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940

혁명 세대 266명

10월 혁명을 만들고 초기 소비에트 국가를 세운 세대, 다수는 훗날 그 혁명의 이름으로 스러졌다.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카르핀스키

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Карпинский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러시아 1847–1936 ○ 자연사

혁명을 가로질러 과학아카데미를 지킨 첫 선출 총재

1917년 5월 15일 과학아카데미 총회에서 최초의 선출 총재 투표가 열렸다. 카르핀스키는 거의 만장일치로 당선되었다 — 오직 본인만이 자신에게 반대표를 던졌다.

카르핀스키는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최초의 선출 총재(1917–1936)로서, 제정에서 소비에트 체제로의 전환기를 가로질러 학술원을 이끈 세계적 지질학자다. 유럽러시아 최초의 종합 지질도를 완성했고, 동유럽 플랫폼의 2층 구조를 밝혔으며, 남부 유럽러시아를 가로지르는 변형대인 '카르핀스키 선'을 규명해 지구조론의 기초를 놓았다. 페름기 상어 헬리코프리온을 기재했고, 그의 이름은 광물 카르핀스카이트, 달의 크레이터, 러시아 지질연구소에 남아 있다. 1917년 5월 총회에서 거의 만장일치로 선출된 그는 혁명과 내전의 혼란 속에서도 학술원의 장비와 기록을 보존하며 소비에트 기초과학 제도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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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869우랄 지역 광산 기사
  • 1869–1896상트페테르부르크 광산연구소 교수
  • 1885–1903지질위원회 위원장
  • 1886제국 과학아카데미 회원 선출
  • 1899–1936광물학회 회장
  • 1916–1917과학아카데미 부총재 대행
  • 1917–1936과학아카데미 총재 · RAS → AN SSSR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

Иван Петрович Павлов
이론가 소비에트 러시아 1849–1936 ○ 폐렴, 86세

조건반사를 발견하고 스탈린에게 '러시아인이라 불리는 것이 부끄럽다'고 쓴 노벨상 생리학자

동료가 거리의 총격 때문에 10분 지각했다고 설명하자, 파블로프가 외쳤다: '혁명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실험실에서 할 실험이 있는데!'

소화생리학 연구로 1904년 노벨상을 수상하고, 개 실험을 통해 조건반사(고전적 조건형성)를 발견하여 현대 행동심리학과 신경과학의 토대를 놓은 러시아·소비에트 생리학자. 레닌의 찬사와 소비에트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면서도 공산당 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1927년 스탈린에게 지식인 탄압에 대해 '러시아인이라 불리는 것이 부끄럽다'고 썼고 1934년 키로프 암살 후에는 대숙청을 몰로토프에게 항의했다. 그의 고등신경활동에 관한 유물론적 생리학은 사후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적 정설로 교조화되어, 그 자신의 치열한 독립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파블로프 학설' 국가 정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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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0–187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전공, 자연과학 후보 학위 취득
  • 1875–1879제국의과외과학원 수학, 금메달로 졸업
  • 1884–1886독일 라이프치히·브레슬라우에서 카를 루트비히·루돌프 하이덴하인 밑에서 연구
  • 1890–1895군사의학아카데미 약리학 교수
  • 1891–1936실험의학연구소 생리학부장
  • 1895–1925군사의학아카데미 생리학 교수
  • 1904소화생리학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 러시아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 1925–1936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 생리학연구소 소장

이반 블라디미로비치 미추린

Ив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Мичурин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55–1935 ○ 자연사

자신의 이름이 라이선코에게 도용된 독학 육종학자

“우리는 자연의 은혜를 기다릴 수 없다. 자연으로부터 그것을 빼앗는 것이 우리의 과업이다.” — 미추린이 묘목장에서 수십 년간 반복한 이 유명한 문장은 후일 소비에트 체제의 자연 정복 수사로 왜곡되었다.

300종 넘는 과일 품종을 육종한 러시아 독학 원예학자. 교잡육종에 평생을 바쳤고 레닌의 지원으로 묘목장이 국립 연구소로 성장했다. 사후 리센코가 그의 이름을 도용해 '미추린 생물학'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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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5랴잔현 베르시나 영지에서 소귀족 가문의 7번째 자녀로 출생
  • 1872프론스크 군립학교 졸업. 랴잔 김나지움에서 '상관에 대한 무례'로 퇴학당함
  • 1875코즐로프에서 첫 임차지(약 500㎡)에 과일·장과류 600종 이상 수집, 교잡 실험 시작
  • 1888투르마소보 인근에 약 13ha의 토지 구입, 러시아 최초의 선종 묘목장 중 하나 설립
  • 1906첫 학술 논문 발표. 1912년 성 안나 훈장 3등급 수훈
  • 1918인민농업위원회, 미추린 묘목장을 국유화하고 그를 관리자로 임명. 레닌이 개인적 관심 표명
  • 1931레닌 훈장 및 노동적기훈장 수훈. 1934년 생물학 박사 학위, RSFSR 과학기술 공로 활동가 칭호
  • 1935소련 과학 아카데미 명예 회원,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 정회원. 6월 7일 사망

콘스탄틴 예두아르도비치 치올콥스키

Константин Эдуардович Циолковский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57–1935 ○ 위암

귀먹은 시골 교사에서 우주비행학의 아버지로. 로켓 방정식 하나로 우주 시대를 연 독학자

「인류는 영원히 지구의 요람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대기와 태양계의 한계를 넘어 정복할 것이다.」

로켓 추진의 기본 방정식을 정립한 우주비행학의 선구자. 1903년 다단계 로켓·궤도 정거장·우주 식민지 개념을 제시했고, 그의 이론은 코롤료프와 소비에트 우주 계획의 직접적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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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9민중학교 교사 자격 취득
  • 1880–1892보롭스크 시립학교 수학·기하 교사
  • 1892–1921칼루가 현립학교·여자교구학교 수학·물리 교사
  • 1903「반응 장치에 의한 세계 공간 탐구」 발표 — 로켓 방정식 기초 확립
  • 1920러시아 세계학 애호가 협회 회원, 소비에트 정부 개인연금 수여
  • 1924–1935우주비행학 이론 집중 연구 — 다단계 로켓·궤도정거장·우주 식민지 구상
  • 1932노동적기훈장 수훈, 75세 전국 경축

미하일 스테파노비치 올민스키

Михаил Степанович Ольминский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63–1933 ○ 자연사

이스트파르트의 창설자이자 볼셰비키 당사 편찬의 설계자

5학년 때 큰 쉬는 시간, 급우가 교실 문을 닫고 교단에 올라 불법 팸플릿 「죽음에는 죽음으로」를 낭독했다. 메젠초프 헌병사령관 암살에 대한 크랍친스키의 글은 올민스키에게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겼다.

나로드나야 볼랴에서 출발해 1904년 레닌의 지도 아래 볼셰비키에 합류한 혁명적 문필가다. 차르 감옥에서 5년 가까이 독방 생활을 견뎠고, 신문 《즈베즈다》, 《프라우다》, 잡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의 편집을 맡으며 볼셰비키 저널리즘의 얼굴이 되었다. 1920년 이스트파르트(당사위원회)를 창설해 소비에트 당사 편찬의 제도적 기초를 놓았고, 살티코프-셰드린 연구로 문학비평사에도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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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885나로드나야 볼랴 '청년동맹' 가입, 체포되어 보로네시로 추방
  • 1891–1898'나로드노볼리치 그룹' 공동 창립, 재체포 후 약 5년 독방, 올레크민스크 유형
  • 1904–1905스위스에서 레닌 지도 아래 볼셰비키 합류, 《프페료트》 《프롤레타리》 편집 참여
  • 1905–1916《노바야 지즌》 《볼나》 《즈베즈다》 《프라우다》 《프로스베셰니예》 편집, 바쿠·사라토프에서 활동
  • 1917모스크바 볼셰비키 위원, 자모스크보레츠키 군사혁명위원, 6차 대회 공동의장, 제헌의회 의원
  • 1918–1920《프라우다》 편집위원, 사회주의 아카데미 교수, 선동열차 강연단 활동
  • 1920–1928이스트파르트(당사위원회) 창설·의장, 잡지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창간·편집
  • 1922–1933구볼셰비키협회 회장(회원번호 1번), 살티코프-셰드린 전집 편찬위원장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랍스키

Константин Сергеевич Станиславс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63–1938 ○ 자연사

모스크바 예술극장 창립자이자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의 창시자

192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 30주년 기념 공연 도중 심장마비가 찾아왔다. 그는 막이 내릴 때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았고, 이후 다시는 배우로 서지 못했다.

러시아·소비에트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 189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공동 창립해 근대 연극을 혁신했다. 배우의 심리적 진실을 체계화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은 세계 연기 교육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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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모스크바 예술문학협회 공동 창립
  • 1898네미로비치-단첸코와 모스크바 예술극장(MAT) 공동 창립
  • 1906'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 연기 방법론 개발 착수
  • 1912MAT 제1스튜디오 설립, 배우 훈련 실험실로 운영
  • 1918볼쇼이 극장 오페라 스튜디오(현 스타니슬랍스키 음악극장) 창설
  • 1922–1924MAT 유럽·미국 순회공연 지휘, 세계적 명성 확립
  • 1936소련 최초의 인민예술가 칭호 수여
  • 1938『배우의 작업』 출간; 모스크바에서 사망

알렉산드르 세라피모비치

Александр Серафимович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63–1949 ○ 자연사

『철류』로 혁명의 서사시를 쓴 돈 카자크의 아들

“우리는 쓰라린 고통 속에서, 온몸의 피를 쥐어짜며 승리를 배웠다.” — 『철류』

돈 카자크 출신 소비에트 작가. 1918년 볼셰비키 입당, 타만 군대의 내전 행군을 그린 『철류』(1924)로 소비에트 산문의 기념비를 세웠다. 『옥탸브리』 주필로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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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유배지에서 첫 단편 「얼음 위에서」 발표, 필명 '세라피모비치'
  • 1902–1917모스크바에서 고리키의 '스레다' 그룹 활동 — 『모래』에 톨스토이 찬사
  • 1918볼셰비키 입당, 『이즈베스티야』 문예부장
  • 1924『철류』 발표 — 타만 군대 행군을 그린 내전 서사시
  • 1926–1929『옥탸브리』 주필,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 발굴·출판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상임위원회 창립 위원
  • 1943스탈린상 1급, 상금 국방기금 헌납

안나 일리니치나 옐리자로바-울리야노바

Анна Ильинична Елизарова-Ульянова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64–1935 ○ 병사

레닌의 맏누이이자 이스크라 지하유통을 조직한 구볼셰비키 혁명가

1932년 안나는 스탈린에게 '블라디미르 일리치는 유대인에 대해 언제나 좋게 말했습니다'라고 쓰며 레닌의 유대인 혈통을 공개해 반유대주의에 맞서 줄 것을 요청했으나, 스탈린은 거부했다.

레닌의 맏누이이자 1898년 RSDLP에 입당한 구볼셰비키. 동생 알렉산드르의 차르 암살 기도 사건으로 5년 유형을 선고받은 후, 블라디미르의 옥중 연락망과 『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판을 조직했다. 1917년 『프라우다』 편집서기로 10월 혁명을 준비했고, 혁명 후 이스트파르트와 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창립에 참여해 소비에트 역사제도의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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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알렉산드르 울리야노프 사건으로 체포, 5년 유형
  • 1898RSDLP 입당, 모스크바 첫 당위원회 활동
  • 1900–1902『이스크라』 유통망 조직 (베를린, 파리, 러시아)
  • 1909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판 조직
  • 1913–1917『프라우다』 편집위원, 편집서기
  • 1917RSDLP(b) 중앙위원회국 위원, 10월 혁명 준비
  • 1918–1921인민위생인민위원부 아동보호부장, 교육인민위원부 근무
  • 1920년대–1932이스트파르트·마르크스-엥겔스-레닌 연구소 공동창립, 『프롤레타르스카야 레볼류치야』 편집서기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코즐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Козловский
제정·백색진영 소비에트 러시아인 1864–1940 ○ 망명 중 사망

크론시타트 포병대장으로 봉기했고, 볼셰비키가 '반란의 주모자'로 지목한 구제국 장군

"공산주의자들은 크론시타트 봉기를 백위대 음모로 보이게 만들기 위해 내 이름을 이용했다. 내가 요새에 있던 유일한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제정 러시아 포병 장교로 30년간 복무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서 시베리아 포병 여단을 지휘했다. 2월 혁명 후 예편했다가 1918년 붉은 군대에 군사전문가로 입대했고, 1920년 12월 크론시타트 요새 포병대장에 임명되었다. 1921년 3월 크론시타트 봉기 당시 봉기군의 방어를 조직했으나, 볼셰비키는 3월 2일 포고에서 봉기를 '코즐롭스키 전 장군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그를 법외자로 선언했으며, 가족과 지인 27명을 인질로 체포했다. 봉기 진압 후 8천여 명의 크론시타트 수병과 함께 핀란드로 탈출했고, 망명지에서 교사와 정비공으로 일하다 1940년 헬싱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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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블라디미르 키예프 사관생도단 입대
  • 1884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졸업
  • 1890미하일롭스키 포병아카데미 1등급 졸업
  • 1905–1912제33포병여단 제2대대장
  • 1912소장 진급; 제11시베리아 포병여단장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34군단 포병감
  • 1918–1920적군 군사전문가로 복무
  • 1920.12–1921.03크론시타트 요새 포병대장; 봉기 중 방어 지휘
  • 1921–1940핀란드 망명: 교사, 도로 노동자, 정비공

페테리스 이바노비치 스투치카

Пётр Иванович Стучка
이론가 소련 라트비아 1865–1932 ○ 자연사

계급적 법 개념을 정식화한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건설자

'법이란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이 계급의 조직된 힘, 즉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 즉 질서이다.' — 『법과 국가의 혁명적 역할』

라트비아 출신 법률가·혁명가. 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을 이끌었고, 10월 혁명 후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를 기초해 소비에트 사법의 토대를 놓았다. 1918~1920년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 1923년부터 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 파슈카니스와 공산아카데미 법학부를 창설하고 최초의 『국가와 법 백과사전』을 편집했으며, 법을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국가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로 정의한 계급적 법 개념은 초기 소비에트 법이론의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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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1888리가 김나지움 졸업,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변호사 개업
  • 1888–1897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 및 신문 『디에나스 라파』 주도
  • 1897–1903체포, 7개월 구금 후 뱟카현 5년 유형 — 풍자집 『작은 등에』 공동 집필
  • 1906RSDRP 입당, 라트비아 사회민주당 통합대회 주재 — RSDRP 지역조직으로 편입
  • 1917.10–11스몰니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연락,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 조사위원장 —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 기초
  • 1918–1920RSFSR 법무인민위원·외무부인민위원,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1918.12–1920.1)
  • 1923–1932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 코민테른 국제통제위원회 의장(1924), 『국가와 법 백과사전』 편집장(1925~1927), 소비에트법연구소 소장(1931)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마르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Марр
이론가 소비에트 그루지야 1865–1934 ○ 뇌졸중으로 사망

제국 학술원 출신으로 유일하게 공산당에 입당해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한 야페트 이론의 창시자

'언어학의 세계 규모적 정립' — 마르가 자신의 이론을 일컫던 표현이다. 그에게 모든 언어는 네 원시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언어는 계급적 상부구조였다.

그루지야 쿠타이시에서 태어난 마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카프카스 언어·고고학으로 명성을 쌓아 1912년 제국 학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혁명 후 언어를 계급적 상부구조로 보며 모든 언어가 네 원시음(sal, ber, yon, rosh)에서 비롯되었다는 '야페트 이론'을 주창, 1930년 공산당 입당과 함께 학술원 부원장이 되어 사망 시까지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했다. 그의 유사과학적 이론은 1950년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로 공식 폐기되었으며, 그 행로는 혁명기 과학과 권력의 길항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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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페테르부르크 대학 동양학부 졸업 및 강사
  • 1912제국 학술원 정회원
  • 1921야페트 연구소(후일 언어·사고 연구소) 설립
  • 1926–1930레닌그라드 공공도서관 관장
  • 1930공산당 입당 (제국 학술원 출신 최초·유일)
  • 1930–1934소련 학술원 부원장

안드레이 예브게니예비치 스네사레프

Андрей Евгеньевич Снесаре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865–1937 ○ 수용소 후유증 사망 · 1958 복권

차르 장군 출신 붉은 군대 이론가, 차리친에서 스탈린과 충돌하다

1918년 차리친에서 보로실로프에 대해 보고했다: "군대 지휘관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복무 의무에 충분히 스며들지 않았으며 부대 지휘의 기본 규칙조차 지키지 않는다." 며칠 후 그와 전 참모진은 체포되었다.

안드레이 스네사레프는 차르 군대 중장에서 붉은 군대 지휘관으로 전향한 군사 지식인이자 동양학자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장까지 오르고 1918년 붉은 군대에 합류했으나, 차리친 방어전에서 군사 전문성을 무시하는 스탈린-보로실로프와 충돌하며 해임·체포되었다. 이후 참모총장 아카데미 원장으로 3년제 정규 교육체계를 정비하고 《전쟁철학》 등 독창적 군사이론을 개척했으며, 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총장으로 소비에트 동양학의 토대를 닦았다. 1928년 소련 군 지도자 최초로 노동영웅이 되었으나, 1930년 '봄' 사건으로 사형 선고 후 10년형으로 감형, 수용소에서 뇌졸중을 겪고 1934년 석방되어 193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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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1899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과 졸업, 모스크바 보병학교 수료,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1등 졸업
  • 1900–1913투르케스탄 군관구 참모, 파미르 분견대장, 인도·아프가니스탄 군사지리학 연구, 중앙아시아 첩보 담당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연대장·여단장·사단장·군단장, 중장 진급, 성 조지 훈장 3·4등급
  • 1918붉은 군대 입대, 북카프카스 군관구 군사지도자 — 차리친 방어전에서 스탈린-보로실로프와 충돌, 체포 후 석방
  • 1919–1921노농적군 참모총장 아카데미 원장: 3년제 정규과정 정비, 《전쟁철학》 강의 개설
  • 1921–1930모스크바 동양학 연구소 총장·교수, 군사지리학 주임 지도관, 노동영웅 칭호(1928)
  • 1930–1937「봄」 사건으로 체포, 사형→10년형 감형, 수용소 뇌졸중, 1934년 석방, 1937년 사망, 1958년 복권

미하일 니콜라예비치 포크롭스키

Михаил Николаевич Покровский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68–1932 ○ 자연사 (암)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창건자이자 사후 부정된 혁명적 역사가

1920년 12월, 레닌은 포크롭스키에게 『가장 간결한 러시아사』에 대해 "구성과 접근이 독창적이며 굉장한 흥미로 읽힌다"고 썼고, 연표를 보충해 교과서로 만들라고 제안했다.

클류쳅스키의 제자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창건자로 전환한 인물로, 러시아사 전체를 계급 분석과 경제 결정론 위에 다시 세웠다. 볼셰비키로서 10월 혁명에 참여했고, 1918년부터 죽을 때까지 소비에트 학문 제도(공산주의 아카데미, 붉은 교수양성원, 이스트파르트, 레닌 연구소, 중앙기록보관소)의 골격을 구축했다. 러시아 전제정을 '모노마흐의 모자를 쓴 상업자본'으로 파악한 그의 테제는 초기 소비에트 역사교육을 규정했으나, 사후 스탈린기에 '포크롭스키 학파'라는 낙인 아래 전면 부정되어 수많은 역사가 숙청의 구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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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91모스크바대학 사학과 졸업, 클류쳅스키·비노그라도프 사사; 대학 잔류하여 교수준비생 지위
  • 1896–1905'합법적 마르크스주의'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로 전향; 1905년 RSDLP(볼셰비키) 가입, 제네바에서 레닌 첫 대면
  • 1905–1907모스크바 볼셰비키 강연단·신문 ≪보르바≫ 편집; 12월 봉기 참가; RSDLP 제5차 런던대회 대의원·중앙위 후보위원
  • 1908–1917망명: '전진파'·이후 반파벳적 입장; 1차대전 때 국제주의자로 복귀; ≪고대 이후의 러시아사≫ 5권 집필(1910–1913)
  • 1917–1918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1917.11–1918.3),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대표단 위원
  • 1918–1932계몽인민부위원(루나차르스키 대리); 고등교육·과학·기록보관소 개혁 주도; 공산주의 아카데미·적색교수양성원·이스트파르트·레닌연구소·중앙기록보관소장
  • 1920–1923≪가장 간결한 러시아사≫ 출간 — 초기 소비에트 역사교육의 표준 교재
  • 1929–1932소비에트 아카데미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정회원 선출(1929); 중앙통제위원회 상임위원(1930–1932); 암으로 사망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고리키

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Горь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68–1936 ○ 자연사

폭풍을 부르다 새장에 갇힌 바다제비

“인간 — 이 말은 자랑스럽게 울린다.” — 『밑바닥에서』(1902)

볼가의 부랑아에서 유럽이 아는 러시아 최고 작가가 되었고, 혁명 전에는 볼셰비키의 돈줄이자 양심이었다. 1917년 이후 레닌의 폭력을 공개 비판하다 사실상 국외로 밀려났지만, 스탈린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소비에트 문학의 간판으로 세웠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교부로 추대된 채 감시 속에 살다 1936년 죽었다. 독살설은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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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917부랑 노동자 출신 작가로 세계적 명성, 볼셰비키 자금 지원
  • 1917–1921『노바야 지즌』에 「제때없는 생각들」 — 혁명의 폭력을 공개 비판
  • 1921–1933요양 명목의 국외 체류(소렌토)
  • 1932–1936귀국, 작가동맹 초대 의장 —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식화

알렉산드르 그리고리예비치 슐리흐테르

Александр Григорьевич Шлихтер
농업 소련 러시아 1868–1940 ○ 자연사

첫 농업인민위원에서 우크라이나 학술원 부원장이 된 볼셰비키 농정가

1905년 10월 18일 키이우 시두마 발코니에서 수천 명 앞에서 무장봉기를 호소했다. 이 연설로 그는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1898년 입당한 노볼셰비키. 혁명 직후 최초의 농업인민위원 대행과 식량인민위원을 지내며 곡물 독점, 무장 징발, 식량분견대 체제를 주도했다. 탐보프 농민반란 진압 실패로 해임된 후 외교관으로 복귀, 1927년부터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겸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을 맡아 리센코 학설을 초기 후원했다. 소련·우크라이나·벨라루스 세 공화국 과학아카데미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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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하르키우 대학 학생 사회민주주의 서클 활동
  • 1898RSDLP 입당; 볼로그다 유형 (5년, 결핵으로 사마라 요양)
  • 1902–1905키이우 RSDLP 위원회 위원, 남서철도 파업위원회 의장; 철도노조 전국대회 의장
  • 190510월 키이우 혁명 집회 주도, 시두마 발코니 연설로 체포; 시베리아 유형 선고
  • 1907–1908RSDLP 제5차 대회(런던) 대의원; 모스크바 위원회 위원
  • 1917.11RSFSR 농업인민위원 대행 (11월 13–24일)
  • 1917.12–1918.2RSFSR 식량인민위원 — 곡물 독점과 징발 체제 주도
  • 1918–1919시베리아, 페름, 뱟카, 우파, 툴라 식량 비상위원; 우크라이나 식량인민위원
  • 1920–1921탐보프 주 집행위원장 — 농민 반란 진압 실패로 해임
  • 1922–1923소련 오스트리아 외교대표 겸 통상대표
  • 1923–1927우크라이나 외교인민위원부 전권대표 겸 합동위원
  • 1927–1929우크라이나 SSR 농업인민위원 — 농공복합단지 구상 주도
  • 1931–193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장 겸 VUAMLIN 의장

필리프 이에세예비치 마하라제

ფილიპე იესეს ძე მახარაძე
이론가 소련 그루지야 1868–1941 ○ 자연사

그루지야를 온건하게 소비에트화하려다 스탈린에게 쫓겨난 볼셰비키 원로

「그루지야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은 외국 점령의 외양을 띠었다, 나라 안에는 혁명에 가담할 준비가 된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21년 12월,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보고

그루지야 구리아 출신으로 트빌리시 신학교와 바르샤바 수의학연구소에서 수학했다. 1891년 사회민주주의에 합류해 멘셰비키 우세 지역에서 드문 볼셰비키 지도자로 활동했고, 1921년 2월 혁명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반대파에 대한 온건 노선과 그루지야 주권 유지를 주장하다 7월 스탈린에게 해임되고 므디바니로 교체되었다. 이 사건은 1922년 '그루지야 사건'의 직접적 전사이며, 이후 고스플란·인민위원회·최고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대숙청을 생존한 몇 안 되는 구볼셰비키 원로로 194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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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사회민주주의 운동에 합류
  • 1903캅카스 연합위원회 RSDLP 위원, 1905년 혁명 참여
  • 1907–1915자캅카스에서 볼셰비키 지하운동 지도
  • 1917『캅카스 노동자』 편집자, RSDLP(b) 캅카스 지역위원회 위원
  • 1918–1920멘셰비키 정부하 그루지야에서 지하활동
  • 1921.2–7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 온건 노선으로 스탈린에게 해임
  • 1922–1938그루지야 중앙집행위 의장, 인민위원회 의장, 자캅카스 고스플란 의장, 자캅카스 중앙집행위 의장
  • 1938–1941그루지야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소련 최고소비에트 부의장

판텔레이몬 니콜라예비치 레페신스키

Пантелеймон Николаевич Лепешинский
이념 · 선전 소련 벨라루스 1868–1944 ○ 자연사

당 역사 기록화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이스트파르트의 공동 창립자

어느 날 내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당시 카멘니 다리 근처 정부 청사(지금의 세라피모비치 거리)에 살고 있었다. 그의 서재 책상 옆 바닥에는 조가 흩어져 있었고, 작은 병아리들이 그것을 쪼아 먹고 있었다. 내 놀란 표정에 그가 말했다. "젊은 생명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지." — 보리스 우를라니스의 회고록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다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1897년 예니세이 유형지에서 레닌과 함께 지냈고, 이후 「이스크라」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10월 혁명 후 계몽인민위원부에서 학교 개혁을 주도했고, 1921년 당 역사 연구를 제도화한 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만년에는 역사박물관과 혁명박물관 관장을 지냈으며, 레닌의 망명 시절을 생생하게 기록한 회고록 『전환점에서』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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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6–1891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학생 혁명서클 조직, 1890년 제적, 키예프 대학 외부시험으로 졸업
  • 1895–1897「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동맹」 활동, 체포·투옥 후 예니세이 유형 — 레닌과 동일 지역
  • 1900–1905「이스크라」 대리인, 프스코프에서 신문 배포 조직, 망명 중 제네바에서 당 서고·기록보관소 설립
  • 1918–1920계몽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학교개혁 부장 — 통일노동학교 규정 초안 작성, 리트비노비치에 실험적 학교-코뮌 설립
  • 1919–1920투르케스탄 공화국 계몽부인민위원 대리, 타슈켄트에서 교원 양성과 첫 공화국 교육대회 조직
  • 1921–1924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 공동 창립자이자 부의장 — 당 역사의 제도적 연구 기반 구축
  • 1925–1927소련 MOPR(국제혁명투사원조회) 중앙위원회 의장
  • 1927–1930, 1935–1936국립역사박물관 관장, 이후 혁명박물관 관장

마리야 표도로브나 안드레예바

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Андреева
작가·예술가 소비에트 러시아 1868–1953 ○ 자연사

레닌이 '동지 페노멘'이라 부른 배우 출신 볼셰비키 재정 요원

1903년, 고위 철도 관리의 아내 신분으로 1등석 열차 칸에 경찰이 쫓는 지하운동가를 숨기고 고리키에게 5월제 선전물을 실은 여행가방을 배달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대표 여배우로 스타니슬랍스키의 무대 파트너였던 마리야 안드레예바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당의 핵심 재정 요원으로 활약했다. 사바 모로조프의 유산 등 자본가들의 거액 헌금을 레닌의 금고로 연결하는 탁월한 자금 조달 능력으로 '동지 페노멘'이라는 당내 별칭을 얻었으며, 18년간 막심 고리키의 동반자로서 그의 문학 활동과 해외 선전 여행을 물질적·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10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으로서 볼쇼이 드라마 극장을 공동 창립했고, 이후 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으로 18년간 봉직하며 혁명기 문화 제도 건설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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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898러시아 예술문학협회 배우
  • 1898–1905모스크바 예술극장 주요 여배우
  • 1904–1917RSDRP(볼셰비키) 재정 요원 — '동지 페노멘'
  • 1918–1921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
  • 1919볼쇼이 드라마 극장 공동 창립
  • 1922–1928베를린 소비에트 무역대표부 예술·영화 담당
  • 1931–1948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

나데즈다 콘스탄티노브나 크룹스카야

Надежда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Крупская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69–1939 ○ 복막염

남편의 그림자 속에서 소비에트 학교와 도서관을 만든 여성

그녀의 방은 언제나 종이 타는 냄새가 났다. 촛불에 암호 편지를 쬐어 읽고, 수백 명 지하 요원의 가명과 주소를 머릿속에 보관한 여성. —트로츠키, 『나의 삶』

레닌의 아내이자 가장 오랜 동지였지만, 단순한 배우자가 아니었다. 하급 귀족 출신으로 마르크스주의 서클에서 활동하다 1898년 슈셴스코예에서 레닌과 결혼했고, 「이스크라」지 서기로서 수백 명의 비밀 통신망을 운영하며 당의 신경계가 되었다. 혁명 후 소비에트 교육의 총설계자로서 리크베스 문맹 퇴치, 통합노동학교, 공공도서관망을 구축했으며, 교육을 인민의 자기 해방으로 보는 관점을 견지했다. 1925년 신반대파에 가담했다 철회했고, 아동문학에 대한 교조적 접근은 복합적인 유산을 남겼다. 70세 생일 이튿날 복막염으로 사망,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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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오볼렌스카야 여성 김나지움 금메달 졸업
  • 1889–1890베스투제프 여성 고등과정 수학, 마르크스주의 서클 가입
  • 1891–1896페테르부르크 넵스카야 자스타바 성인 야간학교 교사, 노동자 선전 활동
  • 1898슈셴스코예 유형지에서 레닌과 결혼, RSDLP 입당
  • 1901–1905뮌헨·런던 망명, 「이스크라」지 서기
  • 1905–1907러시아로 귀환,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서기
  • 1911롱쥬모 당학교 교사, 여성지 「라보트니차」 창간 참여
  • 1917–192010월 혁명 참여, 콤소몰·피오네르 조직 설계, 글라브폴리트프로스베트 의장
  • 1924–1927중앙통제위원회 위원, 1925년 14차 당대회에서 '신반대파' 지지 후 철회
  • 1927–1939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29–1939RSFSR 계몽인민부위원, 소비에트 교육·도서관·검열 정책 주도
  • 1931소련 과학아카데미 명예회원, 교육학 박사학위 취득
  • 1937소비에트 최고회의 제1기 대의원, 최고회의 간부회 위원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비노쿠로프

Александр Николаевич Винокур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869–1944 ○ 자연사

소련 최고재판소 초대 의장, 14년간 사법부를 이끈 의사 출신 볼셰비키

1918년 8월 30일, 레닌이 총격을 당해 크렘린으로 이송되자 비노쿠로프가 응급처치를 했다. 의대를 나온 혁명가가 6년 후 소련 사법부의 정점에 오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의학을 공부한 볼셰비키 법률가로, 1924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최고재판소 초대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사법 체계의 기틀을 세웠다.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혁명 1세대로, 1893년 모스크바 사회민주주의 조직을 공동 창립하고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시두마의 첫 볼셰비키 의장을 지냈다. 1918년 레닌 피격 직후 응급처치를 한 의사였으며, 1918–1921년 러시아 사회보장인민위원으로 복지 행정의 초석을 놓았다. 최고재판소 의장 재임기간 내내 비신스키·크릴렌코와 사법 통제권을 놓고 경쟁했고, 법의 규칙성을 중시했으나 대숙청에 제도적으로 연루되었다. 1938년 해임 후 보건인민위원부 위생교육 부서로 밀려났고, 1944년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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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902모스크바·예카테리노슬라프 사회민주주의 조직 공동 창립; 체포·독방·유배
  • 1903–1917볼셰비키 당원; 예카테리노슬라프·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 활동, 「보험문제」지 편집
  • 1917.10첫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시두마 의장; 노동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 1918–1921러시아 사회보장인민위원
  • 1921–1924기근구제위원회 및 기근후속대책위원회 위원
  • 1924–1938소련 최고재판소 의장
  • 1938–1944보건인민위원부 위생교육부장; 메드기즈 근무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Владимир Ильич Ленин
당 최고 지도자 소련 러시아 1870–1924 ○ 병사

갈림길마다 방향을 바꾼 조타수

1917년 4월 3일 밤, 핀란드역.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은 장갑차 위에 올라 「사랑하는 동지들, 군인·수병·노동자들이여!」라고 외쳤다. 사회주의 혁명 만세로 끝맺은 그 순간, 당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었다.

1917년 4월에는 모두가 미쳤다던 테제로 당을 뒤집었고, 10월에는 봉기를 밀어붙였으며, 1918년 브레스트에서는 회의실에서 가장 신중한 후퇴파였고, 1921년에는 네프로 다시 후퇴했다. 확신과 유연함의 그 결합은 복제되지 못했다. 1922년부터 뇌졸중이 그를 삼켰고, 마지막 구술은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옮기라는 경고였다. 경고는 봉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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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00체포, 시베리아 유형
  • 1900–05이스크라, 『무엇을 할 것인가』, 볼셰비키 분파 형성
  • 1902《무엇을 할 것인가?》 출간
  • 1909《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간
  • 1914–17치머발트 좌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 1916《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집필·출간
  • 1917.4귀국, 4월 테제
  • 1917.10봉기 관철,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18–21브레스트 강화, 내전, 전시공산주의
  • 1918《국가와 혁명》 출간(1917년 집필)
  • 1921네프로의 후퇴
  • 1922–24뇌졸중, 「대회에 보내는 편지」 구술

나리만 나자프 오글루 나리마노프

Нариман Наджаф оглы Нариманов
국가원수 소련 아제르바이잔 1870–1925 ○ 심장마비

계몽 문학에서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수장으로

1906년 교사 대회에서 석유왕 타기예프가 장학금을 들먹이며 입을 막으려 하자, 나리마노프는 즉석에서 장학금을 포기하며 말했다. "비열한 금속 때문에 침묵하지 않겠다. 동지들이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되려 피를 흘리는 이때에."

교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나리마노프는 바쿠에 공공 독서실을 열고 아제르바이잔 사실주의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남겼다. 1905년 훔메트에 합류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끈 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중앙집권적 민족정책과 충돌했으며, 1925년 사망 후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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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보르찰리현 키질-아질리 마을 교사
  • 1891–1902바쿠 사립 김나지움 교사, '나리마노프 독서실' 설립·운영 (1894)
  • 1895–1899희곡 「무지」(1895), 소설 「바하두르와 소나」(1896), 비극 「나디르 샤」(1899) 발표, 고골의 「검찰관」 번역·공연 (1896)
  • 1905무슬림 사회민주주의 조직 '훔메트' 가입
  • 1908노보로시스크 대학 의학부 졸업, 의사 면허 취득
  • 1909–1914체포되어 아스트라한으로 5년 유배, 그곳에서 의사·연극인·민중대학 평의회 의장으로 활동
  • 1917바쿠 볼셰비키 위원회 위원, 신문 「훔메트」 편집자
  • 1918바쿠 인민위원회 도시경제 담당 인민위원
  • 1919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부 근동부장
  • 1920–1922아제르바이잔 혁명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의장, 외무인민위원 겸임 (1920–1921)
  • 1922자카프카스 SFSR 연방평의회 의장 (3월~12월), 제노바 국제회의 소비에트 대표단 참가
  • 1922–1925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 국가원수 중 1인
  • 1923–1925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레오니트 보리소비치 크라신

Леонид Борисович Красин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70–1926 ○ 백혈병

혁명의 기술자에서 소비에트 외교의 설계자로, 서구 자본과 거래할 줄 알았던 유일한 볼셰비키

1893년, 젊은 크라신은 톨스토이를 찾아가 혁명의 필연성을 설파했다. 비폭력을 설교하던 대문호는 격노하여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고 동석했던 아내 류보비는 기록했다.

차르 치하의 시베리아 유형에서 지멘스-슈케르트 러시아 총책임자로, 다시 소비에트 국가의 초대 대외무역인민위원으로, 크라신의 궤적은 볼셰비키 안에서도 독보적이었다. 1905년 혁명기에는 전투기술단을 지휘하며 무기 조달·자금책을 맡았고 바쿠 지하 인쇄소 '니나'로 《이스크라》를 찍어냈다. 1909년 정계에서 물러나 기술자로 복귀, 지멘스의 러시아 총대표까지 올랐다가 1918년 레닌의 부름으로 귀환했다. 대외무역 독점 체제와 1921년 영소통상협정을 주도한 서구 비즈니스계 유일의 고위 볼셰비키로, 레닌은 그를 당내 가장 유능한 실무 조직가로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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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7RSDLP 중앙위원회 위원
  • 1905RSDLP 중앙위원회 전투기술단 책임자
  • 1913–1917지멘스-슈케르트 러시아 총대표
  • 1918–1920RSFSR 통상산업인민위원
  • 1919–1920RSFSR 교통인민위원
  • 1920–1925소련 대외무역인민위원
  • 1921–1923RSFSR·소련 전권대표 (영국)
  • 1924–1926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비치 추루파

Александр Дмитриевич Цюрупа
중앙계획 기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870–1928 ○ 심장마비

식량독재를 설계하고 스스로 굶주린 인민위원

곡물 징발을 지휘하러 가는 열차 안에서 추루파는 굶주림으로 쓰러졌다. 식량인민위원이 굶어 실신했다는 소식은 레닌조차 놀라게 했고, 그의 봉급을 두 배로 올리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1898년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로, 내전기 RSFSR 식량인민위원으로서 곡물 징발제(프로드라즈베르스트카)와 무장 식량분견대를 주도하여 적군과 도시의 기아를 막았다. 1918년 5월 식량 독재 법령을 입안해 농촌 강제 징발을 국가 체계로 정비했다. 네프 도입 후 인민위원회의 부의장·고스플란 의장·무역인민위원을 지내며 전시 공산주의에서 계획경제로의 이행을 실무적으로 관리했다. 혁명의 '병참 책임자'로서 소비에트 국가 동원 체제의 행정 토대를 놓은 집행형 관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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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898헤르손 농업학교 제적 후 통계사·농업기사, 사회민주주의 선전 활동
  • 1898RSDLP 입당, 이스크라 요원으로 우파·하르코프에서 활동
  • 1902–1905체포되어 올로네츠현으로 유형
  • 1905–1917우파현에서 쿠구셰프 공작 영지 관리인으로 위장한 볼셰비키 지하 활동
  • 1917우파 RSDLP(b) 위원·시두마 의장, 페트로그라드로 곡물 열차 수송 조직
  • 1918–1921RSFSR 식량인민위원 — 식량 독재·곡물 징발제·무장 식량분견대 주도
  • 1921–1923RSFSR·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
  • 1923–1925소련 고스플란 의장
  • 1925–1926소련 대외·국내무역인민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