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공산당 엘리트 출신으로, 1989년 12월 혁명의 와중에 민족구국전선(FSN)을 이끌며 차우셰스쿠 체제를 종식시켰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즉결재판과 처형을 승인했으며, 1990년 85% 득표로 루마니아 최초의 자유선거 대통령이 되었다. 광부를 동원해 반대 시위를 진압한 미네리아드 사태로 평판에 금이 갔고, 훗날 혁명기 살상에 대한 반인도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세 차례 대통령을 지내며 NATO 가입과 EU 가입 협상을 완료했으나, 혁명인가 쿠데타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그를 끝까지 따라다녔다.
1989년 11월 29일 몰타 회담 메모에서 베이커는 부시가 고르바초프보다도 "새로운 속도와 목적"을 이끌어야 한다고 썼다.
제임스 베이커는 변호사 출신의 공화당 정치가로, 조지 H. W. 부시와의 오랜 동맹을 바탕으로 미국 보수정치의 핵심 실무자가 되었다. 재무장관으로 환율과 국제 금융을 다룬 뒤 국무장관이 되어 냉전 말기의 외교, 독일 통일, 걸프 위기를 조정했다. 그는 고르바초프의 개혁을 무조건 신뢰하기보다 미국의 이익과 동맹의 안정을 계산했지만, 부시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손을 내밀도록 설득하고 1989년 몰타 회담의 의제와 운영을 구체화했다. 그 신중한 현실주의는 대결의 관성을 늦추면서도 변화의 방향을 미국 외교가 관리할 수 있는 협상으로 바꾸었다.
“피델은 대체 불가능하다, 우리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함께 그를 대체하지 않는 한.” — 대학생 연설, 2006년
7·26 운동 창립 멤버로 몬카다 병영 습격(1953)과 그란마 상륙에 참가했으며, 프랑크 파이스 동부전선 사령관으로서 오리엔테에 게릴라 해방구를 건설한 쿠바 혁명의 핵심 지휘관. 1959년부터 2008년까지 혁명무력부 장관을 지내며 현대 국가 사상 최장기 국방장관을 기록했고, 쿠바의 군사·보안 기구를 구축하고 공산당 제도화를 주도했다. 2008년 형 피델의 뒤를 이어 국가평의회 의장과 2011년 당 제1서기에 취임, 신중한 시장 개혁을 추진하며 2018년과 2021년 차례로 퇴진하기까지 반세기 넘게 쿠바 혁명의 없어서는 안 될 2인자로 군림했다.
1977년 2월 3일 그는 수도 밖에서 민병 부대에 깃발을 수여하고 있었고, 관측자들은 그 일이 목숨을 구했다고 보았다. 11월 11일 데르그 본부에서 체포돼 이튿날 총살형에 처해졌다.
에티오피아 군인으로 1974년 황제를 축출한 군사위원회 데르그의 창설 세대다. 제4사단 소령으로 데르그 부의장에 선출됐고 1975년 4월 이후 중령이 됐다. 1976년 에리트레아 전선에 보낼 수만 명의 농민 민병 모집을 맡았고 보수적·민족주의적·종교적 성향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977년 2월 3일 총격에서 살아남아 제1부의장이 됐으나 같은 해 11월 12일 멩기스투의 명령으로 처형됐다.
시베리아 빈농가 출신으로 14세에 집을 나와 노릴스크 기술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를 우등 졸업했다. 14년간 아무르의 조선소에서 핵잠수함 원자로를 설치하며 경력을 쌓은 뒤 1973년 체르노빌 원전으로 옮겨 3·4호기를 총괄하는 부수석기사가 되었다. 1986년 4월 26일 4호기 안전시험을 현장 지휘했고, 사고 후 설계 결함이 원인임을 주장했으나 1987년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1990년 건강 악화로 석방되었다. 옥중에서도 RBMK 노형의 구조적 결함을 입증하려 애쓰며 『체르노빌. 어떻게 일어났는가』를 집필했고, 1992년 IAEA 자문보고서는 그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뒷받침했다.
1988년 7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해결책은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나는 대안을 보지 못한다."
1931년 스테파나케르트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88년 2월 24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되어 불과 4일 전 지역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를 통과시킨 직후의 폭발적 상황을 물려받았다. 임기 중 3월 당 플레넘을 주재해 모스크바에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 이관을 공식 요청했고, 7월에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고 선언했다. 모스크바는 1989년 1월 그를 해임하고 아르카디 볼스키의 특별관리위원회로 대체했으며, 해임 후 모스크바에서 은퇴 생활을 하다 2000년 사망했다.
1931년 저장성 주지 출신. 1965년 11월 10일 『문회보』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을 실어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1976년 10월 6일 체포되어 1981년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상하이의 문예평론가로 1957년 반우파 투쟁 때 공격적 비판문으로 마오의 눈에 들었다. 장칭·장춘차오의 지시로 1965년 11월 『문회보』에 「신편 역사극 해서파관을 평함」을 발표해 문화대혁명의 서막을 열었고, 중앙문혁소조원으로 선전을 장악했다. 1969년 정치국원이 되어 상하이 그룹의 일원으로 「린뱌오와 공자 비판」 등 운동을 이끌었다. 1976년 10월 4인방으로 체포되어 1981년 20년형을 받았고 1996년 출소 뒤 2005년 사망했다.
빅토르 마카렌코는 공장 노동자에서 출발해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지역 당 지도자로 올라선 당 관료였다. 세바스토폴과 크림에서 산업·농업·관광을 조정하며, 중앙의 지시와 지역의 생산·문화 유산 사이의 긴장을 다뤘다. 1980년대 반알코올 운동 때 그는 블라디미르 셰르비츠키와 함께 마산드라 와이너리와 그 에노테카를 보존하는 쪽에 섰다. 그의 회고는 후기 소비에트 지역 통치가 중앙 정책을 그대로 집행하는 일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1968년 위스콘신대학에서 냉전기 미국 학생들에게 마오 시대 중국을 가르쳤고, 개혁개방기 중국이 관료자본주의로 흘러갔다고 진단하며 1989년 베이징에 있었다.
디트로이트 출신으로 위스콘신대학 매디슨 교수를 지냈다. 첫 저작 『리다자오와 중국 마르크스주의의 기원』(1967)은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민족주의와 농민에 대한 신뢰가 결합한 방식을 밝혔다. 1977년 초판이 나온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는 인민공화국사의 표준 교과서로, 마오주의를 사회주의의 이상과 후진국 근대화라는 이중 과제 사이의 긴장 속에서 읽었다. 그는 마오 시대의 억압을 비판하면서도 개혁기의 시장화가 사회주의의 약속을 저버렸다고 보았다.
1986년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은 바레를 대신해 수개월간 사실상의 국가원수 역할을 맡았다.
프룬제군사아카데미 출신 장성으로, 시아드 바레 정권의 핵심 인물이자 오가덴 전쟁의 최고 사령관이었다. 1970년부터 국방장관, 1971년부터 부통령을 맡았고, 평의회 해산 뒤 1976년 혁명사회당 창립대회에서 정치국원 겸 부서기장으로 선출되어 군부의 정당 장악을 상징했다. 1987년 쿠데타 이후 첫 총리가 되었으나, 이삭족 학살 지휘 책임으로 미국 법원에서 2100만 달러 배상 판결을 받았다.
1982년 6월 시아누크·손산과 반베트남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외무를 맡아, 서방의 지지로 캄보디아의 유엔 의석이 유지되게 했다.
캄보디아의 정치가·경제학자다. 스바이리엥주 출신으로 프놈펜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1959년 귀국해 대학 교수로 일했으며 시아누크 정부 각료를 지냈다. 1967년 좌익 탄압 뒤 은신하다 크메르루주에 합류해 1976~1979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으로 국가원수를 맡았고, 1985년 폴 포트를 계승해 1998년까지 크메르루주를 이끌었다. 2007년 체포되어 2014년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2018년에는 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를 선고받았고 2022년 9월 22일 항소가 기각됐다.
상세 이력 보기
1959–1967귀국해 프놈펜 대학 교수로 활동하고 시아누크의 상쾌 정부 각료를 지냈다
1967좌익 탄압을 피해 은신하다 크메르루주에 합류했다
1973–1974FUNK·GRUNK 대표단을 이끌고 북베트남·중국·조선·알바니아·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알제리 등을 순방했다
1976–1979민주캄푸치아 국가상임위원회 주석으로 국가원수를 지냈다
1976비동맹 정상회의에 민주캄푸치아 대표로 참석했다
1982–1993민주캄푸치아 연합정부에서 부주석 겸 외무를 맡아 유엔 의석 유지를 주도했다
1985–1998폴 포트를 공식 계승해 크메르루주 지도자가 되었다
1997폴 포트를 비난하고 크메르 민족연대당을 창당해 크메르루주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199812월 누온 찌어와 함께 캄보디아 정부군에 투항했다
2007체포되었고, 국제적 압력에도 훈 센 총리는 그를 기소하지 않았다
20148월 7일 반인륜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01811월 16일 베트남인 집단학살 유죄를 선고받았고, 참 집단 학살 관여는 무죄로 인정됐다
명예교수로 임명됐을 때 그를 소개하며 인용된 말, '진정 좋은 사람이라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누구나 아나키스트다.'
뉴욕 브루클린에서 오데사 출신 유대인 이민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퀸스 칼리지에서 평생 러시아와 미국의 아나키즘 운동사를 가르친 개척적 역사가였다. 『크론시타트 1921』(1970)으로 볼셰비키가 그 봉기를 반혁명 음모로 규정한 신화를 실증적으로 깨뜨렸으며, 훗날 게츨러의 명부 연구가 더 정밀한 수치를 내놓자 그 우위를 인정했다. 아나키스트를 '부도덕하고 폭력적'으로 보는 편견에 맞서 그들을 '사회정의의 선구자'로 복원하려 했고, 평생 모은 2만 점의 자료를 미국 의회도서관에 기증했다.
1999년 12월 31일 모스크바 시간 낮 12시 신년사 방송에서: "여러분, 나는 사임합니다.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우리의 많은 꿈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 용서를 구합니다."
1931년 우랄 부트카에서 집단화로 몰락한 부농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2007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건설 기술자로 일하다 1961년 입당해 스베르들롭스크 주 당 제1서기(1976–85)와 모스크바 당 제1서기(1985–87)를 지냈고, 1987년 10월 21일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지도부를 비판한 뒤 해임되었다. 1990년 러시아 연방 인민대의원, 이어 최고소비에트 의장(1990–91)이 되었고 1991년 6월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9년까지 재임했다.
스페인어 한마디 몰랐던 서른 살의 영국인이 쓴 《스페인 내전》이 파리에서 출간되어 프랑코 정권 아래 금서로 밀반입됐다.
휴 토머스는 1961년 저서 《스페인 내전》으로 전쟁을 국제 독자에게 널리 알린 영국 역사가다. 그는 외교 자료와 참전자들의 기록, 인터뷰를 바탕으로 공화파의 투쟁과 내부 폭력을 공산주의 진영이나 반공주의 진영의 논리 어느 한쪽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서술했다. 이 책은 프랑코 독재 아래의 스페인에서 clandestine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여러 차례 개정되었으며, 사실과 해석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연구의 출발점으로 남았다. 이후 그는 쿠바와 스페인 제국, 세계사를 연구했고 정치적으로는 노동당에서 보수당을 거쳐 자유민주당으로 옮겨 갔다.
1977년 응구아비 암살의 공모 혐의로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가봉의 오마르 봉고가 개입해 총살형을 면했다.
농작물 유전학을 전공한 생물학자 출신 정치인으로, 1963년 32세에 마삼바데바 정권의 총리가 됐다. 콩고인민공화국 시절 응구아비 암살 연루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석방돼 프랑스에서 망명했고, 1991년 주권 국민회의의 과도 총리 선거에서 초반 투표를 선두로 달리다 4차 투표에서 밀롱고에게 패했다. 1992년 사회민주주의 정당 UPADS를 이끌고 사수응게소를 꺾어 콩고 최초의 민주 선거 대통령이 됐으나, 1997년 내전에서 패해 다시 망명했다.
1985년 3월 11일 서기장 선출을 앞둔 새벽, 정치국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고르바초프는 정원에서 라이사에게 말했다. "이렇게 더는 살 수 없어." 개혁은 그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체제가 스스로 뽑은 개혁가.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로 체제를 구하려 했고, 1989년 동유럽에서 쏘지 않기로 결정했으며, 1991년 포로스 별장에 사흘간 연금되었다가 자신의 자리가 사라지는 문서에 서명했다. 서방의 갈채와 국내의 원망을 동시에 받으며, 자신이 끝낸 나라보다 31년을 더 살았다.
「우리 대의원들은 에스토니아가 소련 내에서 주권적이고 평등한 구성원으로 남기를 바라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1988년 11월 주권 선언 직후
에스토니아 히우마섬 출신으로 1950년대부터 콤소몰과 당 기구에서 경력을 쌓아 1970년대에는 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까지 올랐다. 에스토니아 민족주의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1980년 모스크바에 의해 외교직으로 밀려나 베네수엘라와 니카라과 대사를 지냈다. 1988년 6월 16일 강경파 카를 바이노의 후임으로 소환되어 에스토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인민전선과 협력하며 그해 11월 에스토니아의 주권 선언을 이끌었다. 1991년 8월 에스토니아 독립 회복 선언에 찬성표를 던졌고, 독립 후에는 에스토니아 민주노동당 의장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1949–1955콤소몰 각급 기관 근무; 타르투국립대학교 졸업(1955)
1955–1961에스토니아 레닌주의청년공산주의자동맹(ELKNÜ)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61–1971에스토니아공산당 탈린시위원회 제1서기
1963–1967에스토니아 SSR 제6기 최고회의 의장
1971–1980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1980–1988소련 대사, 베네수엘라(1980–1986) 및 니카라과(1986–1988)
1991년 8월 21일, 쿠데타 한복판에서 판킨은 체코슬로바키아 TV에 출연했다. 소련 대사 중 유일하게 '야나예프의 치명적 실수'라며 공개 비판하고, 즉각 철회를 촉구한 순간이었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신문을 소련 최고의 청년지로 키운 언론인이자, 국가상을 수상한 문학비평가. 외교관으로 전환해 8월 쿠데타 당시 유일하게 공개 비판한 대사였으며, 쿠데타 실패 후 소련의 마지막 외무장관으로 이스라엘과의 외교 수립, 미소 군축 협상 개시를 주도했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주소 대사에서 『아프간츠이』의 저자까지, 소련을 가장 깊이 이해한 영국 외교관
「우리가 여전히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민스 파이를 먹고 있을 때, 고르바초프가 텔레비전에 나와 자신이 소련 대통령직을 사임했다고 세계에 알렸다」, 1991년 크리스마스 모스크바에서.
영국 외교관이자 작가로, 페레스트로이카와 소련 붕괴의 결정적 시기인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주소 영국 대사를 지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개인적 신뢰를 쌓으며 1991년 8월 쿠데타와 옐친의 부상, 소련 해체를 현장에서 목격했고, 이후 존 메이저 총리의 외교정책 보좌관과 합동정보위원회 의장을 역임했다. 2011년 출간한 『아프간츠이』(Afgantsy)는 소련군이 전장에서 패배하지 않고 질서 있게 철수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군사적 실패가 아니라 정치적·정보적 실패였다고 주장해 '소련판 베트남'이라는 서방의 통념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대표적 수정주의 저작이다.
로버트 팩스턴은 미국의 현대 유럽사 연구자로, 비시 프랑스와 파시즘의 사회적·정치적 조건을 분석했다. 독일 점령기 문서와 프랑스 자료를 함께 읽어 비시 정권이 독일의 수동적 도구가 아니라 자체적인 국가 재편 구상을 지닌 협력자였음을 밝혔다. 마이클 마루스와 함께 쓴 『비시 프랑스와 유대인』은 비시의 초기 반유대 법령이 독일의 직접 명령 없이 추진된 정책임을 논증해 프랑스의 전후 기억과 역사학을 바꾸었다. 그의 연구는 협력과 저항을 도덕적 신화가 아니라 국가기관, 사회세력, 전쟁 조건의 상호작용으로 보게 했으며 세부 해석을 둘러싼 논쟁도 남겼다.
1991년 8월 21일 아침, 쿠데타가 무너지는 것이 확실해지자 이바시코는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야나예프에게 전화해 "고르바초프를 만나러 갈 비행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거절당한 그는 결국 자신이 지지하지 않은 쿠데타 주역들—야조프, 루키야노프 등—과 같은 비행기에 올라 포로스로 향해야 했다.
하르키우 광산대학 출신의 경제학자로, 우크라이나 당 기구에서 20년간 경력을 쌓은 뒤 1989년 셰르비츠키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신설된 부서기장직에 선출되어 모스크바로 옮겼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고르바초프가 총서기직을 사임하자 당 역사상 마지막 지도자가 되었으나, 불과 닷새 만에 당 활동이 정지되면서 소비에트 공산당은 그와 함께 막을 내렸다.
자치주는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가깝지만, 높은 산으로 분리되어 있다. (1977년 국제 저널 인터뷰에서)
아제르바이잔 샤마흐 태생의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73년 헤이다르 알리예프에 의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 제1서기로 임명되어 1988년까지 재임했다. 카라바흐 외부 출신으로 알리예프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며,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족적 요구를 억압하고 바쿠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77년 국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카라바흐가 '높은 산으로 아르메니아와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해 동족의 분노를 샀고, 1988년 2월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해임되었다. 1992년 바쿠에서 체포·투옥되었다가 1993년 알리예프의 사면으로 석방된 뒤 모스크바로 이주해 중학교 역사 교사로 일하다 1998년 사망했다.
1990년 3월 11일 밤, 독립 회복법이 반대 없이 가결되자 의장석의 그가 선언했다. 리투아니아는 다시 독립국가라고. 소련에서 걸어 나간 첫 공화국이었고, 크렘린이 받은 첫 탈퇴 통보였다.
리투아니아의 음악학자로 화가이자 작곡가 추를료니스 연구의 권위자였다. 1988년 개혁운동 사유디스의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고,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독립 회복법을 통과시켜 소련에서 이탈을 선언한 첫 공화국의 국가수반이 되었다. 모스크바의 경제 봉쇄와 1991년 1월의 유혈 진압 시도를 버텨 내며 독립을 지켰고, 이후 세이마스(국회) 의장과 유럽의회 의원을 지내며 리투아니아 우파의 원로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