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에트-폴란드 전쟁
1920년 여름, 붉은군대는 왜 바르샤바로 진격했고 왜 거기서 무너졌는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무너진 세 제국의 국경 지대에서 부활한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벌인 전쟁이다. 선전포고 없이 1919년 2월 벨로루시에서 시작된 충돌은, 1920년 4월 피우수트스키가 페틀류라와 손잡고 키예프로 진공하면서 전면전이 되었다. 부됸니의 기병과 투하쳅스키의 7월 공세로 전세를 뒤집은 붉은군대는 혁명의 수출을 내걸고 바르샤바까지 진격했으나, 8월 바르샤바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했다. 1921년 3월 리가 조약은 커즌선보다 훨씬 동쪽에 국경을 그어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분할했고, 이 국경은 1939년까지 유지되었다. 바르샤바 앞에서의 패배는 총검에 의한 혁명 수출 시도의 사실상 마지막이 되었고, 소비에트 국가를 일국에서의 건설이라는 길로 돌려세웠다.
국경 없는 국경 지대: 전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이 전쟁에는 선전포고가 없었고, 개전일을 특정하기도 어렵다. 1918년 11월 독일이 항복하자 러시아·독일·오스트리아 세 제국이 갈라 가졌던 동유럽 한복판에 거대한 진공이 생겼다. 부활한 폴란드의 동쪽 국경은 어떤 조약에도 정해져 있지 않았고, 소비에트 러시아는 철수하는 독일군의 뒤를 따라 서쪽으로 병력을 밀어 넣고 있었다. 1919년 2월 벨로루시의 베레자 카르투스카에서 마주 들어오던 두 군대가 처음 충돌했다.
두 나라의 목표는 처음부터 양립할 수 없었다. 국가원수 피우수트스키는 러시아와 폴란드 사이에 폴란드가 주도하는 연방(리투아니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을 세워 러시아를 18세기 이전의 경계로 밀어내려 했다. 소비에트 지도부에게 폴란드는 그 자체가 목표라기보다 독일 혁명과 이어지는 다리였다. 1919년 폴란드군은 빌노(4월)와 민스크(8월)를 차례로 점령했으나, 가을이 되자 피우수트스키는 진격을 멈추고 비밀 접촉으로 전선을 사실상 동결했다. 데니킨의 백군이 모스크바로 다가서던 바로 그 시점이었다. 「하나의 불가분한 러시아」를 내건 백군의 승리는 폴란드 독립에 소비에트 정권보다 더 나쁘다는 계산이었고, 이 계산이 백군 최전성기의 소비에트 정권에 숨 쉴 틈을 주었다.
1920년 봄: 키예프로 간 폴란드
1920년 초 양쪽 모두 결전을 준비하며 평화 교섭을 주고받았다. 4월 21일 피우수트스키는 파리에 밀려나 있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수반 페틀류라와 바르샤바 협정을 맺었다. 폴란드가 페틀류라 정부를 승인하는 대가로 페틀류라는 동갈리치아와 볼히니아 서부를 폴란드 영토로 인정했다. 4월 25일 폴란드-우크라이나 연합군이 공세를 열었고, 붉은군대가 결전을 피해 물러난 키예프에 5월 7일 입성했다.
군사적 성공은 정치적으로 비어 있었다. 페틀류라의 이름으로도 우크라이나 농민의 대중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고, 갈리치아를 폴란드에 내준 협정은 우크라이나 민족운동 안에서 페틀류라의 입지를 갉아먹었다. 반대로 소비에트 쪽에서는 「폴란드 지주의 침공」이 내전에 지친 사회를 다시 묶는 애국적 동원의 계기가 되었다. 브루실로프를 비롯한 제정 시대 장교 수천 명이 이 전쟁에서 붉은군대에 복무를 자원했다.
비스와로: 총검에 실린 혁명
반격은 두 갈래로 왔다. 남쪽에서는 6월 5일 부됸니의 제1기병군이 전선을 찢어 폴란드군을 키예프에서 몰아냈고, 북쪽에서는 7월 4일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군이 총공세에 나섰다. 7월 한 달 동안 민스크, 빌노, 그로드노, 비아위스토크가 차례로 떨어졌다. 7월 11일 영국이 민족 분포선(커즌선)에서의 정전을 제안했으나, 승리를 확신한 소비에트 정부는 중재를 거절했다.
이 지점에서 전쟁의 성격이 바뀌었다. 방어전이 「혁명의 수출」 시험이 된 것이다. 마침 모스크바에서 열리고 있던 코민테른 제2차 대회의 대의원들은 회의장에 걸린 지도로 전선의 이동을 지켜보았다. 7월 30일 점령된 비아위스토크에서 마르흘렙스키, 제르진스키, 콘 등의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폴레브콤)가 소비에트 폴란드의 예비 정부로 선포되었다. 그러나 기대는 빗나갔다. 폴란드 노동자와 농민은 붉은군대를 해방자가 아니라 러시아군으로 맞았다. 레닌은 뒷날 클라라 체트킨에게 폴란드의 농민과 노동자들이 "우리가 기대한 동맹자가 아니라 적으로" 붉은군대를 대했다고 인정했고, 1920년 9월 당협의회 비공개 연설에서는 폴란드 진격을 "총검으로 해 본 정찰"이라 부르며 패배를 시인했다. 이 연설은 1992년에야 공개되었다.
바르샤바: 전환점
8월 중순 투하쳅스키의 네 개 군이 바르샤바 외곽에 이르렀다. 그러나 폴란드군은 무선 감청과 암호 해독으로 소련군의 명령을 읽고 있었고, 병참선은 한계까지 늘어나 있었으며, 남서전선군과의 협조는 무너져 있었다. 리보프 방면에 묶인 부됸니의 기병군을 바르샤바 방면으로 돌리라는 총사령부의 지시는 남서전선군 혁명군사회의에서 지연되었다. 정치위원 스탈린이 명령 부서를 거부한 이 일화는 뒷날 패배 책임 논쟁의 핵심이 되었고, 투하쳅스키와 스탈린·부됸니 진영의 반목으로 남아 1937년까지 이어진다.
8월 16일 피우수트스키가 비에프시 강에서 노출된 소련군 좌익을 쳤다. 서부전선군은 붕괴했고, 제4군은 국경을 넘어 동프로이센에 억류되었으며, 수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9월 네만 전투의 패배로 남은 선택은 강화뿐이었다. 10월 12일 리가에서 예비 강화가 서명되었다.
리가의 선, 그리고 긴 그림자
1921년 3월 18일의 리가 조약은 커즌선보다 약 200킬로미터 동쪽에 국경을 그었다.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가 분할되었고, 서부 지역의 벨로루시인·우크라이나인 수백만이 폴란드 국민이 되었으며, 소비에트 쪽에는 폴란드인 소수민족이 남았다. 폴란드는 페틀류라 지원을 끊었고, 그의 군대는 억류되었다. 페틀류라는 1926년 파리에서 암살된다.
포로 문제는 전쟁이 남긴 가장 어두운 유산의 하나다. 폴란드 수용소의 붉은군대 포로 11만여 명 가운데 1만 6,000~2만 명이 티푸스와 기아로 죽었다. 2004년 러시아와 폴란드의 문서보관소가 함께 펴낸 문서집이 확인한 추계로, 조직적 처형이 아니라 수용 조건이 부른 대량 사망이었다. 소비에트 수용소의 폴란드 포로도 수천 명이 같은 방식으로 죽었다. 이 포로들의 죽음은 훗날 카틴 학살을 둘러싼 기억 논쟁에서 「반카틴」 논거로 동원되며 다시 정치가 되었다.
소비에트 국가에게 이 전쟁의 결론은 명확했다. 유럽 혁명은 총검으로 앞당길 수 없었다. 바르샤바의 패배 다섯 달 뒤 신경제정책이 선포되었고, 소비에트 외교는 서방과의 통상 협정과 1922년 라팔로 조약으로 방향을 틀었다. 한편 이 전쟁은 소련 내 폴란드인에 대한 오랜 의심의 원점이 되었다. 1937년 폴란드 작전의 근거 문서들은 1920년의 패배를 폴란드 첩보망의 공작으로 소급해 설명했고, 1939년 9월 17일 소련군이 리가 국경을 넘을 때 그 진격은 이 전쟁에서 잃은 것의 회수로 정당화되었다.
혁명 정부와 분열된 사령부: 바르샤바로 가는 길의 두 균열
비아위스토크에 도착한 폴레브콤은 취임 선언에서 "지주-부르주아 정부를 권력에서 배제한다"고 천명하고 공장·삼림·대지주의 토지를 인민 소유로 선포했다. 위원장 율리안 마르흘렙스키, 사실상의 지도부 펠릭스 제르진스키, 그리고 펠릭스 콘과 이오시프 운쉴리흐트 등으로 구성된 이 예비 정부는 붉은군대의 진격에 맞춰 장갑열차를 타고 스몰렌스크에서 민스크, 빌노를 거쳐 비아위스토크까지 이동해 왔다. 취임 이틀 전인 7월 28일 투하쳅스키의 군대가 비아위스토크를 점령했고, 폴레브콤은 브라니츠키 궁전에 본부를 두었다.
그러나 기대했던 폴란드 노동자의 봉기는 오지 않았다. 제르진스키는 8월 5일 레닌에게 타전한 전문에서 "나레프 강 너머의 분위기는 적대적이다. 가축과 말을 몰아내고 수레 바퀴를 떼어간다"고 보고했다. 폴레브콤이 편성하려 한 폴란드 적군은 겨우 176명의 적색 소총 연대 하나와 파견된 러시아 적군 병력을 합쳐 총 1,000명 남짓에 그쳤다. 비아위스토크의 유대인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상대적으로 호의적인 반응이 있었으나, 가톨릭 폴란드인 다수는 침략군의 꼭두각시로 간주했다. 폴레브콤은 8월 4일 "사회주의 혁명에 위험한 모든 자, 폴란드 대부르주아지와 지주의 대표자들, 백색 폴란드에 동조하는 모든 자를 체포하여 강제수용소로 보내라"는 지시를 내렸으나, 실질적인 행정력은 점령지 일부에만 미쳤다.
바로 이 시기, 붉은군대의 진격을 뒤에서 무너뜨릴 또 다른 균열이 사령부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군은 7월 한 달 동안 600킬로미터 이상을 진격하며 바르샤바 동쪽과 북쪽까지 도달했지만, 그 남쪽 측면은 프리페트 습지와 8,000명 규모의 모지리 집단에만 의존한 채 위험할 정도로 노출되어 있었다. 서부전선군과 예고로프의 남서전선군 사이의 이 접점은 전선 전체에서 가장 취약한 지점이었다.
총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는 투하쳅스키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8월 2일 남서전선군 소속 제12군과 부됸니의 제1기병군을 서부전선으로 전속시키라는 첫 지시를 내렸고, 8월 5일에는 이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남서전선군 혁명군사평의회의 정치위원 이오시프 스탈린은 명령의 부서를 거부했다. 스탈린에게 르부프(리보프)는 단순한 군사 목표가 아니었다. 남서전선군이 르부프를 함락하면 자신이 정치위원으로 있는 전선이 전쟁의 결정적 승리를 거둔 셈이 되며, 동시에 브란겔의 백군이 크림에서 위협하는 상황에서 남부 전선을 방기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8월 12일 레닌에게 보낸 편지에서 "총사령관과 그 일당이 브란겔에 대한 승리를 조직하는 일을 태업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제1기병군은 8월 내내 르부프 공방전에 묶여 있었고, 결국 제1기병군 단 한 개 사단도 바르샤바 전투에 참가하지 못했다. 카를 라데크는 폴란드 민족주의의 폭발적 저항을 경고했고, 레프 트로츠키 역시 바르샤바 진격에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유럽 혁명의 교두보라는 확신 아래 진격을 계속 명령했다. 8월 13일 투하쳅스키의 군대가 바르샤바 동쪽 라지민을 공격하며 전투의 막이 올랐지만, 사령부의 분열과 폴란드 민중의 적대라는 두 균열은 이미 승패를 가르는 조건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네만에서 리가까지: 패배한 쪽이 더 나은 평화를 얻다
바르샤바에서 퇴각한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군은 9월 중순 네만 강, 시차라 강, 스비슬라치 강 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총사령관 세르게이 카메네프는 반격을 명령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서부전선군은 정원 대비 20~40% 수준으로 줄었고, 8월에 6만 8천 명, 9월에 2만 명의 증원이 도착했으나 숙련된 지휘관과 포병은 바르샤바 앞에서 거의 소진된 뒤였다. 그래도 투하쳅스키는 제3군, 제15군, 제16군을 재편하여 브레스트 요새와 비아위스토크 탈환을 노리는 남하 공세를 계획했다.
피우수트스키는 소련군이 방어를 굳히기 전에 네만 선을 돌파하기로 했다. 작전의 핵심은 우회였다. 폴란드 제2군과 제4군이 그로드노와 바우카비스크에서 정면으로 묶는 사이, 오신스키 장군의 수바우키 집단이 리투아니아가 장악한 세이니와 드루스키닝카이 사이의 좁은 회랑을 통해 북쪽으로 돌아 들어가 소련 제3군의 배후를 찌르는 것이었다. 9월 20일 폴란드 제21산악사단이 그로드노를 공격하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사흘간의 교착 끝에 9월 23일 폴란드군이 드루스키닝카이를 점령하고 그로드노와 빌노를 잇는 철도를 차단했다. 소련 제3군의 보급선이 끊겼고, 폴란드 기병대는 리다까지 진출했다. 9월 26일 크라요프스키 장군의 기병이 핀스크를 점령하며 소련 제4군의 보급선마저 위협받자, 투하쳅스키는 총퇴각을 명령할 수밖에 없었다. 시차라 강 전투(10월 중순) 이후 전선은 타르노폴, 두브노, 민스크, 드리사 선까지 밀렸다.
그러나 폴란드군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100만 명을 동원했지만 전선 병력은 35만여 명, 부대 충실도는 정원의 50~60%에 머물렀다. 그리고 피우수트스키에게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전쟁의 정치적 목표였던 우크라이나 독립국 건설은 이미 물 건너갔고, 바르샤바 앞에서 얻은 것은 승리였지 페틀류라의 귀환은 아니었다.
그래서 협상장은 예상과 다른 그림을 그렸다. 평화 회담은 8월 17일 민스크에서 시작되었지만, 바르샤바 전투가 한창인 날이었다. 회담은 곧 리가로 옮겨져 9월 21일 재개되었다. 소비에트 대표단은 아돌프 이오페가 이끌었다. 이오페는 모스크바에서 가져온 제안을 제시했다: 국경을 커즌선보다 '상당히 동쪽'에 긋되 동갈리치아는 폴란드 측에 두고, 민족자결 문제는 일단 제쳐두겠다는 선언이었다. 제안은 10월 5일까지 유효했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이렇게 양보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레닌은 브란겔의 백군이 크림에서 아직 건재하고, 탐보프 반란을 비롯한 농민 봉기가 번지고 있던 상황에서 폴란드 전선을 더 끌고 갈 여유가 없었다. 레닌은 10월 15일 모스크바현 집행위원장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4월에 제안했을 때보다 더 나은 조건으로 평화예비조약에 조인했다. 당시 국경은 50베르스타 동쪽이었으나 지금은 50베르스타 서쪽이다.'
그러나 더 극적인 반전은 폴란드 측에서 일어났다. 전쟁에 이겼으면서도 더 많은 영토를 요구하지 않은 것이다. 리가의 폴란드 대표단을 이끈 얀 돔프스키는 피우수트스키의 측근이 아니었다. 대표단 실세는 국가민주당(엔데치아)이었고, 그 이념적 지도자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폴란드가 민스크를 포함한 넓은 동부 영토를 병합하면 비(非)폴란드계 소수민족이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넘어서고, 이는 폴란드 민족국가의 안정성을 해칠 뿐 아니라 선거에서 피우수트스키 진영에 유리한 유권자를 끌어들이게 된다는 것이었다. 돔프스키는 이오페와의 일대일 비밀교섭에서 민스크를 포기하는 대신 바라노비체, 우니니에츠, 사르니, 루브네를 잇는 전략철도와 라트비아와의 접경을 확보하는 선에서 타협했다. 협정은 10월 5일 합의에 이르렀고, 10월 12일 예비강화 및 정전협정이 서명되어 10월 18일 밤 자정 발효했다. 페틀류라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동맹국인 폴란드에 의해 공식 승인을 박탈당했고, 홀로 소비에트 군대와 마주하게 되었다. 피우수트스키는 이 조약을 '비겁한 행위'라고 불렀고, 이듬해 5월 칼리시의 우크라이나군 수용소를 찾아 페틀류라의 병사들에게 사과했다. 전쟁에 이겼지만, 이긴 쪽이 스스로 평화의 폭을 줄인 역설이었다.
리가에서 팔아넘긴 것은 땅만이 아니었다
1921년 3월 18일의 리가 조약은 전장에서 진 쪽이 모든 것을 잃는 평화가 아니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대표 아돌프 이오페는 국경과 재산 문제에서 큰 양보를 하면서라도 전쟁을 끝내려 했다. 1920년 말 탐보프의 농민 봉기와 크론시타트의 반란이 소비에트 정권에 내부의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고, 폴란드군도 더 깊이 진격할 만큼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측은 폴란드가 점령한 영토를 되찾는 대신, 폴란드가 국제적으로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와 소비에트 벨로루시를 상대국으로 인정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폴란드와 동맹했던 시몬 페틀류라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협상장에 앉지도 못한 채 조약에서 폐기되었다.
폴란드 대표단 내부의 계산은 피우수트스키의 계산과 달랐다. 피우수트스키가 독립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를 완충국으로 삼는 연방 구상을 놓지 않았다면, 민족민주파의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는 동쪽의 비폴란드계 주민을 새 국가 안으로 많이 들이는 것이 위험하다고 보았다. 폴란드 의회 특별위원회는 소비에트 측이 제시한 더 동쪽의 선, 민스크를 포함할 수 있었던 약 100킬로미터의 추가 영토를 거부했다. 그 선택은 군사적 승리를 민족적으로 더 균질한 국가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동시에 그것은 민스크와 주변의 폴란드인들을 소비에트 쪽에 남겨 두고, 벨로루시인과 우크라이나인 약 500만 명을 폴란드 국경 안에 편입하는 결과를 낳았다. 폴란드 수석대표 얀 돔프스키에게는 의회 다수와 전쟁에 지친 사회가 요구한 현실적 타협이었지만, 피우수트스키에게는 동맹국을 버린 근시안적 후퇴였다.
조약은 제6조에서 새 국경 양쪽 주민에게 국적 선택과 귀환의 길을 열고, 제7조에서 언어·종교·문화의 자유를 상호 보장했다. 제14조는 러시아 제국 시기 폴란드에서 반출된 철도 차량을 포함한 물자와 3천만 금 루블의 지급을 약속했다. 그러나 조약문이 보장한 권리와 실제 통치는 달랐다. 국경은 커즌선보다 약 200킬로미터 동쪽에 그어졌고,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는 두 국가로 갈라졌다. 폴란드의 우크라이나 동맹군은 무장 해제와 수용소행을 감수해야 했으며, 페틀류라는 폴란드가 자신들의 피를 평화의 대가로 지불했다고 항의했다. 리가는 전쟁을 멈추고 18년간의 국경을 만들었지만, 자결을 약속받은 사람들에게는 어느 국가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질서를 남겼다. 이후의 민족 갈등을 조약 하나의 악의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협상에서 배제된 우크라이나와 분할된 벨로루시가 그 질서의 비용을 치렀다는 점은 분명하다.
전쟁이 끝낸 것과 끝내지 못한 것
전쟁이 확정한 것은 혁명의 운명이 아니라 국경과 당사자의 선택이었다. 1921년 3월 18일 리가 조약은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을 끝내고, 폴란드에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의 넓은 서부 지역을 넘겼다. 그 선은 1939년까지 실제 국경으로 기능했다. 동시에 폴란드는 시몬 페틀류라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더 이상 지원하지 않았고, 소비에트 측은 서방의 군사적 포위 속에서 당장 감당할 수 있는 평화를 택했다. 이는 어느 한쪽의 완전한 승리라기보다, 전쟁을 계속할 비용이 혁명적 기대와 국가적 영토 목표를 넘어선다는 판단의 결과였다.
그러나 리가는 민족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다. 조약은 벨로루시인과 우크라이나인을 두 국가로 갈랐고, 인구 이동·재산 반환·문화재와 재정 정산은 서명 뒤에도 혼합위원회와 외교 교섭의 장기 과제로 남았다. 폴란드가 얻은 영토 안에는 폴란드인만이 아니라 벨로루시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등 여러 집단이 살았다. 따라서 폴란드의 전간기 국가 건설은 독립과 안전을 얻은 과정인 동시에, 동부 주민에게는 소수자 통치와 국경 밖 민족의 상실을 뜻했다. 소비에트 국가는 영토를 되찾지 못했지만, 군사적 혁명 수출의 실패를 국가 보존과 통상 재개의 조건으로 전환했다.
역사가들이 아직 다투는 지점도 바로 이 이중성이다. 폴란드 중심 서술은 리가를 베르사유 체제를 동유럽에 완성한 현실주의적 평화로 본다. 러시아·소비에트 서술은 한때 이를 제국주의적 강요와 폴란드의 팽창으로 규정했으며,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연구는 두 민족의 분할과 정치적 주체성 상실을 앞세운다. 최근 연구는 냉전기의 검열과 국가 서사를 넘어 협상 기록, 인구 이동 자료, 혼합위원회 문서를 함께 읽는다. 그래서 조약의 국경이 1939년까지 유지되었다는 사실에는 합의가 있지만, 그것이 안정의 성취였는지 다음 충돌을 미룬 강제된 타협이었는지는 합의되지 않았다. 바르샤바의 패배가 유럽 혁명에 결정적 제동을 걸었다는 해석도 강력하지만, 신경제정책과 서방과의 관계 전환을 전쟁 하나의 결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전쟁은 무엇을 선명하게 끝냈지만, 누가 그 국경 안에서 살 권리를 갖는가라는 질문은 남겼다.
결과
리가 조약의 국경은 1939년 9월 17일 소련군이 다시 그 선을 넘을 때까지 18년을 유지되었다. 폴란드 수용소에 갇힌 붉은군대 포로 11만여 명 가운데 1만 6,000~2만 명이 질병과 기아로 죽었고(2004년 러시아-폴란드 공동 문서집의 추계), 소비에트 수용소의 폴란드 포로도 수천 명이 죽었다. 바르샤바의 패배는 유럽 혁명을 군사적으로 앞당긴다는 구상을 사실상 끝냈고, 이듬해의 신경제정책과 서방과의 통상 재개, 1922년 라팔로 조약으로 이어지는 공존 노선의 배경이 되었다. 전쟁의 기억은 길게 남았다. 패배의 책임을 둘러싼 투하쳅스키와 스탈린·부됸니 진영의 반목은 1937년 군 숙청에서 다시 나타났고, 소련 내 폴란드인을 겨눈 1937년 폴란드 작전의 간첩 강박과 1939년 폴란드 분할의 논리에도 이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연표
- 1918.11.11폴란드, 123년 만의 독립 회복
독일의 항복과 함께 피우수트스키가 바르샤바에서 군권을 넘겨받았다. 부활한 폴란드의 동쪽 국경은 어떤 조약에도 정해져 있지 않았다.
- 1919.02.14베레자 카르투스카: 첫 교전
독일군이 빠져나간 벨로루시의 진공으로 폴란드군과 붉은군대가 마주 들어오다 처음 충돌했다. 선전포고는 끝내 없었다.
- 1919.04.19폴란드군, 빌노 점령
피우수트스키가 리트벨 소비에트 공화국의 수도가 된 빌노를 기습으로 빼앗았다. 여름까지 민스크도 폴란드군에 넘어갔다. 가을에 피우수트스키는 진격을 멈췄다. 데니킨의 백군이 모스크바로 다가서던 시점에 소비에트 정권을 무너뜨리는 일을 돕지 않기 위해서였다.
- 1920.04.21바르샤바 협정: 피우수트스키와 페틀류라
폴란드가 페틀류라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페틀류라는 동갈리치아와 볼히니아 서부에 대한 폴란드의 영유를 인정했다. 나흘 뒤 폴란드-우크라이나 연합군이 키예프를 향해 공세를 열었다.
- 1920.05.07폴란드군, 키예프 입성
붉은군대가 결전을 피해 물러나 키예프는 거의 싸움 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기대했던 우크라이나의 대중 봉기와 페틀류라군의 확충은 일어나지 않았다.
- 1920.06.05부됸니의 제1기병군, 전선 돌파
남서전선군의 제1기병군이 지토미르 방면에서 폴란드 전선을 찢었다. 폴란드군은 6월 10일 키예프를 버리고 총퇴각에 들어갔다.
- 1920.07.04투하쳅스키의 7월 공세
27세의 서부전선군 사령관 투하쳅스키가 7월 2일 명령 제1423호를 내렸다: "백색 폴란드의 시체를 넘어 세계적 대화재로 가는 길이 놓여 있다. 총검 위에 우리는 근로 인류에게 행복과 평화를 실어 나를 것이다. 빌노로, 민스크로, 바르샤바로, 진군!" 민스크(7월 11일), 빌노(14일), 그로드노(19일), 비아위스토크(28일)가 차례로 떨어졌다.
- 1920.07.11커즌 각서
영국 외무장관 커즌이 민족 분포에 따른 잠정 경계선(훗날의 커즌선)에서의 정전을 제안했다. 승리를 확신한 소비에트 정부는 중재를 거절하고 폴란드와의 직접 교섭을 요구하며 진격을 계속했다.
- 1920.07.30비아위스토크의 폴레브콤
점령된 비아위스토크에서 마르흘렙스키를 수반으로, 제르진스키와 콘을 위원으로 하는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폴레브콤)가 수립을 선포했다. 소비에트 폴란드의 예비 정부였으나, 기대한 폴란드 노동자·농민의 호응은 오지 않았다.
- 1920.08.13바르샤바 전투
8월 13~25일. 폴란드군은 무선 감청과 암호 해독으로 붉은군대의 배치를 읽고 있었다. 8월 16일 피우수트스키가 비에프시 강에서 노출된 소련군 좌익을 쳤고, 서부전선군은 붕괴했다. 제4군과 기병군단은 동프로이센으로 밀려나 억류되었고, 수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폴란드에서는 「비스와의 기적」으로 불린다.
- 1920.09.20네만 전투
재편성한 투하쳅스키의 방어선을 폴란드군이 다시 무너뜨렸다. 이 패배로 소비에트 측에 남은 선택은 강화뿐이었다.
- 1920.10.18정전 발효
10월 12일 리가에서 서명된 예비 강화와 정전 협정이 발효했다. 페틀류라의 우크라이나군과 크림의 브란겔 백군은 각자 소련과 홀로 마주하게 되었다.
- 1921.03.18리가 조약
국경은 커즌선보다 약 200킬로미터 동쪽에 그어져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가 분할되었다. 이 국경은 1939년 9월 17일까지 유지된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배상금 지불을 약속했고, 폴란드는 페틀류라 지원을 끊었다.
관련 인물 16명
주도 · 집행4
지도부4
비아위스토크에서 수립된 소비에트 폴란드의 예비 정부 수반. 폴란드 노동자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3주 만에 철수했다.
붉은군대 총사령관 · 남서전선군 전용 명령세르게이 카메네프1881–19368월 초 투하쳅스키의 요청으로 제1기병군과 제12군을 서부전선으로 전속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스탈린과 부됸니가 이를 거부하면서 바르샤바 전투의 결정적 균열이 생겼다.
참여5
비아위스토크의 폴레브콤에서 교육·선전을 맡았다. 폴란드 소비에트 정부 수립은 3주 만에 좌절되었다.
서부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겸 폴레브콤 위원이오시프 운쉴리흐트1879–1938레닌이 1920년 7월 15일 폴란드 내 전술에 관해 의견을 구한 상대. 폴레브콤에서 당 건설을 맡았고, 투하쳅스키의 서부전선군 혁명군사평의회와 제16군에서도 활동했다.
관련 용어
출처: Norman Davies, White Eagle, Red Star: The Polish-Soviet War 1919-1920, London, 1972.Красноармейцы в польском плену в 1919-1922 гг. Сборник документов и материалов. М.-СПб., 2004 — российско-польское совместное издание; оценка смертности военнопленных.Приказ войскам Западного фронта № 1423 от 2 июля 1920 г. (М. Н. Тухачевский).В. И. Ленин, выступление на IX Всероссийской конференции РКП(б) 22 сентября 1920 г. (опубл. 1992) — оценка похода на Варшаву; Clara Zetkin, Reminiscences of Lenin, 1929.Wikipedia (en), "Polish-Soviet War," "Battle of Warsaw (1920)," "Peace of Riga," for chronology, orders of battle and fig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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