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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정부·행정 알바니아 국가기관 알바니아 알바니아 1904–1960 ↓ 수감 중 사망

반파시스트 저항에서 전후 야당 운동으로

1945년, 저항운동의 동료들이 권력을 굳히는 동안 선거법이 야당의 출마 준비를 가로막는다고 비판했다.

슈코더르 출신의 알바니아 교육자·정치인. 파리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반파시스트 저항에 참여했으며, 1944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교육장관을 지냈다. 전후 선거법과 야당 활동 제한에 반대하다 1946년 체포되어 수감 중 사망했다. 생몰연도는 AIDSSH의 1960년설을 따르며, 사망지·형량의 이견은 아래에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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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민족해방전선 참여
  • 1944–1945교육장관
  • 1945선거법 비판·민주연합 야당 운동
  • 1946체포·투옥

니콜라이 레오니도비치 두호프

Николай Леонидович Духов

KV·IS 중전차에서 핵탄두까지: 전차와 핵무기 양대축을 설계한 소련 군산복합체의 기둥

하리톤은 두호프를 두고 “그의 설계 천재성은 타고난 것이다”라고 평했다.

세 번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소련의 무기 설계자. 키로프 공장에서 KV·IS 중전차를 설계해 대조국전쟁 승리에 기여했고, 1948년 원자폭탄 프로젝트에 투입되어 KB-11에서 최초의 소련 핵무기 내폭 시스템을 개발했다. 이후 분과 1호 연구소(VNIIA) 소장 겸 수석설계자로서 열핵탄두와 17종 운반체용 핵탄약을 설계해 소련 핵전력의 공학적 기초를 세웠다. 전차와 핵무기를 모두 주도한 유일무이한 경력은 소련 군산복합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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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6키로프 공장 엔지니어 — 트랙터·자동차 설계
  • 1936–1941SKB-2 수석설계자 — KV-1·KV-2 중전차 개발
  • 1941–1948첼랴빈스크 키로프 공장 수석설계자 — KV·IS 전차, T-34 개량, 자주포
  • 1948–1954KB-11 부수석설계자 — 최초의 소련 원자폭탄 내폭 시스템
  • 1954–1964VNIIA 소장 겸 수석설계자 — 열핵탄두 및 핵탄약 설계

바실리 알렉세예비치 마흐뇨프

Василий Алексеевич Махнё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계 1904–1965 ○ 자연사

비밀 원자력 행정의 조직자

첫 소련 원자탄의 이름을 정할 때 마흐뇨프는 'РД'(반응 엔진)에 이니셜 'С'를 덧붙여 'РДС', 곧 '스탈린의 반응 엔진'이 되게 했다고 전해진다.

바실리 마흐뇨프는 소비에트 국가의 통제·군수 행정가로서 전쟁기의 동원 체계와 전후 원자력 프로젝트를 잇는 실무자였다. 그는 1945년 GKO 결정 9887로 설치된 특별위원회의 9인 구성원 가운데 한 사람이자 서기로, 위원회 장치를 운영하고 과학·산업 과제를 국가 행정으로 연결했다. 그의 역할은 과학자의 발견만으로는 추진될 수 없었던 소련 원자력 프로젝트가 비밀주의와 집중 동원 속에서 작동한 방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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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34노동자·농민 감독기관에서 근무
  • 1934–1940소비에트 통제위원회 지역 전권대표
  • 1940–1941소비에트 통제위원회 부위원장, 국가통제 인민위원부 인민위원 대리
  • 1941–1945군수 인민위원부 인민위원 대리, GKO 위원 대리
  • 1945–1953소련 각료회의 특별위원회 위원·서기
  • 1953–1956중형기계공업부 과학기술정보·국제관계국장
  • 1956–1965원자력 이용 국가위원회 과학기술정보·전시국장

빌리스 테니소비치 라치스

Вилис Тенисович Лацис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라트비아 1904–1966 ○ 자연사

울마니스의 총애를 받은 작가에서 라트비아 소비에트화의 설계자로

1940년 7월 21일, 라트비아 국회에서 소련 편입 동의안을 직접 상정한 이는 다름 아닌 그 나라에서 가장 사랑받던 소설가 라치스였다.

항구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부의 아들』(1933)로 라트비아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소설가가 되었다. 카를리스 울마니스 정권의 후원을 받으면서도 지하 공산당 활동을 이어갔고, 1940년 소비에트 합병 후 라트비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19년간 재임하며 농업 집단화와 1949년 대규모 추방을 주도했다. 정치인으로서 소비에트 라트비아의 제도적 틀을 세우는 한편, 『폭풍』과 『새로운 기슭으로』로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하며 소비에트 문학계에서도 정점에 섰다. 1954~1958년 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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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5리가 시립도서관 사서
  • 1935–1940신문 『야우나카스 지냐스』 기자
  • 1940.6–8라트비아 SSR 내무장관
  • 1940–1959라트비아 SSR 인민위원회의·각료회의 의장
  • 1952–1961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 1954–1958소련 최고회의 민족소비에트 의장
  • 1959–1966라트비아 작가동맹 부의장·이사

세르게이 로마노비치 사브첸코

Сергей Романович Савченко
보안·정보·치안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4–1966 ○ 실각 1955

우크라이나 그리스가톨릭 교회를 강제 해체한 국가보안장관, 스탈린 말기 대외첩보 책임자

흐루쇼프와 사브첸코는 1947년 스탈린과 아바쿠모프에게 롬자 주교가 '바티칸의 비밀 사절' 및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하조직과 협력한다고 비난하며 그의 암살 허가를 요청했고, 이후 롬자는 독극물 주사로 살해되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17년간 국경부대를 거쳐 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1943–1946)과 국가보안장관(1946–1949)을 지냈다. 1946년 리보프에서 우크라이나 그리스가톨릭 교회를 강제로 러시아 정교회에 통합시키는 '통합 공의회'를 직접 지휘했고, 1947년에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함께 스탈린에게 무카체보 교구의 테오도르 롬자 주교 암살 허가를 요청해 관철시켰다. 1949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대외정보를 총괄하는 MGB 제1총국장 겸 국가보안차관에 올랐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과 함께 해임되고 1955년 '직무 부적합'을 이유로 강제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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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니콜라예프 현 체카 특별부서 작전요원으로 보안기관 입문
  • 1922–1939국경부대에서 작전·참모·학교 교관으로 17년 복무, 1939년 우크라이나 국경군 제5과장 겸 부사령관
  • 1941우크라이나 국가보안부인민위원
  • 1941–1943우크라이나 내무부인민위원. 1941년 말 세르기옌코 인민위원의 이탈로 사실상 NKVD 지휘
  • 1943–1946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
  • 1946–1949우크라이나 국가보안장관. 1946년 리보프 공의회로 그리스가톨릭 교회 강제 통합 주도
  • 1949–1951소련 외무부 정보위원회 제1부의장, 사실상 소련 대외정보 총괄
  • 1951–1953MGB 제1총국장 겸 국가보안차관
  • 1953베리야 체포 후 MVD 제2총국 제1부국장으로 좌천, 곧 해임
  • 1955'직무 부적합'으로 강제 전역

알렉세이 안드레예비치 포스코노프

Алексей Андреевич Посконов

코시긴 개혁기 고스방크를 이끈 바시키르 출신 재정 엘리트

한 번은 '인민의 적'과 사냥을 갔다는 이유만으로 당적을 박탈당하고 형사입건되었다.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가 직접 나서 그의 무죄를 입증했다.

우파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열한 살부터 일하며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로 공직에 들어간 후 평생 금융계에 몸담았다. 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졸업 후 우파 시·주 재정과장을 거쳐 1940년 러시아공화국 재정차관, 이듬해 재정인민위원이 되었고, 전후 소련 재무차관·제1차관으로 즈베레프와 가르부조프를 보좌했다. 1963년 8월 고스방크 총재로 취임하여 코시긴의 1965년 경제개혁(이윤 지표,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1966))의 신용·결제 측면을 집행했고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를 신설했다. 1937년 사냥 동행을 이유로 '인민의 적' 연루 혐의를 받았으나 바시키르 중앙집행위원회 개입으로 복권된 이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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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제본소 견습공, 약국 창고 노동자
  • 1919–1923붉은군대 복무, 제재소 노동자, 공장위원회 지도원
  • 1923–1931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세무사·과장·차장·재정감독국장, 콜레기움 위원
  • 1931–1934레닌그라드 재정경제연구소 수학, 경제·재정 전공
  • 1934–1939우파 시 재정과장 → 바시키르 재정인민위원부 선임감사관
  • 1939–1940칼리닌주 재정과장
  • 1940–1941러시아공화국 재정부인민위원
  • 1941–1945러시아공화국 재정인민위원
  • 1945–1960소련 재무차관 · 콜레기움 위원
  • 1960–1963소련 재무제1차관
  • 1963–1969국가은행 총재 — 1965년 개혁 신용·결제 집행, 국영농장 독립채산제, 콜호스 보장임금제, 러시아공화국 고스방크 신설
  • 1966–1969CPSU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아브람 이사코비치 알리하노프

Абрам Исаакович Алихан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르메니아 1904–1970 ○ 자연사

중수로에서 세계 최대 가속기까지: ITEP의 23년 지휘자

1956년 흐루쇼프가 ITEP 해직자들의 체포를 막기로 한 후, 알리하노프는 당 회의에서 발언했던 네 사람에게 말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다면 너희는 영웅이다. 몰랐다면 바보다.'

소련 핵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명. 양전자 분광학 연구(1933~1940)와 코조다예프와 개발한 자기분광계는 소련 핵전자공학의 기초가 되었다. 원자폭탄 계획에서 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로 중수로 개발을 맡았다. 1945년 제3실험실(후일 ITEP)을 설립해 23년간 소장으로 재임하며, 소련 최초의 중수 연구용 원자로(1949)와 산업용 중수로(1951)를 직접 지휘했다. ITEP의 7 GeV 싱크로트론(1961)은 세계 최대의 70 GeV 세르푸호프 가속기(1967) 원형이 되었다. 평생 무당파였으며, 반세계주의 캠페인에서 연구원을 보호하고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으며, 1966년 스탈린 복권 반대 서한에 카피차·사하로프와 함께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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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41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연구원
  • 1933–1941LFTI 양전자연구실장
  • 1945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
  • 1945–1968제3실험실 / ITEP 소장
  • 1947–1951모스크바국립대 물리기술학부 물질구조학과장

그리고리 니콜라예비치 사포노프

Григорий Николаевич Сафонов

뉘른베르크 재판에 참여하고 베리야 체포를 거부하며 물러난 소련 검찰총장

1953년 6월 30일, 사포노프는 베리야 체포 영장 서명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입니다. 대의원 면책특권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날로 그는 해임되었다.

야로슬라블현 로스토프의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1925년 레닌그라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레닌그라드 공장들의 법률고문으로 일하며 민법 강의를 병행했다. 1935년 검찰로 전환하여 비신스키의 눈에 띄어 1939년 35세에 소련 검찰 부검사장이 되었고, 제1부검사장으로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소련 검찰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1948년 2월 소련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전후 스탈린기 검찰을 5년간 이끌었으나, 1953년 6월 30일 라브렌티 베리야 체포 영장에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면책특권을 이유로 서명을 거부하며 즉시 해임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지방검찰청의 말단 직위로 강등되어 조용히 복무하다 1968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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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35레닌그라드 기업 법률고문·법률국장, 소비에트법 연구소 민법 강사
  • 1935–1939레닌그라드주 오쿨롭카군·키롭스키구 검사
  • 1939소련 검찰청 민사소송부장
  • 1939–1948소련 부검사장·제1부검사장 (1946년부터 검찰총장)
  • 1945–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소련 검찰단 참여
  • 1948–1953소련 검찰총장
  • 1955–1957모스크바 지방교통검찰청 부검사
  • 1957–1968러시아 SFSR 검찰청 형사재판감독부 차장·수사관리국 검사

루엘린 E. 톰슨

Llewellyn Thompson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흐루쇼프의 마음을 읽고 해법을 제시한 인물

「흐루쇼프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쿠바를 구했다, 나는 침공을 막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ExComm 회의에서.

미국 외교관으로, 1957년부터 1962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대사를 역임하며 흐루쇼프와 독자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ExComm)에서, 10월 27일 도착한 두 통의 흐루쇼프 서한 중 강경한 두 번째 서한을 무시하고 26일의 첫 번째 서한에 응답하라고 권고했으며, 이 전략이 위기 해소의 핵심이 되었다. 이후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다시 모스크바 대사를 지내며 SALT 협상과 핵비확산 정책 수립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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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미국 외교관으로 임용
  • 1941주소 미국대사관 2등서기관, 독소전 발발 후 모스크바 잔류
  • 1952–1957주오스트리아 고등판무관·대사, 오스트리아 국가조약 및 트리에스테 협상
  • 1957–1962주소 미국 대사 (1차), 캠프 데이비드·빈 정상회담, U-2 사건, 부엌 논쟁
  • 1962ExComm 위원,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에 핵심 조언
  • 1962–1966국무부 소련 담당 대사급 순회대사·정무담당 부차관보
  • 1967–1969주소 미국 대사 (2차), 글래스보로 정상회담, SALT·핵비확산 협상

니콜라이 게라시모비치 쿠즈네초프

Николай Герасимович Кузнец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4–1974 ○ 자연사

전쟁 전야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내린 소련 해군의 설계자, 두 번 강등되고 사후 복권된 제독

1941년 6월 21일 밤, 쿠즈네초프는 스탈린의 사전 승인 없이 전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발령했다. 몇 시간 뒤 독일군이 침공했을 때 소련 해군은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소련 해군을 창설한 인물로 평가받는 해군 지휘관. 34세에 해군인민위원이 되어 소련 최연소 인민위원이자 최초의 전문 해군 장교 출신 수장이 되었다. 1941년 6월 21일 밤, 독일 침공이 임박했음을 직감하고 자신의 권한으로 전 함대에 전투태세 1호를 발령하여 육군과 달리 해군은 기습 첫날 단 한 척의 함선도 잃지 않았다. 전쟁 내내 해군을 지휘하며 스타프카와 국방위원회 위원, 얄타·포츠담 회담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활약했고, 1944년 소비에트연방함대제독 계급과 더불어 영웅칭호를 받았다. 전후 스탈린과 흐루쇼프 시기 두 차례 강등되었으나 1988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오늘날 러시아 해군의 유일한 항공모함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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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북드비나 소함대 입대 (나이를 두 살 높여 지원)
  • 1926프룬제 고등해군학교 우등 졸업
  • 1933–1936순양함 체르보나 우크라이나 함장
  • 1936–1937스페인 공화국 해군 수석 고문 (돈 니콜라스 레판토)
  • 1938–1939태평양함대 사령관
  • 1939–1946해군인민위원 (34세, 소련 최연소 인민위원)
  • 1948소장으로 강등, 극동 해군 부사령관으로 전출
  • 1951–1953해군장관으로 복귀 (계급은 중장)
  • 1953–1955국방제1차관·해군총사령관, 소비에트연방함대제독
  • 1956중장으로 재강등 및 강제 퇴역

왕밍

王明
정치·당 지도 중국공산당 중국 중국 (한족) 1904–1974 ○ 사망

'28인의 볼셰비키' 지도자이자 마오쩌둥의 최대 정적

1932년 상하이 사변 당시 "오늘 중국은 '양국의 투쟁' — 신생 중화소비에트공화국과 부패한 중화민국의 투쟁"에 직면해 있다고 주장하며, 이 대립이 "현재 중국 정치생활 전체의 핵심"이라고 규정했다.

모스크바 쑨원대학 출신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핵심 지도자로, 코민테른에 충실한 교조주의 노선을 들여와 중공 초기 지도부를 이끌었다. 마오쩌둥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으며, 마오는 『실천론』과 『모순론』에서 그의 노선을 표적으로 삼았고 1942년 정풍운동에서 교조주의의 상징으로 제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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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모스크바 쑨원대학 유학
  • 1931.1중공 중앙정치국원 선출
  • 1931–1937코민테른 주재 중공 대표
  • 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원 선출
  • 1937–1938중공 장강국 서기
  • 1949–1956중앙법제위원회 주임
  • 1956–1974소련 망명, 반마오 선전 활동

찰스 E. 유스티스 볼렌

Charles E. Bohlen

케넌클레이턴의 정책 메모를 마셜의 하버드 연설문으로 옮긴 국무부 소련 전문가

「포츠담 이후, 소련이 세계 공동체의 합리적이고 협력적인 구성원이 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회고록 『역사의 증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소련 전문가로, 1934년 주소 미국대사관 개설부터 냉전기까지 미소관계의 거의 모든 중대한 장면에 입회했다. 루스벨트트루먼의 통역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배석했으며, 1947년 마셜 국무장관의 요청으로 케넌과 클레이턴의 정책 메모를 하버드 졸업식 연설문으로 작성해 마셜 플랜의 공개적 출발을 이끌었다. 1953년 주소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매카시의 공격을 받으며 인준 청문회를 겪었고, 이후 프랑스 대사까지 지내며 '현자들'로 불린 초당파 외교 고문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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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국무부 외교관으로 임용
  • 1934–1940주소 미국대사관 3등서기관, 독소불가침조약 전문 입수
  • 1943–1945백악관 소련 고문,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 통역
  • 1947–1949국무부 고문, 마셜의 하버드 연설 초안 작성
  • 1949–1951주프랑스 미국 공사
  • 1953–1957주소 미국 대사
  • 1957–1959주필리핀 미국 대사
  • 1962–1968주프랑스 미국 대사

스탈린주의 정통을 고수하다 프라하의 봄 개혁운동에 의해 축출된 체코슬로바키아 지도자

1965년 메이데이 집회 직후 즉석 인터뷰에서 "고기가 곧 나올 겁니다!"(Maso bude vbrzku!)라고 선언했다. 국민들은 "그 '곧'이라는 곳이 도대체 어디냐"고 물으며 온 나라가 웃었다.

1921년 KSČ 창립 당원이자 자물쇠공 출신으로, 슬란스키 숙청 과정에서 당 기구를 타고 부상했으며, 고트발트 사후 제1서기(1953–1968)와 대통령(1957–1968)을 겸직하며 15년간 체코슬로바키아를 통치했다. 스탈린주의 정통을 고수하며 중앙계획·검열을 강화하고 1950년대 정치재판 청산을 거부했으나, 경제 침체와 슬로바키아의 불만이 누적되며 정권 기반이 잠식되었다. 1968년 1월 두브체크에게 당직을 내주며 강제 사임함으로써 개혁의 최대 장애물이 제거되었고, 이는 곧바로 프라하의 봄을 촉발했다. 1971년 정상화 국면에서 중앙위원으로 재선되었으나 실질적 영향력은 없었고, 1975년 프라하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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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당원으로 입당
  • 1937–1938KSČ 호도닌 지역위원회 서기
  • 1941–1945나치 점령 하 지하활동으로 체포, 마우트하우젠 수용소 수감
  • 1945–1951KSČ 프라하 시당 제1서기
  • 1951–1953KSČ 정치서기국 위원 겸 부총리
  • 1953–1968KSČ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57–1968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71정상화 국면 KSČ 중앙위원 재선

알렉산드르 예브게니예비치 골로바노프

Александр Евгеньевич Голован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4–1975 ○ 자연사

붉은 군대 최연소 원수: 스탈린의 직속 전략폭격 사령관

스탈린이 내외투를 벗겨주자 원수는 당황했고, 스탈린은 말했다. "당신은 내 손님이오."

알렉산드르 골로바노프는 소련의 군사 지휘관으로, 붉은 군대 역사상 최연소 병과 원수이자 알렉산드르 노비코프에 이은 두 번째 항공 총원수였다. 1919년 5월 붉은 군대에 지원해 제59소총연대 정찰병으로 복무했고, 1924년 10월부터 OGPU에서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에 가담했으며, 이후 아에로플로트 조종사로서 백만 킬로미터 비행 조종사로 불렸다. 1942년 2월부터 스타프카 직속 장거리항공대(ADD)를 지휘했고, 1944년 12월 ADD가 제18항공군으로 재편되자 그 사령관이 되었으며, 1948년 5월 해임되었다. 1952년 공수군단장으로 전출되었다가 1953년 스탈린 사후 건강상의 이유로 예비역에 편입되었고, 딸 올가의 증언에 따르면 죽는 날까지 스탈린주의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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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0붉은 군대 정찰병, 제59소총연대 (동부·남부전선)
  • 1924–1931OGPU 특별부서 요원, 보리스 사빈코프 체포 가담; 알마아타 근무
  • 1932–1941아에로플로트 조종사·기장·특수비행대 지휘관, 백만 km 무사고 비행
  • 1939할힌골 전투 참전, 고위 지휘부 수송
  •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 약 400시간 전투비행
  • 1941.02제212장거리폭격연대장 (중령)
  • 1941.08제81장거리항공사단장, 베를린·쾨니히스베르크 폭격 지휘
  • 1942.02–1944.12장거리항공대(ADD) 사령관, 스타프카 직속
  • 1943.08항공원수 진급, 붉은 군대 사상 최연소 병과 원수
  • 1944.08항공 총원수 진급
  • 1944.12–1946.04제18항공군 사령관 (1944년 12월 6일 ADD에서 재편)
  • 1946.04–1948.05소련 장거리항공대 사령관, 1948년 5월 해임
  • 1948–1950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수학 (금메달 졸업)
  • 1952–1953공수군단장 (TASS·«로디나»는 프스코프의 제15근위공수군단,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제37근위공수군단으로 기록)
  • 1953예비역 편입
  • 1958–1966민간항공연구소 비행부문 부소장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샤후린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Шахурин

전시 항공공업을 지휘해 루프트바페를 생산력으로 압도한 인민위원

1940년 1월 크렘린에서 스탈린이 말했다. '당신을 항공공업인민위원으로 임명하오. 고리키에 가서 인수인계할 시간조차 없소. 단 하루도, 단 한 시간도 허비할 수 없는 일이 기다리고 있소.'

1940년부터 종전까지 소련 항공공업인민위원으로서 Yak, MiG, Il-2, La-5 등 전투기·공격기의 대량 생산 체제를 구축해 루프트바페를 생산력으로 압도했으나, 종전 직후 1946년 '항공사건'으로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1953년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항공공업 차관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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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7모스크바 전기기술자·콤소몰 간부
  • 1927–1932모스크바 공학경제연구소 학생
  • 1933–1938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및 항공공장 당조직자
  • 1938–1940야로슬라블·고리키 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40–1946소련 항공공업인민위원
  • 1946–1953수감 — '항공사건'으로 7년형
  • 1953–1959항공공업 차관·제1차관; 대외경제관계 국가위원회 부의장

표트르 키릴로비치 코셰보이

Пётр Кириллович Кошево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4–1976 ○ 자연사

사푼산과 쾨니히스베르크를 함락시킨 두 번의 영웅

≪적은 강하고 교활하다. 그러니 너희가 더 교활하고 더 영리해져라. 약점을 찾아내 예상치 못한 강한 일격을 가해라.≫ — 부하들을 훈련시키며.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한 소련 군사 지휘관이다. 대조국전쟁에서 티흐빈, 스탈린그라드, 크림, 동프로이센 전역을 지휘하며 사푼산 탈환과 쾨니히스베르크 함락으로 두 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시베리아·키예프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65년 주독 소련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1968년 소련군 원수로 진급했다. 재임 중 바르샤바 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압 작전에 주독 소련군 부대를 투입했으며, 1969년 해임될 때까지 동독 주둔 소련군의 전투태세를 강화했다. 1961년부터 1971년까지 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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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붉은 군대 자원입대, 제8적기카자크기병사단에서 복무
  • 1927우크라이나 기병학교 졸업, 소대장 보임
  • 1939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15기병사단 참모장
  • 1940제65소총병사단 사단장 (자바이칼 군관구)
  • 1941–1942티흐빈·류반 작전에서 제65소총병사단 지휘
  • 1942–1943제24근위소총병사단장으로 스탈린그라드·북카프카스 전투
  • 1943–1944제63소총병군단장 — 돈바스·멜리토폴·크림 공세, 사푼산 탈환
  • 1944첫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5월 16일)
  • 1944–1945제71소총병군단장, 이후 제36근위소총병군단장 — 동프로이센 공세, 쾨니히스베르크 함락
  • 1945두 번째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 수여 (4월 19일), 승리 퍼레이드에서 제3벨로루시전선 연대 지휘
  • 1946–1948제6근위군 사령관, 이후 보로실로프 고등군사아카데미 과정 수료
  • 1948–1954제5군 사령관 (극동)
  • 1954–1955제11근위군 사령관 (발트 군관구)
  • 1955–1957주독 소련군 제1부총사령관
  • 1957–1960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60–1965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 1961–1971CPSU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65–1969주독 소련군 총사령관
  • 1968소련군 원수 진급 (4월 15일)
  • 1969–1976국방부 감찰총감 그룹에서 명예직 수행

미하일 게오르기예비치 페르부힌

Михаил Георгиевич Первухин
산업·생산 운영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4–1978 ○ 자연사(뇌졸중), 모스크바

첫 원자폭탄 시험의 국가위원회 위원장, 1957년 흐루쇼프에 맞서 좌천된 인물

1942년 2월 26일 화학공업인민위원에 임명되었을 때, 그는 스탈린에게 「저는 전기기술자이고 화학은 잘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스탈린이 답했다: 「당신은 훌륭한 조직가입니다. 볼셰비키라면 맡은 일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대장간 아들로 태어나 전기기술자로 성장한 소련의 산업 행정가. 제2차 세계대전 중 화학공업인민위원으로서 군수 화학물질 생산을 재건했고, 1943년부터는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로 쿠르차토프와 함께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1949년 첫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55년부터 제1부총리를 지냈다. 1957년 흐루쇼프의 일인 독주를 비판한 '반당 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으로 좌천되었으나, 이후로도 고스플란에서 에너지·지역계획 전문가로 일하며 1978년 7월 22일 모스크바에서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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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6모스크바 경제원 졸업 후 카시라 발전소에서 기술자에서 소장까지 승진
  • 1937–1939모스에네르고 수석기사, 글라브에네르고 국장을 거쳐 중공업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 1939–1940발전소·전기공업인민위원, 에너지 인프라 확충 지휘
  • 1942–1950화학공업인민위원(이후 장관), 1942년 2월 26일 임명, 부총리 겸임, 전시 화학 생산 재건·확대
  • 1943–1949원자폭탄 계획의 최고 경제 행정 책임자, 1945년 8월 20일부터 특별위원회 부위원장, 1949년 8월 RDS-1 핵실험 국가위원회 위원장
  • 1952–1957CPSU 중앙위 간부회 위원·제1부총리, 1957년 반당 그룹 사건으로 강등
  • 1958–1962주동독 특명전권대사
  • 1965–1978고스플란 부서장·위원, 원자력발전소 인수 국가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이반 테렌티예비치 페레시프킨

Иван Терентьевич Пересыпки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4–1978 ○ 자연사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를 연결한 통신의 설계자, 최초의 통신병과 원수

1941년 7월 22일 밤, 스탈린은 가피치 장군을 면전에서 해임한 뒤 페레시프킨에게 말했다: 「당신을 통신총국장으로 임명합니다. 체신인민위원직은 그대로 유지하시오.」 묻지도 않은 채 그는 국방부인민위원까지 겸하게 되었다.

수은 광부의 아들로 도네츠크에서 태어나, 열다섯 살에 붉은 군대에 입대해 남부전선에서 내전을 치렀다. 키예프 군사정치학교와 붉은 군대 전기공학 아카데미를 거쳐 통신병과 장교로 성장했고, 1939년 불과 35세에 소련 체신인민위원으로 전격 발탁되었다. 전쟁 한 달째인 1941년 7월 22일, 스탈린은 그를 국방부인민위원과 붉은 군대 통신총국장에 추가 임명해 전시 민간·군사 통신을 한 사람에게 맡겼다. 그는 24차례 전선을 직접 방문하며 모스크바·스탈린그라드·쿠르스크에서 스타프카와 야전군 사이의 안정적 통신을 보장했고, 1944년 39세의 나이로 사상 첫 통신병과 원수 계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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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0붉은 군대 입대, 남부전선에서 내전 참전
  • 1923–1925재입대, 키예프 군사정치학교 졸업, 제1기병사단 통신대대 복무
  • 1937붉은 군대 전기공학 아카데미 졸업, 통신연구소 군정위원
  • 1938–1939붉은 군대 통신국 군정위원, 이후 부국장 (대령)
  • 1939–1944소련 체신인민위원
  • 1941–1944국방부인민위원 겸 붉은 군대 통신총국장
  • 1944–1946통신병과 원수, 붉은 군대 통신총국장
  • 1946–1957육군 통신병과 사령관
  • 1957–1978국방부 차관 과학고문, 국방부 감찰총감단

보리스 글레보비치 무즈루코프

Борис Глебович Музруков

우랄마시에서 탱크를, 마야크에서 플루토늄을, 아르자마스-16에서 핵탄두를 찍어낸 산업 지휘관

1947년, 베리야가 그를 불러 “당 중앙과 스탈린 동지의 결정으로 자네를 기지-10의 책임자로 임명한다”고 통보했다. 무즈루코프가 반대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임무는 소련 최초의 플루토늄으로 이어졌다.

중공업과 원자력 산업을 세 단계로 이끈 소련의 생산 지휘관이다. 1939년 35세로 우랄마시 공장장에 임명되어 7년간 7명이 바뀐 난국을 수습하고, 전시에는 소련 전차·자주포 5대 중 1대를 생산하는 기지로 전환시켰다. 1947년 베리야의 지명으로 마야크(제817콤비나트) 소장이 되어 1949년 8월 소련 최초 원자폭탄용 플루토늄 생산에 성공했다. 1955년부터 1974년까지 VNIIEF(아르자마스-16) 소장으로 전략·전술 핵탄두 개발과 양산을 총괄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레닌상, 스탈린상 2회 수상. 노동자 생활과 도시 기반시설까지 챙긴 실무형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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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9키로프 공장 기술자 → 주임 야금기사
  • 1939–1947우랄마시 공장장
  • 1947–1953마야크(제817콤비나트) 소장
  • 1953–1955중형기계공업부 제4총국장
  • 1955–1974VNIIEF(아르자마스-16) 소장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모로조프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орозов

T-34·T-54·T-64를 설계한 소련 전차의 얼굴

1941년 10월 설계국이 우랄로 철수하자, 36세 모로조프는 숙련공 없는 공장에서 T-34를 더 단순하게 만들면서도 더 강력한 전차로 개량해야 하는 이중 과제를 떠안았다.

14세에 하리코프 기관차 공장 사환으로 출발해 소련 최장수 전차 수석설계자(1940~1976)가 된 공학자. 미하일 코시킨과 함께 T-34 개발을 주도했고, 코시킨 사후 36세에 설계국장을 이어받아 독소전쟁 내내 T-34의 양산 간소화와 전투력 개량(T-34-85)을 동시에 지휘했다. 전후에는 T-54/55를 설계해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전차 계열을 만들었고, 1960년대에는 복합장갑·자동장전장치·활강포를 채택한 T-64로 2세대 주력전차 개념을 열었다. 그의 설계국은 오늘날까지 '모로조프 설계국'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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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하리코프 기관차공장 기술부 사무원·복사공·제도공
  • 1926–28붉은군대 항공여단 항공기술병 복무
  • 1928–31하리코프 기관차공장 설계국 복귀, 콤무나르 트랙터·T-24 전차 설계 참여
  • 1931하리코프 기계제작 전문학교 졸업, BT-2·BT-5·BT-7 경전차 설계 참여
  • 1936–38설계국 신규설계 부문장
  • 1938–40설계국 부국장 겸 부수석설계자, A-20·A-32 개발 — A-32가 T-34로 발전
  • 1940–41하리코프 183호 공장 수석설계자, T-34 양산화 지휘
  • 1941–51우랄 전차공장(니즈니타길) 수석설계자, T-34 현대화·T-43·T-44·T-54 개발
  • 1951–66하리코프 기계제작 설계국 수석설계자, T-55·T-64 개발
  • 1966–76하리코프 기계제작 설계국장 겸 수석설계자, T-64A 완성
  • 1976–79하리코프 설계국 고문·소련 방위산업부 과학기술위원회 위원

표도르 페도토비치 쿠즈네초프

Фёдор Федотович Кузнец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1904–1979 ○ 자연사

GRU에서 글라프PUR까지: 전시 정보와 말기 스탈린 군 정치를 모두 지휘한 상장

1944년 8월, 스탈린은 아바쿠모프, 메르쿨로프, 쿠즈네초프, 수도플라토프를 불러 모아 놓고 새로운 전략적 기만 작전을 명령했다 — 독일군 사령부로 하여금 소련 후방에 대규모 독일군 잔류 부대가 있다고 믿게 만들라는 것이었다.

표도르 쿠즈네초프는 소련 군사정보기관과 군 정치기관을 두루 거친 몇 안 되는 고위 장성이다. 1943년부터 종전까지 총참모부 정보총국(GRU)을 이끌며 대독 승전의 정보적 토대를 관리했고, 1950년부터 스탈린 사망까지 소비에트군 총정치국장으로서 전군의 사상통제를 총괄했다. 메흘리스의 측근으로 대숙청기 군 정치장교 숙청에 관여했으나, 정보 분야로 전환한 뒤에는 전략적 기만 작전 수립에 직접 참여했다. 스탈린 사후 정치국장에서 물러나 국방부 인사국장,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 북부군집단 정치국장을 거쳐 1969년 퇴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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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8모스크바 프롤레타르스키 구당위 제1서기
  • 1938붉은군대 총정치국 간부부장
  • 1938–1942붉은군대 총정치국 부국장
  • 1942–1943제60군·보로네시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
  • 1943–1945총참모부 정보국장 — 총참모부 부참모장
  • 1945–1947총참모부 정보총국(GRU)장 — 소비에트군 총참모부 부참모장
  • 1947–1949소련 각료회의 산하 정보위원회 부의장
  • 1950–1953소비에트군 총정치국장
  • 1953–1957소련 국방부 총인사국장
  • 1957–1959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원장
  • 1959–1969북부군집단 군사평의회 위원 겸 정치국장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코시긴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Косыгин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4–1980 ○ 자연사( 심장마비)

계획에 이윤을 심으려 한 총리

1969년 9월 11일, 국경 충돌이 전면전으로 번질 위기에 코시긴은 베이징 공항에 내려 저우언라이와 약 3시간에서 3시간 반 동안 회담하고 국경 협상 재개에 합의했다.

레닌그라드 봉쇄 시기 국가방위위원회 전권대표로 주민 소개와 라도가호 호저 송유관 부설을 맡아 「생명의 길」 보급선을 세운 기술관료 출신 정치가다. 1964년 10월 15일부터 1980년 10월 23일까지 16년간 각료회의 의장을 지내 이 직위 최장 재임 기록을 세웠고, 1965년 이윤과 판매를 기업 평가 지표로 삼는 경제개혁을 발의했다. 개혁이 시행된 제8차 5개년 계획(1966–1970)은 소련 역사상 가장 성공한 시기로 꼽히지만, 개혁은 1968년 프라하 사태 이후 축소되었다. 1969년 베이징 공항에서 저우언라이와 국경 협상 재개에 합의했고,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반대했으며, 1980년 건강 악화로 본인 요청으로 물러난 뒤 그해 12월 18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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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40섬유공업인민위원
  • 1941–42레닌그라드 소개위원회: 「생명의 길」 보급선 운영
  • 1943–46러시아공화국 총리
  • 1949「레닌그라드 사건」 숙청에서 살아남다
  • 1964–80각료회의 의장(총리)
  • 1965이윤·자율 지표의 경제개혁 발의
  • 1966–70제8차 5개년 계획: 전후 최고 성장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수데츠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удец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4–1981 ○ 자연사

17항공군을 이끌고 프라하까지 진격한 공군원수, 소련 방공군 총사령관

1961년 10월 30일, 수데츠가 지휘하는 장거리항공대의 Tu-95V 폭격기가 노바야제믈랴 상공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50메가톤 수소폭탄 차르봄바를 투하했다. 충격파는 지구를 여러 바퀴 돌았다.

소비에트 공군원수로, 독소전쟁에서 제17항공군을 지휘하며 쿠르스크·드네프르-카르파티아·야시-키시뇨프·프라하 공세에 항공지원을 제공했고 1945년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되었다. 전후 공군 주참모장 겸 부총사령관(1946~1949)으로 제트기 전환을 추진했고, 장거리항공대 사령관(1955~1962)으로 Tu-95K 전략폭격기와 Tu-22 초음속폭격기 배치를 주도하며 1961년 차르봄바 투하를 관할했다. 방공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1962~1966)으로 저고도 방공능력을 확충하고 쿠바 위기 시 아나디리 작전의 방공을 지원했다. 유고슬라비아 인민영웅과 몽골 인민공화국 영웅 칭호도 받은 드문 소련 군사지도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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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2제51군 공군 · 볼가군관구 공군 사령관
  • 1942–1943제1폭격항공군단장
  • 1943–1946제17항공군 사령관
  • 1946–1949공군 주참모장 · 공군 부총사령관
  • 1953–1955제26항공군 사령관
  • 1955–1962장거리항공대 사령관
  • 1962–1966방공군 총사령관 · 국방차관
  • 1966–1981국방부 감찰총감단 감찰관

스테판 아파나시예비치 발레진

Степан Афанасьевич Балез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4–1982 ○ 자연사

카프타노프 밑에서 원자폭탄 사업의 출범을 실무로 꾸린 GKO 과학실 선임보좌관

모스크바에 100명을 불러들여 입경 허가를 내고, 살 집과 배급 카드를 주고, 사이클로트론용 초고순도 철과 원자로용 99% 흑연을 구해야 했다: 바레진이 1943년 봄의 긴박했던 일상을 회고하며.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4세에 적군에 입대한 1세대 소비에트 화학자. GKO 과학 전권위원 카프타노프의 선임보좌관으로서 1942-43년 소련 원자폭탄 사업의 출범을 실무로 꾸렸다: 스타리노프가 노획한 독일 장교의 '원자 수첩'을 접수해 번역을 주선하고 의미를 알아챘으며, 플료로프의 편지를 검토하고, 쿠르차토프를 먼저 면담해 카프타노프에게 데려갔다.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 건물을 물색하고 과학자 100여 명의 모스크바 출입 허가·주택·배급 카드를 해결했으며, 이오페-카프타노프 공동 청원서 초안을 작성해 1942년 9월 28일 GKO 결의의 기초를 놓았다. 이후 레닌 사범대로 복귀해 금속 부식 억제제 분야의 학파를 세웠고 80명의 박사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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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4초등학교 교사·고아원장, 비르스크 현 콤소몰 지도자
  • 1925–1932게르첸 사범대학 졸업, 적색교수대학원 이수, 카르포프 연구소 연구원
  • 1936–1938쿠이비셰프 의과대학 물리·콜로이드 화학 주임
  • 1938–1941레닌 사범대 화학과장, 고등교육위원회 대학부장
  • 1941–1943GKO 과학 전권위원 선임보좌관: 원자폭탄 사업 출범 실무
  • 1944–1948볼셰비키당 중앙위 간부국 대학·과학기관 부부장
  • 1948–1967레닌 사범대 일반·분석화학 주임, 금속 부식 억제제 연구실 창설
  • 1967–1982유네스코 인도 교육 개혁 고문, 『학교에서의 화학』 편집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