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우가바 강을 구하고 라트비아 인민전선을 이끈 언론인
「다우가바를 지키는 것은 독립 라트비아를 지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투쟁이 우리 혁명의 시작이었다.」
라트비아의 언론인·정치인. 1986년 동료 아르투르스 스닙스와 함께 『문학과 예술』지에 실은 기사로 다우가프바 수력발전소 건설 반대 여론을 촉발했고, 3만 명의 서명을 모은 캠페인은 1987년 소련 각료회의가 공사를 중단시키는 성과로 이어졌다. 1988년 10월 라트비아 인민전선 창립대회에서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어, 환경운동에서 시작된 대중 동원을 독립 회복이라는 정치적 목표로 전환시켰다. 1990년 최고회의 부의장을 지내고 1992년 사임한 뒤 언론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사회민주노동당 당수를 거쳐 리가 시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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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언론 활동 시작, 연극·문학 비평
- 1986「다우가바의 운명을 생각하며」 발표,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캠페인 촉발. 올해의 언론인 선정
- 1988–1990라트비아 인민전선 의장
- 1990–1992라트비아 최고회의 부의장
- 1992–1998『네아트카리가 치냐』 등에서 논설위원·문화부장
- 2002–2005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 당수
- 2001–2009리가 시의원
공산당 서기 출신으로 라트비아 독립을 이끈 최고회의 의장
1991년 1월 14일, 쿠즈민 장군이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낸 최후통첩은 단순했다. 라트비아가 채택한 법률들을 철회하라. 고르부노우스는 철회하지 않았고, 일주일 뒤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라트비아 동부 루자 인근 필다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건설기술학교를 마치고 리가 공과대학과 모스크바 사회과학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이념 담당)까지 올랐으나, 1988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의 출범을 지지하며 개혁파로 전환했고, 1990년 5월 4일 소련을 점령국으로 규정하고 독립 이행기를 개시한 최고회의 회기를 주재했다.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시기 쿠즈민 장군의 최후통첩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1월 21일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와 사태를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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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1965기술자(니크라체 국영농장), 리가 농업공학연구소 직원, 소련군 복무
- 1970–1974리가 공과대학 선임강사, 키로프 구 콤소몰 제1서기
- 1974–1988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여러 직책, 최종 이념 담당 서기
- 1988–1990라트비아 소비에트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 1990–1993라트비아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독립 회복 후 국가원수 대행
- 1993–1995제5대 사에이마(국회) 의장
- 1995–2002부총리, 환경보호지역개발장관, 교통장관 역임
소련에서 라트비아를 걸어내고 바리케이드의 밤을 지휘한 물리학자
1991년 1월 20일 밤, 소련 특수부대가 라트비아 내무부 청사를 습격해 다섯 명이 사망했다. 고드마니스는 즉시 소련 내무장관 보리스 푸고에게 전화를 걸었고, 푸고는 '나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라트비아의 물리학자 출신 정치인으로, 고체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라트비아대학교에서 강의했다. 1987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에 합류해 1990년 라트비아 최고회의 선거 승리 후 초대 총리에 취임, 독립 회복을 선언한 정부를 이끌며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당시 전략 거점 방어를 지휘하고 소련 내무장관 푸고에게 직접 전화해 공격 개입을 추궁했다. 2007년 다시 총리가 되어 금융위기 속에서 사임할 때까지 라트비아의 시장경제 전환과 유럽 통합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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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3–1988라트비아대학교 강사, 고체물리학연구소 연구원
- 1989–1990라트비아 인민전선 부의장
- 1990–1993라트비아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총리)
- 1998–1999라트비아 재무장관
- 2006–2007라트비아 내무장관
- 2007–2009라트비아 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