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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정부·행정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90–1970 ○ 자연사

패배 속에서 프랑스의 전쟁 지속을 선언한 국가 지도자

“희망은 사라져야 하는가? 패배는 endgült적인가? 아니다!”

샤를 드골은 프랑스의 군인·저항 지도자·정치가로, 1940년 패전 뒤에도 전쟁을 계속할 프랑스의 대표성을 자임했다. 런던에서 자유 프랑스를 조직해 비시 정권의 정통성 주장에 맞섰고, 해방 뒤에는 임시정부를 이끌며 국가 재건의 방향을 둘러싼 갈등을 드러냈다. 그는 강한 행정부와 국가적 자율성을 중시해 제5공화국을 세웠지만, 개인 권력과 식민지 전쟁을 둘러싼 긴장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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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8육군 보병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독일군 포로
  • 1932–1937국방최고회의 사무국 장교, 기갑전과 기동전 저술
  • 1940.05–06제4기갑사단 지휘, 준장 승진, 국방·전쟁 담당 국무차관
  • 1940–1943런던의 자유 프랑스 지도자, 프랑스군과 해외 위원회 조직
  • 1943–1944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 공동의장 및 의장
  • 1944–1946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 의장
  • 1958–1959국무총리, 제5공화국 헌법 제정 주도
  • 1959–1969프랑스 제5공화국 초대 대통령

제임스 P. 캐넌

James P. Cannon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미국 미국 1890–1974 ○ 자연사

모스크바에서 트로츠키의 비판문을 읽고 미국 트로츠키즘 운동을 창건한 노동운동가

“그들은 자기 당의 심장을 추방한 셈이었다. 트로츠키가 진지한 젊은 활동가들을 모두 자기편으로 만들었고, 빈 껍데기만 남았다.” — 1937년 사회당이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축출한 뒤

캔자스 출신의 아일랜드계 노동운동가로, 1919년 미국 공산당 창립에 참여하고 1922년 코민테른 상임간부회에 올랐다. 1928년 모스크바에서 트로츠키의 코민테른 비판문을 접하고 좌익반대파로 전환, 공산당에서 제명된 후 미국 공산주의자동맹을 창립했다. 1934년 미니애폴리스 트럭 운전사 총파업을 성공적으로 지도했고, 1938년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을 창당하여 초대 전국서기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반대 활동으로 스미스법에 따라 18개월간 수감되었으며, 제4인터내셔널의 핵심 지도자로서 국제 트로츠키즘 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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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미국 사회당(SPA) 입당
  • 1911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 가입, 중서부 조직가로 활동
  • 1919미국 공산노동당(CLP) 창립 참여, 캔자스·미주리·네브래스카 지역서기
  • 1922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 미국 대표, ECCI 상임간부회 선출
  • 1925국제노동방위(ILD) 창립, 초대 전국서기
  • 1928트로츠키주의 전향으로 CPA 제명; 미국 공산주의자동맹(CLA) 공동 창립
  • 1934미니애폴리스 트럭 운전사 총파업 지도
  • 1938사회주의노동자당(SWP) 창당, 초대 전국서기 선출
  • 1944–1945스미스법 위반으로 18개월 수감
  • 1953–1974전국서기직 사임 후 명예 전국의장;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

뱌체슬라프 미하일로비치 몰로토프

Вячеслав Михайлович Молотов

「돌엉덩이」: 마지막까지 신념을 바꾸지 않은 사람

아내 폴리나 젬추지나는 1948년 12월 반역죄로 체포되어 강제 이혼당했고, 스탈린 사후인 1953년에야 풀려났다. 그동안 몰로토프는 매일 저녁 두 사람분 식탁을 차리게 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나 때문에 고통받았다.」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가입한 노볼셰비키로, 1917년 전에 두 번 체포되고 국내 유배되었다. 1926년 정치국 정회원, 1930년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집단화와 대숙청을 지휘했다.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을 서명했고, 국방위원회 부의장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참가했으며 마셜 플랜에 맞선 '몰로토프 플랜'을 추진했다. 1957년 흐루쇼프 축출에 실패하고, 출당 시점은 1961년설과 1962년설이 갈린다. 1984년 복당했고 1986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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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프라우다 창간 실무진
  • 1930–41인민위원회의 의장(총리)
  • 1939독소불가침조약 서명
  • 1939–49, 1953–56외무인민위원·외무장관
  • 1957「반당 그룹」, 몽골 대사로 좌천
  • 1962/1984출당, 그리고 22년 뒤 복당

V. 마르코비치 볼로다르스키

В. Маркович Володарский

10월 혁명기 페트로그라드의 선전 인민위원, 암살로 붉은 테러의 불씨가 되다

「동지들이여, 내가 시계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 나는 인류의 시계, 세계 혁명의 시계를 보고 있다」

페트로그라드의 출판·선전 인민위원이자 탁월한 군중 연설가. 볼셰비키 검열 체계를 구축하고 『크라스나야 가제타』를 창간했다. 1918년 6월 SR 전투원의 총에 암살되어 우리츠키 피살·레닌 피격과 함께 붉은 테러 전면화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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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4세에 분트 가입, 불온 혐의로 김나지움 퇴학
  • 1908–11볼린·포돌리아에서 사민주의 선동원 활동
  • 1911–13피네가 유형, 로마노프 300주년 사면으로 석방
  • 1913–17미국 망명: 필라델피아 재단사, 『노비 미르』 공동 발행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6–8볼셰비키 합류, 수석 선동원, 제6차 당대회 대의원
  • 1917.9–10페트로그라드 평의회 간부회, 10월 봉기
  • 1917.11–1918.6VTsIK 간부회, 출판·선전·선동 인민위원, 『크라스나야 가제타』 창간

파벨 예브게니예비치 라지미르

Павел Евгеньевич Лазимир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 1891–1920 ○ 발진티푸스

볼셰비키 봉기에 좌파 사회혁명당의 얼굴을 빌려준, 이름뿐인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1917년 10월 21일 밤 라지미르는 두 동료와 함께 군구 사령부에 찾아가 수비대에 대한 최고 권한을 선언했고, 폴코브니코프 대령은 그들의 위원을 인정하지 않으며 법을 어기면 체포하겠다고 답했다.

페트로그라드 군 병원의 위생병으로 출발해 사회혁명당의 병사 선전에 투신한 파벨 라지미르는,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병사부 의장으로 부상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는 군사혁명위원회에 비당파적 외관을 입히기 위해 좌파 사회혁명당원인 그를 의장으로 앉혔고, 실질적 지휘는 트로츠키가 맡았다. 라지미르 자신이 MRC 규정 초안을 기초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뒤 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보급·위생을 이끌다 이듬해 발진티푸스로 29세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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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7페트로그라드 군 병원 위생병; 사회혁명당원으로 병사 선전 활동
  • 1917.3–10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병사부 의장·군사부 부의장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초대 의장; MRC 규정 초안 기초
  • 1917.11–1918내무인민위원부·군사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 1918–1920남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보급·위생 조직 총괄

드미트리 안드레예비치 푸르마노프

Дмитрий Андреевич Фурманов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91–1926 ○ 뇌막염

차파예프를 신화로 만든 정치위원 출신 작가

1920년 6월 베르니 수비대 봉기 때, 푸르마노프는 반란군과 직접 협상에 나서 시간을 벌었다. 반란군 지휘관이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고, 그동안 충성 부대가 도착해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

차파예프 사단 정치위원 출신 작가. 소설 《차파예프》(1923)는 혁명적 영웅 서사의 전범이 되었고, 1934년 바실리예프 형제의 영화로 각색되어 소비에트 대중문화의 기념비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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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5모스크바 대학교 문헌학부 수학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위생병 · 준위 복무
  • 1917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소비에트 부의장
  • 1919제25소총사단 정치위원 (차파예프 휘하)
  • 1919–1920투르케스탄 전선 정치부장 · 세미레치예 RVS 대표
  • 1920쿠반 상륙부대 정치위원, 울라가이 상륙 격퇴 — 적기훈장 수훈
  • 1923소설 《차파예프》 출간
  • 1924–1925MAPP(모스크바 프롤레타리아 작가 협회) 서기
  • 1925소설 《먀테시》(반란) 출간

아르투르 흐리스티아노비치 아르투조프

Артур Христианович Артузов

소련 첩보·방첩의 창립자, '트레스트' 작전의 두뇌

1925년 모스크바의 한 안전가옥에서 시드니 라일리가 GPU 요원들에게 둘러싸이자, 아르투조프는 옆방에서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고 전해진다.

체카 방첩부(KRO)를 창설하고 백군 망명 조직을 무력화한 '트레스트' 작전을 설계했다. 1931년부터 해외첩보부(INO)를 이끌며 대외 불법 첩보망을 확장했고, 대숙청 속에서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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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RSDLP(b) 입당, 육해군 동원해제 관리국 근무
  • 1918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정보국장, 군사통제부 활동부장
  • 1919–1922체카 특별부 전권위원 → 특별부 작전과장 → 부부장
  • 1922–1927GPU·OGPU 방첩부(KRO) 부장 — '트레스트', '신디카트-2', '타란텔라' 작전 지휘
  • 1927–1930OGPU 비밀작전국(SOU) 부국장 보좌관
  • 1930–1931OGPU 해외부(INO) 부부장
  • 1931–1935OGPU·GUGB-NKVD 해외부(INO) 부장 — 소련 대외첩보 총괄
  • 1934–1937적군참모부 제4(정보)국 부국장 겸임
  • 1937NKVD 기록보관부로 좌천, 5월 체포, 8월 총살

안토니오 그람시

Antonio Gramsci

감옥이 20년간 멈추려 한 두뇌, 헤게모니의 이론가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것은 태어나지 못한다. 이 공위기에 온갖 병적 증상이 나타난다.” — 『옥중수고』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지배가 폭력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동의로 유지된다는 '헤게모니' 이론을 정립했다. 파시스트 옥중에서 『옥중수고』를 집필,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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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신질서』 창간 — 토리노 공장평의회 운동
  • 1921이탈리아공산당(PCd'I) 창립 참여
  • 1924–1926당 서기 겸 의원
  • 1926체포 — "이 두뇌를 20년간 멈춰야 한다"
  • 1929–1935옥중에서 『옥중수고』 33권 집필
  • 1937가석방 직후 병사
  • 1948–1951옥중 저술이 사후 《옥중수고》 선집 6권으로 처음 출간

예브게니 브로니슬라보비치 파슈카니스

Евгений Брониславович Пашуканис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1–1937 ✕ 처형

법의 상품형태론을 주창한 마르크스주의 법철학자, 소련 국가의 법적 형태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비판자

1936년 11월 소련 법무부인민위원에 임명된 지 두 달 만인 1937년 1월 20일, 자신이 이론화한 소비에트 법 체계의 정점에서 NKVD에 체포되었다. 법의 소멸을 주장한 마르크스주의 법철학자가 국가 권력의 가장 직접적 형태 앞에 선 순간이었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가장 중요한 인물. 1924년 저작 『법의 일반이론과 마르크스주의』에서 법 형식이 상품 교환 관계에서 비롯되며, 공산주의 아래서 국가와 함께 소멸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1922년 스투치카와 함께 공산아카데미 법학부를 창설했고, 이후 공산아카데미 부원장과 소비에트건설·법연구소 소장을 지냈다. 1936년 소련 법무부인민위원이 되었으나, '프롤레타리아 법' 개념을 옹호한 비신스키와 충돌했다. 1937년 1월 체포되어 9월 처형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그의 상품형태론은 오늘날까지 비판법학과 법사회학에서 폭넓게 연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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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모스크바 법관, 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0–1923외무인민위원부 근무, 베를린 소비에트 대사관 고문 — 라팔로 조약 기초 참여
  • 1922스투치카와 공산아카데미 법학부 공동 창설
  • 1924『법의 일반이론과 마르크스주의』 출간 — 법의 상품형태론 정립
  • 1927–1930공산아카데미 정회원 → 부원장
  • 1931–1936소비에트건설·법연구소 소장
  • 1936–1937소련 법무부인민위원

겐리흐 그리고리예비치 야고다

Генрих Григорьевич Ягода

굴라크를 키운 NKVD 수장, 숙청의 피고가 되다

1937년 4월, 야고다는 NKVD 내무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스탈린이 그를 부른 자리에는 이미 예조프가 앉아 있었다. '당신은 4년이나 늦었다' — 스탈린의 말이다. 야고다가 재판정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한 버전에서는 총살 직전 '스탈린 동지 만세!'를 외쳤다고 하고, 다른 버전에서는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굴라크의 설계자는 굴라크의 피고가 되었다.

OGPU와 NKVD의 실무 권력자로 백해-발트 운하 같은 강제노동 사업을 지휘했다. 굴라크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으로 보안기관 통합을 주도했다. 키로프 사건 이후 첫 대숙청 국면을 열었지만, 스탈린은 '충분히 숙청하지 못한다'며 예조프로 교체. 결국 자신이 숙청의 피고가 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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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체카-GPU-OGPU 관료로 성장, 수용소와 대형 건설동원 관리
  • 1934–1936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 보안기관 통합을 지휘
  • 1934–1935키로프 피살 뒤 탄압 확대와 초기 숙청 수사를 담당
  • 1936예조프로 교체, 통신인민위원으로 좌천
  • 1937–1938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처형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체르노프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Чернов

곡물조달에서 VDNKh까지, 2차 5개년 농업을 이끈 인민위원

1935년 2월 17일, 콜호스 충격노동자 대회에서 체르노프는 "1937년 모스크바에서 전연방농업전시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같은 날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전시회 조직 포고령에 서명했다. 훗날 VDNKh의 출발이었다.

직공 가정 출신으로 1909년 멘셰비키로 시작해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곡물조달 기구에서 두각을 나타내 1934년 야코프 야코블레프의 뒤를 이어 농업인민위원이 되었고, 콜호스 체제의 기술적 기반을 강화하는 제2차 5개년 계획 농정을 주도했다. 1935년 전연방농업전시회(VDNKh)를 제안해 조직 준비를 총괄했으며, 농업아르텔 모범정관 제정도 이끌었다. 1937년 체포되어 21인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총살, 198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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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2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현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3–1925도네츠크 현집행위원회 의장
  • 1925–1928우크라이나 SSR 국내무역인민위원
  • 1930–1932소련 공급부인민위원
  • 1933–1934농산물조달위원회(KomzagotSTO) 의장
  • 1934–1937소련 농업인민위원 · 중앙위원회 위원

블라디슬라프 비켄티예비치 코시오르

Владислав Викентьевич Косиор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소련 폴란드 1891–1938 ✕ 처형

형은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총독, 자신은 반대파로 보르쿠타에서 처형된 코시오르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뒤 제명과 유배, 정치격리소, 수용소를 거쳐 처형될 때까지 십오 년을 반대파로 살았다.

폴란드 벤그로프에서 태어나 1906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의 동생으로, 형이 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이자 정치국원으로 올라가는 동안 그는 반대파의 길을 걸었다. 1919년 모스크바 금속노조 지도원, 1920년 제12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과 제14군 정치부 부부장을 지냈고, 1920년부터 1922년까지 전우크라이나 노동조합회의 의장, 1922년부터 1924년까지 노동조합 신문 『트루드』 주필을 맡았다. 1921년 민주중앙집권파에 속했고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뒤 좌익반대파로 활동했다. 1928년 5월 제명되어 볼가 독일인 자치공화국의 포크로프스크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도 활동을 이어가 정치격리소 3년과 미누신스크 유배 5년을 받았다. 1936년 7월 수용소 5년형으로 우흐타-페치라크에 수감되었다가 1937년 12월 다시 체포되어 1938년 3월 30일 보르쿠타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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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9모스크바 금속노조 지도원
  • 1920제12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제14군 정치부 부부장
  • 1920–1922전우크라이나 노동조합회의 의장
  • 1922–1924노동조합 신문 『트루드』 주필
  • 192346인 선언 서명
  • 1928당에서 제명, 포크로프스크 유배
  • 1936수용소 5년형, 우흐타-페치라크 수감
  • 1938보르쿠타에서 처형

아나톨리 니콜라예비치 페펠랴예프

Анатолий Николаевич Пепеляев

27세에 장군이 된 백군 지휘관, 야쿠티야 원정으로 내전을 끝내다

「나는 내 정치적 신념을 모른다. 나는 당파적이지 않다. 나는 인민에게 선과 행복을, 러시아 인민이 친절하고 평화로우며 강하고 위대한 인민이 되길 바란다」: 야쿠티야 원정 중 일기에서

러시아 내전에서 백군의 최연소 장군 중 하나로, 27세에 소장 계급을 받고 '시베리아의 수보로프'로 불렸다. 1918년 12월 페름을 함락시켜 2만 명의 붉은군대 포로를 석방했으며, 콜차크 휘하에서 제1시베리아군을 지휘했다. 내전이 패배로 기운 후에도 하얼빈에서 목수와 마부로 생계를 이어가다 1922년 9월 자원대를 이끌고 야쿠티야 원정에 나섰으며, 1923년 6월 아얀에서의 항복으로 끝난 이 원정은 러시아 내전의 마지막 군사 작전이었다.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되었으나, 대숙청기인 1938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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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파블롭스크 군사학교 졸업, 소위 임관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령 진급,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수훈
  • 1918.05–08톰스크 반볼셰비키 봉기 주도, 제1중앙시베리아군단 지휘
  • 1918.09–12소장 진급(27세), 페름 함락, '시베리아의 수보로프' 별칭
  • 1919중장 진급, 제1시베리아군 사령관
  • 1920–1922하얼빈 망명, 목수·마부로 생계
  • 1922.09–1923.06시베리아 의용대 이끌고 야쿠티야 원정, 아얀에서 항복
  • 1924–1938사형 선고 후 10년형 감형, 1936년 석방, 1938년 대숙청으로 총살

알렉산드르 게오르기예비치 벨로보로도프

Александр Георгиевич Белобородов

로마노프 처형에 서명한 좌익반대파 내무인민위원

스베르들로프에게 알리시오: 전 가족이 가장과 같은 운명을 함께했다. 공식 발표는 대피 중 사망이다.」 ― 로마노프 일가 처형 후 레닌 비서에게 보낸 암호 전보, 1918년 7월 17일

우랄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볼셰비키로, 1918년 우랄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 결정에 서명했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제르진스키의 후임으로 RSFSR 내무인민위원을 지내며 소비에트 경찰·교정 행정을 관장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며 좌익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당에서 축출되었다가 1930년 복당했으나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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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우랄 지역 당위원회 위원
  • 1918우랄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19–1920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정위원 · 중앙위원
  • 1919–1920제9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3RSFSR 내무부인민위원
  • 1923–1927RSFSR 내무인민위원
  • 1930–1936조달위원회 · 국내무역인민위원부 근무

예브헨 미하일로비치 코노발레츠

Євген Михайлович Коновалець

시치 소총병을 이끌고 UVO와 OUN을 조직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도자

1938년 5월 23일 로테르담. 신뢰하던 연락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우크라이나식 초콜릿 상자 안에는 모스크바에서 제작한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다.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 자시키우 출신의 우크라이나 군인·정치가.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가 된 뒤 1917년 키이우에서 시치 소총병을 조직했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싸웠다. 독립전쟁 패배 후 망명지에서 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을 이끌었으며, 1929년 빈에서 여러 민족주의 단체를 통합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을 창설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유럽과 북미의 망명 조직을 연결하고 국제연맹에 우크라이나 문제를 제기하려 했으나, 1938년 로테르담에서 OUN에 침투한 NKVD 요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폭탄으로 암살되었다. 1929년 리투아니아 시민권과 여권을 받아 망명 활동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지만, 그의 민족적·정치적 정체성과 운동의 목표는 일관되게 우크라이나 독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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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복무, 마키우카 전투 뒤 러시아군 포로
  • 1917–1920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 시치 소총병 조직·지휘
  • 1920–1929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 창립·지도
  • 1929–1938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 초대 지도자
  • 1938.05로테르담에서 파벨 수도플라토프의 폭탄 공작으로 암살

오십 에밀리예비치 만델슈탐

Осип Эмильевич Мандельштам
문학·예술 소련 폴란드 1891–1938 ✕ 옥사

기억으로 살아남은 시인

「러시아에서만 시가 존중받는다—시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 시가 살인의 동기인 나라가 또 어디 있나?」 아내 나데즈다의 회고록 『희망, 희망을 거슬러』에 기록된, 스탈린 시대 시인의 운명을 응축한 말.

아크메이즘의 핵심 시인이자 산문가로, 스탈린 체제의 언어와 공포를 시에 새겼다. 체포와 유배 뒤 다시 체포되어 극동 수용소로 보내졌고, 아내와 친구들이 암기해 지킨 시편들보다 먼저 수용소 이송 중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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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시집 『돌』 발표
  • 1920년대시·산문·번역 활동
  • 1934–1937체포와 보로네시 유배
  • 1938재체포, 극동 수용소 이송 중 사망

블라스 야콥레비치 추바리

Влас Яковлевич Чубарь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91–1939 ✕ 총살

11년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끈 경제행정가, 스탈린과 기근 사이에서 균열을 드러내다

1932년 6월 추바리는 "모든 마을에서 수만 명의 굶주린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갔다"며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그를 두고 "추바리는 착각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는 받을 몫보다 더 받았다"고 답했다.

우크라이나 페도리우카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난 경제행정가로, 1907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다. 1923년부터 11년간 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공업화와 집단화를 추진했고, 1932년 6월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기근 실태를 보고하고 곡물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와 1932~33년 기근의 집행 책임도 함께 지며, 2010년 키예프 항소법원은 그를 홀로도모르 조직자 중 한 명으로 판시했다. 1935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으나 1938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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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 1907페도리우카(예카테리노슬라프주) 빈농 가정에서 출생, 제정 노동자구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16세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1–1917크라마토르스크·마리우폴·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 공장 노동자, 지하운동
  • 1917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위원, 10월 혁명기 포병총국 정치위원
  • 1918–1923국가기계제작공장연합(ГОМЗа) 이사장, 최고경제회의 간부, 우크라이나 산업복구 조직국 의장
  • 1921–1923우크라이나 SSR 최고경제회의 의장 겸 중앙석탄공업관리국 의장 (일부 사료는 최고경제회의 의장 재임을 1920~21년으로 기록하며, 이 연대는 출처 간에 엇갈린다)
  • 1923–1934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11년간), 공업화·집단화 주도
  • 1923–1925, 1934–1938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 1926–1935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후보위원
  • 1935–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7–1938소련 재무인민위원
  • 1938.7.4'독일 첩보기관 요원'과 반소련 파괴 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 정치국 축출
  • 1939.2.26소련 대법원 군사재판부에서 사형 판결, 당일 총살; 1955년 복권

미하일 아파나시예비치 불가코프

Михаил Афанасьевич Булгаков
문학·예술 소련 러시아 1891–1940 ○ 병사

출판되지 않은 악마의 작가

1930년, 출판이 모두 막히자 『거장과 마르가리타』 초고를 벽난로에 던졌다. 훗날 소설 속 악마는 불탄 원고를 꺼내며 말한다. '원고는 타지 않는다.' 불가코프는 죽을 때까지 다시 썼고, 결국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의사 출신의 소설가·극작가로, 소비에트 일상의 관료제와 공포를 환상과 풍자로 비틀었다. 희곡이 금지되고 출판 길이 막힌 채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죽을 때까지 고쳤으며, 이 소설은 사후 검열본으로 먼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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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9의사로 복무
  • 1921모스크바로 이주, 작가 활동
  • 1925–1929소설·희곡 발표과 검열
  • 1928–1940『거장과 마르가리타』 집필

예핌 게오르기예비치 예브도키모프

Ефим Георгиевич Евдокимов

샤흐티 사건의 설계자이자 북캅카스의 실력자

스탈린은 1938년 이렇게 회고했다. "예브도키모프가 숄로호프를 체포하라며 두 번 찾아왔다. 전 백위군과 대화한다는 이유였다. 나는 말했다, 자네는 정치도 인생도 모른다고."

내전 세대의 체키스트로, 브란겔군 포로 대량 처형을 지휘하며 현장형 보안요원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1923년 북캅카스 OGPU 전권대표로 부임해 지역 권력 기반을 쌓았고, 1928년 샤흐티 사건을 설계해 기술 전문가를 겨냥한 첫 대형 정치 재판의 자백 확보를 지휘했다. 1929년부터 OGPU 비밀작전총국장을 맡으며 야고다와 적대했고, 1934년 당직으로 옮겨 야고다 집권기 보안기관 바깥에 머물렀다. 예조프 취임 후 북캅카스 인맥을 중앙에 공급하며 재기했으나, 예조프와 함께 몰락해 1940년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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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0모스크바 체카 특별부장, 이어 남서·남부전선 특별부 부부장
  • 1920–1921체카 크림 타격단 책임자
  • 1923–1929북캅카스 주재 OGPU 전권대표
  • 1929–1931OGPU 비밀작전총국장, 콜레기움 위원
  • 1934–1937북캅카스(이후 아조프-흑해)변경주 당 제1서기
  • 1937–1938로스토프주 당 제1서기
  • 1938수상운수 부인민위원
  • 1938–1940체포, 재판과 처형

아르카디 마슬로프

Аркадий Маслов
정치·당 지도 독일 공산당 러시아 러시아 1891–1941 ✕ 의문사 (NKVD 암살 추정)

KPD의 초좌익 전환을 이끈 피아니스트 출신 혁명가, 반스탈린주의 좌파의 영원한 이단아

“좌파 놀음을 하며 '중도파 사냥'에 열중하는 마슬로프 동지는 열정은 많으나 분별이 부족하다” — 레닌, 〈독일 공산주의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직접 이름으로 지목하며 비판했다 (1921년 8월 14일).

우크라이나 유대 상인 가정 출신으로 피아노 연주자의 길을 접고 아인슈타인·플랑크 아래서 물리학을 공부하다, 1차대전을 겪으며 KPD 창립에 가담했다. 루트 피셔의 평생 동반자로서 1924년 당 의장에 올라 통일전선을 배격하며 '볼셰비키화'를 밀어붙였으나, 스탈린과 텔만에게 밀려나 1926년 제명된 뒤로는 반스탈린주의 좌파의 길을 헤맨 이단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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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KPD 창립 당원 —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러시아 전쟁 포로 대상 선전 활동
  • 1920–1923KPD 중앙위원 — 피셔와 함께 베를린 좌파 지도, 《로테 파네》 외교편집장
  • 1924–1925KPD 의장 — 당의 '볼셰비키화'와 초좌익 전환 주도
  • 1924–1926독일 당국 체포·4년형 수감 — 1926년 7월 건강 악화로 조기 석방
  • 1926KPD 제명 — 스탈린과 텔만에 반대, 통합야당 지지
  • 1928레닌분트 공동 창립 — 우르반스·피셔와 결성, 곧 탈퇴
  • 1934–1937트로츠키와 협력 — 제4인터내셔널 운동 참여, 국제사무국 활동
  • 1937–1941파리-쿠바 망명 — 트로츠키와 결별 후 국제그룹 결성, 쿠바로 피신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페틀랴코프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Петляков
산업·생산 운영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91–1942 ✕ 항공사고

샤라슈카에서 태어난 Pe-2: 소련 최고의 전술폭격기를 만든 죄수

1940년 봄, 페틀랴코프는 자신이 설계한 Pe-2의 시험비행을 감옥 창고 지붕 위에서 지켜보았다. 아직 죄수 신분이었다.

안드레이 투폴레프의 오른팔로 TB-1·TB-3 중폭격기와 ANT-20 「막심 고리키」의 날개를 설계한 항공기술자. 1937년 '사보타주' 혐의로 투폴레프와 함께 체포되어 NKVD 샤라슈카에 수감된 상태에서도 설계를 계속했고, 고고도 전투기 VI-100을 급강하폭격기로 전환하라는 라브렌티 베리야의 지시에 45일 만에 Pe-2를 완성했다. 이 기종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소련 공군의 주력 전술폭격기로 활약하며 독소전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40년 석방, 1941년 스탈린상 1급과 두 번째 레닌 훈장을 받았으나, 이듬해 Pe-2 생산 문제를 논의하러 모스크바로 향하던 중 탑승기가 아르자마스 인근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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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타간로크 기술전문학교 졸업, 모스크바로 이주
  • 1911–22모스크바국립기술대학(МВТУ) 입학, 주콥스키 항공역학 연구실 근무
  • 1921–36ЦАГИ 근무, 투폴레프의 중폭격기 개발 주임 — TB-1, TB-3, Пе-8
  • 1936–37항공공장 수석설계자, ЦАГИ 부소장
  • 1937–40체포·수감, NKVD 샤라슈카에서 VI-100 → Pe-2 설계
  • 1940–42석방, 제22공장 수석설계자 — Pe-2 대량생산, Pe-3 개발

고노에 후미마로

近衞文麿
정부·행정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 1891–1945 ✕ 자살

외교를 말했지만 제국의 전쟁을 넓힌 귀족 정치가

1941년 10월, 그는 전쟁을 자신할 수 없다며 외교를 택할 사람에게 정권을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고노에 후미마로는 일본의 귀족 정치가이자 제국의 전시 동원을 이끈 총리였다. 사회주의 사상과 반제국주의적 인종평등론에 관심을 보였지만, 서구 제국주의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과 동아시아 지배 구상을 추진했다. 1940년 삼국동맹과 대정익찬회를 주도한 뒤 미국과의 협상을 시도했으나 군부의 확장 노선을 꺾지 못했고, 1941년 도조 히데키에게 정권을 넘겼다. 전후 전범 용의자로 체포될 예정이던 그는 1945년 청산가리로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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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귀족원 의원
  • 1919파리강화회의 일본 대표단 수행원
  • 1933–1937귀족원 의장
  • 1937–1939제1차 내각 총리대신
  • 1940–1941제2·3차 내각 총리대신
  • 1940–1941대정익찬회 총재
  • 1945동구궁 내각 국무대신
군사·지휘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 1891–1945 ✕ 전사

미국을 알았던 이오지마 방어 지휘관

미국은 세계의 대국이므로 일본은 가능한 한 이 나라와 싸움을 피해야 한다고 가족에게 말했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외교관으로, 미국의 산업력과 군사력을 직접 관찰한 드문 일본군 고위 지휘관이었다. 그는 이오지마에서 해안의 결전을 피하고 지하호와 종심 방어를 결합해 압도적 전력에 맞서는 소모전을 설계했다. 그 방어는 일본의 패배를 막지 못했지만 미국군의 상륙과 섬 점령에 큰 비용을 부과했으며, 동시에 병사들에게 만세 돌격과 무의미한 자결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지휘 원칙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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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육군사관학교 졸업, 기병 소위
  • 1923육군대학교 졸업, 성적 2위
  • 1927–1930미국 주재 무관보, 하버드에서 수학
  • 1931–1933캐나다 주재 무관
  • 1941–1943제23군 참모장, 홍콩 전투에 참전
  • 1943–1944근위 제2사단장
  • 1944–1945제109사단장, 오가사와라 병단장, 이오지마 수비 지휘
  • 1945이오지마 전투에서 전사, 사후 육군 대장 추서

발터 모델

Walter Model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인 1891–1945 ✕ 자살

히틀러의 소방수라 불리며 동부전선의 위기를 진압한 방어전의 명수

눈보라를 뚫고 동프로이센으로 날아간 모델은 히틀러 앞에서 단안경 너머로 노려보며 물었다. 「총통 각하, 9군을 지휘하는 것이 각하십니까, 나입니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장교로 두각을 나타낸 발터 모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최고의 방어전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르제프 돌출부의 9군 사령관으로서 소련군의 여러 대공세를 격퇴해 '방어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히틀러에게는 어디든 급파할 수 있는 '소방수'로 신임을 받았다. 1943년 4월 27일 모델은 항공정찰 사진을 제시하며 쿠르스크 돌출부에 구축된 소련군의 종심 방어선 앞에서 성채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한 최초의 고위 지휘관이었으나 공세는 강행되었고, 북부 공격축을 지휘한 그의 9군은 12km조차 돌파하지 못했다. 전쟁 말기 루르 포위망에서 집단 항복을 거부하고 육군 집단을 해산한 뒤 숲에서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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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52보병연대 사관후보생
  • 1917최고사령부 작전과 참모장교
  • 1935육군총국 제8부(기술) 부장
  • 1940제3기갑사단장
  • 1942제9군 사령관, 르제프 방어전
  • 1943성채 작전 북부 공격 지휘
  • 1944중부집단군 사령관 → B집단군 사령관
  • 1945루르 포위망 포위, 군 해산 후 자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