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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Jean de Lattre de Tassigny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계 1889–1952 ○ 자연사

비시의 명령을 거부하고 해방군을 이끈 장군

1945년 1월, 후퇴 명령이 내려졌지만 장군은 상징적 도시 스트라스부르의 수성을 명령해 드골의 지시를 '완벽한 수렴'으로 하루 먼저 앞질렀다.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전쟁을 거친 프랑스 직업군인으로, 1940년 패전 속에서도 사단의 결속을 지킨 지휘관이다. 비시 정권 아래 복무했지만 1942년 독일군의 남부 프랑스 점령에 맞서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투옥과 탈출 뒤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육군 B와 프랑스 제1군을 지휘하며 프로방스 상륙 이후 툴롱과 마르세유를 해방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 진격했으며, 1945년 베를린 항복식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전쟁을 지휘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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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기병학교 수료, 장교 임관
  • 1914–1918제12용기병연대·제93보병연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21–1926모로코 주둔, 리프 전쟁 참전
  • 1940제14보병사단 사단장, 프랑스 전투
  • 1942–1943몽펠리에 제16군관구 사령관, 비시 명령 거부로 투옥·탈출
  • 1943–1945육군 B 및 프랑스 제1군 사령관, 해방전쟁 지휘
  • 1950–1951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극동원정군 총사령관

레프 자하로비치 메흘리스

Лев Захарович Мехлис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유대인 가정 출신) 1889–1953 ○ 자연사

스탈린의 개인비서에서 붉은 군대의 숙청 집행자로, '붉은 군대의 인퀴지토르'라 불린 인물

1950년 전 보건장관 예. 이. 스미르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1949년 스탈린에게 메흘리스에게 정부 위원회를 맡기자고 제안했더니 스탈린은 배를 잡고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요지는 '메흘리스는 무언가를 부수고 파괴하는 데나 맞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오데사에서 유대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학교 여섯 학급을 마치고 점원·가정교사로 일했으며, 1907~1910년 시온주의 노동자 정당 포알레 시온에 속했다. 1918년 입당해 붉은 군대에서 정치 업무를 맡았고, 1922~1926년에는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였다. 1930~1937년 《프라우다》 편집장으로 '인민의 적'에 대한 투쟁을 선동했고, 1937~1940년 국방부인민위원 겸 정치총국장으로 장교단 대량 숙청을 조직했다. 1942년 케르치 전선의 스타프카 대표로서 참사를 초래해 두 계급 강등되었으나 계급이 회복되어 1944년 상장이 되었고, 국가통제장관(1946~1950)을 지낸 뒤 1953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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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7차르 포병대 복무, 루마니아 전선에서 고급 하사관 계급
  • 1918–1920붉은 군대 정치위원, 여단·사단·집단군에서 복무
  • 1922–1926중앙위원회 사무국 보좌관·국장,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
  • 1930–1937중앙위 출판부장 겸 《프라우다》 편집장, 대숙청 선전전 지휘
  • 1937–1940국방부인민위원·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군 장교단 대숙청의 주요 조직자
  • 1942스타프카 대표로 크림 전선에 파견, 케르치 참사로 전선 붕괴, 스탈린 명령으로 두 계급 강등
  • 1942–1945여러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계급 회복(1942년 중장, 1944년 상장)
  • 1946–1950소련 국가통제장관 겸 국가편성위원회 의장, 각료회의 간부회 위원

에른스트 로이터

Ernst Reuter
정부·행정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89–1953 ○ 자연사

분단 베를린의 목소리가 된 사회민주주의자

“세계의 민족들이여, 이 도시를 보십시오. 이 도시와 이 민족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에른스트 로이터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오가며 20세기 유럽의 격변을 직접 겪은 독일 정치가였다. 나치의 박해와 터키 망명을 거친 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도시 행정과 사회민주주의를 결합한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베를린 봉쇄 때 그는 서베를린 시민의 결의를 국제사회에 호소했고, 분단된 도시를 자유와 자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급진주의에서 민주적 지방정치로 이동한 한 세대의 긴장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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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 1918–1919볼가 독일인 자치 소비에트 공화국 초대 의장
  • 1921독일 공산당 베를린 지구 제1서기
  • 1926–1931베를린 교통 담당 시의원
  • 1931–1933마그데부르크 시장
  • 1935–1946앙카라대학교 도시계획 강사·터키 정부 고문
  • 1947베를린 시장 당선, 소련 점령당국의 승인 거부
  • 1948–1953서베를린 시장, 1951년부터 통치시장
정부·행정 핀란드 국가기관 핀란드 핀란드 1889–1956 ○ 전쟁책임 10년형, 1949년 사면

겨울전쟁 중 총리로 등장하여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협상한 핀란드 대통령

이 재판은 익살극이다. 실제 기소자는 핀란드 국가가 아니라 한 초강대국의 정부이며, 실제 피고는 핀란드 국민이다.

겨울전쟁 발발 직후 핀란드 총리가 되어 소련이 인정을 거부한 합법 정부를 이끌었고, 1940년 3월 모스크바 평화 조약을 협상했다. 핀란드은행 총재 출신의 경제 전문가로 대통령에 올랐으며, 계속전쟁에서 독일과 협력했으나 1944년 뤼티-리벤트로프 협정을 개인 자격으로 맺고 사임해 만네르헤임의 대소 강화를 열었다. 전후 전쟁 책임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49년 사면되었고, 오늘날 핀란드에서는 조국을 위해 희생한 지도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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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4, 1927–1929국회의원 (국민진보당)
  • 1921–1924재무장관
  • 1924–1939, 1944–1945핀란드은행 총재
  • 1925국민진보당 대통령 후보
  • 1939–1940핀란드 총리
  • 1940–1944핀란드 대통령

틸디 졸탄

Tildy Zoltán
정부·행정 헝가리 국가기관 헝가리 헝가리 1889–1961 ○ 봉기 진압 후 수감, 1959년 석방

소련 탱크 앞에서 중립을 선언한 목사 출신 대통령

1956년 11월 1일 기자회견에서 소련의 재침공 가능성을 묻자 "그런 비극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개혁교회 목사에서 독립소지주당 창립자·지도자로 헝가리 전후 민주화의 얼굴이 된 정치인. 1945년 총선 승리로 총리에 오르고 이듬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공산당의 살라미 전술로 1948년 사위의 조작된 반역 혐의를 빌미로 사임당하고 8년간 연금되었다. 1956년 10월 너지 임레의 혁명 정부에 합류해 11월 1일 바르샤바조약 탈퇴와 중립 선언에 동참했고, 봉기 진압 후 6년형을 받았다. 1989년 대법원이 형을 무효화하며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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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29개혁교회 목사, 교회 정기간행물 편집
  • 1936–44소지주당 국회의원, 전쟁 탈퇴 압박, 독일 점령 후 은신
  • 1945–46총리
  • 1946–48공화국 대통령, 강제 사임
  • 1948–56가택 연금
  • 1956.10–11너지 임레 혁명정부 국가장관
  • 1958–59/19896년형 선고, 1959년 사면, 1989년 복권

자와할랄 네루

जवाहरलाल नेहरू
정부·행정 인도 국가기관 인도 인도 1889–1964 ○ 심근경색

비동맹운동을 공동 창설한 인도의 초대 총리

「오랜 세월 전 우리는 운명과의 약속을 맺었고, 이제 그 서약을 실현할 시간이 왔습니다. 한밤중, 세계가 잠든 그 시간에 인도는 생명과 자유를 향해 깨어날 것입니다.」(1947년 8월 14일 독립 전야 연설)

인도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1947년 독립과 함께 초대 총리에 취임하여 1964년 사망할 때까지 인도를 이끌었다. 의회민주주의와 세속주의, 계획경제를 인도 국가의 기초로 삼았으며, 대외적으로는 냉전의 두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 노선을 개척했다. 1954년 티토와의 공동성명에서 '비동맹'을 국제정치 용어로 처음 규정했고, 1956년 브리유니 선언과 1961년 베오그라드 회의를 통해 비동맹운동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 1962년 중·인도 국경전쟁의 패배로 국내적 위신이 흔들렸으나, 사후에도 인도 공화국의 설계자로 추앙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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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 1936–37인도 국민회의 의장
  • 1946–1947인도 과도정부 총리
  • 1947–1964인도 총리
  • 1947–1964외무장관 (겸임)

안나 안드레예브나 아흐마토바

Анна Андреевна Ахматова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89–1966 ○ 병사

감옥 문 앞에서 기다린 시인

1946년 8월 14일 당 중앙위원회 조직국이 아흐마토바의 시를 "우리 인민에게 이질적인" 것으로 규정했고, 즈다노프는 그를 "창녀면서 수녀"라고 비난했다. 그해 9월 4일 그를 작가동맹에서 제명했고, 이 결정은 1988년 취소되었다.

아크메이즘의 대표 시인으로, 1912년 『저녁』과 1914년 『묵주』로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시인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1921년 첫 남편 니콜라이 구밀료프가 체카에 의해 처형되고 아들 레프 구밀료프와 동거인 니콜라이 푸닌이 수용소를 거치는 동안, 1935~1940년 비밀리에 『레퀴엠』을 써서 대숙청의 경험을 기록했다. 1946년 즈다노프의 비난과 출판 금지에도 떠나지 않고 남았고, 말년에는 『영웅 없는 시』를 완성하고 1964년 에트나타오르미나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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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저녁』 발표
  • 1935–1940『레퀴엠』을 비밀리에 집필
  • 1946즈다노프의 비난과 출판 금지, 작가동맹 제명
  • 1951–1965작가동맹 복권과 시집 재출간, 후기 인정

피티림 알렉산드로비치 소로킨

Питирим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рокин
학술·연구 소속 미확정 미국 (1930년 귀화) 러시아 1889–1968 ○ 자연사

차르와 볼셰비키 모두에게 투옥된 에스에르 지도자에서 하버드 사회학과 창설자로

1918년 벨리키 우스튜크의 체카 지하실에서 사형을 기다리며 쓴 공개서한에서 소로킨은 에스에르 탈당과 정치활동 중단을 선언했다.

러시아 혁명기 사회주의혁명당(에스에르)의 주요 지도자로, 케렌스키 총리의 비서,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차르 체제에서 세 차례 투옥되었고 볼셰비키 집권 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22년 '철학의 배'로 추방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가 1930년 하버드대에 사회학과를 창설하고, 사회 계층화·사회 이동성 연구와 『사회문화동학』에서의 순환 이론으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사회학자 중 한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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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에스에르당 입당, 키네슈마에서 체포·투옥
  • 1909–1914페테르부르크대 법학부 졸업, 범죄학 전공
  • 1917에스에르 지도자, 케렌스키 총리 비서, 제헌의회 의원
  • 1919–1922페트로그라드대 교수, 러시아 최초 사회학과 창설
  • 1922소비에트에서 추방 ('철학의 배')
  • 1924–1930미네소타대 교수
  • 1930–1959하버드대 교수, 사회학과 창설 및 학과장
  • 1965미국사회학회 회장

알렉산드라 바실리예브나 아르튜히나

Александра Васильевна Артюхина

제노트델을 전성기로 이끈 유일한 여성 조직국·서기국원

1927년 국제회의 연단에서 "우리 경제학자들조차 여성 노동을 덜 가치 있는 것으로 본다"며 당내 편견을 직시했다.

방직 노동자 출신 혁명가로서 제노트델(여성노동부)을 전성기로 이끌며 여성의 산업 진출을 추진했다. 유일한 여성 조직국원·서기국 후보위원(1926~1930)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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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4상트페테르부르크 방직·금속 노동자, 노조 조직, 프라우다에 '금속노동자 슈라' 필명 기고
  • 1914–1917체포되어 유형
  • 1917–1924비시니볼로초크 당위원, 노동위원, 트베리현 여성부장, 프롤레타르카 공장위원장
  • 1924–1929당 중앙위 여성노동부(제노트델) 부장, 잡지 《라보트니차》 편집장
  • 1926–1930중앙위원, 조직국 위원, 서기국 후보위원
  • 1930–1934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4–1938섬유(면방직)노동자노조 중앙위원장
  • 1938–1951모스크바 방직 공장장

아마데오 보르디가

Amadeo Bordiga

의회주의를 거부하고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한 좌파공산주의 이론가

"우리는 복음을 전파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을 붙이려는 것이다. 때가 오면 불꽃이 타오를 것이다." — 1912년, 나폴리 카를 마르크스 서클에서

이탈리아 공산당 창립자이자 좌파공산주의 이론가. 의회선거 거부와 '불변의 혁명 프로그램'을 주창했고 레닌과 직접 논쟁했다. 축출 후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분석하는 독자적 이론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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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이탈리아 사회당(PSI) 입당
  • 1912나폴리에서 카를 마르크스 서클 창설 — 금선거주의 좌파의 거점
  • 1920제2차 코민테른 대회 참석 — 의회주의를 둘러싸고 레닌과 논쟁
  • 1921리보르노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산당(PCd'I) 창당 — 초대 서기장
  • 1923–1924무솔리니 정권에 체포·구금; 석방 후 지도부 복귀 거부
  • 1926재차 체포, 우스티카 섬 유배 — 그람시와 재회
  • 1930'트로츠키주의' 혐의로 당에서 제명
  • 1951–1970국제공산당(ICP)에서 활동 — 『바탈리아 코무니스타』, 『프로메테오』에 기고

그리고리 이사코비치 추드놉스키

Григорий Исаакович Чудновский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0–1918 ✕ 자살

겨울궁전에 두 번 들어간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 항복 협상으로 방어선을 무너뜨리다

겨울궁전 안에서 팔친스키가 그를 체포하자 사관생도들이 항의했다. 「그의 구금은 우리 명예의 훼손이다. 신변을 보장했다.」 인민위원은 풀려났고, 생도들도 곧 무기를 버렸다.

10대에 혁명운동에 뛰어든 예카테리노슬라프 출신 유대인 청년으로, 트로츠키와 함께 망명 생활을 거쳐 1917년 메즈라이온치를 통해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으로 겨울궁전에 두 차례 직접 들어가 협상했고, 그가 약속한 무사 통행으로 방어선이 무너지며 유혈 충돌을 피할 수 있었다. 곧 남서전선 특별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우크라이나에서 독일군 및 중앙라다에 맞서 싸우다 1918년 4월 류보틴 근처에서 포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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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0혁명운동 입문, 멘셰비키; 예니세이현 유형
  • 1913–1916망명: 파리(『나셰 슬로보』), 코펜하겐, 뉴욕(『노비 미르』)에서 트로츠키와 활동
  • 1917.05–08귀국; 메즈라이온치 → 볼셰비키 합류; 군대 내 반전 선동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 담당; 겨울궁전 협상, 풀코보 전투
  • 1917.11–12남서전선 특별인민위원; 중앙라다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
  • 1918.01–04소련군에 구출; 키예프 민사위원; 류보틴 근처에서 포위되어 자살

파니 예피모브나 카플란

Фанни Ефимовна Каплан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 1890–1918 ✕ 처형

사회혁명당 활동가로, 레닌을 '혁명의 배신자'로 간주하고 단독 암살을 결행한 여성

체카 심문에서: '나는 오늘 레닌에게 총을 쐈다. 나 혼자 한 일이다. 나는 그를 혁명의 배신자로 간주한다. 나는 제헌의회를 지지했고 지금도 지지한다.'

볼린주 유대인 교사 가정에서 태어난 파니 카플란은 16세에 무정부주의자로 활동하다 키예프 총독 암살 기도 혐의로 체포되어 시베리아 강제노동형을 선고받았다. 11년간의 수감 중 실명과 회복을 반복했으며, 마리야 스피리도노바의 영향을 받아 사회혁명당(SR)에 합류했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후, 볼셰비키의 제헌의회 해산을 계기로 레닌을 혁명의 배신자로 규정하고 1918년 8월 30일 모스크바 미헬손 공장에서 권총 세 발을 발사했다. 이 사건은 같은 날 모이세이 우리츠키 암살과 함께 적색 테러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으며, 그녀는 나흘 뒤 크렘린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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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키예프 총독 수호믈리노프 암살 기도 폭탄 음모로 체포됨
  • 1907–1917시베리아 네르친스크 말체프·아카투이 교도소에서 무기징역 복역, 복역 중 실명과 부분 회복 반복
  • 19172월 혁명 후 임시정부 사면으로 석방, 사회혁명당 활동 재개
  • 1918.08.30모스크바 미헬손 공장에서 연설 마친 레닌에게 브라우닝 권총 세 발 발사, 중상 입힘
  • 1918.09.03체카 심문 후 크렘린에서 파벨 말코프에 의해 총살됨

로제 살랑그로

Roger Salengro

극우 언론의 중상에 목숨으로 답한 인민전선의 내무장관

죽기 직전 블룸에게 남긴 유서: "그들이 나를 망신시킬 수 없었다면, 적어도 내 죽음의 책임은 지게 될 것이다. 나는 탈영병도, 배신자도 아니다."

릴 시장 출신의 사회당 정치인으로 블룸 내각의 내무장관. 1936년 6월 파업 국면에서 점거 공장에 대한 강제 해산을 거부했고, 인민전선 강령의 첫 항목이던 극우 동맹 해산을 집행했다. 극우 주간지 『그랭구아르』가 1차 대전 중 탈영했다는 날조 기사를 퍼붓자 군 명예심사와 하원의 압도적 표결이 거듭 무고를 확인했지만 캠페인은 멈추지 않았고, 그는 11월 17일 릴의 자택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례에는 수십만이 모였고, 그의 죽음은 언론의 명예훼손을 규제하는 입법 논의를 촉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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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914릴의 사회주의 학생운동, 당 기관지 기자
  • 1914–1918전우의 시신을 수습하러 나갔다 포로가 되어 독일 수용소 억류
  • 1925–1936릴 시장
  • 1928–1936하원의원, 사회당 노르 연맹 지도자
  • 1936.06내무장관, 점거 공장 강제 해산 거부와 극우 동맹 해산 집행
  • 1936.07–11『그랭구아르』의 탈영 날조 캠페인, 군 심사와 하원 표결로 거듭 무고 확인
  • 1936.11.17릴 자택에서 자살, 장례에 수십만 추모

게오르기 레오니도비치 퍄타코프

Георгий Леонидович Пятаков

혁명과 산업 계획 사이의 볼셰비키

1937년 1월,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석에서. 독일 작가 리온 포이히트방어는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중간 키에 중년, 약간 벗겨진 머리와 붉은빛이 도는 옛날식의 떨리는 뾰족 수염을 한 퍄타코프가 마이크 앞에 서서, 자기가 맡은 산업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조용하고도 공들여 이야기하는 모습을. 마치 대학 강사처럼 손가락을 뻗어 설명하며, 오래전에 죽은 '퍄타코프'라는 인물의 삶과 행적을 상세히 밝히려는 역사학자처럼, 청중이 모든 것을 제대로 이해하고 납득하기를 바라는 한 가지 소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초대 수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민족자결권 문제에서 좌파 공산주의자로서 레닌과 맞섰고, 레닌이 '유언'에서 언급한 단 여섯 명의 볼셰비키 중 한 명이다. 좌익 반대파로 출당되었다가 복당 후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을 주도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주피고인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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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7볼셰비키 입당, 키예프 지하활동, 유형과 망명
  • 1917–1918키예프 위원장, 국립은행 인수, 좌파 공산주의자
  • 1918–1920CP(b)U 중앙위 서기, 우크라이나 임시정부 수반, 군사정보국장
  • 1920–1927돈바스·고스플란·최고경제회의 부의장, 좌익 반대파
  • 1928–1930복당, 고스방크 총재, 신용개혁
  • 1930–1936중공업 부인민위원·제1부인민위원, 5개년 계획
  • 1936–1937체포, 제2차 모스크바 재판 주피고인, 처형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우스트랴로프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Устрялов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국가볼셰비즘을 창시하고 볼셰비키의 국가주의적 전환을 예견한 망명 법학자

소련은 마치 무와 같다. 겉은 붉지만 속은 희다 — 『세대 교체』와 후속 저작에서 반복한 통찰.

페테르부르크 출신 법학자이자 카데트당원. 1913년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한 후 내전기 콜차크 정부 언론국장으로 백군에 참여했다. 패배 후 하얼빈 망명길에 올라 『세대 교체』(1921)를 발표, 볼셰비키만이 러시아 국가를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스메노베호프스트보를 창시했다. 네프 시기 소련을 '겉은 붉고 속은 흰 무'라 평했고, 그의 사상은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지노비예프의 논쟁 대상이 되었다. 1935년 귀국해 모스크바교통공학원 교수로 일했고, 1937년 6월 체포되어 9월 14일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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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6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1급), 동 대학 사립강사; 카데트당 입당
  • 1917–1918페름대학 정교수, 법학부에서 국가법·법철학 강의
  • 1919–1920콜차크 정부 언론국장; 내전기 백군 이념전선 담당
  • 1920–1935하얼빈 망명, 법학부 교수 겸 КВЖД 고문; 『Окно』 창간, 『세대 교체』(1921)로 스메노베호프스트보 창시
  • 1925『혁명의 기치 아래』 출간; 제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지노비예프의 공개 논쟁
  • 1925–1934КВЖД 교육부장(1925–28), 도서관장(1928–34); 중국학 서지 편찬
  • 1935–1937귀국, 모스크바교통공학원 교수; 1937년 6월 체포, 9월 14일 총살

다닐 예고로비치 술리모프

Даниил Егорович Сулим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자신이 산업화를 이끈 국가에 파괴된 노동자 출신 러시아 공화국 총리

1937년 6월 27일, 자신을 축출한 바로 그 중앙위원회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직무 수행 중 체포되었다.

14세에 공장 노동자로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인 술리모프는 우랄 당 기구에서 성장하여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1930~1937)으로서 첫 두 차례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화국의 산업화를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위원(1923~1937)이자 조직국 위원(1927~1930)으로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중 가장 높은 정부 자리까지 오른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정치적 불충성 비판 직후 체포되었고, 파괴활동·간첩·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1월 27일 처형되었다. 1956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1934~1937년에는 체르케스크 시가 그의 이름을 따 술리모프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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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공장 노동 시작
  • 1918–1919페름 시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 최고경제회의 광산·야금부 간부
  • 1919–1920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첼랴빈스크 현 위원회 의장
  • 1923–1926우랄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26–192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우랄 주 위원회 제1서기
  • 1927–1930소련 교통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 1930–1937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마르테먄 니키티치 류틴

Мартемьян Никитич Рютин

「류틴 강령」으로 스탈린 독재에 마지막 당내 저항을 조직한 우익 반대파

1932년 9월 OGPU 심문에서: "내 뒤에는 어떤 배후도 없었고 지금도 없다. 나 자신이 이 조직의 주동자였고, 그 선두에 섰으며, 나 혼자 강령과 호소문 전부를 썼다." — 동지들을 감싸며 모든 책임을 홀로 짊어지려 한 순간.

이르쿠츠크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과 여러 지역 당서기를 역임하고 1927년 중앙위원 후보가 되었다. 강제 집단화를 목격한 후 우익 반대로 전환, 1932년 200쪽 분량의 「류틴 강령」을 집필해 스탈린 개인독재 타도를 호소했다. 이는 당내 마지막 조직적 반대운동이었다. 1932년 체포되어 1937년 25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를 받고 당일 총살되었다. 1988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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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7멘셰비키 입당, 하얼빈 소비에트 의장
  • 1918–21이르쿠츠크 군관구 사령관, 이르쿠츠크 당위원장
  • 1923–24다게스탄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5–28크라스나야프레스냐 구당서기, 중앙위원 후보
  • 1928–30『크라스나야 즈베즈다』 부편집장, 소유즈키노 의장
  • 1930당 제명, 체포 후 석방
  • 1932「류틴 강령」 집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결성
  • 1937군사재판 25분 만에 사형, 당일 총살

보리스 미로노비치 펠트만

Борис Миронович Фельдман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투하쳅스키 사건 피고 8인 중 하나, 고문 아래 자백의 연쇄를 시작한 인사국장

"나는 체포 다음날 곧바로 반소비에트 조직 가담을 자백했으나, 오늘까지도 나의 역할을 축소하고 가장 본질적인 사실들을 은폐하려 했다." (1937년 5월 19일 심문)

유대인 목수의 아들로 핀스크에서 태어나, 1차대전 사병과 내전 사단장을 거쳐 붉은 군대의 엘리트로 올랐다. 1934년부터 노농적군 지휘인사국장으로 전군 간부 배치를 총괄했으며, 투하쳅스키와 긴밀히 움직이며 1932년 독일 제국방위군 기동훈련에도 동행했다. 1937년 5월 15일, 투하쳅스키보다 일주일 먼저 체포된 그는 고문 아래 동료 40여 명을 '군사-트로츠키주의 음모' 가담자로 지목했고, 이 자백이 대숙청의 연쇄 폭발을 촉발했다. 6월 12일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당일, 투하쳅스키 등 7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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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7제정 러시아군 사병, 1차대전 참전
  • 1918–21내전: 제55소총사단장, 탐보프 농민반란 진압 원정군단 지휘
  • 1922–28제17·제19소총군단장
  • 1928–34레닌그라드 군관구 참모장
  • 1934–37노농적군 지휘인사국장
  • 1937.04모스크바 군관구 부사령관으로 전보
  • 1937.05.15체포; 심문에서 동료 40여 명 지목
  • 1937.06.12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총살; 1957년 복권

스타니스와프 아다모비치 메싱

Станислав Адамович Мессинг

제르진스키의 폴란드 전우, 체카의 초석을 놓고 야고다의 조작에 맞서다

1926년 9월 26일, 레닌그라드 OGPU 청사 집무실에서 18세의 하리코프 청년 아나톨리 트루바가 권총을 난사했다. 메싱은 책상 아래로 몸을 피해 살아남았고, 트루바는 곧 총살당했다.

바르샤바의 유대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1908년 폴란드 사회민주당에 입당,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유제프 운쉴리히트의 신임을 얻었다. 모스크바 체카 위원장(1921)과 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OGPU 수장(1921–1929)을 거쳐 1929년 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으로 승진, 미하일 트릴리세르아르투르 아르투조프 사이 2년간 소련 대외첩보를 지휘했다. 겐리흐 야고다가 조작한 '봄'(Весна) 사건에 반대했다가 1931년 해임되어 대외무역으로 밀려났고, 1937년 폴란드 간첩 혐의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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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폴란드 사회민주당(SDKPiL) 입당, 바르샤바 요새 투옥 후 벨기에 유형
  • 1913–1917러시아 제국군 징집, 투르케스탄·카프카스 전선 복무, 연대병사위원회 위원
  • 1917–1918소콜니키 집행위원회 서기, 소콜니키 구역 체카 위원장
  • 1918–1920모스크바 체카 비밀작전부장 → 체카 콜레기야 위원 → 모스크바 체카 부위원장
  • 1921.1–1921.11모스크바 체카 위원장
  • 1921–1929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GPU-OGPU 수장,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GPU 부대 사령관 겸임
  • 1926집무실 피격 암살미수, 적기훈장 수훈
  • 1929–1931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
  • 1930–1934전연방 공산당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1'봄'(Весна) 사건 조작에 반대, OGPU 해임 후 대외무역 인민위원부로 전출
  • 1931–1937전연방 상공회의소 의장, 소·몽·투바 무역회의소 의장
  • 19376월 15일 체포, 9월 2일 총살 — '폴란드 간첩' 혐의

아르투르 카를로비치 스타솁스키

Артур Карлович Сташевский

스페인 공화국 금을 모스크바로 보낸 소련 무역대표

스타솁스키는 재무장관 네그린에게 모스크바에 '금 당좌계정'을 열자고 제안했고, 그 계정으로 무기와 원자재를 살 수 있다고 설득했다.

SDKPiL 출신의 소련 정보장교이자 무역 관료. 베를린에서 합동 레지덴투라를 지휘한 초기 군사정보의 핵심 인물로, 이후 토르그신 이사장과 대외무역 간부를 거쳐 1936년 공화파 스페인의 무역대표로 파견되었다. 스페인에서는 무기 판매 협상과 「작전 X」의 재정적 측면을 관리했으며, 후안 네그린에게 스페인 은행의 금을 소련에 예치하자고 설득한 인물로 지목된다. 1937년 6월 소환되어 두 달 뒤 처형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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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4베를린 합동 레지덴투라(INO·군사정보) 책임자
  • 1925–1926소프토르그플로트 이사
  • 1926–1932푸시노토르그·소유스푸시니나 부이사장
  • 1932–1934토르그신 이사장
  • 1934–1937대외무역인민위원부 글라프푸시니나 국장
  • 1936–1937주스페인 소련 무역대표

야코프 나우모비치 드롭니스

Яков Наумович Дробнис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우크라이나 볼셰비즘의 창립자, 46인 선언 서명자

페틀류라 세력에 체포되어 총살형을 선고받았으나, 마지막 순간 부상당한 채 탈출하여 붉은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은신했다.

야코프 드롭니스는 1906년 16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유대인 노동자 출신 혁명가로, 1918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고 다섯 차례 중앙위원을 지냈다. 내전기에는 페틀류라와 데니킨에 맞서 파르티잔 부대를 조직했으며, 폴타바·오데사에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을 역임하고 192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며 좌익반대파에 가담했고 1927년 제명되었으며, 1937년 제2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평행 반소비에트 트로츠키주의 중심' 사건의 피고로 사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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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8–1920우크라이나 공산당 창립, 중앙위원 (5기)
  • 1920–1922폴타바·오데사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1922–1923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23'46인 선언' 서명, 좌익반대파 가담
  • 1923–1927소인민위원회 부의장, 행정재정위원회 위원
  • 1927–1930당 제명·유배, 1930년 복당
  • 1937제2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 사형

그리고리 페도로비치 그린코

Григорий Фёдорович Гринько

우크라이나 보로트비스트에서 소련 재무인민위원으로: 5개년 계획의 재정 설계자

1937년 그린코가 '인민의 적'으로 체포되자, 그의 서명이 박힌 1·3·5루블 지폐는 정치적 곤란을 야기했다. 당국은 동일한 도안에서 서명만 지운 비상 발행 지폐를 내놓았고, 이후 소련 지폐에서는 아예 어떤 관리의 서명도 인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하르키우현에서 태어난 우크라이나 혁명가. 좌파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을 이끌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과 고스플란 의장을 지낸 뒤 1926년 모스크바로 올라가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과 농업 부인민위원을 역임했다. 1930년 10월 소련 재무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1·2차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업화 자금을 조달하고 재정 제도를 정비했다. 그의 서명이 찍힌 루블 지폐가 전국에 유통될 만큼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으나, 1937년 대숙청 와중에 체포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의 피고로 서고 1938년 총살당했다. 1959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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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7사회혁명당 당원(1906–1912); 모스크바·하르키우 대학에서 학생운동으로 제적;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예카테리노슬라프 근위척탄병연대 장교
  • 1919–1920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보로트비스트) 조직 및 지도; 전우크라이나 혁명위원회 위원
  • 1920–1922우크라이나 SSR 교육인민위원
  • 1922–1926우크라이나 SSR 고스플란 의장(1922–1923, 1925–1926); 키예프 현 집행위원장 겸 시의회 의장(1923–1925)
  • 1926–1930소련 고스플란 부의장(1926–1929); 소련 농업 부인민위원(1929–1930)
  • 1930–1937소련 재무인민위원; 제1·2차 5개년 계획 재정 정책 총괄;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 후보(1934–1937)
  • 1937–19381937년 8월 해임·제명·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피고; 1938년 3월 15일 총살
  • 1959사후 복권 및 당적 회복

레프 나타노비치 크리츠만

Лев Натанович Крицман

전시공산주의를 이론화한 농업마르크스주의자

『영웅적 시기』에서 전시공산주의를 이렇게 요약했다: “본질에서 그것은 개인이나 계급의 오류가 아니었다. 비록 순수한 형태는 아니지만, 그것은 미래의 예기요, 미래가 현재로 돌입한 것이었다.”

전시공산주의를 사회주의로의 선취적 돌파로 분석한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고스플란 간부로 계획경제 제도화에 참여했고, 차야노프를 비판하며 삼층계급분화론을 주창해 집단화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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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멘셰비키 청년활동가로 혁명운동 참여, 오데사대학 제적 후 취리히대학 졸업
  • 1918귀국 후 RKP(b) 입당, 최고경제회의(Vesenkha)에서 경제정책 실무
  • 1920–1921최고경제회의 이용위원회 위원장, 자원 중앙배분 체계 구축
  • 1921–1925고스플란 간부회원, 『프라우다』 편집위원, 공산아카데미 간부회원
  • 1925–1930농업경제연구소장·공산아카데미 농업연구소장, 『농업전선에서』 책임편집자
  • 1926–1936『대소비에트백과사전』 경제 부문 편집위원, 『경제백과사전』 편집장
  • 1928–1933중앙통계국 부국장, 소련 고스플란 부의장
  • 1933–1938지병으로 공직 사임, 연구에 전념하다 신장병으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

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люхер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0–1938 ✕ 옥사

「적기 훈장 제1호」: 내전의 영웅이자 첫 원수 5인 중 하나, 레포르토보에서 스러지다

산재한 적위대를 규합해 54일간 우랄 산맥 1,500㎞를 싸우며 돌파했다. 이 불멸의 행군으로 블류헤르 동지에게 적기 훈장 제1호를 수여한다. —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1918.9.28

야로슬라블 빈농 출신으로, 1918년 우랄에서 1,500㎞ 대장정을 지휘해 붉은 군대 최초의 적기 훈장을 받았다. 프룬제 휘하에서 페레콥 방어선을 돌파해 브란겔을 크림에서 축출했고,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으로 볼로차옙카에서 백군을 최종 격파했다. 쑨원의 주력 군사고문 '갈린 장군'으로 국민혁명군 북벌을 설계했으며, 1929년 중동철도 분쟁에서 만주군을 격파했다. 1935년 초대 원수 5인에 올라 특별극동군을 지휘하며 일본의 팽창에 맞섰으나, 하산 호 전투 뒤 체포되어 루뱐카에서 사망했다.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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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제1차 세계대전 참전, 두 차례 게오르기 훈장, 중상으로 제대
  • 1916볼셰비키당 입당
  • 1918우랄 1,500㎞ 대장정 — 적기 훈장 제1호
  • 1919–1920제51소총사단장: 시베리아 전역, 페레콥 돌파로 크림 점령
  • 1921–1922극동공화국 군사장관 겸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볼로차옙카 승리
  • 1924–1927쑨원의 주력 군사고문 「갈린 장군」 — 국민혁명군 북벌 입안
  • 1929중동철도 분쟁: 만주군 격파, 적성 훈장 제1호 수훈
  • 1929–1938특별극동군 사령관 — 소비에트 극동 방위 총괄
  • 1935초대 원수 5인 중 하나
  • 1937투하쳅스키 사건 특별재판부 참여
  • 1938하산 호 전투 후 해임, 체포, 루뱐카에서 사망
  • 1956사후 복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