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940

혁명 세대 266명

10월 혁명을 만들고 초기 소비에트 국가를 세운 세대, 다수는 훗날 그 혁명의 이름으로 스러졌다.

모이세이 일리치 프룸킨

Моисей Ильич Фрумкин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78–1938 ✕ 총살

'시골이 우리를 등졌다', 당에 직언한 재정 부인민위원

'시골은 소수의 빈농을 제외하고 우리를 반대하고 있다.' 1928년 6월 15일, 재정 부인민위원 프룸킨이 정치국에 보낸 편지의 한 구절. 이 한 문장이 우편향 탄압의 신호탄이 되었다.

1898년 분트를 거쳐 볼셰비키에 합류한 구파 혁명가로, 내전기 식량인민위원부에서 일하고 네프기에는 대외무역·재정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28년 6월, 곡물 조달을 위한 강제 조치가 한창이던 때 정치국에 보낸 편지에서 '시골은 소수의 빈농을 제외하고 우리를 반대하고 있다'고 쓰며 스탈린의 농촌 정책이 노농동맹을 파탄내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 한 통의 편지로 당내 '우편향' 제1호 피의자가 되었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되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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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분트 가입, 이어 RSDLP 가입
  • 1909–1911모스크바 중앙노조사무국 의장
  • 1911–1917예니세이현 유형
  • 1918–1922식량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식량 부인민위원
  • 1922–1928대외무역 부인민위원
  • 1928–1929재정 부인민위원
  • 1928–1930'우편향' 참여자로 지목, 첫 공식 비판 대상
  • 1932–1935대외무역 부인민위원 (복귀)
  • 1935–1937소유즈플라스트마스 트레스트 관리자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유롭스키

Яков Михайлович Юровский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878–1938 ○ 위궤양 천공

마지막 차르를 손수 사살한 체카 집행자

니콜라이에게 말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당신을 사살하기로 결정했다고. 그가 "뭐라고?" 하며 알렉세이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그를 쏘아 즉사시켰다.

톰스크 현의 유대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시계공이 되었고,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8년 7월 이파티예프 하우스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을 직접 지휘하고 차르를 자신의 마우저 권총으로 사살했으며, 시신의 은닉과 훼손까지 진두지휘했다. 내전 후 예카테린부르크 현 체카 의장과 모스크바 구역 체카 책임자를 역임했고, 1921년부터 국가귀금속보관소(Gokhran) 금 부서장으로 일하며 부패 척결에서 신망을 얻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 폴리테크닉 박물관장을 지냈으며, 대숙청 와중에 딸 리마가 트로츠키주의자로 체포된 직후인 1938년 위궤양 천공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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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톰스크에서 볼셰비키 입당
  • 1912체포되어 예카테린부르크로 유배; 사진관 개업
  • 1917예카테린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군사부에서 골로쇼킨의 부관
  • 1918이파티예프 하우스 사령관; 7월 17일 로마노프 일가 처형 지휘
  • 1918–1919모스크바 체카 콜레기움 위원, 구역 체카 책임자
  • 1919예카테린부르크 현 체카 의장
  • 1921국가귀금속보관소(Gokhran) 금 부서장
  • 1928–1933폴리테크닉 박물관장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케드로프

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Кедр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878–1941 ✕ 처형

체카 특별부를 이끌며 북부 적색테러와 최초의 강제수용소 체계를 구축한 올드 볼셰비키

“저는 결백하게 고통받고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시간이 증명할 것입니다.” — 1939년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안드레예프에게 보낸 편지. 1956년 흐루쇼프가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에서 이 편지를 낭독했다.

볼셰비키 군사조직에서 활동하다 1918년 9월 체카 군사부장, 이후 특별부장이 되어 북부 전선의 적색테러를 총괄했다. 아르한겔스크·볼로그다에서 수천 명을 처형하고, 홀모고리 절멸수용소를 세웠으며, 솔로베츠키 수도원을 폐쇄해 초기 강제노동수용소로 전환했다. 그의 아내 올가의 자매들은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와 결혼했고 아르투르 아르투조프의 어머니였다. 1921년 건강 악화로 체카를 떠난 뒤 경제·보건·스포르틴테른 등 변방 직책을 전전하다 1939년 체포되었고, 1941년 7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베리야의 지시로 석방되지 못한 채 사라토프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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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RSDDP 가입, 코스트로마 노동자대 조직, 모스크바 봉기 무기 공급
  • 1912–1916스위스 망명, 의학 학위 취득, 레닌의 측근
  • 1917군사조직 위원, 『솔다츠카야 프라브다』 편집, 군 해산 인민위원
  • 1918.9–1919체카 군사부장 → 특별부장 (내전기 군내 숙청 총괄)
  • 1920–1921체카 북부 전권대표: 홀모고리·페르토민스크·솔로베츠키 수용소 설립
  • 1927–1931적색스포츠인터내셔널 의장
  • 1939–1941체포·고문, 무죄 판결에도 석방되지 않고 총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당 최고 지도자 소련 그루지야 1878–1953 ○ 자연사

「조용한 실무가」로 보였던 사람

1941년 6월 22일 새벽, 주코프가 독일 침공을 알렸을 때 스탈린은 창백한 얼굴로 빈 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몰로토프가 선전포고를 전하자 그는 말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 길고 무거운 침묵.

1917년에는 조연이었고 1924년에는 위험해 보이지 않는 서기장이었다. 그 「실무」, 곧 인사권이 권력의 본체임을 라이벌들은 너무 늦게 알았다. 집단화와 공업화, 대숙청과 굴라크, 그리고 전쟁의 승리가 모두 한 장부에 적혀 있다. 1953년 뇌일혈로 쓰러졌을 때, 곁의 누구도 감히 먼저 의사를 부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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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7지하활동, 체포·유형을 거듭하다 1917년 프라우다로
  • 1913논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발표
  • 1917–22민족인민위원, 내전기 차리친 전선
  • 1922서기장 취임, 인사권 장악
  • 1924강연집 《레닌주의의 기초》 출간
  • 1928–33대전환, 집단화·5개년 계획
  • 1936–38대숙청
  • 1941–45국가방위위원회 의장·최고사령관
  • 1945–53전후 재건과 냉전, 1953년 3월 사망
  • 1952《소련 사회주의의 경제문제》 출간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페트롭스키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Петровский
국가원수 소련 우크라이나 1878–1958 ○ 자연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원수, 드니프로페트롭스크의 이름이 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1915년 2월, 차르 법정은 페트롭스키에게 모든 권리 박탈과 투루한스크 종신 유형을 선고했다. 반전 연설을 한 노동자 의원에게 내려진 형벌이었다.

하리코프현 재단사의 아들로 열한 살부터 노동한 볼셰비키다. 국가두마 노동자 의원(1912)으로 반전 연설로 유형되었고, 10월 혁명 후 내무인민위원으로 체카 창설에 참여했다. 1919년부터 1938년까지 우크라이나 SSR 국가원수로 소련 창설 조약에 서명했고 정치국 후보위원을 지냈다. 대숙청에서 살아남았으나 1939년 해임되어 혁명박물관 부관장으로 여생을 보냈다. 예카테리노슬라프는 1926년 그의 이름을 따 드네프로페트롭스크가 되어 2016년까지 유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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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898예카테리노슬라프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 가담,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00–1903두 차례 체포·투옥, 1905년 예카테리노슬라프 소비에트 서기
  • 1912–1914제4대 국가두마 볼셰비키 노동자 의원, 32회 연설
  • 1914–1917반전 활동으로 체포, 투루한스크 종신 유형
  • 1917.11–1919.03내무인민위원: 체카 창설 참여, 적색 테러 지령 서명
  • 1919–1938전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우크라이나 SSR 국가원수)
  • 1922–1938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 (우크라이나 대표)
  • 1926–1939정치국 후보위원
  • 1939–1940모든 직위에서 해임, 1년간 실직
  • 1940–1958모스크바 혁명박물관 부관장

예브게니야 보그다노브나 보시

Евгения Богдановна Бош
좌익 반대파 소련 독일 1879–1925 ✕ 자살

첫 여성 소비에트 정부 수반, 혁명과 병마 사이에서

독일군이 키예프로 진격하자 동료들은 철수를 결정했지만, 보시는 싸우지 않고 도시를 넘길 수 없다며 버텼다. 결국 그녀는 말 그대로 강제로 대피시켜야 했다.

독일계 볼셰비키로, 1917년 우크라이나 인민사무국 서리를 맡아 여성 최초로 소비에트 정부를 이끌었다. 망명 시절 레닌의 민족문제 노선에 맞섰고, 좌익 반대파 46인 선언에 서명했으며 투병 끝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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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 가입, 볼셰비키 분파 활동
  • 1907–1911키예프에서 지하혁명운동, 키예프 위원회 서기
  • 1912–1914체포, 시베리아 유형, 탈출·망명
  • 1914–1917스위스 망명, '보지 그룹'으로 레닌과 민족문제 논쟁
  • 1917.04–07남서지역 당위원회 의장, 제6차 당 대회 대표
  • 1917.12–1918.03우크라이나 인민사무국 서리 겸 내무인민비서
  • 1918–1919펜자 당위원회 의장, 카스피-캅카스 전선 정치위원
  • 1923–1924좌익 반대파 합류, 46인 선언 서명

글레프 이바노비치 보키

Глеб Иванович Бокий
국가보안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79–1937 ✕ 처형 · 복권 1956

소련 신호정보의 아버지, 체카 스페츠오트델 창설자

경찰이 압수한 그의 수학 공책을 가리키며 "이게 암호라면 풀어 보시지"라고 조롱했다. 차르 비밀경찰은 끝내 해독하지 못했다.

구 러시아 제국 말기 지하혁명운동에서 암호 작성술을 익힌 올드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과 동부·투르케스탄 전선 특별부장을 거쳐 1921년 체카 산하 스페츠오트델(Спецотдел)을 직접 기획·창설하여 1937년까지 이끌며 소련의 통합 암호·도청·무선정보 체계를 구축했다. 국가기밀 보호, 외교공관 도청 및 암호 해독, 무선 펠렌게이션, 최초의 정부보안통신망을 한 부서 아래 통합한 공로로 소련 신호정보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한편 솔로프키 특수수용소(SLON)의 큐레이터로서 굴라그 체계 초기 형성에도 관여했으며, 밀교와 티베트 탐사에 경도된 이력이 후일 기소의 빌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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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RSDLP 입당, 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지하조직 활동
  • 1904–1909RSDLP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
  • 1917.04–1918.03RSDLP(b) 페트로그라드 시위원회 서기
  • 1918.03–08북부지역·페트로그라드 체카 부의장
  • 1918.08–11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 1919.01–09동부전선 체카 특별부장
  • 1919.09–1920.08투르케스탄 전선 체카 특별부장
  • 1921–1937체카·GPU·OGPU·GUGB NKVD 스페츠오트델(제9부) 국장
  • 1923–1934OGPU 콜레기야 위원
  • 1935국가보안 3등급 정치위원

야코프 스타니슬라보비치 가네츠키

Яков Станиславович Ганецкий
경제 운영 소련 폴란드 1879–1937 ✕ 처형

크라쿠프에서 스톡홀름까지 레닌의 돈줄을 책임진 폴란드 혁명가

1917년 4월 13일, 스톡홀름 역. 파르부스가 봉인열차로 도착한 레닌을 기다렸다. 레닌은 직접 만나기를 거부하고 가네츠키를 중간에 세웠다. 파르부스가 물었다: "평화가 필요하다. 그가 무엇을 하려는가?" 가네츠키가 전하자 레닌은 답했다: "나는 외교에 관심 없다. 나의 임무는 사회혁명적 선동이다."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 혁명가로 SDKPiL 창립에 참여하고 레닌의 측근이 되어 볼셰비키의 지하 자금 네트워크를 운영했다. 1차대전기 파르부스와 코펜하겐·스톡홀름에 무역회사를 설립해 전시 상품 무역 이익을 혁명 자금으로 전환했으며, 이 경로는 독일 자금 논쟁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10월 혁명 후 국유은행 부총재와 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로 소비에트 금융체제 구축에 기여했고, 라트비아 전권대표와 카르스 조약 서명으로 외교 무대에도 진출했다. 말년에는 혁명박물관장을 지내다 대숙청 속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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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12SDKPiL 창립 참여, 당 주간부, RSDLP 중앙위원 후보
  • 1912–1915레닌의 크라쿠프 이주 주선, 최측근 보좌
  • 1915–1917코펜하겐·스톡홀름에서 파르부스와 무역회사 운영, 볼셰비키 자금 조달
  • 1917–1920국유은행 부총재(인민은행장 대행), 재정부 인민위원, 고흐란 국장
  • 1920–1923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 카르스 조약 서명, 외교·대외무역 인민위원부 근무
  • 1923–1935대외무역인민위원부 간부, 최고경제회의 상임위원, GO-MEZ 국장
  • 1935–1937모스크바 혁명박물관 관장
  • 1937NKVD 체포, 15분 재판 후 총살형, 1954년 사후 복권

이오시프 스타니슬라보비치 운쉴리흐트

Иосиф Станиславович Уншлихт
국가보안 기관 소련 폴란드 1879–1938 ✕ 처형

체카 부의장에서 민간항공까지: 혁명의 전천후 조직가

1938년 7월 28일, 군사재판에서 운쉴리흐트는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을 전면 번복했다. "나는 '폴란드 군사조직'에 가담한 적이 없다. 모든 진술은 장기간의 심문을 견딜 수 없어서 한 것이다." 재판은 20분 만에 끝났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으로 바르샤바에서 전기 기술을 공부하고 1900년 SDKPiL에 입당했다. 10월 혁명 당일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봉기를 지휘했고 제헌의회 의원이 되었다. 1921년 체카·GPU 부의장으로 보안 기관의 초기 체계를 세웠고 1922년 '철학의 배' 지식인 추방을 주도했다.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고스플란 부의장, 민간항공총국장을 지내며 안보·국방·산업의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 1937년 '폴란드 작전'으로 체포되어 법정에서 자백을 번복했으나 사형을 선고받고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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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SDKPiL 입당, 이후 RSDLP 볼셰비키 분파 합류
  • 1900–1917여섯 차례 체포, 차르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제헌의회 의원
  • 1917–1918내무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프스코프 전선
  • 1919리투아니아-벨로루시 SSR 군사인민위원
  • 1920서부전선·제16군 혁명군사평의회,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 1921–1923체카·GPU 부의장, 능동정찰 특별국, 지식인 추방
  • 1925–1930소련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육해군 부인민위원
  • 1927–1930오소아비아힘 의장
  • 1930–1933고스플란 부의장 (군수공업)
  • 1933–1935민간항공총국장
  • 1935중앙집행위원회 연방회의 서기 직무대행

레프 다비도비치 트로츠키

Лев Давидович Троцкий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879–1940 ✕ 암살 · 멕시코

적군(赤軍)을 만든 웅변가, 얼음도끼에 스러지다

1917년 10월 25일,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의원들이 볼셰비키의 무장봉기를 규탄하며 회의장을 걸어나가자, 트로츠키는 의장석에서 그들의 뒷모습을 향해 선언했다. 「당신들은 파산자입니다. 당신들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이제 가야 할 곳으로 가시오 —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1905년 26세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1917년 10월 봉기의 연출가, 내전에서는 장갑열차를 타고 다니며 적군을 벼려 낸 전쟁인민위원. 영구혁명론으로 러시아 혁명이 유럽 노동계급의 승리 없이는 완성될 수 없다고 주장했고,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에 맞선 좌익반대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당 기구의 조용한 싸움에서는 번번이 늦었다. 1929년 국외로 추방되어 제4인터내셔널을 세웠고, 1940년 멕시코시티의 서재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의 얼음도끼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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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26세에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 1906《결과와 전망》 출간 — 영구혁명론의 초기 정식화
  • 1907–14망명: 빈·파리에서 언론 활동, 《프라우다》 발행
  • 1914–171차대전 반대, 파리·뉴욕 망명, 《나셰 슬로보》·《노비 미르》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볼셰비키·멘셰비키 통합파
  •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에 합류
  • 1917.9–10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군사혁명위, 봉기 설계
  • 1918–25전쟁인민위원, 적군 창설, 내전 승리
  • 1923–27좌익반대파, 패배, 출당
  • 1929–40국외 추방, 제4인터내셔널(1938), 멕시코에서 암살
  • 1930자서전 《나의 생애》 출간
  • 1930–1932전3권 《러시아 혁명사》 출간
  • 1936《배반당한 혁명》 출간

미하일 아르테미예비치 무라비요프

Михаил Артемьевич Муравьёв
좌익 반대파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 1880–1918 ✕ 봉기 중 사살

짜르 장교에서 붉은 사령관으로: 키예프를 점령하고 브레스트 조약에 반대해 봉기한 좌파 에스에르

키예프 점령 후 레닌에게: "포병대에 고층 건물과 부유한 궁전, 교회와 사제들을 향해 포격하라고 명령했다."

러시아 제국군에서 복무한 농민 출신 장교로, 1917년 좌파 사회혁명당에 합류하여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 방어를 지휘했다. 1918년 초 키예프를 점령해 우크라이나에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고 루마니아 전선에서 베사라비아 방어 작전을 이끌며 적군의 주요 군사 지휘관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1918년 7월 동부전선 사령관으로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반대해 봉기, '독일과의 전쟁 재개'를 선언했다가 심비르스크에서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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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17러시아 제국군 복무; 러일전쟁·제1차 세계대전 참전, 중령까지 진급
  • 1917.10–11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케렌스키-크라스노프 군대 방어 지휘
  • 1917.12–1918.2남부혁명전선 참모장, 키예프 점령 작전 지휘
  • 1918.2–3루마니아 전선 사령관, 베사라비아 방어 및 오데사 소비에트 공화국 지휘
  • 1918.6–7동부전선 사령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반대 봉기 후 심비르스크에서 사살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블로크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лок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80–1921 ○ 병사

10월 혁명을 받아들인 러시아 상징주의의 대표 시인

『열둘』을 완성한 뒤 일기에 '오늘 나는 천재다'라고 적었다.

러시아 은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상징주의를 이끈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10월 혁명이 낳은 최대의 문학 작품 『열둘』(1918)을 써서 열두 적위대의 눈보라 행진 앞에 그리스도를 세웠다. 볼셰비키 집권 후 루나차르스키의 소집에 응한 단 다섯 명의 기성 문인 중 한 명으로, 임시정부의 차르 대신 조사위원회에서 일했고 소비에트 문화 기관에서 활동했다. 혁명에의 헌신은 상징주의 독자들을, 신비주의는 볼셰비키 비평가들을 멀어지게 했고, 1921년 '모든 소리가 멈췄다'며 창작의 침묵에 빠졌다. 치료 목적의 출국 비자가 거부된 채 마흔으로 사망했고, 고리키는 루나차르스키에게 정권이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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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첫 시집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시』 출간
  • 1906희곡 『꼭두각시극』 발표
  • 1917임시정부 차르 대신 특별조사위원회 편집자
  • 1918『열둘』과 『스키타이인』 발표, 사회주의 아카데미 참여
  • 1921푸시킨 추모 연설 「시인의 소명에 관하여」

미하일 파블로비치 톰스키

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Томский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80–1936 ✕ 자살

노동조합의 얼굴, 우편향의 세 번째 남자

「해외에서는 우리가 일당제라 비난한다. 틀렸다. 우리에겐 여러 정당이 있다. 단 하나가 집권하고 나머지는 감옥에 있을 뿐이다.」 — 1922년 제11차 당대회, 톰스키가 던진 이 말에 회의장은 폭풍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

소비에트 노동조합 운동의 확고한 지도자로, 정치국 내 유일한 진짜 노동자 출신이었다. 레닌 시대에 전연방 중앙노조협의회 의장과 정치국 위원을 지내며, 1920–1921년 노조 논쟁에서 트로츠키의 노조 군사화 방안에 맞서 노조의 자율성을 옹호했다. 네프의 급진적 폐기에 맞서 부하린·리코프와 함께 '우편향'을 형성했으나 1929년 실각했고, 그 몰락은 독자적 노조 운동의 종말을 상징했다. 1936년 8월, 지노비예프-카메네프 재판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체포를 기다리지 않고 다차에서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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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05볼셰비키 입당, 레벨(탈린) 소비에트 조직
  • 1907–1916런던 당대회 대의원, 카토르가와 유형
  • 1917페트로그라드 위원회, 모스크바 무장봉기 연락
  • 1918–1929전연방 중앙노조협의회(VTsSPS) 의장
  • 1922–1930정치국 위원
  • 1929부하린·리코프와 함께 '우편향'으로 실각
  • 1929–1932전연방 화학공업협회 의장, 최고인민경제회의 부의장
  • 1932–1936국가합동출판사(OGIZ) 책임자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크라스노쇼코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Краснощёков
경제 운영 소비에트 러시아 (우크라이나 출생, 유대인) 1880–1937 ✕ 처형 · 1956년 복권

극동공화국을 설계한 실용주의 볼셰비키

크라스노쇼코프가 병으로 해임된 후, 레닌몰로토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항의했다. "우리는 이 사람을 괴롭혀왔다 —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두뇌와 에너지, 지식과 경험을 가진 사람인데도 말이다."

극동공화국의 초대 수반(1920~1921)이자 소비에트 초기 혼합경제 실험의 핵심 설계자. 1902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노동운동 변호사로 활동하다 1917년 러시아로 돌아와 곧바로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내전기 일본군 철수를 위해 레닌을 설득해 완충국 극동공화국을 수립했으며, 직접 영어로 헌법을 기초하고 수상 겸 외무장관으로서 일본과의 고고타 협정을 성사시켰다. 이후 재무부인민위원, 최고경제회의 간부를 거쳐 산업은행(Промбанк)을 설립해 네프 시기 산업금융의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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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키예프에서 불법 마르크스주의 그룹 가입
  • 1902독일로 망명, 1903년 미국 이주
  • 1912시카고대학 법학부 졸업, 노동변호사 개업
  • 1917–1918블라디보스토크·니콜스크-우수리스크 소비에트 지도자, 극동인민위원회의 의장
  • 1920–1921극동공화국 정부 주석 겸 외무장관
  • 1921–1922RSFSR 재무인민위원회 부인민위원
  • 1922–1923최고경제회의 간부회의 위원 · 산업은행(Промбанк) 설립 및 초대 총재
  • 1923도브롤료트(Добролёт) 초대 이사회 의장
  • 1924–1925부패 혐의로 체포·6년형 선고, 이듬해 사면
  • 1926–1937농업인민위원회 신규인피작물 총국장, 섬유작물 연구소장

니콜라이 일리치 포드보이스키

Николай Ильич Подвойский
군사 · 국방 소련 우크라이나 1880–1948 ○ 심장마비

10월 무장봉기의 작전사령관, 혁명 뒤엔 뒷방으로

"자네, 내 고집이 얼마나 센지 알지? 내 말 잘 듣고, 나중에 안 하면 돼. 대신 전부 받아 적어." 1927년 영화 『10월』의 고증을 지도하며 예이젠시테인에게.

시골 사제의 아들로 신학교를 중퇴하고 볼셰비키에 합류한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는, 1917년 군사혁명위원회 작전트로이카를 이끌며 10월 무장봉기와 겨울궁전 습격을 현장에서 지휘했다. 초대 군사인민위원이 되었으나 4개월 만에 트로츠키에게 밀려났고, 내전 시기에는 브세보부치(보편군사훈련)를 조직했다. 적성과 적기훈장의 창안자이며, 이후 스포르틴테른 의장으로 대중 체육에 헌신했다. 스탈린 시대에 철저히 주변화되었으나 숙청을 살아남아 회고록을 썼고, 61세에 모스크바 방어 참호를 자원하여 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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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5RSDLP 입당·볼셰비키 합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파업·소비에트 지도
  • 1906–1916망명·지하출판; 『즈베즈다』·『프라우다』 창간 참여; 중앙위 러시아국 뷰로 재무위원장
  • 1917.3–10페트로그라드 볼셰비키 군사조직 책임자; 군인신문 편집; 적위대 조직
  • 1917.10VRK 작전트로이카 위원·부의장; 무장봉기·겨울궁전 습격 현장 지휘
  • 1917.11–1918.3초대 군사인민위원; 적군 편성 전러시아 콜레기야 의장
  • 1918–1919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우크라이나 군사인민위원
  • 1920–1927스포르틴테른 의장·최고체육평의회 의장 — 혁명가에서 체육행정가로
  • 1935–1948개인연금자; 회고록 집필·선전활동; 1941년 모스크바 방어 참호 자원

뱌체슬라프 알렉세예비치 카르핀스키

Вячеслав Алексеевич Карпинс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80–1965 ○ 자연사

레닌의 신임을 받은 볼셰비키 언론인, 68년 당원

1917년 1월, 레닌이 올가 라비치에게 격앙된 편지를 쓰자 카르핀스키는 "이건 욕설입니다"라고 직언했다. 레닌은 후일 이네사 아르만트에게 "카르핀스키가 내 편지를 욕설이라고 하더군. 사과 편지를 써야겠어"라고 털어놓았다.

1898년 입당한 최고참 볼셰비키로, 제네바 망명 시절 레닌 직속에서 당 기관지를 편집했다. 혁명 후 《베드노타》 편집장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선전부장으로 농민·대중 선전의 제도적 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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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898펜자에서 중등학생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선전 활동
  • 1898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7세)
  • 1899–1902하리코프대학 의학부에서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조직, 체포·유형
  • 1904–1917제네바 망명, 레닌 지도 아래 《전진》·《프롤레타리》·《사회민주주의자》 편집
  • 1917–1918귀국, 《농촌의 진리》 편집,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선전교도부장
  • 1918–1922《베드노타》 편집장, 선전선 '붉은 별' 호에서 신문 발행
  • 1918–1927《프라우다》 편집위원,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1~7기 위원
  • 1936–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기구에서 근무
  • 1937–1965학술·문필 활동 전념, 레닌·당사 연구, 경제학 박사, 사회주의노동영웅(1962)

세라피마 일리이니치나 고프네르

Серафима Ильинична Гопнер
코민테른 소련 러시아 1880–1966 ○ 자연사

볼셰비키 최초로 우크라이나 당을 이끈 여성, 코민테른 7개 전 대회 대표

1917년 2월, 예카테리노슬라프. 혁명의 소식은 '전신으로' 도시에 도착했다고 고프네르는 회고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지 1년도 안 된 시점, 그녀는 곧바로 볼셰비키 위원회와 신문 《즈베즈다》 편집실로 달려갔다.

우크라이나 공산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볼셰비키. 1903년 입당 이래 지하운동·내전·코민테른 무대를 가로지르며 활동했고, 7개 전 대회 대표를 지냈다. 대숙청을 넘기고 역사학자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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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오데사에서 비합법 사회민주주의 서클 활동 시작
  • 1903RSDRP 가입, 볼셰비키 파벌에 합류
  • 1905예카테리노슬라프 당위원회 위원, 이후 서기
  • 1910–16프랑스 망명: 파리 볼셰비키 그룹, 프랑스 사회당, 베른 여성 사회주의자 회의
  • 1916–17러시아 귀환, 이르쿠츠크·예카테리노슬라프·브랸스크 지하 활동, 《즈베즈다》 편집
  • 191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당을 이끈 최초의 여성
  • 1919–20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제12군 정치국 강사과정 책임자
  • 1920–25예카테리노슬라프·모스크바·도네츠크·하르키우 주당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5–27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여성부 출판분과장
  • 1927–3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전우크라이나 프롤레타리》 편집장, 《콤무니스트》 부편집장
  • 1928–43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후보위원, 7개 전 대회 대표
  • 1938–45《이스토리체스키 주르날》 부편집장
  • 1945–66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사학 박사
  • 1960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 수여

세묜 이바노비치 아랄로프

Семён Иванович Арало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880–1969 ○ 자연사

소련 군사정보기관의 제도적 창시자

아타튀르크는 터키 독립전쟁 시기 소련의 원조에 감사하며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아랄로프의 청동상을 세우도록 직접 지시했다 — 소련 외교관으로서 이 기념비에 오른 것은 그가 유일하다.

소비에트 군사정보의 제도적 창시자로, 1918년 10월 적군 등록국(훗날 GRU)의 초대 국장에 임명되어 볼셰비키의 해외·전략정보 능력의 기초를 닦았다.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서 트로츠키와 함께 적군을 건설하는 한편 체카 창립에도 참여했다. 내전 후에는 외교관으로 전환하여 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 주재 전권대표를 지냈고, 특히 터키 독립전쟁 시기 아타튀르크의 요청으로 이스탄불 탁심 광장의 공화국 기념비에 소련 외교관으로는 유일하게 그의 흉상이 세워졌다. 1937년 숙청으로 정보기관에서 축출되었으나, 60세에 제2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하여 33군 전리품부장으로 종전까지 복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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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RSDLP 입당, 러시아 제국군 입대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대위까지 진급
  • 1918.1모스크바 군관구 작전과장, 체카 창립 참여
  • 1918.9–1919.7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18.11–1919.6적군 등록국(GRU 전신) 초대 국장
  • 1919–1920제12군·제14군·남서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7리투아니아·터키·라트비아·중국 주재 전권대표
  • 1927–1937최고경제회의 간부, 국가보험총국장
  • 1938–1941국립문학박물관 부관장
  • 1941–194560세에 자원입대, 제33군 전리품부장

그리고리 이바노비치 코톱스키

Григорий Иванович Котовский
비소련 혁명가 소련 몰도바 1881–1925 ✕ 살해

제정 무법자에서 소비에트 내전 영웅으로 전환한 베사라비아의 붉은 로빈 후드

1917년 5월 오데사 오페라 극장에서 '카르멘' 공연 중 사형수에서 풀려난 코톱스키가 등장하자 관객 전원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는 무대에 올라 혁명 연설을 했고, 경매에 부쳐진 그의 수갑과 족쇄는 1만 루블에 낙찰되었다.

베사라비아 출신 혁명 지휘관. 제정 시기 빈민 편의 약탈자로 명성을 쌓고, 내전에서 붉은 기병대를 이끌며 몰다비아 자치공화국 수립에 기여했다. 생전에 소비에트 민속의 전설이 되었으며 1925년 피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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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6베사라비아와 오데사에서 무장 강도단 지도자, 반복적 체포·탈옥; 1916년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
  • 19172월 혁명으로 사면; 루마니아 전선에서 복무,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좌익 사회혁명당 입당
  • 1918–1919티라스폴 분견대 기병대 지휘, 오데사 소비에트 공화국 방어; 오비디오폴 군사위원, 제45소총사단 제2여단장
  • 1920적기훈장 수훈, 러시아 공산당 입당; 소비에트-폴란드 전선에서 기병여단 지휘
  • 1921제17체르보노예카자크기병사단장; 마흐노·안토노프 봉기 진압 중 중상; 명예혁명무기·두 번째 적기훈장 수훈
  • 1922–1924제2기병군단장; 몰다비아 ASSR 수립 기여; 세 번째 적기훈장 수훈
  • 1924–1925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겸 우크라이나·몰다비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카메네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Каменев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881–1936 ○ 심장마비 · 대숙청 직전 사망

내전을 승리로 이끈 붉은 군대 총사령관

현대 전쟁에서 적의 패배는 전 전선에 걸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승리의 누적을 요구한다. 타격을 누적시킨 쪽이 승리했다.

러시아 내전 시기 붉은 군대 총사령관(1919–1924)을 지낸 세르게이 카메네프는 차르 군대의 참모 장교 출신으로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콜차크·데니킨·브란겔의 백군을 차례로 격파했다. 동부전선 사령관 시절 콜차크를 우랄 너머로 밀어낸 반격을 주도했고, 총사령관으로서 여러 전선을 연계한 공세로 소비에트 정권을 확립했으며 '지속적 타격의 누적' 교리를 내전 승리의 원리로 정식화했다. 종전 후 정치적 군사 엘리트에게 밀려나 1934년 방공국장으로 좌천되었고 1급 군사령관에 머물렀다. 1936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여 대숙청을 피했으나 스탈린에 의해 사후 인민의 적으로 낙인찍혔다가 1960년대에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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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동부전선 사령관
  • 1919–1924공화국 군대 총사령관
  • 1924–1925붉은 군대 감찰관
  • 1925붉은 군대 참모총장
  • 1925–1926붉은 군대 총감찰관
  • 1926–1927붉은 군대 총국장
  • 1927–1934군사·해군 담당 부인민위원 겸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 1934–1936붉은 군대 방공국장

이반 니키티치 스미르노프

Иван Никитич Смирнов
좌익 반대파 소련 러시아 1881–1936 ✕ 처형

좌익 반대파의 시베리아 볼셰비키

1927년 인민위원직에서 물러난 스미르노프는 무일푼으로 노동교환소에 실업 등록을 하러 갔다. 서류의 '마지막 직위'란에 '우편·전신 인민위원'이라고 적자, 창구의 하급 관리가 눈앞에 서 있는 이 백발의 고매한 거한을 보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1899년 RSDLP에 입당한 볼셰비키로, 일곱 차례 체포와 유배를 겪으며 혁명운동에 헌신했다. 내전기 우랄·시베리아의 당 조직가이자 시브레프콤 의장으로 콜차크 백군 분쇄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20년대에는 좌익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1927년 제명 후에도 1931년부터 비밀 반대파 조직을 이끌며 베를린을 통해 트로츠키와 연락을 재개했고, 1933년 체포되어 1936년 첫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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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과 유배
  • 1918–1921시베리아·우랄 내전기 당 조직가
  • 1923–1927우편·전신 인민위원, 좌익 반대파 지도자
  • 1927–1930당 제명과 유배
  • 1933–1936재체포, 첫 모스크바 재판과 처형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리코프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Рыков
정부 수반 소련 러시아 1881–1938 ✕ 처형

레닌 뒤의 총리, 우파 반대파로 몰리다

'우리는 승리의 순간에, 당이 지배적인 바로 그 순간에 중앙위원회를 떠난다.' 1917년 11월, 리코프는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요구하며 카메네프·지노비예프 등과 함께 사퇴했다. 9일 후 철회.

레닌 사후 소련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어 6년간 정부를 이끌며 네프 체제의 행정적 연속성을 대표한 볼셰비키 지도자이다. 내전기에는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으로 전시 경제를 총괄하고 붉은 군대의 병참을 지휘했으며, 총리로서는 부하린·톰스키와 함께 당내 '우파'의 핵심으로서 농민과의 동맹, 시장을 통한 점진적 사회주의 건설, 균형 잡힌 공업화를 주장했다. 1928-29년 곡물 조달 위기 속에서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와 급속 공업화 노선에 맞섰으나 결국 '우파 반대파'로 낙인찍혀 1930년 실각했고,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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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0인민위원회의 의장

플라톤 미하일로비치 케르젠체프

Платон Михайлович Керженце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81–1940 ○ 심장마비

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자 스탈린기 예술 검열의 설계자

1923년 7월 18일 《프라우다》 1면 기사 「시간이 비행기를 만든다」에서: "우리는 오늘 회의 시작을 기다리느라 7천 노동시간을 허비했다. 그 정도 노동력이면 비행기 한두 대는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또 '비행기 반 대分'을 더 기다린 뒤에야 회의가 시작됐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 '시간' 동맹이 창립되었다.

1904년 입당. 프롤레트쿨트 이론가로 '시간' 동맹을 이끌며 노동과학(NOT)을 주도했다. 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1936–38)으로 스탈린기 문화 통제를 구축했고, 《파리코뮌의 역사》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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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볼셰비키 입당, 모스크바대학 퇴학, 타간카 감옥 수감
  • 1905–1912니즈니노브고로드·페테르부르크·키예프에서 지하활동과 볼셰비키 언론 기고
  • 1912–1917런던·파리·뉴욕 망명, 《프라우다》 특파원, 아일랜드 독립운동 취재
  • 1918–1920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즈베스티야》 부편집장·로스타 책임자
  • 1921–1926주스웨덴 전권대표, 노동과학조직(NOT) 연구 주도, 주이탈리아 전권대표
  • 1928–1930볼셰비키 중앙위 선전부 부장·공산주의아카데미 문학예술언어연구소장
  • 1930–1936인민위원회비서국장·전연방 라디오위원회 의장
  • 1936–1938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 — 불가코프·메이예르홀트 탄압, 형식주의 미술 숙청
  • 1938–1940《소백과사전》 편집장·《파리코뮌의 역사》 집필

파벨 이바노비치 레베데프-폴랸스키

Павел Иванович Лебедев-Полянский
문화 · 문학예술 통제 소비에트 러시아 1881–1948 ○ 자연사

소비에트 검열 기구의 설계자이자 첫 책임자

"글라블리트의 업무는 예외적으로 어렵습니다. 항상 면도날 위를 걷는 것과 같습니다." — 1923년, 글라블리트 1주년을 돌아보며

1902년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 제네바 망명 시기 보그다노프의 '브페료트' 그룹 서기로 활동했고, 혁명 후 프롤레트쿨트 전러시아 의장을 지냈다. 1922년 글라블리트 초대 수장에 취임해 1930년까지 전 출판물의 사전·사후 검열 체계를 구축했으며, 검열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호하고 당 정치국 지침에 복무한다"고 공개 천명했다. 아흐마토바 시집 출간 금지 등 문학계 이념 통제를 직접 주도했고, 말년에는 푸시킨 관장과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서 고전문학 전집 간행을 총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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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RSDLP 입당, 유리예프 대학에서 제적 후 혁명운동
  • 1908–1917제네바 망명, '브페료트' 그룹 서기
  • 191710월 혁명 참여, 성직자회의 및 학술위원회 청산
  • 1919–1922프롤레트쿨트 전러시아 평의회 의장
  • 1922–1930글라블리트(문학·출판 총국) 초대 책임자
  • 1934–1939『문학 백과사전』 주필
  • 1937–1948소련 과학아카데미 푸시킨 관장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