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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인물 2390명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노비코프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Новиков

군수공장 기술자에서 국가계획 수장이 된 방위산업 테크노크라트

1942년 6월 3일, 최고회의 상임간부회 포고령: '생산 조직과 신형 포병·소화기 무기의 숙달, 공장의 능숙한 지휘에서 탁월한 공로.' 34세의 노비코프는 반니코프, 우스티노프와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제프스크 군수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1942년 34세의 나이로 사회주의노동영웅이 된 방위산업 테크노크라트. 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과 러시아공화국 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1960년 흐루쇼프에 의해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소브나르호스 개혁으로 분권화된 경제 속에서 2년 만에 물러났고, 이후 브레즈네프 아래서 15년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남아 군수·경제 분야에서 조용히 영향력을 행사한 내구력 있는 실무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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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9이제프스크 방위공장: 기술자·설계사·주임기술자·기사장
  • 1939–1941제74공장(무장인민위원부) 소장, 이제프스크
  • 1941–1948소련 무장인민부위원·무장차관; 공병포병소장 (1944)
  • 1948–1957레이더위원회·방위공업부·일반기계제조부 지도부
  • 1957–1960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고스플란 의장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의장
  • 1962–1965소련 코메콘 대표; 소련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
  • 1965–198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동독 '공포의 대가': 32년간 슈타지를 장악한 국가보안 수장

“사형 찬반에 대한 그 모든 헛소리 — 전부 헛소리다, 동무들. 집행하라! 필요하다면 법정 판결 없이도.” — 1982년, 슈타지 간부들 앞에서

베를린 빈민가 출신의 공산주의 투사로, 1931년 경찰관 살해 후 소련으로 망명해 NKVD 훈련을 받았다. 스페인 내전 참전 뒤 1945년 귀환하여 동독 국가보안부 창설을 주도했고, 1957년 장관에 올라 32년간 9만 명 규모의 감시 기구를 이끌었다. 슈타지는 동독 사회 전반을 통제했고, 제3세계 무장투쟁 세력과 서유럽 극좌 조직 지원으로 냉전기 사회주의권 안보 협력망을 확장했다. 1989년 체제 붕괴로 물러났고 통일 후 1931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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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KPD 입당
  • 1931뷜로플라츠 경관 살해 후 소련 망명
  • 1936–1939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참전 (대위)
  • 1945베를린 귀환, 리히텐베르크 경찰서장
  • 1950국가보안부 차관 겸 국무차관
  • 1957–1989국가보안부 장관 (슈타지 수장)
  • 1976SED 정치국 정위원
  • 1993경관 살해 유죄 판결, 6년형

블라디미르 벨레비트

Vladimir Velebit

스탈린이 '영국 스파이'로 지목한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외교관

스탈린은 1948년 3월 27일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영국 스파이 벨레비트가 여전히 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유고슬라비아의 변호사 출신 파르티잔 장군이자 외교관으로, 전시에는 연합군 군사 임무단과의 접촉 창구를 맡았고 전후에는 외무차관으로서 서방과 협상했다. 1948년 3월 스탈린은 그를 '영국 스파이'라고 직접 지목하며 티토와의 솔직한 외교 서신 교환을 거부했고, 이는 티토-스탈린 결별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사임 후 복권되어 로마·런던 주재 대사와 유엔 유럽경제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냉전기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외교적으로 구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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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자그레브 대학교 법학박사
  • 1939이스탄불에서 티토를 만나 KPJ에 입당
  • 1942–1943파르티잔 최고사령부, 연합군 군사 임무단 연락장교
  • 1945–1948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
  • 1951–1952주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대사
  • 1952–1956주영국 유고슬라비아 대사
  • 1960–1967유엔 유럽경제위원회(UNECE) 사무총장

폴 니츠

Paul Nitze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인 미국계 1907–2004 ○ 자연사

핵전략과 군비통제를 오간 냉전 설계자

1982년 제네바 협상 중 유리 크비친스키와 ‘숲속 산책’을 하며 타협안을 모색했다.

폴 니츠는 미국의 냉전 전략과 핵무기 정책을 형성한 외교·안보 관료였다. 그는 NSC-68에서 소련과의 장기 대결을 군사력 증강의 문제로 정식화했지만, 핵무기의 위험을 관리하려면 정교한 협상도 필요하다고 보았다. SALT에 참여하고 레이건 행정부의 INF 협상을 이끌면서, 강한 억지력과 군비 감축을 서로 배타적인 선택으로 보지 않는 실무 노선을 추구했다. 이 때문에 그는 군비경쟁의 설계자이자 협상 가능한 질서를 찾은 인물이라는 상반된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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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46전략폭격조사단 부의장
  • 1950–1953국무부 정책기획국장
  • 1961–1963국방부 국제안보담당 차관보
  • 1963–1967해군장관
  • 1967–1969국방부 부장관
  • 1969–1973SALT I 미국 대표단
  • 1981–1984INF 미국 수석협상가
  • 1984–1989대통령·국무장관 군비통제 특별고문

허가이

Алексей Хегай
정치·당 지도 조선로동당 소비에트 고려인 1908–1953 ✕ 숙청 후 의문사

조선로동당 창립 핵심 조직자이자 초기 '소련파'의 지도자

1948년 3월 제2차 당대회에서 허가이는 돌연 연단에 올라 이미 사과한 간부들을 향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사과는 공허한 말일 뿐"이라고 질타했고, 이 발언은 당내 규율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소비에트 고려인 혁명가로, 1945년 소련 점령 당국의 파견을 받아 평양에 도착한 후 조선로동당 창립의 핵심 조직자로 활동했다. 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겸 제2부위원장으로서 소련식 간부당 노선을 추진했으며, 한국전쟁 중 60만 당원 중 45만 명을 검증·제명하는 대대적 당 정비를 주도했다. 대중당을 구상한 김일성과 당 조직 노선을 둘러싸고 충돌해 1951년 실각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소련파'의 부상과 몰락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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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2극동지역 콤소몰 서기
  • 1937당에서 숙청·제명,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 1939당적 회복, 우즈베키스탄에서 당 간부로 복귀
  • 1946북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위원, 조직국장
  • 1948북조선로동당 부위원장 겸 검열위원장
  • 1949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겸 제2부위원장
  • 1951김일성과 충돌 후 전직 해임, 부수상으로 좌천

빅토르 세묘노비치 아바쿠모프

Виктор Семёнович Абакумов

스메르시를 지휘하고 MGB를 통치한 스탈린의 보안 수장

1949년, 저명한 과학자 리나 시테른을 심문하며 "이 늙은 창녀야!"라고 고함치자, 시테른은 "장관께서 학자에게 말하는 태도가 그렇습니까"라고 답했다.

스탈린 시대 말기 국가보안을 총괄한 실력자로, 14세에 적군 입대 후 OGPU·굴라그를 거쳐 대숙청에서 살아남았고, 전시 방첩 기구 스메르시 총국장으로 발탁되어 스탈린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 종전 후 MGB 장관으로서 레닌그라드 사건과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탄압을 설계·집행하며 베리야를 견제하는 스탈린의 핵심 카드로 군림했다. 그러나 1951년 부하의 밀고로 '의사들 음모' 은폐 혐의로 체포되어 자신이 구축한 체제에 삼켜졌고, 스탈린 사후 레닌그라드 사건 조작 혐의로 재판받아 1954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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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NKVD에서 성장, 대숙청기 보안 실무를 거쳐 승진
  • 1943–1946스메르시 방첩총국장, 전시 군 방첩을 지휘
  • 1946–1951MGB 국가보안장관, 전후 보안기관을 지휘
  • 1949–1951레닌그라드 사건 등 전후 숙청 국면에 관여
  • 1951–1954체포 뒤 스탈린 사후 재판을 거쳐 처형

코바치 벨러

Kovács Béla

소련군에 끌려가 소농당 해체의 방아쇠가 된 사무총장

체포되며 남긴 말: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 죄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평생의 일을 배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농 출신의 농민 정치가로, 소학교 네 학년만 마친 뒤 1933년 소농당에 입당해 1945년 사무총장으로 전후 최대 정당을 이끌었다. 틸디·너지 정부의 농업장관으로 지주제 해체와 토지개혁을 밀었고, 공산당의 살라미 전술에 맞서 당의 독립을 지켰다. 1947년 2월 국회가 면책특권 박탈을 거부하자 소련군이 조작된 간첩 혐의로 그를 체포해 굴라크로 끌고 갔고, 이 납치는 너지 페렌츠 총리의 사임과 소농당 해체의 방아쇠가 되었다. 1955년 귀환해 1956년 너지 임레 혁명정부의 농업장관으로 복귀했고, 진압 뒤 카다르 체제에 협력하다 195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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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44소농당 입당, 버러녀 조직가·반나치 저항
  • 1944–45내무부 정치 차관(데브레첸 임시정부)
  • 1945–46농업장관
  • 1945.08–47소농당 사무총장
  • 1947–55소련군 체포, 굴라크 20년형, 1953년 모스크바 수감
  • 1955–56헝가리 이송, 1956.4 석방
  • 1956.10–11너지 임레 혁명정부 농업장관·국가장관
  • 1957–59카다르 체제 협력, 1958 국회의원

게오르기 표도로비치 알렉산드로프

Георгий Фёдор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스탈린의 수석 이념 감독관, 철학 논쟁에 무너지다

1947년 6월 철학 논쟁장. 즈다노프가 500명 앞에서 묻는다: "이 책에서 부르주아 철학자들이 서로를 깨물어먹는 장면은 묘사했으면서, 마르크스주의 혁명이 어떻게 그 모두를 쓸어버렸는지는 어디 있습니까?" 알렉산드로프는 침묵한다.

스탈린 시대 수석 철학 관료. 고아에서 선전선동국장까지 올라 『서유럽철학사』로 스탈린상을 받았으나, 1947년 철학 논쟁으로 실각했다. 문화장관도 성추문으로 1년 만에 민스크로 좌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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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20s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전기기사 아들. 내전기 고아가 되어 보리소글렙스크 고아원에서 성장
  • 1930–1935모스크바 철학문학사연구소(МИФЛИ) 졸업 및 아스피란투라 수료
  • 1935–1939МИФЛИ 교수, 철학사 전공. 아리스토텔레스 연구로 박사학위
  • 1939중앙위 선전선동국 부국장 겸 고등당학교(ВПШ) 교장
  • 1940–1947중앙위 선전선동국장: 전쟁기 선전·대외이념공세·전후 문화통제 주도
  • 1943, 1946『철학사』3권과 『서유럽철학사』로 스탈린상 2회 수상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스탈린 전기(2판) 공동 집필
  • 19476월 철학 논쟁: 스탈린·즈다노프의 비판. 9월 선전선동국장 해임, 철학연구소장으로 전출
  • 1954–1955소련 문화장관 임명. 1년 만에 「검투사 사건」 성추문으로 파면
  • 1955–1961민스크의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철학법률연구소 분과장으로 좌천, 말년을 보냄

프롤 로마노비치 코즐로프

Фрол Романович Козлов

뇌졸중 하나로 브레즈네프 시대를 연 제2서기

1959년 7월 13일, 미국 『타임』지는 코즐로프의 사진을 표지에 싣고 「흐루쇼프의 후계자?」라는 제목을 달았다. 그로부터 4년 뒤 뇌졸중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랴잔 농가 출신의 금속공학자로, 이젭스크 군수공업 현장에서 올라와 전후 레닌그라드 당을 장악했다. 1957년 반당그룹 사건에서 흐루쇼프를 결정적으로 지지한 뒤 중앙위 서기 겸 상임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1960년부터는 흐루쇼프의 공인된 후계자로서 서기국과 상임위원회를 사실상 지휘했다. 당·군·보안기관의 인사권을 독점할 정도로 권력이 집중되었으나, 1963년 4월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흐루쇼프의 후계 구도 전체가 붕괴했고, 그의 빈자리는 브레즈네프가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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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39이젭스크 제철공장 제강소장 → 당위원회 서기
  • 1940–44이젭스크 시당 제2서기: 군수생산 지휘
  • 1947–49쿠이비셰프 주당 제2서기: 중공업·항공 감독
  • 1949–53레닌그라드 시당 제1서기 → 주당 제2서기: 「레닌그라드 사건」 후 당 재건
  • 1953–57레닌그라드 주당 제1서기: 지하철·도시 현대화 추진
  • 1957–58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8–60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일상적 정부 운영 총괄
  • 1960–64중앙위 서기, 사실상의 제2서기: 서기국·상임위원회 주재

레프 다비도비치 란다우

Лев Давидович Ландау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아제르바이잔 1908–1968 ○ 자연사

'란다우 학교'를 세우고 양자유체 역학을 개척한 소련 이론물리학의 거장

그는 물리학자를 성취도에 따라 로그 등급으로 분류하곤 했다. 1급은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랙. 아인슈타인은 0.5급이었다. 자신은 한때 2.5급에 두었다가, 나중에 1.5급으로 올렸다.

소련 이론물리학자. 엄격한 이론최소과목으로 제자를 선발하는 '란다우 학교'를 세웠고, 초유동체·페르미 액체 이론으로 응집물질물리학을 개척했다. 리프시츠와의 《이론물리학 강좌》는 세계적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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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우크라이나 물리기술연구소(UFTI) 이론부장 · 하르코프 대학 교수
  • 1937–1968모스크바 물리문제연구소(IFPAN) 이론부장
  • 1943–1947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저온물리학 교수
  • 1945–1953소련 원자력 프로젝트 참여 · 스탈린상 3회 수상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академик) 선출
  • 1962노벨 물리학상 수상 '응집물질 이론, 특히 액체 헬륨의 선구적 연구'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이사예프

Алексей Михайлович Исае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8–1971 ○ 자연사

소련 우주선의 심장을 만든 엔진 설계자: 폐쇄식 사이클의 발명가

가가린 귀환 후 흐루쇼프 앞에서 코롤료프가 이사예프를 소개했다. "이분이 바로 우리 일을 죄다 제동 거는 사람입니다." 흐루쇼프는 농담을 알아듣고 웃으며 거듭 감사를 표했다 — 우주선을 지구로 되돌리는 제동엔진을 만든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광산기술자로 출발해 로켓 비행기 BI-1의 엔진 개발을 계기로 액체추진 로켓에 뛰어든 설계자. 1949년 폐쇄식 사이클(단계식 연소)을 세계 최초로 제안하고, 얇은 구리 연소실과 평판 분사기를 도입해 독일 V-2 계열의 복잡한 배관 설계에서 소련 로켓공학을 독립시켰다. 그의 제동엔진 TDU는 가가린을 포함한 모든 보스토크·보스호트 우주비행사를 지구로 귀환시켰고, KTDU 기동엔진 계열은 소유스·살류트·미르와 루나·베네라·마르스 탐사선 전체를 움직였다. R-11(스커드) 미사일 엔진과 SLBM 추진체계 설계에서도 결정적 기여를 했으며, 그가 세운 KB KhimMash는 오늘날까지 러시아 우주선 엔진의 핵심 설계국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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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모스크바 광산대학 졸업, 금속공장 기술자
  • 1934–44볼호비티노프 설계국: 항공기 착륙장치, BI-1 로켓전투기 엔진
  • 1944–47OKB-2 수석설계자, 독일 로켓기술 조사단 참가(1945)
  • 1948–52니리-88 제9부: 진동방지 격벽, 평판 분사기, 폐쇄식 사이클(1949) 발명
  • 1951–55R-11(스커드) 엔진 S2.253; 코롤료프와 협업 시작
  • 1958–61OKB-2 확대; 보스토크 TDU 제동엔진(104회 비행 성공)
  • 1962–71KTDU 계열: 소유스·살류트·미르·행성탐사선 엔진; N1-L3 달착륙선용 LOX/LH2 엔진
  • 1967–71KB KhimMash(舊 OKB-2) 수석설계자로 사망 시까지 재임

린든 B. 존슨

Lyndon B. Johnson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908–1973 ○ 자연사

개혁과 전쟁 사이의 냉전 대통령

1968년 7월, 미국과 소련이 전략무기 제한 협상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린든 B. 존슨은 의회에서 다져진 협상력으로 미국의 국내 개혁과 냉전 전략을 함께 밀어붙인 대통령이었다. 그는 민권법과 투표권법, 메디케어를 포함한 ‘위대한 사회’를 확장했지만, 베트남전의 확대는 그 성과를 압도하는 역사적 책임이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경쟁을 지속하면서도 소련과 전략무기 제한을 모색해 1967년 글래스버러 정상회담과 1968년 전략무기 협상 합의로 훗날 SALT로 이어질 길을 열었다. 선거에서 물러난 마지막 해에도 베트남 평화협상과 군비통제를 병행하려 했으나, 합의의 결실은 후임 정부가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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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49텍사스 제10선거구 연방 하원의원
  • 1949–1951텍사스주 연방 상원의원
  • 1951–1953상원 민주당 원내총무
  • 1953–1955상원 민주당 원내대표
  • 1955–1961상원 다수당 원내대표
  • 1961–1963미국 부통령
  • 1963–1969미국 제36대 대통령

살바도르 기예르모 아옌데

Salvador Guillermo Allende
정부·행정 칠레 국가기관 칠레 칠레 1908–1973 ✕ 자살

선거로 집권해 '칠레식 사회주의'를 실험하다 군사 쿠데타로 쓰러진 마르크스주의 대통령

“나는 사임하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변곡점에서 나는 인민의 충성에 목숨으로 보답할 것이다.” — 마지막 라디오 연설, 라 모네다, 1973년 9월 11일

세계 최초로 선거로 집권한 마르크스주의 국가원수. 구리 국유화·농지개혁·사이버신 계획을 통해 평화적 '칠레식 사회주의'를 실험했으나, 1973년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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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칠레대학교 의학부 졸업
  • 1933칠레 사회당 창당 참여 — 체포되어 6개월 수감
  • 1938–1942인민전선 정부 보건부 장관 — 빈민층에 최초 의료 접근권
  • 1945–1970상원의원 — 상원의장(1966–1969)
  • 1952, 1958, 1964인민행동전선(FRAP) 대선 후보 — 세 차례 낙선
  • 1970인민연합 후보로 대통령 당선(36.6%) — 10월 24일 취임
  • 1970–1973구리 국유화, 농지개혁, 사이버신 — '칠레식 사회주의' 실험
  • 1973.09.11군사 쿠데타 — 라 모네다에서 최후 라디오 연설 후 자결

요세프 파벨

Josef Pavel

프라하의 봄에서 내무장관으로 보안기관 개혁을 시도했으나 KGB의 내부 교란으로 좌절된 인물

1968년 8월 침공 당일, 파벨이 해임한 부하 샬고비치는 KGB와 함께 두브체크를 체포했고, 내무부는 장관의 손을 떠났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했고, 1948년 쿠데타에서는 민병대를 지휘했다. 내무차관으로 공포정치에 가담했으나 1951년 체포되어 슬란스키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고문과 25년형을 받았고, 1955년 무죄 석방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내무장관으로 복귀해 국가보안대(StB) 개혁을 추진하고 KGB 연락장교 6명의 존재를 폭로했으나, 부하인 빌리암 샬고비치가 KGB와 공모해 침공 당일 두브체크 체포를 지원하면서 개혁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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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35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료
  • 1937–1939스페인 내전 참전 (디미트로프 대대 지휘)
  • 1947KSČ 중앙위 방위·보안부문 비서장
  • 1948인민민병대 주참모장, 내무차관
  • 1951–1955체포·고문, 1953년 25년형 선고, 1955년 무죄 석방
  • 1968.4–8체코슬로바키아 내무장관
  • 1968–1973강제 퇴임 후 KSČ 제명, StB 감시 속에 사망

발레리 드미트리예비치 칼미코프

Валерий Дмитриевич Калмыков

소련 라디오·전자공업을 20년간 창설·지휘하며 우주 비행과 미사일 방어의 전자적 기반을 구축한 군수 행정가

1961년 6월 17일, 가가린의 우주 비행을 가능케 한 전자 시스템의 공로로 비공개 포고령에 의해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1954년부터 사망까지 20년간 소련 라디오·전자공업을 지휘한 군수 행정가로, 부처 명칭이 세 차례 바뀌는 동안 단 한 번도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로스토프나도누 전기기술자로 출발해 모스크바 동력대학 야간부를 졸업하고, 조선공업 연구소에서 해군 레이더와 유도무기를 개발하며 스탈린상을 두 차례 수상했다. 1954년 신설 무선기술공업부 장관에 취임한 뒤 그가 구축한 전자산업 체계는 유인 우주 비행의 통신·유도 장비와 세계 최초의 작전 배치형 탄도미사일 방어 체계인 모스크바 A-35의 핵심 기반이 되었다. 가가린 비행의 전자 장비 공로로 1961년 사회주의 노동영웅을 받았으며, 7개의 레닌 훈장을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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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9로스토프나도누 전기기술자, 로스토프 공업전문학교 야간 수료
  • 1929–1933모스크바 '모스카벨' 공장 작업반장 → 책임기사
  • 1934모스크바 동력대학(MЭИ) 야간부 졸업
  • 1935–1942조선공업인민위원부 НИИ-10: 설계기사 → 주임설계자 → 주임기사
  • 1942–1949НИИ-10(후 НИИ-100 '알타이르') 소장
  • 1949–1951조선공업부 반동무장 총국장
  • 1951–1954각료회의 제3총국 부국장 (레이더·대공미사일)
  • 1954–1957소련 무선기술공업부 장관
  • 1957–1963각료회의 라디오전자 국가위원회 의장 — 소련 장관
  • 1963–1965소련 라디오전자 국가위원회 의장 — 소련 장관
  • 1965–1974소련 라디오공업부 장관 (재임 중 사망)

알렉세이 일라리오노비치 키리첸코

Алексей Илларионович Кириченко

흐루쇼프 초의 당 임명 담당 서기

1957년 6월 반당 그룹과의 대결에서 키리첸코는 논거를 고르는 수고도 없이 모든 비난을 거칠게 쳐내며 흐루쇼프 편에 섰다. 흐루쇼프 없이는 자신에게도 미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당 역사상 첫 우크라이나인 제1서기로, 1957년 반당 그룹에 맞서 흐루쇼프를 결사적으로 지지하며 모스크바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다. 1958년 사실상 당 제2서기로서 서기국을 주재하고 인사권을 장악했으나, 거친 성격과 독자적 행보로 동료들의 반감을 사고 흐루쇼프의 신임마저 잃었다. 1960년 실각 후 공장장으로 전락했다가 연금 생활자로 완전히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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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57우크라이나 당 제1서기
  • 1957–60중앙위 서기, 당 임명 업무
  • 1960흐루쇼프 체제 내부에서 실각

오토 스코르체니

Otto Skorzeny
군사·지휘 나치당·나치 정권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계 1908–1975 ○ 자연사

나치 특수작전의 지휘관이자 선전의 산물

그란사소에서 무솔리니 앞에 선 장면은 실제 지휘권보다 선전의 공로가 더 크게 기록된 순간이었다.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스코르체니는 Waffen-SS 장교로서 나치 독일의 사보타주와 특수작전을 지휘했다. 1943년 그란사소 작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의 위치를 찾고 SS 분견대를 이끌어 현장에 참여했지만, 작전 전체의 계획과 지휘는 공수부대 장교 하랄트 모르스와 쿠르트 슈투덴트의 몫이었다. 나치 선전은 그를 ‘무솔리니의 구출자’로 내세웠고, 그는 헝가리 정권 전복과 아르덴 공세의 위장작전에도 관여했다. 전후 전범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스페인에서 극우 네트워크와 연결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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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오스트리아 나치당 가입
  • 1938오스트리아 병합 과정에서 SS 대원으로 활동
  • 1943RSHA 제6국 특수공작 부문 지휘
  • 1943그란사소 작전에서 SS 분견대 지휘
  • 1944헝가리 판처파우스트 작전 관여
  • 1944아르덴 공세 그라이프 작전 지휘
  • 1947다하우 군사재판에서 무죄 판결
  • 1953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의 군사 고문

세쿠리타테를 세운 첫 공산당 내무장관, 파우커·루카를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1952년 함께 숙청되다

1952년 5월 전원회의는 제오르제스쿠에게 우편향에 「화해적 태도」를 보였다는 죄를 물어 정치국과 내무장관 자리에서 밀어냈다. 세쿠리타테를 만든 사람이 이듬해 2월 그 세쿠리타테에 체포되었다.

부쿠레슈티 근교 키틸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인쇄공으로 일했고, 1929년 루마니아 공산당에 들어가 인쇄 노조에서 활동했다. 1941년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카란세베시 감옥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복역했으며, 1944년 8월 석방되어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45년 3월 그로자 정부의 내무장관에 올라 1952년까지 경찰과 보안기관을 장악했고, 1946년 총선의 조작, 1947년 마니우 등 국민농민당 지도부의 체포와 재판, 1948년 세쿠리타테 창설과 무장 저항의 진압을 지휘했다. 당내에서는 아나 파우커·바실레 루카와 가까워 「모스크바파」의 세 번째 인물로 꼽혔고, 1952년 5월 전원회의에서 우편향에 「화해적 태도」를 보였다는 죄목으로 정치국과 내무장관 자리에서 제거되었다. 1953년 2월 체포되어 재판 없이 1956년 풀려났고 당적을 잃은 뒤 인쇄소 책임자로 일했다. 1968년 차우셰스쿠 지도부가 데지 시대 숙청을 재심하면서 복권되었고 1976년 부쿠레슈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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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루마니아 공산당 입당, 인쇄 노조 활동
  • 1941–1944체포, 10년형, 카란세베시 감옥 복역
  • 1944석방, 중앙위원회 서기
  • 1945–1952내무장관
  • 1948세쿠리타테 창설 지휘
  • 1952정치국·내무장관 해임
  • 1953–1956체포, 재판 없이 석방, 당적 박탈
  • 1968복권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체르노우소프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Черноус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8–1978 ○ 자연사

레닌그라드 사건 후폭풍 속에 등장했다 사라진 러시아 공화국 수반

1952년 10월, 19차 당대회 직후 체르노우소프는 중앙위 조직국원과 러시아 공화국 총리직에서 동시에 해임되었다. 그의 다음 직장은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이었다.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볼가 강변의 시즈란에서 태어나, 콤소몰 활동가로 출발해 모스크바 동력공학원을 졸업한 기술관료형 당료였다. 1939년부터 1948년까지 모스크바 주당위 제2서기로 알렉산드르 셰르바코프를 보좌했고, 1949년 미하일 로디오노프가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숙청된 직후 러시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 임명되어 스탈린 말년의 러시아 정부를 이끌었다. 1952년 19차 당대회 직후 모든 당직에서 해임되어 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장으로 좌천되었고, 스탈린 사후에야 자동차공업부 차관으로 복귀해 고스플란과 코메콘에서 조용히 경력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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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2러시아 공화국(RSFSR) 각료회의 의장
  • 1949–1952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조직국 위원
  • 1948–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당·노조·콤소몰 기관부장
  • 1939–1948모스크바 주당위 제2서기
  • 1939–1952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 위원 후보
  • 1938–1939모스크바 시 스탈린 구당위 제1서기
  • 1955–1957소련 자동차공업부 차관
  • 1952–1955모스크바 탐조등 공장장

조제프 야코블레비치 코틴

Жозеф Яковлевич Котин

KV·IS 중전차를 만든 탱크그라드의 수석 설계자

동료 설계자가 남긴 말: '코틴은 누군가를 낚아채지 않으면 밤에 잠을 못 이룬다.' 그의 전차들에는 키로프, 보로실로프, 스탈린의 이름이 붙었다.

소련 중전차 설계의 거장으로, KV 계열과 IS(이오시프 스탈린) 중전차, SU-152·ISU-152 자주포를 세상에 내놓은 군수 기술자이자 행정가. 1937년 29세에 키로프 공장 수석 설계자가 되어 T-28 개량을 시작으로, 에스파냐 내전의 교훈을 반영해 대전차 방어를 뚫을 중장갑 전차 개발에 착수했다. 독소전쟁 발발 후 부전차공업인민위원으로서 레닌그라드에서 첼랴빈스크까지 공장 대피를 진두지휘해 '탱크그라드'를 건설했고, 전쟁 기간 1만 8천 대의 전차와 자주포를 쏟아냈다. 전후에도 PT-76 수륙양용전차, T-10 중전차, K-700 트랙터를 개발하며 민수 분야까지 설계 영역을 넓혔고, 1968년 방위공업차관으로 군수 행정의 정점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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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육군기계화·차량화 아카데미 연구부문 엔지니어, 설계국장
  • 1937–1968키로프 공장 SKB-2 수석 설계자 (레닌그라드/첼랴빈스크)
  • 1941–1943소련 전차공업 부인민위원 겸 수석 설계자
  • 1943–1945제100실험전차공장장 겸 수석 설계자 (첼랴빈스크)
  • 1949–1968VNII-100 전차연구소 소장 겸 수석 설계자
  • 1968–1972소련 방위공업차관

프란티셰크 크리겔

František Kriegel
정치·당 지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1908–1979 ○ 당 제명 · 의사면허 박탈 1969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을 거부한 유일한 프라하의 봄 지도자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 선 크리겔은 이렇게 말했다: '쏘든지 시베리아로 보내든지, 나는 서명하지 않겠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KSČ 상임간부회 위원 겸 민족전선 의장으로 개혁을 이끌었다.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당일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연행되었고, 26명의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인 중 유일하게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을 거부했다. 이후 당에서 축출되고 의사 면허도 박탈당했으나, 1977년 헌장 77에 최초 서명하며 생애 마지막까지 반체제 인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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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KSČ 입당
  • 1936–39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군의관
  • 1940–45중국-버마 전선 군의관
  • 1949–52보건부 차관
  • 1964–68국민의회 의원 → KSČ 중앙위원
  • 1968.4–8민족전선 의장 겸 KSČ 상임간부회 위원
  • 1968.8모스크바 의정서 서명 거부
  • 1969–77당 제명·의사면허 박탈, 이후 헌장 77 최초 서명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필류긴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Пилюг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8–1982 ○ 자연사

스푸트니크에서 부란까지: 소련 우주시대의 두뇌를 설계한 유도·항법 수석설계자

1946년 코롤료프가 젊은 필류긴을 찾아와 "로켓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류긴은 자이로스코프 하나로 시작해 35년간 소련의 모든 우주비행을 조종하는 두뇌를 설계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공대를 졸업하고 ЦАГИ에서 정밀기계공으로 일했다. 전후 독일에서 V-2 잔해를 연구하고 1946년 코롤료프의 추천으로 NII-885 자율제어계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그의 유도·항법·제어 시스템은 R-1과 R-7(스푸트니크·가가린), 프로톤, 행성간 탐사선, 부란 왕복선까지 소련 로켓의 거의 모든 계보를 관통했다. 코롤료프·글루시코·바르민과 함께 수석설계자회의에서 소련 우주개발 방향을 결정했으며, 1975년 사하로프의 노벨평화상을 비난한 아카데미 성명에 서명한 72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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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바우만 공대 졸업, 자이로 계측기 '지로그라프'로 졸업논문
  • 1935–43ЦАГИ·비행시험연구소에서 정밀기계공, 항공기 자이로 계측 설계
  • 1943기술과학 후보(박사) 학위 취득
  • 1944–46NII-1 로켓기술부; 독일에서 V-2 잔해 및 유도장치 연구
  • 1946–82NII-885 자율제어계 수석설계자; 수석설계자회의 정식 구성원
  • 1948–57R-1·R-2·R-5·R-7 유도제어계 — 스푸트니크1호·보스토크1호 발사
  • 1960s–70s프로톤, 달·금성·화성 탐사선, 부란 왕복선 유도제어계 총괄
  • 1954–82NII-885(후일 NPTs AP) 소장, 1966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9–82모스크바 무선기술·전자·자동화대학(MIREA) 학과장
  • 1975사하로프 노벨평화상 비난 아카데미 성명 서명 — 72인 중 1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카마닌

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Каманин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8–1982 ○ 자연사

첼류스킨호 구조에서 가가린 선발까지, 우주비행사를 만든 공군장군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가장 안전했던 것은 가가린의 비행이었다. 지금까지 가장 위험했던 것은 보스호트 2호였다.” — 1966년 일기

소련 최초의 우주비행사 훈련 책임자(1960–1971). 1934년 첼류스킨호 빙상 캠프에서 34명을 구조해 최초의 7인 소련영웅 중 하나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Il-2 공격기 군단을 이끌며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리비우, 부다페스트, 프라하 전역을 누볐다. 1960년 공군 원수 베르시닌으로부터 유인궤도비행 군사책임자로 지명되어 가가린, 티토프, 테레슈코바, 레오노프 등 1세대 우주비행사들을 모집·훈련시키고 보스토크 1호 탑승자로 가가린을 추천한 심사위원장이었다. 코롤료프 사후 후임 미신과 수동조종권을 둘러싸고 격렬히 대립했으며 소유즈 1호와 가가린 사망을 모두 현장에서 겪었다. 사후 출판된 비밀 일기 『숨겨진 우주』는 소련 우주개발사의 결정적 1차 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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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보리소글렙스크 군사 조종사 학교 졸업, 극동 레닌 항공연대 배속
  • 1934첼류스킨호 구조: 혼성 항공분견대 지휘, 34명 구조, 소련영웅 №2
  • 1939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제19경폭격여단장
  • 1942–1943제292돌격항공사단장 (칼리닌 전선: 벨리키예루키·데먄스크)
  • 1943–1945제8혼성·제5돌격항공군단장, 쿠르스크·키예프·리비우·부다페스트·비엔나
  • 1956참모본부 아카데미 졸업, 제73항공군 사령관 (중앙아시아)
  • 1960–1971공군 우주비행훈련 책임자, 유인궤도비행 군사총괄, 공군총사령관 우주보좌관

드미트리 표도로비치 우스티노프

Дмитрий Фёдорович Устин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08–1984 ○ 자연사

군수공업의 사람, 국방장관이 되다

정치국에서 조사위원회가 빈 공장 사진을 내밀자, 우스티노프는 위원회가 떠난 다음 날 직접 찍은 가동 중인 공장 사진으로 맞섰다.

사마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기계 설계를 전공한 기술자로, 1941년 6월 병기인민위원에 임명되어 독소전쟁 중 레닌그라드 방위산업의 우랄 대피를 지휘했다. 전후에는 독일의 미사일 프로그램을 흡수해 소련 로켓·핵·우주 산업의 기반을 닦았고, 1957년 각료회의 부의장, 1965년 중앙위 서기로 군수공업 전반을 맡았다. 1976년 그레치코 사망 후 국방장관에 올라 트로츠키 이래 첫 민간 출신 국방장관이 되었으며, 같은 해 소련 원수로 진급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무력 개입을 정치국에서 가장 강하게 주장한 인물 중 하나였고, 1984년 12월 20일 폐렴과 심장마비로 사망해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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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6병기인민위원, 전시 무기생산 동원 체계 지휘
  • 1946–1953병기장관(1946년 인민위원회가 부로 개편), 전후 군수공업 재편
  • 1957–1963각료회의 부의장, 군수공업 전반 총괄
  • 1965–1976중앙위 서기, 방위산업 담당 정치국급 원로로 부상
  • 1976–1984국방장관, 정치국 정회원으로 아프가니스탄 개입 결정에 관여
  • 1953–1957국방공업장관, 군수공업 총괄
  • 1963–1965각료회의 제1부의장, 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