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서 1932~1933년에 수백만 명이 굶주려 죽은 이유는 무엇인가?
홀로도모르는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인위적 기근으로, 약 390만 명이 아사한 재앙이다. 직접적 원인은 스탈린 지도부가 강제 집단화와 가속화된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우크라이나에 설정한 감당할 수 없는 곡물 공출 할당량이었다. 1931년 수확량이 급감했음에도 공출 목표는 오히려 유지되었고, 1932년 가을부터는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 같은 크렘린 특사들이 직접 파견되어 곡물을 샅샅이 수탈했다. 공출에 실패한 마을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경제 봉쇄를 당했고, 1933년 1월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우크라이나와 쿠반의 국경을 봉쇄해 굶주린 농민들이 식량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했다. 기근은 소련 전체 곡창지대를 덮쳤지만 우크라이나에서 희생이 가장 컸으며, 소비에트 당국은 1987년 말까지 기근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대전환 직전의 우크라이나: 곡창, 문화혁명, 그리고 다가오는 파열음
1920년대 후반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는 세 가지 모순된 힘이 한 몸에 작용하는 공간이었다. 하나는 소련 전체 곡물 생산의 27%를 담당하는 곡창 지대라는 경제적 지위, 또 하나는 미콜라 스크리프니크가 이끄는 우크라이나화(코레니자치야의 가장 야심찬 실험)가 만들어낸 문화적 역동성,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크렘린이 점점 더 무겁게 내리누르는 공업화의 압력이었다.
네프 아래 우크라이나 농촌은 1921년 기근의 상처에서 빠르게 회복했다. 1921년 레닌이 잉여곡물 강제징발(프로드라즈베르스트카)을 현물세(프로드날로그)로 대체하면서 농민은 세금을 낸 나머지 곡물을 시장에서 팔 수 있게 되었다. 1926년까지 우크라이나의 곡물 생산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 수준을 거의 회복했고, 돼지 사육 두수는 700만 마리, 소는 860만 마리에 달했다. 하지만 회복의 바탕에는 2,500만 개에 달하는 소규모 개별 농가들이 있었고, 이들은 시장 가격이 낮으면 곡물을 팔지 않고 소비하거나 저장했다. 소비에트 당국의 시각에서 이는 도시 노동자와 수출 계획을 위협하는 구조적 문제였다.
1927~1928년 곡물조달위기가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1927년 1월까지 4억 2,800만 푸드의 곡물이 조달되었으나 1928년 1월에는 겨우 3억 푸드에 그쳤다. 스탈린은 부농(쿨라크)이 곡물을 '은닉'하고 있다고 규정하고, 시베리아와 우랄에서 처음 시험된 우랄-시베리아 방식(형법 제107조를 적용한 강제 압수)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는 네프의 종말을 예고하는 중대한 분기점이었다.
당 내부에서는 치열한 노선 투쟁이 벌어졌다. 니콜라이 부하린은 농민에 대한 시장 유인책과 점진적 집단화를 주장하며 '우익 편향'의 대표자가 되었고, 이미 제거된 레프 트로츠키의 좌익반대파는 급속한 공업화와 농업 잉여의 강제 추출을 주장했었다. 스탈린은 1928년까지 부하린 편에 서서 트로츠키의 초공업화론을 공격했으나, 곡물조달위기를 겪으며 정반대 방향으로 급선회했다. 그가 채택한 길은 트로츠키도 제안하지 않았던 전면적 강제 집단화였다.
우크라이나에는 특수한 층위가 하나 더 있었다. 1923년 시작된 우크라이나화는 1927년까지 우크라이나 공산당 당원의 47%가 우크라이나인이 되고, 정부 기관의 56.5%가 우크라이나인으로 채워질 만큼 실질적 성과를 거두었다. 스크리프니크는 우크라이나어 학교, 출판, 학술원을 확장하며 소비에트 체제 안에서 우크라이나 민족 문화의 제도화를 추진했다. 이는 모스크바의 일부 당 간부들에게 '지방 민족주의'의 온상으로 비쳐졌고, 곡물 공출을 둘러싼 갈등과 결합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29년 가을, 우크라이나 농경지의 3.7%만이 집단화된 상태였다. 당초 1차 5개년 계획은 1932년 말까지 경지의 10% 정도를 집단화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1929년 11월, 스탈린은 프라우다에 「대전환의 해」를 발표하며 이 모든 점진적 계획을 폐기했다. 12월 27일에는 '계급으로서의 쿨라크 청산'이 공식 강령으로 선포되었다. 우크라이나라는 거대한 곡창에 대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곡물 위기에서 '대전환'으로: 네프의 종말과 강제 집단화의 발진
1927년 가을, 소비에트 정부는 곡물 수매가 계획보다 200만 톤이나 모자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탈린은 원인을 쿨라크의 '고의적 사보타주'로 규정하고 1928년 1월 시베리아와 우랄에서 이른바 '우랄-시베리아 방식'이라 불리는 강제 수매를 개시했다. 형법 107조를 무기로 당 간부와 OGPU가 마을을 봉쇄하고 곡물을 수색했으며, '투기꾼과 쿨라크'를 체포해 재산을 몰수했다. 이 비상 조치는 당내에서 즉각 균열을 일으켰다.
정치국 내에서 니콜라이 부하린, 알렉세이 리코프, 미하일 톰스키는 이러한 '전시공산주의적' 강제 수매에 반대했다. 부하린은 1928년 9월 「한 경제학자의 수기」에서 공업화 속도를 재조정하고 농민에 대한 시장 유인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1929년 1월에는 스탈린의 노선을 '봉건-군사적 농민 착취'라고 비판했다. 스탈린은 이들을 '우익 편향'으로 낙인찍고 1929년 4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공개 공격했다. 부하린은 정치국에서, 톰스키는 노조 지도부에서 축출되었고, 리코프는 총리직을 유지했으나 실권을 잃었다.
1929년 11월 7일, 혁명 12주년을 맞아 프라우다에 실린 스탈린의 논설 「대전환의 해」는 네프의 종언을 공식 선언했다. 스탈린은 '중농이 집단농장으로 들어왔고' 곡물 위기가 해소되었다고 주장하며, 부하린 일파의 '개별 농민 경영이 사회주의로 가는 큰길'이라는 주장을 '부르주아 낡은 넝마'라 부르며 조롱했다. 이어 11월 10일부터 17일까지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부하린을 정치국에서 제명하고 전면적 집단화 노선을 채택했다.
12월 27일, 마르크스주의 농업연구자 회의에서 스탈린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는 쿨라크의 착취적 경향을 제한하는 정책에서 계급으로서의 쿨라크를 청산하는 정책으로 이행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닷새 뒤인 1930년 1월 5일, 중앙위원회는 「집단화 속도와 집단농장 건설에 대한 국가 원조 조치에 관하여」를 채택했다. 이 결의는 주요 곡창지대(북캅카스, 볼가 중·하류, 우크라이나 스텝)의 집단화를 1931년 가을까지, 그 외 곡창지대는 1932년 봄까지 완료하도록 명령했다. 쿨라크 청산의 공식적 근거도 이 결의에서 마련되었다.
1950년대 소비에트 사료는 집단화를 '농민 대중의 자발적 운동'으로 서술했지만, 이 결의가 명시한 것은 자발성이 아니라 행정적 속도표였다. 1929년 10월 7.5%에 불과했던 집단화율은 1930년 2월 52.7%로 폭등했고, 곡물 공출 할당량은 1929년 828만 톤에서 1930년 우크라이나에만 722만 톤이 책정되는 등 비현실적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우크라이나 공산당 지도부는 1929년 12월 자체 결의에서 1930년 10월까지 집단화율 21.6%를 계획했으나, 크렘린의 1월 5일 결의는 이 모든 지역 계획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강제 집단화는 이로써 실행 단계에 진입했고, 그 파괴력은 2년 뒤 우크라이나 들판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날 것이었다.
약탈당한 수확: 1931년의 종자 없는 겨울과 침묵으로 응답된 호소
1930년 우크라이나는 2,230만 톤이라는 기록적인 수확을 냈고, 모스크바는 그중 770만 톤을 공출했다. 소련 전체 곡물 조달량의 38퍼센트에 해당하는 양이었고, 나머지 4대 곡창지대(북캅카스, 중앙흑토, 중·하류 볼가)의 공출량을 합친 것과 맞먹었다. 1931년의 수확은 달랐다. 공식 통계로는 1,830만 톤, 이미 전년 대비 18퍼센트 감소였지만, 실제 수확량은 1,380만 톤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크다. 악천후도 한몫했으나 결정적 요인은 따로 있었다. 강제 집단화로 농민들의 노동 의욕이 꺾였고, 쿨라크로 낙인찍혀 추방된 유능한 농민들의 공백을 메울 수 없었다. 전체 초안동물의 절반 이상이 집단화 저항 과정에서 도살되거나 방치되어 죽었고, 트랙터 보급은 약속에 크게 못 미쳤다. 파종도 제때 못 했고 잡초는 만연했으며, 1931년 수확기에는 최대 40퍼센트의 곡물이 밭에서 손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렘린이 1931년 수확에 대해 우크라이나에 부과한 공출 할당량은 722만 톤, 전년과 거의 동일했다. 수확량이 급감했는데도 공출 목표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12월 말, 공출 실적이 목표에 크게 미달하자 스탈린은 인민위원회의장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를 직접 우크라이나로 파견했다. 몰로토프의 압박 아래 우크라이나 공산당 정치국은 12월 29일 '공출 계획의 완수는 무조건적 의무'라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 결정으로 종자 곡물과 사료용 곡물까지 몰수되었고, 공출 캠페인은 1932년 3월까지 연장되었다. 콜호스에서 일한 대가로 받은 약간의 현물 배급마저 압수당한 농민들도 있었다.
1932년 봄이 되자 기근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농민들은 식량을 찾아 RSFSR과 벨로루시로 대거 이주하기 시작했다. 남은 자들은 영양실조와 탈진 상태에서 봄 파종을 해야 했고, 쇠약해진 가축으로는 제대로 된 경작이 불가능했다. 밭의 상당수는 늦게 파종되거나 아예 방치되었고, 잡초가 다시 들끓었다.
이때 우크라이나 지도부 내에서 균열이 생겼다.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 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는 1932년 4월 스탈린에게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있다는 이야기는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굶주리는 마을들은 현지 관리들의 무능 탓일 뿐"이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장 그리고리 페트롭스키는 이미 2월부터 코시오르에게 공출 중단과 식량 원조를 호소하고 있었다.
절정은 1932년 6월 10일이었다. 페트롭스키와 정부 수반 블라스 추바리가 각각 스탈린과 몰로토프 앞으로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추바리는 키예프·빈니차 지역의 굶주린 마을들을 15일간 직접 돌아본 뒤 이렇게 썼다: "나는 많은 마을을 방문했고, 사람들이 도처에서 굶주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자들은 울고 있었고, 남자들조차 때로는 울먹였습니다. 우리는 수확을 했는데 왜 전부 빼앗아 갔습니까? 옛 체제 아래서도 아무도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추바리는 100만 푸드(1만 6천 톤)의 긴급 구호 곡물을, 페트롭스키는 150만 푸드를 요청했다. 두 사람 모두 "농민이 너무 쇠약해지면 1932년 수확은 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탈린은 답하지 않았다. 대신 6월 12일 몰로토프는 당 고위 간부 회의에서 "우리가 오늘 굶주림의 망령과 마주하더라도 공출 계획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완수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6월 18일 스탈린은 카가노비치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크라이나의 문제를 "지난 공출 캠페인에 대한 기계적 접근" 탓으로 돌리면서도, 1932년 공출 계획을 완화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분명히 했다. 6월 21일 양인은 우크라이나 당 지도부에 "콜호스와 솝호스의 공출 의무량 감축은 어떠한 경우에도 허용되지 않으며, 기한 연장도 없다"는 전문을 보냈다. 우크라이나 지도부의 구호 요청은 거부된 것이 아니라 묵살된 것이었다. 이로부터 한 달 뒤, '이삭 세 개 법'이 채택된다.
죽음을 명문화하다: 이삭 다섯 개 법과 마을 블랙리스트
1932년 8월 7일, 소련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위원회 평의회는 「국영기업·집단농장·협동조합의 재산 보호와 사회주의적 공공재산의 강화에 관하여」라는 결의를 채택했다. 미하일 칼리닌,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아벨 예누키제가 서명한 이 법령은 전문에서 사회주의적 재산을 '신성불가침'이라 선언하고, 그에 대한 절도 행위를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적대 행위로 규정했다. 제2조는 집단농장과 협동조합 재산의 절도에 대한 처벌로 전 재산 몰수와 함께 총살형을 규정했고, 정상을 참작할 경우에도 최저 10년형과 전 재산 몰수를 명시했다. 사면은 명시적으로 금지되었다. 1932년 9월에 배포된 적용 지침은 '쿨라크, 전직 상인 및 기타 사회적으로 이질적인 요소들'과 조직적·체계적 절도 사건에 사형을 적용하라고 지시했다.
농민들은 이 법을 '이삭 다섯 개 법'이라 불렀다. 수확이 끝난 들판에서 빈손의 아이가 주울 수 있는 이삭의 개수였다. 이 법은 이삭 줍기를 사형 범죄로 만들었다. 안드레이 비신스키 검찰총장은 이후 소책자를 발간하여, 수확 후 들판에 남은 이삭도 국가 재산이며 그것을 줍는 자는 누구든 절도범이라고 주장했다. 법 시행 첫 5개월 동안 RSFSR에서만 15만 명이 이 법령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중 3.5%인 약 782명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대부분은 10년형을 받았다. 우크라이나 SSR에서는 1933년 한 해에만 1만 2,767명이 같은 조항으로 처벌받았다.
이 법령이 특별히 중요한 것은 그 타이밍과 기능 때문이다. 1932년 여름, 종자마저 몰수당한 겨울을 보낸 우크라이나 농촌에 굶주림의 첫 조짐이 퍼지고 있을 때 제정되었다. 페트롭스키와 추바리는 6월에 스탈린에게 굶주린 농민들이 덜 익은 곡식을 뜯어내리라고 경고했지만, 스탈린이 내놓은 답은 바로 그 행위를 사형으로 다스리는 법이었다. 이 법이 기근을 일으킨 것은 아니지만, 기근에 맞서는 민간의 생존 수단을 박탈했다. 식량이 사라진 마을에 남은 유일한 생존 전략인 들판의 잔여 곡물 수집이 사형 범죄로 재정의된 것이다.
석 달 후, 정권은 개인의 생존을 범죄화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동체 전체를 처벌하기 시작했다. 1932년 11월 18일, 하리코프에서 몰로토프의 직접 지휘 아래 열린 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정치국은 「곡물 공출 강화 조치에 관하여」라는 결의를 채택했다. 이것이 바로 '흑판'(초르나 도슈카) 제도였다. 곡물 공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집단농장, 마을, 나아가 행정구역 전체가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처벌은 전면적이었다. 모든 국영·협동조합 상점 폐쇄, 모든 상품 철수, 모든 금전 대출과 곡물 선급의 회수, 사적·집단적 거래의 전면 금지, 그리고 OGPU 부대의 마을 봉쇄. 당과 집단농장 간부들은 숙청·체포되었다. 곡물 공출과 아무 관계없는 교사, 상인, 아이들까지 포함한 모든 주민이 식량 반입도 외부 탈출도 차단된 채 마을에 갇혔다.
이 결의는 소급적 곡물 벌금도 부과했다. 이미 노동일수에 따라 조합원들에게 배분된 곡물도 회수하라고 명령했다. 낼 곡물이 없는 집단농장에는 15개월분 육류 납부량과 1년분 감자 납부량에 해당하는 벌금이 매겨졌다. 이미 고기와 감자마저 몰수당한 마을들에 대한 벌금이었다. 몰로토프는 '말을 듣지 않는' 마을에 성냥, 소금, 등유의 공급마저 차단하라고 지시했다. 코시오르에게는 '사보타주 분자' 처형을 직접 승인할 권한이 주어졌고, 정치국에는 10일에 한 번씩 집계 보고만 올리면 되었다.
1932년 12월 6일, 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위원회 평의회는 모범 표적으로 여섯 마을을 공식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의 베르브카와 하우릴롭카, 하리코프주의 류텐카와 카미야니 포토키, 오데사주의 스뱌토트로이츠케와 피스키였다. 지방 당국도 자체 명단을 뒤따라 작성했다. 역사학자 헤오르히 파파킨의 불완전한 기록 보관소 분석에 따르면, 흑판은 우크라이나 SSR 405개 행정구역 중 252곳, 공화국의 62%, 그리고 최소 996개의 행정·경제 단위를 덮었다.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주는 가장 큰 타격을 받아 주 내 모든 구역에 최소 한 개 이상의 블랙리스트 마을이 있었고, 전체 블랙리스트 집단농장의 절반 이상이 이 주에 집중되어 있었다.
두 조치, 이삭 다섯 개 법과 흑판 제도, 는 확대되는 징벌 구조의 논리적 연결 고리였다. 8월의 법령이 개인이 곡식을 취하는 것을 사형 범죄로 만들었다면, 11월의 결의는 마을에 곡식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집단 사형선고로 바꾸었다. 두 법령은 함께 우크라이나 농촌을 굶주림이 번지는 곳에서 굶주림에 저항하는 모든 수단을 국가가 불법화한 곳으로 변모시켰다.
공출 실패를 민족 문제로 번역한 두 문서
공출 실패를 민족 문제로 번역한 두 문서
1932년 12월 14일의 비밀 법령은 굶주림을 구호의 문제로 다루지 않았다. 제목은 「우크라이나·북캅카스·서부 변경의 곡물 공출에 관하여」였고, 표면의 목표는 우크라이나와 북캅카스가 1933년 1월 말까지 공출 계획을 완수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령은 실적 부진의 원인을 단순한 수확량 부족이나 잘못된 할당에서 찾지 않고, 집단농장과 지역 행정기관에 침투한 ‘페틀류라 분자들’과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저항으로 설명했다. 따라서 해결책도 두 갈래였다. 공출을 더 강하게 밀어붙이는 동시에 당과 소비에트 기관에서 그런 인물을 제거하고, 우크라이나화된 기관의 정책을 ‘시정’하는 것이었다. 우크라이나어를 공공 행정과 교육에서 넓히던 우크라이나화는 농민 다수의 언어로 국가를 운영하려는 볼셰비키의 민족정책이었지만, 이 순간 모스크바 지도부는 그것을 지방 당국의 통제 상실과 민족주의의 통로로 재해석했다.
이 문서가 무엇을 뜻했는지는 지금도 논쟁적이다. 제노사이드 해석은 공출 명령과 우크라이나화 후퇴가 한 문서에 결합된 사실을 들어, 굶주림이 농촌의 저항뿐 아니라 우크라이나라는 정치적 공동체를 꺾는 수단으로 선택되었다고 본다. 반면 로버트 데이비스와 스티븐 휘트크로프트 같은 연구자들은 이 법령의 직접 대상이 우크라이나만이 아니었고, 북캅카스의 쿠반에도 같은 종류의 조치가 내려졌으며, 문서에 주민을 굶겨 죽이라는 명령은 없다고 지적한다. 두 해석이 충돌해도 확인되는 변화는 분명하다. 공출 실패가 경제정책의 실패가 아니라 적의 음모로 규정되면서, 구호를 요구하는 지방 지도자와 식량을 감춘 농민은 협상 상대가 아니라 처벌할 정치적 적으로 바뀌었다.
그 전환을 마을의 문턱까지 가져간 것이 1933년 1월 1일 스탈린의 전보였다. 그는 우크라이나 지도부에 ‘이전에 훔쳐 숨겨 둔 곡물’을 자진해서 내놓는 사람에게는 보복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농촌 소비에트와 집단농장에 널리 알리라고 했다. 문장만 보면 사면의 제안처럼 보이지만, ‘훔친 곡물’이라는 표현은 농민의 생존용 비축까지 범죄의 증거로 만들었다. 자진 신고하지 않으면 가장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는 반대쪽 위협이 붙었고, 전보는 곧 수색의 명분이 되었다. 조사대는 이미 공출한 곡물만 찾지 않았다. 장롱과 지붕, 구덩이를 뒤져 씨앗과 밀가루, 감자와 고기까지 압수하거나 못 쓰게 만들었다. 당국의 논리에서는 이것이 ‘숨긴 국가 곡물’을 회수하는 집행이었고, 농민의 입장에서는 겨울을 버틸 마지막 식량을 국가가 다시 가져가는 일이었다.
그래서 두 문서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같은 결정을 보여 준다. 12월 법령은 굶주림을 민족적·정치적 불충성의 증거로 만들었고, 1월 전보는 그 판단을 각 가정의 식량에 적용했다. 이것이 스탈린이 처음부터 우크라이나인을 절멸시키려 했다는 명령서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지도부가 상황을 알게 된 뒤에도 공출의 우선순위를 낮추지 않고, 생존 비축을 ‘도난’으로 부르며 수색을 확대했다는 사실은 남는다. 기근은 잘못된 정책의 자동적인 결과로만 지속된 것이 아니라, 이미 굶주리는 사회를 적으로 규정한 행정적 선택들에 의해 더 깊어졌다.
굶어 죽은 마을을 다시 채우다: 1933년의 구호, 노동력, 재정착
1933년 6월의 사망 정점은 기근이 단순히 수확 부족의 결과가 아니었음을 가장 잔혹하게 보여준다. 우크라이나 농촌의 초과사망은 그해 봄부터 폭증했고, 6월에는 하루 평균 약 2만 8천 명에 이르렀다. 시신을 묻을 사람과 힘조차 부족해졌으며, 기록에는 부모가 아이에게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한 일, 시체를 먹는 행위와 인육 섭취 수사가 함께 남아 있다. 이 수치는 한 기관의 완전한 일일 집계라기보다 인구통계 연구가 월별 사망 자료를 재구성한 평균치이므로, 마을마다 같은 속도로 죽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국가가 상황을 몰랐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지방 보고서와 보안기관 자료는 굶주림, 탈진, 고아와 방치된 시신을 반복해서 알렸고, 당국은 이를 공개 구호의 근거보다 통제와 노동력 선별의 근거로 다루었다.
모스크바는 1933년 봄 파종을 위해 종자와 식량 대부를 보냈다. 그러나 구호는 모든 주민에게 분배되는 생존 식량이 아니었다. 집단농장에서 아직 일할 수 있다고 판정된 사람들에게 작업반 급식의 형태로 우선 제공되었고, 이미 굶어 쓰러진 사람, 집단농장 밖의 가족, 이주를 시도한 농민은 배제되기 쉬웠다. 지도부의 계산은 이제 바뀌었다. 무제한 공출을 계속하면 다음 수확 자체가 불가능해지므로, 살아남은 노동력을 동원해 파종을 끝내고 생산을 회복해야 했다. 이것은 앞선 정책을 인정하는 구호라기보다, 죽어 가는 농촌을 생산 단위로 보존하려는 위기 관리였다. 사람을 살릴 곡식과 다음 작물을 위한 종자를 분리해 배분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그 결과는 마을의 회복이라기보다 인구를 행정적으로 교체하는 일이었다. 1933년 11~12월 첫 재정착 파동에서 러시아 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의 고리키 변강, 중앙흑토·서부·이바노보 지역과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에서 2만 1,856가구, 정확히 11만 7,149명이 우크라이나의 비워진 집단농장으로 보내졌다. 1934년 1~2월에는 우크라이나 내부와 중앙흑토 지역에서 두 번째 파동이 이어졌다. 행정 문서가 말하는 목적은 분명했다. 기근으로 농민이 사라진 곳에는 곡물을 재배할 사람이 없었고, 국가는 토지와 집단농장을 놀릴 수 없었다. 따라서 이주민은 '구호 대상'이 아니라 생산을 재개할 노동력으로 모집되었다.
이주가 민족 구성을 즉시 바꾸었다는 해석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헤나디 예피멘코가 지역별 명세와 귀환 자료를 대조한 연구에 따르면 외부 이주민 다수는 정착에 실패해 돌아갔고, 1933~1934년 재정착만으로 우크라이나 농촌의 민족 구성이 크게 바뀌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이 정책의 의미가 작아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는 먼저 농민의 생존 조건을 파괴했고, 그 뒤 빈 집과 토지를 생산 계획에 맞춰 다시 배치했다. 6월의 죽음과 겨울의 재정착 사이에서 바뀐 것은 단지 인구의 수가 아니었다. 우크라이나 농촌은 자기 가족과 공동체의 연속성을 지키는 생활공간에서, 국가가 사람을 배치하고 수확을 회수하는 집단농장으로 더욱 철저히 전환되었다.
무엇이 확정되었고, 무엇이 아직 법정에 남아 있는가
이 사건에서 먼저 확정된 것은 명칭이 아니라 인과관계다. 1932~1933년의 대기근은 가뭄만으로 생긴 자연재해가 아니었다. 강제 집단화가 생산과 농촌의 자율성을 무너뜨렸고, 국가가 낮아진 수확에서 곡물을 계속 공출했으며, 압수와 형벌, 이동 제한이 굶주림이 시작된 뒤에도 유지되었다. 따라서 소련 지도부가 기근을 피할 수 있었고, 그 선택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는 논쟁의 여지가 작다. 쟁점은 그 책임의 성격과 우크라이나 특수성이다.
제노사이드론은 라파엘 렘킨의 1953년 강연과 1988년 미국 의회 조사처럼, 농민의 생존 기반 파괴를 우크라이나 민족의 정치적·문화적 중추를 제거한 연쇄 조치로 읽는다. 이 해석에서 1933년 1월 22일 농민의 이탈을 막은 지령, 곡물 비축이 있었는데도 제한적으로만 방출한 구호, 우크라이나화의 후퇴와 지식인 숙청은 하나의 의도를 드러내는 증거다. 안드레아 그라치오지는 기근이 처음부터 민족 절멸을 위해 설계되었다고 단순화하기보다, 집단화와 공출로 발생한 재난이 우크라이나 농촌의 저항과 민족운동을 꺾는 데 의식적으로 이용되었다고 설명한다.
반대 해석도 문서와 수치에서 출발한다. 로버트 데이비스와 스티븐 휘트크로프트는 1931년과 1932년의 나쁜 수확, 공업화의 무리한 속도, 행정적 혼란을 중시하며 정책이 잔혹하고 범죄적이었지만 기근 자체를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존 아치볼드 게티는 우크라이나인을 민족으로 절멸시키라는 명령이 확인되지 않고, 기근이 러시아·카자흐스탄·북캅카스에도 퍼졌다는 점을 든다. 마크 타우거가 1932년 수확량을 공식치보다 훨씬 낮게 추정한 것도 의도론에 불리한 자료로 사용된다. 다만 이는 국가의 책임을 없애지 않는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는 설명도, 이미 굶주림을 안 지도부가 공출과 봉쇄를 우선한 결정을 설명해야 한다.
최근의 계량 연구는 논쟁을 끝내기보다 증거의 단위를 바꾸었다. 안드레이 마르케비치, 나탈리아 나우멘코, 낸시 치안은 지역별 사망률·민족 구성·공출·이동 제한을 결합해, 우크라이나계 인구 비중이 높은 지역일수록 사망과 공출 압박이 컸다고 주장한다. 연구진은 반우크라이나적 정책 편향이 우크라이나 내 기근 사망의 상당 부분을 설명한다고 추정한다. 이 결과는 선택적 이용설을 강하게 만들지만, 통계적 상관이 스탈린의 주관적 의도를 곧바로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페이지가 확정할 수 있는 결론은 분명하다. 국가는 생산 위기를 만들고, 구할 수 있었던 식량의 배분을 거부하며, 탈출을 막아 대량 사망을 낳았다. 그러나 그것을 우크라이나 민족을 파괴하려 한 제노사이드로 법적으로 부를지는, 명령의 의미와 비교 지역의 수치, 의도와 예견 가능성 사이를 어떻게 판정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학계의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결과
홀로도모르는 우크라이나 인구 구조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남겼다. 1926~1939년 사이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인구 증가율은 6.6%에 그친 반면 RSFSR은 16.9% 증가했고, 우크라이나 민족 인구는 약 10% 감소했다. 1933년 5월 스탈린 지도부는 고정된 현물세 제도를 도입하며 무제한적 공출을 중단했고, 1933년 풍작으로 기근은 가라앉았다. 그러나 기근의 기억은 소련 붕괴 때까지 공론장에서 철저히 배제되었고, 1980년대 말 글라스노스트 이후에야 문서고가 개방되며 학문적 규명이 시작되었다. 이 기근을 무엇이라 부를 것인가는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2006년 우크라이나 의회는 홀로도모르를 우크라이나 민족에 대한 집단학살로 규정했고 이후 30개국 이상이 같은 취지의 결의를 채택했으나, 이는 의회의 정치적 판단이지 사학사의 합의가 아니다. 문서고 사료를 다룬 연구의 다수는 다른 그림을 그린다. 로버트 데이비스와 스티븐 휘트크로프트는 스탈린 지도부의 정책이 그릇되었으나 기근은 그들이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않은 결과였다고 보고, 마크 타우거는 1932년 수확 자체가 공식 통계보다 훨씬 나빴다는 점을, 아치 게티는 우크라이나인을 민족으로서 절멸시키라는 지시가 문서고에서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든다. 기근은 우크라이나만의 일도 아니어서, 같은 시기 카자흐스탄에서는 카자흐인의 3분의 1 가까이가 죽어 비율로는 가장 큰 피해를 입었고 볼가와 북캅카스, 서시베리아도 함께 굶었다. 제노사이드론의 출발점이었던 로버트 콘퀘스트조차 만년에는 스탈린이 기근을 일부러 일으켰다기보다 막을 수 있었는데도 소련의 이해를 앞세워 방치했다는 쪽으로 표현을 고쳤다. 오늘날 가장 널리 받아들여지는 것은 안드레아 그라치오지의 절충으로, 기근의 발생은 집단화와 공출의 산물이었으나 일단 굶주림이 시작된 뒤에는 그것이 우크라이나 농민의 저항과 민족운동을 꺾는 데 선택적으로 이용되었다는 해석이다. 2008년 러시아 국가두마는 '경제·정치적 목표를 위해 국민의 생명을 경시한 체제'라고 규탄하면서도 기근의 우크라이나 특수성은 인정하지 않았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굶주리는 마을에서 곡물이 계속 실려 나갔고 농민의 이동이 봉쇄되었으며 모스크바가 구호 요청에 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연표
- 1929.11대전환의 해: 강제 집단화의 개시
스탈린이 11월 7일 프라우다에 「대전환의 해」를 발표하며 네프를 폐기하고 전면적 집단화로의 이행을 선언한다. 12월 27일에는 '계급으로서의 쿨라크 청산'이 공식 정책으로 채택된다.
- 1930.01.05집단화 속도 결의
정치국이 결의를 통해 주요 곡창지대의 집단화 완료 시한을 1~2년으로 단축하고 쿨라크 청산을 가속한다. 이 결의를 계기로 집단화가 전면적으로 추진된다.
- 1931우크라이나 수확량 급감 속 공출 할당 유지
1931년 우크라이나 곡물 수확량이 1,830만 톤(공식) 또는 1,380만 톤(실제 추정)으로 급감했음에도, 크렘린은 전년과 같은 722만 톤의 공출을 요구한다. 종자 곡물과 사료까지 몰수당한 농촌은 겨울을 넘기기에 턱없이 부족한 상태가 된다.
- 1932.06.10페트롭스키와 추바리의 구호 요청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장 페트롭스키와 인민위원회 의장 추바리가 스탈린에게 기근 실태를 상세히 보고하며 공출 할당량 축소와 식량 원조를 요청한다. 스탈린은 답하지 않는다.
- 1932.08.07'이삭 세 개 법': 집단농장 재산 보호 법령
소련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위원회 평의회가 일명 '이삭 세 개 법'을 채택한다. 집단농장 곡물을 조금이라도 훔치면 최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게 한 이 법은, 굶주린 농민들이 들판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행위조차 범죄로 만들었다.
- 1932.11.18블랙리스트 제도와 마을 봉쇄
몰로토프의 지휘 아래 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가 곡물 공출을 완수하지 못한 집단농장과 마을 전체를 블랙리스트에 올리고 경제 봉쇄하는 결의를 채택한다. 우크라이나 마을의 3분의 1 이상이 이 명단에 오른다.
- 1932.12.1412월 14일 비밀 법령: 곡물 공출과 우크라이나화의 역전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서명한 비밀 법령이 우크라이나와 북캅카스의 곡물 공출 완수를 독려하는 동시에, '페틀류라 분자들과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을 당과 소비에트 기관에서 제거하고 우크라이나화 정책을 시정할 것을 지시한다. 제노사이드론을 펴는 연구자들은 이 문서를 기근과 민족 문제가 맞물린 증거로 든다. 반대쪽에서는 같은 법령이 북캅카스(쿠반)에도 나란히 적용되었고 지시의 중심이 공출 실적에 있었다는 점을 들어, 민족을 표적으로 삼은 증거로 읽기는 어렵다고 본다.
- 1933.01.01스탈린의 신년 전보: 마지막 곡물 수색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지도부에 전보를 보내 '훔친 곡물'을 자진 신고하면 처벌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나, 이는 암묵적으로 또 한 차례 가택 수색을 정당화하는 신호였다. 수많은 증언이 1월 초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마지막 남은 식량까지 몰수되거나 파괴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 1933.01.22우크라이나 국경 봉쇄 지령
스탈린과 몰로토프가 굶주린 농민들이 식량을 찾아 떠나는 것을 막기 위해 우크라이나 SSR과 쿠반의 국경을 봉쇄하라는 비밀 지령을 내린다. 내부 여권 제도가 농민의 도시 이동을 차단한 것과 함께, 이는 농촌 인구를 기아 속에 가두는 결정적 조치였다.
- 1933.01.24포스티셰프 파견: 스탈린의 우크라이나 총독
전연방 공산당 중앙위가 우크라이나 당 지도부를 공출 실패로 비판하고 파벨 포스티셰프를 제2서기로 파견한다. 그는 실질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직접 통치하며 문화계 인사 탄압과 당 숙청을 단행한다.
- 1933.06정점: 하루 28,000명 사망
1933년 6월 홀로도모르가 정점에 달해 하루 약 28,000명이 아사한다. 마을 전체가 사라지고 식인 사례가 보고된다. 그럼에도 모스크바는 기근의 존재를 부인한다.
- 1933.08.15재정착 위원회와 러시아인 이주
전연방 재정착 위원회가 구성되어 RSFSR과 벨로루시 SSR에서 117,000명의 집단농장원들이 인구가 사라진 우크라이나 마을들로 이주한다. 대부분은 결국 귀환한다.
관련 인물 12명
주도 · 집행3
1932년 7월과 10~12월 우크라이나에 특사로 파견되어 공출 할당량 축소 요구를 '반당적'이라고 규탄했다. 1932년 11월 북캅카스에서 쿠반 마을 전체의 시베리아 강제이주를 지휘했다.
소련 인민위원회의장, 공출 특사로 우크라이나에 파견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1931년 12월 말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어 공출 할당 완수를 압박했다. 1932년 6월 '굶주림의 망령과 마주하더라도 공출 계획은 반드시 완수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소련 검찰총장, '이삭 세 개 법'의 공적 집행자 겸 해설자안드레이 비신스키1883–19541933년 '이삭 세 개 법' 해설 소책자를 발간해 법의 통칭을 만들었고, 1936년 이 법 적용 사건 11만5천 건 중 79%가 잘못되었다고 보고했다.
지도부2
참여3
1927~1933년 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으로서 코레니자치야와 우크라이나화를 가장 급진적으로 추진했다. 1933년 7월 민족주의 일탈 혐의로 자살했다.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장, 1932년 6월 스탈린에 기근 구호 요청그리고리 페트롭스키1878–19581932년 2월부터 코시오르에게 공출 중단과 식량 원조를 요구했으며, 6월 10일 추바리와 함께 스탈린에 편지를 보내 기근 실태를 보고하고 구호 곡물을 요청했다.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장, 1932년 6월 스탈린에 기근 구호 요청블라스 추바리1891–19391932년 6월 굶주린 마을들을 직접 돌아본 뒤 스탈린에게 100만 푸드의 긴급 구호 곡물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카가노비치에게 '추바리는 지도자가 아니다'라고 썼다.
관련 용어
출처: Robert Conquest, The Harvest of Sorrow: Soviet Collectivization and the Terror-Famine, Oxford University Press, 1986.R. W. Davies and Stephen G. Wheatcroft, The Years of Hunger: Soviet Agriculture, 1931–1933, Palgrave Macmillan, 2004.Stanislav Kulchytsky, 'Why Did Stalin Exterminate the Ukrainians?', День (Den), 2005–2006 — series of articles by Ukraine's leading scholar of the Holodomor.Roman Serbyn, 'The Ukrainian Famine of 1932-1933 and the UN Convention on Genocide,' Kharkiv Human Rights Group (khpg.org), 27 February 2008.'Famine-Genocide of 1932–3,' Encyclopedia of Ukraine, Canadian Institute of Ukrainian Studies — comprehensive scholarly overview with extensive archival references.Natalya Naumenko, 'The Causes of Ukrainian Famine Mortality, 1932–33,' NBER Working Paper 29089 / Yale University, 2022 — quantitative analysis attributing 52% of excess deaths to collectivisation and grain procurement.Joint Statement on the Great Famine of 1932–1933 in Ukraine (Holodomor), United Nations General Assembly, 7 November 2003, signed by 25 delegations.State Duma of the Russian Federation, Statement 'In Memory of the Victims of the Famine of the 1930s on the Territory of the USSR,' 2 April 2008.Andrea Graziosi, 'The Soviet 1931–1933 Famines and the Ukrainian Holodomor: Is a New Interpretation Possible, and What Would Its Consequences Be?,' Harvard Ukrainian Studies, vol. 27, 2004–2005.Timothy Snyder, Bloodlands: Europe Between Hitler and Stalin, Basic Books, 2010 — situates the Holodomor within the wider Soviet mass killing of the 193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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