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폴란드 전쟁
1920년 여름, 붉은군대는 왜 바르샤바로 진격했고 왜 거기서 무너졌는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무너진 세 제국의 국경 지대에서 부활한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벌인 전쟁이다. 선전포고 없이 1919년 2월 벨로루시에서 시작된 충돌은, 1920년 4월 피우수트스키가 페틀류라와 손잡고 키예프로 진공하면서 전면전이 되었다. 부됸니의 기병과 투하쳅스키의 7월 공세로 전세를 뒤집은 붉은군대는 혁명의 수출을 내걸고 바르샤바까지 진격했으나, 8월 바르샤바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했다. 1921년 3월 리가 조약은 커즌선보다 훨씬 동쪽에 국경을 그어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분할했고, 이 국경은 1939년까지 유지되었다. 바르샤바 앞에서의 패배는 총검에 의한 혁명 수출 시도의 사실상 마지막이 되었고, 소비에트 국가를 일국에서의 건설이라는 길로 돌려세웠다.
국경 없는 국경 지대: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이 전쟁에는 선전포고가 없었고, 개전일을 특정하기도 어렵다.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하자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 세 제국이 갈라 가졌던 동유럽 한복판에 거대한 진공이 생겼다. 부활한 폴란드의 동쪽 국경은 어떤 조약에도 정해져 있지 않았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철수하는 독일군의 뒤를 따라 서쪽으로 병력을 밀어 넣고 있었다. 1919년 2월 벨로루시의 베레자 카르투스카에서 마주 들어오던 두 군대가 처음 충돌했다.
두 나라의 목표는 처음부터 양립할 수 없었다. 국가원수 피우수트스키는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에 폴란드가 주도하는 연방(리투아니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을 세워 러시아를 18세기 이전의 경계로 밀어내려 했다. 소비에트 지도부에게 폴란드는 그 자체가 목표라기보다 독일 혁명과 이어지는 다리였다. 1919년 폴란드군은 빌노(4월)와 민스크(8월)를 차례로 점령했으나, 가을이 되자 피우수트스키는 진격을 멈추고 비밀 접촉으로 전선을 사실상 동결했다. 데니킨의 백군이 모스크바로 다가서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하나의 불가분한 러시아」를 내건 백군의 승리는 폴란드 독립에 소비에트 정권보다 더 나쁘다는 계산이었고, 이 계산이 백군 최전성기의 소비에트 정권에 숨 쉴 틈을 주었다.
폴란드군의 동진은 독일의 점령 질서가 붕괴한 공간에서 진행됐다. 그 배경은 브레스트 강화에, 라다·헤트만·디렉토리아의 정권 교체와 페틀류라의 협상력 약화는 우크라이나 혁명과 전쟁에 이어진다.
1919년: 빌뉴스에서 미카셰비체까지
첫해의 전쟁은 작았지만 그 결과는 컸다. 1919년 봄 폴란드군은 아직 여러 군대의 합이었다. 옛 오스트리아군과 독일군의 폴란드인 장교들, 피우수트스키의 군단병, 프랑스에서 조직되어 4월부터 배로 들어온 유제프 할레르의 「청군」 약 6만 8천 명, 그리고 포즈난에서 독일에 맞서 봉기한 대폴란드군이 서로 다른 군복과 명령 체계를 가진 채 하나의 군대로 묶이는 중이었다. 소비에트 쪽에서 서쪽 국경을 맡은 것은 독일군의 뒤를 따라 들어온 서부군이었고, 그 병력은 데니킨과 콜차크를 상대하는 남부·동부 전선에 밀려 늘 부족했다.
4월 19일부터 21일까지 피우수트스키는 직접 기병을 이끌고 빌뉴스를 기습해 리트벨 소비에트 정부를 몰아냈다. 그는 4월 22일 「옛 리투아니아 대공국 주민에게」 보내는 포고문에서 주민 스스로 장래를 결정하게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도시는 폴란드군의 손에 남았다. 8월 8일 민스크가 떨어졌고, 가을에는 전선이 베레지나 강과 다우가바 강 선에서 멎었다. 피우수트스키가 멈춘 것은 힘이 다해서가 아니었다. 그해 가을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데니킨은 폴란드에 공동 작전을 요청했으나 「단일 불가분 러시아」의 회복을 전제로 폴란드의 동부 국경을 논의하기를 거부했다. 피우수트스키는 백군이 이기면 폴란드는 1914년의 국경으로 돌아간다고 판단했다. 10월부터 12월까지 벨로루시의 미카셰비체 역에서 폴란드 대표 보에르네르와 소비에트 대표 율리안 마르흘렙스키가 비밀 회담을 열었고, 그 결과 폴란드군은 데니킨이 오룔에서 무너지는 결정적인 몇 주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소비에트 지도부는 서부의 병력 4만여 명을 남부로 돌릴 수 있었다. 데니킨은 뒤에 이 침묵을 자신의 패인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미카셰비체의 휴전은 강화가 아니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1920년 1월 28일 폴란드에 「현재의 전선에서」 평화를 제안했고, 폴란드 정부는 답을 미루었다. 그 사이 1월 3일 폴란드군은 라트비아와 함께 다우가프필스를 점령했고, 피우수트스키는 봄의 결전을 준비했다. 소비에트 쪽도 같은 계산이었다. 콜차크가 총살되고 데니킨이 노보로시스크에서 배에 오른 1920년 3월, 붉은 군대의 최정예 부대들이 서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두 나라 모두 상대가 공격을 준비한다고 믿었고 두 나라 모두 옳았다.
북쪽 날개: 라트비아와의 협력, 리투아니아와의 충돌
1920년 1월 폴란드와 라트비아는 다우가프필스에서 합동 작전을 벌여 소비에트군을 밀어냈다. 라트비아에게는 라트갈레 확보를 위한 전쟁이었고, 폴란드에게는 우호국과의 연결을 확보하고 북쪽 전선을 정리하는 작전이었다. 폴란드의 모든 북방 행동을 발트 국가들과의 공통 전쟁으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리투아니아에서 드러난다.
폴란드군은 이미 1919년 4월 빌뉴스를 점령했다. 1920년 7월 12일 소비에트 러시아는 리투아니아와의 모스크바 조약에서 빌뉴스에 대한 리투아니아의 권리를 인정했지만, 이 합의는 폴란드와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지 못했다. 적군의 진격과 후퇴에 따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사적 충돌도 재개됐다. 10월 7일 수바우키 협정은 제한된 군사분계선과 정전을 정했지만, 9일 젤리고프스키군이 빌뉴스를 점령했다. 중부 리투아니아 수립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사이에 장기적 적대를 남겼다. 세 나라의 독립전쟁과 별도 강화는 발트 독립전쟁에서 다룬다.
1920년 봄: 키예프로 간 폴란드
1920년 초 양쪽 모두 결전을 준비하며 평화 교섭을 주고받았다. 4월 21일 피우수트스키는 파리에 밀려나 있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수반 페틀류라와 바르샤바 협정을 맺었다. 폴란드가 페틀류라 정부를 승인하는 대가로 페틀류라는 동갈리치아와 볼히니아 서부를 폴란드 영토로 인정했다. 4월 25일 폴란드-우크라이나 연합군이 공세를 열었고, 붉은군대가 결전을 피해 물러난 키예프에 5월 7일 입성했다.
군사적 성공은 정치적으로 비어 있었다. 페틀류라의 이름으로도 우크라이나 농민의 대중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갈리치아를 폴란드에 내준 협정은 우크라이나 민족운동 안에서 페틀류라의 입지를 갉아먹었다. 반대로 소비에트 쪽에서는 「폴란드 지주의 침공」이 내전에 지친 사회를 다시 묶는 애국적 동원의 계기가 되었다. 브루실로프를 비롯한 제정 시대 장교 수천 명이 이 전쟁에서 붉은군대에 복무를 자원했다.
비스와로: 총검에 실린 혁명
반격은 두 갈래로 왔다. 남쪽에서는 6월 5일 부됸니의 제1기병군이 전선을 찢어 폴란드군을 키예프에서 몰아냈고, 북쪽에서는 7월 4일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군이 총공세에 나섰다. 7월 한 달 동안 민스크, 빌노, 그로드노, 비아위스토크가 차례로 떨어졌다. 7월 11일 영국이 민족 분포선(커즌선)에서의 정전을 제안했으나, 승리를 확신한 소비에트 정부는 중재를 거절했다.
이 지점에서 전쟁의 성격이 바뀌었다. 방어전이 「혁명의 수출」 시험이 된 것이다. 마침 모스크바에서 열리고 있던 코민테른 제2차 대회의 대의원들은 회의장에 걸린 지도로 전선의 이동을 지켜보았다. 7월 30일 점령된 비아위스토크에서 마르흘렙스키, 제르진스키, 콘 등의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폴레브콤)가 소비에트 폴란드의 예비 정부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기대는 빗나갔다. 폴란드 노동자와 농민은 붉은군대를 해방자가 아니라 러시아군으로 맞았다. 레닌은 뒷날 클라라 체트킨에게 폴란드의 농민과 노동자들이 "우리가 기대한 동맹자가 아니라 적으로" 붉은군대를 대했다고 인정했고, 1920년 9월 당협의회 비공개 연설에서는 폴란드 진격을 "총검으로 해 본 정찰"이라 부르며 패배를 시인했다. 이 연설은 1992년에야 공개되었다.
혁명 정부와 분열된 사령부: 바르샤바로 가는 길의 두 균열
비아위스토크에 도착한 폴레브콤은 취임 선언에서 "지주-부르주아 정부를 권력에서 배제한다"고 천명하고 공장·삼림·대지주의 토지를 인민 소유로 선포했다. 위원장 율리안 마르흘렙스키, 사실상의 지도부 펠릭스 제르진스키, 그리고 펠릭스 콘과 이오시프 운쉴리흐트 등으로 구성된 이 예비 정부는 붉은군대의 진격에 맞춰 장갑열차를 타고 스몰렌스크에서 민스크, 빌노를 거쳐 비아위스토크까지 이동해 왔다. 취임 이틀 전인 7월 28일 투하쳅스키의 군대가 비아위스토크를 점령했고, 폴레브콤은 브라니츠키 궁전에 본부를 두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폴란드 노동자의 봉기는 오지 않았다. 제르진스키는 8월 5일 레닌에게 타전한 전문에서 "나레프 강 너머의 분위기는 적대적이다. 가축과 말을 몰아내고 수레 바퀴를 떼어간다"고 보고했다. 폴레브콤이 편성하려 한 폴란드 적군은 겨우 176명의 적색 소총 연대 하나와 파견된 러시아 적군 병력을 합쳐 총 1,000명 남짓에 그쳤다. 비아위스토크의 유대인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반응이 있었으나, 가톨릭 폴란드인 다수는 침략군의 꼭두각시로 간주했다. 폴레브콤은 8월 4일 "사회주의 혁명에 위험한 모든 자, 폴란드 대부르주아지와 지주의 대표자들, 백색 폴란드에 동조하는 모든 자를 체포하여 강제수용소로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실질적인 행정력은 점령지 일부에만 미쳤다.
바로 이 시기, 붉은군대의 진격을 뒤에서 무너뜨릴 또 다른 균열이 사령부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군은 7월 한 달 동안 600킬로미터 이상을 진격하며 바르샤바 동쪽과 북쪽까지 도달했지만, 그 남쪽 측면은 프리페트 습지와 8,000명 규모의 모지리 집단에만 의존한 채 위험할 정도로 노출되어 있었다. 서부전선군과 예고로프의 남서전선군 사이의 이 접점은 전선 전체에서 가장 취약한 지점이었다.
총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는 투하쳅스키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8월 2일 남서전선군 소속 제12군과 부됸니의 제1기병군을 서부전선으로 전속시키라는 첫 지시를 내렸고, 8월 5일에는 이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남서전선군 혁명군사평의회의 정치위원 이오시프 스탈린은 명령의 부서를 거부했다. 스탈린에게 르부프(리보프)는 단순한 군사 목표가 아니었다. 남서전선군이 르부프를 함락하면 자신이 정치위원으로 있는 전선이 전쟁의 결정적 승리를 거둔 셈이 되며, 동시에 브란겔의 백군이 크림에서 위협하는 상황에서 남부 전선을 방기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8월 12일 레닌에게 보낸 편지에서 "총사령관과 그 일당이 브란겔에 대한 승리를 조직하는 일을 태업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제1기병군은 8월 내내 르부프 공방전에 묶여 있었고, 결국 제1기병군 단 한 개 사단도 바르샤바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카를 라데크는 폴란드 민족주의의 폭발적 저항을 경고했고, 레프 트로츠키 역시 바르샤바 진격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유럽 혁명의 교두보라는 확신 아래 진격을 계속 명령했다. 8월 13일 투하쳅스키의 군대가 바르샤바 동쪽 라지민을 공격하며 전투의 막이 올랐지만, 사령부의 분열과 폴란드 민중의 적대라는 두 균열은 이미 승패를 가르는 조건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바르샤바: 8월의 전투들
7월 24일 바르샤바에서는 농민당의 빈첸티 비토스를 총리로, 사회당의 이그나치 다신스키를 부총리로 하는 국방정부가 구성되었다. 좌우가 모두 참여한 이 정부는 의용군 모집을 호소했고, 8월 중순까지 10만 명 넘는 지원자가 입대했다. 국방장관 카지미에시 손코프스키는 후방의 동원을 맡았고, 참모총장 타데우시 로즈바도프스키는 8월 6일 작전명령 8358/III호로 반격 계획을 확정했다. 북쪽에서 시코르스키의 제5군이 브크라 강에서 소비에트 제4군과 제15군을 막고, 바르샤바 정면의 제1군이 라지민을 지키는 사이, 남쪽 비에프시 강에 집결한 5개 사단의 타격 집단이 소비에트 제16군의 노출된 좌익을 북으로 찔러 올라간다는 구상이었다. 피우수트스키는 8월 12일 국가원수 직책을 잠시 내려놓고 타격 집단의 지휘를 직접 맡았다.
폴란드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보이지 않는 곳에 있었다. 참모본부 암호국의 얀 코발레프스키가 1919년 9월부터 붉은 군대의 무선 암호를 풀어 왔고, 8월의 전투 동안 폴란드 사령부는 투하쳅스키의 명령을 거의 실시간으로 읽었다. 8월 13일 소비에트 제3군과 제16군이 바르샤바 동쪽 20킬로미터의 라지민을 공격해 도시를 두 번 빼앗고 두 번 잃었다. 8월 14일 오수프에서 의용 대대를 이끌던 사제 이그나치 스코룹카가 전사했고, 그의 죽음은 곧 「비스와의 기적」 서사의 중심 상징이 되었다. 같은 날 북쪽에서 시코르스키의 제5군이 브크라 강에서 반격에 나섰고, 8월 15일 폴란드 기병이 소비에트 제4군의 무전기가 있던 치에하누프를 급습해 투하쳅스키와 제4군의 연락을 끊었다. 그 뒤 며칠 동안 제4군은 사령부의 명령을 받지 못한 채 서쪽으로 계속 나갔다.
8월 16일 새벽 비에프시 강의 타격 집단이 북진을 시작했다. 예상한 저항은 없었다. 모지리 집단 8천 명이 지키던 100킬로미터의 틈은 하루 만에 열렸고, 8월 17일 폴란드군은 시에들체와 민스크마조비에츠키를, 18일 비아위스토크로 가는 철도를 끊었다. 투하쳅스키는 민스크의 사령부에서 8월 18일에야 사태를 파악하고 총퇴각을 명령했다. 바르샤바 북쪽에서 가장 멀리 나가 있던 제4군과 가야 가이의 제3기병군단은 퇴로가 막혀 8월 24일부터 26일까지 동프로이센 국경을 넘어 독일군에 무장해제되었다. 8월 25일 전투가 끝났을 때 붉은 군대는 6만 6천 명이 포로가 되고 4만 명 이상이 억류되었으며, 200문 넘는 포와 1,000정 넘는 기관총을 잃었다. 폴란드는 약 4,500명이 죽고 2만 2천 명이 다쳤다.
남쪽에서는 다른 전투가 이어졌다. 리보프를 포기하고 8월 20일 북서로 방향을 돌린 부됸니의 제1기병군은 8월 29일부터 31일까지 자모시치를 공격했다. 도시를 지킨 것은 폴란드 부대와 마르코 베즈루치코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 제6사단이었다. 8월 31일 코마루프에서 루멜의 폴란드 제1기병사단이 제1기병군을 정면에서 맞았다. 1813년 이후 유럽 최대의 기병 전투로 불리는 이 싸움에서 부됸니의 군대는 처음으로 결정적으로 패해 부크 강 너머로 물러났다. 폴란드군은 무선 감청과 암호 해독으로 붉은 군대의 배치를 읽었고, 병참선은 한계까지 늘어났으며, 남서전선군과의 협조는 무너져 있었다. 정치위원 스탈린이 기병군 전속 명령의 부서를 거부한 일화는 뒷날 패배 책임 논쟁의 핵심이 되었고, 투하쳅스키와 스탈린·부됸니 진영의 반목으로 남아 1937년까지 이어진다.
프랑스의 지원은 무기·탄약과 군사교육, 부대에 배치된 고문단이라는 지속적인 기반을 제공했다. 1919년부터 활동한 프랑스 군사사절단과 1920년 여름의 영불 연합사절단은 구별해야 한다. 후자에 참여한 막심 베강은 폴란드 참모부의 고문으로 반격 계획을 협의했다. 이를 베강 한 사람이 승리를 설계한 것으로 설명하면 피우수트스키와 로즈바도프스키, 폴란드 지휘부의 작전 수립과 실제 수행을 지우게 된다. 반대로 폴란드 쪽의 「기적」 서사는 소비에트 사령부의 분열과 폴란드 노동자의 냉담, 암호 해독이라는 세속적 조건들을 지운다.
노동자의 파업과 열강의 선택: 전쟁의 국제적 맥락
이 전쟁은 유럽 노동운동이 처음으로 자기 정부의 대외 정책을 직접 막아 낸 사건이기도 했다. 1920년 5월 런던 항의 부두 노동자들은 폴란드로 가는 무기를 실은 화물선 「졸리 조지」의 선적을 거부했다. 8월 9일 붉은 군대가 바르샤바로 다가서고 영국 정부가 개입을 검토하자 노동당과 노동조합회의는 「행동위원회」를 세워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전쟁이 벌어지면 총파업으로 맞서겠다고 선언했고, 전국 350여 곳에 지방 행동위원회가 생겼다. 로이드 조지 정부는 병력 파견을 포기했다. 독일은 7월 20일 중립을 선언하고 영토 통과를 막았으며, 단치히의 항만 노동자들은 8월 폴란드행 군수품 하선을 거부해 영국군 병사들이 직접 짐을 내려야 했다. 체코슬로바키아도 무기 통과를 금지했고, 헝가리의 호르티 정권이 제안한 병력 파견은 그 통과 금지에 막혔다. 폴란드는 서쪽에서 사실상 고립된 채 싸웠다.
예외는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1919년부터 군사사절단을 두고 폴란드군을 훈련시켰고, 1920년 한 해 동안 수십만 정의 소총과 수천 정의 기관총, 수백 문의 포, 항공기와 전차를 보냈다. 미국 조종사들로 편성된 코시치우슈코 비행대대가 부됸니의 기병을 공습했다. 연합국 정부들의 정책도 하나가 아니었다. 7월 10일 스파 회의에서 영국은 폴란드 총리 그랍스키에게 커즌선까지의 후퇴와 빌뉴스의 리투아니아 인도를 조건으로 중재를 약속했고, 7월 11일 커즌 각서가 모스크바로 갔다. 소비에트 정부는 승리를 확신해 이를 거절했다. 프랑스는 폴란드를 독일과 소비에트 사이의 방벽으로 보았고, 영국은 러시아와의 통상 재개를 원했다. 8월의 승리로 폴란드는 어느 쪽의 조건도 따르지 않게 되었다.
소비에트 쪽에서 이 전쟁은 코민테른의 첫 실지 시험이었다. 7월 19일부터 8월 7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코민테른 대회의 대의원들은 회의장에 걸린 지도로 전선의 이동을 지켜보았다. 대회가 채택한 「21개 조건」과 민족·식민지 문제 테제는 유럽 혁명이 임박했다는 전제 위에 있었다. 폴란드 노동자들이 붉은 군대를 해방자로 맞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 전제를 흔들었다. 카를 라데크와 폴란드 공산주의자들은 진격 전부터 폴란드 민족주의의 힘을 경고했고, 레닌은 뒤에 이 전쟁이 「총검으로 해 본 정찰」이었다고 인정했다. 유럽 혁명을 군사적으로 앞당긴다는 구상은 바르샤바 앞에서 끝났고, 그 자리에 통상 협정과 라팔로 조약, 신경제정책이 들어섰다.
네만에서 리가까지: 패배한 쪽이 더 나은 평화를 얻다
바르샤바에서 퇴각한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군은 9월 중순 네만 강, 시차라 강, 스비슬라치 강 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총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는 반격을 명령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서부전선군은 정원 대비 20~40% 수준으로 줄었고, 8월에 6만 8천 명, 9월에 2만 명의 증원이 도착했으나 숙련된 지휘관과 포병은 바르샤바 앞에서 거의 소진된 뒤였다. 그래도 투하쳅스키는 제3군, 제15군, 제16군을 재편하여 브레스트 요새와 비아위스토크 탈환을 노리는 남하 공세를 계획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소련군이 방어를 굳히기 전에 네만 선을 돌파하기로 했다. 작전의 핵심은 우회였다. 폴란드 제2군과 제4군이 그로드노와 바우카비스크에서 정면으로 묶는 사이, 오신스키 장군의 수바우키 집단이 리투아니아가 장악한 세이니와 드루스키닝카이 사이의 좁은 회랑을 통해 북쪽으로 돌아 들어가 소련 제3군의 배후를 찌르는 것이었다. 9월 20일 폴란드 제21산악사단이 그로드노를 공격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흘간의 교착 끝에 9월 23일 폴란드군이 드루스키닝카이를 점령하고 그로드노와 빌노를 잇는 철도를 차단했다. 소련 제3군의 보급선이 끊겼고, 폴란드 기병대는 리다까지 진출했다. 9월 26일 크라요프스키 장군의 기병이 핀스크를 점령하며 소련 제4군의 보급선마저 위협받자, 투하쳅스키는 총퇴각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시차라 강 전투(10월 중순) 이후 전선은 타르노폴, 두브노, 민스크, 드리사 선까지 밀렸다.
그러나 폴란드군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100만 명을 동원했지만 전선 병력은 35만여 명, 부대 충실도는 정원의 50~60%에 머물렀다. 그리고 피우수트스키에게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전쟁의 정치적 목표였던 우크라이나 독립국 건설은 이미 물 건너갔고, 바르샤바 앞에서 얻은 것은 승리였지 페틀류라의 귀환은 아니었다.
그래서 협상장은 예상과 다른 그림을 그렸다. 평화 회담은 8월 17일 민스크에서 시작되었지만, 바르샤바 전투가 한창인 날이었다. 회담은 곧 리가로 옮겨져 9월 21일 재개되었다. 소비에트 대표단은 아돌프 이오페가 이끌었다. 이오페는 모스크바에서 가져온 제안을 제시했다: 국경을 커즌선보다 '상당히 동쪽'에 긋되 동갈리치아는 폴란드 측에 두고, 민족자결 문제는 일단 제쳐두겠다는 선언이었다. 제안은 10월 5일까지 유효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이렇게 양보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레닌은 브란겔의 백군이 크림에서 아직 건재하고, 탐보프 반란을 비롯한 농민 봉기가 번지고 있던 상황에서 폴란드 전선을 더 끌고 갈 여유가 없었다. 레닌은 10월 15일 모스크바현 집행위원장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4월에 제안했을 때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평화예비조약에 조인했다. 당시 국경은 50베르스타 동쪽이었으나 지금은 50베르스타 서쪽이다.'
그러나 더 극적인 반전은 폴란드 측에서 일어났다. 전쟁에 이겼으면서도 더 많은 영토를 요구하지 않은 것이다. 리가의 폴란드 대표단을 이끈 얀 돔프스키는 피우수트스키의 측근이 아니었다. 대표단 실세는 국가민주당(엔데치아)이었고, 그 이념적 지도자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폴란드가 민스크를 포함한 넓은 동부 영토를 병합하면 비(非)폴란드계 소수민족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넘어서고, 이는 폴란드 민족국가의 안정성을 해칠 뿐 아니라 선거에서 피우수트스키 진영에 유리한 유권자를 끌어들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돔프스키는 이오페와의 일대일 비밀교섭에서 민스크를 포기하는 대신 바라노비체, 우니니에츠, 사르니, 루브네를 잇는 전략철도와 라트비아와의 접경을 확보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협정은 10월 5일 합의에 이르렀고, 10월 12일 예비강화 및 정전협정이 서명되어 10월 18일 밤 자정 발효했다. 페틀류라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동맹국인 폴란드에 의해 공식 승인을 박탈당했고, 홀로 소비에트 군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피우수트스키는 이 조약을 '비겁한 행위'라고 불렀고, 이듬해 5월 칼리시의 우크라이나군 수용소를 찾아 페틀류라의 병사들에게 사과했다. 전쟁에 이겼지만, 이긴 쪽이 스스로 평화의 폭을 줄인 역설이었다.
리가의 국경과 배제된 동맹국
1921년 3월 18일 리가 조약은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사이에 체결됐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소비에트 벨로루시를 대표하기도 했다. 폴란드는 동부의 넓은 영토를 얻었지만 민스크는 소비에트 쪽에 남았다. 이 조약은 1920년 8월 라트비아와 러시아 사이에 체결된 동명의 강화와 별개다.
폴란드 지도부의 목표도 하나가 아니었다. 피우수트스키의 연방 구상과 페틀류라와의 동맹은 독립 우크라이나를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사이에 두려는 시도였다. 반면 민족민주파가 중시한 것은 폴란드 국가가 통치할 수 있는 영토와 인구의 구성이었다. 소비에트 측도 브란겔과 농민봉기를 상대하면서 서부전선을 줄일 필요가 있었다. 전쟁 피로와 서로 다른 국가 구상이 군사적 승리를 제한된 강화로 바꾸었다.
그 비용을 가장 직접적으로 치른 동맹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었다. 페틀류라는 협상장에서 배제됐고, 폴란드는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조약 상대국으로 인정했다. 1920년 11월까지 싸운 인민공화국군은 폴란드로 물러나 억류되었다. 부와크-바와호비치의 별도 벨로루시 원정도 휴전 뒤 실패했다. 강화선 밖의 반소비에트 군대가 전쟁을 계속한다고 폴란드 정부가 다시 전면전에 나서는 것은 아니었다.
조약은 주민의 국적 선택과 소수자의 언어·종교·문화적 권리, 재산·문화재 반환과 재정 정산을 규정했다. 그러나 조문과 실제 이행은 달랐다. 우크라이나인과 벨로루시인은 국경 양쪽으로 갈라졌고, 폴란드의 동부에는 유대인을 비롯한 여러 공동체가 함께 살았다. 국경과 소수자 통치는 안정의 성취인 동시에 갈등의 지속이었다.
전쟁포로의 죽음도 국경 확정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수용소의 전염병·굶주림·열악한 처우와 책임은 포로 기록을 통해 따져야 한다. 후대의 카틴 학살과 숫자를 맞바꾸어 정당화하는 방식은 서로 다른 시기의 사건을 왜곡한다. 바르샤바 패배가 적군을 통한 유럽 혁명 확장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과, 신경제정책·서방과의 관계 전환을 이 전쟁 하나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함께 보아야 한다. 전후 국가의 재편은 러시아 내전과 소련 성립으로 이어진다.
결과
리가 조약의 국경은 1939년 9월 17일 소련군이 다시 그 선을 넘을 때까지 18년을 유지되었다. 폴란드 수용소에 갇힌 붉은군대 포로 11만여 명 가운데 1만 6,000~2만 명이 질병과 기아로 죽었고(2004년 러시아-폴란드 공동 문서집의 추계), 소비에트 수용소의 폴란드 포로도 수천 명이 죽었다. 바르샤바의 패배는 유럽 혁명을 군사적으로 앞당긴다는 구상을 사실상 끝냈고, 이듬해의 신경제정책과 서방과의 통상 재개, 1922년 라팔로 조약으로 이어지는 공존 노선의 배경이 되었다. 전쟁의 기억은 길게 남았다. 패배의 책임을 둘러싼 투하쳅스키와 스탈린·부됸니 진영의 반목은 1937년 군 숙청에서 다시 나타났고, 소련 내 폴란드인을 겨눈 1937년 폴란드 작전의 간첩 강박과 1939년 폴란드 분할의 논리에도 이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연표와 지도
1919.02.14 첫 교전: 독일군이 물러나는 벨로루시
- 소비에트 러시아와 소비에트 공화국
- 폴란드 (1920년 동맹 우크라이나군 포함)
- 독일과 단치히
- 다른 국가와 세력
경계는 근사치이며 작전 기록을 바탕으로 개략적으로 그렸고, 소비에트 쪽 전선은 러시아 내전 지도와 같습니다. 회색은 발트 3국, 1919년의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데니킨과 브랑겔의 백군, 루마니아령 베사라비아·부코비나, 체코슬로바키아령 루테니아입니다. 1919년 초의 독일에는 철수 중이던 동부 점령지가 포함되며, 단치히는 1920년 11월 자유시가 되었습니다. 전선 뒤의 봉기와 유격 지역, 마흐노 지역은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 11918.11.11폴란드, 123년 만의 독립 회복
독일의 항복과 함께 피우수트스키가 바르샤바에서 군권을 넘겨받았다. 부활한 폴란드의 동쪽 국경은 어떤 조약에도 정해져 있지 않았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철수하는 독일군의 뒤를 따라 서쪽으로 병력을 밀어 넣고 있었다.
- 21919.02.14베레자 카르투스카: 첫 교전
독일군이 빠져나간 벨로루시의 진공으로 폴란드군과 붉은 군대가 마주 들어오다 처음 충돌했다. 선전포고는 끝내 없었고, 개전일을 특정하기도 어렵다.
- 31919.04.19폴란드군, 빌뉴스 점령
피우수트스키가 직접 기병을 이끌고 리트벨 소비에트 정부의 수도 빌뉴스를 기습했다. 8월 8일 민스크도 폴란드군에 넘어갔다. 빌뉴스의 귀속은 리투아니아와의 오랜 분쟁이 되었다.
- 41919.10–12미카셰비체 비밀 회담
데니킨이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가을, 피우수트스키는 백군의 승리가 폴란드 독립에 더 나쁘다고 판단해 진격을 멈추고 마르흘렙스키와 비밀 회담을 열었다. 소비에트 지도부는 서부의 병력 4만여 명을 남부로 돌릴 수 있었다.
- 51920.04.21바르샤바 협정: 피우수트스키와 페틀류라
폴란드가 페틀류라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페틀류라는 동갈리치아와 볼히니아 서부에 대한 폴란드의 영유를 인정했다. 나흘 뒤 폴란드-우크라이나 연합군이 키예프를 향해 공세를 열었다.
- 61920.05.07폴란드군, 키예프 입성
붉은 군대가 결전을 피해 물러나 키예프는 거의 싸움 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기대했던 우크라이나의 대중 봉기와 페틀류라군의 확충은 일어나지 않았고, 소비에트 쪽에서는 「폴란드 지주의 침공」이 애국적 동원의 계기가 되었다.
- 71920.06.05부됸니의 제1기병군, 전선 돌파
남서전선군의 제1기병군이 지토미르 방면에서 폴란드 전선을 찢었다. 폴란드군은 6월 10일 키예프를 버리고 총퇴각에 들어갔다.
- 81920.07.04투하쳅스키의 7월 공세
27세의 서부전선군 사령관 투하쳅스키가 7월 2일 명령 제1423호를 내렸다: 「백색 폴란드의 시체를 넘어 세계적 대화재로 가는 길이 놓여 있다. 빌노로, 민스크로, 바르샤바로, 진군!」 민스크(7월 11일), 빌뉴스(14일), 그로드노(19일), 비아위스토크(28일)가 차례로 떨어졌다.
- 91920.07.11커즌 각서
스파 회의에서 폴란드 총리 그랍스키가 영국의 중재 조건을 받아들인 뒤 영국 외무장관 커즌이 민족 분포에 따른 잠정 경계선(훗날의 커즌선)에서의 정전을 제안했다. 승리를 확신한 소비에트 정부는 중재를 거절하고 폴란드와의 직접 교섭을 요구하며 진격을 계속했다.
- 101920.07.24바르샤바의 국방정부
농민당의 비토스를 총리로, 사회당의 다신스키를 부총리로 하는 좌우 연합의 국방정부가 구성되어 의용군 모집을 호소했고, 8월 중순까지 10만 명 넘는 지원자가 입대했다. 국방장관 손코프스키가 후방 동원을 맡았다.
- 111920.07.30비아위스토크의 폴레브콤
점령된 비아위스토크에서 마르흘렙스키를 수반으로, 제르진스키와 콘을 위원으로 하는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가 수립을 선포했다. 소비에트 폴란드의 예비 정부였으나 폴란드 노동자·농민의 호응은 오지 않았고, 편성하려던 폴란드 적군은 1,000명을 넘지 못했다.
- 121920.08.09영국 노동운동의 행동위원회
영국 정부가 개입을 검토하자 노동당과 노동조합회의는 소비에트 러시아에 대한 전쟁이 벌어지면 총파업으로 맞서겠다고 선언하고 전국에 행동위원회를 세웠다. 런던과 단치히의 부두 노동자들은 폴란드행 무기 선적을 거부했고,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는 통과를 막았다.
- 131920.08.13–25바르샤바 전투
라지민에서 시작된 전투는 8월 14일 시코르스키의 제5군이 브크라 강에서 반격하고 8월 16일 피우수트스키의 타격 집단이 비에프시 강에서 노출된 소비에트 좌익을 치면서 뒤집혔다. 폴란드군은 붉은 군대의 무선 암호를 읽고 있었다. 서부전선군은 붕괴해 6만 6천 명이 포로가 되었고 제4군과 가이의 기병군단은 동프로이센에 억류되었다. 폴란드에서는 「비스와의 기적」으로 불린다.
- 141920.08.31코마루프: 제1기병군의 패배
리보프를 포기하고 북서로 돌아선 부됸니의 기병군이 자모시치 공격에 실패한 뒤 코마루프에서 루멜의 폴란드 제1기병사단에 패했다. 1813년 이후 유럽 최대의 기병 전투였다. 자모시치는 폴란드군과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 제6사단이 지켰다.
- 151920.09.20–26네만 전투
재편성한 투하쳅스키의 네만 강 방어선을 폴란드군이 리투아니아 영토를 통한 북쪽 우회로 무너뜨렸다. 그로드노와 빌뉴스를 잇는 철도가 끊기자 소비에트 제3군은 후퇴했고, 소비에트 측에 남은 선택은 강화뿐이었다.
- 161920.10.18정전 발효
10월 12일 리가에서 서명된 예비 강화와 정전 협정이 발효했다. 페틀류라의 우크라이나군과 크림의 브란겔 백군은 각자 소비에트 군대와 홀로 마주하게 되었고, 10월 9일 젤리고프스키의 빌뉴스 점령은 리투아니아와의 새 분쟁을 열었다.
- 171921.03.18리가 조약
국경은 커즌선보다 약 200킬로미터 동쪽에 그어져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가 분할되었고, 이 국경은 1939년 9월 17일까지 유지된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배상금 지불을 약속했고, 폴란드는 페틀류라 지원을 끊었다. 폴란드 수용소의 붉은 군대 포로 가운데 1만 6천~2만 명이 죽었다.
관련 인물 45명
소비에트 러시아31명
지도부4
라데크와 트로츠키의 회의론을 물리치고 7월 커즌 각서를 거절하며 바르샤바 진격을 결정했다. 9월 당협의회 비공개 연설에서 이 전쟁을 「총검으로 해 본 정찰」이라 부르며 패배를 시인했다.
군사인민위원 · 바르샤바 진격에 회의적레프 트로츠키1879–1940전쟁인민위원으로 방어전에서 반격으로의 전환을 이끌었으나 커즌선을 넘는 바르샤바 진격에는 회의적이었고, 패배 뒤 카메네프와 총사령부를 옹호했다.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폴레브콤) 위원장율리안 마르흘레프스키1866–1925비아위스토크에서 수립된 소비에트 폴란드의 예비 정부 수반. 폴란드 노동자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3주 만에 철수했다.
붉은군대 총사령관 · 남서전선군 전용 명령세르게이 카메네프1881–19368월 초 투하쳅스키의 요청으로 제1기병군과 제12군을 서부전선으로 전속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스탈린과 부됸니가 이를 거부하면서 바르샤바 전투의 결정적 균열이 생겼다.
집행 · 지휘16
27세의 서부전선군 사령관으로 7월 공세에서 600킬로미터를 진격했으나 노출된 좌익과 끊긴 통신 속에서 8월 바르샤바 앞에서 패했다. 1923년 강의록 『비스와로의 진군』에서 패인을 남서전선군의 비협조에 돌렸다.
남서전선군 정치위원 · 기병군 전용 명령 부서 거부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남서전선군 정치위원으로 리보프 공략을 우선해 8월 제1기병군을 서부전선으로 넘기라는 총사령부 명령의 부서를 거부했고, 이 일은 투하쳅스키와의 오랜 반목의 뿌리가 되었다.
남서전선군 사령관알렉산드르 예고로프1883–1939남서전선군 사령관으로 키예프 탈환과 리보프 공세를 지휘했으나 8월 서부전선군과의 협조에 실패했다.
제1기병군 사령관 · 6월 돌파세묜 부됸니1883–19736월 5일 제1기병군으로 폴란드 전선을 돌파해 키예프에서 폴란드군을 몰아냈으나, 8월 리보프에 묶인 뒤 코마루프에서 첫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제14기병사단장알렉산드르 파르호멘코1886–1921제14기병사단장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했다.
서부전선 정치총국장스타니스와프 페스트콥스키1882–1937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중 서부전선 정치총국장을 맡았다.
25사단장이반 쿠탸코프1897–19381920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25사단을 지휘했다.
제15군 사령관아우구스트 코르크1887–19371919년 8월부터 1920년 10월까지 제15군을 지휘했다.
폴란드군 방어전 지휘관니콜라이 쇼르스1895–19191919년 3월부터 8월까지 제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단장으로 폴란드군에 맞서 방어전을 지휘했다.
적군 중대·대대장미하일 샬린1897–1970내전기에 적군 중대·대대장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가했다.
제17기병사단 군정위원이반 페트로프1896–1958내전 중 제17기병사단 군정위원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했다.
붉은 군대 부대 지휘관세묜 보그다노프1894–1960붉은 군대 소대·중대·대대 지휘관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했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선 기병여단장그리고리 코톱스키1881–19251920년 코톱스키는 소비에트-폴란드 전선에서 기병여단을 지휘했다.
서부전선 정치국장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 (먀스니캰)1886–1925폴란드 전쟁 때 서부전선 정치국장을 지냈다.
소총사단 참모장표도르 톨부힌1894–1949제56소총사단 참모장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했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선의 대대장쿠즈마 갈리츠키1897–19731920년 제45소총사단 제397소총연대 대대장으로 소비에트-폴란드 전선에 투입됐다.
참여10
제1기병군 혁명군사회의 위원으로 부됸니와 함께 6월 돌파와 8월 리보프 공세에 참여했다.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폴레브콤) 위원펠릭스 제르진스키1877–1926비아위스토크 폴레브콤의 사실상 지도자로 소비에트 폴란드의 예비 정부를 이끌었고, 8월 5일 레닌에게 나레프 강 너머 주민의 적대적 분위기를 보고했다.
코민테른의 폴란드통 · 폴란드 봉기 전망에 회의적카를 라데크1885–1939코민테른의 폴란드 전문가로 진격 전부터 폴란드 민족주의의 힘을 경고하며 노동자 봉기 전망에 회의적이었다.
폴레브콤 위원, 교육 담당펠릭스 콘1864–1941비아위스토크의 폴레브콤에서 교육·선전을 맡았다. 폴란드 소비에트 정부 수립은 3주 만에 좌절되었다.
서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겸 폴레브콤 위원이오시프 운쉴리흐트1879–1938레닌이 1920년 7월 15일 폴란드 내 전술에 관해 의견을 구한 상대. 폴레브콤에서 당 건설을 맡았고,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군 혁명군사평의회와 제16군에서도 활동했다.
구 제국군 장교의 붉은 군대 복무를 호소한 특별회의 의장알렉세이 브루실로프1853–19261920년 5월 총사령관 직속 특별회의 의장으로 구 제국군 장교들에게 「폴란드 지주의 침공」에 맞서 붉은 군대에 복무하라고 호소했고 수천 명이 응했다.
제3군·제11군 군사평의회 위원콘스탄틴 메호노신1889–1938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중 제3군·제11군 군사평의회 위원이었다.
폴란드행 군수품 선적 저지해리 폴릿1890–19601920년 5월 런던 항구에서 폴란드행 군수품 선적을 막았다.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위원이반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1870–19281920년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해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소비에트 러시아 기병 장교파벨 쿠로치킨1900–1989내전과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 참전했다.
폴란드와 페틀류라12명
지도부2
집행 · 지휘3
8월 14일 바르샤바 북쪽 브크라 강에서 소비에트 제4군과 제15군에 반격해 피우수트스키의 타격 집단이 남쪽에서 올라올 시간을 벌었다. 이 전투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1922년 총리가 되었다.
1920년 국방장관, 의용군 동원 책임자카지미에시 손코프스키1885–19691920년 8월 국방장관으로 후방의 동원과 보급을 맡아 10만 명 넘는 의용병을 전선에 보냈다.
폴란드 측 러시아 부대 조직자보리스 사빈코프1879–19251920~1921년 폴란드와 함께 싸울 러시아 부대를 조직했다.
참여7
1920년 9월~10월 리가에서 이오페와 교섭해 10월 12일 정전협정을 이끌었다.
'작은 폴란드' 노선의 주창자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1871–1949리가 협상에서 민스크를 포기하고 소수민족 비율을 제한하는 '작은 폴란드' 노선을 밀어붙였다.
빌뉴스를 점령한 폴란드 장군루치안 젤리고프스키1865–19471920년 10월 7일 수바우키 협정이 빌뉴스를 리투아니아 쪽에 남기자, 피우수트스키와 협의한 「항명」으로 10월 9일 빌뉴스를 점령해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웠다.
에스토니아에서 벨로루시로 옮겨간 반소비에트 지휘관스타니스와프 부와크-바와호비치1883–19401920년 폴란드군 아래에서 싸운 뒤 10월 휴전 뒤에도 벨로루시 인민공화국을 내걸고 모지르로 독자 원정을 벌였으나 11월 패퇴했다. 부대의 반유대인 폭력이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 군사고문막심 베강1867–19651920년 영불 연합사절단에 참여해 폴란드 참모부에 자문했다.
폴란드군 참모장교스테판 로베츠키1895–19441919~1920년 폴란드군 참모장교로 폴란드-소련 전쟁에 참전했다.
폴란드군 자원병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1901–19661920년 폴란드군 자원병으로 폴란드-소련 전쟁에 참전했다.
관련 용어
출처: Norman Davies, White Eagle, Red Star: The Polish-Soviet War 1919-1920, London, 1972.Красноармейцы в польском плену в 1919-1922 гг. Сборник документов и материалов. М.-СПб., 2004 — российско-польское совместное издание; оценка смертности военнопленных.Приказ войскам Западного фронта № 1423 от 2 июля 1920 г. (М. Н. Тухачевский).В. И. Ленин, выступление на IX Всероссийской конференции РКП(б) 22 сентября 1920 г. (опубл. 1992) — оценка похода на Варшаву; Clara Zetkin, Reminiscences of Lenin, 1929.Wikipedia (en), "Polish-Soviet War," "Battle of Warsaw (1920)," "Peace of Riga," for chronology, orders of battle and figures.자료 6자료 7자료 8Adam Zamoyski, Warsaw 1920: Lenin's Failed Conquest of Europe (HarperPress, 2008)Jerzy Borzęcki, The Soviet-Polish Peace of 1921 and the Creation of Interwar Europe (Yale University Press, 2008)Stephen White, 'Labour's Council of Action 1920', Journal of Contemporary History 9:4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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