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 발췌: 기동전과 진지전, 헤게모니
인물안토니오 그람시, 레프 트로츠키, 블라디미르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표트르 크라스노프, 페르디낭 포슈, 카를 마르크스, 알렉산드르 파르부스, 주세페 가리발디, 주세페 마치니, 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 조반니 졸리티,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 용어연속혁명, 수동 혁명, 리소르지멘토, 자코뱅파 사건이탈리아의 1848년 혁명과 제1차 독립전쟁 학습사회주의의 분기 2부 · 4장 서방의 혁명은 정면 공격으로 이길 수 있을까?
제7권 §16. 진지전과 기동전 또는 정면전
브론시테인[1]의 저 유명한 운동의 영속성 이론이 기동전 이론의 정치적 반영이 아닌지(카자크 장군 크라스노프[2]의 관찰을 떠올릴 것), 결국 국민 생활의 틀이 맹아 상태에 있고 느슨해서 「참호나 요새」가 될 수 없는 나라의 일반적 경제·문화·사회 조건의 반영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 경우 「서구주의자」처럼 보이는 브론시테인은 사실은 코즈모폴리턴, 곧 피상적으로 국민적이고 피상적으로 서구주의적 또는 유럽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일리치는 깊이 국민적이었고 깊이 유럽적이었다. 브론시테인은 회고록[3]에서, 그의 이론이 십오 년이 지나서야 옳았음이 드러났다는 말을 들었다고 회상하고, 그 경구에 다른 경구로 응수한다. 실제로는 그의 이론은, 이론으로서는, 십오 년 전에도 십오 년 뒤에도 옳지 않았다. 귀차르디니[4]가 말하는 고집쟁이들에게 일어나는 일처럼, 그는 대강 맞혔을 뿐이다. 곧 가장 일반적인 실천적 예측에서 옳았을 뿐이다. 네 살배기 여자아이가 장차 어머니가 되리라고 예언하고는, 그 아이가 스무 살에 어머니가 되자 「내가 맞혔지」 하고 말하면서, 아이가 네 살일 때 어차피 어머니가 될 것이라 믿고 그 아이를 겁탈하려 했다는 사실은 기억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내가 보기에 일리치는 1917년 동방에서 승리를 거두며 적용된 기동전에서, 서방에서 유일하게 가능한 진지전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서방에서는 크라스노프가 관찰하듯 군대가 좁은 공간에 엄청난 양의 탄약을 쌓아 둘 수 있었고, 사회의 틀이 그 자체로 아직 철통같은 참호가 될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통일전선」[5]이라는 공식은 내게는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포슈의 단일 지휘 아래 협상국의 단일 전선을 두는 구상에 해당한다. 다만 일리치는 그의 공식을 깊이 다듬을 시간을 갖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그것을 이론적으로만 다듬을 수 있었을 뿐이고, 근본 과제는 국민적인 것이었다. 곧 그 과제는 지형을 정찰하고, 시민사회의 요소들로 대표되는 참호와 요새의 요소들을 확정할 것을 요구했다. 동방에서는 국가가 전부였고 시민사회는 원시적이고 젤라틴처럼 흐물흐물했다. 서방에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있었고, 국가가 흔들리면 곧바로 시민사회의 튼튼한 구조가 드러났다. 국가는 전진 배치된 참호에 지나지 않았고, 그 뒤에는 요새와 엄폐호의 튼튼한 사슬이 버티고 있었다. 물론 나라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바로 이 점이 국민적 성격의 면밀한 정찰을 요구했던 것이다.
브론시테인의 이론은 총파업에 관한 일부 프랑스 생디칼리스트들의 이론, 그리고 알레산드리가 옮긴 소책자[6]에 담긴 로자의 이론에 견줄 수 있다. 게다가 로자의 소책자와 이론은 프랑스 생디칼리스트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이는 『라 비 우브리에르』(첫 시리즈, 소책자 형태)에 실린 독일에 관한 로스메르[7]의 몇몇 글에서 드러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자생성 이론에서 비롯된다.
제6권 §138. 정치 영역에서도 일어나는 기동전(과 정면 공격)에서 진지전으로의 이행
내가 보기에 이것은 전후 시기가 제기한 정치 이론의 문제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올바르게 풀기가 가장 어려운 문제다. 그것은 브론시테인이 제기한 문제들과 이어져 있다. 브론시테인은 이런저런 의미에서, 정면 공격이 패배의 원인일 뿐인 시기에 정면 공격의 정치 이론가로 간주될 수 있다. 정치학에서의 이 이행은 군사 영역에서 일어난 이행과 오직 간접적으로, 매개를 거쳐서만 이어져 있다. 물론 둘 사이에는 분명히, 그리고 본질적으로 연관이 있지만 말이다. 진지전은 엄청나게 많은 주민 대중에게 엄청난 희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전례 없는 헤게모니의 집중이 필요하고, 따라서 더 「개입주의적인」 정부 형태가 필요하다. 그런 정부는 반대자들에게 더 공공연히 공세를 취하고, 내부 분열의 「불가능성」을 항구적으로 조직한다. 정치적·행정적 통제를 비롯한 온갖 통제, 지배 집단의 헤게모니적 「진지」의 강화 따위가 그것이다. 이 모든 것은 정치적·역사적 상황의 절정 국면에 들어섰음을 보여 준다. 정치에서는 「진지전」이 일단 승리하면 결정적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정치에서는 결정적이지 않은 진지를 차지하는 일이 문제인 동안에는, 그래서 헤게모니와 국가의 모든 자원을 동원할 수 없는 동안에는 기동전이 남아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든 이 진지들이 가치를 잃고 결정적인 진지만이 중요해지면, 그때는 포위전으로 넘어간다. 그것은 압축되고 어려운 전쟁이며, 인내와 창의라는 비범한 자질을 요구한다. 정치에서는 겉보기와 달리 포위가 상호적이다. 지배자가 자신의 모든 자원을 과시해야 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상대를 얼마나 크게 셈하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포위된 요새에서 너무 오래 끄는 저항은 그 자체로 사기를 꺾는다. 그것은 고통, 피로, 휴식의 박탈, 질병을 수반하며, 단련시키는 급박한 위험이 아니라 무너뜨리는 만성적 위험이 끊임없이 곁에 있음을 뜻한다.” 카를 마르크스, 「동방 문제」, 1855년 9월 14일 자 기사(『정치 저작집』 제8권, 22쪽).
제13권 §24. [군사 기술과 정치 기술에서의 기동전과 진지전]
군사 기술에서의 기동전과 진지전의 개념을 정치 기술의 해당 개념과 견주는 문제에 관해서는, 1919년 C. 알레산드리가 이탈리아어로 옮긴(프랑스어에서 옮긴) 로자의 작은 책을 떠올려야 한다. 이 책에서는 1905년의 역사적 경험이 다소 성급하게, 또 피상적으로 이론화된다. 실제로 로자는 그 사건들에서 「의지적」이고 조직적인 요소들을 소홀히 했다. 그 요소들은 로자가 「경제주의적」이고 자생주의적인 모종의 편견 탓에 믿고 싶어 한 것보다 훨씬 더 널리 퍼져 있었고 효과적이었다. 그렇지만 이 작은 책(그리고 같은 저자의 다른 글들)은 정치 기술에 적용된 기동전의 이론화를 보여 주는 가장 의미심장한 문헌 가운데 하나다. 직접적 경제 요소(공황 따위)는 전쟁에서 적의 방어선에 돌파구를 여는 야포처럼 여겨진다. 그 돌파구는 아군이 밀고 들어가 결정적(전략적) 성공을, 또는 적어도 전략선의 방향에서 중요한 성공을 거두기에 충분하다. 물론 역사학에서 직접적 경제 요소의 효과는 기동전에서 중포가 지닌 효과보다 훨씬 복잡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 요소는 다음과 같은 이중의 효과를 지닌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1) 적을 혼란에 빠뜨리고 적이 자신과 자신의 힘과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게 한 다음 적의 방어선에 돌파구를 연다. 2) 아군을 번개처럼 조직하고, 간부를 만들어 내거나, 적어도 (그때까지 일반적인 역사 과정이 길러 낸) 기존 간부들을 흩어진 부대를 편성하는 자리에 번개처럼 배치한다. 3) 도달해야 할 목표의 동일성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집중을 번개처럼 만들어 낸다. 그것은 강철 같은 경제주의적 결정론의 한 형태였고, 게다가 그 효과가 시간과 공간에서 극히 빠르게 나타난다고 여겼다는 점에서 더 나빴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정한 역사적 신비주의, 일종의 기적적인 섬광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협상국은 동방 문제가 차르 체제에 유리하게 최종 해결되지 않도록 제정 러시아의 승리를 원하지 않았기에) 유일하게 가능한 것은 기동전이었는데도 협상국이 러시아 참모본부에 참호전(습지와 숲이 넓게 펼쳐진 발트해에서 흑해까지의 거대한 전선을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것)을 강요했다는 크라스노프 장군의 관찰(그의 소설에 나오는)은 순전한 헛소리다. 실제로 러시아군은 특히 오스트리아 구역에서(그러나 동프로이센에서도) 기동전과 돌파전을 시도했고, 덧없기는 했지만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다. 진실은 적에 대해 처음부터 압도적 우위를 갖고 있지 않은 한 원하는 전쟁 형태를 고를 수 없다는 것이다. 진지전이 서로 맞선 세력의 전반적 관계에 의해 「강요된」 것임을 참모본부들이 고집스레 인정하려 하지 않은 탓에 얼마나 많은 손실이 났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진지전은 본래 의미의 참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치된 군대의 배후에 있는 영토의 조직·산업 체계 전체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진지전을 강요하는 것은 특히 대포와 기관총과 소총의 속사, 특정 지점에 대한 무기의 집중, 그리고 돌파와 후퇴 뒤에 잃은 물자를 빠르게 보충할 수 있게 하는 풍부한 보급이다. 또 하나의 요소는 배치에 참여하는 엄청난 인원인데, 그들의 역량은 매우 고르지 못하며 바로 그 때문에 대중으로서만 움직일 수 있다. 동부 전선에서 독일 구역으로 밀고 들어가는 일과 오스트리아 구역으로 밀고 들어가는 일이 얼마나 달랐는지, 그리고 오스트리아 구역에서도 정예 독일군으로 보강되고 독일인이 지휘한 곳에서는 맹렬한 돌격 전술이 어떻게 참사로 끝났는지를 우리는 보았다. 1920년 폴란드 전쟁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다. 거스를 수 없어 보이던 진격이 바르샤바 앞에서, 프랑스 장교들이 지휘하는 전선에서 베강 장군에게 저지되었다. 예전에 기동전에 고착되어 있었듯 이제 진지전에 고착된 군사 전문가들조차 앞의 유형을 학문에서 지워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산업적으로나 문명적으로나 가장 앞선 국가들 사이의 전쟁에서 기동전은 전략적 기능보다는 전술적 기능으로 축소된 것으로, 예전에 포위전이 기동전에 비해 놓여 있던 것과 같은 자리에 놓인 것으로 여겨야 한다. 정치 기술과 정치학에서도 같은 축소가 일어나야 한다. 적어도 가장 앞선 국가들에 관해서는 그렇다. 그런 국가들에서 「시민사회」는 직접적 경제 요소(공황, 불황 따위)의 파국적 「돌입」에 대해 매우 복잡하고 저항력이 강한 구조가 되었다. 시민사회의 상부구조는 현대전의 참호 체계와 같다. 현대전에서는 맹렬한 포격이 적의 방어 체계 전체를 파괴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바깥 표면만 파괴했을 뿐이어서, 공격하고 전진하는 순간 공격자들이 아직 쓸 만한 방어선과 마주치는 일이 있었다. 정치에서도 대공황기에 같은 일이 일어난다. 공격하는 부대는 공황의 효과로 시간과 공간에서 번개처럼 조직되지도 않고, 하물며 공격 정신을 얻지도 않는다. 거꾸로 공격받는 쪽도 폐허 속에서 사기를 잃거나 방어를 포기하지 않으며, 자기 힘과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지도 않는다. 물론 사태가 그대로 머물지는 않는다. 그러나 정치적 카도르나주의[8]의 전략가들이 기대할 법한 신속함, 가속된 시간, 결정적인 전진 행군이라는 요소가 빠진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정치사에서 이런 종류의 마지막 사건은 1917년의 사건들이었다. 그것은 정치 기술과 정치학의 역사에 결정적 전환점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진지전의 방어 체계에 해당하는 시민사회의 요소들이 무엇인지를 「깊이」 연구해야 한다. 일부러 「깊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요소들이 연구되기는 했지만 피상적이고 진부한 관점에서, 마치 어떤 풍속사가들이 여성 유행의 기벽을 연구하듯이, 또는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곧 어떤 현상이든 「현실적으로」 설명되기만 하면 마치 민간 미신처럼(사실 민간 미신도 설명한다고 없어지지는 않지만) 파괴된다는 확신을 품고 연구되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운동 안의 새로운 조류들이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한 문제도 이 문제들의 연관에 이어 붙여야 한다.
전술 방법을 개정하는 일의 첫걸음이 되었어야 할 시도는, L. 다비도비치 브론시테인이 제4차 회의[9]에서 동부 전선과 서부 전선을 견주었을 때 내놓은 견해였다. 앞의 것은 금세 무너졌지만 그 뒤에 전례 없는 투쟁이 이어졌고, 뒤의 것에서는 투쟁이 「먼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었다. 곧 시민사회가 돌격 이전에 저항하느냐 이후에 저항하느냐, 돌격이 어디서 일어나느냐 따위의 문제였다. 그러나 그 문제는 화려한 문학적 형식으로만 제시되었을 뿐, 실천적 성격의 지침은 없었다.
제19권 §24. 이탈리아에서 국민과 근대 국가의 형성과 발전에서 정치적 지도의 문제
[지배와 지적·도덕적 지도]
리소르지멘토의 여러 정치 조류 사이의 연관, 곧 그 조류들의 상호 관계와, 국토의 여러 역사적 부분(또는 구역)에 있던 동질적이거나 종속적인 사회집단들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 전체는 다음과 같은 근본적 사실로 귀착된다. 온건파[10]는 상대적으로 동질적인 사회집단을 대표했고, 그래서 그들의 지도는 상대적으로 제한된 동요만 겪었다(어쨌든 유기적으로 진보하는 발전 노선을 따랐다). 반면 이른바 행동당은 어떤 역사적 계급에도 특별히 기대지 않았고, 그 지도 기관들이 겪은 동요는 결국 온건파의 이익에 맞추어 수습되었다. 곧 역사적으로 행동당은 온건파에게 이끌렸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했다는, 행동당을 「주머니 속에 넣고 있다」는 말이나 그 비슷한 말은 실제로 정확하다. 국왕이 가리발디와 개인적으로 접촉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사실상 행동당이 카보우르와 국왕에게 「간접적으로」 지도되었기 때문이다. 검토의 토대가 되어야 할 방법론적 기준은 이것이다. 한 사회집단의 우위는 두 가지 방식으로, 「지배」로서 그리고 「지적·도덕적 지도」로서 나타난다. 한 사회집단은 자신이 「청산」하거나 무력으로라도 굴복시키려는 적대 집단들에 대해서는 지배하는 집단이고, 가깝고 동맹한 집단들에 대해서는 지도하는 집단이다. 한 사회집단은 통치 권력을 쟁취하기 전에 이미 지도하는 집단일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이것이 권력 쟁취 자체의 주요 조건 가운데 하나다). 그 뒤 권력을 행사할 때에는, 그 권력을 단단히 쥐고 있더라도, 지배하는 집단이 되지만 계속해서 「지도하는」 집단이기도 해야 한다. 온건파는 1870년과 1876년 뒤에도 계속 행동당을 지도했고, 이른바 「트라스포르미스모」[11]는 이 지적·도덕적·정치적 헤게모니 행동의 의회적 표현에 지나지 않았다. 아니, 1848년 이후 이탈리아 국가 생활 전체가 트라스포르미스모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곧 1848년과 신교황파·연방주의 유토피아의 몰락 뒤 온건파가 정해 놓은 틀 안에서 점점 더 넓은 지도 계급을 만들어 내는 일, 동맹 집단들은 물론 화해할 수 없는 적처럼 보이던 적대 집단들에서 나온 활동적 요소들을, 효과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점진적이지만 끊임없이 흡수하는 일로 특징지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적 지도는 지배 기능의 한 측면이 되었다. 적대 집단들의 엘리트를 흡수하는 일은 그 집단들의 목을 베고, 흔히 매우 오랜 기간 그들을 무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온건파의 정치에서 분명히 드러나듯, 권력에 오르기 전에도 헤게모니 활동이 있을 수 있고 또 있어야 하며, 효과적인 지도를 행사하려면 권력이 주는 물질적 힘에만 기대서는 안 된다. 바로 이 문제들을 눈부시게 풀어냈기에 리소르지멘토는 그것이 이루어진 형태와 한계 안에서, 「공포정치」 없이, 「혁명 없는 혁명」으로서, 다시 말해 쿠오코[12]의 표현을 그가 말하려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쓰자면 「수동 혁명」으로서 가능했다.
온건파는 어떤 형태로, 어떤 수단으로 자신들의 지적·도덕적·정치적 헤게모니의 장치(메커니즘)를 세우는 데 성공했는가? 「자유주의적」이라 부를 수 있는 형태와 수단으로, 곧 개인의, 「분자적」, 「사적」 주도로(다시 말해 실천적·조직적 행동에 앞서 계획에 따라 마련되고 구성된 당 강령에 따르지 않고) 그렇게 했다. 게다가 그것은 온건파가 대표하던 사회집단들의 구조와 기능을 생각하면 「정상적인」 일이었다. 온건파는 그 집단들의 지도층이자 유기적 의미의 지식인이었다.
행동당에게 문제는 달리 제기되었고, 다른 조직 체계를 써야 했을 것이다. 온건파는 그들이 표현하던 사회집단들과의 관계가 유기적이었던 덕에 이미 자연스럽게 「응축된」 지식인들이었다(그들 가운데 상당수에게서는 대표되는 자와 대표하는 자의 동일성이 실현되었다. 곧 온건파는 상층 계급의 현실적이고 유기적인 전위였다. 그들 자신이 경제적으로 상층 계급에 속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지식인이자 정치 조직가였고 동시에 기업주, 대농이나 영지 관리인, 상공업 기업가 따위였다). 이 응축 또는 유기적 집중 덕분에 온건파는, 교육과 행정의 필요(아무리 초보적으로만 채워졌다 하더라도)로 반도 전역에 「분산된」, 「분자적」 상태로 존재하던 온갖 등급의 지식인 대중 전체에 「자생적」 방식으로 강력한 흡인력을 행사했다. 여기서 역사적·정치적 연구의 한 기준이 방법론적으로 탄탄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독립된 지식인 계급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회집단은 자신의 지식인층을 갖거나 그것을 만들어 내려 한다. 그러나 주어진 조건에서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진보적인 계급의 지식인들은 강한 흡인력을 행사해서, 결국 다른 사회집단의 지식인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키고, 그리하여 심리적(허영 따위) 유대와 흔히 신분적(기술·법률적, 동업조합적 따위) 유대로 모든 지식인 사이에 연대의 체계를 만들어 내기에 이른다.
이 일은 주어진 사회집단이 실제로 진보적인 역사 시기에, 곧 그 집단이 자신의 생존 요구를 채울 뿐 아니라 경제·생산 활동의 새로운 영역을 끊임없이 장악하며 자신의 틀을 계속 넓혀서 사회 전체를 실제로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시기에 「자생적으로」 일어난다. 지배적 사회집단이 자신의 기능을 다하자마자 이데올로기적 블록은 무너지기 시작하고, 그러면 「자생성」 대신 「강제」가 점점 덜 감추어지고 덜 간접적인 형태로 들어설 수 있다. 결국 본격적인 경찰 조치와 쿠데타에까지 이른다.
행동당은 그 본성상 이런 흡인력을 가질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이끌리고 영향을 받았다. 한편으로는 위협의 분위기(1848~1849년 프랑스의 사건들로 더 강해진, 공포정치의 1793년에 대한 공포) 때문에 특정한 민중적 요구(예컨대 토지 개혁)를 강령에 받아들이기를 망설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가장 큰 인물들 가운데 몇몇(가리발디)이 비록 간헐적이기는 해도(동요) 온건파 지도자들과 개인적으로 종속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행동당이 자율적 세력이 되어, 결국 적어도 리소르지멘토 운동에 더 뚜렷하게 민중적이고 민주적인 성격을 새기는 데 성공하려면(운동 자체의 근본 전제를 생각하면 아마 그 이상은 갈 수 없었을 것이다), 온건파의 「경험적」 활동(그것은 목적에 완벽하게 들어맞았으니 말로만 경험적이었다)에 맞서, 민중 대중, 무엇보다 농민의 핵심 요구를 반영하는 유기적인 통치 강령을 내세웠어야 했다. 온건파가 행사한 「자생적 흡인」에 맞서, 계획에 따라 「조직된」 저항과 반격을 내세웠어야 했다.
온건파의 자생적 흡인의 전형적 사례로는 「가톨릭 자유주의」 운동의 형성과 발전을 떠올려야 한다. 이 운동은 교황청에 큰 충격을 주어 그 움직임을 어느 정도 마비시켰고, 교황청의 사기를 꺾었다. 처음에는 교황청을 지나치게 왼쪽으로 밀어붙였고(비오 9세의 자유주의적 몸짓), 다음에는 교황청을 그것이 차지할 수도 있었던 자리보다 더 오른쪽으로 몰아넣어 결국 반도와 유럽에서 고립되게 했다. 교황청은 그 뒤 교훈을 얻었음을 보여 주었고, 최근에는 눈부시게 책략을 부릴 줄 알게 되었다. 먼저는 근대주의, 다음에는 인민주의가 리소르지멘토의 가톨릭 자유주의 운동과 비슷한 운동인데, 이는 대부분 한편으로는 상층 계급 세속 지식인들의 근대 역사주의가, 다른 한편으로는 실천철학의 실천 운동이 행사한 자생적 흡인력 덕분이었다. 교황청은 교회와 가톨릭 종교를 개혁하려는 경향으로서의 근대주의는 쳤지만, 인민주의, 곧 근대주의의 경제·사회적 토대는 발전시켰고, 오늘날 비오 11세 아래에서 그것을 자신의 세계 정책의 지렛대로 삼고 있다.
반면 행동당은 구체적인 통치 강령조차 갖추지 못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무엇보다도 온건파에게 봉사하는 선동·선전 기구였다. 행동당의 내부 불화와 갈등, 마치니가 가장 용맹한 행동가들(가리발디, 펠리체 오르시니 등)에게서 자기 인격과 활동에 대해 불러일으킨 끔찍한 증오는 확고한 정치적 지도가 없었기 때문에 생겨났다. 내부 논쟁은 대부분 마치니의 설교만큼이나 추상적이었지만, 거기서 쓸모 있는 역사적 시사를 얻을 수 있다(무엇보다 피사카네의 글들이 그렇다. 물론 피사카네는 로마 공화국에서 가리발디의 군사 독재에 반대한 것처럼 돌이킬 수 없는 정치적·군사적 오류를 저질렀다). 행동당은 이탈리아 문학의 수사적 전통에 젖어 있었다. 그것은 반도에 존재하던 문화적 통일, 그러나 주민의 아주 얇은 층에 국한되고 바티칸의 코즈모폴리터니즘에 오염된 그 통일을, 그 문화 전통과 무관했고 설령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거대한 민중 대중의 정치적·영토적 통일과 혼동했다. 자코뱅과 행동당을 견주어 볼 수 있다. 자코뱅은 도시와 농촌의 연계를 확보하려고 끈질기게 싸웠고 승리를 거두었다. 특정한 당으로서 그들의 패배는 어느 시점에 그들이 파리 노동자들의 요구와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은 나폴레옹에 의해, 그리고 오늘날에는 아주 초라하게 에리오와 달라디에의 급진사회당에 의해 다른 형태로 이어졌다.
프랑스 정치 문헌에서는 도시(파리)를 농촌과 이어야 한다는 필요가 언제나 생생하게 느껴지고 표현되었다. 이탈리아에서도 널리 읽힌 외젠 쉬의 연작 소설을 떠올리기만 하면 된다(포가차로는 『옛날의 작은 세계』에서 프랑코 마이로니가 스위스에서 『민중의 신비』의 분책을 몰래 받아 보는 모습을 그리는데, 이 책은 빈 같은 몇몇 유럽 도시에서 사형 집행인의 손으로 불태워졌다). 이 소설들은 농민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을 파리와 이어야 한다고 유난히 끈질기게 역설한다. 그리고 쉬는 자코뱅 정치 전통의 대중 소설가였으며, 여러 면에서(나폴레옹 전설, 반교권주의와 반예수회주의, 소부르주아적 개량주의, 형벌 이론 따위) 에리오와 달라디에의 「요람기 판본」이었다. 행동당이 마치니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언제나 은연중에 반프랑스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라 크리티카』 1929년 223쪽 이하에 실린 오모데오의 논문 「프랑스의 우위와 이탈리아의 주도」를 볼 것). 그러나 행동당은 반도의 역사 속에서 거슬러 올라가 이어 붙을 전통을 갖고 있었다. 코무네의 역사에는 이 문제에 관한 경험이 풍부하다. 갓 태어난 부르주아지는 제국과 지방 봉건 세력에 맞서 농민들 가운데서 동맹자를 찾는다(물론 값싼 노동력을 두고 부르주아와 귀족이 다툰 탓에 문제는 복잡해진다. 부르주아는 풍부한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것은 농촌 대중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지만, 귀족은 농민을 토지에 묶어 두려 했다. 그래서 농민이 도시로 달아났고, 도시에서는 귀족이 그들을 붙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다른 상황에서도 코무네 문명의 발전에서는 지도적 요소로서의 도시의 기능이, 농촌 내부의 갈등을 깊게 하고 그것을 봉건제를 무너뜨리는 정치·군사적 도구로 쓰는 도시의 기능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탈리아 지도 집단들에게 가장 고전적인 정치술의 스승인 마키아벨리 역시, 물론 그 시대의 용어와 관심사 안에서, 이 문제를 제기했다. 마키아벨리의 정치·군사 저작들에서는 용병대를 없앨 수 있는 국민 민병대를 만들려면 민중 대중을 지도층에 유기적으로 종속시켜야 한다는 필요가 꽤 잘 보인다. 카를로 피사카네는 아마 마키아벨리의 이 흐름에 이어져 있을 것이다. 그에게 민중의 요구를 (선전으로 그것을 불러일으킨 뒤에) 채워 주는 문제는 주로 군사적 관점에서 보였다. 피사카네에 관해서는 그의 구상의 몇 가지 이율배반을 분석해야 한다. 나폴리 귀족 피사카네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전쟁 경험이 유통시킨 일련의 정치·군사 개념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개념들은 조제프 보나파르트와 조아키노 뮈라의 치세에 나폴리로 옮겨 심어졌지만, 무엇보다 나폴레옹 휘하에서 복무한 나폴리 장교들의 생생한 경험을 통해 전해졌다(M. 미시롤리가 『누오바 안톨로지아』 [1929년 3월 1일]에 쓴 카도르나 추모 글은, 이 나폴리의 군사 경험과 전통이 예컨대 피아넬을 통해 1870년 이후 이탈리아군의 재편에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강조한다). 피사카네는 민주적 정치 없이는 징병제에 기초한 국민군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지만, 가리발디의 전략에 대한 그의 반감과 가리발디에 대한 불신은 설명할 수 없다. 그는 가리발디에 대해, 구체제의 참모본부들이 나폴레옹에 대해 지녔던 것과 같은 경멸적 태도를 지닌다.
리소르지멘토의 이런 문제들을 위해 가장 연구해야 할 인물은 주세페 페라리다. 다만 그의 이른바 주요 저작들, 뒤죽박죽이고 혼란스러운 진짜 잡록들보다는 시사 소책자와 편지들에서 연구해야 한다. 그러나 페라리는 대체로 이탈리아의 구체적 현실 바깥에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프랑스화되어 있었다. 그의 판단은 흔히 실제보다 더 예리해 보이는데, 그가 이탈리아보다 훨씬 앞선 상황을 반영하는 프랑스의 도식을 이탈리아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페라리는 이탈리아에 대해 「후대 사람」의 처지에 있었고, 그의 지혜는 어떤 의미에서 「뒤늦은 지혜」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정치가는 실제적이고 현재적인 실현자여야 한다. 페라리는 이탈리아의 상황과 프랑스의 상황 사이에 중간 고리가 빠져 있으며, 다음 고리로 넘어가려면 바로 이 고리를 이어 붙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보지 못했다. 페라리는 프랑스어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할 줄 몰랐고, 그래서 그의 「예리함」 자체가 혼란의 요소가 되어 새로운 종파와 소학파를 낳았을 뿐 현실 운동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문제를 깊이 파고들면, 여러 면에서 행동당의 많은 사람과 온건파의 차이는 유기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의 차이라기보다 「기질」의 차이였음이 드러난다. 「자코뱅」이라는 말은 결국 두 가지 뜻을 갖게 되었다. 하나는 본래의 뜻, 역사적으로 특징지어진 뜻으로, 프랑스 혁명의 특정한 당을 가리킨다. 이 당은 프랑스 생활의 전개를 특정한 방식으로, 특정한 강령에 따라, 특정한 사회 세력을 토대로 구상했고, 극도의 에너지와 결단과 단호함을 특징으로 하는 특정한 방법으로 당과 정부의 행동을 펼쳤다. 그 단호함은 그 강령과 그 방법이 옳다는 광신적 믿음에서 나왔다. 정치 언어에서는 자코뱅주의의 두 측면이 갈라졌고, 자기 사상이 무엇이든 그 사상의 기적적 힘을 광신적으로 확신하기에 정력적이고 단호하며 광신적인 정치가를 「자코뱅」이라 불렀다. 이 정의에서는 민중 대중의 요구를 자기 것으로 삼은 데서 나온 건설적 요소보다 적수와 적에 대한 증오에서 나온 파괴적 요소가, 국민적 정치 요소보다 종파적이고 비밀 결사 같고 소집단적이며 고삐 풀린 개인주의적 요소가 우세했다. 그래서 크리스피가 자코뱅이었다는 글을 읽을 때는 이 나쁜 뜻으로 그 말을 이해해야 한다. 강령으로 보면 크리스피는 순전한 온건파였다. 그의 가장 고귀한 자코뱅적 「강박」은 나라의 정치적·영토적 통일이었다. 이 원칙은 좁은 의미의 리소르지멘토 시기뿐 아니라 그 뒤 그가 정부에 참여한 시기에도 언제나 그의 나침반이었다. 몹시 격정적인 그는 온건파를 사람으로서 증오한다. 그는 온건파에게서 마지막 순간에야 나선 사람들, 「여섯째 날의 영웅들」, 구체제가 입헌제로 바뀌기만 했으면 구체제와 화해했을 사람들, 토스카나 온건파처럼 대공이 달아나지 못하게 그 옷자락에 매달렸던 사람들을 본다. 그는 통일주의자가 아닌 자들이 만든 통일을 거의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왕조의 이유로 단호하게 통일주의적일 것임을 아는 군주제와 손잡고, 피에몬테 정치가들 자신에게도 없던 에너지와 열정으로 피에몬테 헤게모니의 원칙을 받아들인다. 카보우르는 남부를 계엄령으로 다스리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크리스피는 파시 운동 때문에 시칠리아에 곧바로 계엄령과 군사 법정을 세우고, 파시 지도자들이 시칠리아 분리를 위해 영국과 음모를 꾸몄다고 고발한다(비사퀴노 가짜 조약). 그는 시칠리아 대지주들과 긴밀히 손잡는다. 농민의 요구를 두려워하는 그들이 가장 통일주의적인 계층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의 일반 정책은 프랑스와의 관세 전쟁과 보호관세로 북부의 산업주의를 강화하려 한다. 그는 나라에 현실적 독립을 줄 수 있고 지배적 사회집단의 틀을 넓힐 산업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면 남부와 섬들을 무시무시한 상업 위기에 빠뜨리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것은 공장주를 만들어 내는 정책이다. 1861년부터 1876년까지의 우파 정부는 경제 발전을 위한 일반적 외부 조건만 소심하게 만들었을 뿐이다. 정부 기구 정비, 도로, 철도, 전신을 갖추고, 리소르지멘토 전쟁의 빚에 짓눌린 재정을 바로잡았다. 좌파는 우파의 일방적 조세주의가 민중에게 불러일으킨 증오를 누그러뜨리려 했지만 안전밸브 노릇밖에 하지 못했다. 좌파는 좌파의 사람과 문구로 우파의 정책을 이어 갔다. 반면 크리스피는 새로운 이탈리아 사회를 실제로 한 걸음 앞으로 밀어냈고, 새로운 부르주아지의 진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사실과 말 사이, 탄압과 탄압 대상 사이, 도구와 가한 타격 사이의 불균형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녹슨 구식 포를 현대식 대포처럼 다루었다. 크리스피의 식민 정책도 그의 통일 강박과 이어져 있으며, 이 점에서 그는 남부의 정치적 순진함을 이해할 줄 알았다. 남부 농민은 토지를 원했고, 이탈리아 안에서는 그것을 주려 하지 않았던(그리고 줄 수 없었던), 「경제적 자코뱅주의」를 하려 하지 않았던 크리스피는 개척할 식민지 땅이라는 신기루를 내보였다. 크리스피의 제국주의는 아무런 경제·금융적 토대 없는, 격정적이고 웅변적인 제국주의였다. 수단이 풍부하고 이윤율이 하락 경향을 보이기 시작하는 지점에 이른 자본주의 유럽은 수익성 있는 투자의 팽창 영역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1890년 이후 거대한 식민 제국들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아직 미숙한 이탈리아는 수출할 자본이 없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지극히 빠듯한 필요를 위해서도 외국 자본에 기대야 했다. 그러므로 이탈리아 제국주의에는 현실적 추진력이 없었고, 그 자리를 토지 소유를 향해 맹목적으로 내달리는 농촌 주민의 민중적 열정이 대신했다. 그것은 해결해야 할 국내 정치의 필요를, 그 해결을 끝없이 비켜 가게 하는 방식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그래서 크리스피의 정책은 아프리카에 쓴 막대한 돈이 이탈리아에 투자되기를 더 바랐을 (북부) 자본가들 자신에게서도 반대를 받았다. 그러나 남부에서 크리스피는 「손쉬운 토지」라는 「신화」를 만들어 내 인기를 얻었다.
크리스피는 시칠리아 지식인의 넓은 집단에 강한 자국을 남겼다(특히 그렇다는 것이고, 그는 모든 이탈리아 지식인에게 영향을 주어 나중에 거세게 발전할 국민사회주의의 첫 세포들을 만들어 냈다). 그는 분리주의 냄새가 나는 모든 것에 대한 항구적인 의심의 분위기를 낳은 통일 광신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1920년 시칠리아 대지주들이 팔레르모에 모여 「로마」 정부에 분리를 위협하는 진짜 최후통첩을 내놓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 대지주들 가운데 여럿이 에스파냐 국적을 계속 유지하면서 퇴역 군인 농민들의 소요로 위협받는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고 마드리드 정부의 외교적 개입을 끌어낸 일(1919년 비보나 공작 사건)도 막지 못했다. 1919년부터 1926년까지 남부 여러 사회집단의 태도는 크리스피의 강박적 통일 노선의 몇몇 약점을 드러내고, 졸리티가 거기에 가한 몇몇 수정을 부각한다(실제로 그 수정은 많지 않았다. 졸리티는 본질적으로 크리스피의 궤도 안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졸리티는 크리스피의 기질적 자코뱅주의 대신 관료적 근면과 연속성을 들여왔다. 그는 식민 정책에서 「토지의 신기루」를 유지했지만, 거기에 「방어적」 군사 구상과 미래를 위해 팽창의 자유를 위한 조건을 만들어야 한다는 전제를 더해 이 정책을 떠받쳤다).
1920년 시칠리아 대지주들의 최후통첩 사건은 고립된 일이 아니다. 롬바르디아 상층 계급이 때때로 옛 밀라노 공국을 재건해 「스스로 해 나가겠다」고 위협했던 선례(정부에 대한 일시적 협박 정책)를 생각하면 다른 해석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1919년부터 스카르폴리오 형제가 축출될 때까지 『일 마티노』가 벌인 캠페인에서 그 진정한 해석을 찾을 수 있다. 그 캠페인을 완전히 허공에 뜬 것으로, 곧 강박적 통일주의가 만든 위협의 분위기 탓에 땅 밑에 잠복해 있던 잠재적 여론 조류와 정서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한 생각일 것이다. 『일 마티노』는 두 차례에 걸쳐 다음과 같은 논지를 폈다. 남부는 계약적 토대, 곧 알베르토 헌장 위에서 이탈리아 국가의 일부가 되었지만, (암묵적으로) 사실상의 현실적 인격을 계속 간직하고 있으며, 그 계약적 토대가 어떤 식으로든 훼손되면, 곧 1848년 헌법이 바뀌면 단일 국가의 결속에서 벗어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논지는 1919~1920년에는 어떤 방향의 헌법 변경에 맞서 전개되었고, 1924~1925년에는 다른 방향의 변경에 맞서 다시 제기되었다. 『일 마티노』가 남부에서 지닌 중요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우선 그것은 가장 널리 읽힌 신문이었다). 『일 마티노』는 언제나 크리스피파이자 팽창주의자였으며, 토지에 대한 굶주림과 이민의 고통이 만들어 낸, 온갖 막연한 이주 식민주의로 기우는 남부 이데올로기에 기조를 부여했다. 『일 마티노』에 관해서는 또한 다음을 떠올려야 한다. 1) 롬바르디아 섬유업자들이 남부의 몇몇 면직 공장을 손에 넣으려던 시도를 둘러싼 북부에 대한 격렬한 캠페인. 그 시도는 산업 지대 입법을 피하려고 기계를 고철로 위장해 롬바르디아로 옮기려던 단계에까지 이르렀으나, 바로 이 신문이 그것을 막았고, 신문은 부르봉 왕가와 그 경제 정책을 찬양하기까지 했다(1923년의 일이다). 2) 1925년에 마리아 소피아를 「애통하고」 「향수에 젖어」 추모해 물의와 추문을 일으킨 일.
『일 마티노』의 이런 태도를 평가하려면 몇 가지 방법적 점검 요소를 고려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스카르폴리오 형제의 모험가 기질과 돈에 팔리는 성격이 그것이다(마리아 소피아는 복수심에서, 아니면 나폴리 왕국을 복원할 희망으로, 의심할 여지 없이 돈까지 써 가며 이탈리아 국내 정치에 끊임없이 개입하려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914년인가 1915년에 『루니타』에는 에리코 말라테스타를 공격하는 짧은 기사가 실렸는데, 말라테스타와 마리아 소피아 사이의 「우정」 관계가 결코 끊긴 적이 없는 듯하므로 1914년 6월의 사건들이 치타 디 보르보네를 통해 오스트리아 참모본부의 후원과 자금을 받았을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B. 크로체는 『옛 이탈리아의 사람과 일』에서, 테러를 저지른 한 아나키스트를 탈옥시키려던 시도와 관련해 이 관계를 다시 다루는데, 그 시도 뒤 이탈리아 정부는 마리아 소피아의 이런 활동을 멈추게 하려고 프랑스 정부에 외교 교섭을 했다. 또 1919년 전 왕비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그녀를 찾아갔던 B. 부인이 들려준 마리아 소피아에 관한 일화들도 떠올릴 것. 끝으로 말라테스타는 마땅히 그래야 했는데도 이런 비난에 한 번도 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P. 스키키가 프랑스에서 찍어 낸 『일 피코니에레』라는 지하 소신문에 보낸 편지에서 답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예외지만, 그것은 매우 의심스럽다), 그리고 스카르폴리오 형제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아마추어리즘이 그것이다. 그러나 『일 마티노』가 남부에서 가장 널리 읽힌 신문이었고, 스카르폴리오 형제가 타고난 기자들, 곧 황색 언론의 보급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깊은 민중적 정념의 조류를 재빨리 「공감적으로」 직관하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해야 한다.
크리스피의 강박적 통일 정책이 실제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지녔는지를 가늠할 또 하나의 요소는 북부에서 남부에 대해 형성된 감정의 복합체다. 남부의 「빈곤」은 북부 민중 대중에게는 역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통일이 평등의 토대 위에서가 아니라 도시와 농촌이라는 영토적 관계 속에서 남부에 대한 북부의 헤게모니로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곧 북부가 구체적으로 남부를 희생시켜 살찌는 「문어」였고 북부의 경제·산업적 성장이 남부 경제와 농업의 빈곤화와 직접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북이탈리아의 서민은 오히려, 남부가 부르봉 체제가 근대적 발전에 걸어 놓았던 족쇄에서 풀려난 뒤에도 진보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빈곤의 원인이 객관적 경제·정치 조건에서 찾아야 할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남부 주민에게 타고난 내적인 것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했다. 땅이 자연적으로 매우 풍요하다는 확신이 뿌리 깊었던 만큼 더욱 그러했다. 남은 설명은 하나뿐이었다. 사람들의 유기적 무능, 그들의 야만, 생물학적 열등이다. 이미 퍼져 있던 이런 견해(나폴리의 「라차로니」 기질은 오래된 전설이었다)는 실증주의 사회학자들(니체포로, 세르지, 페리, 오라노 등)에 의해 굳어지고 아예 이론화되어, 과학에 대한 미신의 시대에 「과학적 진리」의 힘을 얻었다. 그리하여 인종에 관한, 북부와 남부의 우열에 관한 남북 논쟁이 벌어졌다(이런 관점에서 남부를 옹호한 N. 콜라얀니의 책들과 『리비스타 포폴라레』 전집을 볼 것). 그러는 동안 북부에는 남부가 이탈리아의 「납덩이」라는 믿음, 이 「납덩이」가 없었다면 북이탈리아의 근대 산업 문명이 더 크게 진보했으리라는 확신 따위가 남았다. 세기 초에 이 영역에서도 남부의 강한 반발이 시작된다. 루주 장군이 의장을 맡아 열린 1911년 사르데냐 대회에서는 통일 국가의 처음 50년 동안 본토를 위해 사르데냐에서 몇억이 뜯겨 나갔는지를 계산한다. 살베미니의 캠페인은 『루니타』 창간으로 절정에 이르렀지만 이미 『라 보체』에서 벌어지고 있었다(「남부 문제」에 관한 『라 보체』 특별호를 볼 것. 나중에 소책자로 다시 찍혔다). 사르데냐에서는 움베르토 카우의 지도 아래 자치 운동이 시작되었고, 이 운동은 『일 파에세』라는 일간지까지 가졌다. 이 세기 초에는 또 B. 크로체와 주스티노 포르투나토를 우두머리로 한 일종의 「범이탈리아적」 「지식인 블록」이 이루어져, 남부 문제를 정치·의회 생활을 쇄신할 수 있는 국민적 문제로 내세우려 한다. 자유민주주의 경향을 지니고 예술, 문학, 정치 등 모든 분야에서 국민의 생활과 문화를 새롭게 하고 촌티를 벗기려는 젊은이들의 잡지라면 어디서나 크로체와 포르투나토의 영향뿐 아니라 그들의 기고가 나타난다. 『라 보체』와 『루니타』가 그렇고, 볼로냐의 『라 파트리아』, 밀라노의 『아치오네 리베랄레』, 조반니 보렐리가 이끈 자유주의 청년 운동 따위도 그렇다. 이 블록의 영향은 알베르티니의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정치 노선을 정하는 데서 길을 트고, 전후에는 새로운 상황에 따라 『라 스탐파』(코스모, 살바토렐리, 그리고 암브로시니를 통해)와 졸리티주의에서, 크로체가 마지막 졸리티 정부에 입각하면서 나타난다.
분명 매우 복잡하고 다면적인 이 운동에 대해서는 오늘날 그 자신이 이 운동의 전형적 화신이었던 G. 프레촐리니조차 편향된 해석을 내놓는다. 그러나 프레촐리니 자신의 『이탈리아 문화』 초판(1923)이, 특히 그 생략들과 함께, 진정한 문헌으로 남아 있다.
이 운동은 최고점까지 발전하는데, 그 최고점은 동시에 해체점이기도 하다. 이 지점은 P. 고베티의 독특한 입장과 그의 문화적 기획에서 찾아야 한다. 조반니 안살도(그리고 「칼칸테」, 곧 프란체스코 치코티 같은 그의 협력자들)가 귀도 도르소를 상대로 벌인 논쟁은 이 도달점과 귀결점을 가장 잘 보여 주는 문헌이다. 강박적 통일주의의 검투사 같은 위협적 태도에서 이제는 뚜렷이 보이는 희극성 때문에도 그렇다(1925~1926년에 안살도가 나폴리에 부르봉 왕가가 돌아올 수 있다고 사람들이 믿게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이 문제의 모든 전사와 논쟁이 「입문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암시와 수수께끼 같은 언급으로 오가던 지하 통로를 알지 못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보일 것이다. 그렇지만 오리아니를 읽은 일부 민중적 요소들 사이에서도 당시 나폴리에서 부르봉 왕정복고가, 따라서 단일 국가 결속의 더 광범위한 해체가 가능하다는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통일 이후 이탈리아사의 몇몇 요소에 대한 이런 일련의 관찰과 분석에서, 온건파와 행동당 사이의 대립을 평가하고, 이 두 당의, 그리고 그 가운데 뒤의 당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지도를 두고 다툰 여러 조류의 서로 다른 정치적 「지혜」를 탐구하기 위한 몇 가지 기준을 끌어낼 수 있다. 온건파에 효과적으로 맞서려면 행동당은 농촌 대중, 특히 남부의 농촌 대중과 결합해야 했고, 외적인 「형식」이나 기질에서뿐 아니라 무엇보다 경제·사회적 내용에서 「자코뱅」이어야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정통왕조파·교권파 지식인층들을 통해 반동 블록으로 실현되던 여러 농촌 계급의 결합은 두 방향으로 힘을 쓸 때에만 해체되어 새로운 자유주의·국민적 형성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하나는 밑바닥 농민에게 힘을 쓰는 것으로, 그들의 기본 요구를 받아들여 새 통치 강령의 필수적 부분으로 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하층 지식인에게 힘을 쓰는 것으로, 그들을 결집하고 그들의 관심을 가장 끌 수 있는 동기를 강조하는 것이다(새 정부 기구가 만들어진다는 전망과 그것이 주는 취업 가능성만으로도, 그 전망이 농촌 주민의 열망에 기대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면, 그들에게는 엄청난 흡인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이 두 행동의 관계는 변증법적이고 상호적이었다. 많은 나라의 경험, 무엇보다 대혁명기 프랑스의 경험이 보여 주었듯, 농민이 「자생적」 충동으로 움직이면 지식인들이 동요하기 시작하고, 거꾸로 한 무리의 지식인이 구체적인 친농민 정책이라는 새로운 토대 위에 서면 그들은 점점 더 중요한 대중의 분파들을 끌고 가게 된다. 다만 농촌 주민의 분산과 고립, 그리고 그래서 그들을 튼튼한 조직으로 결집하기 어렵다는 점을 생각하면, 운동은 지식인 집단에서 시작하는 것이 낫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두 행동 사이의 변증법적 관계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좁은 의미의 농민 정당은 만들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농민 정당은 대체로 관료적 편성이라는 도식적 형태가 아니라 강한 여론 조류로서만 실현된다. 그렇지만 조직의 뼈대만이라도 있다는 것은 엄청나게 유용하다. 사람들을 어느 정도 선별하기 위해서도, 지식인 집단을 통제하고 신분적 이해 때문에 그들이 어느새 다른 지반으로 옮겨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도 그렇다.
이 기준들은 행동당에서 농업 문제의,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은 「전문가」였던 주세페 페라리의 인물됨을 연구할 때 염두에 두어야 한다. 페라리에게서는 또한 농업 날품팔이, 곧 땅 없이 그날그날 벌어먹는 농민에 대한 태도를 잘 연구해야 한다. 그는 이들 위에 자기 이데올로기의 상당 부분을 세우며, 그 때문에 지금도 특정 조류들이 그를 찾고 읽는다(모난니가 루이지 파브리의 서문을 붙여 다시 펴낸 페라리의 저작들). 날품팔이 문제가 매우 어렵고 오늘날에도 풀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다음 기준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날품팔이는 오늘날에도 대부분, 그러니 리소르지멘토 시기에는 더욱더, 집중된 자본과 분업을 갖춘 발달한 농업 산업의 노동자가 아니라 그저 땅 없는 농민이다. 리소르지멘토 시기에는 임시 고용 노동자보다 연간 계약에 묶인 노동자 유형이 눈에 띄게 더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심리는 마땅한 예외를 빼면 소작인이나 소농의 심리와 같다(1917년 말이나 1918년 초, 당시 내걸린 「농민에게 토지를」이라는 공식의 실현을 두고 상원의원 타나리와 바시니가 『일 레스토 델 카를리노』와 『라 페르세베란차』에서 벌인 논쟁을 떠올려야 한다. 타나리는 찬성, 바시니는 반대였다. 바시니는 대농업 기업가로서의 경험, 분업이 이미 크게 진전되어 장인 농민이 사라지고 근대 노동자가 나타난 탓에 토지를 나눌 수 없게 된 농업 기업의 소유주로서의 경험에 근거했다). 이 문제는 농업 노동의 장인적 성격이 너무 뚜렷한 남부보다는, 그것이 더 가려져 있는 포 계곡에서 첨예하게 제기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도 포 계곡에서 날품팔이 문제가 첨예했던 것은 부분적으로 「경제 외적」 원인 때문이었다. 1) 남부처럼 이민으로 출구를 찾지 못하고 공공사업 정책으로 인위적으로 유지된 과잉 인구. 2) 노동 인구가 날품팔이와 분익 소작인의 단일 계급으로 굳어지기를 원하지 않은 지주들의 정책. 그들은 분익 소작과 직영을 번갈아 쓰면서, 이 번갈아 쓰기를 자신들의 동맹자가 될 특권적 분익 소작인을 더 잘 선별하는 데 이용했다(포 지역의 지주 대회마다 분익 소작이 나은지 직영이 나은지가 늘 논의되었고, 그 선택이 정치·사회적 동기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분명했다). 리소르지멘토 시기에 포 계곡의 날품팔이 문제는 무시무시한 빈민화 현상의 형태로 나타났다. 경제학자 툴리오 마르텔로가 1871~1872년에 쓴 『인터내셔널의 역사』에서도 그렇게 보았는데, 이 저작은 앞 시기의 정치적 입장과 사회적 우려를 반영하므로 염두에 두어야 한다.
페라리의 입장은 그의 「연방주의」 때문에 더 약해진다. 그 연방주의는 특히 프랑스에 살던 그에게서는 프랑스의 국민적·국가적 이익의 반영으로 더욱 비쳤다. 프루동과, 프랑스의 국가적 이익과 민주주의라는 공언된 관점에서 이탈리아 통일을 공격한 그의 팸플릿들을 떠올려야 한다. 실제로 프랑스 정치의 주요 조류들은 이탈리아 통일에 격렬히 반대했다. 지금도 왕당파(뱅빌 무리)는 두 나폴레옹이 국민주의 신화를 만들어 내고 그것이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실현되도록 거들어 프랑스의 상대적 위상을 낮추었다고 소급해서 「비난」한다. 프랑스가 「안전」하려면 스위스 같은 작은 나라들의 먼지 구름에 둘러싸여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1848년 이후 온건파가 자신들의 헤게모니 아래 국민 블록을 형성한 것은, 그런 일반적 공식의 구체적 정치 내용은 고려하지 않은 채, 바로 「독립과 통일」이라는 구호 위에서였다. 그들은 행동당의 두 최고 지도자 마치니와 가리발디에게 서로 다른 형태와 정도로 영향을 미쳤다. 온건파가 알맹이에서 껍데기로 관심을 돌리게 하는 데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다른 많은 예 가운데 게라치가 시칠리아의 한 학생에게 보낸 편지의 다음 표현이 보여 준다(에우제니오 데 카를로가 『아르키비오 스토리코 시칠리아노』에 펴낸 F. D. 게라치와 리엘라의 공증인 프란체스코 파올로 사르도폰타나의 서한집, 『일 마르초코』 1929년 11월 29일 자 요약). “무엇을 바라든, 전제정이든 공화정이든 다른 무엇이든, 우리끼리 갈라서려 하지 맙시다. 이 축만 있으면, 세상이 무너져도 우리는 길을 다시 찾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치니의 활동 전체는 구체적으로 보면 통일에 대한 끊임없고 항구적인 설교로 요약되었다.
[자코뱅과 행동당]
자코뱅주의와 행동당에 관해 맨 앞에 놓아야 할 요소는 이것이다. 자코뱅은 가차 없는 투쟁으로 지도하는 당으로서의 기능을 쟁취했다. 그들은 실제로 프랑스 부르주아지에게 자신을 「강요」했고, 부르주아지를 처음에 더 강했던 부르주아 핵심부가 「자생적으로」 차지하려 했을 자리보다 훨씬 앞선 자리로, 역사적 전제들이 허용해야 했을 자리보다도 훨씬 앞선 자리로 이끌었다. 그 때문에 반동의 역류와 나폴레옹 1세의 기능이 생겨났다. 자코뱅주의(그러나 그 전에는 크롬웰과 「원두당」)의, 따라서 대혁명 전체의 이 특징, 곧 극도로 정력적이고 단호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겉보기에) 상황을 억지로 밀어붙이고, 부르주아들의 엉덩이를 걷어차 앞으로 내몰며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을 만들어 내는 이 특징은 다음과 같이 「도식화」할 수 있다. 제3신분은 신분들 가운데 가장 이질적이었다. 그것은 매우 잡다한 지식인 엘리트와, 경제적으로는 매우 앞섰지만 정치적으로는 온건한 집단을 갖고 있었다. 사건의 전개는 가장 흥미로운 과정을 따른다. 제3신분의 대표들은 처음에는 그 사회집단을 지금 실제로 이루는 구성원들에게 관련된 문제, 곧 그들의 직접적인 「동업조합적」 이익(동업조합적이라는 말을 전통적 의미로, 곧 특정 범주의 좁은 의미의 직접적이고 이기적인 이익이라는 뜻으로)만을 제기한다. 실제로 혁명의 선구자들은 큰소리는 치지만 실제로는 아주 조금만 요구하는 온건한 개혁가들이다. 차츰 「동업조합적」 개혁에만 관심을 두지 않고 부르주아지를 모든 민중 세력의 헤게모니 집단으로 구상하려는 새로운 엘리트가 선별되는데, 이 선별은 두 요인의 작용으로 일어난다. 옛 사회 세력의 저항과 국제적 위협이다. 옛 세력은 아무것도 양보하려 하지 않으며, 무언가를 양보한다면 시간을 벌고 반격을 준비하려는 의도로 그렇게 한다. 혁명 과정의 모든 「중간」 정지에 반대하고, 끈질기게 살아남는 옛 사회의 요소들뿐 아니라 어제는 혁명가였으나 오늘은 반동이 된 자들까지 단두대로 보낸 자코뱅의 정력적 행동이 없었다면, 제3신분은 이 잇따른 「덫」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코뱅은 진행 중인 혁명의 유일한 당이었다. 그들은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이루던 현재의 실제 사람들의 직접적 필요와 열망을 대표했을 뿐 아니라, 혁명 운동을 전체로서, 온전한 역사적 발전으로서 대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미래의 필요까지, 그리고 다시 말하지만 그 특정한 실제 사람들만이 아니라 기존의 기본 집단에 동화되어야 할 모든 국민 집단의 필요까지 대표했다. 편향되고 근본적으로 반역사적인 한 조류에 맞서, 자코뱅은 추상론자가 아니라 마키아벨리식 현실주의자였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그들은 평등, 우애, 자유라는 공식의 절대적 진리를 확신했고, 더 중요한 것은 자코뱅이 일깨워 투쟁으로 이끈 거대한 민중 대중이 그 진리를 확신했다는 점이다. 자코뱅의 언어, 그들의 이데올로기, 그들의 행동 방법은 시대의 요구를 완벽하게 반영했다. 비록 「오늘날」, 다른 상황에서 한 세기 넘는 문화적 가공을 거친 뒤에는 「추상적」이고 「광란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해도 말이다. 물론 그것들은 프랑스 문화 전통에 따라 그 요구를 반영했다. 그 증거는 『신성 가족』[13]에 나오는 자코뱅 언어의 분석, 그리고 자코뱅의 법률·정치 언어와 독일 고전철학의 개념들을 서로 나란하고 서로 번역할 수 있는 것으로 놓은 헤겔의 인정이다. 독일 고전철학은 오늘날 최대의 구체성을 지닌 것으로 인정되며 근대 역사주의를 낳았다. 첫째 요구는 적대 세력을 섬멸하거나 적어도 무력하게 만들어 반혁명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둘째 요구는 부르주아지 그 자체의 틀을 넓히고 그것을 모든 국민 세력의 우두머리에 세우는 것, 모든 국민 세력에 공통된 이익과 요구를 확인해 이 세력들을 움직이고 투쟁으로 이끌어 두 가지 결과를 얻는 것이었다. a) 적의 타격에 더 넓은 표적을 맞세우는 것, 곧 혁명에 유리한 정치·군사적 관계를 만들어 내는 것. b) 방데식 군대를 모집할 수 있는 모든 수동성의 지대를 적에게서 빼앗는 것. 자코뱅의 농업 정책이 없었다면 파리는 방데를 문 앞에 두었을 것이다. 본래 의미의 방데의 저항은 브르타뉴인, 그리고 일반적으로 다른 민족 계통의 주민들 사이에서 「단일 불가분의 공화국」이라는 공식과 관료·군사적 중앙집권 정책 때문에 첨예해진 민족 문제와 이어져 있다. 자코뱅은 자살하지 않고서는 이 공식과 정책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롱드파는 자코뱅의 파리를 짓밟으려고 연방주의를 지렛대로 쓰려 했지만, 파리로 끌고 온 지방 부대는 혁명가들 쪽으로 넘어갔다. 민족(과 언어)의 구별이 매우 컸던 몇몇 주변 지대를 빼면, 농업 문제가 지방 자치의 열망을 압도했다. 농촌 프랑스는 파리의 헤게모니를 받아들였다. 곧 옛 체제를 결정적으로 파괴하려면 온건한 지롱드파가 아니라 제3신분의 가장 앞선 요소들과 블록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자코뱅이 「억지로 밀어붙인」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언제나 현실의 역사적 발전 방향에서 이루어졌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은 부르주아 정부를 조직했을 뿐 아니라, 곧 부르주아지를 지배계급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그 이상을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르주아 국가를 창조했고, 부르주아지를 국민의 지도계급, 헤게모니 계급으로 만들었다. 곧 새 국가에 항구적 토대를 주었고, 단단한 근대 프랑스 국민을 창조했다.
그럼에도 자코뱅이 언제나 부르주아지의 지반 위에 머물렀다는 것은, 지나치게 확정되고 경직된 형성체로서의 당으로서 그들의 종말과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을 가져온 사건들이 보여 준다. 그들은 르 샤플리에법을 유지하며 노동자에게 단결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최고가격」법[14]을 공포해야 했다. 그렇게 그들은 파리의 도시 블록을 깨뜨렸다. 코뮌에 모여 있던 그들의 돌격대는 실망해서 흩어졌고, 테르미도르가 우세해졌다. 혁명은 가장 넓은 계급적 한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동맹과 연속혁명의 정책은 결국 당시로서는 풀 수 없는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했고, 군사 독재만이 억누를 수 있었을 원초적 힘을 풀어놓았다.
행동당에서는 이런 자코뱅적 노선, 지도하는 당이 되려는 이런 불굴의 의지와 비슷한 것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이탈리아에서 투쟁은 옛 조약들과 기존 국제 질서에 맞선 투쟁으로,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그것을 대표하고 떠받치며 반도의 일부를 점령하고 나머지를 통제하던 외국 열강 오스트리아에 맞선 투쟁으로 나타났다. 프랑스에서도 적어도 어떤 의미에서는 이 문제가 나타났다. 어느 시점에 내부 투쟁이 국경에서 싸우는 국민 투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온 영토가 혁명에 넘어온 뒤의 일이었고, 자코뱅은 외부의 위협에서 내부의 더 큰 에너지를 끌어낼 줄 알았다. 그들은 외부의 적을 이기려면 내부에서 그 동맹자들을 짓밟아야 한다는 것을 잘 이해했고, 9월 학살을 저지르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와, 적어도 지식인·귀족·지주의 일부 사이에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분명히 존재하던 이 연계를 행동당이 고발하지 않았거나, 적어도 마땅한 에너지로, 실천적으로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고발하지 않았고, 그것은 능동적인 정치 요소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묘하게도」 애국적 위신의 많고 적음의 문제로 바뀌었고, 1898년 이후까지 이어진 신랄하고 불모한 논쟁의 꼬리를 남겼다(『크리티카 소찰레』가 복간된 뒤 「레룸 스크립토르」가 쓴 글들과 로무알도 본파디니의 『애국주의 50년』을 볼 것). 이와 관련해 페데리코 콘팔로니에리의 「신문 조서」 문제를 떠올려야 한다. 본파디니는 앞서 든 책의 한 주석에서 밀라노 국립 문서고에서 「신문 조서」 묶음을 보았다고 말하며 약 80책을 언급한다. 다른 이들은 이 조서 묶음이 이탈리아에 존재한다는 것을 늘 부인했고, 그것으로 조서가 공간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빈 문서고에서 이탈리아 관련 문서를 조사하는 임무를 맡은 상원의원 살라타의 글, 1925년(?)에 발표된 글에서는 조서를 찾아냈으며 공간될 것이라고 했다. 한때 『라 치빌타 카톨리카』가 자유주의자들에게 그것을 공간해 보라고 도전하며, 그것이 알려지면 다름 아닌 국가의 통일이 날아가 버릴 것이라고 주장했던 일도 떠올릴 것. 콘팔로니에리 문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오스트리아에게 사면받은 다른 애국자들과 달리 뛰어난 정치가였던 콘팔로니에리가 활동에서 물러나 석방 뒤 매우 조심스러운 태도를 지켰다는 점이다. 콘팔로니에리 문제 전체는 그와 그의 동료들이 취한 태도와 함께, 개개인이 쓴 회고록을 그것을 쓴 시점과 함께 깊이 검토하며 비판적으로 다시 살펴야 한다. 이 문제가 불러일으킨 논쟁을 위해서는 프랑스인 알렉상드르 앙드리안의 회고록이 흥미롭다. 그는 콘팔로니에리에게 큰 존경과 찬탄을 보내는 한편, G. 팔라비치노의 나약함을 공격한다.
롬바르디아 귀족이 오스트리아에 대해, 특히 1853년 2월 밀라노 봉기 시도 뒤와 막시밀리안의 부왕 통치기에 취한 태도를 최근까지도 변호하는 데 관해서는, 그 역사 저작이 늘 민주파에 편향되고 신랄한 알레산드로 루치오가 살보티가 오스트리아에 바친 충성스러운 봉사를 정당화하기까지 한다는 것을 떠올려야 한다. 자코뱅 정신은 무슨! 이 문제에서 희극적인 대목은 알프레도 판치니가 제공한다. 그는 『카보우르의 생애』에서 프란츠 요제프가 밀라노를 방문하는 동안 한 귀족 집 창문에 내걸린 「호랑이 가죽」을 두고, 간드러지는 만큼이나 역겹고 위선적인 변주를 늘어놓는다!
리소르지멘토를 「왕의 정복」으로 보는 미시롤리, 고베티, 도르소 등의 구상은 이 모든 관점에서 고찰해야 한다.
이탈리아에서 자코뱅 정당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그 까닭은 경제 영역에서, 곧 이탈리아 부르주아지의 상대적 약함과 1815년 이후 유럽의 달라진 역사적 분위기에서 찾아야 한다. 프랑스 민중의 에너지를 억지로 일깨워 부르주아지와 동맹시키는 정책에서 자코뱅이 르 샤플리에법과 「최고가격」법으로 부딪힌 한계는, 1848년에는 이미 위협적인 「유령」으로 나타났고, 오스트리아와 옛 정부들, 그리고 (교황뿐 아니라) 카보우르까지 이것을 능숙하게 이용했다. 부르주아지는 프랑스에서와 달리 넓은 민중 계층에 대해 (아마) 더는 헤게모니를 넓힐 수 없었다(객관적 이유가 아니라 주관적 이유로 넓힐 수 없었다). 그러나 농민에 대한 행동은 분명 언제나 가능했다.
부르주아지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그리고 영국)의 차이. 프랑스에서는 전개와 능동적이고 긍정적인 정치 요소가 가장 풍부한 과정이 나타난다. 독일에서는 과정이 어떤 면에서는 이탈리아와 비슷하게, 어떤 면에서는 영국과 비슷하게 진행된다. 독일에서 1848년 운동은 부르주아적 집중이 모자랐기 때문에(자코뱅 유형의 구호는 민주파 극좌가 내놓았다. 「연속 혁명」), 그리고 국가 쇄신의 문제가 민족 문제와 얽혀 있었기 때문에 실패한다. 1864년, 1866년, 1870년의 전쟁들은 민족 문제와 계급 문제를 중간 유형으로 함께 해결한다. 부르주아지는 경제·산업의 통치권을 얻지만, 옛 봉건 계급은 군대와 행정과 토지에서 광범한 동업조합적 특권을 지닌 채 정치 국가의 통치층으로 남는다. 그러나 적어도 독일에서 이 옛 계급이 그토록 큰 중요성을 유지하고 그토록 많은 특권을 누린다 해도, 그들은 국민적 기능을 수행하며, 신분적 기원과 전통이 준 특정한 기질을 지닌 채 부르주아지의 「지식인」이 된다. 프랑스보다 먼저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난 영국에서는, 영국의 「자코뱅」, 곧 크롬웰의 「원두당」이 극도의 에너지를 보였는데도 독일과 비슷한 신구 융합 현상이 나타난다. 옛 귀족은 일정한 특권을 지닌 채 통치층으로 남고, 그 역시 영국 부르주아지의 지식인층이 된다(게다가 영국 귀족은 문이 열린 틀이어서 지식인과 부르주아지에서 나온 요소들로 끊임없이 새로워진다). 이에 관해서는 『공상에서 과학으로』 영어판 서문[15]에 담긴 몇몇 관찰을 보아야 하며, 이것은 지식인과 그들의 역사적·사회적 기능에 관한 연구를 위해 기억해 두어야 한다.
거대한 자본주의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융커와 카이저주의가 권력에 남은 데 대해 안토니오 라브리올라가 내놓은 설명은 올바른 설명을 어렴풋이 보여 준다. 산업 발전이 만들어 낸 계급 관계가 부르주아 헤게모니의 한계에 이르고 진보적 계급들의 입지가 뒤집히자, 부르주아지는 옛 체제와 끝까지 싸우지 않고 그 정면의 일부를 남겨 두어 그 뒤에 자신의 실제 지배를 가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같은 역사적 발전이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과정의 이런 차이는, 여러 국민의 생활 내부 관계의 서로 다른 조합뿐 아니라 서로 다른 국제 관계와도 이어 보아야 한다(이런 종류의 연구에서는 국제 관계가 흔히 과소평가된다). 대담하고 무모한 자코뱅 정신은 분명 프랑스가 유럽에서 그토록 오래 행사한 헤게모니와, 그리고 파리 같은 도시 중심의 존재와 절대 군주정이 프랑스에서 이룬 중앙집권과 이어져 있다. 반면 나폴레옹의 전쟁들은 가장 대담하고 진취적인 사람들을 엄청나게 희생시켜, 지적으로는 유럽의 쇄신에 그토록 풍요로웠음에도, 프랑스의 투쟁적 정치 에너지뿐 아니라 다른 국민들의 정치 에너지도 약하게 만들었다.
국제 관계가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의 발전 노선을 정하는 데 큰 중요성을 지녔던 것은 분명하지만, 온건파와 카보우르는 당파적 목적으로 그것을 과장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사실은, 카보우르가 콰르토 원정과 해협 횡단 이전에는 가리발디의 주도가 불러올 수 있는 국제적 분규 때문에 그것을 불처럼 두려워하다가, 나중에는 천인대가 유럽 여론에 불러일으킨 열광에 그 자신이 떠밀려 오스트리아에 대한 즉각적인 새 전쟁이 가능하다고 볼 정도가 되었다는 점이다. 카보우르에게는 외교관의 직업적 왜곡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그로 하여금 「지나치게 많은」 어려움을 보게 했고, 「음모적」 과장과, 상당 부분 줄타기 곡예 같은 교묘함과 술책의 묘기로 이끌었다. 어쨌든 카보우르는 당의 사람으로서 탁월하게 일했다. 그의 당이 가장 깊고 지속적인 국민적 이익을, 부르주아지와 민중 대중의 요구 공동체를 가장 넓게 확장한다는 의미에서만이라도 대표했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1848~1849년의 「자코뱅」 구호와 그 운명]
1848~1849년에 제기된 「자코뱅」 구호에 관해서는 그 복잡한 운명을 연구해야 한다. 파르부스-브론시테인 그룹이 다시 집어 들고, 체계화하고, 가공하고, 지성화한 그 구호는 1905년과 그 뒤에 무력하고 효과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것은 추상적인 것, 과학 실험실의 것이 되어 버렸다. 그 문학적 표현에서 그것에 반대한 조류는, 반대로 그것을 「일부러」 쓰지는 않고도, 사실상 현재의 구체적이고 살아 있는 역사에 들어맞고 때와 장소에 맞는 형태로, 변혁해야 할 특정 사회의 모든 땀구멍에서 솟아나는 것으로서, 도시 집단의 헤게모니 아래 두 사회집단이 맺는 동맹으로서 적용했다.[16]
앞의 경우에는 적절한 정치적 내용 없는 자코뱅적 기질이 있었다. 뒤의 경우에는 문학적·주지주의적 딱지가 아니라 새로운 역사적 관계에 따른 「자코뱅적」 기질과 내용이 있었다.
주석
- 옮긴이: 브론시테인은 레프 트로츠키의 본성(Бронштейн)이다. 그람시는 옥중에서 검열을 의식해 트로츠키를 이 이름으로, 레닌을 부칭 「일리치」로 적었다. 「운동의 영속성 이론」은 연속혁명론을 가리킨다. ↩
- 옮긴이: 표트르 크라스노프(1869~1947). 제정 러시아군 장군이자 돈 카자크 아타만으로, 망명 뒤 소설 『쌍두 독수리에서 붉은 깃발로』를 썼다. 그람시가 말하는 「관찰」은 이 소설에 나오며, 제13권 §24에서 다시 다룬다. ↩
- 옮긴이: 트로츠키의 자서전 『나의 생애』(1930). ↩
- 옮긴이: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1483~1540). 피렌체의 역사가·정치가로, 『리코르디』에서 고집쟁이들이 우연히 맞힌 일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
- 옮긴이: 코민테른 제3차 대회(1921)와 집행위원회 결정(1921년 12월)이 내놓은 노동자 통일전선 전술. 포슈는 1918년 연합군 총사령관이 된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다. ↩
- 옮긴이: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 당, 노동조합』(1906). 1919년 카를로 알레산드리가 프랑스어판에서 이탈리아어로 옮겼다. 제13권 §24 첫머리에서 다시 다룬다. ↩
- 옮긴이: 알프레드 로스메르(1877~1964).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지 『라 비 우브리에르』의 필자로, 뒤에 프랑스 공산당과 코민테른 지도부에 들어갔다. ↩
- 옮긴이: 제1차 세계대전 때 이탈리아군 총사령관 루이지 카도르나가 이손초 강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거듭한 정면 공세에 빗댄 말이다. ↩
- 옮긴이: 코민테른 제4차 대회(1922년 11~12월). 트로츠키는 이 대회 보고에서, 러시아에서는 부르주아 국가가 쉽게 무너진 뒤에 긴 내전이 이어졌지만 서방에서는 권력 장악 이전에 더 힘든 투쟁을 치러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
- 옮긴이: 「온건파」(moderati)는 카보우르를 중심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가 아래 통일을 추구한 자유주의 군주파이고, 「행동당」(Partito d’Azione)은 마치니와 가리발디를 중심으로 한 민주·공화파 조류다. 그람시는 이 대비로 통일의 지도권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를 묻는다. ↩
- 옮긴이: 1876년 좌파 집권 뒤 아고스티노 데프레티스가 시작한, 반대파 의원들을 정부 다수파로 끌어들여 정당 간 경계를 지우는 의회 운영 방식. ↩
- 옮긴이: 빈첸초 쿠오코(1770~1823). 『1799년 나폴리 혁명사론』에서 민중의 참여 없이 외부에서 들여온 1799년 나폴리 혁명을 「수동 혁명」이라 불렀다. ↩
- 옮긴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신성 가족』(1845). ↩
- 옮긴이: 1791년의 르 샤플리에법은 노동자와 장인의 단결을 금지했다. 1793년의 「일반 최고가격」법은 생필품 가격과 함께 임금에도 상한을 두었다. ↩
- 옮긴이: 엥겔스가 1892년 『공상에서 과학으로』 영어판에 붙인 서문. 영국 부르주아지와 귀족의 타협을 다룬다. ↩
- 옮긴이: 이 단락에서 저본(주제별 판)은 편자의 풀이를 꺾쇠괄호로 넣었다. 「자코뱅」 구호는 「연속 혁명」, 「파르부스-브론시테인」은 헬판트(파르부스)와 트로츠키, 「그것에 반대한 조류」는 레닌주의 조류, 「두 사회집단」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