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우크라이나

5 명

해당 인물

파울로 페트로비치 스코로파츠키

Павло Петрович Скоропадський
반혁명 세력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1873–1945 ○ 망명 중 사망

독일 점령 하 우크라이나국의 마지막 헤트만

1918년 4월 29일 키예프에서 전우크라이나 지주대회가 만장일치로 '헤트만 만세!'를 외치며 파울로 스코로파츠키를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으로 추대했다.

코사크 헤트만 가문의 후예이자 제정 러시아 군단장으로 1차 세계대전을 치른 귀족 장군. 1918년 4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독일군의 후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중앙라다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국의 헤트만으로 즉위했다. 8개월간의 집권기 동안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와 국립대학을 세우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나, 대지주 중심의 토지 정책과 독일 점령군의 곡물 강제 징발이 농민의 광범한 저항을 불렀다. 1918년 11월 독일 패전과 함께 페틀류라가 이끈 반헤트만 봉기에 밀려 퇴위했고, 이후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나치 협력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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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근위 기병연대 장교 임관
  • 1904–1905러일전쟁에서 코사크 부대 지휘, 훈장 수훈
  • 1912소장 승진, 니콜라이 2세의 시종무관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병사단 지휘, 중장 승진
  • 1917제34군단장, 우크라이나화하여 제1우크라이나군단으로 개편
  • 1917.10자유코사크 총사령관(오타만)으로 선출
  • 1918.04–12우크라이나국 헤트만
  • 1919–1945독일 망명, 헤트만 운동 지도

시몬 바실리요비치 페틀류라

Симон Васильович Петлюра
반혁명 세력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1879–1926 ✕ 파리에서 암살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이끌었으나 유대인 학살의 책임 논쟁에 휩싸인 독립운동가

러시아의 운명에서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떼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러시아가 패배하면 그 재앙은 우크라이나에도 미칠 것입니다.

폴타바 출신의 사회민주주의 언론인으로, 1917년 중앙라다 군사사무총서기를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 총사령관과 집정내각(디렉토리야) 수반을 지냈다. 볼셰비키·백군·폴란드 사이에서 독립을 수호하려 싸웠으나 1920년 패퇴 후 폴란드, 이어 파리로 망명했다. 그의 군대 휘하에서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으며, 페틀류라가 이를 막지 못했는지 의도적으로 방치했는지는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1926년 파리에서 유대인 아나키스트 숄롬 슈바르츠바르트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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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17우크라이나 혁명당(RUP)·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USDRP) 활동, 언론인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운동 주도
  • 1917.5–1917.12중앙라다 군사사무총서기, 우크라이나 군 편성 주도
  • 1918.1–1918.3하이다마키 코쉬 지휘관, 키예프 아르세날 봉기 진압
  • 1918.11–1919.2우크라이나 집정내각(디렉토리야) 군사총책
  • 1919.2–1920.12집정내각 수반 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 총사령관
  • 1920.4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 체결, 대볼셰비키 동맹
  • 1924–1926파리 망명정부에서 주간지 『트리주브(Тризуб)』 발행

비톨트 파블로비치 포킨

Вітольд Павлович Фокін
외국 정치가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인 1932–2025 ○ 자연사

소련 경제관료에서 독립 우크라이나의 첫 총리로

비톨트 포킨은 광산 기술자 출신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경제관료로, 계획경제의 운영과 국가 전환을 함께 경험했다. 그는 독립 직전과 직후 우크라이나 정부를 이끌며 경제 위기와 연방 해체의 압력을 조정해야 했다. 1991년 12월 레오니드 크라프추크와 함께 우크라이나 대표로 벨로베시 협정에 서명해 소련 이후 질서의 출범에 참여했다. 말년에는 돈바스 협상에서 논쟁적인 입장을 보여 공적 역할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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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63루한스크 지역 탄광 기술자·관리자
  • 1963–1971돈바스 무연탄 산업 관리자
  • 1971–1987우크라이나 국가계획위원회 부서장·부위원장
  • 1987–1990우크라이나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90–1991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91–1992우크라이나 초대 총리
  • 1991벨로베시 협정 우크라이나 서명자
  • 2020우크라이나 삼자접촉그룹 대표단 제1부대표

바실 마로치코

Василь Марочко
연구자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인 1956– ○ 활동 중

홀로도모르의 제도와 기억을 추적한 역사학자

바실 마로치코는 1920~1930년대 우크라이나 농촌과 홀로도모르를 연구해 온 우크라이나 역사학자다. 그의 연구는 기근을 추상적 재난이 아니라 곡물 징발과 농촌 통제를 결합한 국가 정책의 결과로 분석한다. 그는 흑색명부가 우크라이나 SSR 405개 구역 중 252개를 포괄했다는 계산을 제시하며, 식량 박탈과 행정적 격리가 농민 사회를 어떻게 압박했는지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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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1995우크라이나 역사연구소 대학원생·연구원
  • 1985「우크라이나 집단농촌의 소비에트 생활양식 형성」으로 역사학 박사 학위 취득
  • 1996「우크라이나 농민 협동조합」으로 역사학 박사 논문 방어
  • 1996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연구자협회 회장
  • 2008–2015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연구자협회 회장
  • 2013–우크라이나 역사 전공 교수
  • 2022홀로도모르 연구소 선임연구원, 국립 홀로도모르-제노사이드 박물관

헤나디 흐리호리요비치 예피멘코

Геннадій Григорович Єфіменко
연구자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인 1971– ○ 활동 중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국가와 사회를 추적한 역사가

헤나디 예피멘코는 20세기 전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정치·사회사를 연구한 우크라이나 역사가다. 그는 홀로도모르 이후 농촌 재정착을 두 차례 파동으로 나누어 분석하고, 국가가 곡물 생산 기반을 회복하려 경제적으로 추진한 정책과 이주민의 대규모 귀환을 함께 밝혔다. 그의 연구는 인구 이동을 민족 구성의 단순한 변화로 과장하지 않고, 기근 뒤 농촌의 노동력과 국가 통치가 맞물린 문제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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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1994루한스크 국립 교육기관 역사학부에서 수학
  • 1993–1997마르키우카 중등학교 역사 교사
  • 1997–2000우크라이나 역사연구소 대학원
  • 2001「1932~1938년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연방공산당의 민족·문화 정책」으로 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2000–현재우크라이나 국립과학원 역사연구소 20~30년대 우크라이나사 부문 연구원
  • 2013「기근 이후 시기 이주와 추방」에서 1933~1934년 재정착의 지역별 자료를 체계화
  • 2014–현재역사 대중화 프로젝트 ‘리크베즈’ 참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