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갈색책』 6장 「문화 섬멸전」

인물마그누스 히르슈펠트, 막스 호단, 쿠르트 힐러, 카를 기제,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 지크문트 프로이트, 해블록 엘리스, 오스카 와일드, 에드워드 카펜터, 노먼 헤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요제프 괴벨스, 아돌프 히틀러,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블라디미르 레닌, 이오시프 스탈린,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리프크네히트, 아우구스트 베벨, 베르톨트 브레히트 용어갈색책 (1933), 성과학 연구소, 세계 성개혁 연맹, 1933년 나치 분서, 돌격대 (SA) 사건독일 성개혁 운동과 나치의 파괴 (1897~1935), 나치 집권과 수권법

6 문화 섬멸전

독일 노동계급과 그 조직들에 대한 주공격과 나란히, 히틀러와 괴벨스는 독일 지식인의 가장 훌륭한 층에 맞서서도 동시에 전쟁을 벌이고 있다. 돌격대의 군화가 가장 뛰어난 학자와 예술가들이 평생 애써 이룬 업적을 짓밟는다. 돌격대는 말 그대로 수많은 지식인의 잔혹하게 학대당한 몸뚱이를 짓밟는다. 이들은 싸우는 노동자들과 털끝만 한 연관도 없을 때가 많았는데도 – 독립적이고 진보적이며 자유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나치의 증오를 샀다. 히틀러 치하에서는 자유주의적 신념만으로도 이미 “범죄”이며, 가차 없이 처벌된다.

괴벨스는 갈색 종교재판관들을 지휘한다. 그들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프랑스 대혁명 이전으로까지 되돌릴 수 있다고 믿는다. 민족주의로 왜곡된 프리드리히 대왕(Fridericus Rex)의 지팡이, 열병식 행진, 시체 같은 맹종 – 이것이 “제3제국”을 특징짓는 저 “문화”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대적”이거나 “자유주의적”이거나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지목된 모든 것, 지난 150년 동안의 시민적 진보와 계몽을 구현하는 모든 것이 뿌리 뽑혀야 한다는 것이다.

히틀러 독일에는 이제 “정신의 자유”라는 사상이 설 자리도, 학문적 객관성을 향한 시민 학자들의 지극히 소박한 선의가 설 자리도, 예술 작품 속에서 민중의 사회적 해방 투쟁을 가장 수줍게 표현하는 일이 설 자리도 없다. 강단에서, 무대에서, 연단과 지휘대에서 쫓겨났다! 진료소와 연구소와 학술원에서 쫓겨났다. 독일 도시들의 광장에 쌓인 진보 문학의 화형대는 멀리서도 보이는 불길의 신호로 알린다. 갈색 야만은 가장 용감하고 헌신적인 반파시스트들을 육체적으로 절멸하려 할 뿐 아니라, 시민 문화가 노동계급에게 물려줄 살아 있고 값진 모든 것, 아니 그저 시민적으로나마 진보적인 모습을 띤 모든 것까지도 없애 버리려 한다는 것을.

정신적 “자유주의”의 마지막 기수들이 지금 독일에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학살당하고 있다. 그 학살자는 지배 세력이 자기들의 자본주의 체제가 몰락하는 것을 막으려고 풀어놓은 저 갈색 폭력이다. 최근 독일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우리 시대에 문화의 미래가 노동계급의 해방 투쟁과 떼려야 뗄 수 없이 결부되어 있음을 그 어느 때보다 분명히 증명했다.

6.1 학자 박해

“오 세기여, 오 학문이여, 사는 것이 즐겁도다!”

(울리히 폰 후텐)

파시즘의 치명적 증오는 당연히 노동계급의 해방 투쟁을 공공연히 지지하거나 평화주의 단체와 가까운 지식인들을 겨눈다. 이 증오는 국회의사당 화재 직후 첫날부터 이미 그들에게 온 힘을 다해 쏟아졌다. 갈색 방화범들의 도발 직후 시작된 첫 검거 물결에서, 암스테르담에서 창립된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의사 협회」의 독일 지부가 매우 큰 타격을 입었다. 그 지도자 펠릭스 뵌하임 박사는 2월 말부터 히틀러의 감옥에 갇혀 있다.

뵌하임 박사는 대단히 존경받는 내과 전문의로, 수많은 학술 업적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그는 어느 정당에도 속하지 않았다. 그는 업적의 학문적 의의를 인정받아 베를린에서 손꼽히게 큰 병원인 후펠란트 병원의 과장 의사 자리에 올랐다. 펠릭스 뵌하임 박사가 양심에 따라 전쟁 반대 의사 운동의 선두에 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는 히틀러 파시스트들의 화해할 수 없는 증오에 내맡겨졌다. 국제 의사 협회를 위한 그의 활동은 제멋대로 “대역죄”로 낙인찍혔다. 그에게는 변호인도 허락되지 않는다. 몇 달째 구금되어 있는데도 가족과의 연락은 일절 거부되었다.

막스 호단은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남성을 위한 성 상담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수많은 대중 과학서를 쓴 사람이다. 그는 몇 달째 히틀러의 앞잡이들 손아귀에 있다.

이름난 마르크스주의 학자 헤르만 둥커는 전 세계 노동운동 전체에서 높은 이름을 얻은 사람인데, 노령과 중병에도 불구하고 투옥되었다. 그의 목숨이 몹시 위태롭다. 전쟁 전 사회민주주의 노동자 한 세대 전체가 존경하는 스승으로 여기던 이 사람이 히틀러의 감옥에서 몸과 마음이 무너져 가고 있다.

중국에 관해 깊은 통찰을 주는 책을 쓴 작가 카를 아우구스트 비트포겔, 작가 루트비히 렌, 카를 폰 오시에츠키, 쿠르트 힐러, 에곤 에르빈 키시, 에리히 뮈잠, 클라우스 노이크란츠, 에리히 바론 등, 그리고 의사인 브레슬라우의 셸러 교수, 베를린의 아슈 박사, 함부르크의 볼게무트 박사가 체포되었다. 학술 기관과 대학과 학교는 “돌격대 문화”의 훈련소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나 평화주의나 자유주의 사상을 품었다는 의심을 받는 고명한 학자들에 대한 박해는 독일 국가인민당 사람들에게까지 미친다. 독일의 가장 중요한 대학들의 교수진이 반달족 같은 무자비함으로 쑥대밭이 된다. 무능하고, 기껏해야 시류에나 밝은 사이비 학자들의 밀고와 자리 사냥이 판을 친다.

6.2 독일 학문의 정수가 파괴되다

해고, 휴직 처분, 박해를 당한 이들의 명단에서 우리는 몇몇 사례만 골라 든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에 대한 박해다. 스위스 시민이자 프로이센 학술원 회원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좌파 민주주의적 정치 신념,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적극적 관심, 그리고 세계적 명성을 얻은 학문적 업적 때문에 나치에게서 “비독일적”이라는 증오를 샀다. 아인슈타인의 학술 저작은 나치의 환호 속에 베를린 대학의 화형대에서 불태워진다. 노벨상 수상자를 이렇게 다룬 것 하나만으로도 히틀러 독일은 현대 학문의 세계에서 이미 웃음거리가 되었다.

정밀과학 없이는 고도로 발달한 산업의 어느 분야도 번성할 수 없다. 그런데도 히틀러 정권은 정밀 자연과학과 수학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들을 강단에서 몰아냈다.

괴팅겐 대학은 매우 오랜 전통을 지녔고, 지난 50년 동안 걸출한 연구자 한 세대 전체를 길러 냈다. 이 대학의 가장 중요한 교수들이 쫓겨났다.

세계적 명성을 지닌 실험물리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제임스 프랑크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자진” 사퇴를 강요당했다.

역시 이름난 물리학자인 보른 교수는 자신의 “비독일적” 연구를 독일에서 더는 이어 갈 수 없다.

수학자 쿠란트는 함수론 분야의 권위자다. 베른슈타인은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보험 수학자로 꼽힌다. 에미 뇌터는 수학과 고등 대수학 분야에서 명망 있는 학자다. 이 학자들 모두가 떠나야 했다.

베를린의 수학부는 가장 뛰어난 교수들을 빼앗겼다. 베를린 공과대학도 큰 손실을 입었다.

쫓겨난 이들 가운데에는 텔레비전을 실현하는 최초의 실용적 방법을 제시한 공로를 지닌 물리학자 아르투어 코른 교수도 있다.

대학 “숙청”의 희생양이 된 베를린 수학자들 가운데 맨 앞자리에는 대수학자 슈어와 미제스 교수, 비버바흐 교수가 있다.

정밀과학의 대표자들을 향한 이 광란은 현대 자본주의 경제 운영의 관점에서 보아도 자살 행위다. 이것은 소련이 모든 정직한 학자들에게 열어 준 거대한 가능성과 극명하게 대조된다.

나치 숙청의 희생자 가운데에는 노벨상 수상자 프리츠 하버도 있다. 화학자들의 큰 학파를 이끈 하버는 이미 전쟁 전에 일급의 학문적 권위자였다. 그는 공기에서 질소를 얻는 최초의 쓸 만한 공정을 개발했다. 그는 평화주의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하버는 자신의 발명으로 세계대전 때 빌헬름 시대 독일에 큰 공헌을 했다. 그의 이름은 현대 독일 화학의 최고 발전을 상징한다. 《타임스》(1933년 5월 4일)가 지적했듯이, 독일이 4년의 전쟁을 버텨 낼 수 있었던 것을 아마 그 누구보다 많이 빚진 사람(하버)을 나치가 사퇴하도록 “강요”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같은 때 쫓겨난 폴라니 교수는 하버의 중요한 협력자였다.

정밀과학 분야에서 나치의 문화 야만에 밀려나야 했던 다른 이름난 학자들 가운데에는 플랑크의 양자론을 연구한 베를린의 뷔크 교수가 있다. 정수론 분야에서 독자적인 업적으로 알려진 쾨니히스베르크의 수학자 헨젤이 있다. 집합론에 관한 주목받는 책을 낸 킬의 아돌프 프랑켈 교수가 있다. 복사의 중요한 문제들을 다룬 베를린의 물리학자 프링스하임이 있다.

여기 열거한 학자들은 모두 전문가들 사이에서 높이 평가받는 이름난 학자이자 연구자이자 스승이다. 매우 불완전한 이 열거만으로도, 이 추방이 독일 학문의 진정한 섬멸이라는 것, 독일 파시즘이 종교재판과 화형대로 모든 학문적 진보와 싸우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6.3 학자들에게 해외 여권을 내주지 마라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프랑스 학사원(Institut de France)에 초빙되고, 징계받은 부인과 의사 베른하르트 촌데크 교수가 스톡홀름에서 강의하자, 징계받은 독일 대학교수들의 해외 여권을 빼앗는 방안이 진지하게 검토되기에 이르렀다. 이 학자들의 “비독일적” 정신이 외국 대학에 이로움을 주어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우익지 《테글리헤 룬트샤우》는 1933년 4월 17일 자에서 아인슈타인이 프랑스 학사원에 초빙된 것을 두고 제국 정부에 요구했다. 휴직 처분을 받은 독일 대학교수 16명의 해외 여권을 즉시 빼앗으라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머지않아 파리나 옥스퍼드나 런던에 자리를 잡고 그곳 강단에서 반독일 정치를 펴지 않으리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문은 휴직 처분을 받은 교수들 가운데 켈젠, 레데러, 본 같은 이들은 외국에 아주 훌륭한 연줄을 지니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6.4 독일 최고의 의사들이 독일에서 일할 수 없다

독자는 이 장의 다른 곳에서,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독일에서 해고되고 “휴직 처분”되고 한직으로 밀려난 학자들의 명단을 보게 될 것이다. 자리에서 쫓겨난 의사 몇 사람을 여기서 짧게 소개해 두고자 한다.

베른하르트 촌데크는 스웨덴의 노벨 의학상 수상자 폰오일러에게서 “비길 데 없는 권위자”라는 평을 들었다. 우리는 촌데크 덕분에 소변을 분석해 임신을 아주 이른 단계에서 확인할 수 있는 화학적 방법을 갖게 되었다. 이 방법은 사회위생의 관점에서나 순수 의학의 관점에서나 지극히 중요하다. 촌데크는 호르몬 연구에서 뛰어난 업적을 쌓았다. 그는 성호르몬을 분리해 내려고 힘써 왔다. 성호르몬은 남성과 여성에게서 특이하게 다른 물질로, 그 존재가 최근 몇 해 사이에야 확인되었다. 촌데크는 이 연구 방법의 개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최근 성호르몬의 “인공” 제조를 놀라운 성과로 진척시켰다. 히틀러 정부는 이런 학문적 역량을 강단에서 밀어낸다!

한직으로 밀려난 베를린의 결핵 연구자 프리트만은 민중의 역병인 결핵과 적극적으로 싸우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뛰어난 결핵 치료제를 발명했다.

베를린 모아비트 병원 외과 과장이자 추밀 의무 고문관이며 교수인 모리츠 보르하르트는 젊은 시절 독일의 저명한 외과 의사 폰베르크만의 조수였다. 뒤에는 베를린 피르호 병원의 과장 의사를 지냈다. 보르하르트는 외과 의사로서 결핵과 싸웠다. 그는 민족사회주의자들의 “보건 위원”에 의해 해임되었다.

6.5 히르슈펠트의 성과학 연구소는 어떻게 쑥대밭이 되고 파괴되었나

연구소에 몸담고 있지는 않았지만 사건의 경과를 낱낱이 지켜볼 수 있었던 믿을 만한 목격자이자 증인이, 세계적으로 이름난 이 베를린의 학술 연구·교육·치료 기관이 끔찍하게 파괴된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1933년 5월 6일 아침 《베를리너 로칼안차이거》는 베를린 도서관들에서 비독일적 정신의 책들을 숙청하는 작업이 이날 오전에 시작되며, 체육 대학 학생들이 성과학 연구소에서 이 작업의 막을 열 예정이라는 소식을 실었다. 이 연구소는 1918년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박사가 옛 하츠펠트 공의 저택에 세웠고, 그 뒤 프로이센 정부가 공익 재단으로 인수했다. 연구소는 유례없는 수집품과 연구, 기록 보관소와 도서관 덕분에 국제적 명성을 누렸고 찾는 이가 많았다. 특히 많은 외국 학자와 의사와 작가가 그곳에서 연구하려고 베를린에 왔다.

이 신문 기사를 보고 특히 귀중한 개인 장서와 원고 몇 가지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그 일은 좌절되었다. 이 책들을 가지고 나가던 젊은이가, 분명 밤사이에 이미 연구소를 에워싸고 있던 감시대에게 붙잡혀 가진 것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5월 6일 9시 30분, 학생 100명가량과 관악대를 태운 트럭 몇 대가 연구소 앞에 나타났다. 그들은 건물 앞에 군대식으로 대열을 짓고는 음악에 맞춰 건물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사무실이 아직 문을 열지 않은 때라 연구소를 대표할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가사 일을 하는 여성 몇 명과 연구소와 가까운 남자 한 사람만 있었다. 학생들은 모든 방에 들어가겠다고 요구했다. 얼마 전부터 쓰지 않던 1층의 응접실들, 그리고 세계 성개혁 연맹의 예전 사무실과 지금 사무실처럼 잠겨 있던 방은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아래층 방들에서 별로 얻을 것이 없자 그들은 2층으로 올라가 연구소 접견실들에서 잉크병을 서류와 양탄자 위에 쏟아 버리고 개인 책장으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흠잡을 데가 있어 보이는 것은 다 가져갔는데, 대체로 이른바 ‘블랙리스트’를 따른 듯했다. 그러나 그 밖의 다른 책들도 집어 갔다. 이를테면 비서 기제의 개인 장서에서 투탕카멘에 관한 큰 책 한 권과 미술 잡지 여러 권을 가져갔다. 이어 그들은 기록 보관소에서 간성(間性) 사례들을 그린 큰 벽 도판들을 떼어 냈다. 이것은 1913년 런던 켄싱턴 박물관에서 열린 국제 의학 대회 전시회를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들은 이 도판 대부분을 창밖으로, 건물 앞에 서 있던 동료들에게 던졌다.

그 밖의 그림, 중요한 유형들을 찍은 사진 대부분은 벽에서 떼어 내어 그것으로 축구를 했다. 그래서 부서진 그림과 유리 조각이 큰 무더기로 남았다. 한 학생이 이것은 의학 자료라고 이의를 제기하자, 다른 학생은 그런 건 상관없다고, 자기들은 책 몇 권과 그림 몇 장을 압수하려는 게 아니라 연구소를 없애 버리려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어 긴 연설과 함께, 내분비 과정을 보여 주는 실물 크기 모형을 창밖으로 던져 박살 냈다. 한 진료실에서는 환자 치료에 쓰던 판토스타트[a1]를 대걸레 자루로 때려 부쉈다. 또 히르슈펠트 박사의 청동 흉상을 약탈했다. 그 밖에도 많은 예술품을 가져갔다. 연구소 도서관에서는 처음에는 책을 몇백 권만 가져갔다.

그동안 내내 직원들은 감시를 받았고, 음악은 쉴 새 없이 울렸다. 그래서 건물 앞에는 구경꾼이 떼 지어 몰려들었다. 12시에 지휘자가 꽤 긴 폐회 연설을 했고, 대원들은 특별히 지은 「저질 외설 노래」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a2]를 부르며 물러갔다.

연구소에 사는 사람들은 이 약탈로 일이 끝나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오후 3시에 다시 돌격대원들을 태운 트럭 여러 대가 나타나, 아침의 대원들이 철저히 치울 시간이 모자랐으니 압수를 계속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두 번째 무리는 모든 방을 다시 샅샅이 뒤지고, 값진 책과 원고는 모조리 바구니 여러 개에 담아 날라 갔다. 모두 합쳐 큰 화물차 두 대 분량이었다. 그들이 퍼붓는 욕설로 보아 학생들은 이 전문 도서관에 있는 저자들의 이름을 대부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들은 계단실에서 떼어 내어 끌고 간 초상의 주인 지크문트 프로이트를 ‘돼지 유대인 프로이트’라고 불렀을 뿐 아니라, 해블록 엘리스도 ‘돼지 해블록 엘리스’라고 불렀다. 영국 저자 가운데서는 해블록 엘리스 말고도 특히 오스카 와일드, 에드워드 카펜터, 노먼 헤어의 저작을 노렸고, 미국 작가 가운데서는 소년 법원 판사 린지, 마거릿 생어, 조지 실베스터 비어렉의 책을, 프랑스 저작 가운데서는 앙드레 지드, 마르셀 프루스트, 피에르 로티, 졸라 등의 책을 노렸다. 판더펠더와 덴마크 의사 레운바크 박사의 책을 보고도 학생들은 저자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잡지도 여러 해 치를 통째로 가져갔는데, 특히 『성적 중간 단계 연보』 24권이 그랬다. 그들은 작성된 질문지(수천 장)도 끌고 가려 했으나, 이것은 환자 병력이라는 분명한 지적을 듣고서야 학생들은 그만두었다. 반면 세계 성개혁 연맹의 자료, 잡지 《섹수스》의 남아 있던 부수 전부, 그리고 카드 색인을 가져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아직 출판되지 않은 것도 일부 있는 수많은 친필 문서와 원고(크라프트에빙과 카를 하인리히 울리히스의 것 등)도 침입자들의 손에 희생되었다.

그들은 히르슈펠트 박사가 언제 돌아오는지 거듭 물었다. 그들 표현대로 그가 언제쯤 돌아올지 ‘귀띔’을 받고 싶어 했다. 연구소가 약탈당하기 전에도 이미 돌격대원들이 여러 차례 연구소에 와서 히르슈펠트 박사를 찾았다. 그가 말라리아에 걸려 외국에 있다는 대답을 듣자 그들은 이렇게 받아쳤다. ‘그럼 우리가 손쓸 것도 없이 뒈져 버리면 좋겠군. 그러면 굳이 목을 매달거나 때려죽일 필요도 없을 테니까.’

5월 7일 베를린과 다른 지역의 신문들이 성과학 연구소에 대한 작전을 보도하자, 세계 연맹 지도부는 전보로 항의했다. 수집된 자료 가운데 많은 것이 외국인 소유물이니 예고된 소각을 거두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문화부 장관에게 보낸 이 전보는 무시되었고, 오히려 모든 저작과 그림이 사흘 뒤 오페라 광장에서 다른 많은 저작과 함께 불태워졌다. 연구소 전문 도서관에서 없어진 책은 1만 권이 넘었다. 횃불 행렬에서 학생들은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박사의 흉상을 들고 가다가 화형대에 던졌다.”

나치의 보도에서 이 “문화적 위업”은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독약 부엌을 힘차게 들이치다.”

독일 학생들이 “성연구소”를 소탕하다.

독일 학생회 제10관구가 어제 유대인 마그누스 히르슈펠트가 이끌어 온 “성연구소”를 점거했다. 학문의 외투를 걸치려 애쓰던 이 연구소는 14년 동안의 마르크스주의 지배 아래서 당시의 권력자들에게 늘 비호를 받았는데, 이번 가택 수색으로 똑똑히 밝혀졌듯이 오물과 추잡함의 소굴일 뿐이었다. 외설 그림과 글, 그리고 문서와 카드 색인이 트럭 한 대 가득 압수되었다… 발견된 자료 가운데 일부는 형사 경찰이 다루어야 하고, 다른 일부는 집회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울 것이다.

(《앙그리프》 1933년 5월 6일 자)

6.6 “비독일적” 사회학자, 국법학자, 법학자

민족사회주의자들은 이름난 사회학자, 국법학자, 법학자들을 몰아내면서, 몹시 “국가 수호적”인 연구자들, 대개는 훌륭한 보수주의자들까지도 자리에서 내쫓았다.

쫓겨난 학자들 가운데 가장 이름난 이는 하이델베르크의 사회학자 알프레트 베버다. 알프레트 베버는 세상을 떠난 형 막스 베버와 함께 큰 저작들에서, 유럽 밖 여러 민족과 문화의 원시 경제가 발전해 온 형태를 철저히 연구한 결과를 내놓았다. 베버는 결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시민 학자다. 베버는 다른 민족과 문화를 민족사회주의식으로 반쯤 원숭이요 “열등 인간”이라고 낙인찍지 않는 대죄를 저질렀다.

베를린 상과대학은 학장인 뛰어난 자유주의 경제학자 본 교수를 잃는다. 국법학자 안쉬츠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을 떠나야 한다. 베를린 대학 교수를 오래 지낸 안쉬츠는 이미 제정 독일 시절에 자기 분야에서 일급의 권위자였다. 뒤에 그는 바이마르 제국 헌법의 권위 있는 주석가가 되었다.

그의 동료 다수가 내쫓겼다. 쾰른의 시민적 교수 켈젠, 킬의 동료 함스, 《프랑크푸르터 차이퉁》의 전 편집인 파일러, 우파 사회민주주의자 에밀 라트브루흐, 사회민주주의자인 프랑크푸르트의 진츠하이머, 하이델베르크의 레데러, 프랑크푸르트의 헬러 – 모두 법학자다. 독일 최고의 민법학자 마르틴 볼프 교수는 갈고리십자가 학생들에게 강단에서 강제로 쫓겨났다. 헤이그 국제 사법 재판소의 독일 대표인 킬의 자유주의 국제법학자 레빈 쉬킹은 관직에서 쫓겨났다.

위대한 심리학자들도 강의실에서 밀려났다. 아동 심리학에 관한 큰 저작을 낸 함부르크의 빌리암 슈테른,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의 막스 베르트하이머는 더는 독일 대학에서 가르칠 권리가 없다. 함부르크에서는 덜 알려진 교수 대여섯 명과 함께 철학자 에른스트 카시러가 해고되었다. 그는 이른바 마르부르크 학파 출신으로, 학식과 명성이 높은 사람이다.

6.7 화형대로!

“베를린에서 정치경찰은 어림잡아 1만 첸트너[a3]쯤 되는 책과 잡지를 압수해 옛 기마 보안경찰의 마구간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꼼꼼한 선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압수가 늘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작전이 알려지자 곧 많은 도서실이 경찰의 손을 피하려고 책을 은신처로 옮겼다. 그러나 은닉처는 대부분 찾아냈다. 많은 장서가 헛간, 지하실, 정원 오두막, 다락, 개인 주택 등에 나뉘어 숨겨진 채 발견되었다.”

(《푈키셔 베오바흐터》 1933년 5월 21/22일 자)

“우리는 괴테와 아인슈타인의 나라가 아니며, 그런 나라가 되고 싶지도 않다. 바로 그것만은 안 된다.”

(후송, 《베를리너 로칼안차이거》 1933년 5월 7일 자)

“칼리프가 알렉산드리아의 이름난 도서관을 불태우려 하자, 몇몇 사람이 이 귀중한 장서만은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왜?’ 칼리프가 물었다. ‘이 책들에 코란에 있는 것이 적혀 있다면 쓸데없다. 다른 것이 적혀 있다면 해롭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불태워졌다.”

5월 10일, 대학 맞은편 베를린 오페라 극장 앞 광장에서 거대한 화형대의 불길이 타올랐다. 광장 전체가 돌격대와 친위대의 갈색·검은색 부대에 군대식으로 봉쇄되었다. 트럭들이 어마어마한 책 더미를 실어 왔고, 고함이 울려 퍼졌고, 선전 장관 괴벨스가 자동차를 타고 쏜살같이 달려왔다. 1933년에 이 유례없는 분서의 구경거리가 벌어졌다.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와 「독일의 노래」가 이를 반주했다.

화형대 위로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저작이, 레닌과 스탈린의 저작이,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아우구스트 베벨의 저작이 날아갔다. 일하는 인류에게 해방의 길을 가리켜 보인 이 위대한 학자이자 투사들의 저작을 불태우는 일이, 고삐 풀린 반동 무리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독일이여, 독일이여, 모든 것 위에!”—

날름거리는 불길 속으로 평화주의 작가들의 저작이 날아갔다. 시민 독일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뜻하던 이름의 시민 시인과 사회 개혁가들의 책이 불탔다. 불은 토마스 만과 하인리히 만, 레온하르트 프랑크,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지크문트 프로이트, 야코프 바서만, 슈테판 츠바이크, 베르톨트 브레히트, 알프레트 되블린, 테오도어 플리비어의 책을 삼켰다.

“독일이여, 독일이여, 모든 것 위에!”—

진보적 정신의 산물을 불태우는 이 일은 베를린 대학의 알렉산더 폰 훔볼트와 빌헬름 폰 훔볼트 상 받침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졌다. 이 대학을 세운 빌헬름 폰 훔볼트는 계몽 시대 정신의 담지자로서, 융커의 프로이센을 서구 시민 세계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이제 그의 기념상 앞에서 돌격대 제복을 입은 독일 학생들이 진보 문학을 향한 포그롬을 벌였다. “독일이여, 독일이여, 모든 것 위에!” —

베를린 대학 앞에서 타닥거리는 불, 쇼비니즘으로 들끓는 군중의 머리 위로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 제국 선전 장관 괴벨스의 연설 — 히틀러에 충성하는 베를린의 《12시 신문》조차 무의식적인 자기 인식 속에서 “유령 같다”고 부른 구경거리. 모든 세기의 압제자들이 자기들의 화형대로 얻은 쓰라린 경험은 잊혔다! 중세의 유령들이 되살아난다. 베를린 대학 앞의 불길은 마르크스주의 저작들과 함께 지난 150년 동안 시민 문화와 학문이 이룬 최고의 성과까지 삼키려 한다.

독일 전역에서 모든 진보 문학을 향한 파괴의 광란이 날뛰고 있다. 가택 수색에서 수만 곳의 개인 장서가 압수되었고, 흔히 그 자리에서 없애거나 제멋대로 끌고 갔다. 대체할 수 없는 노동운동의 희귀 문헌을 갖춘, 독일에서 가장 값지고 큰 도서관 가운데 하나인 라이프치히 인민회관 도서관은 마르크스주의를 향한 갈색 “문화 담지자”들의 증오에 희생되었다.

독일 국가인민당 계열 통신사 「텔레그라펜 우니온」의 1933년 5월 10일 자 보도에 따른 공개 분서의 몇 가지 사례를 든다.

“베를린, 5월 10일. 뮌헨에서는 대학 중정에서 기념식이 열려 총장 폰춤부슈 추밀 고문관이 새 학생법을 전달했다. 기념 연설은 바이에른 문화부 장관 솀이 맡아 민족 혁명과 대학의 과제에 관해 말했다. 마지막 순서로 쾨니히스 광장까지 횃불 행렬이 이어졌고, 그곳에서 비독일적 책들을 불태웠다.

드레스덴에서는 학생회 집회에서 시인 빌헬름 페스퍼가 연설했다. 그곳에서도 기념식이 끝난 뒤 큰 횃불 행렬이 비스마르크 기념탑까지 나아갔고, 드레스덴 학생회 최고참의 연설에 이어 저질·외설 문헌 전부를 불태웠다.

브레슬라우에서는 학생회 집회가 성 광장에서 열렸다. 대학교수 보른하우젠의 기념 연설이 있은 뒤 저질·외설 문헌 약 40첸트너를 불태웠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는 대학교수 프리케가 역사적인 뢰머베르크 광장에서 거행된 의식의 막을 열었다. 상징적으로 불태울 책을 실은 수레를 황소 두 마리가 소각 장소까지 끌고 왔다. 소각은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합창으로 끝났다.”

그보다 며칠 앞서 뒤셀도르프에서는 위대한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의 작품이 화형대의 불길에 넘겨졌다.

괴벨스 씨는 베를린 연설에서 소 수레가 화형대로 나아가는 것, 문학을 불태우는 것을 “강력한 상징적 행위”라고 불렀다. 분서는 단지 상징으로만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독일 파시스트들의 반동은 실제로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인쇄된 말을 조금도 상징적이지 않게 불태워 버리려 한다. 반파시즘 문학을 퍼뜨리고 쓰는 사람들을 육체적으로 절멸하려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주석

  1. [옮긴이] 판토스타트(Pantostat): 갈바니 전류·감응 전류 등을 내어 전기 치료와 진단에 쓰던 의료 기기. ↩
  2. [옮긴이]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 1930년 공산주의자에게 살해된 돌격대원 호르스트 베셀이 가사를 쓴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의 당가. ↩
  3. [옮긴이] 첸트너(Zentner): 독일의 무게 단위로 1첸트너는 50킬로그램. 1만 첸트너는 약 500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