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1953

발트 3국의 재점령: 숲의 형제들과 1949년의 추방

전쟁이 끝난 뒤에도 발트 3국에서는 왜 10년 가까이 숲속의 전쟁이 이어졌고, 소련은 추방과 집단화, 이주로 이 땅을 어떻게 바꾸었는가?

1944년 여름부터 1945년 5월 쿠를란트의 항복까지 붉은군대는 발트 3국을 다시 점령했고, 돌아온 공화국 지도자들은 모스크바의 중앙위원회 뷰로 감독 아래 소비에트 체제를 복원했다. 징집과 탄압을 피해 숲으로 들어간 수만 명의 숲의 형제들은 특히 리투아니아에서 1949년 리투아니아 자유 전사 연합으로 뭉쳐 싸웠으나, MGB와 섬멸대대, 침투 공작에 차례로 꺾였다. 1948년 베스나 작전과 1949년 3월 9만여 명을 시베리아 등지로 보낸 프리보이 작전은 저항의 기반을 무너뜨리고 집단화를 밀어붙였다. 1950년 에스토니아에서는 제8차 전원회의가 「부르주아 민족주의」를 이유로 지도부를 숙청했고, 러시아어 사용 이주민의 유입과 산업화, 교회 탄압이 이어졌다.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베리야의 민족 정책은 석 달 만에 뒤집혔다.

붉은군대의 귀환과 쿠를란트 (1944–1945)

1944년 여름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 중부집단군이 벨라루스에서 밀려나자 붉은군대는 다시 발트 지역으로 들어왔다. 빌뉴스는 7월 5일 시작된 공세 끝에 13일 저녁 함락되었고, 뒤이은 샤울랴이 공세의 선두는 7월 31일 리가만 해안에 닿았다. 9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벌어진 발트 전략 공세에는 이반 바그라먄의 제1발트 전선군, 안드레이 예료멘코의 제2발트 전선군, 이반 마슬렌니코프의 제3발트 전선군과 레오니트 고보로프의 레닌그라드 전선군 일부가 나섰다. 에스토니아에서는 독일군이 물러나던 9월 18일 헌정 정부가 탈린의 정부 청사를 장악했으나, 22일 레닌그라드 전선군이 수도를 점령했고 대통령 직무대행 위리 울루오츠는 스웨덴으로 피신했다. 리가는 10월 13일 제3발트 전선군에 점령되었다. 1 2 3 4)

10월 9일 붉은군대가 메멜(클라이페다) 근처에서 발트해에 닿자 독일 북부집단군은 라트비아 서부의 쿠를란트 반도에 갇혔다. 독일군 참모총장 하인츠 구데리안 등은 이 병력을 빼내 중부 유럽 전선에 쓰자고 건의했으나 아돌프 히틀러는 거부했고, 1945년 1월 25일 쿠를란트 집단군으로 이름을 바꾼 이 부대는 붉은군대의 공세를 여섯 차례 막아 냈다. 통신이 끊긴 쿠를란트 집단군은 5월 8일 독일 항복 문서가 서명된 뒤인 5월 10일에야 명령을 받아 항복했다. 5월 12일까지 약 13만 5,000명이, 발트 지역 전체로는 약 18만 명의 독일군이 포로가 되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클라이페다 전투가 1945년 1월에 끝났다. 5 6

새 점령을 피해 많은 사람이 서쪽으로 떠났다. 1944년 에스토니아에서는 8만 명이 바다를 건너 핀란드와 스웨덴으로 피난했고, 라트비아에서는 쿠를란트 전선이 버티는 사이 약 13만 명이 스웨덴과 독일로 빠져나갔으며, 리투아니아에서는 정치·문화계 인사를 중심으로 약 7만 명이 독일로 물러났다. 돌아온 붉은군대는 약탈과 폭력을 저질렀다. 안타나스 스니에치쿠스조차 7월 23일 라브렌티 베리야에게 「카우나스에서 이런 강도와 폭력이 계속되면 붉은군대에 대한 마지막 공감마저 사라질 것」이라고 항의했고, 베리야는 이를 스탈린에게 전했다. 국경도 바뀌어, 1944년 라트비아 영토의 약 2%인 아브레네 지구 일부가, 1945년에는 에스토니아의 페체리 군과 나르바강 동쪽의 이반고로드가 러시아 SFSR로 넘어갔다. 라트비아는 전쟁 동안 인구의 약 20%를 잃었다. 7 8 6 9

소비에트 공화국의 복원과 모스크바의 뷰로

1941년 동쪽으로 물러났던 공화국 지도자들이 붉은군대와 함께 돌아왔다. 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 안타나스 스니에치쿠스는 1944년 러시아에서 돌아왔는데, 그의 어머니와 형제자매 다섯은 서방으로 피난했고 어머니는 아들과 의절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전쟁 중 사실상 당을 이끈 니콜라이 카로탐이 탈린 점령 뒤인 9월 28일 전원회의에서 제1서기로 선출되었고, 라트비아에서는 야니스 칼른베르진슈가 1940년부터 1959년까지 제1서기 자리를 지켰다. 정부 쪽에서는 라트비아의 빌리스 라치스, 에스토니아의 아르놀트 베이메르 등이 각료회의(1946년까지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맡았지만 실권은 당 제1서기에게 있었다. 리투아니아 SSR 최고소비에트를 이끈 유스타스 팔레츠키스는 형식상의 최고 권위였을 뿐이고, 빌리스 라치스도 대체로 허수아비로 여겨졌다. 10 11 12 13 14 9

모스크바는 새 공화국마다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뷰로를 두어 현지 당을 감독했다. 1944년 11월 11일 설치되어 1947년 6월 해체된 에스토니아 뷰로는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측근 니콜라이 샤탈린이, 1946년 3월부터는 게오르기 페로프가 이끌었고, 중요한 문제는 먼저 이 뷰로에서 논의된 뒤에야 에스토니아 당 중앙위원회 뷰로에 올라갔다. 1945년 6월 5일 이 뷰로는 에스토니아 SSR과 스웨덴의 외교 관계 수립을 제안한 카로탐의 편지를 잘못으로 규정했다. 리투아니아 뷰로는 1944~1946년 미하일 수슬로프가 이끌었는데, 1970년대의 지하 출판물은 그가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의 추방과 살해에 개인적 책임이 있다고 고발했다. 공화국 당의 제2서기 자리에는 거의 언제나 러시아인이나 다른 슬라브계가 앉았다. 라트비아에는 1937~1938년 대숙청의 「라트비아 작전」에서 살아남은 러시아의 라트비아계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보내졌으나, 이들 대부분은 라트비아어를 하지 못했다. 15P_KK_Eesti_b%C3%BCroo) 16 17 18 8

현지 당은 작고 이질적이었다. 1944년 마지막 분기에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당원은 56명뿐이었고, 1946년 당원 가운데 에스토니아인은 42%였다. 라트비아 당은 1949년 라트비아인이 52%였고, 리투아니아 당은 1953년에도 리투아니아인이 38%에 그쳤다. 에스토니아는 전후 첫 10년 동안 러시아에서 나고 자라 에스토니아어를 잘 못하는 에스토니아계 간부들이 다스렸는데, 사람들은 그들의 러시아식 억양을 비꼬아 「예스토니아인」이라 불렀다. 소비에트 제도는 선거로 다시 세워졌다. 라트비아에서는 1946년 2월 연방 최고소비에트, 1947년 2월 공화국 최고소비에트, 1948년 1월에야 지방 소비에트 선거가 치러졌고, 1946년 리투아니아 선거의 투표율 90% 이상이라는 결과는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리투아니아 파르티잔들은 1946년과 1947년의 선거에 항의하며 이를 방해했다. 17 7 8 9 19

숲으로 간 사람들 (1944–1946)

다시 점령당하기를 거부한 많은 사람이 숲으로 들어갔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서는 이들을 1905년 혁명 때부터 쓰인 말인 「숲의 형제들」이라 불렀고, 리투아니아에서는 「초록 사람들」(žaliukai)이나 그냥 파르티잔이라 불렀다. 리투아니아에서는 1944년 독일이 해산한 리투아니아 지역방위군 병력의 절반가량이 유격대를 이루어 시골로 흩어졌고, 리투아니아 자유군(LLA)은 7월 1일 소련에 대한 전쟁 상태를 선포하며 대원들에게 숲에 머물라고 명령했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에서는 독일군 편에서 싸운 병사들이 붙잡히지 않고 숲으로 들어갔는데, 라트비아에서는 1945년 5월 독일 항복 뒤 군단병 약 4,000명이 숲으로 갔다. 무엇보다 전후 붉은군대 징집이 대열을 키웠다. 일부 지역에서는 등록된 징집 대상자의 절반도 나타나지 않았고, 사라진 징집 대상자의 가족에 대한 괴롭힘이 더 많은 사람을 숲으로 몰았다. 20 19 21

리투아니아 파르티잔들이 벌인 싸움은 첫해가 가장 격렬했다. 이 한 해 동안 약 1만 명의 리투아니아인이 죽었는데, 전쟁 전체 사망자의 약 절반이다. 100명이 넘는 큰 부대들이 칼니슈케, 세다, 파나라 마을 등에서 NKVD와 정면으로 싸웠고, 소련의 통제가 미치지 않은 마을과 소도시를 파르티잔이 장악했다. 남부에서는 교사였던 아돌파스 라마나우스카스가 1945년 초 「바나가스」(매)라는 가명으로 합류해 140명 규모의 메르키네 중대를 꾸렸고, 1945년 6월 바르치아 숲의 전투에서는 파르티잔 30~47명이 죽었다. 1945년 7월 소련 당국은 숲에 숨은 사람들에게 「사면」과 「합법화」를 내걸었고, 1957년의 소련 보고에 따르면 모두 3만 8,838명이 나왔다(「무장 민족주의 도적」 8,350명, 징집 기피자 3만 488명). 그래도 1945년 말 리투아니아의 숲에는 약 3만 명의 무장 인원이 있었다. 19 22

저항에 참여한 인원은 추정마다 다르다. 적어도 5만 명(에스토니아 1만, 라트비아 1만, 리투아니아 3만)이라는 추정이 있고, 미시우나스와 타게페라는 리투아니아 3만, 라트비아 1만~1만 5,000, 에스토니아 1만 명으로 본다. 에스토니아에 대해서는 1944~1953년 1만 4,000~1만 5,000명이 싸웠다는 추정과, 독일군이 물러난 뒤 약 3만 명이 숲에 숨었다는 서술이 함께 있다. 라트비아에서는 실제 전투원이 가장 많을 때 1만~1만 5,000명, 저항 참여자 전체는 4만 명에 이르렀다고 하며, 1945~1955년 700개 무리에 최대 1만 2,000명이었다는 추정도 있다. 세 나라의 비중은 손실에서도 드러난다. 역사가 하인리흐스 스트로즈는 NKVD 보고를 근거로 1945년 한 해에 리투아니아에서 8,916명, 라트비아에서 715명, 에스토니아에서 270명의 파르티잔이 죽었다고 보았다. 20 7 21

리투아니아 자유 전사 연합 (1946–1952)

1946년 여름부터 리투아니아 파르티잔은 작지만 더 잘 조직된 부대로 바뀌었다. 전국을 남부(네무나스), 북동부(산악), 서부(바다)의 세 지역과 아홉 개 군관구로 나누었고, 정면 전투 대신 벙커에 숨어 정치·선전 활동을 벌이며 80종 가까운 정기간행물을 냈다. MGB도 전술을 바꿔 첩자를 모으고 섬멸대대를 조직했으며, 파르티잔은 소련 협력자에 대한 보복으로 맞섰다. 아돌파스 라마나우스카스는 1947년 9월 다이나바 군관구 사령관, 1948년 남부 리투아니아 지역 사령관이 되었고, 소련 병사들을 위한 러시아어 신문 『자유로운 말』을 비롯한 여러 지하 신문을 쓰고 엮고 펴냈다. 19 22

파르티잔은 서방의 지원에 희망을 걸었다. 건축학도 출신으로 1946년 무장 저항에 들어가 타우라스 군관구의 비루테 여단을 이끌던 유오자스 룩샤는 1947년 말 동료 둘과 함께 철의 장막을 넘어, 파르티잔이 모은 소련의 탄압·살해·추방에 관한 자료와 교황 비오 12세에게 지원을 청하는 편지를 서방에 전했다. 그는 스웨덴을 거쳐 프랑스와 서독에서 프랑스 정보기관과 CIA의 훈련을 받았고, 서방에 머무는 동안 1944~1947년 파르티잔 활동의 기록 『자유를 위한 투사들』을 썼다. 1949~1950년 사이 CIA의 낙하산으로 리투아니아에 돌아온 그는 1951년 가을 MGB에 살해되었다. 한편 여러 목격자는 그가 1941년 카우나스의 리에투키스 차고 학살에 가담했다고 증언했으나, 리투아니아 정부는 이를 부인한다. 23 19

1949년 2월 미나이치아이 마을의 벙커에 모든 파르티잔 지휘관이 모여 중앙 지휘부인 리투아니아 자유 전사 연합(LLKS)을 세우고, 직업 장교 출신 요나스 제마이티스를 간부회 의장으로 뽑았다. 1918년 독립선언 31주년인 2월 16일 연합은 스스로를 리투아니아의 최고 정치·군사 권력으로 선포하는 선언을 채택했다. 선언은 회복될 리투아니아가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민주국가여야 한다고 하면서 공산당을 범죄 조직으로 규정했고, 의장의 제1대리가 된 아돌파스 라마나우스카스도 서명자의 한 사람이었다. 선언 문서는 KGB가 보관한 덕에 남았고, 독립 회복 뒤 리투아니아 의회는 이를 공식 법령으로 인정했다. 제마이티스는 2009년 리투아니아의 제4대 대통령으로 공식 인정되었다. 24 25 19 22 26

진압: MGB, 섬멸대대, 침투 공작

독일군이 물러난 뒤 섬멸대대가 다시 만들어졌다. 1941년 독일의 침공 직후 NKVD 아래 창설된 이 준군사 조직은 전후에 현지 지원자로 꾸려졌고, 1941년의 악명 때문에 1945~1946년 「인민 방위」로 이름을 바꾸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러시아어 「이스트레비텔리」(파괴자)에서 따 이들을 「스트리바이」라 불렀다. 섬멸대대는 숲의 형제들을 돕거나 도울 만한 민간인을 위협하고 매복과 수색에 나섰으며, 농민들에게 벌목·토탄 채굴·도로 공사 의무를 강요하는 등 농촌에서 소비에트 정책을 집행하는 무력이었다. 저항을 빠르게 없애는 효율적인 전투 부대는 되지 못했지만, 말과 사람과 지형을 아는 현지인으로서 보안기관과 내무군에 귀중한 보조 전력이 되었다. 조직은 1954년 해체되었고, 에스토니아 의회는 2002년 이를 범죄 조직으로 규정했다. 27 19

MGB는 고문과 즉결 처형, 가족 추방으로 파르티잔을 압박했고, 처형한 파르티잔의 시신을 마을 마당에 전시해 주민을 겁주었다. 붙잡히면 고문을 당하고 가족이 화를 입을 것을 알았던 파르티잔은 수류탄 하나를 자폭용으로 남겨 두곤 했다. 결정적인 무기는 침투였다. 1940년대 말부터 영국 MI6과 미국·스웨덴 정보기관이 숲의 형제들에게 물자와 연락원을 보냈으나, 소련을 위해 일한 영국 정보기관원들이 정보를 넘기면서 MI6의 정글 작전은 크게 무너졌고, MGB는 많은 부대를 찾아내 침투하고 없앨 수 있었다. 1945~1954년 서방이 라트비아로 보낸 요원 약 25명도 대부분 체포되었다. 서방에 있는 소련 첩자들과 저항 조직 안의 침투자가 모은 정보에 1952년의 대규모 작전이 더해져, 1950년대 초에는 저항 대부분이 꺾였다. 19 20 21

1944~1953년의 테러는 누구도 안전하다고 느낄 수 없게 했다. 이 기간 리투아니아에서는 18만 3,000명이 체포되어 14만 2,000명이 굴라크로 보내졌고, 라트비아에서는 8만 8,000명이 감옥과 수용소로 보내져 적어도 2,321명이 처형되었으며, 에스토니아에서는 적어도 3만 4,800명이 정치적 이유로 체포되고 900명이 처형되었다. 소련 자료에 따르면 에스토니아에서는 1953년까지 파르티잔 2만 351명이 「제압」되어 그 가운데 1,510명이 전투에서 죽었고, 숲의 형제들의 손에 붉은군대·NKVD·에스토니아 경찰 1,728명이 죽었다. 라트비아 당국은 저항 기간 전체에 소련 측 1,562명이 죽고 560명이 다쳤다고 보고했다. 리투아니아의 희생은 파르티잔과 지지자를 합쳐 약 3만 명으로 추산되며, 파르티잔 전사만 2만 명이 넘는다는 서술도 있다. 발트 숲속 전쟁 전체의 사망자는 적어도 5만 명이다. 20 7 19 9

토지에서 콜호스로: 추방의 물결 (1945–1951)

재점령 뒤 1940년의 국유화가 되살아났다. 에스토니아에서는 몇 해 사이 90만 헥타르가 넘는 땅이 몰수되어 상당 부분이 러시아 등지에서 온 새 정착민에게 넘어갔고, 라트비아에서는 피난민의 농장이 몰수되고 독일 지지자의 농지가 크게 줄었으며 남은 농민의 세금과 의무 공출량이 개인 영농을 할 수 없을 만큼 올랐다. 1947년 5월 21일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에스토니아 농업의 집단화를 승인했고, 리투아니아에서도 1947년 집단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무거운 세금과 선전에도 1948년 말까지 콜호스에 들어간 농가는 리투아니아와 에스토니아에서 약 3%에 그쳤다. 당국은 1930년대 초의 집단화 경험을 빌려 쿨라크를 주된 장애물로 지목하고 탄압했다. 7 8 9 28

추방도 곧 다시 시작되었다. 1944년 10월 체첸인과 인구시인의 추방을 겪어 본 세르게이 크루글로프 등은 징집을 피해 파르티잔에 들어간 「도적」의 가족을 추방하자는 구상을 돌렸다. 1945년 5월에는 리투아니아의 독일계 주민 약 1,000명이 타지키스탄 바흐시강 유역의 목화 농장으로 보내져 첫 두 해에 약 580명이 죽었고, 에스토니아에서도 8월 독일계를 중심으로 407명이 페름주로 옮겨졌다. 리투아니아에서는 1946년 2월 네 개 군에서 추방이 시작되었고 1947년 12월과 1948년 1~2월에도 이어졌다. 1948년 5월 22~24일 MGB는 베스나(봄) 작전으로 숲의 형제들과 그 가족, 「쿨라크」를 포함한 조력자를 리투아니아에서 추방했다. 공식 집계는 4만 9,331명이지만 3만 9,766명이나 4만 7,534명이라는 수치도 있으며, 이들은 특별이주민 신분으로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 이르쿠츠크주 등지로 보내졌다. 6 29 9 30

1949년 1월 18일 스탈린은 세 공화국 지도자들을 불러 보고를 받았고, 그날 정치국은 대규모 추방을 결정했다. 1월 29일 소련 각료회의는 극비 결정 제390-138ss호로 「쿨라크, 민족주의자, 도적」과 그 지지자·가족의 추방을 승인하며 리투아니아 2만 5,500명, 라트비아 3만 9,000명, 에스토니아 2만 2,500명의 할당량을 정했다. 2월 28일 국가보안장관 빅토르 아바쿠모프가 MGB 명령 제0068호에 서명했고, MGB 차관 세르게이 오골초프가 MGB의 역할 전체를, 표트르 부르마크 중장이 리가에 본부를 두고 MGB 부대를 지휘했다. 「군사 훈련」을 구실로 8,850명의 병력이 더 들어왔다. 3월 25일 새벽부터 MGB 요원 셋, 섬멸대대원 둘, MGB가 무장시킨 현지 당 활동가 넷이나 다섯으로 이루어진 작전조가 가족들을 끌어냈고, 화물열차는 평균 2주, 길게는 한 달 가까이 달렸다. 28

3월 25~28일의 프리보이 작전으로 9만 명이 넘는 사람이 시베리아 등지로 추방되었다. 공화국별 수치는 자료마다 다르다. 리투아니아는 2만 8,656명 또는 2만 8,981명(4월의 추가 추방까지 약 3만 2,000명), 라트비아는 4만 2,113~4만 3,000명, 에스토니아는 2만 722명이다. 추방자의 약 72%가 여성과 16세 미만 어린이였고, 내무장관 세르게이 크루글로프는 5월 18일 스탈린에게 의지할 데 없는 노인 2,850명과 부양할 부모가 없는 어린이 1,785명이 포함되었다고 보고했다. 추방은 「영구」였고 탈출 시도에는 20년 중노동이 걸렸으며, 1950년 말까지 4,123명(4.5%)이 죽었는데 그 가운데 2,080명이 어린이였다. 에스토니아의 집단화율은 3월 20일 8%에서 4월 20일 64%로, 라트비아는 11%에서 50% 이상으로 뛰었고, 그해 말 에스토니아는 80%, 라트비아는 93%에 이르렀다. 62%에 머문 리투아니아에서는 1951년 가을 2만 명이 넘는 사람을 다시 추방한 오센(가을) 작전이 이어졌다. 28 6 9 31 29

「부르주아 민족주의」와의 싸움 (1949–1952)

1949년 스탈린은 중앙에서 더 독립하려 한다는 의심을 받는 지방 지도부를 다잡으려 새 숙청에 나섰다. 러시아 역사가 옐레나 주브코바는 크렘린의 전후 발트 정책을 집단화를 미루고 탄압을 주로 저항 운동에 겨누었던 1944~1947년과, 1947년 중반부터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직접적인 획일화와 대규모 탄압이 이루어진 시기로 나눈다. 레닌그라드 사건의 여파 속에서 레닌그라드 당 지도부와 가깝다고 여겨진 에스토니아 당 지도부도 표적이 되었다. 한 개인의 거듭된 투서를 계기로 중앙위원회가 조사를 시작했고, 1949년 12월 파견된 조사단은 카로탐이 「정치적 신뢰를 얻지 못한 옛 부르주아 간부」에 기대고 쿨라크를 비호한다고 보고했다. 조사단에 가장 깊은 인상을 준 것은 공화국 지도부에 부르주아 민족주의 성향의 인물이 많다고 거듭 경고했다는 요한네스 캐빈의 진술이었다. 카로탐은 말렌코프와 스탈린에게 편지를 써 간부 선발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세 해 동안 교사 1,022명을 정치적 이유로 해임하고 1만 2,000명을 체포·처벌했으며 1949년 3월 「쿨라크·민족주의 분자」를 추방했다고 내세웠다. 32

1950년 1월 공화국 국가보안장관 보리스 쿰이 해임되었고, 3월 7일 정치국은 에스토니아 지도부가 부르주아 민족주의와의 싸움에 소홀했다는 결정을 승인했다. 3월 21~26일 탈린에서 열린 에스토니아 공산당 제8차 전원회의에서는 중앙위원회를 대표한 판텔레이몬 포노마렌코가 고발 연설을 했고, 카로탐은 제1서기에서 물러나 요한네스 캐빈으로 교체되었다. 곧바로 숙청이 시작되어 3월 24일 니골 안드레센이 체포되어 25년형을 받았고, 한스 크루스와 헨드리크 알리크 등이 당에서 쫓겨난 뒤 체포되었다. 과학아카데미에서는 한 해 동안 100명 넘게 정치적 이유로 해고되었고, 타르투 대학에서는 교수진 약 200명이 고발되고 학생 약 100명이 제적되었다. 아르놀트 베이메르도 1951년 3월 각료회의 의장에서 해임되었다. 카로탐은 체포를 면하고 5월 모스크바의 사회과학아카데미로 보내졌으나 캐빈의 반대로 다시는 에스토니아로 돌아오지 못했다. 캐빈은 1978년까지 당을 이끌었다. 32 33 11 14

다른 두 공화국은 사정이 달랐다. 스니에치쿠스는 1949~1950년 지하 시절의 옛 공산주의자 동지들을 박해에서 지켜 내며 처음으로 모스크바와 맞섰고, 리투아니아는 옛 공산주의자에 대한 대규모 박해가 없었을 뿐 아니라 소비에트 이전 시기의 공산주의자가 단 한 명도 기소되거나 체포되지 않은 소련의 유일한 공화국이 되었다. 라트비아에서는 칼른베르진슈와 빌리스 라치스가 자리를 지켰지만, 1949년 3월 리가시 선전선동부의 비전임 강사 30명 가운데 라트비아어를 아는 사람이 8명뿐이었을 만큼 바깥에서 온 간부가 많았다. 1949년 무렵 세 나라 모두에서 토박이 공산주의자는 당원의 약 3분의 1이었고, 다섯 해의 점령 뒤에도 당에 들어간 사람은 리투아니아인의 0.3%, 라트비아인과 에스토니아인의 0.7%에 그쳤다. 10 17

이주, 산업, 교회 — 그리고 1953년

전후 재건은 대규모 이주와 함께 왔다. 「스탈린 민족 정책에 따른 형제적 도움」이라는 이름으로 수십만 명의 러시아어 사용자가 주로 도시로 옮겨 와, 에스토니아의 도시 인구는 1945~1950년 26만 7,000명에서 51만 6,000명으로 늘었고 그 증가분의 90% 이상이 새 이주민이었다. 주택은 돌아온 전쟁 피난민보다 이주민에게 먼저 배정되었다. 소련 계획가들은 에스토니아 북동부의 오일셰일 채굴을 키워 제4차 5개년 계획의 에스토니아 투자 가운데 40%를 그 기반 시설에 배정했는데, 1948년부터 오일셰일 가스가 전용 관을 따라 레닌그라드로 보내진 반면 탈린에는 1953년에야 들어왔다. 라트비아에는 1945~1955년에만 53만 5,000명의 이주민이 들어왔고, 리가는 군사 도시가 되었다. 에스토니아인의 비율은 1934년 88%에서 1959년 75%로, 라트비아인의 비율은 1940년 약 79%에서 1989년 52%로 떨어졌다. 7 17 8

교회도 탄압을 받았다. 리투아니아에서는 국가 무신론과 파르티잔 투쟁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관여 때문에 박해가 거세져, 사제와 신자가 체포·추방되고 교회가 문을 닫았으며 새 사제의 양성이 특히 제한되었다. 텔샤이의 빈첸타스 보리세비추스 주교는 서방으로 피하지 않고 남았다가 1945년 12월과 1946년 2월 NKVD에 체포되었고, 협력하면 사면하겠다는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파르티잔에게 가짜 서류를 주었다는 등의 혐의로 8월 28일 사형을 선고받았고 11월에 처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테오필리우스 마툴리오니스 주교는 1946년 사목 서한을 냈다는 이유로 다시 10년형을 받았고, 빌뉴스 대주교 메치슬로바스 레이니스도 투옥되었으며, 1950년 국가는 빌뉴스 대성당을 교회에서 빼앗았다. 1951년에는 여호와의 증인 등 금지된 종교 집단의 신자들이 발트 3국과 몰도바, 서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에서 강제 이주되었고, 라트비아에서는 칼른베르진슈가 정교회의 베니아민(페드첸코프) 수도대주교를 리가에서 물러나게 했다. 34 35 36 29 12

서방은 병합을 끝내 법적으로 승인하지 않았다. 미국과 영국은 1945년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발트 점령을 사실상 인정했지만, 1940년 7월 23일의 웰스 선언에 따라 대부분의 서방 민주국가와 함께 병합을 법적으로는 승인하지 않았고, 옛 정부의 이름으로 활동하는 발트 3국의 외교관과 영사를 계속 인정했다. 1947년 망명 외교관들은 점령에 관한 공동 서한을 유엔에 보냈고, 1949년 3월 26일 미 국무부는 발트 3국이 여전히 자신의 외교 대표를 둔 독립국이라는 회람을 냈으며, 1950년 7월 27일 망명 외교관들은 「집단 학살적 대량 추방」에 대한 유엔 조사를 지지해 달라고 미국에 호소했다. 그러나 소련이 안전보장이사회에 있는 한 발트 문제는 유엔의 공식 의제에 오르지 못했다. 서방이 소련과 전쟁을 벌여 발트를 해방하리라는 숲의 형제들의 희망도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7 37 29 20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 내무장관이 된 라브렌티 베리야는 비러시아 민족의 처우 개선을 내세웠다. 그가 준비한 초안에 따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간부회는 5월 26일 리투아니아, 6월 12일 라트비아에 관한 비밀 결정을 내려 토착 간부의 등용을 서두르게 했고, 6월 전반 라트비아·에스토니아·리투아니아 공산당이 이를 받아들이는 전원회의를 열었다. 베리야는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 내무부의 지도부를 모두 민족 간부로 바꾸라고 지시했고, 라트비아에서는 러시아인 관리 여럿이 해임되었다. 같은 무렵인 5월 30일, 뇌출혈로 마비된 채 숨어 지내던 요나스 제마이티스가 체포되어 모스크바에서 베리야에게 직접 심문을 받았다. 그러나 베리야는 6월 26일 체포되었고, 그의 「민족」 결정들은 7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철회되었다. 파르티잔 지도부는 1953년에 무너졌는데, 1952년 연합을 이어받은 아돌파스 라마나우스카스는 이미 무장 투쟁을 멈추고 수동적 저항으로 돌아서라고 명령한 뒤였다. 제마이티스는 1954년 부티르카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38 39 8 26 19 22

결과

1953년 파르티잔 지도부는 무너졌고, 마지막 지휘관 라마나우스카스는 1956년에 체포되었다. 1944~1955년의 추방자는 에스토니아 12만 4,000명, 라트비아 13만 6,000명, 리투아니아 24만 5,000명으로 모두 50만 명이 넘는다는 추정이 있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의 민족 구성은 이주로 크게 바뀌었고, 서방의 병합 불승인은 발트 3국의 법적 연속성 원칙으로 남아 1991년의 독립 회복으로 이어졌다.

연표와 지도

빌뉴스 탈린 리가 리에파야 (쿠를란트) 크라스노야르스크 모스크바 미나이치아이 파바르투피스 메르키네 2 탈린 3 리가 4 리에파야 (쿠를란트) 6 크라스노야르스크 7 미나이치아이 8 파바르투피스 1 빌뉴스 5 메르키네
  1. 11944.07.13소련독일리투아니아
    빌뉴스 함락

    바그라티온 작전의 빌뉴스 공세 끝에 붉은군대가 빌뉴스를 점령했다.

  2. 1944.09.14소련독일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발트 전략 공세

    네 개 전선군이 11월 24일까지 독일 북부집단군을 몰아냈다.

  3. 21944.09.22소련에스토니아스웨덴
    탈린 점령

    레닌그라드 전선군이 탈린에 들어왔고 울루오츠는 스웨덴으로 피신했다.

  4. 1944.09.28에스토니아
    카로탐 제1서기

    에스토니아 공산당 전원회의가 카로탐을 제1서기로 뽑았다.

  5. 31944.10.13소련라트비아
    리가 점령

    제3발트 전선군이 리가를 점령했다.

  6. 1944.11.11소련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뷰로

    중앙위원회가 에스토니아 당을 감독할 뷰로를 세웠다(1947년 6월 해체).

  7. 41945.05.10독일소련라트비아
    쿠를란트 항복

    독일 항복 이틀 뒤 쿠를란트 집단군이 항복했다.

  8. 1945.07리투아니아
    「사면」과 합법화

    1957년의 소련 보고에 따르면 리투아니아에서 3만 8,838명이 숲에서 나왔다.

  9. 51945.12.15리투아니아
    메르키네 습격

    라마나우스카스가 이끈 파르티잔이 메르키네를 공격해 소련 기록을 없앴다.

  10. 1946.11리투아니아
    보리세비추스 처형

    텔샤이 교구장 보리세비추스가 처형된 것으로 여겨진다.

  11. 1947.05.21소련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집단화 승인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에스토니아 농업의 집단화를 승인했다.

  12. 61948.05.22소련리투아니아
    베스나 작전

    24일까지 약 4만~4만 9,000명이 리투아니아에서 추방되었다.

  13. 1949.01.29소련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결정 제390-138ss호

    소련 각료회의가 세 공화국의 추방 할당량을 정했다.

  14. 71949.02.16리투아니아
    2월 16일 선언

    리투아니아 자유 전사 연합이 최고 정치·군사 권력임을 선포했다.

  15. 1949.03.25소련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프리보이 작전

    28일까지 9만 명이 넘는 사람이 추방되었다.

  16. 1950.03.21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제8차 전원회의

    26일까지 이어진 전원회의에서 카로탐이 물러나고 캐빈이 제1서기가 되었다.

  17. 81951.09.04리투아니아
    룩샤 사망

    서방에서 돌아온 룩샤가 MGB에 살해되었다.

  18. 1951.10소련리투아니아
    오센 작전

    리투아니아에서 2만 명이 넘는 사람이 다시 추방되었다.

  19. 1952리투아니아
    라마나우스카스의 지휘

    제마이티스가 건강 때문에 물러나자 연합을 이끌며 무장 투쟁 중단을 명령했다.

  20. 1953.03소련
    스탈린 사망

    베리야가 내무장관이 되었다.

  21. 1953.05.26소련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에 관한 결정

    중앙위원회 간부회가 베리야의 초안대로 토착 간부 등용을 서두르게 했다.

  22. 1953.05.30소련리투아니아
    제마이티스 체포

    마비된 채 숨어 지내던 제마이티스가 체포되었다.

  23. 1953.06.26소련
    베리야 체포

    7월 전원회의가 그의 민족 결정을 철회했다.

관련 인물 25명

참여9

라트비아 SSR 각료회의 의장빌리스 라치스1904–1966

1940년부터 1959년까지 정부 수반이었으나 대체로 허수아비로 여겨졌고, 라트비아 숲의 형제들의 암살 표적이 되었다.

리투아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의장유스타스 팔레츠키스1899–1980

형식상 리투아니아 SSR의 최고 권위였지만 실권은 당 제1서기 스니에치쿠스에게 있었다.

소련 부총리, 1953년 내무장관라브렌티 베리야1899–1953

1944년 스니에치쿠스의 항의를 스탈린에게 전했고, 1953년 토착 간부 등용 결정을 밀어붙였으며 체포된 제마이티스를 직접 심문했다.

제1발트 전선군 사령관이반 바그라먄1897–1982

발트 전략 공세에서 제1발트 전선군을 지휘했다.

제2발트 전선군 사령관안드레이 예료멘코1892–1970

발트 전략 공세에서 제2발트 전선군을 지휘했다.

제3발트 전선군 사령관이반 마슬렌니코프1900–1954

제3발트 전선군을 지휘해 1944년 10월 13일 리가를 점령했다.

레닌그라드 전선군 사령관레오니트 고보로프1897–1955

레닌그라드 전선군이 1944년 9월 탈린을 점령했고, 1945년 5월 쿠를란트 집단군 사령부의 항복을 받았다.

독일 총통아돌프 히틀러1889–1945

쿠를란트에 갇힌 북부집단군을 철수시키자는 건의를 거부했다.

독일 육군 참모총장하인츠 구데리안1888–1954

쿠를란트의 병력을 철수시켜 중부 유럽 전선에 쓰자고 건의했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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