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1955

티토-스탈린 결별

사회주의 진영에서 처음 갈라져 나간 나라는 왜 쫓겨났고, 어떻게 살아남았나?

티토-스탈린 결별은 1948년 6월 코민포름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제명하면서 사회주의 진영에 처음으로 공개 균열이 생긴 사건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군이 아니라 자국 파르티잔의 힘으로 해방과 혁명을 이뤘고, 그만큼 모스크바의 지시에 덜 매여 있었다. 발칸 연방 구상과 그리스 내전 지원을 둘러싼 마찰, 유고슬라비아 내 소련 고문단과 정보망에 대한 반발이 쌓이자, 스탈린은 서한 논쟁과 코민포름 결의로 티토 지도부의 굴복을 요구했다. 결의는 유고슬라비아 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이탈해 민족주의의 길로 갔다고 선고했지만, 예상과 달리 유고슬라비아 당은 지도부를 중심으로 뭉쳐 버텼다. 소련과 동유럽의 경제 봉쇄, 국경 도발, 침공 준비설 속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서방의 원조를 받아들였고,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독자 모델을 만들기 시작했다.

탱크 없이 들어선 정권

1945년 봄 유럽 전역에서 전쟁이 끝났을 때, 유고슬라비아는 동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조건에 서 있었다. 폴란드·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당은 붉은 군대의 진주와 함께 권력을 틀어쥐었거나, 적어도 붉은 군대의 존재 없이는 권력 장악이 불가능했다. 유고슬라비아는 달랐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1941년부터 4년 동안 독일·이탈리아 점령군 및 그 협력 세력과 싸워 자력으로 나라를 해방했고, 붉은 군대가 유고슬라비아에 발을 들인 것은 1944년 10월 베오그라드 공세 때가 처음이었다. 이때도 표도르 톨부힌 원수의 제3우크라이나 전선군은 티토의 임시정부에 정식 허가를 요청해야 했고, 해방된 영토에서는 유고슬라비아 민간 당국의 통치권을 인정해야 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 파르티잔은 80만 명 규모의 정규군으로 성장해 있었고, 유고슬라비아 공산당(KPJ)은 전쟁 전 8천 명이던 당원을 1945년까지 15만 명 이상으로 늘렸다. 이 모든 것은 소련이 아니라 자체 동원으로 이룬 성과였다.

이 차이는 사소하지 않았다. 1945년에서 1947년 사이, 여타 동유럽 공산당들이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인민민주주의' 연립정부 단계를 거치며 느리게 권력을 독점해 가는 동안,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이미 1945년 말에 확고한 일당 지배를 구축했다. 선거는 치렀지만 군주제 세력은 보이콧했고, 인민전선이 90% 이상의 득표로 승리했다. 이는 티토가 '민족의 해방자'로서 누린 대중적 지지에서 나온 결과였다. 스탈린에게 이것은 양날의 칼이었다. 유고슬라비아를 동유럽에서 가장 확실한 공산주의 거점으로 칭송하면서도(1947년 9월 코민포름이 창설됐을 때 유고슬라비아를 다른 나라들이 본받아야 할 모델로 내세우기까지 했다) 그 지도부가 모스크바의 통제 밖에서 형성된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점점 더 우려했다. 1946년부터 베오그라드 주재 소련 대사관의 내부 보고들은 유고슬라비아 지도자들을 점점 더 불리한 어조로 그리기 시작했다.

또 하나의 마찰선은 경제 문제였다. 유고슬라비아는 스탈린식 급속 공업화를 가장 충실히 모방해 1947년에 야심 찬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동시에 소련은 유고슬라비아에 합작주식회사를 세웠는데(항공 수송을 위한 JUSTA와 다뉴브 해운을 위한 JUSPAD가 1947년에 설립되었다) 이 회사들은 소련 측 출자분을 부풀려진 전후 가격으로, 유고슬라비아 측 출자분을 전쟁 전 가격으로 평가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티토가 항의하자 스탈린은 이런 구조가 원래 '패전국'을 위해 설계된 것이라고 인정했다. 소련은 또한 유고슬라비아에 합작은행을 제안하면서 소련인 은행장을 두려 했고, 무역협정에서는 유고슬라비아 원자재를 낮은 가격에 사들이는 조건을 강요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지도부에게 이것은 동맹국이 아니라 식민지 취급이었다.

그러나 가장 깊은 균열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라고 있었다. 소련은 유고슬라비아 국가기구와 군대에 민간 및 군사 고문단을 파견했고, 이들은 기술 지도뿐 아니라 유고슬라비아 당국자들을 포섭해 소련에 직접 보고하는 정보망을 구축하려 했다. 유고슬라비아 보안기관(OZNA, 후에 UDBA)은 이를 간파하고 저항했다. 1948년 8월 31일자 미국 국무부 전문이 정확히 지적했듯, 이 갈등의 핵심은 '소련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직접 통제하려 한 시도'였으며, 공개 파열은 '유고슬라비아인들이 소련의 첩보 및 파괴공작에 저항했기 때문에' 일어났다. 소련 고문단과 정보망은 유고슬라비아 보안기관을 뚫지 못했고, 소련이 유고슬라비아 지도부 내에 심어 둔 요원들(당 중앙위원 스레텐 주요비치와 전 산업장관 안드리야 헤브랑)이 발각되고 체포되면서 갈등은 되돌릴 수 없는 지점에 이르렀다. 외교적·이념적 언어로 포장된 서한 논쟁과 코민포름 결의는, 그 밑에서 이미 진행 중이던 주권 대 예속의 싸움 위에 덧씌워진 서사였다. 티토는 한 번도 소련의 통제를 받아본 적 없는 정권을 이끌고 있었고, 스탈린은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었다.

탱크 없이 들어선 정권, 모스크바 없이 움직인 외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KPJ)이 1945년 말 동유럽에서 가장 확고하게 권력을 장악한 공산당이 된 데는 한 가지 구조적 이유가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군이 밀고 들어와 세운 정권이 아니었다. 티토의 파르티잔은 1941년부터 4년간 독자적으로 싸워 80만 명의 군대를 키웠고, 종전 무렵에는 전 국토의 상당 부분을 스스로 장악했다. 1944년 10월 베오그라드 공세에서 붉은 군대가 합류했을 때도, 톨부힌 원수의 제3우크라이나 전선군은 티토의 임시정부에 정식으로 영토 진입 허가를 요청해야 했고 해방된 지역의 민간 행정권을 유고슬라비아 측에 넘겨야 했다. 이는 동유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 차이는 곧바로 외교 노선으로 번졌다. 1945년 5월, 유고슬라비아군은 이탈리아계 도시 트리에스테를 점령했고, 서방 연합군과의 대치가 한 달 넘게 이어졌다. 티토는 5월 27일 류블랴나 연설에서 "우리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을 것이며, 누군가의 흥정에서 거스름돈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연설은 서방만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스탈린은 즉각 주벨그라드 소련 대사를 불러 "티토 동무에게 전하라. 다시 이런 공격을 하면 우리는 공개 비판으로 응답하고 그를 부인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트리에스테에서 소련이 유고슬라비아를 전폭 지지하지 않은 것은, 스탈린이 서방과의 불필요한 충돌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다. 유고슬라비아 지도부에게 그것은 '형제국'이 자기 이익을 위해 유고슬라비아의 요구를 희생시킨 첫 경험이었다.

그럼에도 1945~1947년 유고슬라비아는 소비에트화의 모범생이었다. 1946년 1월 제정된 연방인민공화국 헌법은 1936년 소비에트 헌법을 거의 그대로 옮긴 것이었다. 산업 국유화는 동유럽에서 가장 급진적이어서 80% 이상이 국가 부문으로 넘어갔고, 1947년 4월에는 동유럽 최초의 5개년 계획이 발표되었다. 카르델은 1945년 12월 당 기관지 《보르바》에 "스탈린에 대해 쓴다는 것은 인류 발전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시기를 쓰는 것"이라고 썼다. 1947년 9월 코민포름 창립 회의에서 유고슬라비아 대표단은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의 '의회 환상'을 가장 날카롭게 비판했고, 코민포름 본부는 베오그라드에 두기로 결정되었다. 겉으로 보기에 유고슬라비아는 소련의 가장 믿음직한 동맹이었다.

그러나 이 '모범생'은 동시에 가장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유고슬라비아는 그리스 내전에서 공산주의 민주군(DSE)을 적극 지원했는데, 이는 1944년 처칠과의 모스크바 회담에서 그리스를 영국 세력권으로 양보한 스탈린의 '백분율 협정'과 정면 배치되는 행동이었다. 알바니아와의 통합도 유고슬라비아 주도로 추진되었다. 1946년 상호원조조약과 관세협정으로 알바니아는 거의 유고슬라비아 경제권에 편입되었고, 유고슬라비아 고문 수백 명이 알바니아 각 부처에 파견되었다. 스탈린은 1947년 중반부터 알바니아에 자체 고문을 보내기 시작했고, 티토는 이를 알바니아 통합을 가로막으려는 움직임으로 읽었다.

결정적 파열은 발칸 연방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1947년 8월 1일,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는 블레드에서 우호협력조약을 체결하고 관세 동맹, 국경 통행 자유화, 피린 마케도니아의 유고슬라비아 마케도니아 공화국 편입 준비에 합의했다. 모스크바와의 사전 협의는 없었다. 화가 난 몰로토프는 이 협정을 공개 비난했고, 스탈린은 양측에 항의 서한을 보냈다. 이듬해 1948년 1월, 불가리아의 디미트로프가 기자회견에서 동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연방 구상을 말하면서 그리스까지 포함시키자, 《프라우다》는 1월 28일 그런 구상은 없다고 정면 부인했다. 그리스 내전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디미트로프의 발언은 서방에 소련의 팽창 의도로 읽혔고, 스탈린에게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외교적 부담이었다.

2월 1일, 몰로토프는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 지도부를 모스크바로 소환했다. 티토는 직접 가지 않고 카르델과 크로아티아 간부평의회 의장 바카리치를 보냈다. 모스크바에 먼저 와 있던 질라스가 합류했다. 2월 10~11일 크렘린에서 열린 회의에서 스탈린은 분노를 쏟아냈다.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가 사전 협의 없이 외교 정책을 추진한다고 질책하고, "당신들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보고하지 않고, 우리는 거리에서 모든 것을 알아내야 한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기정사실만 들이민다"고 말했다. 이어 스탈린은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즉각 결성하라고 역으로 요구했고, 알바니아도 나중에 편입시키라고 했다. 그리고 양국이 모든 외교 문제에서 소련과 사전 협의할 것을 명시한 의정서를 카르델 앞에 내밀었다. 카르델은 서명하는 수밖에 없었다.

베오그라드로 돌아온 유고슬라비아 지도부는 충격에 빠졌다. 2월 19일 비밀리에 열린 KPJ 정치국 회의에서 불가리아와의 연방은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정치국은 연방이 유고슬라비아를 소련의 직접 통제 아래로 흡수하려는 '트로이 목마'라고 판단했다. 3월 1일 중앙위원회는 이 결정을 재확인하면서, 소련과의 관계는 유지하되 "우리 나라의 이익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는 원칙을 추가했다. 바로 이 회의 내용이 정치국원 스레텐 주요비치를 통해 소련 대사관에 흘러들어갔다. 모스크바는 유고슬라비아가 굴복하지 않을 것임을 그때 확실히 알았다.

세 통의 편지와 한 통의 결의: '의심스러운 마르크스주의자들'에서 이단으로

1948년 3월 18일, 몰로토프는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소련 측에 경제 정보 제공을 금지했다는 이유로 모든 민간 전문가와 군사 고문의 즉각 철수를 통보했다. 티토는 이에 항의하는 서한을 3월 20일 보냈고, 엿새 뒤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공동 명의로 첫 번째 답신이 날아왔다. 이것이 3개월간 이어진 서한 논쟁의 시작이었다.

3월 27일자 첫 서한에서 스탈린은 질라스, 부크마노비치, 키드리치, 란코비치를 '의심스러운 마르크스주의자들'로 지목하며, 이들이 '소련은 경제적으로 유고슬라비아를 예속시키려 한다', '코민포름은 소련 당이 다른 당을 종속시키기 위한 도구'라는 반소 선전을 퍼뜨린다고 비난했다. 트로츠키의 경력을 '꽤 교훈적'이라고 덧붙인 대목은 노골적인 위협이었다. 또 유고슬라비아 당이 합법화되지 않은 반지하 상태에 머물러 있고, 내부 민주주의도, 비판과 자기비판도 없으며, 국가보안부 장관이 당 간부를 관리한다고 꼬집었다. 블라디미르 벨레비트 외무차관을 영국 간첩으로 지목하며 '그가 외무성에 남아 있는 한 소련 정부는 유고슬라비아 외무성을 통해 솔직한 서신을 주고받을 수 없다'고 통보한 점은 외교적 단절 예고나 다름없었다.

유고슬라비아 중앙위원회는 4월 12~13일 전원회의를 열었다. 티토는 스탈린의 비난을 '비방과 허위 정보'라고 일축하며, 유고슬라비아 당이 이룩한 민족적 독립과 평등의 성과를 강조했다. 회의에서 유일하게 티토에 반대한 인물은 스레텐 주요비치였다. 주요비치는 유고슬라비아가 소련의 일부가 되어야 하며 동맹이 깨지면 국제관계에서 설 자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티토는 주요비치와 또 다른 친소 인사인 안드리야 헤브랑을 '일탈' 혐의로 숙청하기로 결정했다. 둘 다 일주일 안에 체포되었다.

5월 4일 두 번째 서한은 더욱 날카로웠다.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의 답신 태도를 '과장된 야심'이라고 규정하고, 소련군이 없었다면 유고슬라비아 당이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파르티잔의 자력 해방이라는 유고슬라비아 정통 서사의 핵심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 서한에서 스탈린은 분쟁을 코민포름에 회부하자고 처음 제안했다. 티토와 카르델은 5월 17일 답신에서 코민포름 중재를 거부하며, 다른 공산당들을 미리 포섭해 표결 결과를 조작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5월 22일 세 번째 서한은 사실상 최후통첩이었다. 코민포름 회의 불참은 '묵시적 유죄 인정'이라고 적었다. 6월 19일, 부쿠레슈티에서 이틀 뒤 열릴 회의의 공식 초청장이 도착했지만, 유고슬라비아 지도부는 대표단을 보내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1948년 6월 28일, 부쿠레슈티에 모인 소련, 불가리아, 루마니아,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프랑스, 이탈리아 8개국 공산당 대표들은 만장일치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상황에 관한 정보국의 결의」를 채택했다. 프라하의 기관지 『루데 프라보』가 같은 날 지면에 실으면서 전 세계에 공개되었다.

결의는 8개 조항으로 구성되었다. 핵심은 유고슬라비아 당 지도부가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이탈해 '민족주의의 길'로 접어들었으며, 당을 인민전선 속에 용해시키고, 쿨라크를 방치하며, 소련과 소련군을 적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부분은 8조였다. '건전한 당원들'이 현 지도부로 하여금 '공개적이고 정직하게 잘못을 인정하도록 강제하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들을 교체하고 새로운 국제주의적 지도부를 세워라.' 이는 스탈린이 바라던 시나리오, 즉 티토 지도부가 내부에서 무너지는 그림을 문자 그대로 적시한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스탈린의 계산은 빗나갔다. 유고슬라비아 당원들은 소련에 등을 돌린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더 나은 공산주의자라는 확신을 갖고 지도부에 결집했다. 7월 21일 열린 제5차 당대회에서 2,344명의 대의원은 티토의 지도력을 재확인했다. 사회주의 진영의 깨지지 않을 것 같던 단일성은 그렇게 처음으로 금이 갔다.

버티기: 봉쇄, 숙청, 그리고 자기 길 찾기

1948년 6월 코민포름 결의가 내려진 뒤, 스탈린의 압박은 말에서 행동으로 옮겨갔다.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들은 유고슬라비아와의 무역을 단계적으로 차단했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 수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소련권 교역은 1949년 말 사실상 붕괴했다. 체코슬로바키아로의 수출은 4,860만 달러에서 860만 달러로, 소련으로부터의 수입은 3,370만 달러에서 470만 달러로 추락했다. 유고슬라비아 경제 계획은 소련산 기계·원자재·석유를 전제로 짜여 있었기에, 봉쇄는 국가 재건 계획 전체의 동력을 빼앗는 타격이었다. 1949년 수출 수입은 전년 대비 36% 감소했고, 1948~1950년 연이은 가뭄까지 겹쳐 식량 배급이 확대되었다.

봉쇄에 더해 국경에서는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7,877건의 국경 충돌이 기록되었고, 27명의 유고슬라비아 보안 요원이 사망했다. 헝가리·루마니아·불가리아·알바니아에는 '유고슬라비아 해방'을 내건 망명 여단이 편성되었다.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소련 훈련 장교들의 집단 탈주를 겪었고, 1948년에는 티토의 전시 최고사령부 참모장이었던 대장 아르소 요바노비치가 소련 지원 쿠데타를 시도하다 국경 수비대에 사살되었다. 침공이 임박했다는 두려움 속에서 1952년 국방비는 국민소득의 21.4%까지 치솟았다.

이러한 외부 압박 속에서 유고슬라비아 지도부는 내부의 적을 상정하고 대규모 숙청에 돌입했다. 알렉산다르 란코비치 내무장관이 이끄는 국가보안국(UDBA)은 당원 중 스탈린을 지지하거나 지지할 의심이 있는 이들, 이른바 코민포르모브치(이베오브치)를 색출했다. 1948~1951년에만 55,663명의 당원이 코민포름 지지자로 등록되었고, 이는 전체 당원의 19.52%에 달했다. 란코비치는 훗날 51,000명이 살해·수감·강제노동에 처해졌다고 밝혔다. 1949년에는 아드리아 해의 불모지 골리오토크와 스베티그르구르 섬에 특별 수용소가 건설되었다. 이 수용소의 특징은 폭력이 간수가 아니라 수감자들끼리 집행되도록 설계된 점이었다. 새로 도착한 수감자는 '슈팔리르'라 불리는 이중 행렬 사이를 지나며 집단 구타를 당했고, 이후 서로를 감시·고발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체계 속으로 던져졌다. 약 13,000명에서 16,000명의 정치범이 이 섬들을 거쳤고, 수감자의 상당수는 나치 점령기에 티토와 함께 싸운 파르티잔 출신이었다.

경제 봉쇄를 돌파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는 서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1948년 12월 티토는 전략 원자재를 서방에 수출하고 무역을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1949년 2월, 미국은 "티토를 띄워 두라(keep Tito afloat)"는 입장을 정리했고, 같은 해 8월 수출입은행이 첫 차관을 승인했다. 1950년 가을 곡물·비료·농기계 재고가 바닥나자 미국은 2,000만 달러의 식량 차관을 제공했고, 12월에는 트루먼 대통령이 「1950년 유고슬라비아 긴급구호법」에 서명해 5,000만 달러 상당의 식량을 추가 지원했다. 서방 원조는 사상적 전향이 아니라 생존의 조건이었다.

그러나 티토 지도부는 생존을 넘어 자기 정당화의 논리를 필요로 했다. "우리는 쫓겨난 쪽이 아니라, 변질된 쪽을 떠난 정통이다"라는 주장이 그 핵심이었다. 1949년 5월, 에드바르트 카르델은 「유고슬라비아 인민민주주의에 관하여」라는 보고서에서 소련이 국가와 당 관료에 의한 일당 독재로 변질되었으며, 진정한 사회주의는 국가 기구의 점진적 소멸을 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과 레닌의 「국가와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논법으로, 유고슬라비아가 오히려 원칙에 충실하고 소련이 배반했다는 역전된 서사를 구축한 것이다.

이 논리의 제도적 구현이 노동자 자주관리였다. 1949년 11월 23일, 보리스 키드리치와 주로 샬라이가 「노동자평의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지침」에 서명해 대규모 국영기업에 노동자평의회 설치를 지시했다. 이어 1950년 6월 27일, 「국영기업 및 상급경제연합의 노동자 집단에 의한 관리에 관한 기본법」이 통과되었다. 티토는 이날 "공장을 노동자들에게 넘긴다"고 선언했고, 기업의 일상적 운영을 노동자들이 선출한 평의회와 관리위원회에 맡겨 국가 계획의 틀 안에서 생산·투자·임금 결정에 참여하게 했다. 그러나 자주관리는 처음부터 이중적이었다. 국가는 여전히 기업 소유권을 쥐고 있었고 평의회의 결정 범위는 계획 당국의 승인에 묶여 있었다. 1950년의 법은 자유시장 사회주의가 아니라, 봉쇄와 고립 속에서 정권의 정통성을 새로 세우고 소비에트 모델 추종의 관성에서 조직을 떼어내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그럼에도 이 제도는 유고슬라비아가 소련 모델과는 다른 사회주의를 제도화했다는 점에서, 진영 내 첫 이단이 단순한 외교적 일탈이 아니라 체제의 갈림길이었음을 보여주었다.

스탈린 없는 세계에서: 화해의 협상과 비동맹이라는 선택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의 죽음은 유고슬라비아가 5년 동안 견뎌온 봉쇄와 침공 위협의 근원을 제거했다. 그러나 사망 당일 베오그라드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 외무부는 각국 공관에 보낸 훈령에서 "스탈린 사후에도 소련의 기본 정책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티토에게 선택지는 셋이었다. 서방과의 군사 협력을 심화하거나, 소련과 화해하거나, 아니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길을 새로 만드는 것이다.

첫 움직임은 모스크바 쪽에서 왔다. 소련 새 집단지도부는 1953년 6월 유고슬라비아에 대사 교환을 제안했고, 7월 30일 발코프가 베오그라드에, 9월 30일 비디치가 모스크바에 도착하며 국교가 복원되었다. 그러나 흐루쇼프가 말렌코프와의 권력 투쟁에서 우위를 잡기 전까지는 진전이 더뎠다. 결정적인 편지는 1954년 6월 22일 흐루쇼프가 티토에게 보낸 서한으로, 1948년의 결별은 "베리야아바쿠모프가 스탈린에게 준 거짓 정보" 탓이며 관계 정상화를 원한다는 내용이었다.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는 1954년 11월 26일 회의에서 두 가지 조건을 달고 화해를 수용했다: 국가의 독립과 독자적 사회주의 건설 경로를 훼손하지 말 것.

1955년 5월 26일 흐루쇼프와 불가닌이 이끄는 소련 대표단이 베오그라드에 도착했다. 공항에서 흐루쇼프는 1948년의 단절을 베리야의 책임으로 돌리는 연설을 읽었지만, 티토는 통역 없이 러시아어로 듣고도 답례사에서 "과거는 잊자"는 한 마디만 건넸다. 5월 27일부터 6월 2일까지 이어진 협상은 험난했다. 소련 측은 유고슬라비아의 서방과의 경제·군사 관계(발칸 조약 포함), 1948년 분쟁에 대한 유고슬라비아의 해석, 그리고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베오그라드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유고슬라비아 측은 이 모든 공격을 반박하고, 국가 간 평등과 내정 불간섭, 사회주의 건설 경로의 다양성을 문서에 명기할 것을 요구했다.

6월 2일 서명된 베오그라드 선언은 유고슬라비아의 요구가 대부분 관철된 문서였다. 그 핵심은 "상이한 형태의 사회주의 발전은 각국 인민의 배타적 권한에 속한다"는 조항이었다. 공산당이 이끄는 국가에 대해 소련이 이런 원칙을 문서로 인정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이 대목은 모스크바의 오랜 이념적 중재자 지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선언이었고, 흐루쇼프가 치른 대가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서방과의 관계를 유지했고, 바르샤바조약기구 가입을 거부했으며, 발칸 조약은 사문화되었다. 소련으로서도 얻은 것은 있었다. 유고슬라비아가 나토에 편입될 가능성을 차단했고, 흐루쇼프는 이 화해를 7월 전원회의에서 스탈린주의 노선(몰로토프)을 공격하는 무기로 썼다. 그러나 흐루쇼프는 같은 회의에서 유고슬라비아의 자주관리를 "수정주의"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화해는 처음부터 양가적이었다.

스탈린의 그림자에서 벗어난 유고슬라비아는 곧 동서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길을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그 단초는 이미 1954년 12월 티토의 인도 방문에서 놓였다. 12월 22일 네루와 티토가 발표한 공동성명은 비동맹 정책이 "수동적 중립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건설적인 평화 정책"이라고 규정했다. 1956년 7월 19일 브리유니 섬에서 티토는 네루와 이집트의 나세르를 만나 브리유니 선언에 서명했다. "평화는 분할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집단 안보를 통해 달성된다"는 이 선언은 비동맹 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5년 뒤인 1961년 9월 1일, 25개국 정상이 베오그라드에 모였다. 의장인 티토는 개막 연설에서 "우리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지만, 누구에게도 등을 돌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신생 독립국이 대거 등장한 1960년대 초, 비동맹은 냉전의 양극화에 맞서는 제3세계의 집단적 발언권이었고, 동시에 유고슬라비아가 국제 무대에서 인구나 군사력 이상의 비중을 행사하게 해준 외교 전략이었다. 화해와 비동맹은 같은 질문, 즉 두 진영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에 대한 두 개의 대답이었다. 하나는 모스크바가 양보해서 얻은 숨구멍이었고, 다른 하나는 베오그라드가 스스로 개척한 자리였다.

역사가들이 끝내 합의하지 못한 것들

티토-스탈린 결별이 역사가들에게 남긴 가장 큰 질문은 '왜'에 관한 것이다. 유고슬라비아 공식 역사학은 오랫동안 "유고슬라비아의 독자적인 사회주의 건설 노선이 소련의 간섭과 충돌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2007년 예로님 페로비치가 동유럽 기록보관소 자료를 분석해 발표한 연구는 이 설명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페로비치에 따르면 1948년 충돌의 직접적 원인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발칸에서의 세력권 다툼, 특히 알바니아 병합을 둘러싼 티토의 독주를 스탈린이 더 이상 용납하지 않은 데 있었다. 유고슬라비아는 1948년 이전까지 소련식 모델을 가장 충실히 모방한 나라였고, 오히려 모스크바가 동유럽에 본보기로 제시한 사례였다. '독자 노선'은 결별 이후에 비로소 만들어졌다.

이 주장은 즉시 논쟁을 불렀다. 러시아 학자 스티칼린은 페로비치의 또 다른 명제, 즉 스탈린이 유고슬라비아를 잃더라도 나머지 위성국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는 계산으로 움직였다는 부분에 이의를 제기했다. 몰로토프가 1953년 "정면 공격으로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인정한 점을 들어, 단기적으로도 소련의 패배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 논쟁은 더 극적이다. 스탈린이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실제로 계획했는가? 1956년 망명한 헝가리 장성 벨러 키라이의 증언은 대규모 침공 준비가 1949-50년에 진행되었다고 주장하며 서방 학계를 오랫동안 지배했다. 그러나 헝가리 사학자 라슬로 리터는 바르샤바조약기구 문서고에서 그런 계획의 흔적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가 찾은 것은 정반대였다: 소련과 헝가리 군부는 서방이 유고슬라비아를 경유해 공격해올 경우를 대비한 방어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48년 6월 스탈린이 체코슬로바키아의 클레멘트 고트발트에게 보낸 서한 역시, 목표가 유고슬라비아를 전복하는 것이 아니라 고립시켜 쇠퇴시키는 데 있었음을 시사한다.

세 번째 논쟁은 자주관리 제도가 언제 시작되었는가에 관한 것이다. 티토 시대의 공식 서사는 1950년 노동자평의회법을 코민포름 결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응답으로 제시했지만, 일부 사학자, 특히 슬로베니아 역사학계는 자주관리의 싹이 이미 전쟁 중 빨치산 인민위원회에 있었다고 본다. 에드바르트 카르델 자신도 후일 이런 입장을 취했다.

마지막으로, 결별이 유고슬라비아 사회에 얼마나 오래 남았는가에 대한 평가도 갈린다. 크리스티안 악스보 닐센의 연구에 따르면, 유고슬라비아 국가보안국은 코민포름 자체가 1956년 해산된 뒤에도 '코민포르모브치'에 대한 감시를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붕괴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결별이 끝난 것이 아니라 체제 내부에 영구히 얼어붙은 균열로 남았다는 해석이다.

이 모든 논쟁이 공유하는 결론은 하나다. 티토-스탈린 결별은 한 번의 단절이 아니라, 해석이 거듭 갱신되는 사건이라는 점이다. 냉전기에는 '단일한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신화를 깬 최초의 균열로 읽혔고, 탈냉전기 기록 개방 이후에는 지정학적 이해 충돌로 재규명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 해체 이후에는 그 붕괴의 먼 기원을 품은 사건으로 다시 읽히고 있다.

깨진 거울, 열린 길: 1948년이 남긴 것

티토-스탈린 결별이 내린 판결 가운데 시간이 가장 확실하게 확정한 것은 하나다: 단일한 중심에서 지도되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관념은 1948년 6월 28일부로 더 이상 기술적 사실이 아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스탈린은 유고슬라비아를 굴복시켜 이 관념을 복원하려 했고, 유고슬라비아는 자신이 오히려 정통이라고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의 주장과 달리 '하나의 중심' 자체가 무너졌다. 이후 중소 분쟁(1960년대), 유로코뮤니즘의 등장(1970년대), 그리고 사회주의권의 궁극적인 해체에 이르기까지, 국가마다 다른 사회주의 건설 경로가 가능하다는 생각은 이 첫 균열 없이는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무엇이 균열을 일으켰는지에 관해서는 합의가 남아 있지 않다. 공산권 기록이 개방된 이후의 연구, 특히 페로비치(Jeronim Perović)의 2007년 재평가는 구유고슬라비아 공식 역사서술이 주장해 온 구도(이념적 노선 차이, 즉 '소련의 관료적 변질 대 유고슬라비아의 진정한 사회주의')가 틀렸다고 본다. 새 자료는 결별의 주된 동인이 이념이 아니라 발칸에서의 영토적·정치적 야심, 특히 알바니아 문제를 둘러싼 충돌이었음을 보여준다. 티토는 모스크바의 반대에도 알바니아에 군대를 배치하려 했고, 스탈린은 이를 자신의 위계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읽었다. 이 견해에 따르면, 결별 후 유고슬라비아가 정교화한 자주관리 이데올로기는 갈등의 원인이 아니라 갈등의 산물이었다.

또 하나의 미결 문제는 유고슬라비아가 '살아남았다'는 사실 자체를 어떻게 평가할지다. 서방의 경제원조와 군사원조(1950년대 초 미국 단독으로 4억 달러 이상을 제공했고, 1953년 발칸 조약은 나토 회원국인 그리스·터키와 유고슬라비아를 군사적으로 묶었다) 없이 유고슬라비아가 버텼을 가능성은 낮다. 그런 점에서 이 결별은 냉전의 수사와 달리 진영 논리가 현실에서는 얼마나 가변적인지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가장 정통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 여겼던 지도부가 워싱턴의 수표로 버틴 모순, 그리고 자주관리를 이념으로 내세우면서 내부의 코민포름 지지자 수만 명을 골리 오토크에 보낸 모순은 오늘날에도 이 사건을 평가하는 중심축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이 결별이 단지 강대국 정치의 한 장면에 불과했다고 보는 시각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 유고슬라비아가 1961년 비동맹 운동의 창립을 주도하고, 냉전 내내 두 진영 어디에도 편입되지 않은 유일한 유럽 사회주의 국가로 남았다는 사실은, 1948년의 균열이 외교적 생존을 넘어 하나의 지속 가능한 국제정치적 입장으로 발전했음을 뜻한다. 티토 자신이 '티토주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만든 것은 소련식 사회주의의 이론적·실천적 대안으로 기능하는 하나의 모델이었다. 자주관리, 비동맹, 연방제라는 삼각축은 1991년 유고슬라비아 해체까지 이 국가의 정체성을 규정했고, 그 뿌리는 1948년의 단절에 닿아 있다.

결별이 확정한 것, 결별이 열어둔 것

티토-스탈린 결별이 결정적으로 확정한 것은 하나다. 국제 공산주의 운동은 더 이상 단일한 중심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1948년 6월 28일 코민포름 결의가 처음으로 증명했다. 스탈린은 결의만으로 유고슬라비아 당내 '건전한 세력'이 티토를 몰아낼 것이라 믿었으나, 지도부는 버텼고 1950년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제도적 대안을 내놓으며 실천적 이탈을 교리적 경쟁으로 전환했다. 1955년 흐루쇼프가 베오그라드 선언에서 사회주의 건설 경로의 다양성을 공식 인정한 것은, 결별이 실천에서 이미 증명한 바를 문서로 확인한 셈이었다. 1956년 팔미로 톨리아티의 '다중심주의' 개념과 1960년대 중소 분쟁은 모두 1948년의 균열을 선례로 삼았다. 단일 중심의 종언, 이것만은 확정적이다.

확정되지 않은 것은 결별의 원인, 더 정확히 말하면 원인의 성격이다. 유고슬라비아 공식 역사학은 연방 해체까지 줄곧 '사상적 차이'가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티토가 1937년 당을 장악한 이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소련과 다른 사회주의를 준비해왔고, 1948년은 그 차이가 폭발한 해라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1991년 이후 모스크바와 베오그라드 기록관이 열리면서 이 서사는 근본적으로 흔들렸다. 레오니트 기비안스키와 예로님 페로비치의 연구가 보여주듯, 1945~1947년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동유럽에서 가장 정통적인 스탈린주의 정당이었다. 1946년 헌법은 1936년 소비에트 헌법을 그대로 옮겼고, 집단화는 가장 과격했으며, 스탈린 찬양은 가장 열광적이었다. 새 증거가 가리키는 분열 원인은 사상이 아니라 지정학이었다. 알바니아 병합 추진, 그리스 내전 개입, 불가리아와의 연방 교섭, 이 발칸 정책을 스탈린의 시간표에 종속시키라는 요구를 티토가 거부한 것이 충돌의 발단이었다. 사상적 분화는 결별 후에 왔지, 결별을 불러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 합의는 또 다른 논쟁을 낳았다. 결별이 지정학적 충돌이었다면, 사상이라는 구조적 요인의 무게는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러시아 역사가 알렉산드르 스티칼린은 페로비치가 스탈린의 단기 계산을 강조한 나머지 모스크바가 입은 장기적 손실을 과소평가했다고 비판한다. 몰로토프조차 1953년 7월 "정면 공격으로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실패를 인정하지 않았는가. 독립적인 공산주의 국가의 존재 자체는, 기원이 무엇이었든, 크렘린이 결코 무력화할 수 없었던 사상적 도전이었다는 반론이다. 기록은 결별이 사상에서 비롯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지만, 결별의 효과가 사상을 변형시켰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소련이 침공하지 않은 이유도 열려 있다. 베러 키라이의 침공 계획 존재 주장은 라슬로 리터의 반증, 즉 바르샤바조약기구 문서에 관련 자료가 전무하다는 사실에 부딪혔지만, 1949~1953년 소련 군사·정치국 문건이 완전히 공개되지 않은 이상 결론은 유보다. 마지막으로, 결별이 동유럽의 개혁을 촉진했는지 지연시켰는지도 닫히지 않은 문제다. 1956년 폴란드와 헝가리의 '독자 노선' 요구는 1948년의 선례 없이 생각하기 어렵지만, 1949~1952년의 '티토주의자' 숙청은 개혁을 이끌었을 간부들을 먼저 제거했다. 결별은 문을 열었고 동시에 그 문으로 걸어가는 것을 공포로 채웠다.

1948년이 단일한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관념을 깨뜨렸고 그 균열이 되돌려지지 않았다는 점은 확정적이다. 그러나 그 균열이 한 인물의 발칸 야망과 다른 인물의 통제 욕구가 부딪친 결과인지, 보편적 권위를 주장하면서도 민족 단위 정당에 의존하는 운동의 내재적 불안정성의 발현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이 질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 결별의 역사적 무게는 왜 일어났느냐보다 그 후에 무엇을 가능하게 했느냐에 실려 있으며, 기록관은 아직 그 무게를 다 재지 못했다.

확정된 사실, 갈리는 해석

1990년대 이후 구소련권 문서고가 열리면서, 티토-스탈린 결별 연구에서 적어도 세 가지는 더 이상 정당한 논쟁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첫째, 유고슬라비아 공식 역사서술이 주장해온 '우리는 다른 사회주의 길을 걸었기에 쫓겨났다'는 서사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 2007년 예로님 페로비치가 구소련권 문서를 분석해 입증했듯이, 1948년 이전 유고슬라비아는 동유럽에서 가장 정통적인 스탈린주의 국가였고, 집단화와 국유화를 가장 급진적으로 밀어붙였다. 갈등의 실질적 원인은 이념이 아니라 발칸에서의 영토·정치적 주도권, 특히 알바니아 병합을 둘러싼 티토의 독자 행보였다.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유고슬라비아식 사회주의는 결별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다. 고립된 정권이 자신의 정통성을 다시 세우기 위해 사후에 만들어낸 이론적 무기였던 것이다.

둘째, 스탈린이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명령했다는 벨러 키라이의 증언은 문서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헝가리 역사가 라슬로 리테르가 헝가리 국방부·참모본부 문서를 전면 검토한 결과, 1949~1951년 헝가리군의 증강과 '남부 방어체계' 구축은 유고슬라비아 방면으로부터의 서방 공격에 대비한 방어 계획이었지, 침공 준비가 아니었다. 흐루쇼프도 훗날 회고록에서 스탈린이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하지 않은 이유로 소련이 유고슬라비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다는 점과 미국의 개입 우려를 꼽았다.

셋째, 스탈린이 애초에 티토 정권을 무너뜨리려 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1948년 6월 코민포름 결의 직후 스탈린이 클레멘트 고트발트에게 보낸 서한은, 목표가 유고슬라비아를 고립시켜 '쇠퇴'시키는 것이지 전복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러나 핵심적인 물음은 여전히 열려 있다. 스탈린은 알바니아 통합에 대한 티토의 요구를 정말로 지지했는가, 아니면 지연 전술이었는가? 1951년 모스크바 군사회의 이후 소련의 군사 계획이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되었다는 일부 연구자의 주장은, 러시아 국방부 문서고가 여전히 폐쇄되어 있어 검증이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유고슬라비아가 소련의 여느 위성국이었다면 결별은 피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자력으로 해방한 파르티잔 국가와 모스크바 중심의 위계적 질서 사이에는 처음부터 파열이 예정되어 있었을까? 중소 분쟁으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진영의 다중심화'가 이 결별 없이도 가능했을까? 이 질문은 문서고가 완전히 열리더라도, 사료보다 역사가의 판단에 맡겨진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

결과

결별은 양쪽 모두에 오래 남았다. 동유럽에서는 '티토주의'가 이단의 이름이 되어 라이크, 코스토프, 슬란스키 재판 등 위성국 숙청 재판의 죄목으로 쓰였다. 유고슬라비아는 1950년 자주관리법을 시작으로 소련 모델과 구별되는 사회주의를 제도화했고, 냉전의 두 진영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노선을 굳혀 1961년 베오그라드에서 첫 비동맹 정상회의를 주최했다. 화해는 스탈린 사후에 왔다. 1955년 흐루쇼프가 베오그라드를 방문해 관계를 정상화하고 각국의 상이한 사회주의 건설 경로를 인정했는데, 이 인정은 이듬해 폴란드와 헝가리에서 '독자 노선' 요구가 분출하는 배경이 되었다. 단일한 중심에서 지도되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이라는 관념이 처음으로 깨진 사건으로, 이후의 중소 분쟁과 다중심주의 논쟁을 예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표

  1. 1945–1947
    자력으로 선 정권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은 소련군의 상시 주둔 없이 나라를 해방했고, 전후 개조도 가장 급진적으로 밀어붙였다. 트리에스테 문제와 그리스 내전 지원에서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행동은 서방과의 충돌을 피하려는 스탈린의 계산과 어긋나기 시작했다.

  2. 1948.01–02
    발칸 연방을 둘러싼 파열음

    디미트로프가 발칸 연방 구상을 공개 발언하자 스탈린은 불가리아와 유고슬라비아 지도부를 모스크바로 불러 질책하고, 즉각적인 연방 결성을 역으로 강요했다. 유고슬라비아는 이를 흡수 시도로 읽고 거부했다.

  3. 1948.03–05
    서한 논쟁

    소련이 군사·민간 고문단을 철수시키고, 스탈린과 몰로토프 명의의 서한이 유고슬라비아 당을 반소련·반마르크스주의로 규탄했다. 티토와 카르델의 답신은 혐의를 조목조목 반박하며 대등한 당 대 당 관계를 요구했다.

  4. 1948.06
    부쿠레슈티 결의: 제명

    코민포름 제2차 회의가 유고슬라비아공산당 제명을 결의하고, 당내 '건전한 세력'이 지도부를 갈아치우라고 호소했다. 호소는 실패했다. 7월의 유고슬라비아 당대회는 티토 지도부를 재신임했다.

  5. 1948–1949
    봉쇄와 이단 사냥

    소련권의 경제 봉쇄와 국경 도발이 이어졌고, 유고슬라비아 안에서는 코민포름 지지자(코민포르모브치) 수만 명이 골리 오토크 수용소 등지에 수감되었다. 동유럽 각국에서는 라이크 재판을 시작으로 '티토주의자' 재판이 조직되었다.

  6. 1950
    자주관리라는 답

    고립 속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자신이 정통이고 소련이 관료적으로 변질됐다는 논리를 세웠다. 1950년 노동자평의회법으로 시작된 자주관리 제도는 그 논리의 제도적 표현이었고, 서방의 원조와 무역이 경제를 지탱했다.

  7. 1953–1955
    베오그라드 선언

    스탈린 사후 소련 새 지도부는 관계 복원에 나섰고, 1955년 흐루쇼프가 베오그라드를 방문해 내정 불간섭과 사회주의 건설 경로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선언에 서명했다. 화해는 이루어졌지만 유고슬라비아는 바르샤바조약기구 밖에 남았다.

  8. 1961
    비동맹으로

    두 진영 사이의 자리를 노선으로 굳힌 유고슬라비아는 인도, 이집트 등과 함께 비동맹 운동을 발의했고, 1961년 베오그라드에서 첫 정상회의를 주최했다.

관련 인물 18명

참여7

발칸 연방 구상의 당사자게오르기 디미트로프1882–1949

연방 구상 발언으로 모스크바의 질책을 받았다

1955년 화해의 주역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

베오그라드를 방문해 관계를 정상화했다

자주관리 이론의 설계자이자 대소 응전의 논객에드바르트 카르델1910–1979

1949년 「유고슬라비아 인민민주주의에 관하여」에서 소련의 관료적 변질을 처음 이론화하고, 1950년 노동자 자주관리법의 제도화를 주도했다

1955년 베오그라드 방문 소련 대표단장니콜라이 불가닌1895–1975

소련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1955년 5월 베오그라드 선언 서명을 위한 소련 대표단을 공식 이끌었으나, 실질 협상은 흐루쇼프가 주도했다.

티토와 비동맹운동을 공동 창설한 총리자와할랄 네루1889–1964

네루는 1954년 티토와 비동맹 공동 성명에 서명했고, 1956년 브리유니 선언을 발표했으며, 1961년 베오그라드 정상회담에서 비동맹운동을 공식 창설했다.

노동자 자주관리의 경제 이론가보리스 키드리치1912–1953

보리스 키드리치는 1949년 11월 두로 샬라이와 함께 노동자 평의회 설치에 관한 훈령에 공동 서명했으며, 카르델리와 더불어 자주관리의 경제 이론을 발전시켰다.

크로아티아 행정위원회 의장블라디미르 바카리치1912–1983

카르델리와 함께 1948년 2월 모스크바 회담에 파견되어 스탈린과의 대결에 참석했다.

관련 용어

출처: Ivo Banac, With Stalin against Tito: Cominformist Splits in Yugoslav Communism (Cornell University Press, 1988)Jeronim Perović, The Tito-Stalin Split: A Reassessment in Light of New Evidenc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9:2, 2007)Wilson Center Digital Archive: The Tito-Stalin Spl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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