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09–1941.06

발트 3국 병합과 1941년 6월 추방

1939년 기지 조약에서 1941년 6월의 대규모 추방까지, 소련은 어떻게 발트 3국을 큰 전투 없이 점령하고 「자발적 가입」의 형식으로 병합했으며, 그 대가는 누가 치렀는가?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의정서에 따라 소련은 1939년 9~10월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 상호원조조약과 소련군 기지를 강요했고, 리투아니아에는 그 대가로 빌뉴스를 넘겼다. 1940년 6월 파리가 함락되던 때 세 나라에 최후통첩을 보내 붉은 군대로 점령했고, 블라디미르 데카노조프·안드레이 비신스키·안드레이 즈다노프가 유스타스 팔레츠키스·아우구스츠 키르헨슈테인스·요하네스 바레스의 「인민정부」를 세웠다. 7월의 단일 명부 선거로 뽑힌 인민의회들은 소련 가입을 청원했고, 8월 3~6일 세 나라는 소련 공화국이 되었다. 안타나스 스메토나는 망명했고 콘스탄틴 페츠와 카를리스 울마니스, 요한 라이도네르는 소련으로 끌려갔다. 미국은 웰스 선언으로 병합을 승인하지 않았다. 국유화와 체포 끝에 1941년 6월 14일 밤 수만 명이 시베리아로 추방되었고, 여드레 뒤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비밀의정서와 기지 조약 (1939년 9–10월)

1939년 8월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의정서는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를 소련의 세력권에 넣었고, 처음에 독일 몫이던 리투아니아도 9월 28일의 독소 국경·우호 조약으로 대부분 소련 쪽에 넘어갔다. 9월 17일 폴란드를 침공한 소련은 이튿날 탈린에 억류되어 있던 폴란드 잠수함 오르젤이 빠져나가자 에스토니아의 중립을 문제 삼았다. 모스크바의 신문과 라디오가 에스토니아를 「적대적」이라고 몰아붙이고 붉은 해군 군함과 폭격기가 탈린 앞바다와 하늘에 나타난 가운데, 9월 24일 모스크바에 간 외무장관 카를 셀테르는 군사기지를 허용하는 상호원조조약을 요구받았다. 에스토니아 정부는 굴복했고, 9월 28일 셀테르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조약에 서명했다. 조약은 두 나라의 주권과 정치·경제 체제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적었지만, 소련은 에스토니아의 두 섬과 팔디스키 항에 해군·공군·육군 기지를 두고 유럽의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2만 5,000명을 주둔시킬 권리를 얻었다. 1 2) 3

라트비아는 10월 5일 외무장관 빌헬름스 문테르스가, 리투아니아는 10월 10일 같은 조약에 서명했다. 10월 3일 모스크바에 온 리투아니아 외무장관 유오자스 우르브시스에게 이오시프 스탈린은 직접 독소 비밀의정서와 세력권 지도를 보여 주었다. 우르브시스가 소련군 기지는 사실상의 점령이라며 반대하자 스탈린은 「빌뉴스를 받든 말든 소련군은 어차피 리투아니아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결국 리투아니아는 소련이 폴란드 침공으로 차지한 빌뉴스 지역의 약 5분의 1과 옛 수도 빌뉴스를 받는 대신 소련군 2만 명의 주둔을 받아들였고, 라트비아에는 3만 명이 배정되었다. 소련 선전은 이를 약소국에 대한 스탈린의 관대함으로 내세웠고 리투아니아 정치인들도 공개적으로는 「전통적인 소련–리투아니아 우호」를 칭송했지만, 거리에는 「빌뉴스는 우리 것, 리투아니아는 러시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4 5 2) 6

10월 28일 리투아니아군이 1920년 이후 처음으로 빌뉴스에 들어갔다. 소련군은 떠나기 전에 공장 설비와 병원 장비, 차량, 박물관과 도서관의 문화재를 실어 갔고, 10월 30일부터 11월 1일까지 빵값이 갑자기 오르자 지역 공산주의자와 폴란드인의 충돌이 유대인을 겨냥한 폭동으로 번졌다. 리투아니아 안의 소련군 기지는 알리투스, 프리에나이, 가이쥬나이, 나우요이빌니아 네 곳에 1만 8,786명으로 정해졌다. 에스토니아에서는 1만 2,000~1만 8,000명의 발트 독일인이 독일로 이주했다. 같은 요구를 거부한 핀란드와 11월 30일 겨울전쟁이 벌어졌을 때 발트 3국은 공식적으로 중립이었지만, 소련 폭격기는 에스토니아의 기지를 핀란드 폭격에 썼다. 그 뒤 몇 달 동안 소련은 발트 국가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고, 기지의 소련 병사들도 규율을 지켰다. 1940년 3월 29일에도 몰로토프는 최고소비에트에서 세 나라와의 상호원조조약 이행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5 3 2) 6

최후통첩 (1940년 5–6월)

독일이 서유럽에서 승리를 거듭하자 소련의 태도가 바뀌었다. 5월 16일 『이즈베스티야』는 거인들이 생존을 걸고 싸우는 동안 작은 나라가 중립을 지키려는 것은 순진하다고 썼고, 5월 25일 몰로토프는 리투아니아가 기지의 소련 병사 셋을 납치했다고 항의했다. 소련이 살해되었다고 주장한 병사 부타예프는 실제로는 부대를 탈영했다가 리투아니아 경찰에 발견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었고, 리투아니아 조사위원회의 자료 요청에 소련은 답하지 않았다. 6월 7일 몰로토프가 지목한 대로 총리 안타나스 메르키스가 모스크바에 갔지만 납치 혐의만 되풀이해 들었고, 9일에는 리투아니아가 라트비아·에스토니아와 발트 협상을 통해 비밀 군사동맹을 꾸며 조약을 어겼다는 비난까지 받았다. 안타나스 스메토나 대통령은 미하일 칼리닌에게 친서를 보내 리투아니아가 조약을 늘 지켜 왔다고 밝혔지만, 11일의 마지막 회담도 아무 결론 없이 끝났다. 6

붉은 군대는 이미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6월 5일 발트 지역의 모든 소련군이 국방인민위원 세묜 티모셴코의 지휘 아래 들어갔고, 드미트리 파블로프 장군은 11일 리투아니아 공격 계획을 확정했다. 리투아니아 동쪽 국경에 모인 병력은 22만 1,260명에 항공기 1,140대, 전차 1,513대였고, 리투아니아군은 2만 8,005명이었다. 9일 티모셴코는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함선을 나포하고 해안을 봉쇄하며 두 정부의 탈출을 막을 준비를 지시했고, 14일 에스토니아에 대한 해상 봉쇄가 시작되었다. 같은 날 소련 폭격기 두 대가 탈린에서 헬싱키로 가던 핀란드 여객기 칼레바를 격추해, 미국 공관들의 외교 행낭을 나르던 미국 외무직원 헨리 W. 앤사일 주니어가 숨졌다. 세계의 눈이 파리 함락에 쏠린 6월 14일 자정 직전, 몰로토프는 모스크바에서 우르브시스에게 최후통첩을 건넸다. 내무장관과 국가보안국장을 재판에 넘길 것, 상호원조조약을 더 잘 이행할 정부를 세울 것, 「충분히 많은」 소련군의 진입을 허용할 것, 그리고 이튿날 오전 10시까지 답할 것이었다. 6 2) 3

리투아니아 정부는 밤새 회의를 열었다. 스메토나는 상징적인 무력 저항이라도 하자고 했지만, 메르키스와 군 지휘관들은 이미 소련군이 나라 안에 있고 동원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항은 불가능하다고 보았고, 정부는 아침 7시 항의 없이 모든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오에 모스크바는 새 총리 후보를 거부하고 몰로토프의 차관 블라디미르 데카노조프가 새 정부 구성을 감독한다고 알려 왔다. 스메토나는 대통령 직무를 메르키스에게 맡기고 「내 손으로 리투아니아를 볼셰비키 나라로 만들고 싶지 않다」며 15일 저녁 키바르타이에서 국경 개울을 걸어서 건너 독일로 갔다. 같은 날 새벽 소련 NKVD 부대는 라트비아 동부 마슬렌키 등의 국경 초소를 습격해 국경수비대원 3명과 민간인 2명을 죽이고 37명을 끌고 갔다. 16일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 거의 같은 최후통첩이 전해졌다. 응답 시한은 여덟 시간(라트비아에는 여섯 시간이었다는 서술도 있다)뿐이었고, 리투아니아가 이미 소련군 손에 들어간 상황에서 두 나라도 요구를 받아들였다. 6 7 8 4

점령과 모스크바의 특사들 (1940년 6월)

6월 15일 소련군이 리투아니아에, 16~17일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 들어갔다. 당시 『타임』 기사에 따르면 며칠 사이에 약 50만 명의 붉은 군대가 세 나라를 점령했고, 에스토니아에는 기지 밖에서 약 9만 명이 더 들어왔다. 리투아니아군은 저항하지 말고 친절하게 맞이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카를리스 울마니스는 라디오로 붉은 군대에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하며 「나는 내 자리에 남을 테니 여러분도 여러분의 자리에 남으라」고 말했다. 에스토니아 군대와 방위연맹도 정부의 명령에 따라 무장을 해제당했다. 탈린 라우아 거리의 독립 통신대대만이 6월 21일 붉은 군대와 공산주의자 민병대 「인민자위대」에 맞서 몇 시간 동안 싸우다 협상 끝에 항복했고, 같은 날 탈린 성의 탑에 걸린 에스토니아 국기가 붉은 깃발로 바뀌었다. 세 나라의 점령은 소련군이 뒷받침한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와 함께 진행되었다. 2) 3 6 9

모스크바는 나라마다 특사를 보내 새 정권을 만들었다. 리투아니아에는 데카노조프가 6월 15일 카우나스에 도착해 소련 대사관에 자리를 잡았다. 안타나스 스니에치쿠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 공산당이 그의 손발이 되었고, 모스크바에서 온 소련 행정 전문가와 보안기관원들이 그를 도왔다. 라트비아에는 안드레이 비신스키가 6월부터 8월까지 머물며 친소 정부 수립과 소련 편입을 감독하고 라트비아 공산당에서 「트로츠키주의자와 부하린주의자」를 숙청했다. 에스토니아에는 레닌그라드 당 지도자로 발트해에서 소련의 입지를 넓히는 데 관심을 두었던 안드레이 즈다노프가 갔다. 몰로토프는 6월 18일 독일 대사 슐렌부르크에게 프랑스에서 거둔 독일의 승리를 「따뜻하게」 축하하며, 영국과 프랑스가 발트 국가들에서 독일과 소련 사이를 이간질하려던 음모를 끝내야 했다고 설명했다. 10 11 12 13 2)

세 개의 「인민정부」 (1940년 6–7월)

리투아니아에서는 스메토나가 떠나자 메르키스가 대통령 직무를 맡았고, 이튿날 라디오로 스메토나를 해임하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발표했다. 6월 17일 그는 소련의 요구대로 좌파 언론인 유스타스 팔레츠키스를 총리로 임명하고 물러났으며, 팔레츠키스가 대통령 직무까지 맡았다. 이른바 「인민정부」에는 소련 점령의 도구가 아니라 권위주의적인 스메토나 정권을 갈아 치운 정부로 보이도록 이름난 인사들이 들어갔다. 작가 빈차스 크레베미츠케비추스가 외무장관과 총리 직무를 맡았다. 스메토나 정권에 대한 반감이 컸던 탓에 일부 리투아니아인은 이를 독립의 상실보다 대통령 권력의 해체로 받아들였다. 리투아니아는 1990년 이후 스메토나가 사임한 적이 없으므로 메르키스의 권한 장악은 위헌이었고, 따라서 그 뒤 병합에 이르는 모든 조치가 무효라는 입장을 지킨다. 14 6 15 16

라트비아에서는 울마니스가 쿠데타 사흘 뒤 총리직을 내놓고, 사실은 소련 대사관이 정한 아우구스츠 키르헨슈테인스의 좌파 정부를 임명했다. 미생물학자인 키르헨슈테인스는 소련 대사관에 불려 가 새 정부의 수반 자리를 제안받았고, 작가 빌리스 라치스가 내무장관이 되었다. 울마니스는 그 뒤 한 달 동안 소련에 협조했다. 7월 14~15일 선거 전까지 라트비아에서는 소련식 정치 질서를 도입하거나 소련에 가입하겠다는 정부 계획이 공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다. 9 17 18 19

에스토니아에서는 즈다노프가 6월 21일 콘스탄틴 페츠 대통령에게 의사이자 시인인 요하네스 바레스를 총리로 하는 괴뢰 정부를 임명하게 했다. 페츠는 자리를 지켰지만 그 자신이 꼭두각시가 되어 한 달 동안 새 정권이 내놓은 200개 가까운 법령에 서명했고, 그 가운데에는 조기 선거를 가능하게 한 선거법 개정도 있었다. 의회 상원인 국가평의회가 해산된 채 다시 소집되지 않았으므로 이 개정은 위헌이었다. 마지막 합헌 총리 위리 울루오츠의 정부는 지하로 들어갔고, 1944년 4월 비밀리에 모인 에스토니아 공화국 선거위원회는 바레스의 임명이 불법이었다고 선언했다. 20 21 22

단일 명부 선거와 「가입 요청」 (1940년 7–8월)

세 정부는 기존 의회를 해산하고 7월 14~15일에 「인민의회」 선거를 치르기로 했다. 공산당 아닌 정당과 단체는 이미 모두 금지되었고, 지하에서 나온 공산당은 리투아니아 1,500명, 라트비아 500명, 에스토니아 133명에 지나지 않았다. 후보는 공산당이 만든 「근로인민연합」이 의석 하나에 한 명씩만 냈고, 그 상당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선거 전 약 2,000명의 정치 활동가가 체포되었다. 투표한 사람은 여권에 도장을 받았고, 투표하지 않은 사람은 「인민의 적」으로 찍혀 뒷날의 박해를 각오해야 했다. 런던의 소련 대사관은 투표가 끝나기도 전에 결과를 발표했고, 라트비아의 결과는 투표 마감 24시간 전에 런던 신문에 실렸다. 23 15 18

에스토니아에서는 사흘 만에 야당이 80개 선거구 가운데 66곳에 후보 78명을 냈지만, 즈다노프가 바레스에게 야당 후보를 명부에서 빼라고 명령했고 거의 모두가 협박과 폭력, 무효 처리로 사라졌다. 남은 야당 후보 한 사람도 뒤에 체포되었다. 공식 발표로 근로인민연합은 80석을 모두 차지했는데, 독일 점령기에 다시 집계해 보니 투표율은 80.1%, 득표율은 91.6%였고 선거위원회가 3만 5,119표를 위조한 증거가 나왔다. 라트비아에서는 금지된 정당들의 「민주 블록」이 명부에 오르려 했지만 사무실이 폐쇄되고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 리투아니아의 공식 결과는 투표율 95.51%, 찬성 99.19%였다. 공식 발표된 세 나라의 득표율은 92.2~99.2%였다. 24 25 18 6 26

세 인민의회는 7월 21일 일제히 열려 토론도 없이 만장일치로 자국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소련 가입을 청원했다. 초기 회의들에서는 대기업과 부동산, 토지의 국유화도 결의했다. 크레베미츠케비추스는 7월 1일 밤 모스크바에서 몰로토프로부터 발트 국가들이 모두 소련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돌아와 사임서를 썼다. 7월 21일 울마니스는 대통령직에서 밀려났고 키르헨슈테인스가 그 직무를 맡았다. 페츠는 같은 날 아들을 탈린의 미국 공사관에 보내 망명을 청했으나, 사임 날짜조차 21~23일로 기록이 엇갈리는 가운데 바레스가 대통령 권한을 넘겨받았다. 전 정권의 지도자들은 곧바로 사라졌다. 외무장관 문테르스 가족은 7월 16일 내무장관 빌리스 라치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추방되었고, 메르키스는 스웨덴으로 탈출하려다 리가에서 붙잡혔다. 요한 라이도네르 총사령관 부부는 7월 19일 펜자로, 페츠 일가는 30일 우파로, 울마니스는 스타브로폴로 보내졌다. 23 16 9 20 19 14 27

8월 1일 세 나라 대표단이 모스크바의 소련 최고소비에트에 청원을 냈고, 리투아니아가 3일, 라트비아가 5일, 에스토니아가 6일에 받아들여졌다. 에스토니아 대표단은 바레스가 이끌었다. 인민의회들은 이름을 각 공화국의 최고소비에트로 바꾸었고, 리투아니아 인민의회는 8월 25일 1936년 소련 헌법을 본뜬 새 헌법을 채택했다. 바레스와 키르헨슈테인스는 각각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이 되었다. 공식 소련 서사는 세 나라가 동시에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켜 자발적으로 가입을 요청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라트비아 헌법은 국가 체제의 근본 변경에 유권자 3분의 2가 찬성하는 국민투표를 요구했고, 에스토니아에서는 상원 없이 하원만 선출되었다. 세 나라는 1990~1991년 독립을 회복하면서 이런 근거로 병합 절차 전체가 무효였다는 입장을 세웠다. 23 15 21 17 2) 25 24

웰스 선언과 불승인

미국은 7월 15일 행정명령을 고쳐 발트 3국의 자산을 동결하고 이들을 독일 점령국들과 같은 범주에 넣었다. 7월 23일 국무장관 대행 섬너 웰스는 소련의 발트 3국 점령을 규탄하고 병합을 승인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무부 유럽 담당 관리들이 처음 쓴 초안을 웰스는 너무 약하다며 그 자리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전화로 읽어 주었고, 두 사람은 문안을 더 강하게 고쳤다. 웰스 선언은 무력에 의한 영토 변경을 인정하지 않는 1932년 스팀슨 독트린을 적용한 것으로, 미국은 발트 국가들의 공사들을 계속 주권국 정부의 사절로 인정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를 「여러 해 만에 국무부가 낸 가장 이례적인 외교 문서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하루 전 웰스는 페츠 일가에게 외교 비자를 내주도록 허가했지만, 페츠는 끝내 떠나지 못했다. 26 28 20

선언은 뒤에 미국·영국·소련 동맹 안에서 마찰의 원인이 되었지만, 웰스는 소련이 침략 행위에 「합법성의 냄새」를 입히려 했다며 이를 끝까지 옹호했다. 1942년 그는 병합을 지지한 국민투표를 「조작된」 것이라고 부르고 싶었다고 적었고, 병합이 「모든 도덕적 관점에서 변호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놀랄 만큼 어리석다」고 썼다. 미국은 소련과 군사적으로 맞서지 않았지만, 선언 덕분에 발트 국가들은 독립된 외교 공관을 유지했고 행정명령 8484가 그들의 금융 자산을 보호했다. 에스토니아 해외에 있던 선박 42척의 선원들은 귀국을 거부했고, 이 배들은 영국에 징발되어 대서양 호송선단에 쓰였다. 불승인은 이후의 모든 미국 대통령과 의회 결의가 이어받아 반세기 동안 유지되었다. 26 3

소비에트화와 체포 (1940–1941)

새 정권은 곧바로 경제를 소련식으로 바꾸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7월 23일 모든 토지와 은행, 큰 산업 기업이 국유화되었고, 큰 기업 대부분과 주택의 절반이 국가 소유가 되었으며 크론을 루블로 바꾸는 인위적으로 낮은 환율로 저축이 사라졌다. 리투아니아에서는 모든 은행과 1,000리타스가 넘는 예금, 170제곱미터가 넘는 부동산, 노동자 20명 이상의 기업이 국유화되었고, 토지는 모두 국유화된 뒤 큰 농장을 30헥타르로 줄여 남는 약 57만 5,000헥타르를 소농에게 나눠 주었다. 리타스는 실제 가치의 3분의 1~4분의 1로 평가 절하된 끝에 1941년 3월까지 회수되었다. 집단화는 곧바로 하지 않았지만 농업 세금이 50~200% 올랐다. 라트비아에서도 1940년에는 집단화 소문을 공식 부인하며 땅 없는 농민 5만 2,000명에게 10헥타르까지의 작은 땅을 주었으나, 1941년 초부터 집단화 준비가 시작되었다. 29 3 6 18

사회와 정치 조직도 해체되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7월 1일 모든 문화·종교 단체가 폐쇄되고 공산당과 그 청년 조직만이 합법 정치 조직으로 남았다. 라트비아에서는 8월 7일 모든 인쇄 매체와 인쇄소가 국유화되었고, 11월부터 모두 4,000종의 책이 금지되어 회수되었다. 소련 헌법과 러시아에서 옮겨 온 형법이 도입되었고, 1941년 1월에는 소련 최고소비에트 선거가 치러졌다. 세 나라의 공산당은 1940년 10월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의 지부가 되었다. 라트비아에 남아 있던 발트 독일인과 그렇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 무렵 독일로 떠났다. 6 18 30 21

체포는 병합 전부터 시작되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점령 첫해에 주요 정치인과 장교 대부분을 포함해 8,000명 넘게 체포되었고, 장교 약 800명이 체포되어 그 절반가량이 처형되거나 수용소에서 굶어 죽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병합 뒤 한 해 동안 약 1만 2,000명이 「인민의 적」으로 투옥되었다. 라트비아에서는 울마니스와 전쟁장관 발로디스, 군 총사령관 베르키스가 1940년 7월 체포되었고, 라트비아로 피신해 있던 백계 러시아인 대부분도 NKVD에 붙잡혔다. 숙청은 괴뢰 정부까지 미쳐 복지장관 율리스 라치스가 체포되었다. NKVD는 1940년 늦여름부터 「반소비에트 분자」를 등록했는데, 리투아니아에서만 인구의 약 15%인 32만 명을 등록 대상으로 잡았고, 그 가족까지 합치면 인구의 절반에 이르렀다. 3 6 18 31

1941년 6월 14일

1941년 5월 14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는 제1299-526ss호 공동 결정으로 발트 공화국들과 서부 우크라이나, 서부 벨라루스, 몰다비아에서 「사회적 이질 분자」를 내쫓기로 했다. 실무 절차는 국가보안 부인민위원 이반 세로프가 서명한 이른바 세로프 지령이 정했다. 날짜가 없는 이 문서는 NKGB가 생긴 1941년 2월과 사본이 접수된 6월 7일 사이에 쓰였을 것이다. 지령은 추방을 최대한 은밀하고 조용하고 빠르게 하라고 했고, 가족마다 100킬로그램까지의 짐만 허용했으며, 가장은 굴라크 수용소로, 나머지 가족은 먼 특별이주지로 보내게 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네 명으로 이루어진 집행조가 두 가족씩 맡았다. 체포 대상 명단은 계속 바뀌었다. 5월 13일 보고서는 수용소로 보낼 체포자 1만 9,610명과 가족 2,954명을 꼽았지만, 한 달 뒤에는 체포자 8,598명과 가족 1만 3,654명으로 바뀌어 「반소비에트 가족」 전체를 없애려는 방침을 드러냈다. 32 33 34 35 31

작전은 6월 13일 밤부터 14일 새벽에 세 나라에서 동시에 시작되었고,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에서 온 NKVD와 NKGB 부대가 지역 경찰, 공산당원과 함께 집을 에워쌌다. 끌려간 사람의 수는 출처마다 다르다. 에스토니아는 공식 자료 9,156명(러시아어 위키백과)부터 9,254~1만 861명(영어 위키백과), 열차 문서에 따른 1만 16명(러시아어 위키백과)까지 엇갈리며, 유럽인권재판소는 약 1만 명이라고 적었다. 라트비아는 1만 5,424명으로, 그 가운데 유대인 1,771명과 러시아인 742명이 있었다(라트비아어 위키백과는 「1만 5,400명 이상」). 리투아니아는 6월 19일의 NKVD 보고가 1만 7,485명을 집계했지만 통계가 불완전하고 혼란스러웠으며, 리투아니아 대학살·저항 연구 센터는 1만 6,246명의 운명을 추적해 발표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16일에도 명단에서 약 1,400명이 모자라자 소련 관리들이 16~18일 2,000명을 서둘러 더 붙잡았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유대인 439명이, 라트비아에서는 리테네 군 야영지에서 장교 600명이 붙잡혔다. 31 36 37 32 3 18 33

가족들은 화물차에 실려 떠났다. 리투아니아의 열차는 나우요이빌니아에 모였고, 남자들은 추가 조사나 서류 처리를 핑계로 가족과 떨어져 수용소행 열차에 따로 실렸다. 열일곱 편의 열차는 19일 출발해 6월 30일에서 7월 9일 사이에 도착했다. 남자들은 대부분 시베리아의 굴라크 수용소에서 죽었다. 에스토니아어 위키백과는 에스토니아에서 붙잡힌 남자 약 3,000명이 거의 모두 처형되거나 수용소에서 죽었다고 적는다. 여자와 아이들은 옴스크주와 노보시비르스크주, 크라스노야르스크, 알타이, 카자흐스탄 등지의 특별이주지에 내려졌고, 열악한 생활 조건 때문에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에스토니아 추방자의 사망률은 60%로 추산되며, 역사가 아르비다스 아누샤우스카스는 1941년의 리투아니아 추방자 가운데 약 8,000명이 죽었다고 보았다. 31 36 38

여드레 뒤인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다. 수십만 명을 더 추방하려던 당장의 계획은 전쟁으로 멈췄다. 리투아니아에서는 리투아니아 행동주의 전선이 준비해 온 6월 봉기가 일어나 리투아니아 임시정부를 세웠고, 퇴각하는 NKVD는 라이니아이 숲 등지에서 정치범을 학살했으며, 에스토니아에서는 「숲의 형제」가 소련군과 싸웠다. 이 이야기와 이어진 독일 점령은 다음 사건에서 다룬다. 페츠와 문테르스는 26일, 라이도네르는 28일 유형지에서 다시 체포되었다. 처음에 많은 발트인은 독일군을 해방자로 맞았다. 오늘날 발트 3국은 6월 14일을 추모일로 지킨다. 18 39 40 41 20 19 27 2) 36

결과

세 나라는 소련의 공화국이 되었고, 국가의 지도층은 망명하거나 소련의 감옥과 유형지로 사라졌다. 1941년 6월의 추방으로 에스토니아에서 약 1만 명, 라트비아에서 약 1만 5,400명, 리투아니아에서 약 1만 6,000~1만 7,500명이 끌려갔고 그 상당수가 돌아오지 못했다. 이 경험은 많은 발트인이 독일군을 해방자로 맞은 배경이 되었고, 미국의 불승인은 1991년 독립 회복 때까지 이어졌다.

연표와 지도

리가 탈린 모스크바 카우나스 우파 나우요이빌니아 빌뉴스 키바르타이 1 탈린 5 리가 2 모스크바 크렘린 9 카우나스 7 우파 8 나우요이빌니아 3 빌뉴스 4 키바르타이 6 워싱턴 국무부
  1. 11939.09.18에스토니아소련폴란드
    오르젤 사건

    탈린에 억류된 폴란드 잠수함이 탈출하자 소련이 에스토니아의 중립을 문제 삼았다.

  2. 21939.09.28에스토니아소련
    소련–에스토니아 상호원조조약

    에스토니아가 소련군 기지와 2만 5,000명 주둔을 받아들였다.

  3. 1939.10.05라트비아소련
    소련–라트비아 상호원조조약

    문테르스 외무장관이 서명했다.

  4. 1939.10.10리투아니아소련
    소련–리투아니아 상호원조조약

    빌뉴스를 받는 대신 소련군 2만 명 주둔을 허용했다.

  5. 31939.10.28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군 빌뉴스 입성

    1920년 이후 처음으로 리투아니아군이 빌뉴스에 들어갔다.

  6. 1940.05.25소련리투아니아
    납치 혐의 각서

    몰로토프가 리투아니아가 소련 병사들을 납치했다고 항의했다.

  7. 1940.06.07리투아니아소련
    메르키스의 모스크바 회담

    11일까지 세 차례 회담에서 몰로토프가 비난만 되풀이했다.

  8. 1940.06.14소련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핀란드
    리투아니아에 최후통첩

    파리 함락의 날 자정 직전에 전달되었고, 여객기 칼레바가 격추되었다.

  9. 41940.06.15소련리투아니아라트비아독일
    리투아니아 점령, 스메토나 망명

    붉은 군대가 들어왔고 스메토나가 키바르타이에서 독일로 넘어갔다. 마슬렌키 국경 초소도 습격당했다.

  10. 1940.06.16소련라트비아에스토니아
    라트비아·에스토니아에 최후통첩

    두 나라는 몇 시간 만에 요구를 받아들였다.

  11. 1940.06.17소련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라트비아·에스토니아 점령, 팔레츠키스 정부

    메르키스가 팔레츠키스를 총리로 임명하고 물러났다.

  12. 51940.06.20라트비아
    키르헨슈테인스 정부

    소련 대사관이 정한 정부가 리가에서 들어섰다.

  13. 1940.06.21에스토니아소련
    바레스 정부와 탈린의 교전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강요로 바레스 정부가 섰고, 독립 통신대대가 몇 시간 저항했다.

  14. 1940.07.14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인민의회 선거

    15일까지 단일 명부로 치러졌고 결과는 조작되었다.

  15. 1940.07.21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소비에트 공화국 선포

    세 인민의회가 소련 가입을 청원했다.

  16. 61940.07.23미국소련
    웰스 선언

    미국이 소련의 점령을 규탄하고 병합을 승인하지 않았다.

  17. 71940.07.30에스토니아소련
    페츠 추방

    페츠 일가가 우파로 보내졌다.

  18. 1940.08.03소련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소련 편입

    리투아니아(3일), 라트비아(5일), 에스토니아(6일)가 소련 공화국이 되었다.

  19. 1941.05.14소련
    추방 결정

    「사회적 이질 분자」 추방을 정한 공동 결정이 내려졌다.

  20. 81941.06.14소련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6월 추방

    13~14일 밤 세 나라에서 수만 명이 동시에 끌려갔다.

  21. 91941.06.22독일소련리투아니아
    독일의 소련 침공

    리투아니아에서 6월 봉기가 일어났다.

관련 인물 25명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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