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940

혁명 세대 266명

10월 혁명을 만들고 초기 소비에트 국가를 세운 세대, 다수는 훗날 그 혁명의 이름으로 스러졌다.

올가 다비도브나 카메네바

Ольга Давыдовна Каменева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인 1883–1941 ✕ 총살

트로츠키의 동생이자 카메네프의 아내: 소비에트 문화외교의 첫 설계자

1927년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크렘린에서 그녀를 방문한 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올가 다비도브나 자신은 활기차고 쾌활하며 다소 미국식의 숙녀처럼 보였다.'

러시아 혁명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문화 행정가로, 레프 트로츠키의 여동생이자 레프 카메네프의 첫 번째 아내였다. 1918년 교육인민위원부 연극부(TEO) 책임자로서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와 함께 러시아 연극의 볼셰비키화를 추진했으며, 1925년부터 1928년까지 대외문화교류협회(VOKS) 회장으로서 르 코르뷔지에와 시어도어 드라이저 등 서구 지식인들을 소련으로 초청하며 소비에트 문화외교의 틀을 구축했다. 1920년대 모스크바에서 주요 문학 살롱을 운영했고 당 여성부 이사로도 활동했으나, 1927년 남편과 오빠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모든 직위를 상실했고 1941년 오룔 근교 메드베데프 숲에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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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8–1919교육인민위원부 연극부(TEO) 책임자
  • 1919–1920s당 여성부 이사
  • 1921–1923기근후유증대책중앙위원회 주요 위원
  • 1923–1925대외구호위원회(KZP) 위원장
  • 1925–1928대외문화교류협회(VOKS) 회장
  • 1927남편과 오빠의 몰락으로 모든 직위 상실

이반 드미트리예비치 추구린

Иван Дмитриевич Чугурин
좌익 반대파 소련 러시아인 1883–1947 ○ 1940년 체포, 사후 복권

비보르크 구 노동자 볼셰비키, 레닌에게 당원증을 건네다

1917년 4월 3일 밤 핀란드 역, 비보르크 구 위원회를 대표해 막 귀환한 레닌에게 당원증 제600호를 건넸다.

1905년 소르모보 봉기의 바리케이드 전투 지휘부였고, 1911년 레닌의 롱주모 당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17년 2월에는 카유로프·파블로프와 함께 비보르크 구 볼셰비키의 핵심으로서 여성의 날 파업을 무장봉기로 밀어붙였다. 레닌 귀환 당일 핀란드 역에서 당원증 제600호를 직접 건넨 노동자 혁명가이며, 10월에는 비보르크 구 봉기본부에 있었고 내전기에는 제5군 정치국장과 체카 간부를 지냈다. 1940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어 수용소에 갔다가 병든 몸으로 풀려나 함석공으로 일했고,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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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소르모보 공장에서 노동하며 RSDLP에 입당, 지하 혁명 활동 시작
  • 1905.12소르모보 무장봉기 지도 '5인조'의 일원으로 바리케이드 전투 지휘
  • 1911레닌의 롱주모 당학교 수학, 귀국 직후 체포되어 나림스키 변방 5년 유형
  • 1916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 RSDLP(b) 지하위원회 위원
  • 1917.02–102월 혁명에서 카유로프·파블로프와 함께 무장봉기 주도; 비보르크 구 봉기본부 위원
  • 1918–1919제5군 정치국장, 체카 간부회 위원 겸 서기, 체카 수송부장
  • 1921–1937크라스노예 소르모보 부소장, 북부 조선소 소장, '혁명의 엔진' 공장 소장 등 산업 지도자
  • 1940날조된 혐의로 체포, 수용소에서 병을 얻어 석방 후 함석공으로 생계를 이음

세묜 미하일로비치 부됸니

Семён Михайлович Будённый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883–1973 ○ 자연사

말 탄 내전의 전설, 기계화 시대에도 살아남은 원수

「이오시프, 반혁명이오! 나를 체포하러 왔소! 나는 살아서 넘어가지 않겠소!」 — 1937년 NKVD가 다차를 급습하자 스탈린에게 전화로 외친 말 (딸 니나는 이 일화를 부인했다)

가난한 소작농 출신으로 제정 러시아 기병대에서 복무하며 성 게오르기 훈장 전 등급을 받았고, 내전에서는 제1기병군 사령관으로 백군을 분쇄하며 적군의 전설이 되었다. 1935년 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로 임명되었고, 독소전쟁 초기에는 남서방면군 총사령관으로서 키예프 포위의 위험을 경고했으나 스탈린에게 경질되었으며 이후 후방의 기병 감찰관으로 전쟁을 마쳤다. 전문 군사교양보다 타고난 직감과 용기에 의존했던 그는 레닌부터 브레즈네프까지 모든 지도자 밑에서 살아남아 세 번의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고 90세에 붉은광장 벽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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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7러시아 제국군 기병, 성 게오르기 훈장 전 등급 수훈
  • 1919–23제1기병군 사령관: 데니킨·브란겔 격파,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 1924–37적군 기병 감찰관; 군마 육종 사업 조직
  • 1935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
  • 1937–40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이어 국방부 제1부인민위원
  • 1941남서방면군 총사령관 — 키예프 철수 권고로 경질됨
  • 1943–53적군 기병 사령관, 전후 농업부 차관(마정 담당)
  • 1958/63/683차례 소비에트연방영웅 수훈

이반 크세노폰토비치 크세노폰토프

Иван Ксенофонтович Ксенофонт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884–1926 ○ 자연사

체카의 영원한 2인자, 혁명재판의 설계자

“크리스털 같은 청렴함과 당에 대한 헌신… 타고난 부드러움이 혁명의 이익이 요구하는 곳에서는 무자비함과 공존했다.” — 동료 체키스트들의 증언, 1926년

스몰렌스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방직공장 노동자로 혁명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 1917년 12월 체카 창설 멤버로 합류해 제르진스키의 비서를 맡았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체카 제1부의장 겸 특별재판소장으로서 좌파SR 반란 진압, '전술중앙' 재판,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을 직접 지휘했다. 내전기 내내 제르진스키·페테르스·라치스와 함께 '체카의 불변 지도핵심 4인'으로 불렸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당 중앙위원회 업무관리자로 스탈린의 기구 장악을 보좌했으며, 말년에는 사회보장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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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RP 입당, 볼셰비키 분파
  • 1905–1914모스크바·리가에서 혁명 활동, 수차례 체포
  • 1914–1917서부전선 복무, 네스비시·슬루츠크 소비에트 의장
  • 1917.12체카 창설 멤버, 제르진스키 비서
  • 1919–1921체카 제1부의장 겸 특별재판소장
  • 1921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참여
  • 1922–1925RKP(b) 중앙위원회 업무관리자
  • 1925–1926RSFSR 사회보장 부인민위원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라셰비치

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Лашевич
좌익 반대파 소련 러시아 1884–1928 ✕ 자연사 · 하얼빈

적군 부사령관에서 통합 반대파로 전락한 군사 지도자

1917년 10월 24일 밤, 라셰비치는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서 순양함 아브로라 호에 명령을 내려 전날 사관생도들이 끊어 놓은 니콜라예프스키 다리를 복구하게 했다 — 봉기의 동맥을 다시 연 순간이었다.

오데사 출신의 볼셰비키 군사 지도자. 1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두 번 부상당한 뒤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에서 10월 봉기를 지휘했다. 내전기 제3군 사령관과 동부·남부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활약했고, 1925년 적군 제1부사령관 겸 전쟁·해군 부인민위원에 올랐다. 1926년 지노비예프의 통합 반대파에 가담해 모스크바 근교 숲에서 불법 반대파 집회를 열었다가 중앙위원회 후보위원과 부사령관 직에서 해임되었고, 1927년 출당 후 하얼빈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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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5RSDLP 입당, 오데사·니콜라예프·예카테리노슬라프·페테르부르크에서 당 활동, 반복적 체포와 유배
  • 1915–17제1차 세계대전 징집, 두 번 부상, 공로로 상급 하사관 진급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볼셰비키 분파 서기·의장,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봉기 지휘
  • 1918–20제3군 사령관, 동부·남부·서부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7군 사령관 대행
  • 1922–25시베리아 혁명위원회 의장, 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25–26소련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해군 제1부인민위원
  • 1926–27통합 반대파 가담, 불법 집회 조직, 중앙위 후보위원 해임, 15차 당대회 출당
  • 1928반대파 철회 선언, 당적 회복, 하얼빈에서 사망

그리고리 예레메예비치 예브도키모프

Григорий Еремеевич Евдоким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84–1936 ✕ 처형

지노비예프의 오른팔로 페트로그라드를 구했고, 스탈린의 쇼재판에서 사라졌다

1919년 페트로그라드 공방전. 세르주: 「백발에 우렁찬 목소리, 술 좋아하는 늙은 뱃사람. 도시는 주로 그 덕에 구원되었다」

15세에 하천 선원이 되어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9년 제7군 정치부장으로 유데니치의 페트로그라드 공세를 막아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고, 빅토르 세르주는 「도시를 구한 것은 주로 예브도키모프였다」고 기록했다. 내전 후 페트로그라드 노조 의장과 소비에트 부의장을 거쳐 1925년 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로 지노비예프의 최측근이자 '신반대파' 지도자가 되었다. 1926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위 서기로 발탁되었으나 곧 통합반대파에 가담해 모든 직위를 잃고 출당됐다. 복당 후 낙농업 관료로 전락했다가 1936년 제1차 모스크바 전시재판에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함께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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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LP 입당, 볼셰비키
  • 1908–16수차례 체포와 유형, 시베리아 탈출
  • 1917페트로그라드 적위대 조직, 제헌의회 의원
  • 1919제7군 정치부장, 페트로그라드 방어
  • 1922–25페트로그라드 노조평의회 의장, 소비에트 부의장
  • 1925–26레닌그라드 주당위 제1서기, '신반대파'
  • 1926.1–4중앙위 서기 겸 조직국원
  • 1927통합반대파, 중앙위 제명, 출당
  • 1929–34낙농공업 총관리국장 등 경제 관료
  • 1936.8제1차 모스크바 전시재판, 사형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밀류틴

Владимир Павлович Милюти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884–1937 ✕ 처형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통계적 기초를 놓은 첫 농업인민위원

1917년 10월 29일, 중앙위원회에서 레닌이 무장봉기를 촉구하자 밀류틴은 첫 반대 발언자로 나서 “우리는 첫 일격을 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레닌은 그 자리에서 밀류틴과 쇼트만을 상대로 반박하며 논쟁을 벌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밀류틴은 바로 그 봉기의 식량 보급을 책임졌다.

최초의 소브나르콤 농업인민위원(1917)으로 혁명정부의 토지정책을 구상했다. 멘셰비키에서 시작해 1910년 볼셰비키로 전향한 경제이론가로, 중앙통계국(TSuU) 국장과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통계·계산 기반을 정비했다. 전시공산주의에서 네프, 5개년 계획으로 이행하는 시기 내내 국가경제 기구의 실무를 떠받친 기술관료였으나, 1937년 '우익 반혁명 조직'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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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10RSDLP 입당, 멘셰비키로 활동하며 쿠르스크·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에서 지하 조직
  • 1910볼셰비키로 전향, 이후 8차례 체포로 약 5년간 수감과 유형 생활
  • 1917사라토프 소비에트 초대 의장,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소브나르콤 초대 농업인민위원(10.26–11.4)
  • 1917–1918연립정부 주장하며 당중앙위·인민위원직 사퇴했다가 번복, VTsIK 경제부장과 VSNKh 부의장 역임
  • 1918–1924VSNKh 간부·북서지역 경제회의 부의장, 코민테른 발칸·오스트리아 대표로 대외 활동
  • 1924–1930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부 간부, 공산주의아카데미 부의장, 중앙통계국(TSuU) 국장 겸 고스플란 부의장
  • 1930–1937고스플란 부의장, 이후 중앙집행위원회 산하 학술기관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계획·학술 관료로 활동
  • 1937'우익 반혁명 조직' 혐의로 체포·사형 선고, 10월 30일 처형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보론스키

Александ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Воронс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84–1937 ✕ 처형

《크라스나야 노비》 편집장, 바벨·파스테르나크를 발굴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1921년 크렘린의 레닌 자택. 《크라스나야 노비》 창간 회의에서 고리키가 인도 설화집을 보이자 레닌은 "이걸 황금 외화로 사고 있다. 올해는 기근이 든다"고 잘랐다. 보론스키는 이렇게 회고했다: "두 진리가 충돌했다 —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와 '그러나 빵이 없다면'."

《크라스나야 노비》를 창간해 바벨·파스테르나크를 발굴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예술을 삶의 인식으로 보는 미학으로 RAPP에 맞서 페레발을 이끌었다. 좌익반대파 가담 후 1937년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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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탐보프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06–1910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1년 독방, 야렌스크 2년 유형
  • 1912프라하 당대회 대의원; 서기로 회의록 작성, 대중노동자신문 창간 주장
  • 1917–1920오데사 소비에트 집행위원,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당위원장,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 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 1921–1927《크라스나야 노비》 창간·편집장; 《프로제크토르》 편집; 출판사 '크루크' 설립; 문학그룹 '페레발' 결성·주도
  • 1923'46인 성명' 서명, 좌익반대파에 가담
  • 1927–1930트로츠키주의 혐의로 출당, 리페츠크 유배; 1929년 반대파 활동 철회 선언, 1930년 복당
  • 1930–1935국립문학출판사 고전문학부 편집자; 자전적 소설 집필
  • 1937대숙청 중 체포(2월 1일), 스탈린 서명 사형명단 등재, 8월 13일 15분 재판 후 총살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틴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Замятин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84–1937 → 망명지 사망

금지된 미래의 설계자

1931년 6월, 자먀틴은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작가인 나에게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사형 선고와 같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그는 소련을 떠날 허가를 받아냈다.

볼셰비키였던 해군기술자·작가는 통제와 순응의 미래를 『우리들』에 그렸다. 이 소설은 소비에트 검열이 금지한 첫 작품이 되었고, 그는 작가로서의 삶이 불가능해진 뒤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 출국 허가를 받았다. 파리 망명 중에도 소련 여권을 지키며 1935년 반파시스트 작가대회에 소련 대표로 참석했으나, 결국 조국 밖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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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기술자 생활
  • 1921『우리들』 완성과 금지
  • 1920년대풍자소설·문학비평 활동
  • 1931출국 허가
  • 1932–1937파리 망명 생활

안드레이 세르게예비치 부브노프

Андрей Сергеевич Бубнов
이념 · 선전 소련 러시아 1884–1938 ✕ 처형

10월혁명 정치국원에서 문맹퇴치를 이끈 계몽인민위원으로

1917년 10월 16일, 부브노프는 무장봉기를 지휘할 5인 당중심에 선출되었다. 군사혁명위원회 야전참모장으로서 그의 임무는 페트로그라드의 우편·전신 체계를 장악하는 것이었다.

10월혁명을 지도한 1917년 정치국원이자, 붉은 군대 정치총국장(1924–1929), 러시아공화국 계몽인민위원(1929–1937)을 지냈다. 붉은 군대에 정치교육 체계를 세웠고, 계몽인민위원으로서 의무적 초등교육 도입과 대규모 성인 문맹퇴치(리크베즈)를 추진해 소비에트 교육의 제도적 토대를 완성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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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519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총파업 조직
  • 1906–1913스톡홀름 당대회 대표, 《프라우다》 편집위원
  • 1914–1916사마라·볼가 하류 지역 혁명운동 지도, 투루한스크 유배
  • 1917정치국원, 군사혁명당중심 위원,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야전참모장
  • 1918–1919전우크라이나 중앙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22–1924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4–1929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크라스나야 즈베즈다》 편집장
  • 1925중앙위원회 서기
  • 1929–1937러시아공화국 계몽인민위원 — 의무초등교육·문맹퇴치·아동문학 출판사 설립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세레브롭스키

Александр Павлович Серебровский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러시아 1884–1938 ✕ 처형 · 복권 1956

"소비에트 록펠러"라 불린 바쿠 석유와 소련 금광의 재건자

1924년, 90세의 존 D. 록펠러와 차를 마시고 숲을 산책하며 소련 석유에 대한 신용장을 얻어냈다. "록펠러는 내 눈을 바라보더니 뜻밖에도 동의했다."

혁명가 출신 기계공학자로서, 내전으로 폐허가 된 바쿠 유전을 미국식 시추 기술로 재건해 소련 석유 산업의 토대를 놓았다. 1928년부터 국가 금 채굴 트러스트 Главзолото를 이끌며 알래스카 광산 기술을 도입하고 미국 기술자를 직접 영입해 금 생산을 급증시켰으며, 이 금은 스탈린 공업화의 기계 수입 재원이었다. 오르조니키제의 중공업 부인민위원으로서 소련 중공업 건설을 총괄했고, 1937년 대숙청으로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된 후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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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05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집행위원 (푸틸로프 공장 대표)
  • 1908–1911벨기에 망명; 브뤼셀 고등기술학교 졸업 (기계공학)
  • 1917–1918무역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 1919우크라이나 전선 군수보급 책임자; 중앙 포병공장 관리위원회 의장
  • 1920교통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0–1926아즈네프티(아제르바이잔 석유 트러스트) 이사회 의장
  • 1926소련 석유신디케이트(네프테신디카트) 이사회 의장
  • 1927–1930소련 최고경제회의(VSNKh) 부의장
  • 1928–1937글라브졸로토(비철금속·금·백금 총관리국) 국장
  • 1932–1937중공업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25–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스피리도노바

Мари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Спиридонова
좌익 반대파 소련 러시아 1884–1941 ✕ 처형

좌파 사회혁명당의 얼굴이자 농민 대변자: 볼셰비키에 맞선 마지막 혁명적 야당 지도자

"나는 심장이 찢어질 듯한 고통 때문에 이 결행을 맡았다... 루제놉스키 이후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을 들으며 사는 것이 부끄럽고 괴로웠다." — 1906년 재판에서의 진술

러시아 혁명운동에서 가장 상징적인 여성 지도자 중 한 명. 1906년 농민 탄압을 주도한 탐보프 부지사 고문 루제놉스키를 암살한 후 전국적 민중 영웅이 되었고, '인민의 변호인'으로 불렸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후 좌파 사회혁명당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 전러시아 농민대회 의장과 제헌의회 의장 후보로 추대될 정도로 막대한 대중적 지지를 받았다. 1918년 여름 볼셰비키와 결별하고 좌파 에스에르 봉기에 가담했으며, 이후 스탈린 시대 25년간 투옥·유배를 거듭하다 1941년 오룔 교외 메드베데프 숲에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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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에스에르 당원, 전투분대 가입
  • 1906탐보프 부지사 고문 루제놉스키 암살; 사형 선고 후 무기징역으로 감형, 네르친스크 카토르가
  • 19172월 혁명으로 석방; 좌파 에스에르 지도자, 전러시아 농민대회 의장,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 1918.1볼셰비키 분파가 제헌의회 의장 후보로 추대 (153표, 체르노프 244표)
  • 1918.7좌파 에스에르 봉기 가담, 체포; 1년형 선고 후 사면
  • 1919–1930반복적 체포, 유배, 정신병원 감금; 1923년 해외 탈출 시도 실패
  • 1937우파에서 체포, '에스에르 중앙' 조직 혐의로 25년형
  • 1941오룔 교외 메드베데프 숲에서 161명과 함께 집단 처형

바르바라 니콜라예브나 야코블레바

Варвара Николаевна Яковлева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84–1941 ✕ 처형

체카에서 좌익 반대파로 간 재정 인민위원

죄수열차 안에서 발렌티나 폴랴코바가 추궁했다. 「당신의 거짓 증언으로 내 남편이 총살당했다.」 야코블레바가 답했다. 「예조프의 명령이었다. 15일 밤낮 잠을 못 자게 하더니 결국 서명했다.」

혁명기 페트로그라드 체카를 이끌었던 옛 볼셰비키이자, 1924~26년 좌익 반대파의 지도자였다. 러시아공화국 재정 인민위원을 지낸 뒤 1937년 체포되어 장기형을 선고받았고, 1941년 오룔 감옥의 집단 처형에서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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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과 유배
  • 1918–1919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 1924–1926좌익 반대파 지도부
  • 1929–1937러시아공화국 재정 인민위원
  • 1937–1941체포, 수감과 오룔 감옥 처형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안토노프-사라톱스키

Владимир Павлович Антонов-Саратовский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84–1965 ○ 자연사

1902년 입당한 볼셰비키 법률가이자 소비에트 법제의 설계자

1917년 10월, 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시내 음악원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선포하고 적위대를 지휘했다.

1902년 RSDLP에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법률가로, 1917년 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으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주도했고 1920~1921년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을 지냈다. 1923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 산하 입법제안위원회 의장과 대법원 판사를 겸하며 소비에트 사법·입법 체계의 기초를 설계했고, 샤흐티 재판·멘셰비키 재판·산업당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회고록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깃발 아래』(1925)와 『붉은 해』(1927)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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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RSDLP 입당
  • 1905모스크바 12월 무장봉기 참여
  • 1917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 혁명위원회 위원장
  • 1919RSFSR 내무인민위원부 부위원, 쿠르스크 현 집행위원장, 제13군 혁명재판소장
  • 1920–1921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마흐노 진압 담당, 제4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3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총장
  • 1923–1938소련 인민위원회 입법제안위원회 의장 겸 소련 대법원 판사
  • 1939–1952RSFSR 법무인민위원부·법무부에서 근무

야코프 미하일로비치 스베르들로프

Яков Михайлович Свердлов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러시아 1885–1919 ○ 병사

혁명 직후 당과 국가를 연결한 조직가

1918년 1월 5일 제헌의회 개회 순간, 사회자로 나선 원로 사회혁명당원을 단상에서 밀어내고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이름으로 직접 개회를 선언했다.

중앙위 서기국 의장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을 겸하며 혁명 직후 볼셰비키 권력의 실무를 총괄했다. 레닌의 정치 결정을 표결·인사·기관 운영으로 전환한 독보적 조직가로, 10월 봉기 실무 지휘, 제헌의회 해산, 최초 소비에트 헌법 제정, 코민테른 창립을 주관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비준에서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12년 넘는 유형과 감옥 생활로 쌓은 당내 인맥과 현장 감각이 그의 무기였다. 34세에 스페인 독감으로 급서하자 레닌은 '당 전체의 기둥이 무너졌다'고 썼으며, 그의 공백은 훗날 스탈린의 권력 집중을 앞당긴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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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중앙위 서기, 10월 봉기 조직 실무
  • 1917–19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18–19중앙위 서기국 의장

미하일 바실리예비치 프룬제

Михаил Васильевич Фрунзе
군사 · 국방 소련 키르기스스탄 1885–1925 ○ 수술 중 사망

트로츠키 뒤의 붉은 군대 개편자

1925년 10월, 위궤양 수술을 앞둔 병상에서 아내에게 편지를 썼다. "토요일에 새 회진이 있을 예정이다. 수술을 거부당하지나 않을까 두렵다." 수술이 취소될까 봐 두려워했지만, 수술대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러시아 혁명운동과 소비에트 군사 건설을 잇는 핵심 인물. 1904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직물 파업을 이끌고 두 차례 사형 선고를 받았다. 내전기에는 동부전선에서 콜차크를, 남부전선에서 브란겔을 격파한 붉은 군대의 가장 성공적인 전선 사령관으로 부상했다. 1925년 트로츠키의 후임으로 전쟁인민위원이 되어 정규군 중심의 군사개혁과 통일군사교리 확립을 추진했고, 마르크스주의 군사이론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같은 해 위궤양 수술 중 사망하여 소비에트 권력사에서 가장 논쟁적인 죽음 중 하나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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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혁명운동과 투옥·유형, 1917년 뒤 볼셰비키 군사조직으로 이동
  • 1919–1920동부전선과 투르케스탄 전선에서 백군 격파
  • 1920남부전선에서 브란겔군 격파와 크림 점령 지휘
  • 1924–1925군사개혁 구상, 통일군사교리와 정규군 재편 추진
  • 1925전쟁인민위원 취임 직후 수술 중 사망

솔로몬 그리고리예비치 모길렙스키

Соломон Григорьевич Могилевский
국가보안 기관 소련 러시아 1885–1925 ✕ 항공사고 사망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의 첫 책임자: 이녜의 토대를 놓은 8개월

1921년 초대 이녜 부장으로 취임한 모길렙스키에게 주어진 것은 겨우 몇 명의 요원과 모스크바의 허름한 사무실이 전부였다. 그로부터 불과 8개월 후 소비에트 해외정보기관의 첫 거점망이 유럽과 중동에 뿌리를 내렸다.

파블로그라드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4년 체포된 뒤 스위스로 망명해 제네바에서 레닌을 만났고, 그의 추천으로 볼셰비키 분파에 합류했다. 1919년 전연방비상위원회(체카)에 배치되어 모스크바 체카와 특별부에서 활동했으며, 1921년 8월 GPU 해외부(INO)의 초대 부장으로 임명되어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의 기초 조직을 구축했다. 1922년 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으로 전임되어 튀르키예·이란 방면 첩보망을 지휘하고 1924년 그루지야 8월봉기 진압에 참여해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5년 3월 트빌리시 근방에서 발생한 의문의 항공기 폭발 사고로 먀스니코프, 아타르베코프와 함께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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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파블로그라드 RSDLP 조직 입당
  • 1904체포, 이후 스위스 망명 — 제네바에서 레닌과 만남
  • 1906–1916러시아 귀국 후 예카테리노슬라프 선전활동, 대학 수학, 군 복무
  • 1917민스크 RSDLP 위원, 4월 당 대회 대의원, 10월 혁명 참가
  • 1917–1919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모스크바·키예프 사법기관, 제12군 혁명재판소
  • 1919–1920모스크바 체카, 좌파 SR 음모 적발; GPU 특별부 전권대표
  • 1921–1922GPU 해외부(INO) 부장 —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 초대 책임자
  • 1922–1925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 — 튀르키예·이란 첩보, 1924년 8월봉기 진압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메드베데프

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Медведев
좌익 반대파 소련 러시아 1885–1937 ✕ 처형

노동자 반대파의 금속노동자. 당 기관에 패배하고 숙청되다

1937년 9월 10일 군사합의회에서 58조 테러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공범으로 누구도 지목하지 않았다. 당일 총살되었다.

모스크바 근교 빈농 가정 출신으로 열셋에 오부호프 공장 선반공이 된 볼셰비키 노동자였다. 1차대전 중 실랴프니코프와 함께 페트로그라드에서 당 중앙위 러시아국을 조직했고, 1917년 아친스크 소비에트를 결성했다. 내전 후 금속노동자조합 중앙위원으로 실랴프니코프와 '노동자 반대파'를 공동 지도하며 노동조합의 경제 통제와 당내 노동자 민주주의를 주장했다. 1922년 '22인 서한'에 서명해 코민테른에 당내 탄압을 호소했고, 1933년 출당 후 1937년 재판에서 끝내 자백을 거부하고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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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오부호프 공장 파업 참가
  • 1903RSDLP 입당, 볼셰비키 파벌 합류
  • 1912–14지하 노동자보험운동 조직
  • 1915–17당 중앙위 러시아국 조직, 시베리아 유형
  • 1917아친스크 소비에트 결성, 제헌의회 의원 당선
  • 1918전러시아 중앙집행위 혁명재판소장, 적군 정치위원
  • 1920–22금속노동자조합 중앙위원, '노동자 반대파' 공동 지도
  • 1921–22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22'22인 서한' 코민테른 제출, 분파활동 혐의로 경고
  • 1920s 후반중공업인민위원부 근무
  • 1933당 제명, 북부 러시아 행정유형
  • 1935–37체포, 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수감, 사형 선고

알렉산드르 가브릴로비치 실랴프니코프

Александр Гаврилович Шляпников
좌익 반대파 소련 러시아 1885–1937 ✕ 처형

노동자 반대파의 지도자. 레닌에게 패배하고 숙청되다

1937년 9월 2일 군사합의회의 재판에서 테러 음모 혐의를 끝까지 부인했다. 최후 진술에서 '소비에트 권력에 적대적이지 않다'고 말했고, 유일하게 인정한 죄는 '주변 사람들에 대한 관대한 태도'였다. 당일 총살되었다.

무롬의 가난한 옛의식파 집안에서 태어나 열 살부터 공장 노동을 시작한 숙련 선반공이었다. 1901년 입당해 볼셰비키가 되었고, 프랑스·독일·영국에서 망명 노동자로 일하며 유럽 노동운동을 체득했다. 10월혁명 후 초대 노동인민위원으로 8시간 노동제의 기초를 놓았다. 내전 말기 콜론타이와 함께 '노동자 반대파'를 이끌며 노동조합의 경제 통제를 주장했으나, 1921년 레닌에게 패배했다. 외교직으로 밀려난 뒤 1933년 출당, 1937년 스탈린 암살 기도 혐의로 거짓 기소되어 처형되었다. 1963년 사법적 복권, 1988년 당적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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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RSDLP 입당, 볼셰비키 파벌 합류
  • 1917당 중앙위원회 러시아국 위원
  • 1917–18초대 노동인민위원 (RSFSR)
  • 1918–19남부전선·카스피-캅카스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0–22'노동자 반대파' 지도, 중앙위원
  • 1923'46인 선언' 서명
  • 1924–25주프랑스 통상대표
  • 1933당 제명, 행정적 추방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크릴렌코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Крыленко
군사 · 국방 소련 러시아 1885–1938 ✕ 처형

혁명적 법의식의 설계자, 20분 만에 끝난 재판의 피고

1918년, 사형제 폐지 직후의 재판에서 피고에게 총살형이 선고되자 방청객이 술렁였다. 크릴렌코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처형이 폐지된 겁니다. 샤스트니는 처형되는 게 아니라 총살되는 겁니다.」

볼셰비키 변호사이자 군사 지휘관. 1917년 11월 최초의 소비에트 최고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독일과의 휴전을 지휘했다. 이듬해부터 소비에트 법률 체계의 핵심 설계자로 전환, 혁명적 법의식 이론을 통해 법을 계급투쟁의 도구로 규정했다. 샤흐띠·산업당·멘셰비키 재판에서 국가검사로 활약하며 비신스키와 법무 주도권을 놓고 경쟁했다. 1938년 체포, '반혁명 등산·관광 테러 조직' 사건으로 20분 재판 끝에 사형 선고, 같은 해 7월 꼼무나르까에서 총살. 1955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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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볼셰비키 비밀 활동, 체포와 망명 반복; 제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참전
  • 1917.11–1918.3소비에트 최초의 최고총사령관; 두호닌 해임, 휴전 교섭 개시
  • 1918–1922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혁명재판소 의장
  • 1922–1929러시아 공화국 법무부차관 겸 수석 검사보
  • 1929–1931러시아 공화국 검사; 샤흐띠·산업당·멘셰비키 재판의 국가검사
  • 1931–1936러시아 공화국 법무인민위원
  • 1936–1938.1소련 법무인민위원
  • 1938.7.2920분 재판 후 사형 선고, 당일 총살

보리스 다비도비치 캄코프

Борис Давидович Камков
좌익 반대파 소련 몰도바 1885–1938 ✕ 처형

좌파 사회혁명당의 공동 창립자이자 수석 이론가, 볼셰비키 연정에서 7월 봉기까지

"혁명적 사건이 벌어지는 역사적 순간에 우리는 도덕적 평가를 할 여유가 없었다. 우리의 자리는 혁명과 함께하는 것임이 분명했다." — 1917년 11월 PLSR 제1차 대회

좌파 사회혁명당(PLSR)의 공동 창립자이자 수석 이론가. 볼셰비키와 연정을 구성했으나, 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 반대로 1918년 7월 봉기를 주도했다. 진압 후 유배를 거듭하다 1938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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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에스에르 전투조직 가입; 체포되어 투루한스크로 유배
  • 1907해외 탈출, 제네바·파리에서 망명 활동; 하이델베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1911)
  • 1915치머발트 국제사회주의 회의 참석; 반전 국제주의자 활동
  • 1917.4–11귀국 후 PLSR 공동 창립;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 국제부장
  • 1917.11제헌의회 의원 선출 (페트로그라드 수도선거구, 에스에르 9번 명부)
  • 1918.4PLSR 중앙위원회 상임간부회 의장으로 선출
  • 1918.7브레스트-리톱스크 조약 반대, 7월 봉기 주도; 진압 후 지하 활동
  • 1920–1937반복적 체포·유배 (첼랴빈스크, 트베리, 보로네시, 아르한겔스크); 경제학자로 생계 유지
  • 1938VKVS에서 사형 선고, 8월 29일 콤무나르카에서 처형; 1992년 사후 복권
좌익 반대파 소련 폴란드 1885–1939 ✕ 옥중 살해

재판에서 살아남아 감옥에서 죽은 논객

"스탈린과 모세의 차이를 아십니까? 모세는 유대인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나왔지만, 스탈린 동지는 유대인들을 정치국에서 데리고 나왔지요." —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가 정치국에서 축출된 뒤 라데크가 바자노프에게 던진 농담.

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으로 국제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운동을 오간 저널리스트·외교가였다. 레닌의 측근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과 코민테른 창립에 참여했고, 볼셰비키 중앙위원·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날카로운 논쟁과 비꼬는 유머로 이름난 좌익 반대파 지도자였으나, 1930년 공개 자아비판으로 복당했다. 대숙청 속 제2차 모스크바 재판의 중심 피고로 법정에서 연극적 자백을 펼쳐 10년형을 받았고, 1939년 옥중에서 스탈린의 지시로 살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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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3국제 공산주의·외교 활동
  • 1923–1927좌익 반대파 지도부
  • 1937–1939재판, 수감과 살해

아론 리보비치 셰인만

Арон Львович Шейнман
경제 운영 소련 러시아 1885–1944 ○ 망명 중 자연사

체르보네츠로 네프 인플레이션을 진정시키고 스탈린 체제에서 이탈한 첫 고위 금융 관료

1922년 2월 28일, 레닌이 셰인만에게: "현재 국가은행은 관료적 서류 게임일 뿐이다. 달콤한 공산주의-관료적 거짓말이 아닌 진실을 듣고 싶다면, 이것이 진실이다."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로, 1917년 헬싱키 소비에트 의장과 제헌의회 의원을 지냈다. 1921~1924년과 1926~1929년 두 차례 소련 국가은행 총재를 맡아 금태환 체르보네츠를 도입, 네프 시기 초인플레이션을 진정시켰다. 레닌으로부터 "관료적 서류 게임"이라는 신랄한 질책을 받았지만, 바로 그 제도 구축이 화폐 안정을 가능케 했다. 1929년 해외 출장 중 소환을 거부해 초기 네보즈브라셰네츠가 되었고, 대숙청을 피해 런던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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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7헬싱키 소비에트 의장 · 제헌의회 의원
  • 1918–1919스톡홀름 주재 재무관
  • 1920–1921그루지야 주재 전권대표
  • 1921–1924국가은행 총재 (1차) · 체르보네츠 도입
  • 1926–1929국가은행 총재 (2차) · 소환 거부, 망명
  • 1933–1939인투리스트 런던 지부장 · 영국 귀화
  • 1944런던에서 사망

블라디미르 예브그라포비치 타틀린

Владимир Евграфович Татлин
작가·예술가 소비에트 러시아 1885–1953 ○ 사망

건설되지 않았지만 혁명적 유토피아의 가장 지속적인 상징이 된 탑의 창조자

1920년 베를린 다다 전시회에서 게오르크 그로스와 욘 하트필드는 '예술은 죽었다 — 타틀린의 새 기계 예술 만세!'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섰다.

러시아 및 소비에트 화가, 건축가, 무대 디자이너로,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함께 1920년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양대 거장이었다. 1919-1920년에 설계한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타틀린의 탑)는 에펠탑보다 높은 400미터의 나선형 철골 구조물로, 코민테른의 본부로 구상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한 채 혁명적 건축의 상징으로 남았다. 1914년부터 선보인 '반(反)부조'는 목재와 금속 등 산업 재료로 제작된 3차원 구성물로, 구축주의의 선구적 작업이었다.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득세하며 공식 후원을 잃었으나, 1960년대에 재평가되어 그의 탑은 혁명적 예술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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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모스크바에서 성상 화가로 경력 시작
  • 1913파리에서 피카소의 작업실 방문, 구호부조 제작 시작
  • 1915마지막 미래파 전시 '0.10'에서 반(反)부조 전시
  •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기념비(타틀린의 탑) 설계 및 모형 전시
  • 1925–1927키예프 예술대학 교수
  • 1927–1930모스크바 브후테마스 교수
  • 1930–1932개인 비행 장치 '레타틀린' 제작
  • 1948반공산주의적이라는 비판으로 해고, 그러나 숙청되지 않음