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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궈펑

华国锋
정치·당 지도 중국공산당 중국 중국 1921–2008 ↓ 퇴임 1981 · 자연사

「네가 일을 맡으면 내가 안심한다」는 마오의 후계자, 4인방을 체포하고 덩샤오핑에게 밀려났다

1976년 10월 6일, 마오쩌둥 사후 한 달 만에 화궈펑은 예젠잉·왕둥싱과 함께 중난하이에서 4인방을 체포하고 당 주석과 군사위 주석을 겸했다. 그러나 1981년 덩샤오핑에게 실권을 넘겼다.

산시 출신으로 후난에서 지방 간부로 일하다 마오의 눈에 들었고,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사후 총리 대행, 4월 톈안먼 사건 뒤 제1부주석 겸 총리가 되었다. 마오 사후 10월 예젠잉·왕둥싱과 4인방을 체포하고 당 주석·군사위 주석을 겸했다. 「마오 주석의 결정은 모두 지키고 지시는 모두 따른다」는 양개범시로 정통성을 세우려 했으나 1978년 진리 기준 논쟁과 11기 3중전회에서 덩샤오핑에게 주도권을 잃었고 1980~1981년 총리와 당 주석직을 내놓았다. 2002년까지 중앙위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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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1980국무원 총리
  • 1976–1981중공 중앙 주석

게르하르트 쉬러

Gerhard Schürer

동독의 파산을 경고했으나 체제를 구하지는 못한 국가계획위원장

내가 정치국에서 호네커에게 이 정책을 경고했을 때 나는 '사보타주'로 일축됐다.

게르하르트 쉬러는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경제 관료였다. 그는 호네커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통일' 노선이 투자보다 소비에 치우쳐 국가를 파산으로 몰고 있다고 경고했으나, 정치국에서 '사보타주'라는 비난을 받으며 18년간 후보 위원에 머물렀다. 1989년 10월 30일 크렌츠의 요청으로 제출한 「동독 경제 상황 분석」에서 서방 부채 490억 발루타마르크와 임박한 지급불능을 폭로하며 국경 통제 완화를 대가로 한 서독 차관을 제안했고, 이 보고서는 체제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결정적 문건이 되었다. 통일 후 '신뢰 남용' 혐의로 18일간 구금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회고록 『모험과 상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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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기계공 훈련
  • 1939–1945루프트바페 복무, 비행 교관
  • 1948SED 입당
  • 1955–1958모스크바 공산당 고등학교 수학
  • 1960–1962SED 중앙위 계획·재정·기술부장
  • 1962–1965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1965년 위원장 승진
  • 1965–1989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겸 각료회의 간부위원
  • 1973–1989SED 정치국 후보위원, 1989년 11월 정위원

빅토르 게오르기예비치 쿨리코프

Виктор Георгиевич Кулик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1–2013 ○ 자연사

12년간 바르샤바 조약군을 지휘한 최장수 총사령관

1941년 6월 중순, 폴란드 접경 블라디미르볼린스크의 하숙집 주인이 갓 임관한 쿨리코프 중위에게 말했다. "중위님, 저쪽에서 그러는데 22일에 전쟁이 시작된답니다."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전차장교로 대조국전쟁의 첫날부터 베를린까지 싸웠다. 1971년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에 올라 소련군의 현대화를 이끌었고, 1977년부터 1989년까지 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을 지내며 냉전 후기 동구권 군사 교리를 총괄했다. 1981년 폴란드 계엄령 위기 당시 소련 군사 개입을 반대해 역사의 분수령에 섰다. 소련 원수, 영웅 칭호와 레닌상을 받았으며, 퇴역 후 러시아 하원의원으로 베테랑 복지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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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붉은 군대 입대, 그로즈니 보병학교에서 훈련
  • 1941–1945전차부대 소대장·중대장에서 제143전차여단 참모장까지, 모스크바~베를린 전역 참전
  • 1953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기계화연대·사단장 역임
  • 1959참모본부 군사아카데미 졸업, 제5근위전차군 부사령관
  • 1964제6제병연합군 사령관 (레닌그라드 군관구)
  • 1967–1969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 1969–1971주독 소련군 총사령관
  • 1971–1977소련군 참모총장 겸 국방제1차관
  • 1977–1989바르샤바 조약 통합군 총사령관 겸 국방제1차관
  • 1999–2003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통합 러시아), 재향군인위원회 위원장

미하이 1세

Mihai I
정부·행정 루마니아 국가기관 루마니아 루마니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왕가) 1921–2017 ↓ 퇴위 강요 후 망명

1944년 8월 23일 안토네스쿠를 체포해 루마니아를 연합국 편으로 돌리고, 1947년 총구 앞에서 퇴위한 마지막 국왕

1947년 12월 30일 아침, 병력이 둘러싼 왕궁에서 그로자게오르기우데지는 퇴위 문서를 내밀었다. 거부하면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구금 중인 학생 1천 명이 총살될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미하이는 망명 뒤 증언했다. 그날 오후 의회는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왕가의 카롤 왕세자와 그리스의 엘레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왕위 계승을 포기한 탓에 1927년 여섯 살에 섭정 아래 국왕이 되었고 1930년 카롤 2세가 귀국해 왕위를 되찾자 왕세자로 내려왔다. 1940년 9월 안토네스쿠가 카롤 2세를 퇴위시키자 열여덟 살에 다시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은 안토네스쿠의 독재와 추축국 동맹에 있었다. 1944년 8월 23일 붉은 군대가 국경을 넘은 뒤 그는 궁정 쿠데타로 안토네스쿠를 체포하고 연합국과 휴전해 루마니아를 대독 전선으로 돌렸고, 이 공으로 소련의 승리훈장을 받은 극소수의 외국인이 되었다. 그러나 1945년 3월 비신스키의 압박으로 그로자 정부를 임명해야 했고, 그해 8월부터 법령 서명을 거부하는 「국왕 파업」으로 맞섰으나 1946년 조작 선거와 1947년 마니우 재판을 막지 못했다. 1947년 12월 30일 그로자와 게오르기우데지가 강요한 퇴위 문서에 서명했고 같은 날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948년 국적을 박탈당한 채 영국과 스위스에서 시험 비행사와 증권 중개인으로 살았으며, 1992년 부활절의 첫 귀국 때 부쿠레슈티에 백만 명이 모였다. 1997년 국적을 되찾았고 2017년 스위스에서 죽어 쿠르테아데아르제시의 왕가 묘지에 국장으로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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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30섭정 아래 첫 재위
  • 1930–1940왕세자
  • 1940안토네스쿠의 카롤 2세 퇴위로 재즉위
  • 19448월 23일 궁정 쿠데타, 안토네스쿠 체포·연합국 편 전환
  • 1945소련 승리훈장 수훈, 그로자 정부 임명 강요
  • 1945–1946「국왕 파업」, 법령 서명 거부
  • 194712월 30일 퇴위 강요, 망명
  • 1948국적 박탈
  • 1992첫 귀국 방문
  • 1997국적 회복

아나톨리 세르게예비치 체르냐예프

Анатолий Сергеевич Черняев

고르바초프의 펜이자 양심: 신사고 외교의 설계자

1989년 11월 10일 일기, 베를린 장벽 붕괴에 대하여: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사회주의 체제 역사의 한 시대 전체가 끝났다. 이것이 고르바초프가 해낸 일이다.」 출처: 고르바초프 재단 문서고, 국가안보문서보관소 번역.

1921년 5월 25일 모스크바(마리나 로샤)에서 태어나 2017년 3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41년 7월 붉은군대에 지원해 북서전선에서 발트 해방 작전에 참전했고 1945년 제대했다. 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를 졸업하고 1958–1961년 프라하에서 『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 편집위원으로 일했다. 1961년 중앙위 국제부에 들어가 1986년 3월부터 1991년까지 고르바초프의 외교 보좌관으로 일했고, 1989–1991년 인민대의원을 지냈다. 1992년부터 고르바초프 재단에서 페레스트로이카 문서 사업을 이끌었다. 학위 연도와 국제부 부부장 재임 시기는 사료 간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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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6붉은군대: 1941년 7월 지원 입대, 제1충격군 소속 북서전선 참전, 부상, 1945–1946년 제대
  • 1938–1950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1938–1941 재학, 1947–1949 복학 후 대학원); 1950년 후보학위 논문 방어
  • 1950–1958모스크바대학 근현대사 강의, 학과장 대리
  • 1958–1961프라하 『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 편집위원
  • 1961–1986중앙위 국제부: 포노마료프 밑의 담당관에서 부부장으로(러시아어 위키백과·RGASPI는 1970–1986년, NSA는 1972–1985년으로 기록)
  • 1986–1991고르바초프 외교정책 보좌관: 정상회담 실무, 연설문, 신사고 외교 설계
  • 1992–2011고르바초프 재단: ‘페레스트로이카 문서사’와 ‘페레스트로이카 외교정책’ 사업; 1992–2011년 재직

게이브리얼 잭슨

Gabriel Jackson
학술·연구 미국 미국계 1921–2019 ○ 자연사

스페인 공화국과 내전을 해석한 미국 역사학자

1948년 FBI 요원이 동급생들의 정치 활동을 밀고하라고 요구하자 잭슨은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답을 거부했다.

게이브리얼 잭슨은 미국의 스페인 현대사 연구자이자 역사가, 저널리스트였다. 1965년 저서 《스페인 공화국과 내전》은 영어권에서 제2공화국과 내전을 종합적으로 다룬 초기 연구로, 공화파 내부의 정치적 갈등까지 분석한 작업이었다. 그는 공화파의 제도적 개혁과 PCE의 전쟁 수행을 상대적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한 반면, POUM과 혁명적 좌파의 전략을 비현실적으로 보았으며, 이 해석은 내전사 논쟁의 한 축이 되었다. 매카시즘으로 학문 경력이 지연되었지만 UC 샌디에이고에서 현대 유럽사를 가르쳤고, 은퇴 뒤에도 바르셀로나에서 스페인 역사에 관한 저술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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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하버드대학교 역사·문학 학사
  • 1942–1946미군 복무, 항공기 정비·사진 판독·지도 제작
  • 1950스탠퍼드대학교 현대사 석사
  • 1952툴루즈대학교 현대·현대사 박사
  • 1965–1983UC 샌디에이고 현대 유럽사 교수
  • 1965–1969UC 샌디에이고 역사학과장
  • 1969–1971UC 샌디에이고 교수평의회 의장
  • 1983–2019명예교수·스페인 역사 저술가

아고스티뉴 네투

Agostinho Neto
정치·당 지도 앙골라 해방인민운동 앙골라 앙골라 1922–1979 ○ 췌장암 · 만성 간염(간암설도 있음)

독립 투쟁을 이끈 의사 시인, 앙골라의 초대 대통령

「우리의 땅, 우리의 어머니 / 우리는 돌아가리라」. 시집 『성스러운 희망』(1974)에 실린 시 「우리는 돌아가리라」에서.

앙골라 독립 투쟁을 이끈 의사이자 시인. 1956년 12월 MPLA 창립 시 초대 의장이었고, 수감으로 명예직이었다가 1962년 12월 회의에서 실질 의장으로 선출되어 1974년까지 독립 전쟁을 지도했다. 1975년 11월 11일 앙골라 인민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해 소련·쿠바와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일당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했으며, 1977년 쿠데타 시도 이후 대규모 숙청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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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포르투갈 유학, 코임브라·리스본 대학 의학부에서 수학하며 반식민주의 학생운동 참여
  • 1956앙골라 해방인민운동(MPLA) 창립 당시 초대 의장(사무총장은 비리아투 다 크루스)
  • 1960–1962PIDE에 체포되어 리스본 구금, 1962년 탈출 후 콩고-레오폴드빌로 망명
  • 1962–1974MPLA 대표자 회의에서 실질 의장으로 선출되어 독립 전쟁을 지도하고 소련·쿠바·유고슬라비아와 유대를 구축
  • 197511월 11일 앙골라 인민공화국 초대 대통령 취임, 사회주의 노선 선언
  • 1975–1979쿠바 군사 개입과 소련 지원으로 내전 방어, 1977년 니투 알베스의 쿠데타 시도 진압
  • 1977MPLA를 MPLA-노동당(MPLA-PT)으로 재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식 이념으로 채택

엔리코 베를링구에르

Enrico Berlinguer

서구 최대 비집권 공산당을 이끈 유로코뮤니즘의 설계자

『라 레푸블리카』와의 인터뷰(1981년 7월 28일)에서 이탈리아 정당 체제의 구조적 부패를 '도덕적 문제(questione morale)'로 명명하며: "오늘날 정당들은 무엇보다 권력과 후견주의의 기계다. 사회와 사람들의 삶에 대한 지식은 빈약하거나 왜곡되어 있고, 사상·이상·정책은 거의 없거나 모호하며, 감정과 시민적 열정은 제로다." 이 표현은 이후 수십 년간 이탈리아 정치 담론의 기준점이 되었다.

이탈리아 공산당(PCI) 서기장(1972–1984). 소련 지도를 거부하는 민주적 사회주의 노선인 유로코뮤니즘을 주창했으며, 1976년 총선에서 PCI 사상 최고인 34.4% 득표율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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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PCI 입당, 사사리 청년공산주의자 지부 창립
  • 1944반파시스트 빵 시위로 체포, 3개월 구금 후 무혐의 석방
  • 1949–1956이탈리아청년공산동맹(FGCI) 서기
  • 1962PCI 서기국 위원 겸 국제부 책임자
  • 1968–1984이탈리아 하원의원 (로마, 5선)
  • 1969PCI 부서기, 루이지 론고의 후계자로 내정
  • 1972–1984이탈리아 공산당(PCI) 서기장
  • 1979–1982유럽의회 의원

표트르 스테파노비치 플레샤코프

Пётр Степанович Плешаков

소련 전파전자전의 설계자

1972년 헬싱키 SALT I 회담에서 소련 대표단의 일원으로 미국 측에 '우리 미사일은 당신들 미사일방어 체계를 버터 자르듯 뚫고 지나갈 것'이라고 말했고, 미국은 곧바로 조약에 서명했다.

1974년부터 1987년까지 소련 라디오공업부 장관을 지낸 군수 행정가로, 소련 전파전자전(RЭБ)과 방공 레이더 체계의 기술적 토대를 구축했다. TsNII-108 소장 시절 소련 최초의 광대역 항공 자동 무선정찰 스테이션 '롬-1'과 대레이더 수동탐지 유도 미사일 체계를 개발했으며, 장관으로서 탄도미사일의 미사일방어 돌파용 전자대응책과 우주 조기경보 시스템을 총괄했다. 미국의 전략방위구상(SDI)에 대응하는 '반SDI' 프로그램을 주도하며 냉전기 전자전 경쟁의 핵심 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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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45붉은군대 통신연구소(NIIIS) 기술자, 제3벨로루시·자바이칼 전선 파견
  • 1945–1950TsNII-108 선임연구원·연구실장
  • 1950–1952소련 군부 제5총국(무선정찰·전파방해) 장교, 한국전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두 차례 파견
  • 1952–1958TsNII-108 부서장·섹터장, '롬-1' 정찰 스테이션·대레이더 미사일 유도 체계 개발
  • 1958–1964TsNII-108 소장, 공병대령
  • 1964–1968국가무선전자위원회 부위원장, 라디오공업 차관
  • 1968–1974라디오공업부 제1차관
  • 1974–1987라디오공업부 장관, 대장 진급

게오르기 니키토비치 볼샤코프

Георгий Никитович Большаков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비에트 러시아인 1922–1989 ○ 사망

흐루쇼프와 케네디 사이의 비밀 배후 채널을 운용한 GRU 장교

로버트 케네디는 회고록에서 볼샤코프가 전한 흐루쇼프의 '방어용 무기' 보증을 떠올리며 "그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거짓의 직물이었음을 깨달았다"고 썼다.

모스크바 출신의 GRU 장교. 1951년 TASS 특파원으로 첫 미국 파견을 시작해, 1959년부터는 잡지 「소비에트 라이프」 부편집장 신분으로 워싱턴에서 활동했다. 1961년 5월 프랭크 홀먼의 주선으로 로버트 케네디를 만난 이후 약 1년 반 동안 50여 차례 독대하며 흐루쇼프-케네디 간 비밀 배후 채널을 운용했고, 베를린 위기와 쿠바 미사일 위기 국면에서 소련의 의도를 백악관에 전달하는 핵심 창구였다. 쿠바 위기 당시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소련의 쿠바 군사 지원이 순수 방어용이라고 거듭 보증했으나, 미사일 발사대가 적발되며 신뢰가 붕괴되었고 1962년 12월 본국으로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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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3군사 통역 장교, 연대 통역 및 사단 정보과 보좌관으로 카렐리야·북서 전선에서 복무
  • 1943–1950고등정보학교 및 군사외교 아카데미에서 수학
  • 1951–1955TASS 특파원 신분으로 뉴욕·워싱턴 주재 (첫 미국 파견)
  • 1955–1957주코프 국방장관 특별임무 장교
  • 1957–1959GRU 중앙기관 선임 장교
  • 1959–1962잡지 「소비에트 라이프」 부편집장 신분으로 워싱턴 주재, 로버트 케네디와 약 50회 비밀 접촉
  • 1962–1989노보스티 통신사 근무, 잡지 「소비에트 연방」 편집장 역임

빅토르 그리고리예비치 아파나시예프

Виктор Григорьевич Афанасьев

프라우다 최장기 편집장이자 브레즈네프 시대 인쇄 정통의 수문장

그는 우리 역사의 더러운 빨래를 들추어볼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출신으로, 1976년부터 1989년까지 13년간 당 기관지 《프라우다》 편집장을 맡아 브레즈네프 시대 인쇄 정통의 최종 수문장으로 군림했다. 재임 중 《프라우다》 발행부수는 1,060만 부로 정점을 찍었고, 소련 언론인연맹 의장과 중앙위원회 위원을 겸하며 당의 공식 입장을 신문 지면에 충실히 구현했다. 1989년 옐친의 음주 의혹을 다룬 이탈리아 기사를 전재했다가 사상 초유의 사과문을 게재하고 해임되었으며, 이는 글라스노스트 시대에 구시대적 편집 노선이 붕괴했음을 상징하는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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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53적군 복무, 공수부대 및 SMERSH 방첩 장교
  • 1953–1960첼랴빈스크 사범대학 철학 강사·학과장
  • 1960–1968CPSU 중앙위 부설 사회과학아카데미 교수
  • 1968–1974《프라우다》 부편집장·제1부편집장
  • 1974–1976《콤무니스트》 편집장
  • 1976–1989《프라우다》 편집장 (역대 최장기)
  • 1976–1990소련 언론인연맹 의장, 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0–1994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주임연구원

무함메트나자르 가푸로비치 가푸로프

Мухамедназар Гапурович Гапуров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투르크메니스탄 1922–1999 ○ 자연사

16년간 브레즈네프 시대 투르크메니스탄을 이끌며 면화·가스 경제를 통합한 공화국 지도자

1943년 2월 26일, 북서전선에서 상급병사 가푸로프는 총알이 다리를 꿰뚫고 파편 세 개가 오른팔을 찢는 중상을 입었다. 그 부상이 그를 교단에서 당 기구로 밀어 올린 인생의 분기점이었다.

차르조우 근처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로 출발한 투르크멘 당 간부로, 1941년 징집되어 북서전선에서 자동소총 분대장으로 싸우다 1943년 2월 중상을 입고 제대했다. 이후 콤소몰과 당 기구를 차근차근 올라 1963년 투르크멘 SSR 각료회의 의장 겸 외무장관이 되었고, 1969년 12월 공산당 제1서기에 올라 16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그의 재임기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천연가스 개발과 관개 농업 확장이 본격화된 시기로, 공화국은 소련의 면화·에너지 경제에 깊숙이 편입되었으나 동시에 지역 간 파벌 경쟁과 족벌주의도 심화되었다. 1985년 12월 고르바초프가 면화 부패 스캔들을 이유로 그를 전격 해임했고, 이후 회고록을 집필하다 1999년 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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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차르조우주 8년제 학교 교사
  • 1941–1943소련군 자동소총 분대장, 북서전선 참전, 중상으로 제대
  • 1943–1944학교 교무주임·교장, 차르조우주
  • 1944–1947차르조우 지역당 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48–1951차르조우주 콤소몰 제1서기
  • 1951–1955투르크멘 SSR 콤소몰 중앙위원회 선전선동 담당 서기
  • 1959–1962차르조우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62–1963투르크메니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63–1969투르크멘 SSR 각료회의 의장 겸 외무장관
  • 1969–1985투르크메니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1–1986CPSU 중앙위원회 위원 (1966–1971 후보위원)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탄자니아 탄자니아 1922–1999 ○ 자연사

우자마 사상을 창안하고 비동맹 사회주의 탄자니아를 24년간 이끈 건국 대통령

“우리 아프리카인들은 사회주의로 '개종'될 필요도, 민주주의를 '배울' 필요도 없다. 둘 다 우리의 과거 — 우리를 낳은 전통 사회 — 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 1962년 에세이 「우자마」

탄자니아의 독립운동 지도자, 건국 대통령, 그리고 아프리카 사회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 1954년 TANU를 창당해 비폭력 독립투쟁을 이끌었고, 1961년 독립을 성취했다. 1967년 아루샤 선언으로 전통적 공동체성을 현대 사회주의와 접목한 독자적 발전 모델인 우자마(Ujamaa)를 제시하고 은행·산업 국유화와 무상교육 확대를 추진했다. 집권 기간 내내 남아프리카 해방운동을 후원했으며 비동맹운동의 중심 인물로 활약했다. 1985년 스스로 권좌에서 물러나 아프리카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평화적 정권 이양을 실현했고, 말년에는 부룬디 내전 중재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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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2에든버러대학교 유학 — 사범·정치학 수학, MA 취득
  • 1954탕가니카 아프리카 민족연합(TANU) 창당
  • 1960–1961탕가니카 수석장관 → 초대 총리
  • 1961.12탕가니카 독립 — 사상 첫 흑인 다수 통치 국가로
  • 1962–1964탕가니카 초대 대통령 — 공화국 출범
  • 1964잔지바르와 통합 — 탄자니아 연합공화국 출범
  • 1967아루샤 선언 — 우자마(아프리카 사회주의) 노선, 은행·대기업 국유화
  • 1978–1979우간다-탄자니아 전쟁 — 이디 아민 정권 전복 주도
  • 1985대통령직 자진 사퇴 — 평화적 정권 이양
  • 1985–1990CCM(혁명당) 의장 — 후임 정부의 신자유주의 전환 비판
  • 1996–1999부룬디 내전 평화 중재 — 유엔 위임

헤게뒤시 언드라시

Hegedüs András
정부·행정 헝가리 국가기관 헝가리 헝가리인 1922–1999 ○ 자연사

혁명의 문턱에서 책임을 짊어진 젊은 총리

그는 훗날 총리직 수락을 두고 “나쁜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헤게뒤시 언드라시는 헝가리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로, 라코시 체제의 충실한 간부에서 체제 비판적 연구자로 이동했다. 라코시와 게뢰의 후원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1956년 혁명 때 소련군 개입 요청서에 서명하며 마비된 지도부의 정치적 책임을 떠안았다. 모스크바로 피신했다가 귀국한 뒤 사회학 연구를 이끌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한 뒤 당에서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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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불법 헝가리 공산당 가입
  • 1945–1947MADISZ 전국 서기
  • 1951–1953농업 관련 장관
  • 1953–1955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5–1956헝가리 각료회의 의장
  • 1956혁명 중 소련군 개입 요청서 서명
  • 1963–1968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사회학 연구그룹 창립·소장
  • 1973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제명

미하일 이바노비치 세미랴가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Семиряга
학술·연구 소련 러시아인 1922–2000 ○ 사망

겨울전쟁의 실제 전사자 53,522명을 최초로 공개하며 소련 공식 기록을 깨뜨린 군사사학자

1989년 『오고뇨크』 22호에 「네즈나메니타야 보이나(빛나지 않은 전쟁)」를 발표하며, 1940년 몰로토프가 공식 발표한 소련군 전사자 48,475명이라는 숫자가 허구임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전후 소련군정청에서 복무한 군사사학자로, 평생을 소련의 전쟁사 연구에 바쳤다. 1989년 잡지 『오고뇨크』에 겨울전쟁의 실제 소련군 전사자가 53,522명임을 공개하며 50년간 유지된 공식 통계를 처음으로 깨뜨렸고, 이후 비밀의정서와 카틴 학살 문서를 최초로 출판하는 등 폐쇄된 기록의 문을 열었다. 만년에는 나치 점령지 협력 문제를 다룬 방대한 연구로 소련사의 마지막 금기를 파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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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붉은군대 징집
  • 1941–1945대조국전쟁 참전 (돈·스탈린그라드·제3우크라이나·제1벨로루시 전선)
  • 1945–1950독일 주둔 소련군정청 근무
  • 1953역사학 후보 박사 (루자티아인 연구)
  • 1962역사학 박사
  • 1967소련 국방부 군사사연구소 연구원, 『제2차 세계대전사』 9권 책임편집, 국가상 수상
  • 1989『오고뇨크』에 겨울전쟁 실제 사상자 최초 공개
  • 1992『스탈린 외교의 비밀』 출간

니콜라이 겐나디예비치 바소프

Николай Геннадиевич Басов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2–2001 ○ 자연사

메이저와 레이저의 기초를 세우고 양자전자공학을 미사일 방어로 확장한 노벨상 물리학자

1985년, 미국의 SDI 계획에 맞서 바소프는 "소련이 제안된 어떤 기술에도 대응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냉전 말기의 기술 경쟁에서 노벨상 수상자의 말은 단순한 과학적 견해가 아니라 국가 전략의 일부였다.

소련의 라디오물리학자이자 양자전자공학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1952년 알렉산드르 프로호로프와 함께 암모니아 분자빔을 이용한 전자기파 증폭·발진 원리를 확립했고, 1954년 최초의 메이저를 제작했다. 이후 3준위 레이저, 반도체 레이저, 고출력 가스·화학 레이저로 연구를 확장했으며, 레이저 핵융합 가능성을 세계 최초로 제안했다. 이 공로로 1964년 프로호로프, 찰스 타운스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73년부터 15년간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장을 맡으며 소련 레이저 물리학의 제도적 중심을 이끌었고, 그의 연구는 소련의 미사일 방어 계획에 직접 기여했다. 1985년 미국의 SDI 구상에 대해 소련도 동등한 기술력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공개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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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붉은 군대 징집, 쿠이비셰프 군사의학아카데미 입교
  • 1943–1945제1우크라이나 전선에서 야전 군의관 보조로 복무
  • 1945–1950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MEPhI) 입학 및 졸업
  • 1950–1953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대학원생, 1953년 이학후보 학위
  • 1956이학박사 학위 취득, 논문 「분자 발진기」
  • 1958–1972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부소장
  • 1959프로호로프와 함께 레닌상 수상
  • 1962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3FIAN 양자라디오물리학 연구실 창설 및 초대 실장
  • 1964노벨 물리학상 수상 (프로호로프, 타운스와 공동)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7–1990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 1969첫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 1973–1988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장
  • 1974소련 최고회의 연방회의 대의원 (제9~11기)
  • 1982두 번째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 1989소련 국가상 수상

코파치 샨도르

Kopácsi Sándor

국가의 명령과 민중을 향한 총부리 사이에서 멈춘 경찰 수장

1956년 10월 23일, 그는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코파치 샨도르는 금속 노동자와 반나치 저항 활동가 출신의 헝가리 경찰 지휘관으로, 국가기구 안에서 개혁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부다페스트 경찰청장으로서 1956년 10월 23일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고, 봉기 세력과 협력하며 국가근위대 부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체포되어 나지 임레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63년 사면으로 석방되었고, 훗날 회고록으로 혁명의 내부 경험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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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모칸 반나치 저항운동 참가
  • 1945헝가리 공산당 입당, 경찰관이 됨
  • 1949내무부 수용소 업무 담당 국장
  • 1952–1956부다페스트 경찰청장
  • 1956국가근위대 부사령관
  • 1958나지 임레 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 1963사면으로 석방
  • 1975–2001캐나다 망명과 회고록 집필

바딤 알렉세예비치 키르피첸코

Вадим Алексеевич Кирпиченко

소련 대외정보 작전을 12년간 지휘한 KGB 제1총국 부국장

1979년 12월 카불, 슈토름-333 작전 개시 후 상황을 전혀 몰랐던 주아프간 소련 대사 타베예프가 전화로 해명을 요구하자, 키르피첸코는 "지금 너무 바빠서 통화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보고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하고 끊었다.

키르피첸코는 KGB 제1총국(대외정보)의 첫 번째 부국장으로서 1979년부터 소련 붕괴까지 12년간 소련의 해외 첩보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이다. 모스크바 동양학대학 아랍어과를 수석 졸업한 후 1954년 이집트 부주재관으로 정보 경력을 시작했으며, 수에즈 위기와 욤키푸르 전쟁을 카이로 현장에서 목격했다. 1979년 12월에는 카불에 직접 파견되어 하피줄라 아민 축출 작전의 정보 부문을 지휘했고, 이후 고르바초프 시기 글라스노스트가 외국 정보기관의 활동을 용이하게 만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은퇴 후 6권 분량의 《러시아 대외정보사》 편찬을 주도하며 소련 정보기관의 공식 기억을 정리하는 작업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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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46제103근위소총사단 복무 (헝가리·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전선)
  • 1947–1952모스크바 동양학대학 아랍어과
  • 1952–1953KGB 제101정보학교
  • 1953–1954KGB 제1총국 동방부
  • 1954–1960KGB 주이집트 부주재관
  • 1962–1964KGB 주튀니지 주재관
  • 1967–1970KGB 제1총국 아프리카부장
  • 1970–1974KGB 주이집트 주재관
  • 1974–1979KGB 제1총국 부국장 겸 'S'국장 (비합법정보)
  • 1979–1991KGB 제1총국 제1부국장
  • 1988–1989KGB 제1총국장 권한대행
  • 1991–1997러시아 대외정보국(SVR) 고문단장

보반끼엣

Võ Văn Kiệt
정부·행정 베트남 국가기관 베트남 베트남 1922–2008 ○ 싱가포르에서 별세

도이머이 개혁의 설계자이자 베트남의 총리

2007년 BBC 베트남어방송 인터뷰에서 "애국에는 백 가지 길이 있다. 베트남의 조국은 한 사람, 한 당, 한 집단만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1975년 이후 남부에서 당의 '중대한 실수'를 인정하며 정치범과의 대화와 민족 화해를 촉구했다.

베트남의 정치인·경제 개혁가. 1922년 메콩델타 빈롱 성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39년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입당했고, 대프랑스·대미 항쟁에 참전했다. 1976~1982년 호찌민시 당 책임자, 1982~1991년 부총리를 지냈으며 총리 재임기(1991~1997)에 도이머이 개혁을 추진해 베트남의 대외 개방을 이끌었다. 2008년 6월 11일 싱가포르에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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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인도차이나 공산당 입당
  • 1946–1954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참전
  • 1976–1982호찌민시 당 책임자
  • 1982–1991부총리
  • 1991–1997총리
  • 1995아세안 가입, 미국과 국교 정상화

아포스톨로스 산타스

Απόστολος Σάντας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그리스 그리스인 1922–2011 ○ 자연사

아크로폴리스에서 점령의 상징을 끌어내린 저항가

1941년 5월 30일 밤, 산타스와 마놀리스 글레조스는 아크로폴리스에 올라 나치 깃발을 끌어내렸다.

아포스톨로스 산타스는 제2차 세계대전기 그리스의 저항운동가로, 마놀리스 글레조스와 함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나치 깃발을 철거한 일로 기억된다. 두 학생의 행동은 점령에 맞선 초기 공개 저항의 상징이 되었고, 독일 당국은 그들에게 궐석 사형을 선고했다. 산타스는 이후 EAM과 ELAS에 참여해 무장투쟁을 벌였지만, 해방 뒤에는 좌파라는 이유로 이카리아와 마크로니소스 등지에 유배되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거쳐 캐나다에 정치적 망명을 신청했다가 1962년 그리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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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마놀리스 글레조스와 함께 아크로폴리스의 나치 깃발을 철거했다.
  • 1942민족해방전선(EAM)에 참여했다.
  • 1943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에 참여해 중부 그리스에서 추축국에 맞서 싸웠다.
  • 1944해방 뒤 법학 공부를 마쳤다.
  • 1946–1948좌파적 신념 때문에 이카리아, 프시탈레이아, 마크로니소스로 유배되었다.
  • 1948–1962이탈리아를 거쳐 캐나다로 탈출해 정치적 망명을 얻었다.
  • 1962–2011그리스로 돌아와 아테네에서 살았다.

노로돔 시아누크 노로돔

នរោត្តម សីហនុ
정부·행정 캄보디아 국가기관 캄보디아 캄보디아 1922–2012 ○ 베이징에서 사망

캄보디아의 국왕이자 민족통일전선 지도자

1982년 6월 크메르루주·손산의 KPNLF와 함께 반베트남 연합정부를 세우고 그 수반이 되어 유엔의 캄보디아 대표권을 유지했다.

캄보디아의 국왕·국가원수·총리를 지냈다. 1941년 프랑스 식민지 아래 즉위해 1953년 독립을 이끌었고 1955년 양위한 뒤 정치에 들어갔다. 1970년 축출됐다가 1975~1979년 크메르루주 아래 가택 연금됐고, 1982~1991년 크메르루주와 연합한 저항 정부를 이끌었으며 1993년 왕으로 복위해 2004년 다시 양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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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55캄보디아 국왕
  • 1955–1960인민사회동맹(상쿰)을 이끌며 총리·국가원수를 지냈다
  • 1960–1970국가원수
  • 1981저항 정당 민족통일전선(FUNCINPEC) 창당
  • 1982–1987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CGDK) 대통령
  • 1991–1993최고국민평의회 의장
  • 1993–2004캄보디아 국왕

올레그 겐리호비치 이바놉스키

Олег Генрихович Ивановский
과학·기술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계 1922–2014 ○ 자연사

초기 우주선의 조립과 시험을 이끈 설계자

가가린은 해치 수리를 마친 이바놉스키에게 말했다. ‘그때 네 얼굴을 봤어야 해, 녹슨 금속의 온갖 색이 지나가더군.’

올레그 이바놉스키는 전쟁 경험 뒤 로켓·우주기술 설계자가 되어 소련 우주계획의 초기 체계를 현장에서 구현했다. 그는 미하일 호먀코프의 대리로 스푸트니크 1호의 조립과 시험을 이끌었고, 이어 달·행성 자동정거장과 보스토크 유인우주선 개발을 담당했다. 가가린의 첫 비행을 준비한 뒤 라보치킨 설계국에서 달 탐사와 행성 연구용 기체를 지휘했으며, 은퇴 후에는 우주기술 박물관에서 그 역사를 보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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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6붉은군대 국경·기병부대 복무, 대조국전쟁 참전
  • 1947–1954NI-88 기술자·선임기술자, 모스크바 동력공학대학 졸업
  • 1954–1957OKB-1 설계자, 초기 인공위성 개발
  • 1957–1961스푸트니크 1호·2호 및 달 탐사선 설계 책임, 보스토크 수석설계자
  • 1961–1965소련 각료회의 군산문제 국가위원회 우주부문장
  • 1965–1983라보치킨 설계국 달·행성 부문 부총괄·총괄설계자
  • 1983–2014라보치킨 우주기술박물관장 및 과학고문

레오니트 미트로파노비치 자먀틴

Леонид Митрофанович Замятин

브레즈네프 체제의 정보 설계자

자먀틴은 카터 행정부를 향해 '미국은 세계 헌병 역할에 나서고 있다'고 맹렬히 비난하며, 하피줄라 아민이 CIA 요원이었다는 주장을 소련 고위 관리로서는 처음으로 공개 제기했다. — FRUS, 1980년 1월 28일

소련의 외교관이자 당 선전 책임자로, TASS 사무총장과 중앙위 국제정보부장을 거치며 브레즈네프 시기 소련의 해외 정보·선전 체계를 총괄했다. 브레즈네프 회고록 3부작의 집필진을 이끌어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말년에는 주영 대사로 부임했다가 1991년 8월 쿠데타를 규탄하기를 거부하여 해임되었다. 냉전기 소련의 대외 이미지와 정보 통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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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46모스크바 항공대학·고등외교학교 졸업, 외무부 입부
  • 1946–1962외무부에서 UN·IAEA 대표부 근무, IAEA 상임대표 역임
  • 1962–1970외무부 공보국장, 대외 발표와 언론 브리핑 총괄
  • 1970–1978TASS 사무총장, 소련 공식 통신사의 수장
  • 1978–1986중앙위 국제정보부장, 당의 대외 선전·정보 활동 총괄
  • 1978브레즈네프 회고록 3부작 집필진 지휘, 레닌상 수상
  • 1986–1991주영 소련 대사, 8월 쿠데타 규탄 거부로 해임

조야 아나톨리예브나 코스모데먄스카야

Зоя Анатольевна Космодемьянская
군사·지휘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923–1941 ✕ 처형

소련 최초의 여성 영웅, 18세에 교수대에서 「스탈린이 올 것이다」를 외친 파르티잔

목에 올가미가 걸린 채 조야는 외쳤다: 「작별이에요, 동지들! 싸우세요, 두려워하지 마세요! 스탈린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스탈린이 올 것입니다!」

소련의 가장 상징적인 전쟁 영웅 중 한 명. 1941년 10월 고등학생 신분으로 자원입대해 서부전선 사령부 직속 정찰·방화 공작부대 9903에 배속되었고, 독일군 후방에서 도로 매설과 통신선 절단 임무를 수행했다. 11월 27일 페트리셰보 마을에서 독일군이 사용하던 가옥 세 채에 방화한 뒤 이튿날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단 한마디도 불지 않았고, 11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사후 『프라우다』 기자 표트르 리도프의 취재로 전모가 알려지자 스탈린은 "인민의 영웅"이라 칭했고, 1942년 2월 여성 최초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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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콤소몰 가입
  • 1941.10고등학생 신분으로 자원입대, 서부전선 정찰·방화 부대 9903 배속
  • 1941.11.4–17볼로콜람스크 방면에서 도로 매설·통신선 절단 임무 수행
  • 1941.11.27페트리셰보 마을에서 독일군이 사용하던 가옥 3채 방화
  • 1941.11.28–29체포·고문 후 교수형 — 가명 「타냐」만 대고 끝까지 신원을 밝히지 않음
  • 1942.2.16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 수여 (여성 최초, 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