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1991

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

시민을 지키지 못하게 된 국가가 어떻게 시위대에는 여전히 군대를 보낼 수 있었는가?

1988년 숨가이트 포그롬에서 1991년 빌뉴스 유혈사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은 페레스트로이카 아래에서 소련의 민족질서와 중앙권력이 함께 무너져 가는 과정이다. 네 사건의 성격은 같지 않다. 숨가이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계기로 터진 반아르메니아 포그롬이자 국가의 치안 실패였고, 1989년 트빌리시는 비무장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군사적 진압이었으며, 1990년 바쿠는 민족폭력과 중앙권력 붕괴가 겹친 자리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군사개입이었고, 1991년 빌뉴스는 독립을 선언한 연방공화국의 주권기관에 대한 강제력 행사였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된 위기를 보여 준다. 중앙정부는 민족 간 폭력으로부터 주민을 지키지 못하면서도, 공화국의 정치적 이탈에는 반복해서 군사력을 썼다.

1988년 이전, 폭발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

1988년 2월 20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로의 이관을 결의했을 때, 소련 중앙은 이 요구를 처리할 제도적 도구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결의가 뜬금없이 터져 나온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1920년대부터 민족을 기준으로 영토를 나누고 민족어·민족관료·민족문화기관을 제도화해 왔다.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들은 명목상으로는 「자유로운 탈퇴권」까지 헌법에 명시한 주권적 단위였고, 공화국 내부에는 자치공화국과 자치주 같은 중첩된 민족영토 단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구조 아래에서 민족 정체성은 억압되기는커녕 제도적으로 보존·강화되었고, 각 공화국의 「명목 민족」은 자신의 영토와 언어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게 되었다. 문제는 이 체제가 민족 간 영토 분쟁이나 공화국 간 경계 변경을 실제로 처리할 절차를 전혀 마련해 두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1977년 연방 헌법 제78조는 공화국 영토 변경에 공화국 자체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규정했을 뿐, 한 공화국 안의 자치지역이 다른 공화국으로 옮겨 가겠다고 요구할 때 무엇을 따라야 하는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침묵이 바로 1988년 위기의 해부학적 원인이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비극적 모순은 이 구조의 축소판이었다. 1921년 7월, 카프카스 지역 볼셰비키 지도부(카프비로)는 스탈린의 개입 아래 인구의 약 94%가 아르메니아인인 이 산악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 안에 자치주로 편입시켰다. 이후 60여 년간 카라바흐 아르메니아인들은 1945년, 1965년, 1967년, 1977년에 걸쳐 반복해서 모스크바에 청원과 탄원서를 보냈으나 번번이 아제르바이잔 측의 거부권에 막혔다. 1969년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아제르바이잔 당 제1서기로 취임한 뒤 바쿠의 통제는 더욱 체계화되었다. 알리예프는 1973~74년에 자치주 지도부 전체를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로 몰아 숙청하고 외부 출신 아르메니아인 보리스 케보르코프를 자치주 당 제1서기로 앉혔다. 동시에 아제르바이잔인 이주 장려와 아르메니아인 이탈 압력으로 자치주 내 아르메니아인 비율은 1926년의 89.2%에서 1989년에는 76.9%까지 떨어졌다. 아르메니아어 교육과 문화 교류는 조직적으로 위축되었고, 1981년 자치주 법률은 아르메니아어가 지방 관청의 작업 언어라는 조항마저 삭제했다. 카라바흐 아르메니아인들 사이에서는 「백색 집단학살」이라는 말이 퍼져 나갔다.

이런 불만이 폭발할 수 있게 된 것은 미하일 고르바초프글라스노스트 정책이 당의 검열과 통제를 완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88년 초까지 고르바초프의 개혁 구상은 경제 재건과 행정 효율에 집중되어 있었고, 민족 문제는 사실상 사각지대였다. 1986년 12월 카자흐스탄에서 쿠나예프 해임과 러시아인 콜빈 임명에 반발해 알마아타 시위가 발생했을 때도 모스크바는 이를 지역 엘리트 간 갈등 정도로 파악했을 뿐, 민족적 동원의 전조로 읽지는 않았다. 1987년 여름, 카라바흐 아르메니아인 약 7만 5천 명이 고르바초프에게 직접 청원서를 보냈고, 같은 해 10월 예레반에서는 환경 시위가 민족 요구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1988년 2월 13일 스테파나케르트에서 첫 대규모 집회가 열렸고, 일주일 뒤인 2월 20일 자치주 소비에트는 110대 17로 이관을 결의했다. 이 결의는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하나의 소비에트 기관이 다른 소비에트 기관에 맞서 자신의 관할 변경을 요구한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숨가이트에서 유혈이 시작되었다.

결의안에서 포그롬까지: 절차 없는 체제에 던져진 카라바흐

1988년 2월 20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가 내린 결의안은, 겉보기에 소련 헌법이 보장한 절차에 충실했다. 대의원 110명 대 17명으로 아제르바이잔 SSR에서 아르메니아 SSR로의 이관을 청원한 이 안건은 소련 헌법 제70조(민족자결권)와 제78조(공화국 영토 변경 불가, 단 당해 공화국의 동의가 있을 경우는 예외)를 정확히 겨냥했다. 문제는 이 헌법 조항을 현실에서 작동시킬 수 있는 기구가 어디에도 없었다는 점이다. 한 공화국의 영토 일부가 다른 공화국으로 이관된 전례는 없었고, 중앙은 이 결의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로 규정하는 외에는 답을 내놓지 못했다. 스테파나케르트 자치주 당 위원회 제1서기 겐리흐 포고샨은 곧바로 해임되었고, 이는 중앙이 문제를 행정조치로 봉합하려 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봉합은 이미 늦었다. 아르메니아 SSR에서는 예레반을 중심으로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와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 편입을 요구했고, 아제르바이잔 SSR에서는 이것이 공화국 영토의 분할 시도로 받아들여졌다. 2월 22일, 아스케란 인근에서 스테파나케르트로 향하던 아제르바이잔인 무리와 경찰·현지 주민 사이에 충돌이 벌어져 아제르바이잔인 2명이 사망했다. 바로 이 소식이 5일 후 숨가이트의 불씨가 된다.

숨가이트는 바쿠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공업도시로, 화학·금속 공장 노동자 25만 명이 붐비는 곳이었다. 주민 5명 중 1명이 전과자였고, 평균 연령은 25세였다(내무장관 블라소프가 2월 29일 정치국에서 보고한 수치). 인구 약 1만 8천 명이 아르메니아인이었다. 2월 26일, 레닌 광장에서 수십 명의 아제르바이잔인이 카라바흐 사태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다음 날 27일에는 군중이 수천 명으로 불어났고, 연단에서는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보복을 촉구하는 연설이 이어졌다. 시 당 제2서기 멜레크 바이라모바도 연설자 명단에 있었다.

같은 날 저녁, 소련 부검찰총장 알렉산드르 카투세프는 중앙 텔레비전과 바쿠 라디오에서 아스케란 충돌의 사망자가 아제르바이잔인 2명임을 확인했다. 증언에 따르면 이 방송 직후 「벌떼 같은 굉음」과 함께 폭력이 시작되었다. 27일 밤부터 29일까지 무리는 아르메니아인 가옥을 찾아내 불태우고, 거주자를 도끼와 쇠파이프로 살해했으며 여성을 집단 강간했다. 시 경찰은 거의 전원이 아제르바이잔인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개입하지 않았다.

중앙의 반응은 충격적일 정도로 느렸다. 28일 저녁이 되어서야 중앙당 조직담당 부부장 그리고리 하르첸코KGB 부의장 필리프 보브코프가 현장에 도착했다. 하르첸코는 훗날 드 발에게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세 시간 늦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하루를 늦었다」고 말했다. 29일 오후에야 정치국이 소집되어 계엄령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고르바초프는 「계엄이 정말 필요한가?」라고 물었고, 야조프 국방장관은 총기는 지급하되 실탄은 별도로 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29일 저녁이 되어서야 공수부대와 해군 보병이 투입되어 사태를 진압했다. 공식 사망자는 아르메니아인 26명, 아제르바이잔인 6명이었으나, 아르메니아 측은 피해 규모가 훨씬 크다고 주장한다(역사학자 제프리 호스킹은 수백 명으로 추정).

사법처리는 정치적 의지를 보여 주지 못했다. 검찰은 80여 건으로 사건을 쪼개 각지 법원에 분산시켰고, 기소된 94명 대부분은 범행 동기를 「훌리건 충동」으로 적시한 10대와 청년들이었다. 선동 연설을 한 인물들은 기소되지 않았고, 경찰과 당 간부의 직무유기도 문제 삼지 않았다. 1988년 말 바쿠 시위대 사이에서는 「숨가이트의 영웅」이라는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불과 1주일 사이에 소련 체제는 세 가지 실패를 한꺼번에 드러냈다. 영토 문제를 다룰 헌법적 절차는 존재하지 않았고, 주민 보호라는 국가의 기본 의무는 이행되지 않았으며, 사후 책임 규명도 정치적 봉합으로 대체되었다.

거리에서 공화국으로: 페레스트로이카가 낳은 인민전선

1988년 여름부터 1989년 봄까지, 소련의 여러 공화국에서 「인민전선」 또는 그에 준하는 조직들이 잇따라 결성되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1988년 4월 13일 에드가르 사비사르가 TV 생방송에서 「페레스트로이카 지지 인민전선」 구상을 제안했고 10월 1일 창립대회가 열렸다. 라트비아 인민전선은 1988년 10월 9일 결성되어 곧 25만 명의 회원을 가진 최대 조직이 되었다. 리투아니아의 사유디스는 1988년 6월 3일 35인의 지식인 발기그룹으로 출발해 10월 창립대회에서 음악학자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캅카스에서는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이 1989년 7월 창립대회를 열었다.

이 조직들은 공통된 패턴을 보였다. 초기에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며 공화국의 자치권 확대를 요구했으나, 수개월 안에 완전한 주권, 이후 독립으로 목표가 이동했다. 사유디스는 1989년 2월 리투아니아가 소련에 강제 병합되었음을 선언했고, 라트비아 인민전선은 1989년 5월 31일 독립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밝혔다. 이 조직들은 기존의 공화국 제도들을 그대로 대중정치의 기반으로 활용했다. 공화국 최고회의 선거에 후보를 내고, 공화국 각료회의 내의 개혁파 공산당원들과 연대하며, 공화국 국영 언론을 통해 활동했다. 소련이 수십 년간 구축한 민족공화국 체제가, 바로 그 제도적 형태를 빌려 자신을 해체하는 운동의 무대가 된 셈이다.

이 흐름은 단순한 「민족 감정의 분출」이 아니었다. 각 공화국의 상황은 달랐다. 발트 3국은 전간기 독립국가로서의 역사와 1939년 독소불가침조약 비밀의정서에 의한 강제병합이라는 서사를 가졌고, 1987년부터 환경운동·헬싱키 그룹 등을 통해 조직화가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캅카스에서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이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양쪽에서 민족운동의 촉매가 되었다. 그러나 공통된 구조적 조건이 있었다. 글라스노스트가 공포와 검열을 제거하자, 소련이 제도화해온 민족 단위, 즉 공화국·자치공화국·민족언어·민족간부가 곧바로 정치적 동원의 틀로 전환된 것이다.

공화국 당 기관들은 이 운동 앞에서 분열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알기르다스 브라자우스카스 같은 개혁파가 사유디스와 공조한 반면, 보수파 서기장 링가우다스 송가일라는 실각했다. 그루지야에서는 상황이 더욱 급진적이었다. 1989년 3월 18일 압하지야의 리흐니 마을에서 3만 명 이상의 압하지야인들이 그루지야로부터의 분리와 연방공화국 지위 회복을 요구하는 집회를 열었고, 이에 맞서 트빌리시에서는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메라브 코스타바가 이끄는 독립위원회가 4월 4일부터 대규모 시위와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시위대는 압하지야 분리주의의 배후에 소련 중앙이 있다고 보았고, 그루지야의 독립 회복을 요구했다. 요구는 반反소비에트로 전환되었고, 군중은 정부청사 앞 루스타벨리 대로를 점거했다.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 파티아슈빌리는 공화국 정부가 전복될 것을 두려워했다. 4월 7일, 고르바초프가 런던에 머무는 동안 리가초프가 주재한 정치국은 트빌리시에 군대와 내무부 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같은 날 야조프 국방장관은 부장관 코체토프와 자캅카스 군관구 사령관 로디오노프를 트빌리시로 보냈다. 4월 8일 밤 그루지야 방위회의에서 코체토프는 「모스크바는 사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현장에서 결정을 내려야 한다」며 즉각적인 진압을 압박했다. 방위회의는 시위대 해산을 결의했고, 4월 9일 오전 4시경 로디오노프 휘하의 부대가 삽·곤봉·최루가스를 동원해 비무장 시위대를 공격했다. 21명이 사망했고 그중 17명이 여성이었다. 대부분은 군중 압사와 가스 흡입으로 숨졌다.

이어진 충격은 사건 자체만큼이나 의미심장했다. 고르바초프는 런던에서 4월 7일 밤 귀국했으나 작전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크라머의 연구에 따르면 정치국이 아닌 야조프와 현장의 코체토프가 실질적 결단을 내렸으며 고르바초프의 부인은 개연성이 있다. 귀국 후 고르바초프는 군부에 책임을 돌리며 유혈사태를 비판했고, 이는 이후 군 장교들 사이에서 「트빌리시 신드롬」, 즉 상부의 정치적 뒷받침 없는 작전은 거부하는 태도를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1989년 12월 소브차크 위원회는 제2차 인민대표대회에서 군의 과잉 대응을 규탄하고 무력 사용의 법적 절차 부재를 지적했다. 그러나 책임자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트빌리시는 민족운동에 대한 첫 대규모 군사적 진압이었고, 중앙권력이 협상과 폭력 사이에서 원칙 없이 표류하기 시작한 분수령이었다.

포그롬을 방치한 국가, 권력 도전에는 탱크로

1990년 1월 13일, 바쿠의 레닌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군중은 아르메니아 SSR 최고회의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자국 예산에 포함시킨 데 항의하고 있었다.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은 집회에서 '국민방위위원회' 결성을 선포하고 공장과 사무실에 지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군중 속에서 누군가 확성기로 "아제르바이잔인이 아르메니아인에게 살해당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소식을 퍼뜨렸고, 이 말은 불씨가 됐다. 집회의 일부가 떨어져 나와 아르메니아인 거주 구역으로 향했다.

이어진 7일간은 계획된 테러였다. 가해자들은 아르메니아인 명단과 주소를 손에 쥐고 있었다. 희생자들은 고층 발코니에서 던져졌고, 불타는 가구 속으로 내쳐졌으며, 길거리에서 구타당해 죽었다. 휴먼라이츠워치는 48명의 사망을 확인했고, 토마스 드 발은 약 90명으로 추정한다. 강간 5건, 주거지 습격 2,044건, 강도 191건이 신고됐다. 아르메니아 정교회 성당은 불타 잿더미가 됐고 소방대와 경찰은 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바쿠에는 소련 내무부 내부군 12,000명이 주둔하고 있었고, 추가로 소련군 부대와 카스피 소함대 병력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목격자들은 "길거리에서 민병대에게 다가가 근처에서 벌어지는 아르메니아인 공격을 신고했지만 민병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인민전선의 에티바르 마메도프 자신도 기차역 근처에서 두 아르메니아인이 군중에게 휘발유를 뒤집어쓰고 불태워지는 것을 목격했으며, 200미터 떨어진 곳에 400~500명의 내부군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 구역을 봉쇄하고 군중을 해산하려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월 15일, 소련 최고회의 간부회는 나히체반과 나고르노카라바흐 일부에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바쿠는 포함되지 않았다. 포그롬이 한창인 도시가 비상사태 선포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이 무렵 인민전선은 모스크바의 군사개입을 우려해 바쿠 진입로와 병영 주변에 바리케이드를 쌓기 시작했다.

1월 19일 저녁 7시 15분, 바쿠 텔레비전 센터의 전원 공급 장치가 폭발했다. 방송은 끊겼다. 독립 조사단 '쉬트'와 아제르바이잔 최고회의 위원회는 이것이 소련군 또는 KGB 특수부대의 소행이라고 결론지었다. 같은 시각, 인민전선 지도부는 공산당 제2서기 빅토르 폴랴니치코를 만났다. 폴랴니치코는 "군대가 진입할 것"이라고 말했고, 마메도프가 바리케이드를 철거하고 텔레비전으로 대국민 호소를 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자정 무렵, 26,000명의 소련군 병력이 전차·장갑차·해군 함정과 함께 바쿠로 진입했다. 작전명은 '우다르(타격)'였고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이 직접 지휘했다. 그러나 바쿠 시민들은 텔레비전과 라디오가 차단된 상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비상사태 선포는 새벽 5시 30분에야 군용 라디오와 헬기 살포 전단을 통해 공표됐다: 진입 5시간 반이 지난 뒤였다.

군대는 바쿠를 적진처럼 공격했다. 탱크는 바리케이드와 함께 승용차와 구급차까지 뭉갰다. 군인들은 달아나는 사람들을 향해 사격했고, 발코니에 나온 주민들도 표적이 됐다. 휴먼라이츠워치/헬싱키워치 조사단은 "소련군이 1월 19~20일 밤 사용한 폭력은 아제르바이잔인들의 저항 수준과 너무도 균형이 맞지 않아 집단적 처벌에 해당한다"고 결론지었다. 공식 사망자는 131~137명, 부상자는 700명 이상이었다. 사망자 상당수는 바리케이드나 시위와 무관한 행인이었다.

야조프는 당초 군사개입의 명분으로 "아르메니아인 보호"를 내세웠다. 그러나 1월 26일 이즈베스티야와의 인터뷰에서 직접 그 이유를 뒤집었다. "우리는 인민전선의 정치 구조를 분쇄하기 위해 왔다. 그들이 3월로 예정된 선거에서 승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휴먼라이츠워치가 확보한 바쿠 군사검찰 문서는 작전 계획이 포그롬 이전부터 수립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바쿠 내무부 관리들 중 일부는 인민전선 활동가들에게 무기와 정보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소련은 기존의 법적 절차마저 무시했다. 연방 헌법 제119조 14항은 공화국 최고회의 간부회와의 협의를 요구했지만, 아제르바이잔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엘미라 카파로바는 비상사태 선포가 "자신의 인지 없이" 이루어졌다며 라디오로 항의했다. 이튿날 아제르바이잔 최고회의는 긴급회의를 열어 비상사태령을 정지시켰고, 중앙이 이를 무시하면 연방 탈퇴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선언했다.

1월 22일, 바쿠 시민 거의 전부가 희생자들의 장례 행렬에 참여했다. 수만 명의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원들이 공개적으로 당증을 불태웠다. 헤이다르 알리예프는 모스크바의 아제르바이잔 상주대표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 비극은 고르바초프와 그의 독재적 야망의 중대한 과실"이라고 규탄했다. 바쿠의 사건은 한 공화국에서 소련 국가의 정당성을 완전히 붕괴시켰다. 동시에 그것은 예고이기도 했다: 1년 뒤 빌뉴스에서 동일한 양상이 반복될 때, 이번에는 세계 언론이 주목하고 있었다.

독립 선언에서 탱크까지: 열 달의 교착과 유혈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가 124대 0으로 독립 회복을 선언했을 때, 모스크바는 이것을 연방 탈퇴가 아니라 헌법질서에 대한 정면 위반으로 규정했다. 고르바초프는 이틀 뒤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리투아니아의 결정을 무효라고 선언했고, 4월 18일에는 에너지 원자재 공급을 차단하는 경제 봉쇄를 개시했다. 마제이케이 정유공장으로의 석유 공급이 중단되고 가스는 84%가 줄었으며, 연료·의약품·식료품까지 금수 품목에 추가됐다. 그러나 리투아니아는 란츠베르기스 의장의 지도 아래 독립 선언을 철회하지 않았고, 모스크바가 계산한 것과 달리 경제적 압박이 정치적 굴복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봉쇄가 효과를 보지 못한 데는 두 개의 정치적 계산 착오가 작용했다. 첫째, 봉쇄는 리투아니아뿐 아니라 칼리닌그라드와 소련 연방기업 약 100곳을 함께 타격했다. 둘째, 독립을 향한 리투아니아인의 결집을 오히려 강화했다. 4월 26일에는 52세의 스타니슬로바스 제마이티스가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 앞에서 봉쇄에 항의해 분신자살했다. 서방 정부들은 고르바초프의 개혁 노선을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아 소극적이었지만, RSFSR 내부에서 옐친이 주권 선언을 준비하는 등 연방 전체로 파급효과가 번지는 조짐이 나타났다.

6월 29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는 독립회복법의 효력을 100일간 정지하는 타협안을 받아들였고, 7월 2일 소련은 봉쇄를 해제했다. 양측은 협상 테이블에 앉았지만, 란츠베르기스가 "독립 그 자체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입장을 굽히지 않은 반면 소련 측은 헌법 복귀를 전제로 한 연방개혁 틀 안에서만 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0월에서야 겨우 협상단 구성이 합의됐고, 11월 30일 예정된 첫 회담은 소련 측의 불참으로 무산됐다. 12월 28일 리투아니아 의회는 법 효력 정지를 종료했다.

1991년 1월로 접어들면서 모스크바의 접근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프스코프 공수사단과 KGB 특수부대 알파 그룹이 리투아니아로 증원 배치됐다. 1월 8일, 프룬스키에네 총리가 고르바초프를 만나 군사행동이 없을 것이라는 보장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그날로 사임했다. 그녀의 실각은 리투아니아 지도부에서 협상파가 제거되고 란츠베르기스의 강경 노선만 남았음을 의미했다. 이틀 뒤인 1월 10일, 고르바초프는 최고회의에 소련 헌법 복원과 독립법 철회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1월 11일, 친모스크바 리투아니아 공산당(CPSU 강령파)의 예르말라비추스가 '리투아니아 SSR 민족구제위원회'의 창설을 선언하고 자신들이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했다. 바로 그날 소련군은 국방부 청사와 언론회관을 점거했고, 1월 12일에는 국방차관 아찰로프가 빌뉴스에 도착해 전 작전 지휘권을 인수했다. 수만 명의 시민이 의회와 텔레비전 탑 주변에 모여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1월 13일 오전 1시 50분, 탱크와 장갑차가 텔레비전 탑을 포위하고 시민들을 향해 실탄을 발사했다. 이날 밤 14명이 죽었다: 대부분 총상이었고, 두 명은 탱크에 깔렸으며, 한 명은 심장마비였다. 알파 그룹 대원 빅토르 샤츠키흐도 아군 오인 사격으로 사망했다. 방송국은 점거됐지만, 카우나스의 소규모 스튜디오가 즉시 임시 방송을 시작해 여러 언어로 세계에 참상을 알렸다. 의회 건물은 끝내 함락되지 않았다.

사후, 고르바초프·야조프·푸고는 모두 모스크바에서 아무도 무력 사용을 명령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푸고는 시위대가 먼저 발포했다고 말했다. 이 주장은 국제앰네스티가 "평화적이고 비무장인 시위자 13명이 소련군에 의해 살해됐다"고 발표하며 정면으로 반박되었다. 2019년 리투아니아 법원은 야조프를 포함한 전직 소련 관료·장교 67명에게 전쟁범죄 유죄를 선고했다. 명령 계통이 최종적으로 어디까지 올라갔는지는 오늘날까지도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다.

모두가 "예"라고 했지만 저마다 다른 나라를 상상했다

1990년 12월 24일 제4차 소련 인민대표대회는 연방 보존을 묻는 국민투표 실시를 결의했다. 고르바초프에게 이것은 공화국 지도부를 압박할 민중적 위임장이었다. 미국 헬싱키위원회(CSCE)가 당시 지적했듯, "민주적 방법으로 민주주의의 결과를 무력화하려는 시도"였다.

투표일인 1991년 3월 17일 이전에 이미 여섯 공화국은 거리를 두고 있었다. 발트 3국은 각각 2월과 3월에 독립 찬반 주민투표를 실시해 74~93%의 찬성으로 독립을 확정한 상태였다. 그루지야는 3월 31일에, 아르메니아는 9월에 자체 독립 투표를 예정해 두었다. 몰도바도 거부했다. 이들 공화국에서는 중앙선관위가 구성되지 않았고, 군부대·개별 지방소비에트·공장위원회가 자체 투표소를 열었다. 전체 유권자 1억 8,560만 명 중 1억 4,857만 명이 참여했고, 그중 1억 1,351만 명(76.4%)이 "예"라고 답했다. 그러나 이 "찬성"의 내용은 공화국마다 달랐다.

질문은 이랬다. "완전히 보장된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갖춘, 평등하고 주권적인 공화국들의 갱신된 연방으로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보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비판자들은 이것이 "모든 것이 잘 되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묻는 것과 다름없다고 했다. 인민대표 아르카디 무라셰프는 "아무도 권리와 자유가 어떻게 보장될지 알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더 결정적인 것은 공화국들이 질문을 자기 방식으로 고쳐 썼다는 점이다. 카자흐스탄은 "주권 공화국들의 연방"을 "주권 국가들의 연합"으로 바꾸었다. 러시아는 같은 날 대통령직 신설을 묻는 별도 투표를 병행했고, 70%가 찬성했다. 가브릴 포포프 당시 모스크바 시의회 의장은 "사람들은 이 두 과정을 양립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러시아 대통령직 투표는 고르바초프의 연방 국민투표보다 더 실질적인 결과를 낳았다. 6월 보리스 옐친이 러시아 대통령으로 선출되면서, 소련 대통령보다 더 큰 민주적 정당성을 가진 경쟁 권력 중심이 탄생한 것이다. 우크라이나는 연방 유지 찬반과 동시에 "주권국가선언에 기초한 주권국가연합의 일원"이 되는 데 대한 찬반을 물었고, 유권자 80.2%가 두 질문 모두에 찬성표를 던졌다. 한 사람이 같은 날 연방 유지와 우크라이나 주권을 동시에 지지하는 모순이 공식 통계로 기록된 셈이었다.

3월 21일 소련 최고회의는 결과를 "최종적이며 소련 전역에 구속력을 갖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여섯 공화국에는 국민투표법의 문구가 닿지 않았다. 오히려 결과는 상반된 해석을 동시에 가능하게 했다. 고르바초프는 연방 유지의 위임장을 받았다고 주장했고, 옐친과 크랍추크는 자기 공화국의 주권도 함께 승인받았다고 보았다. 국민투표가 확인한 것은 연방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연방이라는 말이 이미 모두에게 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한 달 뒤 고르바초프는 노보오가료보에서 9개 공화국 지도자들과 "9+1 합의"를 체결했지만, 바로 그 회의에 불참한 여섯 공화국의 부재가 새로운 연방의 범위가 애초에 다투어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무너진 것은 연방이었고, 남은 것은 민족영토 단위와 풀리지 않은 질문들이었다

이 위기는 두 가지를 결정했고, 적어도 두 가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결정된 것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국가 형태의 종말이었다. 1988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가 던진 질문, 한 민족영토 단위가 자신이 속한 공화국을 바꿀 수 있는가에 대해 소련 체제는 끝내 답을 내지 못했고, 그 답 없는 상태가 캅카스에서 발트까지 모든 주권 요구의 선례가 됐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 결정된 것은 민족영토 단위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덮고 있던 연방이라는 정치적 틀이었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됐을 때 사라진 것은 연방정부와 당의 중앙집권적 통제였지, 공화국·자치공화국·자치주라는 영토적 구획은 아니었다. 15개 공화국은 국제법상 독립국이 됐고, 그 경계는 소련 헌법이 그었던 행정경계를 그대로 따랐다. 소련 민족정책이 수십 년간 제도화한 민족영토 단위들은 연방이라는 껍질을 벗고 주권국가로 걸어나왔다.

결정되지 않은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은 그 민족영토 단위들 내부에 중첩된 더 작은 단위들의 지위였다. 나고르노카라바흐는 아제르바이잔 SSR 안의 아르메니아계 자치주로 남았고,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야는 그루지야 SSR 안의 자치공화국·자치주로 남았으며,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 SSR 안의 문제로 남았다. 이 모든 분쟁은 1988-1991년의 민족위기 속에서 이미 폭력 단계에 들어갔으나 소련 중앙정부가 해결하지 못했고, 연방이 사라진 뒤에도 독립국들 간의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이른바 '냉동분쟁'으로 불리는 이 유산은 1991년 이후 30년 넘게 캅카스와 동유럽의 안보지형을 규정했으며, 그중 나고르노카라바흐는 2023년 아제르바이잔의 군사작전으로 자치공화국이 전격 해산될 때까지 지속됐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정리되지 않은 쟁점은 크게 둘이다. 첫째는 필연성 대 우연성의 문제다. 마크 바이싱어는 1987년에는 불가능해 보이던 소련 해체가 1991년에는 불가피해 보이게 된 과정을 '두꺼워진 역사'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즉 사건 자체가 제도를 변화시키는 속도가 지도부의 이해와 대응을 앞질렀고, 민족운동의 파급효과가 공화국에서 공화국으로 파도를 타듯 전파되면서 붕괴는 그 과정 속에서 비로소 필연적인 것이 됐다는 주장이다. 반면 블라디슬라프 주보크는 2021년 저서 『Collapse』에서 소련이 구조적으로 붕괴할 수밖에 없었다는 관념에 반대한다. 그에 따르면 고르바초프의 구체적인 정책 실패, 특히 1987년 사회주의 기업법과 신연방조약 협상의 파국적 전개가 붕괴를 초래했으며, 다른 선택이 가능했다.

둘째는 명령 책임의 문제다. 트빌리시(1989), 바쿠(1990), 빌뉴스(1991)에서 군대가 움직였을 때 그 명령이 정치 지도부의 어디까지 도달했는지는 세 사건 모두에서 끝내 규명되지 않았다. 아나톨리 소브차크가 이끈 인민대표대회 조사위원회는 트빌리시 유혈사태가 위법한 명령에 의해 발생했다고 결론 내렸지만, 누가 그 명령을 내렸는지는 특정하지 못했다. 이 경험은 군 내부에 이른바 '트빌리시 신드롬'을 낳았다. 정치적 책임을 질 사람이 없으면 작전적 판단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퍼진 것이다. 이 신드롬은 이후 바쿠와 빌뉴스 작전에도 영향을 미쳤고,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부대들이 시위 진압을 거부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빌뉴스에서 고르바초프가 작전을 사전에 승인했는지 여부는 30년 넘게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리투아니아 검찰은 고르바초프를 참고인으로 소환하려 했으나 러시아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 사건들이 남긴 가장 깊은 흔적은 제도적 교훈보다 더 근본적인 지점에 있다. 패권을 잃어가는 제국이 협상과 무력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때, 그 중간지대에서 가장 먼저 희생되는 것은 무력 자체가 아니라 무력을 통제하는 정치적 책임이라는 사실이다.

무엇이 정착됐고 무엇은 여전히 답이 없는가

이 연쇄적 위기가 최종적으로 정착시킨 것은 하나다. 15개 연방공화국의 행정 경계는 국제법상 국경이 되었고, 그 경계 안의 명목 민족은 독립국가의 '원천 민족'으로 재탄생했다. 소련이 70년간 쌓아 올린 민족-영토 단위가 분리 독립의 합법적 그릇이 된 셈인데, 이것은 브루베이커(Rogers Brubaker)가 '제도화된 민족성'이라 부른 것의 최종 귀결이었다.

그러나 그 경계 안에 살던 소수민족에게는 정반대의 의미였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 압하지야인, 남오세티야인,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러시아어 화자들: 이들은 한 공화국에서 다수였던 민족이 다른 공화국에서는 소수가 되는 소비에트식 경계 획정의 유산을 그대로 떠안았다. 1991년 이후 이 '내부 소수민족'의 지위를 둘러싼 무력 충돌이 네 곳에서 발발했고, 그중 나고르노카라바흐만 2023년에야 군사적으로 봉합되었을 뿐 나머지는 오늘날까지 동결분쟁으로 남아 있다. 소련은 무너졌지만 소련이 만든 민족영토의 경계는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국제법의 보호를 받으며 더 단단해졌다.

역사학자들이 여전히 합의하지 못하는 지점은 이것이다. 민족주의는 소련 붕괴의 원인이었는가, 결과였는가. 로널드 수니(Ronald Suny)는 소련이 스스로 민족을 만들어 냈다는 데 방점을 둔다. 코레니자치야로 민족 엘리트를 양성하고 공화국이라는 제도적 껍데기를 준 것이 글라스노스트 아래서 분리 독립 운동의 기반이 됐다는 설명이다. 마크 베이신저(Mark Beissinger)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1987년부터 1992년까지 추적한 6,663건의 시위와 2,177건의 집단 폭력 사건 데이터는, 분리 독립에 대한 '잠재된 수요'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민족 정체성 자체가 사건의 연쇄 속에서 만들어졌음을 보여 준다. 발트의 성공이 캅카스의 동원을 촉발하고, 캅카스의 실패가 다른 공화국의 전술을 바꾸었다. 베이신저에게 붕괴는 '구조의 논리'가 아니라 '사건의 조수'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발레리 티시코프(Valery Tishkov)는 더 급진적인 입장에서, 민족주의란 정치 엘리트가 권력 재분배 과정에서 동원한 도구에 불과했으며, 적절한 이권 배분만 있었다면 소련은 붕괴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논쟁은 소련의 붕괴 자체가 무엇이었는가라는 질문과 분리될 수 없다. 코트킨(Stephen Kotkin)에게 1991년은 제국이 아니라 체제의 종말이었고, 결정적 행위자는 거리의 시위대가 아니라 모스크바의 엘리트 관료였다. 이 관점에서 민족위기는 '제국의 말기 증상'이라기보다는, 엘리트의 공산주의 포기가 만들어 낸 진공 속에서 번성한 정치적 기회였다. 수니와 베이신저는 출발점이 다르지만, 소련 체제가 민족을 억압하지 않고 제도화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제도가 위기의 구조적 조건이었다는 데는 양쪽 모두 동의한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열려 있는 질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사실의 문제다. 빌뉴스에서 방아쇠를 당긴 명령 계통은 누구였는가. 바쿠에서 군 지휘관들이 포그롬을 막지 않은 것은 지시에 따른 것인가, 무능인가, 의도인가. 관련 기록은 러시아 대통령기록보관소에 여전히 비공개로 남아 있다. 다른 하나는 해석의 문제다. 민족-영토 연방제는 붕괴를 내장한 구조였는가, 아니면 1985년 이후의 정치적 선택이 다른 경로를 막았을 뿐인가. 고르바초프가 1988년 2월 카라바흐 소비에트의 결의안을 다른 방식으로 처리했더라면, 또는 1990년 봄에 신연방조약을 더 일찍 제안했더라면. 이 반사실적 질문은 입증될 수도 반증될 수도 없지만, 소련 민족정책을 평가하는 모든 작업의 배경에 놓여 있다.

역사가들이 여전히 다투는 것: 명령 계통, 필연성, 그리고 민족주의

이 네 사건을 둘러싼 사실관계는 상당 부분 정리됐지만, 역사가들 사이에서는 세 가지 큰 질문이 여전히 닫히지 않았다.

첫째, 명령 계통이다. 누가 군대에 발포를 지시했는가. 트빌리시에서는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이고르 로디오노프가 작전 명령을 내렸다는 점까지는 소브차크 위원회 조사로 확인됐으나, 그 위로는 올라가지 않았다.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 줌베르 파티아슈빌리가 군 투입을 요청한 기록은 있지만 발포까지 의도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바쿠에서는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과 바딤 바카틴 내무장관이 현장 지휘소에 있었음에도, 민간인 사격 명령이 어디서 나왔는지 특정되지 않았다. 빌뉴스에서는 블라디슬라프 아찰로프 국방차관이 현장 지휘를 맡았고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KGB 의장의 알파부대가 작전 핵심이었으나, 고르바초프에게까지 명령 계통이 닿았는지는 끝내 규명되지 않았다. 아이나스 라사스의 2007년 연구는 고르바초프가 몰랐다는 주장에 반하는 정황 증거를 제시했지만, 러시아 측 기록 공개 거부로 결정적 증거는 없다. 리투아니아 법원이 2019년 65명에게 전쟁범죄 유죄를 선고했으나 피고인 대부분은 궐석재판이었고, 고르바초프는 2022년 사망할 때까지 어떠한 법정 증언도 하지 않았다.

둘째, 소련 해체에서 민족주의의 인과적 무게를 두고 역사가들은 첨예하게 갈린다. 로널드 그리고르 수니는 『과거의 복수』(1993)에서 소련의 민족영토 연방제 자체가 해체의 구조적 조건을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공화국·자치지역·민족언어·민족관료제를 수십 년간 제도화했기에, 글라스노스트가 당의 통제를 약화시키자 그 단위들이 즉시 주권운동의 기반이 됐다는 것이다. 마크 베이신저는 『민족주의 동원과 소련 국가의 붕괴』(2002)에서 이 구조적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반박한다. 그에 따르면 민족주의는 잠재된 수요가 아니라 사건 자체가 만들어낸 '조수(潮水)'였다. 숨가이트 이후 캅카스에서, 트빌리시 이후 발트에서 각 민족운동은 서로의 성공과 중앙의 실패를 지켜보며 급진화했고, 1987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분리독립이 1991년에는 불가피해 보이게 됐다. 블라디슬라프 주보크는 『붕괴』(2021)에서 한발 더 나아가, 민족주의든 경제든 구조적 요인보다 고르바초프 개인의 선택이 더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한다. 이 세 입장은 같은 사건들을 보면서도 무게 중심을 각기 다른 곳에 둔다.

셋째, 이 모든 논쟁의 기저에는 '소련 해체는 필연이었는가'라는 더 큰 질문이 깔려 있다. 1991년의 결과를 1988년 체제의 유전자에서 찾는 입장(수니, 마틴 말리아)과, 1988~1991년의 사건 연쇄가 만들어낸 우발적 경로로 보는 입장(베이신저, 주보크, 세르히 플로히) 사이의 간극은 아직 메워지지 않았다. 이 간극은 단지 학계의 문제가 아니다. 옛 소련 영토에서 오늘날의 영토분쟁, 즉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압하지야, 남오세티야,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모두 1988~1991년에 형성된 균열선을 따라 흐르고 있으며, 각 분쟁에서 어느 쪽이 '원래 그 땅의 주인'인지를 주장하는 논리는 결국 소련 해체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명령 계통, 인과의 무게, 필연성, 이 세 질문은 그래서 단지 역사 서술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정치의 문제이기도 하다.

결과

이 과정은 소련 민족정책의 근본 모순을 드러냈다. 소련은 수십 년에 걸쳐 공화국·자치지역·민족언어·민족관료제를 제도화했으나, 그 공동체가 영토와 주권을 실제로 재협상할 절차는 두지 않았다. 글라스노스트가 당의 통제력을 약화시키자 그 단위들이 곧바로 주권운동의 기반이 됐다. 중앙은 협상·연방개혁·치안·강압 사이에서 원칙을 세우지 못했고, 유혈이 거듭될수록 그 지역에서 소련 국가의 정당성은 깎였다. 「소련은 더 이상 중립적인 연방정부가 아니다」라는 인식이 퍼졌고, 이 연쇄적 정당성 붕괴는 1991년 해체로 이어진 주요 경로 가운데 하나였다.

연표

  1. 1988.02.20
    카라바흐 결의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로의 이관을 요청했다. 연방 헌법에는 이런 요구를 처리할 절차가 사실상 없었다.

  2. 1988.02.27–29
    숨가이트 포그롬

    아제르바이잔 SSR 숨가이트에서 아르메니아인을 겨냥한 폭력이 사흘간 이어졌다. 공식 사망자는 32명이며 아르메니아 측은 더 많다고 본다. 군 투입은 늦었다.

  3. 1988–1989
    민족전선의 형성

    발트 3국과 캅카스에서 인민전선·사유디스가 결성되어 기존 공화국 제도를 대중정치의 기반으로 삼았다.

  4. 1989.04.09
    트빌리시

    그루지야의 독립 요구 집회를 소련군이 삽과 가스를 써서 해산했다. 21명이 죽었고 다수가 여성이었다. 소브차크 위원회가 책임 소재를 조사했다.

  5. 1990.01.13–19
    바쿠의 포그롬

    바쿠에서 아르메니아인을 겨냥한 폭력이 며칠간 이어지는 동안 주둔 병력은 개입하지 않았다.

  6. 1990.01.19–20
    검은 1월

    소련군이 바쿠에 진입해 민간인 130여 명이 죽었다. 포그롬은 막지 못한 군대가 인민전선의 권력 도전에는 투입된 셈이었다.

  7. 1990.03.11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

    리투아니아 최고회의가 독립 회복을 선언했다. 모스크바는 이를 무효로 규정하고 경제 봉쇄로 대응했다.

  8. 1991.01.13
    빌뉴스

    소련군과 특수부대가 텔레비전 탑과 방송국을 장악하려 했고 민간인 14명이 죽었다. 명령 계통이 어디까지 올라가는지는 끝내 규명되지 않았다.

  9. 1991.03.17
    연방 국민투표

    연방 유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됐으나 발트 3국·그루지야·아르메니아·몰도바는 참가하지 않았다. 연방의 범위 자체가 이미 다투어지고 있었다.

관련 인물 35명

주도 · 집행9

국방장관 · 군 투입드미트리 야조프1924–2020

바쿠와 빌뉴스에 투입된 병력의 책임 계통 위쪽에 있었다.

KGB 의장 · 특수부대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1924–2007

빌뉴스 작전에 투입된 특수부대를 관할했고, 이듬해 8월 쿠데타의 주동자가 됐다.

내무장관 · 내무부 병력보리스 푸고1937–1991

내무부 병력을 관할했고 발트 지역 강경책의 한 축이었다.

내무장관 · 바쿠 작전 현장바딤 바카틴1937–2022

야조프와 함께 바쿠 외곽 지휘소에서 작전을 지휘했으며, 바쿠 내무부 병력 12,000명이 포그롬에 개입하지 않은 책임에도 연루됐다.

육군총사령관 · 바쿠 작전발렌틴 바렌니코프1923–2009

국방차관 겸 육군총사령관으로서 바쿠에 파견된 고위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작전 후 이즈베스티야 인터뷰에서 군이 절제했다고 주장했다.

국방차관 · 빌뉴스 작전 현장 지휘블라디슬라프 아찰로프1945–2011

1991년 1월 12일 빌뉴스에 도착해 모든 군사 작전의 지휘권을 장악했으며, 텔레비전 탑과 방송국 장악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자카프카스 군관구 사령관 · 트빌리시 작전 현장 지휘이고르 로디오노프1936–2014

1989년 4월 9일 루스타벨리 대로 집회 해산 작전 명령을 내렸다. 소브차크 위원회가 지목했으나, 명령 계통의 위쪽으로는 책임이 올라가지 않았다.

국가구원위원회를 선포한 리투아니아 공산당 이념서기유오자스 예르말라비추스1940–2022

1991년 1월 11일 자신이 리투아니아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고 주장하는 국가구원위원회의 창설을 선포했으며, 이는 소련군의 군사 개입을 위한 정치적 구실이 되었다.

중앙당의 현장 집행자빅토르 폴랴니치코1937–1993

인민전선 지도자들에게 군 투입이 불가피하다고 전했고, 위기 때 위장복을 입고 나타났다.

지도부9

서기장 · 일관된 원칙의 부재미하일 고르바초프1931–2022

협상과 무력 사이를 오갔고, 빌뉴스와 바쿠의 명령 관계를 끝까지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나고르노-카라바흐 특별관리위원회 위원장아르카디 볼스키1932–2006

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1932–

1990년 3월 11일 독립 회복법을 통과시켰고, 경제 봉쇄 74일과 1991년 1월의 소련군 작전을 비폭력 시민저항으로 견뎌 냈다.

위기 당시 아제르바이잔 제1서기압두라흐만 베지로프1930–2022

압두라흐만 베지로프는 상황 통제력을 상실했고, 군대가 진입하기 전에 모스크바로 도망쳤으며, 중앙 정부와 알리예프 양측으로부터 사태의 책임을 추궁받았다.

리투아니아 친모스크바파 공산당 제1서기미콜라스 부로케비추스1927–2016

그는 친모스크바 리투아니아 공산당(CPSU 플랫폼) 제1서기이자 민족구제위원회의 핵심 인물이었고, 1999년 1월 사태에서의 역할로 리투아니아 법정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국방위원회를 이끈 인민전선 지도자아불파즈 엘치베이1938–2000

엘치베이는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 지도자로서 1990년 1월 13일에 결성된 국방위원회를 이끌었으며, 훗날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이 되었다.

트빌리시 시위와 단식투쟁을 조직한 독립위원회 지도자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1939–1993

1989년 4월 트빌리시 시위와 단식 투쟁을 조직한 독립위원회의 공동 지도자였으며, 이후 독립 그루지야의 첫 대통령이 되었다.

에스토니아 인민전선 공동창립자에드가르 사비사르1950–2022

1988년 4월 13일 에스토니아 TV 생방송에서 인민전선 구상을 처음 제안했다.

독립위원회 공동지도자메라브 코스타바1939–1989

감사후리아와 함께 트빌리시 시위를 이끈 독립위원회의 공동지도자였다.

참여6

개혁파 · 발트 정책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1923–2005

개혁파의 이론가로 독소불가침조약 비밀의정서 조사를 이끌어 발트의 주권 주장에 근거를 열었다.

검은 1월 규탄 · 아제르바이잔헤이다르 알리예프1923–2003

검은 1월 직후 모스크바에서 군사개입을 공개 규탄하고 당을 떠났다.

러시아 대통령직을 국민투표에 추가보리스 옐친1931–2007

1991년 2월 7일 러시아 최고회의를 설득해 연방 국민투표와 같은 날 러시아 대통령직 신설을 묻는 투표를 병행하게 했다. 많은 동시대인이 이 쪽이 더 실질적인 결과라고 보았다.

카자흐스탄 투표용지 문구 변경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1940–

카자흐스탄 최고회의는 연방 국민투표 문구에서 '주권 공화국들의 연방'을 '주권 국가들의 연합'으로 바꾸었다. 중앙은 이 결과를 전체 집계에 포함해 달라고 공식 요청받았다.

우크라이나에 이중 질문을 추가레오니트 크랍추크1934–2022

연방 국민투표와 함께 '우크라이나가 주권국가선언에 기초하여 소비에트 주권국가연합의 일원이 되는 데 동의하는가'라는 별도 질문을 추가했고, 유권자 80.2%가 찬성했다.

바쿠 진입을 차단해 폭력을 돌린 시당 제1서기푸아트 무사예프1938–2017

무사예프는 바쿠로 가는 버스를 막아 시위대를 숨가이트로 우회시켰으며, 이 조치는 폭력의 장소가 옮겨지는 결정적 고리였다.

관련 용어

출처: Mark R. Beissinger, Nationalist Mobilization and the Collapse of the Soviet Stat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Human Rights Watch / Helsinki Watch, Conflict in the Soviet Union: Black January in Azerbaidzhan (1991)Thomas de Waal, Black Garden: Armenia and Azerbaijan Through Peace and War (NYU Press,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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