했다. 전쟁 동안 무려 여덟 개 전선군을 지휘했고, 1945년 제4우크라이나 전선군을 이끌어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해방을 완수했다. 전후 1955년 원수 계급을 받았으나 군사적 성과와 달리 정치적 비중은 제한적이었다. 금지된 종전 일기를 전쟁 내내 몰래 써내려간 기록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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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7제국군 징집병, 남서·루마니아 전선에서 하사관
  • 1918–20마르콥카 빨치산 조직, 제1기병군에서 내전 종군
  • 1935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 1938–39제6기병군단장, 폴란드 동부 진주
  • 1941.6–7서부전선군 사령관 대리, 스몰렌스크 방어전에서 부상
  • 1941.8–10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 타이푼 작전에서 포위·부상
  • 1942.8–1943.1스탈린그라드 전선군 사령관, 천왕성 작전 남쪽 집게발
  • 1943–44칼리닌·제1발트·제2발트 전선군 사령관
  • 1944독립연안군 사령관, 크림 해방
  • 1945.3–5제4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해방
  • 1945–58카르파티아·서시베리아·북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 1955소련 원수 진급
  • 1958–70국방부 감찰총감, 회고록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